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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 오피니언
    • 정론
    2024-10-08
  • [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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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8
  •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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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4
  • [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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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09
  • [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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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03
  •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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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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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일은 한국교회의 커다란 숙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이 추락하는 시점에서, 교회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면에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매우 중요한 선교적 과제이기도 하다. 사실 최근에 와서 연합의 논의가 활발한 것 같지만, 교회 연합과 일치를 향한 한국교회의 노력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 한국교회의 연합체는 1924년 설립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NCCK)가 유일했다, 그러다가 1989년 교회협의 활동과 지향에 이견을 가진 복음주의 계열 교회들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CCK)을 설립했다. 이때부터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라는 지형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11년 한기총의 이단 해제 문제와 금권선거 등의 문제로 주요교단들이 한기총을 탈퇴하고 한국교회연합(한교연, CCIK)을 설립했다. 이후 2017년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을 위해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UCCK))이 생겼는데, 이 과정에서 내홍을 겪으며 대부분의 교단들이 한교총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한교총은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단이 참여한 최대 교회연합기구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작년부터 한교총·한기총·한교연의 기구 통합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었고, 최근 한교총과 한기총이 통합을 위한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 통합 논의는 앞서 기술한 교회연합의 역사에서 보듯이 보수교계의 통합이란 한계를 가진다. 실제 1990년대 말부터 제한적이지만 당시 교회협과 한기총에 소속된 교단 간에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진보와 보수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강한 시대적인 요청도 있어서 교회협과 한기총은 ‘연합과 일치’를 위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기총은 한국교회일치위원회(위원장:최성규 목사)를, 교회협은 교회연합운동추진특별위원회(위원장:전병금 목사)을 구성하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단일기구 탄생을 위해 깊숙한 논의를 진행했다. 물론 이 논의가 구체적인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이 논의의 중심에는 교회협과 한기총이라는 기구 외에 故 옥한흠목사가 초대대표회장이었던 한국교회목회자협의회(한목협)의 역할이 있었다. 실제 한목협은 2012년 한국교회 986명의 목회자가 연서명하여 ‘연합과 일치를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의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를 향한 열망은 진지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현재 한국교회 연합의 논의는 한교총 중심의 보수 교계의 연합 논의라는 측면이 있다. 전통적인 교회 연합기구인 교회협을 배제한 연합 논의여서 제한적인 데다. 특별히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연합기구는 정부는 물론 시민사회와 소통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지금의 통합논의는 한계가 분명하다. 한교총이 공동대표회장 체제에서 1인 대표회장 체재로 전환한 것도 시대정신과 부합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연합과 일치의 문제는 한국교회의 집단지성이 작동하고, 시스템이 작용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엡 4:5-6)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를 존중하며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지혜이다. 연합과 일치를 꿈꾸는 한국교회는 우선 현존하는 연합기구들이 복음의 정신에 충실한 지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고자 하는 더 넓은 선교의 현장에서 만나야 한다. /성북교회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일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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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8
  • ‘코로나 시대’와 한국 신학교육의 미래
      현금 한국 사회의 변화는 교회가 대응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고 급격하다. 어쩌면 196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사회가 변해온 과정보다도 더 빠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신학교육의 현장도 다르지 않다. 선교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한국교회, 피 선교 국가에서 선교 국가로 성장하여 세계 각지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교회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한국교회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 한국교회에 대한 걱정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 소리들이 조금씩 다른 입장이기는 하지만, 교회 안팎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신학교육의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전해진 바와 같이 각 신학대학원의 금년도 신입생 지원현황을 접하면서 느끼게 되는 위기감은 더 하다. 1970~80년대에 우수죽순처럼 신학교들이 생겨났고, 1990년대에는 정원 확대는 물론 신학교들이 종합대학교로 개편하는 것을 경쟁적으로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입학정원을 줄이거나 타 학과로 정원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렇게 했음에도 현실은 정원 미달 정도가 아니라 학사운영이 어려운 정도로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무엇을 걱정해야 하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신학교육의 미래를 생각하면 참담한 심정이 아닐 수 없다.    절박한 심정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먼저 한국교회는 국민적인 신뢰와 존경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교육과 함께 전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교회가 사회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전도는 물론 교회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상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신학교육은 더 이상 신학교만의 역할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 교단은 전체 교회가 신학교육을 위해서 뜻을 모아야 한다. 단지 신학교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차원이 아닌, 목회자나 선교사 등 교회의 사역자로서 미래를 꿈꾸게 해야 한다. 교회 내적으로 그러한 꿈을 갖게 하지 못한다면, 후보생 부족사태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셋째, 조금 획기적인 제안일 수 있지만,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으로서 6~7년의 수업연한의 단일한 제도로 교회 지도자를 양육하는 프로그램으로 개편하고, 그에 따른 비용은 전부 교단이 감당하도록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그 기간 동안 후보생은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목회자, 선교사, 혹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게 하여 준비된 사역자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이 그 과정에서 후보생으로서 결격사유가 보인다면, 확실하게 걸러내야 한다. 더 이상 신학교육을 제도와 형식에 적당히 맞추는 수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    끝으로, 수업연한 내내 교수와 후보생들이 수도원적인 환경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신학과 신앙을 전수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서 양성하도록 개편해야 할 것이다. 단지 재능 있는 사람, 경영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닌, 지도자로서 신실하고,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역자로서 자신의 섬김의 삶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신학교육이어야 한다. 철저하게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먼저 자신의 삶을 찾고, 그것을 나누면서 이루어 가는 한 사람으로서 목회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신총회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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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8
  • 개혁주의생명신학, 회개 용서운동과 연합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130여 년간 한국교회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성장을 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과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성장시키시는데 사용하신 도구였다. 한국 기독교는 한민족의 계몽과 발전,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만이 자유와 독립을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사경회마다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새벽마다 차가운 교회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기도가 있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녔던 열정적인 전도자가 있었다. 빈부격차와 사농공상 차이가 교회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한국교회는 나라를 잃은 슬픔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붙들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 부흥성장을 허락하셨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미약한 한국교회를 들어 세계교회의 모델이 되게 하셨다. 하지만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한국교회는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졌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교회 분열의 배후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욕심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본질적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단으로 배척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 등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리와 신학을 둘러싼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지향하는 기관들조차도 아직 분열되어 완전히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부끄럽다.   교회의 속성 중 하나인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하나 됨은 일차적으로 제도적 하나 됨보다는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을 뜻한다. 하지만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은 제도적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비록 교단 통합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교단 간의 연합과 협력, 일치는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이룰 방법은 무엇일까?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방안을 여러 가지로 제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방해하는 인간의 욕심과 죄악을 넘어서는 것이다. 옛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내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 이웃 중심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기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죄와 잘못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교회 분열의 잘못을 서로에게 돌리지 말고 나 자신에게 돌리는 회개운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듯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웃의 잘못을 넉넉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교회 분열의 역사에서 서로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서로 용서하지 못했던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 /백석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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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2-11
  • 한국교회 연합과 일치의 방안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130여 년간 한국교회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성장을 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과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성장시키시는데 사용하신 도구였다. 한국 기독교는 한민족의 계몽과 발전,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만이 자유와 독립을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사경회마다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새벽마다 차가운 교회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기도가 있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녔던 열정적인 전도자가 있었다. 빈부격차와 사농공상 차이가 교회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한국교회는 나라를 잃은 슬픔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붙들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큰 부흥성장을 허락하셨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미약한 한국교회를 들어 세계교회의 모델이 되게 하셨다. 하지만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한국교회는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졌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교회 분열의 배후에는 인간의 연약함과 욕심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본질적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단으로 배척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 등 본질적 교리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리와 신학을 둘러싼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지향하는 기관들조차도 아직 분열되어 완전히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부끄럽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우리 사회 앞에서 회개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속성 중 하나인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말하는 하나 됨은 일차적으로 제도적 하나 됨보다는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을 뜻한다. 하지만 유기적이고 영적인 하나 됨은 제도적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비록 교단 통합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교단 간의 연합과 협력, 일치는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이룰 방법은 무엇일까?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방안을 여러 가지로 제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방해하는 인간의 욕심과 죄악을 넘어서는 것이다. 옛 자아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내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 이웃 중심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기에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회개용서운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죄와 잘못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교회 분열의 잘못을 서로에게 돌리지 말고 나 자신에게 돌리는 회개운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듯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웃의 잘못을 넉넉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교회 분열의 역사에서 서로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서로 용서하지 못했던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회개용서운동은 말로는 쉽지만 실천하기 어렵다.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죄의 뿌리가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회개용서운동을 실천할 수 없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 없이는 회개용서운동이 불가능하다고 밝힌다. 참된 회개와 용서는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분열을 딛고 연합과 일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충만을 강하게 구하는 기도성령운동이 불일 듯 일어나야 한다. / 백석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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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2-08
  • 위드 코로나시대 한국교회의 방향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아쉽게도 한국교회는 코로나라는 위기의 시대에 선교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몇몇 교회들의 부적절한 대응으로 한국교회 전체 이미지가 실추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잘 대처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제 한국사회는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위드 코로나라고 해서 코로나가 끝난 것은 아니다. 의학계에서는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더 강한 전염병이 올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앞으로 한국교회의 목회방향은 전염병이 돌고 있는 상황에서도 성도들의 영적 생활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중심/교제중심의 목회를 해 온 것 같다. 교회에 자주 나와 얼굴이 보이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했고, 성도들과 잘 어울리고 다양한 공동체 활동을 하는 사람을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교회의 문은 닫아야만 했고 성도들과의 교제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그렇게 믿음(?) 좋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교회의 부흥이 곧 개인 영성의 부흥으로 연결하는 목회를 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성도들과 만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홀로서기 영성훈련을 해야 한다. 말씀묵상(QT)이나 성경읽기, 성경쓰기 등이 좋은 예일 것이다. 필자 교회는 오히려 코로나 상황에서 성경읽기(10독 이상 15명)와 온라인 성경공부(80여명)가 더 활성화가 되어 많은 성도들이 즐겁게 참여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을 만날 수 없게 되면서 개인 영성훈련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이 주어진 것이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 방향은 숫자로 평가하는 교회 부흥보다는 가장 기본이 되는 개인 영성 훈련을 통해 혼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성도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필자 교회는 매달 첫 주는 어른들과 교회학교(다음세대) 어린이들이 함께 드리는 세대통합예배를 드렸다.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더 이상 세대통합예배를 드리진 못하지만 세대통합 목회에 대해 강조점을 두고 목회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가정 안에서의 신앙교육은 사라졌다. 자녀를 교회학교에 맡기고, 교사들에게 자녀의 신앙을 책임지라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되면서 교회학교는 문을 닫았고 교사들 역시 교회에서 다음 세대들을 만날 수 없게 되니 이들의 신앙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유일하게 서로 만날 수 있는 곳은 가정이다. 부모와 자녀들이 가정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렇기에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가정 중심의 세대통합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담임목사의 메시지로 부모들은 설교를 듣고, 교회학교에서는 이 메시지로 공과를 만들어 현장과 온라인으로 교육을 한다. 주중에서는 이 메시지로 부모님과 자녀들이 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며 고백과 간증을 나누고,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축복 안수기도를 한다.   위드 코로나 시대 목회는 기본이 충실한 목회여야 한다. 교인 숫자 늘리기 목회가 아닌 성도 개개인이 험한 시대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개인 영성을 강화하는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교회는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일어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가정이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예배하는 곳이 되도록 목회해야 할 것이다. “위드 코로나” 목회에 “위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 /기감 중부연회 감독·효성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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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3
  • 생명을 치유하고 회복케 하는 새해
    코로나 19가 한창이지만, 우리나라는 2021년에 선진국 지위로 올라섰고, 여러 가지 면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일으켰다. 넷플릭스 덕분에 오징어 게임이라는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지만, 반대로 오징어 게임 덕분에 넷플릭스는 비 영어권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서로 윈윈하는 좋은 사례가 된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세상은 재빠르게 재편되고 있는데, 특별히 온라인으로 접속하고 활동하는 가상 세계의 변화가 눈에 두드러진다. 컴퓨터 상에서 활약하는 가상의 인물인 인공 인간이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가상공간에서 무한히 펼쳐지는 메타버스의 세계 속에서 대체 불가능 토큰(NFT)인 가상 자산을 이용해 경제 활동을 하고, 디지털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창작자들은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는 기후 위기라고 하는 매우 심각한 위협 앞에 놓여 있고,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는 지속적인 저출산 고령화와 지방의 소멸이라고 하는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들도 있다. 이런 세상의 변화와 과제 앞에서 우리의 중장기 계획은 어떠해야 하며, 또 2022년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앞으로 우리 모두가 가야하는 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이 시편에 있다. “너희는 힘 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나 물질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희망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나그네를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주님이 누구이신 줄 정확하게 알고 그 분을 따르며 그 분께 희망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살고 늙고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만, 급작스런 죽음은 살아남은 이들을 당황하게 한다. 동시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한 사람의 삶을 기억하고 그를 주님의 품으로 보내는 예식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삶도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 앞으로 불려갈 우리들의 마지막은 과연 어떨까? 준비 없이 당하고야 마는 죽음, 삶의 끝일까? 아니면 충실한 일상을 살았기에 도달하는 삶의 완성일까?   우리 고유의 전통에 따라 새해가 되면 서로에게 덕담을 한다. 가슴 설레며 새해를 맞이하며 서로의 계획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새해 아침을 맞아 설렘만이 아니라 두려움도 나눠야 할 것 같다. 산맥을 뚫고 나오는 뜨겁고 뭉클한 더 빨간 햇덩이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지만, 추운 겨울 깊은 산속에 무겁게 내리누르는 폭설과 깊은 울음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감정에 더하여, 우리의 삶 한구석에서 늘 우리를 떨게 만드는 불안에 대해서도 속 터놓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새해를 여는 날들이지만 푸근하고 편안한 말씀만이 아니라, 걱정스런 말들도 나누어야 한다.   이 모두가 생명을 치유하고, 모든 것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과정들을 통해서 서로의 신뢰가 두터워지고, 믿음이 굳세지고, 사랑이 깊어지며, 주님을 향한 열정이 타오르게 될 것임을 믿는다. 2022년도 오로지 주님을 의지하여 날마다 구원을 이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북한다./생명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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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26
  • 한국교회여, 평화통일의 ‘마중물’ 역할을 하라
      지금의 시대를 구약으로 말하면 메대가 쇠하고 파사가 흥하는 시대와 같다. 그래서 이스라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벨론 유수가 끝난 것은 시대의 거대한 전환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가 어떤 의미에서 시대적 전환기인가? 무엇보다 ‘제국’이 쇠하는 시대이다. 1980년 대 후반 냉전이 무너지고 미국의 일국패권이 지속됐는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패권은 쇠하기 시작했다. 결국 2021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고, 이라크에서도 철수했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과연 무엇을 얻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좌파 정권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올해 브라질 대선에서도 ‘핑크 타이드’의 바람이 불지 관심이 몰리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미국의 지배와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은 내부의 분열로 사실상 ‘내전상태’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미국의 위상이 그전만 못하다. 이 모든 변화들이 그동안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미국이라는 제국의 쇠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는 평화통일의 정세가 조성되고 있다. 그 첩경은 종전선언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뚜렷한 성과는 보이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권은 종전선언에 미온적인 미국을 설득하고 있다.   여전히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미국은 대북 적대정책을 고수하고 있고, 이에 대해 북한은 핵무력 강화로 나가고 있다. 그나마 종전선언에 북한이 흥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종전선언과 평화의 불씨를 어떻게 살리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평화통일을 향한 교회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두 갈래로 해야 한다. 먼저 미국의 조야를 설득하고, 미국교회와 시민단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미국교회는 대단히 평화지향적이다. 또 미국의 시민사회를 움직여 집권자들이 평화의 정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음으로 남북관계에서 남한의 교회들은 북한의 교회들과 관계개선과 교류에 힘써야 한다. 물론 현재로서는 북미관계,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큰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더 큰 어려움에 빠져있다.   그러나 교류를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다. 한국교회는 평화와 변화의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복음이고, 신앙의 힘이다. 모두가 희망이 없다고 할 때, 신앙은 거기에 희망과 소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통일운동을 전개함에 있어 연합기구이건 개인이건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통일운동을 전개해야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분명한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교회협은 그동안 한국교회 통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진행했다. 그만큼의 역사적 데이터가 있기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한다.   한교총은 한국교회의 가장 큰 연합기구로 성장했다. 과거 한기총이 보여줬던 극단성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화통일운동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짧기에 한계는 분명 있다. 그러므로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는 교회협과 실천력이 있는 한교총이 서로 함께 통일운동에 나서야 한다.   또한 현장운동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동안 노력에 비해 특별한 성과가 없었기에 허무감과 회의감이 팽배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다시 현장이 살아나야 한다. 민족의 역사를 생각하며 우리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바라보며 희망을 놓지 말자.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이 세대는 평화통일운동에 관심이 없고 극단적 개인주의에 빠져있는데,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한국교회의 고유한 자기전통을 전수해줘야 한다. /목사·기독교평화연구소 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2-01-13
  • 두려움과 신뢰 사이에서
    목양실을 둘러보면 벽에 걸어 놓은 교회 달력 외에는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데 새해가 도착했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새는 하늘을 날았고, 말은 들판을 달렸고, 하다못해 굼벵이도 열심히 구르다가 도착한 새해를 만났다. 저쪽에서 꿈쩍 않고 묵묵히 한쪽 자리를 지키며 풍상을 이겨온 바위에게도 이미 새해이다. 그렇게 새해가 온 세상에 도착했다. 2022년 새해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걸어올까? 궁금하다. 희망과 기대, 아니면 희망 실종과 기대 무산. 2년 동안 같이 살아온 지겨운(?) 코로나는 오미크론이라는 새로운 변종 이름을 붙이고, 다시 파도처럼 한 해를 점령하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는 각자 다 다르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두려움과 신뢰 사이 어디쯤에서 살아간다. 인간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두려움은 우리 일상의 삶에서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천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노르웨이 초현실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1863-1944)는 어렸을 때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살았다. 저녁노을 붉게 물든 하늘과 거무스런 대지, 두 자연의 색깔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 사이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리치는 한 인간의 두려움. 그의 절규(The Scream)라는 그림에서 절정을 이룬다.    성경은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뢰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우리에게 펼쳐 보여준다. 우리의 인생은 좋은 길만 따라가는 자동항법 장치에 따라 밤하늘을 날아가는 장거리 비행기가 아니며, 도로 위를 알아서 가는 자율주행 차량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임의 변수가 많은 바다 위에서 항해를 한다. 갈릴리 바다에 배 한 척이 떠 있다. 유람선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이름의 배다. 일이 일어난 그날,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마 8:18)하셨다. 풍랑이 일지 모르는 바다를 배타고 건너가는 것은, 제자들 스스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제안한 일도 아니었다. 여지없이 풍랑이 일어났다. 그 여정을 계획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띄우는 한 해의 인생의 배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다시스로 내빼다가 풍랑을 만난 요나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는 거친 풍랑의 한 가운데서 배 밑창까지 내려가 숨었으나 그 두려움의 원인이 어디에서 온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날 제자들이 만난 갈릴리 바다에서의 풍랑은 다시스로 가는 바다 풍랑하고는 달랐다. 갈릴리 풍랑은 불순종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순종의 결과였다. 그래도 풍랑 치는 바다는 두려운 것이다. 풍랑 치는 세상은 정돈된 삶과 희망의 항로를 혼란시키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탄 배의 어촌계 등록 주인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정한 주인은 그 안에 누워계신 예수님이시다.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잠잠케 하시는 그 분이 온 세상과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다. 바다가 그렇듯 우리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기에 여기에 신뢰가 작동해야 한다.    우리는 한평생 두려움과 신뢰 사이에서 어딘가에 위치해서 살아간다. 신뢰는 의지하는 힘이다. 가는 길에 수북하게 쌓인 의심을 거둬내고 낙심에 기죽지 않으며 힘이다. 신뢰가 커지면 두려움이 작아지고 마침내 죽음이라는 최종 두려움마저도 사라진다. 이것이 배는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신뢰이다. 평상시에는 우리에게 있는 신뢰의 정도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 바다에 풍랑이 일면 비로소 신뢰가 입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신뢰와 믿음은 면적이 아니라 체적이다. 도화지 펴놓고 색칠 예쁘게 한 평면 그림이 아니라 거칠지만, 삶 속에서 만들어진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있는 그릇이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고척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2-29
  • 다사다난한 한해를 보내며
      2년째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가 공동화(空同化) 현상에 직면해 있는 가운데 또다시 계절은 바뀌어 눈발이 흩날리는 나목(裸木)의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눈이 내린다는 것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 계절이 되었다는 시그널이기도 합니다. 코로나가 온통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역사를 움직이려는 군불은 계속 지펴지고 있을 것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듯 어떤 다크호스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지, 아니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엄청난 사건 사고들이 터져 역사의 판도를 바꿀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사 없는 인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능력이 출중한 천재적인 어떤 한 두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범부(凡夫)들이 일구어낸 삶도 역사의 한 부분이 됩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내려다본 역사도 중요하지만, 거인의 다리 사이로 바라본 소시민들의 세상도 엄연히 역사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인간사회가 거쳐 온 변천의 모습, 또는 그 기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분명 우리가 역사의 주체이건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예 역사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권리를 알지 못한 채 포기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인간들의 행태를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였습니다. 마치 운전하다가 길을 잃고 잘못 들어섰으면 멈춘 다음 위치를 확인하고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일진대 오히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속도를 높인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질주하여 도달한 곳은 어디가 될까요?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역사는 현재이고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라는 그 속에는 오늘의 내 자화상이 들어 있고 미래의 우리들의 모습이 들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결단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인과관계(因果關係)의 그물망이 됩니다. 그러기에 독불장군처럼 돈키호테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나누며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야 후대가 우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줄 것이고 이것이 가풍(家風)이 되어 명문가를 이루게 되고, 이 사회의 전통과 문화가 되어 아름다운 일류국가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손에는 역사라는 실 꾸러미가 들려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가면서 인간사회가 거쳐 온 과거라는 역사의 이름 아래 새롭게 옷을 짤 기회를 줍니다. 역사는 공시적(共時的)이면서 동시에 통시적(通時的)인 인과관계를 깨달을 수 있게 하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며칠 전 미국 켄터키주에 몰아닥친 토네이도의 시원(始原)은 이미 아마존 정글의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에서부터 시작되었듯이 현재 진행형인 수많은 사건과 테러,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죄악과 무분별한 난(亂) 개발이 빚어낸 결과물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함이 필요합니다.   역사는 사건이나 인물을 기억하고 년도를 암기하는 과목이 아닙니다. 역사는 우리 각자가 깊이 고뇌하며 마음 깊이 되새겨야 하는 역동성입니다.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사람만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멈출 수 있고 전후좌우를 살피어 창조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한해라고 하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을 보내며 다시금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역사의식을 고취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래야 카이로스(Kairos)의 때에 있어야 할 자리에서 지혜롭게 사명을 감당하여 잘했다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개인과 가정, 교회와 이 나라에 지난날 애굽에서의 수치와 실패는 ‘길갈’(굴러감)하고 므낫세(잊어버림)하며, 다가올 새해엔 ‘에브라임’(창성함)의 은총만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예장 한신측 부총회장·예향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12-26
  • 한 해를 보내며
    역사 없는 인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능력이 출중한 천재적인 어떤 한 두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범부(凡夫)들이 일구어낸 삶도 역사의 한 부분이 됩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내려다본 역사도 중요하지만, 거인의 다리 사이로 바라본 소시민들의 세상도 엄연히 역사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인간사회가 거쳐 온 변천의 모습, 또는 그 기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분명 우리가 역사의 주체이건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예 역사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권리를 알지 못한 채 포기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인간들의 행태를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였습니다. 마치 운전하다가 길을 잃고 잘못 들어섰으면 멈춘 다음 위치를 확인하고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일진대 오히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속도를 높인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질주하여 도달한 곳은 어디가 될까요?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역사는 현재이고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라는 그 속에는 오늘의 내 자화상이 들어 있고 미래의 우리들의 모습이 들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결단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인과관계(因果關係)의 그물망이 됩니다. 그러기에 독불장군처럼 돈키호테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나누며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야 후대가 우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줄 것이고 이것이 가풍(家風)이 되어 명문가를 이루게 되고, 이 사회의 전통과 문화가 되어 아름다운 일류국가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손에는 역사라는 실 꾸러미가 들려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가면서 인간사회가 거쳐 온 과거라는 역사의 이름 아래 새롭게 옷을 짤 기회를 줍니다. 역사는 공시적(共時的)이면서 동시에 통시적(通時的)인 인과관계를 깨달을 수 있게 하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며칠 전 미국 켄터키주에 몰아닥친 토네이도의 시원(始原)은 이미 아마존 정글의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에서부터 시작되었듯이 현재 진행형인 수많은 사건과 테러,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죄악과 무분별한 난(亂) 개발이 빚어낸 결과물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함이 필요합니다.   역사는 사건이나 인물을 기억하고 년도를 암기하는 과목이 아닙니다. 역사는 우리 각자가 깊이 고뇌하며 마음 깊이 되새겨야 하는 역동성입니다.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사람만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멈출 수 있고 전후좌우를 살피어 창조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한해라고 하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을 보내며 다시금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역사의식을 고취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래야 카이로스(Kairos)의 때에 있어야 할 자리에서 지혜롭게 사명을 감당하여 잘했다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개인과 가정, 교회와 이 나라에 지난날 애굽에서의 수치와 실패는 ‘길갈’(굴러감)하고 므낫세(잊어버림)하며, 다가올 새해엔 ‘에브라임’(창성함)의 은총만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예향교회 담임목사•예장 합동한신 부총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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