[변두리 소수자⑨] 동행 속도
김윤곤
외국에서 서울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역동성이다. 그 느낌이 상쾌하다. 내 걸음도 빨라지고, 마음도 활발해 진다. 나보다 늦게 걷는 이들이 있으면, 추월도 한다.
아내와 함께 걸으면, 거의 매번 듣는 말이 ‘천천히 걸으라’는 것이다. 따라 걷기가 힘들단다. 그래서, 손을 잡고 다정하게 ‘끌고’(?) 가기도 한다. ‘힘들다’고 말하면 속도를 조금 줄이게 된다.
2022년 한국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국민생활체육조사’ 결과는 한국인의 보행 속도를 여섯 단계로 분류했다. 완보, 산보, 속보, 급보, 강보, 그리고, 경보이다. 이들 중에 급보부터 올림픽 종목에도 들어 있던 경보 수준까지의 세 단계는 일상적 보행 속도는 아니다. 어떤 자료들에 의하면, 한국 성인의 평균 보행 속도는 시간당 4.8km 라고 한다. 노인의 평균 보행속도는 1분에 64m 로, 시속 3.8km 였다. 완보와 산보 사이에서 완보에 가까운 속도이다. 속보에 근접한 젊은이들의 속도에 비하면, 시간당 1km 이상 차이가 나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 일본, 싱가포르, 호주, 나이지리아, 탄자니아에 거주하는 65세 이상 노인 6,472명을 비교한 결과, 가장 빠른 속도였다(The Journals of Gerontology, 2023.04.08, 분당서울대병원).
한국 국민 모두가 빠르게 걷는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현상과도 비슷하다. 이전 세대에서 빠르게 달려 왔던 노년층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 세대와의 조화에 신경이 쓰이고 눈치도 보이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지금의 노인들이 젊은 시절에 얻을 수 있었던 결과 만큼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고 낙심한다. 청년들과 노년들이 열심과 성취에 대해 비교 할 때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다.
미국 시애틀 퍼시픽 대학의 생물학 교수 카라 월 셰플러는 걷는 속도로 대인관계에 대한 문화적 영향을 실험했다. 시애틀과 우간다 중부의 무코노(Mukono)라는 타운의 한 대학에서 한 학기를 보내며, 1,700명이상의 사람들이 걷는 시간을 재고, 분석하여, 2018년 9월 호 <PeerJ-Life and Environment>에 발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혼자 걸을 때의 속도는 우간다의 사람들이 시애틀 사람들의 걷는 속도보다 평균 11%가 빨랐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을 때는 그 속도가 느려졌다. 특히 노약자와 어린이들을 동반했을 때의 속도는 혼자일 때보다 약 16%가 더 느렸다고 한다. (2018.10.02. 뉴욕타임스 특약-한국일보 기사 참조)
환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시애틀은 여유로운 도시였다. 나도 대학 시절을 보내고, 직장 생활을 하고, 가정을 이루면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든 곳이다. 그런데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앞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시애틀의 주민들이 걷는 속도는 다른 사람들과 걸을 때 오히려 빨랐다. 남자들은 다른 남자와 걸을 때 빨랐고, 다른 남성보다 앞에 서면, 그 속도가 더 빨랐다고 한다. 남녀 모두 아이들과 함께일 때도 속도가 빨랐다. 자녀를 안고 동행할 때의 보행 속도가 혼자 걸을 때보다 20% 빨랐다는 부분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셰플러 교수는 “실험 대상자들의 사정까지 조사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지만, 사회의 대인 관계 분위기를 짐작 할 수 있는 자료이다.
걷다가, 가끔 연상되는 말이 있다. ‘혼자 가려면 빨리 가고, 함께 가려면 천천히 가라.’ 빠른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 인도의 격언이다. 우리 사회는 늘 앞에 가는 사람, 위에 있는 사람, 일등이 되려고 노력하는 분위기이다. 빠른 속도로 달려야 사는 사회는 뒤쳐진 이들을 기다려 줄 수 없고, 후진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질 수밖에 없다. 내가 남들을 제치며 치열하게 얻어낸 내 승리의 보상을 가족 외의 남들에게 ‘준다’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인도의 성자’라 불렸던 썬다 싱이 30살 때, 티베트의 눈 산을 넘게 되었다. 앞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의 눈보라와 높이 쌓인 눈길을 걷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가파른 비탈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를 구조하여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동행하던 동료는 나도 힘들다며, 먼저 가 버렸다. 썬다 싱은 그 부상한 사람을 등에 업고 아주 조심스럽게, 느린 속도로, 어렵게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걷는 중에, 얼어 죽어서 쓰러져 있는, 앞서 먼저 떠났던 친구를 보게 되었다. 자신만의 체온으로는 추위를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반면, 싱은 부상자를 업고 힘들게 걷는 동안, 더워진 체온 때문에 부상자와 함께 살게 된 것이었다.
대한민국 사회도 잘 사는 자들의 힘과 젊은이들의 희망이 손을 맞잡아야 따뜻해 수 있다. 먼저 살면서 쌓은 것들을 나누는 자들과 뒤에서 뛰는 자들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사회가 어두워진다. 지치도록 달려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청년들에게 그 연령대를 살면서 많은 것을 갖게 된 어른들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자기 자녀에게만 돈을 주면 자기들끼리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다. 사회에 빵을 나누면, 좋은 나라에서 그 후손들도 함께 잘 살게 된다. 먼저 얻은 부가 사회의 공존 자원으로 흘러야 한다. 그 격차가 줄어야, 서로의 손이 닿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행진한 속도가 시속 2~3마일(4~4.8km) 정도였다고 한다. 젊은 청년들에게는 답답한 속도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대열에서 어떻게 남는 시간을 썼을까? 그들은 가끔 뒤돌아 보며, 뒤에 오는 어린이와 노약자들을 부축하거나, 업기도 하고, 마차에 앉히느라 그 속도가 느려졌을 것이다. 노인들은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청년들을 잠잠히 축복했을 것이다. 빛의 속도보다도 빠르시지만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서, 그들과 함께 가시던 하나님도 그런 그들을 보시며 흐뭇해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하여, 그 마음에 흐르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한 것을 보고 싶어 하신다. 한국이 함께 잘 가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신 1:31, 29:5).
*김윤곤목사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구약 및 상담학) 학위를 받고, 앵커리지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17년 시무했다. 미국장로교 대서양한미노회 노회장 등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다종족 주민 협력 프로젝트 등을 위해 7년간 선교사로 지냈다. 김목사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목양적 단상과 영감을 이민자·목회자·선교사·다문화 사역자의 관점에서 나눌 예정이다. (격주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