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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헌절– 말씀과 교회법을 존중하는 거룩한 교회를 위하여
      7월17일, 우리는 대한민국의 헌법이 제정되고 공포된 뜻깊은 날을 맞이합니다. 헌법은 한 나라의 근본과 질서를 세우는 토대이며, 국민 모두가 지켜야 할 최상의 규범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는 이 세상의 법보다 더 영원하고 절대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 기초한 교회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존재하게 한 생명의 뿌리요, 교회법은 그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 교회가 정의롭고 질서 있게 세워지도록 인도하는 거룩한 울타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두 가지 기준을 존중히 여기며 세워가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안팎의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권위의 상실, 무분별한 다툼과 분열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때로는 작은 오해가 깊은 상처로 번지고, 사소한 이익다툼이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아픈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의 시기일수록 우리가 더욱 붙잡아야 할 것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이를 바르게 적용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법의 질서입니다.   교회 안에 갈등과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무엇보다 말씀과 교회법을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람의 편에 서거나, 세상법을 교회의 유일한 잣대로 삼아 판단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그 뜻을 구하며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사랑과 진리를 함께 가르치며, 교회법은 공의와 은혜가 조화를 이루도록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다툼과 분쟁 앞에서 화해와 중재의 은혜로운 길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억울함이 있어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하고, 내 뜻을 내려놓고 교회의 유익을 구하며,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를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다시 우뚝 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고린도전서14장 4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품위와 질서는 결코 사람의 지혜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교회법을 경외함으로 지킬 때에만 유지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떳떳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헌법을 존중하되, 그 위에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법을 가장 높은 권위로 세우는 교회가 될 때, 우리 가운데 주님의 평화와 은혜가 충만히 임할 것입니다. 주께서 이 결단 위에 은혜를 더하시고, 교회를 새롭게 하시며, 이 나라와 민족 위에 진리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교회에 평화! 세상에 빛을! 아멘”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증경대표회장, 비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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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7-08
  • [정론] 수련회를 사경회로
       신학교에서 한 학기 마지막 시험을 보는 시간이었다. 교수는 시험지를 나누어 준 후에 이렇게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한 학기 동안 성경해석학을 잘 배웠습니다. 앞으로 믿음의 생활을 할 때 이번 학기에 배운 것을 가지고 삶에 시험이 올 때 능히 이기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기도를 했다. 그날 공부한 것은 성적을 얻기 위하여 공부한 것보다 앞으로 시험이 올 때 이길 수 있는 지식을 얻었다고 깨달았다. 그 후 성도들과 성경공부를 시작할 때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그 지식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에서 시험을이기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진다” 는 말은 꼭 하게 되었다.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완전한 확신과 확고한 진리임을 믿고 있다.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하고,순수하고,영원한 지혜이며, 그것이 양심에 확신을 주고 마음을 뚫고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립한다”고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을 쓴 윌리암 퍼킨스은 말했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삶이 풍요로워졌고 편리해졌다. 삶의 속도도 빨라졌다. 그래도 모든 사람은 갈증을 안고 살고 있다. 갈증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함이라고 하고 있다.     기원전 765~755년 사이의 아모스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에게 전한 말씀으로 성경 암8:11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는 이 말씀이 오늘날 모든 사람과 그리스도인이라면 들어야 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살고 있다. 그런데도 삶의 목이 마른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앉아 있지만 정녕 마음에 깨달음은 없고, 성경공부 시간에 성경에 대한 지식은 얻지만 마음에 깨달음이 없는 지식을 쌓고 있다면 여전히 삶은 목마를 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 막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되 마음을 기울이고 들었으면 실천을 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교회는 성경공부 시간이 있다. 성도들이 참석하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성도는 저조하다. 대부분 관심과 시간이 없고 생활이 바쁘고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성경공부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이면 분명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어렸을 때 교회 (현 용산 중앙교회)는 여름에 사경회를 열었다. 오전 10시에 모든 성도들은 교회에 모여서 성경 말씀을 배웠다. 기억나는 것은 아현교회 김현봉목사님이 오셔서 일주일간 말씀을 전하셨다. 여름이라 무더운 날씨였지만 교회 창문을 열고 성도들은 마루바닥에 앉아서 말씀을 배웠다. 초등학생이었는데 다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기도에 대하여, 성령님에 대하여, 예배에 대하여, 전도에 대하여 쉽게 가르쳐 주셨다. 특히 기도에 대하여 배울 때는 회개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다. 여름사경회 후에 성도들은 저녁마다 기도하는 일에 힘을 썼고 전도의 열기가 있어 매 주일 새신자가 등록하였다.     교회는 매년 여름이 되면 각 기관별로 수련회를 하게 된다. 수련회에 형편상 참석을 못하는 성도가 있고 교회 형편이 어려워 수련회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수련회를 사경회로 하면 좋을 것 같다. 성도들에게 성경공부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만들어서 같은 주제로 같은 내용을 새벽, 오전, 저녁에 한다면 성도들은 형편에 따라 참석할 수 있게 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될 것이다. /무디사역문화연구소 소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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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6-30
  • [정론] 나라사랑의 힘은 역사의 기억이다
      2020년(10월) 방탄소년단 BTS가 한국과 미국의 우호증진에 큰 공헌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밴 플리트 상을 받았다. 처음에 BTS가 이 상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올해로 75년이 되는 6.25한국전쟁에 미군 최고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만든 상이었는데 그의 아들 밴 플리트 주니어도 공군요원으로 함께 6.25전쟁에 참전해 작전비행 중에, 그만 북한군의 의해 요격된 비행기가 추락이 되었다.     행방이 불분명한 그를 수색하자는 부하들의 조언을 밴 플리트 장군은 “내 아들을 찾겠다고 많은 군인들을 더 희생시킬 수 없다”고 눈물을 머금고 만류했다고 한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22세의 그의 아들 주니어 밴 플리트가 그때 죽었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죽지 않고 북한 군의 포로가 되어서 중국에 인계되었고 나중에 소련군에까지 최종 넘겨져서 시베리아의 군락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2020년 방탄소년단이 밴 플리트 상을 수상하기 한달 전 그의 조카뻘 되는 조셉 맥 크리스천(미국LA 거주)발표가 되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밴 플리트 장군은 1996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도 자신의 아들이 평양인근 산야에 묻혀있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고, 그 아들이 묻혀있는 땅 한국이 어서 통일 되어 그의 시신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밴 플리트 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BTS가 이 상을 받으면서 “우리는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소중한 미국의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라는 소감을 발표하자 중국의 방탄소년단 팬들이 그 방탄소년단을 비방하고 탈퇴화는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이 한반도를 침범한 미군을 물리치고자 조선을 도와주었다는 식의 역사왜곡으로 중국 젊은이들 착각 속에 빠뜨렸다. 사상의 자유가 없고 특별히 기독교에 대한 반대적인 사상을 가진 중국은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망각시켰다. 그런데, 나중에 중국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왜곡된 역사를 잘못 알았다고 반성하는 참교육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3만 4천명의 젊은 미국 청년들이 한국의 지금의 번영과 자유를 지켜주었다는 75년전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만 하는데, 정작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망각한 채로 살고 있는 현실이 두렵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하고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에게 베푼 이 역사적인 기적과 사실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전하고 기억하라’ 했다. 젊은이들은 특별히 어린 세대와 다음세대들은 부모로부터 나라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실천할 때 힘이 생기고 가족사랑과 나라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근본적으로 주신 하나님을 사랑할 힘이 생긴다.    역사의 정확한 기억 더 분명하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역사에 어떻게 개입하시고 인도하셨느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또 분별하는 것이 나라 사랑의 힘이다. 그 역사를 아는 자들을 미래가 기억할 것이다. 신채호는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고 성경은 “너희가 옛날 애굽 땅에서 종살이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말라.”(신15;15) 고 신신당부 했다. 역사는 과거를 잊어버리면 현재의 역사도 잊혀지게 된다는 뜻이다. /기드온동족선교회 국제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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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6-24
  • [정론] 크리스천과 애국운동
         6월은 애국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현충일과 6·25사변 75주년을 맞으면서 나라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에는 국경을 초월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겐 자신들이 속한 국가가 있기에 애국 애족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에 나라를 사랑하고 헌신과 충성을 다 해야만 한다. 크리스천의 애국운동은 교회 역사를 보면 늘 헌신적으로 함께 해왔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는 「금주·금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당시, 우리는 매우 가난하였다. 그런데도 술과 담배로 낭비하는 생활로 절제하지를 못했다.교회가 앞장 서서 근검 절제하는 생활운동은 지금도 꼭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도 교단별로 경건 절제운동으로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와 기타 생활 전반에 걸쳐 낭비하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애국운동임이 분명하다. 이런 운동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이되라』시는 분부의 실천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풍족한 생활을 하는 뒷면에서 어두운 음지에 살아가는 장애인들과 노숙자들을 돕는 교회의 실천은 역시 세상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크리스천은 모두 일어나 애국운동에 동참해야만 한다. 6·25사변을 생각하면 그때, 우리의 힘만으론 감당키 어려웠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엔(UN)군 16개국이 동참하여 준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지금도 이 땅에는 평화가 요구되고 있다. 북한은 핵을 무기로 삼고 위협하고 있다. 평화를 깨려는 불안과 두려움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때 평화를 구하는 기도가 있어야 하고 나라를 지키는데 솔선 수범해야 한다. 그것이 애국운동이다. 평화가 제일이다. 신곡(神曲)을 쓴 유명한 시인 단테는 이 세상의 최고 단어는 「평화」라고 했다. 그가 한번은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날 밤, 위안을 얻기위해 산타크로채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을 때 마침, 저녁 기도를 드리다가 나온 힐라리오라는 수도사가 “무엇을 구하러 왔소?”라고 물어, 단테가 “평화요”라고 해서 남겨진 말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이해 관계가 얽힌 국가 간에도 평화이고, 우리나라 안에서도 계층간의 평화와 정치적 혼란 역시 평화가 우선이고 이 사회 곳곳에, 가정마다에도 서로간의 평화가 제일이다. 애국의 달, 6월이 평화의 기쁨이 있기를 기원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4~19)”/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5-06-13
  • [정론] 애국하는 길
      세계최대 평택 주한 미군사령부 영내에 들어가면 「포 채플린즈 메모리얼 채플」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라틴어 격언이 눈에 띈다. “PRO DEO ET PATRIA”, “하나님과 나라를 위하여!”는 애국심에 대한 헌신을 표현하는 격언이다. 이 채플의 4명의 성직자는 두 명의 개신교 목사, 한 분의 유대교 랍비, 한 분의 로마카톨릭 신부들로 ‘불멸의 성직자’ 또는 ‘도체스터 성직자’라고도 불린다. 1943년 2월 3일 미군 수송선 SS 도체스터호가 침몰하면서 민간인과 군인을 구출하다 사망한 성직자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최악의 해상 참사 중 하나였다. 민간 여객선인 도체스터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선박 관리국의 병력 수송선으로 군용으로 개조되었다. 1943년 1월 23일 뉴욕을 출발하여 그린란드로 향했으며 해안 경비대의 호위를 받는 3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호송대의 일원으로 약 900명을 태웠다.     2월 3일 이른 아침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앞바다에서 독일 잠수함 U-223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 목사들은 다른 군인들이 구명보트에 탑승하도록 도왔고 구명조끼가 떨어지자 자신들의 구명조끼를 포기하고 배와 함께 가라앉으면서 팔짱을 끼고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이 네 명의 군목들의 이야기는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수많은 추모비가 세워지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사후에 수훈 십자 훈장과 퍼플하트 훈장을 받았다. 군목들은 명예훈장(미국최고의 훈장)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기에 수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대신 의회는 명예훈장과 동일한 무게와 가치를 지닌 훈장을 제정했다.    군인이 전장에서 목숨을 마다하지 않고 희생하는 것만이 애국이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길은 군인들만의 일은 아니다. 기독교신자를 포함하여 국민 모두는 군인들과 같은 무게로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애국’이 특정집단의 전유물이 될 때 공산혁명이나 나치독재,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정당화되고 만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것이 분명하다. 모든 국민의 애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사와 시대 앞에서 “나 몰라라”,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하루살이’ 일상은 애국이 아니라 망국의 고속도로를 까는 것이다.    오늘 탄핵정국과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의 역사와 현실 앞에 무관심과 체념은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짐을 내팽개치는 범죄다. 대선 정국 앞에서 골치 아픈 정치 어젠다요 세상 일이라고 외면한다면 이후에 닥쳐올 뻔한 미래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자폭행위가 된다.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개인적 희생과 사랑만으로 멈추지 말고 공동체적 행복과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 양보하는 희생이 일반화되는 나라와 국민이 되길 위해 분노 게이지는 의지로 낮추고 조절하며, 필요한 적과 상대를 인정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며 화합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모든 국민이 실천하는 ‘애국’이 될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오직 하나님만이 들을 수 있게 하는 ‘골방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지키시고 세우시는 나라, 대한민국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가는 군대를 모아 국경선을 지키지만 교회는 성도를 모아 새벽기도, 철야기도 군대를 비롯한 영적군대를 만들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적과 싸우며 사명을 다하고 있다.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할 사실은 통치자와 국민 사이에는 분명 인격과 성품의 연결이 있다. 지도자의 나쁜 정책과 성품은 전염성을 가지고 국민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지도자의 인격적 부패와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성품은 사회 전반을 파괴하고 만다. 그러기에 국가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 애국하는 길은 선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함께 권선징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전국기독교수연합회 회장·칼빈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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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5-23
  • [정론]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이루는 축복공간
       트럼프 대통령 2기가 시작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남자와 여자를 성별로 인정한다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서명을 하였는데, 이에 때를 맞추어서 유럽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성별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뉴스에서 회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강력한 로비를 바탕으로 동성애를 확산시키려는 퀴어(queer/괴상한) 단체들의 활동 때문이다. 이들 동성애 단체는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매스컴과 정치를 장악하고, 이미 학교와 문화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혀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까지 동성애 이념으로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70세가 넘어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 배우까지 동성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손가락질받고 있다. 이혼녀로 혼자 자녀를 양육하며 배우 활동한 것을 필자도 한 때는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자녀를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지만 잠잠해도 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 큰 파문을 불러왔다. 그것은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사위가 자랑스럽다’라는 투의 발언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은 며느리로 상대집안과 결혼한 것이라는 해괴한 일로 추정된다. 윤여정의 이런 발언은 소수 동성애 단체에는 환영받았겠지만, 대부분 일반인이 체감하는 사회적 정서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배우도 공인이다. 공인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공인의 발언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모방심리를 자극한다. 이런 점에서 윤여정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 하고, 취소하여야 한다. 사과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공인으로 활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3남매를 둔 다둥이 가정의 부모인데, 셋째에게는 국가가 국민건강보험도 제외했다. 내가 결혼하여 자녀를 출생할 때 국가가 나서서 산아제한을 실시하였다. 그 한 예로 예비군 훈련을 가면 정관수술을 간호사들이 시행할 정도였다. 집안에 의사와 간호사가 많아서 들은 이야기로는 정관과 난관수술의 인원이 의료인들에게 할당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망국적인 일을 행한 지난 정부의 의료인들은 반성과 회개를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의료분쟁으로 환자의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의료인들은 정부 시책을 대할 때 자기들에게 유리하면 생명도 죽이는 불임과 낙태뿐만 아니라, 환자를 방치하고 데모하는 의료분쟁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동성애자는 자녀를 낳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망국적인 동성애와 무분별한 낙태로 가뜩이나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결혼하여도 자녀를 낳지 않는 시대에 초저출산 문제로 대한민국이 소멸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라는 통계가 심각한 상황이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까? 나는 다둥이 자녀를 둔 신학생들과 농어촌 미자립 개척교회를 돕는 사역을 위해 벌써 24차례나 예수학교로 모였다. 그랬더니 2명 이상 8명까지 자녀를 낳은 다둥이 가정이 모이는 집회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다시 여름에 홍천 시냇가의 숲 펜션에서 한국과 몽골과 일본의 어린이들을 불러서 2박3일 국제영어성경캠프를 무료로 진행한다. 미디어에 종사하는 분들은 다둥이 가정의 행사를 자주 소개하여 사회적 분위기를 고취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5-05-20

실시간 정론 기사

  • [정론] 하나 됨과 평화의 길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눅19:42)   한 때 교회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하나였다. 하지만 보편교회는 이미 해체되었고, 다양한 종교와 인종, 민족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다원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교회가 약해졌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절망적이거나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교회는 소수자들 모임이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12:32). 교회는 처음부터 적은 무리로 출발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적은 무리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한마디로 교회가 힘이 빠지는 현상은 ‘정체성 회복의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약한 것을 자랑해야 하고(고후11:30),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 때문이다(고후12:9).   그동안 교회는 세계를 지배하거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가 가진 권력과 부를 통해 발생한 현상이었고, 가난한 자와 배우지 못한 자, 여성과 이방인 등은 교회의 소외 계층으로서 말할 기회를 상실했다. 신약성서는 여성을 포함해 이방인도 기꺼이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었고, 만일 언어 문제로 소통이 어려울 때는 그들을 대표하는 집사를 임명해 그들이 소외되는 일을 방지했었다. 하지만 교회가 강해지면서 교회 안에는 장벽들이 출현했다.   교회는 약한 자들을 환대할 때 존재의 이유가 명징해진다. 교회는 이 땅에서 힘을 빼앗긴 자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힘을 빼앗긴 자들은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배척 당하는 자들이다(눅6:20-22). 이제 그들은 애굽의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며, 이 땅에서 자신의 처지에 있는 자, 또는 있었던 자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연대하기를 기뻐한다.   뉴비긴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이기에 좋든 싫든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회중은 하나님이 몸소 기꺼이 불러 그 아들과 교제하도록 모으신 사람들이다. 그 교인들은 그분이 직접 택하신 것이지 우리가 택한 것이 아니므로, 좋든 싫든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서로 격리된 모임이 아니라 함께 모이는 모임이며, 그것을 조성한 힘은 하나님의 사랑, 곧 사랑스럽지 않은 이까지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손을 뻗치시는 그 사랑이다”.   한국 교회가 이 땅에서 화해와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 나라의 표지가 되기 위한 유일하고도 올바른 길은 이 땅에서 힘을 빼앗긴 자, “곧 사랑스럽지 않은 이”들과 연대하며, 그들과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는 길이다. 이 땅의 나그네들을 품을 때 평화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평화를 만드는 일은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는 길이지만, 동시에 이 일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받는 길이다(마5:9).   갑진년 새해 전망이 밝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약한 자들을 위한 공동체성을 회복한다면 여전히 희망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일은 교회의 사명이며 소명이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나오는 문장 하나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마주할 수 있나?“ /성서대전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4-01-18
  • [정론] 기독교 ‘사랑의 실천’
      기독교를 한 마디로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사랑의 종교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담겨 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기독교인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 시점에 ‘기독교가 사랑을 실천하는가?’ 그리고 ‘기독교인은 사랑을 실천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사랑을 실천했다는 것은 ‘글로 쓰여진 사랑’이 아니라 ‘삶으로 쓰는 사랑’을 했다는 뜻이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글로 쓰여진 사랑’과 ‘삶으로 쓰는 사랑’이다. 글로 쓰여진 사랑을 보여준 소설이 있다.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소설인 <올리버 트위스트>다. 이 소설은 디킨스가 1834년에 제정된 ‘신빈민 구제법’에 저항하기 위해 썼다. 영국의 ‘신빈민 구제법’이란 가난한 사람들을 구빈원 같은 수용시설에 집어넣어서, 아주 최소한의 먹을 것과 잠잘 공간, 생활필수품을 제공하면서 그들에게 가혹한 일을 시키려는 의도로 만든 법이다.   사랑을 삶으로 써야 하는 기독교는 약자를 함부로 대하였고, 더 혹독하게 다뤘다.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구빈원 위원들은 구빈원에 들어온 아이들에게 잠자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강요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올리버다. 약자를 대표하는 그는 아침 6시부터 노동을 시작했다. 노동 강도에 비해 식사량은 턱 없었다. 아이들이 먹는 식사량은 세 숟가락의 수프뿐이다. 배가 고파 아이들이 얼마나 숟가락으로 긁어먹었는지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구빈원’이란 자유도 없고, 인간의 존엄성도 없었다.   삶으로 쓰여진 사랑이 있다. 미국 성공 신화로 유명한 팀 하스다. 회장은 하형록 회장으로, 사훈은 책 처럼 “우리는 이웃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We exist to help those in need)”는 잠언 31장 20절 말씀이다. 잠언 31장 20절은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다. 팀 하스는 하형록 회장의 잠언 31장 20절 말씀에 근거해 회사를 경영하자 미국 동부 청년들이 일하고 싶은 100대 회사 중 하나가 되었다.   기독교는 글로 쓰여진 헛된 사랑이 아니라 삶으로 쓰여진 진정한 사랑을 해야 한다. 김하중 대사는 <하나님의 대사:사랑의 중보자>에서 기독교인의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따라 배울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삶으로 쓰여진 사랑으로 하는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두드러진 특징이어야 한다. 이 사랑의 실천, 인간의 힘으로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힘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힘으로 하기 위해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해야 한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야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된다.     기독교 영성가인 달라스 윌라드는 영성 훈련을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것’이라 했다. 그는 영성 훈련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절제의 훈련이다. 다른 하나는 참여의 훈련이다. 사랑의 실천은 참여의 훈련에 속한다.   글로 쓰여진 사랑을 한 구빈위원들은 올리버가 배가 고파 구빈원 원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금만 더 주세요.” 결과는 참혹했다. 올리버는 국자로 맞기만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프를 조금만 더 달라’는 말 한 마디로 위원회가 회집되었다. 글로 쓰여 진 사랑의 어처구니없는 기독교의 모습이다.   2023년 말이 다가온다.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기독교는 삶으로 쓰여진 사랑을 했는가? 점검해야 한다. 기독교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우리는 많은 이웃이 나보다 힘들다면 삶으로 쓰여 진 사랑을 해야 한다. 기독교가 삶으로 쓰여 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으면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사랑의 가치 실현이다.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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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12-01
  • [정론] 감사의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
      추수감사절이 있는 11월은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하는 계절이다. 많은 계획과 소망을 품고 한 해를 시작했는데, 벌써 2023년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올해 초에 세웠던 계획들 중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래서 아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올해 초에 걱정하고 염려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래서 고마울 수도 있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고 바랐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결과적으로 잘 된 경우도 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보다 더 크게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   감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나온다. 감사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감사는 우리에게 나쁜 일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그대로 응답하지 않으시고 더 좋은 것을 주시기도 하신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쁜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고 구할 때 그것을 주시지 않음으로써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는 말씀을 믿는다. 감사는 응답의 확신을 품는 기도를 낳는다. 감사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에게 모든 선한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을 더 신뢰하며, 나 자신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감사의 사람은 모든 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고 기도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만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의 기도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다. 그러한 기도를 드릴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빌 4:7).   일반적 상식으로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리스도인은 감사하고 선한 응답을 확신하면서 기도한다. 무슨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평화를 누린다. 이 평화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강이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할 때 얻을 수 있는 평강이다. 그러할 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유혹과 시험 가운데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선이 오직 하나님을 향할 것이며 하나님을 향한 충성된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감사의 계절 11월에 세상을 향했던 우리의 시선을 거두어 모든 시선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향하는 시간을 누리길 소망한다. 후회와 아쉬움, 두려움을 멀리하고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기를 바란다. 개혁주의생명신학 기도성령운동을 실천하여 영적 생명을 회복하고, 가정과 교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우리의 기도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 예배를 회복하고 경건을 회복하고 기도를 회복하고 성도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시처럼 다시 감사 기도의 자리로 나아감으로써 우리의 상식과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계절이 되길 소망한다. /백석대 기획산학부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3-11-14
  • [정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이유들
      2023년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한 해의 결산으로 몸과 마음이 바빠지는 계절이다. 전통적으로 11월이 오면 교회는 추수감사절을 기다리며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돌아본다. 길었던 코로나 팬데믹이 종식되고, 일상을 회복한 것은 특별한 감사의 제목이다. 우리 사회도 여러 분야에서 이전의 단계로 돌아가고 있지만, 정치와 경제,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범사에 감사하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감사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일이 생기거나 좋은 것을 받고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반대의 경우에도 감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감사할 수 없는 조건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감사의 기도를 올리기 쉽지 않다. 현대 인류가 마주한 위기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내용들이다. 코로나는 물론이고, 날로 심화되는 기후변화는 지구촌 곳곳에서 유례없는 자연재해를 만들어내고 있다. 과학자들은 대부분의 기상이변이 인류의 과도한 에너지 소비와 탄소 배출, 환경파괴의 결과라고 인식하고 있다. 지구온난화와 함께 급격하게 나타나는 자연재해는 그동안 누려온 일상의 평화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있다.   국지적인 무력충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고 있다. 2022년 2월 발발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2년째 계속되고 있다. 두 나라에서 이미 10만 이상의 사망자와 30만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향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도 6백 만 명에 달하고 있다. 21세기에 어떻게 이러한 전쟁이 가능한 것인지 물을 여유도 없이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하마스의 공격으로 발발한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3주 만에 8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전해지고 있다. 사망자들 가운데 어린 아이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뉴스에 많은 이들이 커다란 애도와 염려를 표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나아가 아랍권의 오래 된 대립과 갈등을 풀어갈 길은 요원해 보인다.   국내외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뉴스들이 날마다 들려온다. 이해할 수 없는 범죄와 사건, 사고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애통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환경에서 개인적으로 감사할 수 있는 제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마음으로부터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행복하고 감사의 제목이 많다 하더라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 어쩌면 더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감사할 수 없을 때 감사하는 믿음   믿음은 감사할 수 없는 환경에서 감사할 수 있는 힘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의무이며 특권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이 힘들고 참혹하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볼 때 감사할 수 있다. 새로운 날과 무한한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 눈에 보이는 환경은 지나가는 풍경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양의 근거가 되는 다니엘서 3장의 고백은 감사할 수 없는 환경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이 금신상을 만들고 경배하라 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아니 따를 수 없었다. 왕은 그들을 불러 금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불타는 풀무불에 넣겠다고 경고한다. 왕의 위협에도 다니엘과 세 친구는 굴하지 않고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과 왕의 손에서 건져낼 것이라고 응답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3장 18절의 말씀은 찬양으로 만들어져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우리가 드려야 할 감사의 모범이다. 이 모습을 그려보며 믿음이 감사의 내용이고 감사가 믿음의 형식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1600년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며 빛의 화가로 불리는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작품들 중에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 머리가 하얗게 된 늙은 노인이 검소한 식탁위에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림 속 노인의 식탁 위에는 검소하고 투박한 그릇에 담겨진 스프 한 그릇과 접시 없이 마른 빵 하나가 놓여 있다. 이 노인이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추측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빵 한 덩어리, 스프 한 그릇을 놓고 감사하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노인의 감사 기도가 가능한 것은 그 옆에 놓인 성경책과 안경에 있을 것이다. 흐려지는 시력을 감수하며 날마다 성경을 읽어가는 노인의 모습을 그려보면 거룩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이 소박한 그림은 우리가 마주한 기후위기와 환경파괴의 위기 앞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감사는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라는 말씀도 자주 듣지만 가장 고귀한 감사는 자발적인 감사이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는 진정한 감사이다. 이 감사의 계절에 교회 안팎의 어렵고 힘든 환경과 조건을 뛰어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감사를 드리는 한국교회가 되기 소망한다./WCC중앙위원·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3-10-31
  • [정론] 기독교 문화가 아쉽다
        어떤 종교가 어느 지역에 토착하여 뿌리를 박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전도 운동과 윤리 운동과 문화 운동의 세 가지 면을 골고루 갖추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엄청난 전도열에 있어서 결코 타 종교에 뒤지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또한 수준 높은 고급종교로서의 도덕성과 윤리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과제인 문화 운동은 어떠한가?    앞으로의 종교 전쟁은 이미지 전쟁이다. 그리고 이미지 전쟁은 곧 문화전쟁이다. 우리나라 같은 종교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교리적인 분별에 관심이 없다. 그 종교의 이미지가 어떠한가에 자기의 마음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 개선에 문화는 더없이 좋은 수단이다. 문화를 통한 이미지 개선이 없이는 한국기독교가 가진 도덕성은 빛을 보지 못하며 사회는 나쁜 이미지 속에서 계속 기독교를 비판적인 눈으로 볼 것이다. 더구나 이미지 개선 없는 전도 운동은 사회에 역겨움만을 더하여 기독교를 오히려 외면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다.    오늘날 한국기독교가 돈을 투자해야 할 곳은 건물이나 전도, 구제만은 아니다. 이런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지만 문화를 통한 이미지 개선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문화에 투자하고 문화 운동에 동력을 제공하여 실추된 이미지를 개선하려고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교인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이 사회 곳곳에 기독교 거리가 형성되고, 기독교의 건물이 관광지가 되고, 교회의 노래를 들으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어야 한다. 기독교의 의식과 이념이 생활관습으로 녹아져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불교와 천주교, 그리고 기타 종교나 이단들이 문화 운동을 통한 저변확대에 엄청난 노력과 돈과 인력을 투자하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종교개혁은 문화개혁이었음을 깨닫고 문화적 노력을 통한 이미지 개선과 선교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한국기독교는 열심히 전도만 하고 예배만 드렸던 공동체가 아니었다. 우리 선조들은 전 인구의 1.5%밖에 안되는 교인수로 삼일운동을 주도하였고, 민족을 계몽하고 문화를 만들어냈다. 한국기독교는 일제강점기에도 신문과 잡지를 간행했는데, 신문 9종, 잡지 105종, 선교사 간행 잡지가 7종이나 되었다. 1923년 기독교 지도자 1257명이 <조선기독교창문사> 창립하였고, 초대 사장에 월남 이상재가 취임하였다. 창문사의 정기간행물에는 《신생명》을 비롯하여 《어린동무》, 《조선동요집》등을 간행하였다. 기독교는 한글 연구와 보급 운동을 벌였는데, 춘원 이광수는 “한글도 글이라는 생각을 조선인에게 준 것은 실로 예수교회다”라고 말하였다. 한글의 큰 스승 주시경이나 이윤재, 최현배 같은 한글학자들이 모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는 또한 문맹퇴치 운동을 벌여 교회 부설의 수많은 야학과 서당, 강습소 등이 생겨났다. 최초의 점자 개발을 한 박두성 선생도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1926년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 불리는 한글점자를 개발하였다. 기독교인들은 민족역사 바로 가르치기 운동에도 앞장섰다. 남궁억의 <조선이야기>,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김교신의 <조선지리소고> 등 많은 서적이 출판되었다.    조만식, 김동원 등이 주도한 1920년대의 물산장려운동도 기독교가 주도한 국산품 애용 운동이었다. 기독교는 금주, 금연 운동도 벌였다. 당시 조선이 술 때문에 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는 주일성수, 축첩 중지, 제사중지, 노름 중단, 금주·금연을 세례를 위한 조건으로 하였다. 이제 물어야 한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모이는 숫자나 교회당의 모습 외에 어떤 문화를 만들고 있는가? 이웃이 보이고, 민족이 보이고, 문화가 보이고, 역사가 보이는 교회 문화 창출이 아쉽다./전 서울장신대 총장·한국찬송가개발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3-10-17
  • [정론] 한국교회, ‘지구 열대화’ 고민해야
       낯설지 않은 시사용어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는 이제 기후 위기(Climate Crisis)로 전환 되었다. 세계 여기저기에서 이상 기후 현상이 나타나 지구촌 인류가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자연 재해를 맞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의 위기감이 감지되고 있다. 북극과 남극이 지금 상태로 계속 녹아내리면 언젠가 서울까지 물에 잠기는 상황이 온다는 가상 지도까지 등장했다. 물의 도시로 한 해 수천만 명 관광객이 찾는 베니스, 도시 중앙의 산 마르코 광장, 산 마르코 성당이 물에 잠기는 사태가 수시로 발생한다. 바야흐로 지구 온난화를 넘어서는 기후 위기가 심각해진다.    그렇게 수십 년 세월이 흘러갔다. 지구촌 국제사회는 탄소중립을 두고 신경전을 벌인다. 자국 이기주의에 몰입되어 ‘너 죽고 나 살자’는 줄다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산업은 발전이라는 이름의 열차에 올라타 멈추지 못하고, 이익에 눈 먼 세계는 자연과 환경을 착취 수준으로 이용한다. 드디어 2023년 7월 UN 사무총장이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를 선언했다. 온난화를 지나 열대화, 즉 지구가 끓고 있다고 폭탄 선언한 셈이다. 그 원인제공자는 누구일까? 학자는 지목한다. 바로 인류라는 것이다. 지구는 인류의 등장, 즉 '인류세'(Anthropocene)로 인해 더 이상 자체 정화, 자체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르고 있다는 경고다.   하나님의 창조와 질서, 생명과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기독교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지구 열대화라는 비극에 기독교가 혹 어떤 부정적 역할을 한 면은 없는가? 돌이켜 봐야할 시점이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세가 아니라, 진심으로 옷을 찢고 가슴을 찢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지구 열대화에 이른 이 상황을 돌이켜 봐야한다. 우리가 누리는 자연은 하나님의 신비한 창조이며, 선물이다. 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숨 쉬며 은혜에 기대어 살아왔다.    그런데 그 결과가 자연 파괴, 환경 파괴로 다가왔다면 우리의 죄악은 사회적으로도 선을 넘어섰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크리스찬들은 가정, 교회에서 누구보다 먼저 환경문제를 고려해야 하며, 나아가 지구 열대화를 막기위한 적극 행동에 나서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와 자연은 하나님의 고귀하신 창조이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 청지기(Stewardship) 책임을 다해야 한다. 소극적으로 생활 측면에서 절제해야 하지만 교회 차원에서 적극적 대응을 해야한다. 최근 기업, 산업이 도입하고 있는 ESG가 그것이다.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거버넌스(Governance) 차원에서 기후 위기에 대안적 행동을 해야한다.   교회가 구원에 관한 특별은총만 강조하게 된다면, 교회의 공공성은 더욱 사회로부터 분리될 것이며, 교회가 스스로 게토화 되는 위기를 자초할 것이다.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초대교회가 사회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들은 역사가 지금도 재현되어야 한다. 지구 열대화의 시대에 들어선 현재 ESG 도입을 교회가 고려하고 실행해야 한다. 탄소제로, 기후 위기, 환경 회복을 위해 함께 행동해야 한다. 그것은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며 곧 믿음의 선한 행동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경 파괴의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이레문화연구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3-09-25
  • [정론] 한국교회위한 책임을 다하는 총회
       올해는 9월 18일부터 22일 사이에 통합, 합동, 고신, 백석측 장로교단의 정기총회가 줄줄이 개최된다. 한국교계에서 장로교단은 최대의 주류교단이다. 여타의 교단에서 들으면 섭섭하게 생각하지 모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단례로 예장통합측만 보더라도 111년의 역사와 9,500여개의 교회, 2만 2천여명의 목사와 230만명의 성도를 가지고 있다. 이런 교단이 서너 개 더 있으니 사실상 한국교회는 장로교단과 장로교단이 아닌 교회로 분류된다고 보아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최고의 역사와 최대의 교세를 가진 장로교단이라는 사실이 결코 교단의 크기를 자랑하거나 교세의 힘을 보여주는 데서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한국교계에서 절대적 위상과 교세를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한국사회 전체를 향한 울림이 크다는 말과 동일시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장로교단은 그 체급에 맞는 역할과 사명을 감당해야할 필연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교계 안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장로교단이 한국교회에 주류교단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그 위상에 걸맞는 역할과 책임을 다 해주기를 바라면서 올해 장로교단 총회에 기대하고 싶은 점 한 두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첫째는 한국교계 위상의 제고와 대 사회적, 대 정부적 메시지의 볼륨을 높이는 일이다. 한국교회 위상의 제고는 연합과 일치에서 나온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일반 성도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교계 연합단체로 나뉘어져 있다. 이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기대가 아니고 당위이다. 물론 연합은 어렵다. 그러나 한국 최대의 주류교단 장로교가 좀더 적극적으로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 나선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금년 총회를 통해서 장로교단이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으로서의 위상을 재인식하고 한국교회를 하나로 묶는 역할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주었으면 한다.    그것은 단순한 정치공학적 과제를 넘어 시대를 향한 장로교단의 신앙적 사명으로 인식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요 기도이다. 장로교단이 앞장서서 한국교회의 연합을 보다 공고히 하고 그 힘으로 한국사회 전반을 향한 대사회적, 대정부적, 대국민적 메시지를 낸다면 그 목소리는 더욱 큰 울림이 될 것이다. 민주화가 진행되던 당시 교회의 목소리는 국민들의 기대를 담아냈다. 교회의 목소리는 어느 한 시대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시대 모든 대상을 상대로 끊임없는 깨달음을 자초하게 하는 죽비로서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장로교단은 교회연합을 통해 한국사회를 향한 끊임없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야한다. 최대의 교세와 능력을 가진 장로교단이 아니면 누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제 한국의 장로교는 자신의 교단내에서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품고 리드하는 장자의 리더쉽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나아가서 올해 장로교단 총회에 바라는 것은 교단내 정치적 목회적 약자에 대한 보다 전향적인 사고를 가지는 일이다. 단적인 예가 교회내 여성에 대한 정책적 제도적 문제이다. 여전히 여성안수는 미래의 과제로 넘겨지고 있으며 여전히 여성 총대는 하늘의 별따기이다. 다행히도 예장합동 총회는 여성사역자 지위 향상을 위한 안건을 다루고 예장통합은 제도적으로 여성총대 확대방안을 이야기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아직도 소극적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시대가 무르있었다. 조금 더 ‘화끈한’ 모습을 보여주시면 어떨까? 장로교단은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이요 한국교회의 최대의 리더교단이 아닌가. 왜냐하면 아직도 목회적 약자에 대하여 소극적 단계조차도 이르지 못한 필자가 소속된 작은 교단이 그런 장로교단을 따라가고 싶기 때문이다. 장로교단 성총회에 하나님의 은총을 빈다./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3-09-12
  • [2023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갱신해야 교회가 산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이 붙은 교단들을 중심으로 매년 9월은 교단 총회의 계절이다. 성결교단과 순복음 등 몇 교단 총회가 5월에 있고, 대부분의 교단 총회가 9월에 열린다. 총회는 해당 교단의 최고 의결 회의체다. 교단의 헌법에 규정된 내용에 따라 총회가 열리고 안건들을 결의하고 그에 따라 교단의 일 년 살림살이가 진행된다. 기독교 신앙에서 교단법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일반 사회나 국가의 법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교회법을 거룩한 법이라고 한다. ‘교회법이 사회법보다 우선’이라는 대원칙이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서 불변하는 신앙적 입장인 까닭도 이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어느 교단이나 그 소속 국가의 사법 판결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법은 사회법보다 앞선다. 교단 총회 앞에 거룩하다는 단어를 넣어서 성총회(聖總會)라고 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장로교 교단들에 이른바 ‘장자 교단’의식이 강하다.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서 두 가지가 중심일 테다. 하나는 신학적으로 장로교의 신학과 교리가 가장 올바르다는 자의식이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나온 것인데 교인 수와 재정을 중심한 물량적인 교세로 보아서 장로교가 가장 크다는 점이다. 신학적인 점에서야 다른 교단들의 신학적인 전통들도 나름으로 주장하는 바가 있을 테고, 장로교 교단들 안에서도 서로 입장 차이가 나기도 하니 그렇다고 치자. 교세 문제는 한국 교계 전체가 작동하는 데서 현실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장로교가 아닌 교단의 목사로서 장로교 교단들의 장자 의식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장자 의식에서 진짜로 중요한 점이 따로 있다. 장자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집안의 장남이라면 집안이 어려울 때 자신을 던져서 집을 지켜야 한다. 집안이 어지럽고 기울어져 가는데 나 몰라라 한다면 장자답지 못하다. 옛날의 우리네 삶의 관습으로 한다면 장자에게는 특권도 많고 책임도 무겁다. 이제는 법이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부모의 유산 상속에서 장자의 몫이 컸다. 종가집 전통이 내려오는 가문의 재산에서는 이유를 불문하고 장손이 종가를 물려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책임이 막중했다. 연중 이어지는 제사를 모시는 것은 물론이고 가문의 형제 친족들 대소사도 꼼꼼히 살피며 가문 전체를 이끌어야 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장자 의식이 절실하다. 한국교회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죄에서 돌이켜 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누가 먼저든 나서서, 외치고, 행동해야 한다. 예장통합의 명성교회 세습 논란은 교회 내적으로 산적한 문제들의 단면일 뿐이다. 교회의 병폐를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다. 교회가 존재하는 세상의 상황도 폭발할 정도다. 윤석열정부가 이끄는 우리 사회 안의 심각한 분열과 최근의 일본 오염수 방출 상황, 남북으로 갈린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갈등, 미중의 대결 양상에서 우리나라의 생존 방향, 오늘날 세계의 전쟁과 기후 위기와 빈곤의 문제 등 인류의 삶이 위기다.    장로교 교단들에 바라며 부탁을 드린다. 장자 교단, 현실적으로 맞다. 한국 교회의 중심 흐름을 장로교 교단들이 이끌어 왔다. 그만큼 한국 교회 역사의 영욕(榮辱) 양면 모두에 장로교가 연관되어 있다. 2023년은 어쩌면 한국 교회가 회개하고 회복할 마지막 몇 년의 시작일지 모른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올해 장로교 교단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이후 한국 교회의 상황이 상당 부분 걸려 있다. 9월 총회들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한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3-08-29
  • [정론] 한국교회와 복음의 본질
       교회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불변하는 복음과의 해석을 통해 복음을 살아내며 세상에 참여하는 성육신적 공동체이다. 복음과의 관계가 단절되거나 느슨해진 교회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 교회이며, 그 정체성과 삶의 방식에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 초대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때마다, 끊임없이 교회의 본질에 대해 질문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항상 기인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교회의 삶에 투영한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로 그 존재의미를 확증하며, 하나님의 선교는 기독론으로 인해 그 의미가 명료하게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복음과 단절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 우리가 길을 잃은 지점은 어디며,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재발견해야 할 복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교회가 사회문화의 지배적 가치관과 타협하고 세상 한복판에 내던져진 표류하는 난파선과 같이 제도화와 세속화의 덫에 갇힐 때, 복음을 살아낼 능력을 상실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잃어버리며, 회심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상실한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급진적 회심은 교회의 삶에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할 핵심 요소이다. “과연 서구가 회심할 수 있는가?” 이것은 레슬리 뉴비긴이 37년간 인도 선교사역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조국의 상황을 직시하며 던진 질문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회심”에 관해 심각한 도전적 질문이 필요하고, 그 자리로 나갈 수 있는 결정적 실마리와 계기와 필요하다.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 이후 글로벌 사회문화의 변화에 맞물려 한국 사회문화의 변화는 한국교회의 몰락을 촉진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위기는 '교회 내부에 존재하는 하나님 백성의 우상숭배'이다. 구약 예언자들이 하나님 백성의 우상숭배에 대해 비탄에 젖어 하나님 앞에서 전적인 굴복과 회개를 통해 돌아오라는 부르짖음을 외친 것은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실재이다. 또한, 초대교회의 출발점은 교회가 다시 재발견해야 할 핵심일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통해 새롭게 갱신된 공동체이며, 그 공동체가 일으킨 개인과 사회와 세상의 변화를 의미한다. 한국교회의 선교역사에서 1903년 원산 대부흥 운동과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은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좌표를 새롭게 한 '선교운동'이며 '복음 운동'이었다. 이제 복음은 우리의 실상을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허물과 죄를 철저하게 고백하고 사죄의 은총을 구하라는 요구한다.    2023년 2월 8일, 미국의 변방인 미국 켄터키주 인구 6,000명의 작은 마을의 에즈베리 대학교에서 하나님께서 상처, 두려움, 절망, 소외감, 박탈감, 그리고 희망을 잃어버린 Z 세대의 대학생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의 인생에 변화를 일으키셨다. 그날, 수요 채플 후에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기 원하는 학생들은 남아서 기도하자”라는 설교자의 도전에 20명의 Z세대 대학생들(교수나 목사 혹은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이 강단 앞에 모여 기도를 시작했고, 작은 기도 모임이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인 부흥 운동으로 점화되었으며, 미디어를 통해 세계로 퍼지고 있다. 16일 동안 이어진 에즈베리 대학교 부흥 집회는 단순히 내부로 집중된 내향적 운동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와 주변의 사회와 문화를 변혁하는 운동으로 확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20명의 Z세대 대학생들이 하나님을 열망하게 하시고 복음에 겸손히 순종하게 하셨다. 에즈베리 부흥 운동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예언자적 비탄과 슬픔, 애통함을 보며, 죄의 용서로 인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그리고 기쁨과 감사를 발견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부흥 운동은 사회문화와 세대의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각성 운동이며 갱신 운동이고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반의 변혁을 가져오는 운동이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참된 부흥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그리스도 중심의 부흥과 갱신은 인간 편에서 급진적 겸손과 전적인 굴복을 요구한다. 이 점에서, 2024년 9월 로잔운동 5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에서 열리는 제4차 로잔대회는 고백과 회개 운동으로서 복음의 재발견을 통해 교회의 영적 활력과 사회문화적 변혁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서울신대교수·한국로잔위원회 총무
    • 오피니언
    • 정론
    2023-08-03
  • [정론] 한국교회는 ‘하나’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어둡고 공허한 미지의 땅 조선에 생명을 걸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한 선교사들이 있다. 이 분들의 신앙과 연합정신, 그리고 숭고한 희생을 바탕으로 한국교회는 출발했다. 그러나 광복 후에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두 동강이 났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진보와 보수의 극한 대립으로 정체성이 실종된 채 정쟁에 몰두하게 됐다. 사회는 물량주의와 한탕주의,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이웃을 향한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랑의 문화가 사라져버렸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상처받은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극복해야 할 한국교회가 1959년 이후 신사참배의 회개문제와 교회재건을 이유로 분열하기 시작했고, 교세의 확장을 목적으로 정치권과 결탁하며 ‘지성주의’와 ‘성장주의’ 패러다임에 빠지게 됐다. 신학은 사변화되어 교회존재의 본질을 상실한 채 사분오열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교회마저도 각양의 불미스러운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 서면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한국교회와 연합기관들도 자신들의 이권과 교권다툼에 휘둘려 여럿으로 갈렸다. 교회가 세상사람들에게 신뢰를 잃고 교회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선교의 문이 더욱 좁아진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을 실천하는 ‘회복의 마중물’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분연히 일어나 자기희생을 사명으로 하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땅에 한국교회 선교의 문을 여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복음 촛대의 본질을 회복하며, 생명을 살리는 교회로서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되면, 우리 사회의 갈등을 봉합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감히 제언한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순교의 피로 이룩한 140년 동안 박해의 연단 속에서도 오뚝이와 같이 다시 일어서는 숨겨진 저력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교회는 교육·보건·복지·정치·사회·문화 등으로 사회계몽을 이끌어왔고, 우리 사회의 급속한 성장기 저변에는 한국교회가 주류를 형성하면서 대한민국을 이끄는 중심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있어 왔다.   그러나 성장의 정점에서 풍요 가운데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대 사회적인 사명 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갈등의 시대에 세상과 소통에 실패했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화평케 하지 못해 마치 교회는 다툼이 있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됐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이 돼버렸다.   구원의 대상은 세상이기에, 이제 세상의 힘없는 자들의 신음 소리에(사1:17)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혼의 절규소리에 반응하는 ‘코람데오’의 심장으로 서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현실에 통탄하며 회개하고, 다시금 ‘하나’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는 먼저, 근본적인 복음의 가치에 충실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성장 지상주의에 사로잡혀서 교회 간 양극화를 초래한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 두번째로 교권주의를 내려놓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는 목회자다워야 한다. 목회자는 언행불일치적 삶이 아닌, 거룩한 부담감의 삶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 그 거룩한 일이 시작되는 데에 마중물이 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예장 백석총회 사무총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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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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