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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3.10.1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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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종교가 어느 지역에 토착하여 뿌리를 박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전도 운동과 윤리 운동과 문화 운동의 세 가지 면을 골고루 갖추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엄청난 전도열에 있어서 결코 타 종교에 뒤지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또한 수준 높은 고급종교로서의 도덕성과 윤리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과제인 문화 운동은 어떠한가?

 

 앞으로의 종교 전쟁은 이미지 전쟁이다. 그리고 이미지 전쟁은 곧 문화전쟁이다. 우리나라 같은 종교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교리적인 분별에 관심이 없다. 그 종교의 이미지가 어떠한가에 자기의 마음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 개선에 문화는 더없이 좋은 수단이다. 문화를 통한 이미지 개선이 없이는 한국기독교가 가진 도덕성은 빛을 보지 못하며 사회는 나쁜 이미지 속에서 계속 기독교를 비판적인 눈으로 볼 것이다. 더구나 이미지 개선 없는 전도 운동은 사회에 역겨움만을 더하여 기독교를 오히려 외면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다.

 

 오늘날 한국기독교가 돈을 투자해야 할 곳은 건물이나 전도, 구제만은 아니다. 이런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지만 문화를 통한 이미지 개선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문화에 투자하고 문화 운동에 동력을 제공하여 실추된 이미지를 개선하려고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교인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이 사회 곳곳에 기독교 거리가 형성되고, 기독교의 건물이 관광지가 되고, 교회의 노래를 들으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어야 한다. 기독교의 의식과 이념이 생활관습으로 녹아져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불교와 천주교, 그리고 기타 종교나 이단들이 문화 운동을 통한 저변확대에 엄청난 노력과 돈과 인력을 투자하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종교개혁은 문화개혁이었음을 깨닫고 문화적 노력을 통한 이미지 개선과 선교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한국기독교는 열심히 전도만 하고 예배만 드렸던 공동체가 아니었다. 우리 선조들은 전 인구의 1.5%밖에 안되는 교인수로 삼일운동을 주도하였고, 민족을 계몽하고 문화를 만들어냈다한국기독교는 일제강점기에도 신문과 잡지를 간행했는데, 신문 9, 잡지 105, 선교사 간행 잡지가 7종이나 되었다. 1923년 기독교 지도자 1257명이 <조선기독교창문사> 창립하였고, 초대 사장에 월남 이상재가 취임하였다. 창문사의 정기간행물에는 신생명을 비롯하여 어린동무, 조선동요집등을 간행하였다. 기독교는 한글 연구와 보급 운동을 벌였는데, 춘원 이광수는 한글도 글이라는 생각을 조선인에게 준 것은 실로 예수교회다라고 말하였다. 한글의 큰 스승 주시경이나 이윤재, 최현배 같은 한글학자들이 모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는 또한 문맹퇴치 운동을 벌여 교회 부설의 수많은 야학과 서당, 강습소 등이 생겨났다. 최초의 점자 개발을 한 박두성 선생도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1926년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 불리는 한글점자를 개발하였다. 기독교인들은 민족역사 바로 가르치기 운동에도 앞장섰다. 남궁억의 <조선이야기>,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김교신의 <조선지리소고> 등 많은 서적이 출판되었다.

 

 조만식, 김동원 등이 주도한 1920년대의 물산장려운동도 기독교가 주도한 국산품 애용 운동이었다. 기독교는 금주, 금연 운동도 벌였다. 당시 조선이 술 때문에 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는 주일성수, 축첩 중지, 제사중지, 노름 중단, 금주·금연을 세례를 위한 조건으로 하였다. 이제 물어야 한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모이는 숫자나 교회당의 모습 외에 어떤 문화를 만들고 있는가? 이웃이 보이고, 민족이 보이고, 문화가 보이고, 역사가 보이는 교회 문화 창출이 아쉽다./전 서울장신대 총장·한국찬송가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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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기독교 문화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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