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기독교적 상상력의 극단적 서사 작품②-이건숙의
임영천의 한국 기독교소설 산책
그 할아버지의 소원이란, 처자를 남겨두고 온 고향 땅 신의주를 생전에 자기 두 발로 한번 밟아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화자 ‘나’는 어느 무역회사의 과장 직분을 맡고 있었으며, 그 회사가 중국 심양 지역에 공장을 하나 차리게 된 일로 거기에 출장을 가야 했으므로, 그는 자신과 할아버지의 공통 일정을 잘 조절해서 결국 할아버지를 비행기에 동승시켜, 마침내 심양을 향해 떠났다.
화자 ‘나’가 이렇게 과중한 부담을 안고서 그 할아버지를 직접 신의주로 모시기로 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그 할아버지의 사연이 참으로 기구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독자의 처지에서 생각해 내린 판단이지만, 화자 ‘나’가 그 할아버지와 동병상련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었다. 먼저, 첫째(기구한 사연)에 관해서 보자면 이러하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신의주에서 살고 있었을 때 아내를 몹시 구박했다. 교회에 나가지 말라는 그의 요구를 아내가 거역해서였다. 가지 말라는데도 아내가 계속 교회에 나가자 그는 어느 날 부엌에서 아내의 등짝을 불로 지졌다. 어린 딸 학실이가 직접 현장을 목도하고 기겁을 해 놀라 소리 질렀다. 그 뒤로 아내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못하는) 대신, 틈만 나면 집에서 찬송가를 불러댔다.
그러나 실제로 딱 두 가지 곡만 불렀다. ‘예수 사랑하심은’과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이 두 곡뿐이었다. 아내가 하도 찬송을 불러대는 것이 귀찮았지만, 그러나 그 곡들이 그의 귀에 못이 박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두 곡의 찬송을 다 암기하게 돼버렸다. 그런데 결국 이 두 가지 찬송이 어느 때 그의 목숨을 구해주게 될 줄이야 그 자신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6·25동란 때 북군으로 동원되었던 그는 어느 전투 현장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미군 지휘관이, 예수 믿는 사람 외엔 다 죽이겠다며, 신자라면 다 손을 들고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포로들 거의 전부가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 보려고 손을 들고 나왔다. 그들에게 신자인 증거로 찬송을 불러 보라고 하자, 많은 이들이 별수 없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학실이 아빠는, 이때다 싶게, 평소 아내가 부르던 찬송가 하나를 자신 있게 불렀다. 그러자 미군 장교가 한 곡만 가지고서는 확실치가 않으니 한 곡 더 불러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나머지 한 곡도 힘차게 불렀다. 그는 그렇게 하여 석방되었다. 자기가 평소에 그렇게도 구박했던 아내가 이 위급한 때 자기 목숨을 살려주게 될 줄이야.
미군 포로 신세에서 풀려난 그는 후에 남한에 정착한 뒤 교회에 잘 나가 장로 직분도 받게 되었고, 정년 이후 지금은 은퇴 장로의 신분이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 할아버지는 북에 남아 있는 아내에 대한 감사와 속죄의 심정이 서로 뒤엉켜 있었다. 이 이야기가 ‘나’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다음은 둘째(독자의 처지에서 판단한바)에 관해서이다.
화자 ‘나’도 할아버지와 다소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북에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학실이의 경우는 헤어진 아버지가 남에 있었다. ‘나’와 학실이는 동갑내기이며, ‘나’의 아버지가 북에 살아 계시다면, 학실이 아빠(이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일 것으로 보인다.
모든 정황이 어쩌면 한 가족이라고 착각될 만큼 두 가족은 서로 유사한 환경에 놓여 있다. ‘나’가 그 할아버지에 대하여 연민의 정, 다른 말로 표현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에 빠져들게 된 이유 중의 하나라고 보겠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