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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헌절– 말씀과 교회법을 존중하는 거룩한 교회를 위하여
      7월17일, 우리는 대한민국의 헌법이 제정되고 공포된 뜻깊은 날을 맞이합니다. 헌법은 한 나라의 근본과 질서를 세우는 토대이며, 국민 모두가 지켜야 할 최상의 규범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는 이 세상의 법보다 더 영원하고 절대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 기초한 교회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존재하게 한 생명의 뿌리요, 교회법은 그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 교회가 정의롭고 질서 있게 세워지도록 인도하는 거룩한 울타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두 가지 기준을 존중히 여기며 세워가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안팎의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권위의 상실, 무분별한 다툼과 분열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때로는 작은 오해가 깊은 상처로 번지고, 사소한 이익다툼이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아픈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의 시기일수록 우리가 더욱 붙잡아야 할 것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이를 바르게 적용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법의 질서입니다.   교회 안에 갈등과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무엇보다 말씀과 교회법을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람의 편에 서거나, 세상법을 교회의 유일한 잣대로 삼아 판단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그 뜻을 구하며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사랑과 진리를 함께 가르치며, 교회법은 공의와 은혜가 조화를 이루도록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다툼과 분쟁 앞에서 화해와 중재의 은혜로운 길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억울함이 있어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하고, 내 뜻을 내려놓고 교회의 유익을 구하며,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를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다시 우뚝 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고린도전서14장 4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품위와 질서는 결코 사람의 지혜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교회법을 경외함으로 지킬 때에만 유지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떳떳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헌법을 존중하되, 그 위에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법을 가장 높은 권위로 세우는 교회가 될 때, 우리 가운데 주님의 평화와 은혜가 충만히 임할 것입니다. 주께서 이 결단 위에 은혜를 더하시고, 교회를 새롭게 하시며, 이 나라와 민족 위에 진리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교회에 평화! 세상에 빛을! 아멘”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증경대표회장, 비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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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7-08
  • [정론] 수련회를 사경회로
       신학교에서 한 학기 마지막 시험을 보는 시간이었다. 교수는 시험지를 나누어 준 후에 이렇게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한 학기 동안 성경해석학을 잘 배웠습니다. 앞으로 믿음의 생활을 할 때 이번 학기에 배운 것을 가지고 삶에 시험이 올 때 능히 이기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기도를 했다. 그날 공부한 것은 성적을 얻기 위하여 공부한 것보다 앞으로 시험이 올 때 이길 수 있는 지식을 얻었다고 깨달았다. 그 후 성도들과 성경공부를 시작할 때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그 지식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에서 시험을이기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진다” 는 말은 꼭 하게 되었다.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완전한 확신과 확고한 진리임을 믿고 있다.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하고,순수하고,영원한 지혜이며, 그것이 양심에 확신을 주고 마음을 뚫고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립한다”고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을 쓴 윌리암 퍼킨스은 말했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삶이 풍요로워졌고 편리해졌다. 삶의 속도도 빨라졌다. 그래도 모든 사람은 갈증을 안고 살고 있다. 갈증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함이라고 하고 있다.     기원전 765~755년 사이의 아모스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에게 전한 말씀으로 성경 암8:11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는 이 말씀이 오늘날 모든 사람과 그리스도인이라면 들어야 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살고 있다. 그런데도 삶의 목이 마른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앉아 있지만 정녕 마음에 깨달음은 없고, 성경공부 시간에 성경에 대한 지식은 얻지만 마음에 깨달음이 없는 지식을 쌓고 있다면 여전히 삶은 목마를 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 막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되 마음을 기울이고 들었으면 실천을 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교회는 성경공부 시간이 있다. 성도들이 참석하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성도는 저조하다. 대부분 관심과 시간이 없고 생활이 바쁘고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성경공부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이면 분명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어렸을 때 교회 (현 용산 중앙교회)는 여름에 사경회를 열었다. 오전 10시에 모든 성도들은 교회에 모여서 성경 말씀을 배웠다. 기억나는 것은 아현교회 김현봉목사님이 오셔서 일주일간 말씀을 전하셨다. 여름이라 무더운 날씨였지만 교회 창문을 열고 성도들은 마루바닥에 앉아서 말씀을 배웠다. 초등학생이었는데 다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기도에 대하여, 성령님에 대하여, 예배에 대하여, 전도에 대하여 쉽게 가르쳐 주셨다. 특히 기도에 대하여 배울 때는 회개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다. 여름사경회 후에 성도들은 저녁마다 기도하는 일에 힘을 썼고 전도의 열기가 있어 매 주일 새신자가 등록하였다.     교회는 매년 여름이 되면 각 기관별로 수련회를 하게 된다. 수련회에 형편상 참석을 못하는 성도가 있고 교회 형편이 어려워 수련회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수련회를 사경회로 하면 좋을 것 같다. 성도들에게 성경공부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만들어서 같은 주제로 같은 내용을 새벽, 오전, 저녁에 한다면 성도들은 형편에 따라 참석할 수 있게 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될 것이다. /무디사역문화연구소 소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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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6-30
  • [정론] 나라사랑의 힘은 역사의 기억이다
      2020년(10월) 방탄소년단 BTS가 한국과 미국의 우호증진에 큰 공헌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밴 플리트 상을 받았다. 처음에 BTS가 이 상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올해로 75년이 되는 6.25한국전쟁에 미군 최고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만든 상이었는데 그의 아들 밴 플리트 주니어도 공군요원으로 함께 6.25전쟁에 참전해 작전비행 중에, 그만 북한군의 의해 요격된 비행기가 추락이 되었다.     행방이 불분명한 그를 수색하자는 부하들의 조언을 밴 플리트 장군은 “내 아들을 찾겠다고 많은 군인들을 더 희생시킬 수 없다”고 눈물을 머금고 만류했다고 한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22세의 그의 아들 주니어 밴 플리트가 그때 죽었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죽지 않고 북한 군의 포로가 되어서 중국에 인계되었고 나중에 소련군에까지 최종 넘겨져서 시베리아의 군락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2020년 방탄소년단이 밴 플리트 상을 수상하기 한달 전 그의 조카뻘 되는 조셉 맥 크리스천(미국LA 거주)발표가 되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밴 플리트 장군은 1996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도 자신의 아들이 평양인근 산야에 묻혀있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고, 그 아들이 묻혀있는 땅 한국이 어서 통일 되어 그의 시신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밴 플리트 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BTS가 이 상을 받으면서 “우리는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소중한 미국의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라는 소감을 발표하자 중국의 방탄소년단 팬들이 그 방탄소년단을 비방하고 탈퇴화는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이 한반도를 침범한 미군을 물리치고자 조선을 도와주었다는 식의 역사왜곡으로 중국 젊은이들 착각 속에 빠뜨렸다. 사상의 자유가 없고 특별히 기독교에 대한 반대적인 사상을 가진 중국은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망각시켰다. 그런데, 나중에 중국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왜곡된 역사를 잘못 알았다고 반성하는 참교육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3만 4천명의 젊은 미국 청년들이 한국의 지금의 번영과 자유를 지켜주었다는 75년전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만 하는데, 정작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망각한 채로 살고 있는 현실이 두렵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하고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에게 베푼 이 역사적인 기적과 사실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전하고 기억하라’ 했다. 젊은이들은 특별히 어린 세대와 다음세대들은 부모로부터 나라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실천할 때 힘이 생기고 가족사랑과 나라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근본적으로 주신 하나님을 사랑할 힘이 생긴다.    역사의 정확한 기억 더 분명하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역사에 어떻게 개입하시고 인도하셨느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또 분별하는 것이 나라 사랑의 힘이다. 그 역사를 아는 자들을 미래가 기억할 것이다. 신채호는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고 성경은 “너희가 옛날 애굽 땅에서 종살이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말라.”(신15;15) 고 신신당부 했다. 역사는 과거를 잊어버리면 현재의 역사도 잊혀지게 된다는 뜻이다. /기드온동족선교회 국제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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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6-24
  • [정론] 크리스천과 애국운동
         6월은 애국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현충일과 6·25사변 75주년을 맞으면서 나라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에는 국경을 초월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겐 자신들이 속한 국가가 있기에 애국 애족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에 나라를 사랑하고 헌신과 충성을 다 해야만 한다. 크리스천의 애국운동은 교회 역사를 보면 늘 헌신적으로 함께 해왔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는 「금주·금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당시, 우리는 매우 가난하였다. 그런데도 술과 담배로 낭비하는 생활로 절제하지를 못했다.교회가 앞장 서서 근검 절제하는 생활운동은 지금도 꼭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도 교단별로 경건 절제운동으로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와 기타 생활 전반에 걸쳐 낭비하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애국운동임이 분명하다. 이런 운동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이되라』시는 분부의 실천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풍족한 생활을 하는 뒷면에서 어두운 음지에 살아가는 장애인들과 노숙자들을 돕는 교회의 실천은 역시 세상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크리스천은 모두 일어나 애국운동에 동참해야만 한다. 6·25사변을 생각하면 그때, 우리의 힘만으론 감당키 어려웠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엔(UN)군 16개국이 동참하여 준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지금도 이 땅에는 평화가 요구되고 있다. 북한은 핵을 무기로 삼고 위협하고 있다. 평화를 깨려는 불안과 두려움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때 평화를 구하는 기도가 있어야 하고 나라를 지키는데 솔선 수범해야 한다. 그것이 애국운동이다. 평화가 제일이다. 신곡(神曲)을 쓴 유명한 시인 단테는 이 세상의 최고 단어는 「평화」라고 했다. 그가 한번은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날 밤, 위안을 얻기위해 산타크로채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을 때 마침, 저녁 기도를 드리다가 나온 힐라리오라는 수도사가 “무엇을 구하러 왔소?”라고 물어, 단테가 “평화요”라고 해서 남겨진 말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이해 관계가 얽힌 국가 간에도 평화이고, 우리나라 안에서도 계층간의 평화와 정치적 혼란 역시 평화가 우선이고 이 사회 곳곳에, 가정마다에도 서로간의 평화가 제일이다. 애국의 달, 6월이 평화의 기쁨이 있기를 기원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4~19)”/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5-06-13
  • [정론] 애국하는 길
      세계최대 평택 주한 미군사령부 영내에 들어가면 「포 채플린즈 메모리얼 채플」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라틴어 격언이 눈에 띈다. “PRO DEO ET PATRIA”, “하나님과 나라를 위하여!”는 애국심에 대한 헌신을 표현하는 격언이다. 이 채플의 4명의 성직자는 두 명의 개신교 목사, 한 분의 유대교 랍비, 한 분의 로마카톨릭 신부들로 ‘불멸의 성직자’ 또는 ‘도체스터 성직자’라고도 불린다. 1943년 2월 3일 미군 수송선 SS 도체스터호가 침몰하면서 민간인과 군인을 구출하다 사망한 성직자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최악의 해상 참사 중 하나였다. 민간 여객선인 도체스터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선박 관리국의 병력 수송선으로 군용으로 개조되었다. 1943년 1월 23일 뉴욕을 출발하여 그린란드로 향했으며 해안 경비대의 호위를 받는 3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호송대의 일원으로 약 900명을 태웠다.     2월 3일 이른 아침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앞바다에서 독일 잠수함 U-223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 목사들은 다른 군인들이 구명보트에 탑승하도록 도왔고 구명조끼가 떨어지자 자신들의 구명조끼를 포기하고 배와 함께 가라앉으면서 팔짱을 끼고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이 네 명의 군목들의 이야기는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수많은 추모비가 세워지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사후에 수훈 십자 훈장과 퍼플하트 훈장을 받았다. 군목들은 명예훈장(미국최고의 훈장)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기에 수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대신 의회는 명예훈장과 동일한 무게와 가치를 지닌 훈장을 제정했다.    군인이 전장에서 목숨을 마다하지 않고 희생하는 것만이 애국이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길은 군인들만의 일은 아니다. 기독교신자를 포함하여 국민 모두는 군인들과 같은 무게로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애국’이 특정집단의 전유물이 될 때 공산혁명이나 나치독재,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정당화되고 만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것이 분명하다. 모든 국민의 애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사와 시대 앞에서 “나 몰라라”,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하루살이’ 일상은 애국이 아니라 망국의 고속도로를 까는 것이다.    오늘 탄핵정국과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의 역사와 현실 앞에 무관심과 체념은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짐을 내팽개치는 범죄다. 대선 정국 앞에서 골치 아픈 정치 어젠다요 세상 일이라고 외면한다면 이후에 닥쳐올 뻔한 미래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자폭행위가 된다.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개인적 희생과 사랑만으로 멈추지 말고 공동체적 행복과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 양보하는 희생이 일반화되는 나라와 국민이 되길 위해 분노 게이지는 의지로 낮추고 조절하며, 필요한 적과 상대를 인정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며 화합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모든 국민이 실천하는 ‘애국’이 될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오직 하나님만이 들을 수 있게 하는 ‘골방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지키시고 세우시는 나라, 대한민국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가는 군대를 모아 국경선을 지키지만 교회는 성도를 모아 새벽기도, 철야기도 군대를 비롯한 영적군대를 만들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적과 싸우며 사명을 다하고 있다.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할 사실은 통치자와 국민 사이에는 분명 인격과 성품의 연결이 있다. 지도자의 나쁜 정책과 성품은 전염성을 가지고 국민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지도자의 인격적 부패와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성품은 사회 전반을 파괴하고 만다. 그러기에 국가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 애국하는 길은 선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함께 권선징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전국기독교수연합회 회장·칼빈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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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5-23
  • [정론]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이루는 축복공간
       트럼프 대통령 2기가 시작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남자와 여자를 성별로 인정한다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서명을 하였는데, 이에 때를 맞추어서 유럽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성별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뉴스에서 회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강력한 로비를 바탕으로 동성애를 확산시키려는 퀴어(queer/괴상한) 단체들의 활동 때문이다. 이들 동성애 단체는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매스컴과 정치를 장악하고, 이미 학교와 문화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혀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까지 동성애 이념으로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70세가 넘어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 배우까지 동성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손가락질받고 있다. 이혼녀로 혼자 자녀를 양육하며 배우 활동한 것을 필자도 한 때는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자녀를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지만 잠잠해도 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 큰 파문을 불러왔다. 그것은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사위가 자랑스럽다’라는 투의 발언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은 며느리로 상대집안과 결혼한 것이라는 해괴한 일로 추정된다. 윤여정의 이런 발언은 소수 동성애 단체에는 환영받았겠지만, 대부분 일반인이 체감하는 사회적 정서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배우도 공인이다. 공인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공인의 발언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모방심리를 자극한다. 이런 점에서 윤여정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 하고, 취소하여야 한다. 사과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공인으로 활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3남매를 둔 다둥이 가정의 부모인데, 셋째에게는 국가가 국민건강보험도 제외했다. 내가 결혼하여 자녀를 출생할 때 국가가 나서서 산아제한을 실시하였다. 그 한 예로 예비군 훈련을 가면 정관수술을 간호사들이 시행할 정도였다. 집안에 의사와 간호사가 많아서 들은 이야기로는 정관과 난관수술의 인원이 의료인들에게 할당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망국적인 일을 행한 지난 정부의 의료인들은 반성과 회개를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의료분쟁으로 환자의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의료인들은 정부 시책을 대할 때 자기들에게 유리하면 생명도 죽이는 불임과 낙태뿐만 아니라, 환자를 방치하고 데모하는 의료분쟁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동성애자는 자녀를 낳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망국적인 동성애와 무분별한 낙태로 가뜩이나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결혼하여도 자녀를 낳지 않는 시대에 초저출산 문제로 대한민국이 소멸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라는 통계가 심각한 상황이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까? 나는 다둥이 자녀를 둔 신학생들과 농어촌 미자립 개척교회를 돕는 사역을 위해 벌써 24차례나 예수학교로 모였다. 그랬더니 2명 이상 8명까지 자녀를 낳은 다둥이 가정이 모이는 집회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다시 여름에 홍천 시냇가의 숲 펜션에서 한국과 몽골과 일본의 어린이들을 불러서 2박3일 국제영어성경캠프를 무료로 진행한다. 미디어에 종사하는 분들은 다둥이 가정의 행사를 자주 소개하여 사회적 분위기를 고취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5-05-20

실시간 정론 기사

  • 생명을 치유하고 회복케 하는 새해
    코로나 19가 한창이지만, 우리나라는 2021년에 선진국 지위로 올라섰고, 여러 가지 면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일으켰다. 넷플릭스 덕분에 오징어 게임이라는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지만, 반대로 오징어 게임 덕분에 넷플릭스는 비 영어권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서로 윈윈하는 좋은 사례가 된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세상은 재빠르게 재편되고 있는데, 특별히 온라인으로 접속하고 활동하는 가상 세계의 변화가 눈에 두드러진다. 컴퓨터 상에서 활약하는 가상의 인물인 인공 인간이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가상공간에서 무한히 펼쳐지는 메타버스의 세계 속에서 대체 불가능 토큰(NFT)인 가상 자산을 이용해 경제 활동을 하고, 디지털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창작자들은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는 기후 위기라고 하는 매우 심각한 위협 앞에 놓여 있고,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는 지속적인 저출산 고령화와 지방의 소멸이라고 하는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들도 있다. 이런 세상의 변화와 과제 앞에서 우리의 중장기 계획은 어떠해야 하며, 또 2022년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앞으로 우리 모두가 가야하는 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이 시편에 있다. “너희는 힘 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나 물질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희망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나그네를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주님이 누구이신 줄 정확하게 알고 그 분을 따르며 그 분께 희망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살고 늙고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만, 급작스런 죽음은 살아남은 이들을 당황하게 한다. 동시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한 사람의 삶을 기억하고 그를 주님의 품으로 보내는 예식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삶도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 앞으로 불려갈 우리들의 마지막은 과연 어떨까? 준비 없이 당하고야 마는 죽음, 삶의 끝일까? 아니면 충실한 일상을 살았기에 도달하는 삶의 완성일까?   우리 고유의 전통에 따라 새해가 되면 서로에게 덕담을 한다. 가슴 설레며 새해를 맞이하며 서로의 계획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새해 아침을 맞아 설렘만이 아니라 두려움도 나눠야 할 것 같다. 산맥을 뚫고 나오는 뜨겁고 뭉클한 더 빨간 햇덩이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지만, 추운 겨울 깊은 산속에 무겁게 내리누르는 폭설과 깊은 울음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감정에 더하여, 우리의 삶 한구석에서 늘 우리를 떨게 만드는 불안에 대해서도 속 터놓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새해를 여는 날들이지만 푸근하고 편안한 말씀만이 아니라, 걱정스런 말들도 나누어야 한다.   이 모두가 생명을 치유하고, 모든 것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과정들을 통해서 서로의 신뢰가 두터워지고, 믿음이 굳세지고, 사랑이 깊어지며, 주님을 향한 열정이 타오르게 될 것임을 믿는다. 2022년도 오로지 주님을 의지하여 날마다 구원을 이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북한다./생명사랑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2-01-26
  • 한국교회여, 평화통일의 ‘마중물’ 역할을 하라
      지금의 시대를 구약으로 말하면 메대가 쇠하고 파사가 흥하는 시대와 같다. 그래서 이스라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벨론 유수가 끝난 것은 시대의 거대한 전환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가 어떤 의미에서 시대적 전환기인가? 무엇보다 ‘제국’이 쇠하는 시대이다. 1980년 대 후반 냉전이 무너지고 미국의 일국패권이 지속됐는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패권은 쇠하기 시작했다. 결국 2021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고, 이라크에서도 철수했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과연 무엇을 얻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좌파 정권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올해 브라질 대선에서도 ‘핑크 타이드’의 바람이 불지 관심이 몰리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미국의 지배와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은 내부의 분열로 사실상 ‘내전상태’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미국의 위상이 그전만 못하다. 이 모든 변화들이 그동안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미국이라는 제국의 쇠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는 평화통일의 정세가 조성되고 있다. 그 첩경은 종전선언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뚜렷한 성과는 보이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권은 종전선언에 미온적인 미국을 설득하고 있다.   여전히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미국은 대북 적대정책을 고수하고 있고, 이에 대해 북한은 핵무력 강화로 나가고 있다. 그나마 종전선언에 북한이 흥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종전선언과 평화의 불씨를 어떻게 살리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평화통일을 향한 교회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두 갈래로 해야 한다. 먼저 미국의 조야를 설득하고, 미국교회와 시민단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미국교회는 대단히 평화지향적이다. 또 미국의 시민사회를 움직여 집권자들이 평화의 정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음으로 남북관계에서 남한의 교회들은 북한의 교회들과 관계개선과 교류에 힘써야 한다. 물론 현재로서는 북미관계,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큰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더 큰 어려움에 빠져있다.   그러나 교류를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다. 한국교회는 평화와 변화의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복음이고, 신앙의 힘이다. 모두가 희망이 없다고 할 때, 신앙은 거기에 희망과 소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통일운동을 전개함에 있어 연합기구이건 개인이건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통일운동을 전개해야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분명한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교회협은 그동안 한국교회 통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진행했다. 그만큼의 역사적 데이터가 있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한다.   한교총은 한국교회의 가장 큰 연합기구로 성장했다. 과거 한기총이 보여줬던 극단성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화통일운동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짧기에 한계는 분명 있다. 그러므로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는 교회협과 실천력이 있는 한교총이 서로 함께 통일운동에 나서야 한다.   또한 현장운동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동안 노력에 비해 특별한 성과가 없었기에 허무감과 회의감이 팽배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다시 현장이 살아나야 한다. 민족의 역사를 생각하며 우리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바라보며 희망을 놓지 말자.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이 세대는 평화통일운동에 관심이 없고 극단적 개인주의에 빠져있는데,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한국교회의 고유한 자기전통을 전수해줘야 한다. /목사·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2-01-13
  • 두려움과 신뢰 사이에서
    목양실을 둘러보면 벽에 걸어 놓은 교회 달력 외에는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데 새해가 도착했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새는 하늘을 날았고, 말은 들판을 달렸고, 하다못해 굼벵이도 열심히 구르다가 도착한 새해를 만났다. 저쪽에서 꿈쩍 않고 묵묵히 한쪽 자리를 지키며 풍상을 이겨온 바위에게도 이미 새해이다. 그렇게 새해가 온 세상에 도착했다. 2022년 새해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걸어올까? 궁금하다. 희망과 기대, 아니면 희망 실종과 기대 무산. 2년 동안 같이 살아온 지겨운(?) 코로나는 오미크론이라는 새로운 변종 이름을 붙이고, 다시 파도처럼 한 해를 점령하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는 각자 다 다르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두려움과 신뢰 사이 어디쯤에서 살아간다. 인간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두려움은 우리 일상의 삶에서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천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노르웨이 초현실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1863-1944)는 어렸을 때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살았다. 저녁노을 붉게 물든 하늘과 거무스런 대지, 두 자연의 색깔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 사이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치는 한 인간의 두려움. 그의 절규(The Scream)라는 그림에서 절정을 이룬다.    성경은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뢰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우리에게 펼쳐 보여준다. 우리의 인생은 좋은 길만 따라가는 자동항법 장치에 따라 밤하늘을 날아가는 장거리 비행기가 아니며, 도로 위를 알아서 가는 자율주행 차량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임의 변수가 많은 바다 위에서 항해를 한다. 갈릴리 바다에 배 한 척이 떠 있다. 유람선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이름의 배다. 일이 일어난 그날,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마 8:18)하셨다. 풍랑이 일지 모르는 바다를 배타고 건너가는 것은, 제자들 스스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제안한 일도 아니었다. 여지없이 풍랑이 일어났다. 그 여정을 계획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띄우는 한 해의 인생의 배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다시스로 내빼다가 풍랑을 만난 요나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는 거친 풍랑의 한 가운데서 배 밑창까지 내려가 숨었으나 그 두려움의 원인이 어디에서 온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날 제자들이 만난 갈릴리 바다에서의 풍랑은 다시스로 가는 바다 풍랑하고는 달랐다. 갈릴리 풍랑은 불순종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순종의 결과였다. 그래도 풍랑 치는 바다는 두려운 것이다. 풍랑 치는 세상은 정돈된 삶과 희망의 항로를 혼란시키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탄 배의 어촌계 등록 주인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정한 주인은 그 안에 누워계신 예수님이시다.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잠잠케 하시는 그 분이 온 세상과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다. 바다가 그렇듯 우리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기에 여기에 신뢰가 작동해야 한다.    우리는 한평생 두려움과 신뢰 사이에서 어딘가에 위치해서 살아간다. 신뢰는 의지하는 힘이다. 가는 길에 수북하게 쌓인 의심을 거둬내고 낙심에 기죽지 않으며 힘이다. 신뢰가 커지면 두려움이 작아지고 마침내 죽음이라는 최종 두려움마저도 사라진다. 이것이 배는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신뢰이다. 평상시에는 우리에게 있는 신뢰의 정도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 바다에 풍랑이 일면 비로소 신뢰가 입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신뢰와 믿음은 면적이 아니라 체적이다. 도화지 펴놓고 색칠 예쁘게 한 평면 그림이 아니라 거칠지만, 삶 속에서 만들어진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있는 그릇이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고척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2-29
  • 다사다난한 한해를 보내며
      2년째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가 공동화(空同化) 현상에 직면해 있는 가운데 또다시 계절은 바뀌어 눈발이 흩날리는 나목(裸木)의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눈이 내린다는 것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 계절이 되었다는 시그널이기도 합니다. 코로나가 온통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역사를 움직이려는 군불은 계속 지펴지고 있을 것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듯 어떤 다크호스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지, 아니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엄청난 사건 사고들이 터져 역사의 판도를 바꿀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사 없는 인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능력이 출중한 천재적인 어떤 한 두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범부(凡夫)들이 일구어낸 삶도 역사의 한 부분이 됩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내려다본 역사도 중요하지만, 거인의 다리 사이로 바라본 소시민들의 세상도 엄연히 역사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인간사회가 거쳐 온 변천의 모습, 또는 그 기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분명 우리가 역사의 주체이건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예 역사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권리를 알지 못한 채 포기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인간들의 행태를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였습니다. 마치 운전하다가 길을 잃고 잘못 들어섰으면 멈춘 다음 위치를 확인하고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일진대 오히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속도를 높인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질주하여 도달한 곳은 어디가 될까요?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역사는 현재이고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라는 그 속에는 오늘의 내 자화상이 들어 있고 미래의 우리들의 모습이 들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결단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인과관계(因果關係)의 그물망이 됩니다. 그러기에 독불장군처럼 돈키호테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나누며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야 후대가 우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줄 것이고 이것이 가풍(家風)이 되어 명문가를 이루게 되고, 이 사회의 전통과 문화가 되어 아름다운 일류국가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손에는 역사라는 실 꾸러미가 들려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가면서 인간사회가 거쳐 온 과거라는 역사의 이름 아래 새롭게 옷을 짤 기회를 줍니다. 역사는 공시적(共時的)이면서 동시에 통시적(通時的)인 인과관계를 깨달을 수 있게 하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며칠 전 미국 켄터키주에 몰아닥친 토네이도의 시원(始原)은 이미 아마존 정글의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에서부터 시작되었듯이 현재 진행형인 수많은 사건과 테러,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죄악과 무분별한 난(亂) 개발이 빚어낸 결과물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함이 필요합니다.   역사는 사건이나 인물을 기억하고 년도를 암기하는 과목이 아닙니다. 역사는 우리 각자가 깊이 고뇌하며 마음 깊이 되새겨야 하는 역동성입니다.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사람만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멈출 수 있고 전후좌우를 살피어 창조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한해라고 하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을 보내며 다시금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역사의식을 고취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래야 카이로스(Kairos)의 때에 있어야 할 자리에서 지혜롭게 사명을 감당하여 잘했다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개인과 가정, 교회와 이 나라에 지난날 애굽에서의 수치와 실패는 ‘길갈’(굴러감)하고 므낫세(잊어버림)하며, 다가올 새해엔 ‘에브라임’(창성함)의 은총만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예장 한신측 부총회장·예향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2-26
  • 한 해를 보내며
    역사 없는 인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능력이 출중한 천재적인 어떤 한 두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범부(凡夫)들이 일구어낸 삶도 역사의 한 부분이 됩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내려다본 역사도 중요하지만, 거인의 다리 사이로 바라본 소시민들의 세상도 엄연히 역사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인간사회가 거쳐 온 변천의 모습, 또는 그 기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분명 우리가 역사의 주체이건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예 역사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권리를 알지 못한 채 포기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인간들의 행태를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였습니다. 마치 운전하다가 길을 잃고 잘못 들어섰으면 멈춘 다음 위치를 확인하고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일진대 오히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속도를 높인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질주하여 도달한 곳은 어디가 될까요?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역사는 현재이고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라는 그 속에는 오늘의 내 자화상이 들어 있고 미래의 우리들의 모습이 들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결단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인과관계(因果關係)의 그물망이 됩니다. 그러기에 독불장군처럼 돈키호테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나누며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야 후대가 우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줄 것이고 이것이 가풍(家風)이 되어 명문가를 이루게 되고, 이 사회의 전통과 문화가 되어 아름다운 일류국가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손에는 역사라는 실 꾸러미가 들려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가면서 인간사회가 거쳐 온 과거라는 역사의 이름 아래 새롭게 옷을 짤 기회를 줍니다. 역사는 공시적(共時的)이면서 동시에 통시적(通時的)인 인과관계를 깨달을 수 있게 하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며칠 전 미국 켄터키주에 몰아닥친 토네이도의 시원(始原)은 이미 아마존 정글의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에서부터 시작되었듯이 현재 진행형인 수많은 사건과 테러,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죄악과 무분별한 난(亂) 개발이 빚어낸 결과물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함이 필요합니다.   역사는 사건이나 인물을 기억하고 년도를 암기하는 과목이 아닙니다. 역사는 우리 각자가 깊이 고뇌하며 마음 깊이 되새겨야 하는 역동성입니다.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사람만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멈출 수 있고 전후좌우를 살피어 창조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한해라고 하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을 보내며 다시금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역사의식을 고취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래야 카이로스(Kairos)의 때에 있어야 할 자리에서 지혜롭게 사명을 감당하여 잘했다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개인과 가정, 교회와 이 나라에 지난날 애굽에서의 수치와 실패는 ‘길갈’(굴러감)하고 므낫세(잊어버림)하며, 다가올 새해엔 ‘에브라임’(창성함)의 은총만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예향교회 담임목사•예장 합동한신 부총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2-21
  • 성탄의 현대적 의미
      성탄절이 다가오면 이런 의문을 갖는 분들이 계신다. “예수님께서 정확히 12월 25일에 태어나셨을까?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하늘의 별이 인도했고, 동방박사가 경배하러 온 이야기 등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바울이 활동했던 당시에도, 성경이 기록된 당시에도, 초대 교회에서도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성경에서 다른 절기는 정확히 날짜를 알려주는 반면 성탄절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당시에 수많은 저작을 남긴 이레니우스와 오리겐도 성탄절의 날짜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하지 않는다. 초대교회의 주된 관심은 예수님의 사역, 수난, 부활이었기 때문이다.   2세기 후반이 되면서 성탄절의 날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다. 성탄절에 대한 기록을 처음으로 남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당시에 성탄절로 언급된 날짜들 8월 28일, 5월 20일, 4월 20일, 21일을 말하고 있지만, 모두 12월 25일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보면, 양을 치던 목동들이 예수께 경배하러 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양을 치는 시기는 보통 3~9월이라 12월과는 거리가 멀다. 성탄절이 현재의 12월 25일로 굳어진 데에는 여러 학설이 있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축제일이 12월 25일로 성탄절과 일치한다. 그래서 일부 이단에서는 성탄절을 지키는 기성 교회를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단이라고 말하며, 자신들만이 진정한 기독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이해는 유대인들의 문화를 잘 몰라서 나온 주장이다.   당시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사고에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날, 즉 잉태된 날과 십자가에 죽으신 날짜가 서로 같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 보좌에서 세상에 오신 날과 같은 날에 다시 하늘 보좌로 올라가셨다는 믿음이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니산월 14일이 태양력으로 계산하면 3월 25일이다. 즉 하늘의 천사로부터 예수의 수태의 사실을 3월 25일에 알게 되었는데, 이날을 기준으로 해산날을 계산해보면 12월 25일이 된다. 이렇게 이해하면, 왜 동방교회에서는 성탄절을 1월 6일에 지키는 지도 설명이 가능하다. 히브리달력 니산월 14일을 그리스달력을 따라서 계산하면, 그 날짜가 3월 25일이 아닌 4월 6일이 된다. 4월 6일을 기준으로 해산날을 계산하면, 1월 6일이 된다.   즉, 성탄절의 날짜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이 성탄절을 기념하기 위해 정한 날짜의 기준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과 같은 날로 정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려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복음서들이 기록될 당시에 예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에 전할 목적으로 기록하면서 유대인 중심의 마태 공동체는 예수를 아브라함의 족보에서 출생하신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모세와 같이 위대한 분으로 구약에서 예언한 예언의 성취로 묘사했다.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시기에 천체의 별의 움직임을 기록했고, 그 별을 보고 박사들이 경배하러 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공동체가 경험한 예수님은 어떤 모습인가? 늘 병자, 약자, 과부, 어린이와 함께하신 분이다. 이들이 고백하는 예수는 낮고 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평화를 선포하신 분이다. 마구간에서 나시고, 밤늦도록 퇴근하지 못한 목동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고백에 있다. 마태 공동체는 유대인 공동체답게 유대인 중의 유대인, 왕 중의 왕으로 예수를 고백했고, 누가 공동체는 세상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낮고 천하게 오신 분으로 고백했다. 요한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신 초월적인 분으로 묘사했고, 바울은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춘 분으로 묘사했다. 초대교회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날을 세상에 잉태되신 날로 여기며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분으로 고백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남긴다면 어떻게 고백하시겠는가? 이 대답은 스스로 해야 한다. 성탄절이 12월 25일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태복음의 기록이 사실인지, 누가복음의 기록이 사실인지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런 논쟁에 빠지면 성경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도 놓칠뿐더러, 훨씬 더 중요한 것 성탄절이 여러분 각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놓치게 된다. 다시 한 번 묻는다. 성탄절이 ‘여러분’에게 ‘지금’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감리교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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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12-17
  • 참된 사랑을 실천했던 간호사
      얼마 전 뉴스에서 모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기숙사에서 자살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한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신입 간호사인데 그녀의 자살 이유가 23명이나 되는 환자를 혼자 돌봐야만 했던 살인적인 노동과 선배 간호사들의 소위 ‘태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태움’이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주로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를 괴롭히는 악습을 일컫는 은어라고 한다. 백의의 천사라는 간호사들 사이에 이런 악습이 존재한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면서 120여 년 전 외국인으로 이 땅에 와서 40년 넘게 간호사로 머물다 떠난 한 여성 간호선교사가 떠올랐다. 에스더 쉴즈(1868-1940)라는 이름의 이 여성간호사는 간호선교사로 이 땅에 와서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다만 병원을 찾아온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한국 사람들을 섬기다 삶을 마쳤다.   “우리 병원 정문 혹은 입구에서 한 명 이상의 나병환자를 보지 않고 보낸 날이 거의 없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그리고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31년 5월에 그녀가 쓴 글의 일부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자신의 모국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세브란스병원에 간호학교를 세우고 간호사를 양성했으며 이후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권리와 발전을 위해 간호사협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에서 입국한 최초의 간호사 안나 P. 제이콥슨(1866-1897)이나 서서평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쉐핑(1880-1934) 간호선교사 역시 많은 사랑으로 간호사와 선교사의 임무를 다하다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세상을 떠난 분들이다. 특히 제이콥슨 선교사는 원래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지만 선교사가 되기 위해 미국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지원하여 1895년 간호선교사로 서울에 파송을 받은 분으로 제중원(현재의 세브란스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간호하며 전도를 감당했던 무척이나 신실하고 성실한 간호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나 바람과 달리 그녀는 한국에서 1년 반 밖에 활동하지 못했는데 이질과 말라리아를 앓았고 결국 치명적인 간농양으로 31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뒤를 이어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간호선교사가 바로 에스더 쉴즈인데, 쉴즈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한국으로 파송 받아서 1938년 만 70세로 은퇴할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만 40여 년, 의료선교와 복음전도 그리고 간호교육과 사회사업으로 일생을 바쳤다.   “나는 의학적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 심한 병에 걸린 후 회복된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항상 편안하다. 약 15년 전 4명의 아이를 가진 과부가 진료소를 찾아왔는데 어머니와 생후 1개월 된 작은 아기는 즉시 입원했다. 어머니는 급성신장염을 앓고 있었다. 약 한 달 동안 치료를 잘 받았고 우리는 아기를 돌보아 주었으며 그녀는 회복되었다.” 쉴즈의 선교 보고서에는 이런 기록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쉴즈는 한국 사람들에게 ‘세브란스의 천사’(angel of Severance), 혹은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렸다. 그녀가 병원의 간호부장으로 일하면서 자기의 봉급 전부를 세브란스병원에 찾아온 빈궁한 환자들을 위해 바쳤기 때문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던 그녀를 위해 병원의 교직원들이 회갑연을 베풀어 주었을 때 “세브란스병원의 천사 같은 어머니”였던 그녀는 병들고 가난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던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병원을 찾아왔을 때 누구나 병원에서 편안히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분수식 급수대를 설치하는데 사용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초기 간호사들은 일생을 바쳐 구제와 사랑의 손길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늘 우리 사회는 ‘태움’으로 보답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평택대 교수, (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2-08
  •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서주일은 성경연구와 보급을 위해 매년 12월 둘째 주일에 지키는 절기이다. 1804년 영국에서 성서공회가 처음으로 조직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국에서 처음으로 성서주일 예배를 드린 것은 1899년이었다. 그 해 5월 성령강림주일에 ‘성서공회주일’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성서주일을 지켰다.   당시 영국성서공회 조선지부 총무인 켄뮤어가 처음으로 성서주일을 주창하여, 모금을 통해 기독교의 아름다운 전통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이웃에게 성서를 보급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1900년 「신약젼셔」가 발간되면서 ‘성서공회주일’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고, 1954년부터는 세계 교회와 함께 ‘성서주일’이라는 명칭으로 지켜오고 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 즉 ‘성경의 종교’이다.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언한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단순한 인간의 전승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와 행동을 기록하게 하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며 지켜왔다.     잘 알려졌다시피 성경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 셀러 중의 으뜸이다. 특히 한국의 성서공회는 지금도 꾸준하게 세계 곳곳에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복음을 받아들이던 나라에서 이제 성경을 세계에 보급하는 자랑스러운 국가가 된 것이다.    성경보급은 대한민국에서 역사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19세기 말 조선에 왔던 선교사들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그리고 이렇게 나온 한글성경은 복음전파와 부흥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남녀노소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기록에 보면 선교사들 스스로가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무엇보다 종이인쇄출판의 쇠퇴로 책을 읽는 사람들의 수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신 스마트기기를 통해 성경을 읽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는 막을 수 없는 대세인가?   편리함 때문에 예배 시간에 화면을 사용한다. 찬송과 성경이 화면으로 나오다보니 이제 교인들은 예배 시간에도 성경과 찬송을 보지 않게 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성경은 점점 손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이제 이런 편리함에 익숙해져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회는 이 말씀 위에 서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며, 교회를 사랑하는 것 역시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일학교 때부터 성경을 읽는 훈련을 해야 한다.     특히 성서주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준비하여 기다리는 절기인 대강절 기간에 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반포되어 읽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쇠퇴기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물론 사실이 그럴 수도 있다. 한국교회에 쇠퇴기가 온 근본적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에 대한 사랑, 말씀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신앙의 편의주의가 쇠락을 앞당긴 것이 아닌가?   대강절과 성서주일을 맞이하며 한국교회는 다시 한 번 성경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무엇보다 목회자부터 먼저 회개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에 다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날 것이다. 성경 사랑의 길로 다시 나가자. /전 총신대총장. 코메니우스연구소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2-08
  • 참된 사랑을 실천했던 간호사
        얼마 전 뉴스에서 모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기숙사에서 자살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한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신입 간호사인데 그녀의 자살 이유가 23명이나 되는 환자를 혼자 돌봐야만 했던 살인적인 노동과 선배 간호사들의 소위 ‘태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태움’이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주로 선배 간호사가 후배 간호사를 괴롭히는 악습을 일컫는 은어라고 한다. 백의의 천사라는 간호사들 사이에 이런 악습이 존재한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면서 120여 년 전 외국인으로 이 땅에 와서 40년 넘게 간호사로 머물다 떠난 한 여성 간호선교사가 떠올랐다. 에스더 쉴즈(1868-1940)라는 이름의 이 여성간호사는 간호선교사로 이 땅에 와서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다만 병원을 찾아온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한국 사람들을 섬기다 삶을 마쳤다.   “우리 병원 정문 혹은 입구에서 한 명 이상의 나병환자를 보지 않고 보낸 날이 거의 없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그리고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31년 5월에 그녀가 쓴 글의 일부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자신의 모국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세브란스병원에 간호학교를 세우고 간호사를 양성했으며 이후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권리와 발전을 위해 간호사협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물론 쉴즈 간호선교사만 우리나라에 와서 자신의 재능과 사랑을 바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입국한 최초의 간호사 안나 P. 제이콥슨(1866-1897)이나 서서평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쉐핑(1880-1934) 간호선교사 역시 많은 사랑으로 간호사와 선교사의 임무를 다하다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세상을 떠난 분들이다. 특히 제이콥슨 선교사는 원래 노르웨이에서 태어났지만 선교사가 되기 위해 미국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지원하여 1895년 간호선교사로 서울에 파송을 받은 분으로 제중원(현재의 세브란스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간호하며 전도를 감당했던 무척이나 신실하고 성실한 간호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나 바람과 달리 그녀는 한국에서 1년 반 밖에 활동하지 못했는데 이질과 말라리아를 앓았고 결국 치명적인 간농양으로 31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뒤를 이어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간호선교사가 바로 에스더 쉴즈인데, 쉴즈는 189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한국으로 파송 받아서 1938년 만 70세로 은퇴할 때까지 우리나라에서만 40여 년, 변함없이 의료선교와 복음전도 그리고 간호교육과 사회사업으로 일생을 바쳤다.   “나는 의학적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 심한 병에 걸린 후 회복된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항상 편안하다. 약 15년 전 4명의 아이를 가진 과부가 진료소를 찾아왔는데 어머니와 생후 1개월 된 작은 아기는 즉시 입원했다. 어머니는 급성신장염을 앓고 있었다. 약 한 달 동안 치료를 잘 받았고 우리는 아기를 돌보아 주었으며 그녀는 회복되었다. 우리는 당시 의복과 음식을 주고 몇 개월치의 방세를 줌으로써 그들을 도와야 했다.” 쉴즈의 선교 보고서에는 이런 기록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쉴즈는 한국 사람들에게 ‘세브란스의 천사’(angel of Severance), 혹은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렸다. 그녀가 병원의 간호부장으로 일하면서 자기의 봉급 전부를 세브란스병원에 찾아온 빈궁한 환자들을 위해 바쳤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회갑연에서 받은 선물을 세브란스 병원 안에 물을 마실 수 있는 분수식 급수대 3개를 설치하는데 사용할 정도였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던 그녀를 위해 병원의 교직원들이 회갑연을 베풀어 주었을 때 “세브란스병원의 천사 같은 어머니”였던 그녀는 병들고 가난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던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병원을 찾아왔을 때 누구나 병원에서 편안히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분수식 급수대를 설치하는데 사용했던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초기 간호사들은 일생을 바쳐 구제와 사랑의 손길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늘 우리 사회는 ‘태움’으로 보답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평택대 교수, (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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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8
  • 위기의 시대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
      이슬람과 공산주의와 이단과 동성애는 지구촌 교회를 일시에 허무는 2백 마리의 여우와 같이 하나님의 포도원 담장을 허무는 사탄의 세력이다. 이미 이들의 공격으로 무너진 서구교회는 재건이 불가능한 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고, 자취를 감춘 교회가 많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남겨 주신 마지막 그루터기가 되어서 성경적인 개혁신학을 신속하게 회복해야 한다. 기회주의자들인 일부 목사는 세상과 타협을 하기에 더는 기대할 것이 없으므로, 장로들이 깨어서 목숨을 걸고서 교회를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굳게 지켜야 한다.   신학교에서 신약성서를 가르치는 교수가 이슬람 대책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슬람화되면 교회는 더는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터키에 있는 소아시아 7대 교회는 다 무너지고 주저앉고 돌무더기만 가득하다. 이것이 이슬람의 실체이다.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학자와 목회자 가운데 원어를 들먹거리면서 이슬람을 샬롬이나 살렘과 같은 평화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아랍어 동사 아슬라마("복종시키다")의 동명사인 이슬람은 "복종하기"란 사전적 의미를 보면,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내려준 종교"(아랍어 사전)이고, "알라와 그가 준 율법에 복종하는 것"(꾸란어휘사전)이고, "평화와 복종과 순종, 알라가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알라의 가르침과 인도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한국이슬람교중앙회)이다. 곧 이슬람은 무함마드에게 전적으로 복종하는 종교이므로. 평화란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복종을 강요하는 이슬람은 무자비한 복종을 모토로 지하드(성전 聖戰)를 자행하는 폭탄테러의 주범이다.   기독교보다 600년 후에 나타난 이슬람은 신구약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처음부터 기독교를 반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등장한 이슬람은 호전적인 종교이다. 코란이 성경을 들먹거리고 다수 성경인물을 묘사하지만 면밀히 검토하면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거짓이다. 이슬람이 성경을 들먹거리는 이유는 기독교인에게 포교하려고 의도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이슈 중에 하나는 이단이다. 이단은 초기 기독교가 발생하기 시작할 때부터 집요하게 정통교회를 뒤흔들고 나온 사이비 집단이다. 이단은 처음에는 정통교회의 전통에 편승하다가 점차 본색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정통교회와 같은 것 같다가 마지막에 다른 것이 이단의 특징이다. 한국교회는 절반 이상이 이단이다. 유라시아와 러시아와 중국과 북한과 쿠바에 종교의 자유가 없지만, 이미 많은 이단이 활동하면서 공산당에 신물을 느낀 주민의 공허한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기독교의 전도도 금지되어 교회가 허물어지고 신앙의 대를 잇지 못하는 상황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단에 편향된 영혼이 죽어가고 기독교문화마저 녹슬게 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신학생들이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라. 신학생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자기들이 사역하고자 하는 교회의 장로이다. 이 점에서 장로는 철저하게 보수적이며 교회의 전통을 지키려는 분이므로, 인사문제를 목회자에게만 일임하지 말고, 인선 위원회에 들어가서 신학후보생들을 검증할 수 있어야한다. 평생 동안 한 교회에서만 섬긴 장로의 영적 지도력은 현대 목회에서 아주 필요한 부분이다. 과거 장신대에 수도 없는 데모가 있을 때마다 장로들이 ‘저런 문제아를 교회에서 청빙하면 안 된다’라는 목소리를 높일 때, 신학생들이 정신을 차리고 자중하던 일이 있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한국교회 정론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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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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