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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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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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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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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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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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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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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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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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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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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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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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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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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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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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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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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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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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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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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관용의 정치
- 70년 전만 해도 가난의 대명사로 중국을 말하곤 했다. 그 때 등장한 인물이 등소평(登小平)이었다. 그는 세가지 정책으로 가난한 나라를 잘 사는 중국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1) 흑묘백묘론(黑猫 白描論)이다. 검은 고양이든지 흰고양이든지 쥐만 잡으면 된다는 것이다. 2) 선부 공부론(先富 共富論)이다. 특별한 재능이 있는 자를 선별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3) 공칠과삼(功七過三論)이다. 즉 관용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완전치 못하므로 결국 실수 할 수 밖에 없다. 과(過)가 3이고, 공(功)이 7이면 이해하고 용서하라는 정책이다. 이것이 오늘날 중국을 키워 미국과 대결하도록 한 바탕이 된 것이다. 오늘의 한국의 정치는 절망적이다. 보수와 진보가 거의 대부분의 문제에서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다. 얼마 전 좌파정권의 전위대와 같은 성공회 신부가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사람의 내외가 탄 비행기가 추락하도록 '비나이다 비나이다' 라고 기도 했다는 것이다. 같은 종교인으로서 그 같은 행태가 부끄러웠고, 이해할 수 없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희망의 종교인데 성공회 신부의 그런 표현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제 정당 정치는 변해야 한다. 여기에 진보와 보수가 하나 되었던 나라를 소개하고 싶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인종차별 정책 때문에 27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넬슨 만델라가 출옥후에 5년 만에 대통령이 되었다. 당시 백인 세력의 대표자로 흑인탄압에 앞장섰던 드 클레로크에게 부통령이 되어 달라고 제안을 했다. 만델라 대통령은 그가 정치적인 적임에도 그와 화합하여 부통령 자리를 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통합된 정치를 통해서 인종탄압을 타파하고 자유 민주주의로 정착하여 그 공으로 1993년에 두 사람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사람들은 피해를 입으면 복수와 용서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데, 대개가 복수를 택한다. 복수하고 나면 공허가 온다. 리고 복수의 에너지는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삶의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러므로 용서하고 관용하는 것이 상대를 살리고 나를 살린다. 즉 나라를 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심지어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다. 어떤 언론인은 한국인이 모르는 3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지금 한국인은 자신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인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며, 세째로는 우리의 인접국인 중국과 일본이 무서운지를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눈을 들어 주변을 보라. 오늘날 우리가 이처럼 잘먹고 잘살게 된 기초는 이승만 박사가 어렵사리 채택한 자유민주주와 시장경제 체제였다고 나는 생각한다.동물의 왕국에서 두 마리의 사슴이 생사를 걸고 싸우다가 사자밥이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반도 북쪽에는 김정은이 자기의 정권유지를 위해 남한을 적화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김정은이 최근에도 수십발의 미사일을 쏘아 대고 있지만, 우리는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와같은 때 우리 안에서 진보와 보수가 아웅다웅 당파 싸움만 일삼고 있는 이것이 옳은 일인가? 지금은 우리가 깨어나야 하고, 정신을 차려야 할 때다. 한국의 진보와 보수 정치인들이여! 그리고 한국 교회여! 장래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시대정신을 바르게 읽고 관용과 통합의 지도자가 되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한국교회도 돌이켜 회개하고 시대의 선지자로서 더 큰 기도의 사명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기하성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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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관용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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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감사생활
-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시4:1). 너그러운 마음은 곤란한 일을 통해 마음의 연단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이 얻을 수 있는 옥토 밭이다. 난관에 부딪쳐보지 않고는 모든 것을 섣부르게 판단하고 의기양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곤란한 일을 겪은 후에 범사에 모든 것에 때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정한 시간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를 보는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된다. 구원과 회개와 은혜의 시간과 성숙의 때를 기다릴 수 있게 된다. 이런 너그러운 마음을 소유하게 될 때 진정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우리는 이 사람이 누군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한 사람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 모든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시간과 법칙 아래 놓이게 됐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에 이를 수 있는 지름길이 돼줬다. 비로소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진정한 기쁨과 진정한 감사와 진정한 소망이 생긴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법칙 아래에 놓이기 전에도 이미 넘치는 의욕과 소망이 있었다. 아마도 그의 삶은 모든 가능성으로 인해 그의 삶에 기쁨과 환희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다시는 맛보지 못하게 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행히도 영원히 변함없는 시간을 알게 되고 그 은혜를 감사하는 성숙한 내면을 소유하게 된다. 이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고 있는 돌아온 탕자이야기이다. 자신의 능력과 그 유능함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자신에게 감사했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있던 물질과 명예와 자신감들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보였고, 하나님께로 가는 자세를 배우게 됐다. 비로소 아버지 집에 있는 자비와 부요함과 너그러움에 대해 찬미하게 된다. 아버지집에 있는 종들이 얼마나 많은 은혜와 자비가 넘쳐나는 삶인가를 알게 된다. 이런 아버지의 너그러움을 알게 되자 그는 집을 향해 돌아가고자 마음을 정한다. 어떠한 마음으로 돌아가는가? 아버지가 옳았다는 것을 알게 돼 그 은혜를 찬미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간다. 자신을 잃어버린 후에야 이 탕자는 비로소 아버지의 자비로움을 알게 된다. 모든 길이 차단 된 후에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진정한 감사란 내게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자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러한 감사가 얼마나 위험하며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것인지 경험하기 전까지는 잘 모르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이르러도 여전히 원망하고 실패의 원인들을 주변에 돌리기 일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감사하는 생활에 이를 수 있도록 이런 경험에 담대해지길 바란다. 아버지의 집에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얼마나 충만한가를 노래하는 때가 이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하는 성숙한 시간이다. 나의 능력을 잃어버릴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감사하게 된다. 나의 기쁨을 빼앗기고 나서야 주님이 주신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나의 길에서 실패하고 나서야 하나님의 길을 걷게 되는 평안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부요한 그리스도인이며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이길 수 있는 진정한 승리자인 것이다. 이들이 살아가는 삶에서 나오는 모든 것의 감사는 하나님의 가능성에 두고 있다. 이런 영적인 눈이 열릴 때 자신의 실패와 헐벗음이 보이지 않는 진정한 감사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감사는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그가 당한 슬픔과 실패의 문제도 그의 기쁨을 제거할 수 없게 된다. 이 승리와 기쁨은 자신에게 나오지 않으며 하나님께로 나왔음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감사생활이 가능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발견할 때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무엇인가? 자신이 어떤 곤란한 일을 당해도 잘못됐다는 패배의식보다는 하나님은 옳으시다는 것을 찬미하는 것이다. /대전반석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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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감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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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없는 종교는 망한다
- 문성모목사/ 강남제일교회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 종교에 있어서 문화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질문은 어떤 종교가 문화에 대한 가치를 얼마나 귀하게 보는가 하는 문제이다. 문화 없는 종교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는 문화를 무시하고 홀대하는 종교는 아닌지 심각하게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양적 성장에 매달린 결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사람이 없어서도 아니다. 문화를 보는 안목이 없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란 종교에 있어서 마치 비타민과 같은 영양소이다. 비타민이란 당장 없다고 성장에 큰 표시가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탄수화물이나 단백질같이 귀하게 생각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몸에 필요한 비타민이 없으면 그 성장은 곧 기형이 되고 부작용을 일으키고 나쁜 세균을 이기지 못하여 질병에 걸리게 된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문화에 도무지 투자하지 않고 가치를 두지도 않고 정책이나 안목도 없이 그저 커지고 많아지고 일등이 되고 초특급이 되는데 만 혈안이 되어 비교의식과 경쟁의식 속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왔다. 몸집은 커졌으나 기형적 현상이 나타났다. 도덕성에 구멍이 뚫려 한국 기독교 전체가 침몰하고 있는 느낌이다. 뻔한 선거 부정이 앞에 있는데도 무감각하다. 거짓말을 하고도 양심의 가책도 없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약육강식, 적자 생존의 논리를 목회에 그대로 반영하고도 너무나 뻔뻔스럽다. 문화는 삶이고 삶이 신앙이 되어야 한다. 지금 어느 교회가 몇백 명에서 몇만 명이 되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성장 과정에서 문화적 성장이 함께 있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누가 총회장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문화적 도덕성이 있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모조리 파괴된 채 남아있는 명예와 감투와 자랑거리는 아무런 감동을 줄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대단히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각 교단 총회와 개 교회에 문화부가 신설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이 문화부의 주목적이 음악회나 책을 발행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구멍 난 도덕성을 메워 침몰하는 한국 기독교를 구하는 도덕성 회복 운동, 삶의 갱신운동, 예배문화의 질적 성장운동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양적 성장을 주목적으로 하는 전도부나 선교부에는 엄청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에 반하여 질적 성장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문화부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세상에서도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 문화 없는 종교는 결국 부도덕한 거대한 사이비 집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우리 신앙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가 곧 문화 행위에 속하며 삶 자체가 문화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믿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도 너무 너무 중요한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회당의 역할은 예배드림, 성경 필사, 민족문화 보존의 세 가지였다. 한국교회에 부족한 것은 민족문화 보존이다. 교회의 문화가 삶의 문화이고 삶의 문화가 민족공동체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 /강남제일교회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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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없는 종교는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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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빛을 발하는 교회
- 여러 해 전 광화문 교보빌딩 외벽에 붙었던 시구가 기억난다. “황새는 날아서 / 말은 뛰어서 / 달팽이는 기어서 /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반칠환 시인의 시였다. 짧은 시의 전문을 다시 소개하면 이렇다. “황새는 날아서 / 말은 뛰어서 / 거북이는 걸어서 / 굼벵이는 굴렀는데 /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이 시의 제목은 “새해 첫 기적”이다. 시인은 여러 동물들이 각자의 보폭으로 다다른 새해 첫 날의 장면을 기적이라고 명명했다. 2022년 8월 31일 독일 남부의 아름다운 소도시 카를스루에에 도착한 세계 각국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필자에게는 기적이었다. 서너 달 전까지 정상 개최가 불확실했던 코로나 팬데믹의 와중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제11차 총회 첫 날 4천 명의 참가자들이 도착했으니 말이다. 단순히 비행기와 기차와 자동차로 총회 장소에 도착했다는 뜻이 아니다. 총회의 정상 개최를 위하여 몇 달 전부터 기도하며 준비한 대표들과 참가자들, 독일 정부와 협력하며 도시를 세계교회의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낸 주최측, 총회 프로그램마다 성실하게 참석하며 풍성한 논의를 만들어낸 참가자들 모두 다양한 전통과 장소와 역할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날 한시”에 같은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만들어낸 기적이라고 믿는다. 두 주간 진행된 총회에서 세계교회 대표들과 참가자들을 전쟁과 질병, 기후위기의 위협 앞에 고통당하는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며 교회의 사명을 나누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을 화해와 일치로 이끄신다”는 주제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확산하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어나기 전에 정해졌다. 십자가와 비둘기, 원을 조합하여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화해, 일치를 상징하고, 이 땅의 교회가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을 형상화한 포스터는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게 현대 교회의 비전을 담아냈다. 그리고 2022년 늦여름 총회가 열렸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한국교회는 네 회원교회가 중심이 되어 한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번 총회의 주제와 의미를 알리는 사업을 진행하며, 교회일치를 통한 복음화를 알렸다. 각 교단이 공식적으로 모집한 120명의 참가자들과 취재진, 개인 참가자들을 포함하면 200명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참가한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어느 기사의 표현대로 이전에 열린 아홉 번의 해외 총회에 참가한 한국 대표단의 전체 인원보다 많은 규모였다. 참가자들이 보고, 듣고, 만나고, 경험한 세계교회와의 교감은 한국교회가 장차 걸어갈 에큐메니칼 운동의 토대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을 화해와 일치로 이끄신다”는 주제로 열린 총회를 마치고 발표한 총회 메시지 “A Call to Act Together"는 고린도후서 5장 14절의 말씀을 근거로 세 가지 부르심을 담았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를 따르라”("Come, follow me")이다. 두 번째는, “공동의 여정에 참여하라”(”Our journey together")이다. 세 번째는, “온 세상으로 가라”(“Go into the whole world")는 부르심이다. 여기에서 부르심은 소명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를 따라, 함께, 세상으로 향하는 교회로 부르는 것이다. 교회는 이미 세상에 있는데, 새삼 세상으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명하신 분명한 사명을 공동의 사명으로 행하는 것이다. 즉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세상은 지금 짙은 어둠 속에 있다. 전쟁으로 신음하고,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자연재해로 넘어지는 어두운 세상에서 교회는 사랑과 소망의 빛을 발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총회를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세계교회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믿는다./동인교회 목사·WCC 중앙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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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빛을 발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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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선한 손길 내미는 ‘예배자’ 되길
- 장로교총회는 역사적으로 지난 100여년 이상 주로 9월에 열린다. 일제강점기간 중 총독부 요구와 일부 친일 목사들에 의해 27회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 찬성을 결의했다. 그 이후 1941년 경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총회가 열린 달은 11월, 10월, 4월, 5월로 유동적이다가 1956년 41회 이후부터는 9월로 확정된다. 그럼에도 총회는 일제의 핍박이 극심하던 1943년, 44년, 45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빠짐없이 개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예장통합측은 「복음의 사람, 예배자로 살게 하소서」란 주제로 총회를 개최했다. 올해 주제 표어가 나온 성경구절은 시편 50편 5절과 로마서 12장 1절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도전적인 말씀이자, 지키기 힘들지만 꼭 지켜야 하는 믿음의 행동강령이 담긴 말씀이다. ‘내 몸을 산 제물로 주님께 드리는’ 삶, 바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올바른 삶을 실천하는 ‘예배자’로의 삶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예배자 중, 아주 오랜 조상은 가인과 아벨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는 기본 조건은 ‘선을 행하면’(창4:7)이다. 아벨을 죽이는 살인죄를 저지르기 이전에 이미 가인은 선을 행하지 않았단 말씀이고, 그가 드린 예배 혹은 제사는 ‘선을 행하지’ 않은 면에서 아벨이 드린 제사와 구별된다는 의미, 다시 말해, 선을 행하지 않음으로 바로 죄에 빠졌고, 예배를 드리는 행위와 상관없이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 아니었을까? 코로나19 시대를 지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민낯을 아주 많이 드러냈다.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운 독립군의 얼굴도 아니고, 자식을 잃어가면서도 조선을 사랑해 떠나지 못한 선교사들의 얼굴도 아니며, 고아를 업어 키운 선교사이자 벽안의 간호사의 얼굴도 아니었다. 참 이기적이고, 무관심하며 무책임한 얼굴을 사회에 드러냈다. 마스크를 써서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사회는 물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예수의 제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런데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백신을 거부하고, 집회를 강행했으며, 수많은 교회들이 교권 세습을 허용했다. 그럼에도 총회는 부단히 명예를 회복하려 애써 왔다. 이번 장로교총회 이후 그리스도인 모두가 힘을 합해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삶 살기를 희망하며 선포한다. 올해 백주년을 맞은 한국 YWCA가 여성의 주체적 성장을 위해, 정의·평화·생명운동을 선포하며 1922년 창립되기 꼭 10년 전, 1912년 9월 1일은 장로교총회가 평양에서 조직된 날이다. 당연히 초대 총회장은 언더우드선교사(1859~1916)였다. 이듬해 1913년에는 남쪽인 경성 승동교회당에서 총회가 열렸으며, 총회장은 독일 출신의 엥겔선교사(1868~1939)였다. 이후, 장로교총회는 신의주, 원산, 함흥의 교회에서 열리고, 해방 후에는 남쪽에서만 열리고 있다. 속히 ‘복음’으로 통일이 돼 남북을 오가며 장로교총회를 하는 날이 오길 기다린다. 그때까지, 진정 한국의 개신교회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선한’ 일을 하는 진정한 ‘예배자’들의 공동체가 되길 기도한다. 세상 지도자들에게 바른 정치를 하라고 말하기에 앞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개신교 지도자들이, 우리 총회원들이 먼저, 선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길 기도한다. 정의로운 총회 진행을 통해 하나님께 칭찬받는 모두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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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선한 손길 내미는 ‘예배자’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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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포기하지 말아야」
- 기독교 교회가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면서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교회는 아메리카로 건너가기 전에 1,300여 년 동안 유럽의 종교였다. 유럽의 문화와 삶 전체가 당연히 기독교적이었다. 교회가 사회 제도와 삶의 모든 면에 촘촘하게 엮여 있었다. 특히 황제나 왕 또는 제후가 주도하는 정치 제도와 교회의 교권 구조는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었다. 유럽이란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은 공적인 것이었다. 아메리카로 건너가면서 기독교 신앙은 구조로 보면 사회적인 제도와 공적인 틀에서 벗어나 사적인 것이 되었다. 17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몽주의의 흐름이 이런 상황에 큰 역할을 했다. 신앙이란 것은 인간의 자유와 인격적인 존엄성에 근거한 개인의 선택 사항이 됐다. 아메리카 대륙에 세워져 이후의 세계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미국이란 나라는 계몽주의 사상의 정치 이념에 따라 정교분리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흔히 말하는 청교도 신앙의 목표는 정교분리의 사회가 아니라 성경이 곧 국가의 법이 되는 사회였다. 한국교회는 미국식 교회구조를 기본 틀로 갖고 있다. 신앙을 사적인 것으로 보는 것 말이다. 기독교 신앙이 사회 및 역사 흐름과 떨어질 수 없다는 자의식이 약한 것이 그래서다. 미국 교회는 그 신앙 구조가 사적이긴 해도 미국이란 국가 건립 때부터 사회제도와 기독교가 늘 서로 소통하고 조율했다. 교회와 국가가 분리된 구조이지만 나름으로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틀이 있다. 유럽교회는 긴 역사 유산의 영향으로 구체적인 교회제도와 신앙의 틀이 아직 상당 부분 공적이다. 유럽의 기독교가 사회적 공공선과 연관된 자의식이 강한 이유이다. 그럼 한국교회는 어떤가? 기독교 신앙이 없던 문화권에 기독교가 들어와 정착했다. 기본 구조가 미국식이다. 신앙 의식과 구조가 사적이다. 교세가 성장하면서 교회의 사회적 역할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기본 틀이 사적인 방식에 머물러 있다. 감독제 정치 형태를 가진 일부를 빼면 한국교회의 교단들은 거의 모두 개교회주의 방식으로 사역한다. 이것이 개별 교회를 성장하게 한 동인이기도 했지만 현재는 아주 심각하게 부정적인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대형 교회의 세습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장로교 총회들이 열리는 계절이다. 한국교회의 주도적 집단인 장로교 교단들의 총회가 중요하다. 여기에서 공적으로 논의하고 결정하는 사안들이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끼친다. 사회가 교회를 보는 시각도 많은 부분 여기에 걸려 있다. 위에서 살핀 유럽식과 미국식 기독교의 비교에서 보면 한국교회의 약점이 쉽게 보인다. 사회적 공공선을 위한 책임 의식이 약한 것이다. 이번 총회들에서 사회와 세계 역사 흐름의 공적인 책무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얼른 생각해도 대여섯 가지를 꼽을 수 있다. 기후 위기와 코로나19 관련 사안, 정치, 경제, 외교 등 다방면에 걸쳐 드러난 윤석열정부의 심각한 문제점들, 남북 분단과 동아시아의 상황 등이다. 교회 내적인 일이야 당연히 심도 있게 다뤄야 한다. 코로나 이후의 목회 상황 변화에 대처하며 새로운 목회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대형 교회의 세습을 막고 교회의 제도와 치리가 바람직하게 작동하도록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갱신이다.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일에 기독교의 존립이 걸려 있음을 깨닫고 절절한 심정으로 말씀을 묵상하며 변화되도록 공적인 계기가 마련돼야 한다. 요한복음 17장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가 사회와 역사 흐름의 책무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장로교 총회를 위해 기도하며 그 사역을 응원한다./기성 증경총회장·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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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포기하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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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시대 신학교육의 나아갈 방향
-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각 분야에 미친 영향은 크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현상은 관계의 단절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와 교육현장에 당면한 문제들 역시 크다. 그런데 모든 문제들의 근본으로 가면 관계 단절이라고 하는 데 집중된다. 공동체로서 교회의 문제도 다르지 않다. 또한 신학교육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학교육을 위한 특별한 묘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존경할 수 있는 선생님이 있어서 어떤 상황에서든 신학교육을 할 때, 다음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교육과 관련한 증거는 확실하다. 즉 6·25사변 당시 전선에서는 전쟁을 치르면서도 국공립학교는 물론이고 사립학교들도 피난지에서 임시로 학교를 열어서 가르쳤다. 전시하에서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쉬지 않았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신학교육도 다르지 않았다. 피난지에서 당장 하루를 살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임에도 천막을 치고 신학교육을 했고, 소명을 확인하는 이들이 천막교실을 찾아들었고, 그 이들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들어 놓았다. 당시 신학생으로서 그들에게 하루는 절박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우선순위에서 뒤로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전국의 각 신학대학원의 지원율은 급격하게 저조해 지고 있다. 많은 신학교들이 현실을 감안하여 입학정원을 하향 조정했음에도 미달사태를 막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당면한 이 사태를 단순히 신학교육의 방법론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질문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지 교회들에서 소명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안내와 가르침,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제시해야 하는 것이 먼저 일 것이다. 그리고 신학교육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와 신학생들 모두가 존경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신실하고 경건하며 기꺼이 따르고 싶은 신앙인력이 준비된 선생님이다. 신학교육은 단지 방법론이 아니다. 신앙인격과 성경신앙에 대한 확신, 그리고 신학의 깊은 이해와 가르침을 따를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갖춘 선생님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선생님이 신학생들과의 신뢰와 존경을 전제한 사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이 단절된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비록 비대면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신학교육은 선생님의 신앙과 함께 신학이 전수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생님은 제자들과의 관계를 더 긴밀하게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제자들에게 단순히 신학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신뢰와 존경이 전제된 관계에서 자신의 신앙과 삶으로 담아내는 신학을 전수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학교육은 단지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경건한 삶과 섬김, 신학에 임하는 신실함 등 선생님의 삶에 도반(道伴)하는 제자들에게 나눔으로써의 가르침이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가르침에 감동하면서 그 선생님을 닮고자 하는 사모함이 있을 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결코 신학생 됨을 포기하거나 소명에 대한 우선순위를 뒤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동행하고 싶은 선생님이 더 필요하고 절박하게 아쉬운 것은 필연이라고 역사는 말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과 함께 많은 제안들이 있는 것을 접하게 된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진정 동행하고 싶은 선생님이 더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역사가 교훈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이다.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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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시대 신학교육의 나아갈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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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를 통한 다음세대 부흥
- 한국사회는 다음세대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학령인구는 40만 명대 중반으로 12년간 유지되지만, 만5세 학령인구는 35만 명이며, 만2-5세 학령인구는 30만 명, 만0세 학령인구는 2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올해는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앞질렀다. 외국 이민자 수용 등 대안이 나오지 않는 한 한국인구 전체가 급감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저출산은 영적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다음세대 복음화율이 상대적으로 더 낮기 때문이다. 다음세대의 인구 자체가 적은데다 다음세대 내에서의 복음화율은 더욱 낮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교회는 다음세대를 위한 예배와 교육을 충분히 행하지 못했다. 젊은 세대가 하나님 앞에 나와 새로워지는 여름성경학교와 여름수련회가 이뤄지지 못하면서 다음세대의 영적 교육은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맞아 한국교회는 이번 여름을 다음세대 재교육에 힘쓰고자 한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오기 전에 했던 프로그램을 반복하거나 확대하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어려울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서3:16-17)고 말씀한다. 코로나19는 우리 신앙과 삶의 거품을 걷어내는 계기가 됐다. 무엇이 우리 신앙과 삶에 꼭 필요한 것인지를 확인케 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경이 답이다!”고 외친다. 한국교회의 다음세대 교육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갈 때 가능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우리가 연구하거나 판단하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로잡고, 의로 교육하기 위함이다. 성경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다음세대는 하나님께서 교장 되시는 ‘성경학교’를 통해 새로워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께선 우리의 어두워진 눈과 마음을 밝혀주신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깨달아 겸손히 엎드리게 만드신다. 성령이 충만할 때 말씀의 생명력을 경험한다. 우리의 이성이나 경험으론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고, 말씀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없다. 우리의 처지나 상황을 들어 우리의 불순종을 정당화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쉬어선 안 된다. ‘성경이 답’이라 외치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이 기도성령운동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 여름 한국교회는 말씀운동과 기도운동을 통해 다음세대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영적 저출산을 극복하고 영적 후손을 많이 낳아야 한다. 성령충만하여 복음을 전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코로나19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적용해선 안 된다. 예배·말씀·기도를 멀리했던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예배를 사모하여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를 쉬지 않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란다. 한국교회여, 다시 일어나라! 올 여름엔 오직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자. 그럴 때 영적으로 메마른 우리 심령에 성령의 단비를 내려주실 것이다. 영적 가뭄이 해소되고 영혼의 풍년을 맞이할 것이다. 오곡백과 만발한 추수를 기다리며 말씀과 기도의 씨를 뿌리자. /백석대 부총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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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를 통한 다음세대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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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의 순결함
- 한국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편만하게 스며든 복음에 대한 멸시와 한국교회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에 복음의 능력을 다시 불어넣을 수 있는 실마리는 무엇일까? 대다수가 기독교의 본질 회복을 외치고 있지만, 실상 기독교의 본질은 비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나온다는 주장은 그리 많지 않다. 본질을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교회의 내면에 도사리는 비본질을 파악하고 제거하여 삶으로 구현하는 작업은 꽤 고통스러운 자기성찰과 재습관화의 과정임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힘(power)을 향해 움직이는 성향을 띠고 무언가를 숭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삶의 목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 대상이 무엇이든 예배하는 존재이다. 극단적 상대주의가 지배하는 현 세계에서 인간이 숭배하는 대상은 고대 신들의 재현으로서 동일본질이고 같은 목적을 추구한다. 그것은 성적 쾌락,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기본적인 욕구를 극대화하는 이 시대의 지배문화가 제공하는 다양한 형태의 우상숭배다. 우상숭배는 인간의 삶을 철저하게 황폐하게 만든다.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일성과 보편성에 대한 확신이며, 이에 대적하는 모든 이념과 사상이 추구하는 우상과 싸움이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다양한 이방 신들을 섬기는 주변국들에 의해 둘러싸인 상황에서 유일신 야훼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연관된 싸움이었다. 바울의 선교사역은 1세기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 로마 문명을 지배하던 우상에 대항한 싸움이었다. 루스드라, 아덴, 그리고 에베소에서 바울의 사역은 신화적 우상, 철학적 우상, 그리고 경제적 우상에 대한 폭로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복음의 변증이었다. 성경 이야기의 중심에는 유일신 사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철저하게 밝히고 있다. 48년 전인 1974년, 빌리 그래함과 존 스토트 목사에 의해 출범한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운동은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자”라는 기치 아래 깨어지고 분열되고 상처로 얼룩진 세상, 끊임없이 변하며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공적 영역에서 변치 않는 복음의 온전함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로잔운동은 교회의 온전함과 순결함이란 야훼의 길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겸손하고 정직하며 단순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2024년 9월 로잔운동은 5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에서 제4차 로잔대회를 개최한다. 만일 로잔운동이 복음이 가져오는 도전과 충격 그리고 변화와 갱신의 활력을 글로벌 기독교와 한국교회에 제공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초래하는 교회의 지속적 회심과 변혁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 안에 내재한 우상들을 제거하는 예언자적 대항문화 형성과 대안적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새롭게 형성되는 길은 성경 이야기 때문에 재형성되어야 하며, 그것은 성경의 백성들이 주변 국가들의 우상에 굴복하며 좌절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헤쳐나간 그 길을 따르는 복음이 이루는 변화를 의미한다. 이 점에서 한국 사회문화 가운데 깊이 뿌리내린 우상을 타파하고 교회 안에 내재한 세속적 욕망을 극복하는 과제는 남은 자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서울신대 교수·한국로잔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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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의 순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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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후 한국교회 일치운동 과제
-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가 폭력, 팬데믹, 기아, 기후위기 그리고 수많은 다양한 고난 속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을 통해 세상에 소망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역사 안에서 보여주신 그리스도는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으며,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다. 이 거룩한 사랑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성적 토대요, 자원이다. 교회는 분열과 차별의 세상 속에서 화해와 일치, 정의와 평화라는 복음적 가치를 담은 반문화적 증언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세상을 화해와 일치로 이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곧 ‘마음의 에큐메니즘’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교회 간 대화에서 매우 어려운 주제들도 많이 있고, 교회들 사이의 차이와 다양성은 일치의 순례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일치를 향한 노력에는 차이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용납하고 존중하는 진정성 있는 사랑의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아내는 마음이야말로, 타인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고, 형식적 관계를 넘어 신뢰를 형성하여 교회들이 가시적 일치를 이루게 하고, 또한 세상의 악·불의와 싸우는 실천적 정의를 가능케 한다. 교회는 무엇보다 ‘안전한 공간’이어야 한다. 이데올로기 혹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입장을 넘어서 대화와 소통의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는 노력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추구해야 하는 기본적인 영성적 노력이다. 또한 일치는 단순히 교단끼리 연합을 훨씬 넘어서 인류의 일치, 그리고 만물의 일치를 예시하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우주적 그리스도론’, ‘우주적 교회론’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고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인종·성·계급 때문에 분열하고 싸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류로서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지향점이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정신인 것이다.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운동의 과제는 다음과 같다. 우선, 기후비상사태 등 인류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생태적 전환과, 한반도평화에 대한 주체적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탈분단 및 탈핵 등 그린엑소더스 운동의 확산이다. 한국교회는 21세기형 에큐메니컬 운동의 대각성과 활성화를 통해, 기후비상사태와 남북문제에 있어서 집단지혜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특히 기후위기 당사자 세대인 청년들의 에큐메니컬 운동 활성화를 도모해야 한다. 또한 지역과 지구촌을 함께 보는 글로컬 에큐메니즘을 건설할 필요성이 있다. 전국 단위의 단체들이 선구적으로 나서야 한다. 지역의 에너지, 먹거리 등 지역의 문제해결안에 집중해 정의로운 전환 및 돌봄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지역적 에큐메니즘을 실현하길 바란다. 이 과정에서 지역마다 여성단체와 청년단체가 함께 연대하는 일들이 활성화되어, 시민사회와 지자체가 결정하는 사항들에 도덕적 압력을 집어넣을 수 있는 프로세스가 작동되길 기대한다.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교회들이 서로 사랑하는 제자직의 기본을 다시금 확인하자. 그리스도인 개인의 관계, 교회 간 대화와 협력 관계에 특히 일치를 지향하는, 질적으로 성숙한 사랑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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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후 한국교회 일치운동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