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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부터 이어지는 나눔
장규영 / 구세군 대한본영 홍보부장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중요한 고백 가운데 하나가 ‘감사’일 것이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주심에 대한 감사, 우리 삶에서 매 순간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고백하는 감사, 좀 더 깊이 강조하면 매 순간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감사일 것이다. 추수감사절은 단순히 한 해의 풍성한 결실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그보다 더 깊이 있는 ‘하나님 은혜의 고백의 절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수장절’을 지키며 곡식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인정하는 예배’로 감사의 고백을 드렸다. 그러니까 풍요를 자랑하는 날로 여긴 것이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고 교만을 경계하는 신앙의 훈련이었던 것이다. 신명기 8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감사는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한 기억의 행위임을 알 수 있다.대구에서 목회를 할 때 일이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교인들 여러 명이 둘러 앉아서 강단에 장식할 과일, 채소, 농작물을 어떻게 배치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모두 마트로 이동해서 한 가득 사가지고 와서 강단 앞을 풍성하게 장식했다. 또 어떤 분들은 직접 본인이 농사를 짓지 않으니값 비싸고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며 마찬가지로 마트에서 구입한 과일을 강단에 놓았다. 모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감사의 방법인 것이다. 예배를 마친 후 모든 교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제안을 했다.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는 농사를 짓는 분이 한 분도 없으니, 마트에서 산 물건으로 강단을 장식하기보다, 여러분의 마음과 정성을 모아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좋은 음식을 나누는 것은 어떨까요?” 이 제안에 어떤 반응을 했겠는가. 모두 흔쾌히 동참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누었던 말씀이 시편 112편 5, 9절이다.“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의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가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은혜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삶에서 존재하고 지속적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행할 수 있게 된 것에 평소의 감사보다 더한 감사가 고백되는 결정이었다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의 절기마다 단순히 하나님께만 감사하지 않았다.하나님의 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것이 감사의 완성이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누려야 할 은혜”인 것이다. 이 절기의 정신이 바로 오늘날 추수감사절 구제와 나눔의 기원이다. 그 후로 여전히 추수감사절은 은혜를 기억하고 나누는 은혜를 더하는 교회가 되었다. 감사는 형편이 아니라 믿음의 방향에서 나온다.풍요로움 속에서 감사하는 것은 세상도 하는 것이지만, 결핍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는 오직 믿음의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귀한 고백이다. 나에게 풍요로움을 주셨어도, 혹은 그렇지 않았다 할지라도 항상 북쪽을 가르키는 나침반처럼 믿음의 방향은 항상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도록 우리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신앙의 고백은 ‘감사’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으심을 온 몸으로 느끼며 오늘도 감사의 삶이 지속되는 풍요로움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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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큰 감사
감사의 계절인 가을이 돌아오면 누구나 감사의 주제를 떠올린다. 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며 여러 사람에게 문안하면서, 특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감사하고 있다(롬 16:3-4). 더 나아가서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 부부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바울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역자”(롬 16:3)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바울을 죽이려고 고소한 사람들은 벨릭스 총독에게 거짓으로 위장한 감사를 드린 일(행 24:3)도 있었으니, 우리가 사람에게 거짓 감사로 눈속임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감사의 상황이다. 특히 바울은 다양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감사할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살전 3:9). 그러므로 바울은 헌금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해야 할 것을 권면한다(고후 9:11-12). 또한 바울은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감사(고후 4:15)하고,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한다(고전 14:18). 경우에 따라서 바울은 날을 중히 여기는 자와 제단의 음식을 먹는 자도 혹은 반대로 먹지 않는 자도 감사함으로 행동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롬 14:6). 이는 자발적인 신앙생활을 촉구하는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분을 주신 것도 감사를 드리며(딤전 1:12), 더 나아가서 무엇을 하든지 감사를 드려야 한다(골 3: 17).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감사하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유카리스토’라는 단어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예수의 성만찬 예식에 똑 같이 사용되고 있다(눅 22:17; 고전 11:24). 그래서 성만찬 예식을 그리스어에서 따다가 영어로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에게 가장 큰 감사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사건에 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구원사건을 기념하는 성만찬 예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가장 큰 감사를 드릴 수 있다. 방지일 목사의 말씀 중에, 자신에게 가장 큰 감사는 죄 용서에 대한 것이라고 설교한 대목이 있다. 우리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면서, 감격해하는 이유는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으로 감사를 드릴까? 소유로 감사를 드린다면, 경제적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지난 여름 수해현장에서 확인한 결과에 의하면, 처참하게 무너진 수해지역의 주민들이 오히려 자원봉사자들을 향해서 감사하다는 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수해에 생명을 잃은 이들도 많았는데, 자신들은 이렇게 몸이나마 성하니 감사하다는 것이 아닐까? 감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다시 감사절이 다가온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솟구쳐 오른다. 오늘 미천한 생명이지만, 다시 나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가장 귀한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는 지금도 우리 하나 하나를 기억하시며, 사랑의 목자로서 우리의 길을 수유의 선상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앞으로 누릴 영생의 약속까지...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모든 부분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귀한 생명을 주셔서 살게하심으로 너무나도 과분한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길을 가면서도 입을 열어서 자주 말해보자. 입술에 감사와 찬양의 열매가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해요! 나는 죄인입니다. 생명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한국교회 정론대표·예수말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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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녹색은총에 대한 감사
기독교인이 갖는 기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분으로 이 가을 추수기를 맞아 하나님의 은총에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적색은총과 녹색은총이다. 적색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죄가 용서받고 주님 안에서 의인이 되게 하는 은총으로, 상당히 영적인 의미의 은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런 적색은총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녹색은총도 주어져 있다. 녹색은총이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으로 이 지구를 통해 얻는 모든 물질들이 이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주셨으며, 비를 내려주시고,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공기 중에 산소가 없다면 우리는 단 몇 분만에 목숨을 잃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이 공기를 주신 것으로 이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만약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 땅은 수확을 내질 못할 것이며 우리는 다 굶어 죽게 될 것인바, 때에 따라 우리에게 비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노동을 통해 모든 쓸 것들을 공급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공장에서 나오는 걸로 착각할 때가 많은데, 실질적으론 이 땅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내주고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이 땅이 우리에게 준 것에 약간의 노동력을 더하여 우리에게 좀 더 편리한 물건으로 만들어 쓰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공산품의 대표격인 차를 생각해보자. 그 차를 구성하고 있는 강철, 플라스틱, 유리 등 모든 것이 다 이 땅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좀 변형하여 쓰기는 하지만, 우리가 철을 만들고, 유리를 만들며,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석유를 만들 수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으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고 착각할 때가 많은데, 살피면 살필수록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은혜의 덕분에 목숨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미물의 하나인 바퀴벌레 한 마리도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없다. 그와 같은 생명을 가진 벌레 한 마리도 만들 수 없는 우리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창조의 힘을 다시 찬양하게 된다. 이 가을 우리는 들판에 가득 찬 오곡백과들을 본다. 나의 힘으로 이것을 수확한 것이 아니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 자연에 살며 주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금년의 추수감사절에도 우리를 먹이시는 주님의 은혜를 다시 바라보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가 없이 주신 이 자연이 나 자신만을 위한 나 자신의 것인 양 살 때가 많다. 이 자연의 선물들은 내가 노력하여 얻은 것이 아닌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녹색은총을 나 혼자의 것으로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땅도 우리만을 위한 주거지이기보다는 서로 나누어야 할 대상이며,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이웃과 나누어야 할 것으로 알고, 감사의 나눔이 있는 이 추수감사절이 되어야겠다. / 총회한국교회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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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종교개혁과 오늘의 교회 공동체
오늘의 세계는 평화와 안전, 성장과 번영, 그리고 ‘자신감’이라는 단 하나의 신호로 정치·경제·사회·교육의 흐름을 빠르게 예측하려 한다.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일상이 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갖고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세계 경제는 이제 데이터보다 ‘확신’으로 움직이며, 그 뒤에 숨은 감정의 파동은 예측할 수 없는 충격을 준다. AI 관련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들은 줄어들고, 대신 기술과 세속사회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내면의 신호를 포착하라”는 메시지에 더 많이 이끌리고 있다. 더 나아가 현대는 기술이 국경이 되고, 경제가 무기가 되는 시대 속에 우리는 ‘제2차 냉전’이라 불리는 새로운 질서 속에 살아간다. 21세기 냉전의 파고는 지정학적 갈등을 넘어 경제, 금융, 공급망, 기술, 안보 전반의 영역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방심하거나, 선한 의도를 가지고도 행동하지 않으면 악이 활개 치는 현실이 된다. 공동체의 부패와 공모 구조 속에서 정직과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세상이 불확실하다고 해서 모든 교회가 방향을 잃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히려 보다 나은 교회 공동체 회복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변화와 개혁의 영성 곧 말씀과 기도로 대응하는 것이다. 교회와 사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공동체를 세우려 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끝없는 개혁’(“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외치며 교회와 세상의 어둠을 밝힌 교회 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그의 외침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울림이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루터 이후, 칼뱅은 성경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칭의 이후의 삶을 성령 내주하심에 의한 성화와 삶의 개혁 여정으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오직 성경’이라는 신앙의 유일한 근거를 확립하였다. 칼뱅의 사상은 예정론과 성화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 칼뱅은 사회 속에서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 멈추지 않고 사회와 정치, 경제와 교육, 지정학적 경계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생활의 관점에서 교회와 사회 개혁, 신자의 삶과 연결했다. 이는 오늘날 성경을 기초로 한 신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적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루터와 칼뱅은 교회 개혁을 넘어 삶과 사회 전체의 개혁을 추구했다. 그들의 복음은 사회 변혁으로 이어졌고, 신앙의 열정은 어두운 세상을 새롭게 했다. 루터, 칼뱅은 모두 이원론적 신앙을 넘어, 일원론적 신앙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했다. 종교 개혁자는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도 성령의 확신으로 새로운 ‘통찰’을 주었다. 그 확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믿음”이었다. 오늘 교회는 매년, 종교개혁 기념의 달 10월마다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오늘 교회는 개혁되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은 예수의 정신으로 가득한가?” “예배는 말씀에 대한 충실한 응답과 찬양으로 충만한가?” “믿음은 세상 속에서 살아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등이다. 루터와 칼뱅은 단지 교회의 전통적 제도와 교리를 개혁한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사회 전 영역에 실천한 참된 개혁자였다. 이들의 종교개혁 운동은 16세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 요청이다. 종교개혁 508주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는 다시 그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위에 설 때, 오늘의 교회 공동체는 다시 살아나 성령의 바람과 생명의 불길을 일으키게 된다./한국칼빈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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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이 때를 위하여 일어나라!
뷰카라는 시대 상황 복잡다단한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위해 신조어가 생겼으니 이른바 VUCA: 즉 불안정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을 그 특징으로 한다. 급변하는 시대상황을 파악하고 만든 용어이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 현대 세계 정세는 유감스럽게도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자행하는 자국이기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변형된 파시즘, 극좌의 선동과 극우의 부상 등등. 이런 결과 세계 곳곳에서 선진국이라는 자들이 벌이는 전쟁을 3차 세계대전의 서막과 같은 불안감을 짙게 하고 있다. 지구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있는 실감이 든다. 우리는 내우외환(內憂外患) 그런 시대적 징후 속에서 대한민국은 어떤가. 우리도 예외없이 그런 와중에 깊이 들어와 있다. 뷰카 VUCA 속 내우외환.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분열의 고질병은 이미 조선시대 사화와 당파싸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동인서인, 남인북인, 노론소론으로 나눠어져 피비린내 나는 정파투쟁을 벌인 과거가 있다. 이 분열이 치유되지 못하자 실학사상은 그야말로 미완의 실험으로 끝나고 구한말을 맞는다. 하지만 허약해진 나라가 어찌 열강의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일본제국주의에 제물이 되고 수탈당하니 국력은 그야말로 피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8.15 독립으로 백성들이 민심을 추스르는가 했더니 열강의 이데올로기로 6.25 전쟁이라는 막심한 피해를 보게 된다. 이로서 대한민국 영토 안에 좌우 대립이 극명해지고, 현재는 진보, 보수를 표방하는 대의명분은 희박해지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치는 정치판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여기에 느닷없는 계엄령, 관세 전쟁이라니, 실로 내우외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때를 위한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 세상은 이렇게 소란하고 요동치고 있다. 마치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 그 세상같다. 메시야 오셨다는 소식에 오히려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마 2:2). 진리의 빛이 오셨는데 세상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하여 정작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형국이다(요 1:10-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근거로 주셨으니, 그 십자가 사랑으로 인해 세워진 교회, 곧 세상을 위한 빛의 등대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의 보혈로 세워진 교회는 혼란한 시대의 마지막 보루가 되신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이제 믿음으로 ‘남은 자’들이 성도(聖徒)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때, 교회는 교회 될 것이요,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하리라. 교회는 곧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에 4:14).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참회의 영을 부어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거룩과 진실, 사랑과 공평(공의와 평화)을 회복하며, 나라의 분열을 치유하고, 복음통일 하는 역사를 허락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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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
국제 연합은 10월 1일을 ‘국제 노인의 날’로 제정하였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10월 1일을 ‘노인의 날’로 제정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10월 1일은 이미 ‘국군의 날’로 지정되었기에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지정하였다. 더불어 10월을 ‘경로의 달’로 지정하였다. 이번 10월의 6일은 특별히 우리나라의 고유 명절인 추석이다. 추석이 되면 민족의 대이동이 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요즈음 가족들이 함께 모인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임에도 서로 대화를 나누는 중, 자칫 사소한 말싸움이 후에는 심각한 가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특별히 최근에는 가족끼리라도 아주 민감한 우리나라의 정치를 이야기하면 마치 양당 체제처럼 서로 나뉘어 논쟁한다. 그러면 가족이라도 예민한 주제는 아예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말아야 할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끝에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그리고 종과 상전에 대한 서로의 태도에 대해 권면한다(엡 5:22-6:9). 이런 이유로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말씀을 ‘가정 준칙’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가정 준칙에는 먼저 한 가지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에베소서 5장 21절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라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면 결코 경솔하게 대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태도와 말로 대한다. 그러므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는 서로를 대할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와 말로 행동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우리 주변의 이웃에게도 확장하라는 권면이다. 사실 태도는 곧 그 사람의 자체이다.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속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가정 준칙의 말씀 뒤에 그 유명한 영적 전쟁에 대한 권면(엡 6:10-20)을 덧붙인다. 올바른 삶의 태도를 먼저 갖출 때 비로소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에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올해 추석 연휴는 10월 3일 개천절과 10월 9일 한글날이 합쳐져 최대 10일까지로 매우 길다.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서로에게 경솔하게 대할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서, 자녀는 부모가 편해서. 하지만 사랑해서 편해서 무심코 던진 말과 태도에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그러므로 이번 추석에는 가족을 대할 때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서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대하자. 그러면 분명히 감사하고 화목한 추석 연휴를 보내게 될 것이다. 또한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하더라도, 가족끼리 예민한 주제를 논하더라도 상대방을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서로를 대하면 다툼과 상처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이다. 끝으로 10월이 ‘경로의 달’인만큼, 자녀들은 그래도 삶을 오래 산 어른의 지혜에 먼저 귀를 기울이자. 또한 어른들은 젊은 세대를 그저 훈계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경청하며 격려하자.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대하는 나의 태도가 곧 이웃과 국가를 대하는 태도를 형성한다./팔복루터교회 목사·NCCK 에큐메니칼신학과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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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부터 이어지는 나눔
- 장규영 / 구세군 대한본영 홍보부장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중요한 고백 가운데 하나가 ‘감사’일 것이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주심에 대한 감사, 우리 삶에서 매 순간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고백하는 감사, 좀 더 깊이 강조하면 매 순간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감사일 것이다. 추수감사절은 단순히 한 해의 풍성한 결실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그보다 더 깊이 있는 ‘하나님 은혜의 고백의 절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수장절’을 지키며 곡식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인정하는 예배’로 감사의 고백을 드렸다. 그러니까 풍요를 자랑하는 날로 여긴 것이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고 교만을 경계하는 신앙의 훈련이었던 것이다. 신명기 8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감사는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한 기억의 행위임을 알 수 있다.대구에서 목회를 할 때 일이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교인들 여러 명이 둘러 앉아서 강단에 장식할 과일, 채소, 농작물을 어떻게 배치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모두 마트로 이동해서 한 가득 사가지고 와서 강단 앞을 풍성하게 장식했다. 또 어떤 분들은 직접 본인이 농사를 짓지 않으니값 비싸고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며 마찬가지로 마트에서 구입한 과일을 강단에 놓았다. 모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감사의 방법인 것이다. 예배를 마친 후 모든 교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제안을 했다.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는 농사를 짓는 분이 한 분도 없으니, 마트에서 산 물건으로 강단을 장식하기보다, 여러분의 마음과 정성을 모아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좋은 음식을 나누는 것은 어떨까요?” 이 제안에 어떤 반응을 했겠는가. 모두 흔쾌히 동참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누었던 말씀이 시편 112편 5, 9절이다.“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의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가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 은혜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삶에서 존재하고 지속적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행할 수 있게 된 것에 평소의 감사보다 더한 감사가 고백되는 결정이었다라고 생각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의 절기마다 단순히 하나님께만 감사하지 않았다.하나님의 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것이 감사의 완성이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누려야 할 은혜”인 것이다. 이 절기의 정신이 바로 오늘날 추수감사절 구제와 나눔의 기원이다. 그 후로 여전히 추수감사절은 은혜를 기억하고 나누는 은혜를 더하는 교회가 되었다. 감사는 형편이 아니라 믿음의 방향에서 나온다.풍요로움 속에서 감사하는 것은 세상도 하는 것이지만, 결핍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는 오직 믿음의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귀한 고백이다. 나에게 풍요로움을 주셨어도, 혹은 그렇지 않았다 할지라도 항상 북쪽을 가르키는 나침반처럼 믿음의 방향은 항상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도록 우리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신앙의 고백은 ‘감사’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으심을 온 몸으로 느끼며 오늘도 감사의 삶이 지속되는 풍요로움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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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부터 이어지는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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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큰 감사
- 감사의 계절인 가을이 돌아오면 누구나 감사의 주제를 떠올린다. 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며 여러 사람에게 문안하면서, 특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감사하고 있다(롬 16:3-4). 더 나아가서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 부부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바울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동역자”(롬 16:3)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바울을 죽이려고 고소한 사람들은 벨릭스 총독에게 거짓으로 위장한 감사를 드린 일(행 24:3)도 있었으니, 우리가 사람에게 거짓 감사로 눈속임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감사의 상황이다. 특히 바울은 다양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감사할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살전 3:9). 그러므로 바울은 헌금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해야 할 것을 권면한다(고후 9:11-12). 또한 바울은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감사(고후 4:15)하고,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한다(고전 14:18). 경우에 따라서 바울은 날을 중히 여기는 자와 제단의 음식을 먹는 자도 혹은 반대로 먹지 않는 자도 감사함으로 행동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롬 14:6). 이는 자발적인 신앙생활을 촉구하는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분을 주신 것도 감사를 드리며(딤전 1:12), 더 나아가서 무엇을 하든지 감사를 드려야 한다(골 3: 17).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감사하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유카리스토’라는 단어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예수의 성만찬 예식에 똑 같이 사용되고 있다(눅 22:17; 고전 11:24). 그래서 성만찬 예식을 그리스어에서 따다가 영어로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에게 가장 큰 감사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사건에 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구원사건을 기념하는 성만찬 예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가장 큰 감사를 드릴 수 있다. 방지일 목사의 말씀 중에, 자신에게 가장 큰 감사는 죄 용서에 대한 것이라고 설교한 대목이 있다. 우리가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면서, 감격해하는 이유는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으로 감사를 드릴까? 소유로 감사를 드린다면, 경제적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지난 여름 수해현장에서 확인한 결과에 의하면, 처참하게 무너진 수해지역의 주민들이 오히려 자원봉사자들을 향해서 감사하다는 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수해에 생명을 잃은 이들도 많았는데, 자신들은 이렇게 몸이나마 성하니 감사하다는 것이 아닐까? 감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다시 감사절이 다가온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솟구쳐 오른다. 오늘 미천한 생명이지만, 다시 나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가장 귀한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는 지금도 우리 하나 하나를 기억하시며, 사랑의 목자로서 우리의 길을 수유의 선상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앞으로 누릴 영생의 약속까지...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모든 부분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귀한 생명을 주셔서 살게하심으로 너무나도 과분한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길을 가면서도 입을 열어서 자주 말해보자. 입술에 감사와 찬양의 열매가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해요! 나는 죄인입니다. 생명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한국교회 정론대표·예수말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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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큰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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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녹색은총에 대한 감사
- 기독교인이 갖는 기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분으로 이 가을 추수기를 맞아 하나님의 은총에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적색은총과 녹색은총이다. 적색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죄가 용서받고 주님 안에서 의인이 되게 하는 은총으로, 상당히 영적인 의미의 은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런 적색은총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녹색은총도 주어져 있다. 녹색은총이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으로 이 지구를 통해 얻는 모든 물질들이 이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주셨으며, 비를 내려주시고,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공기 중에 산소가 없다면 우리는 단 몇 분만에 목숨을 잃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이 공기를 주신 것으로 이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만약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 땅은 수확을 내질 못할 것이며 우리는 다 굶어 죽게 될 것인바, 때에 따라 우리에게 비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노동을 통해 모든 쓸 것들을 공급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공장에서 나오는 걸로 착각할 때가 많은데, 실질적으론 이 땅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내주고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이 땅이 우리에게 준 것에 약간의 노동력을 더하여 우리에게 좀 더 편리한 물건으로 만들어 쓰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공산품의 대표격인 차를 생각해보자. 그 차를 구성하고 있는 강철, 플라스틱, 유리 등 모든 것이 다 이 땅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좀 변형하여 쓰기는 하지만, 우리가 철을 만들고, 유리를 만들며,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석유를 만들 수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으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고 착각할 때가 많은데, 살피면 살필수록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은혜의 덕분에 목숨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미물의 하나인 바퀴벌레 한 마리도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없다. 그와 같은 생명을 가진 벌레 한 마리도 만들 수 없는 우리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창조의 힘을 다시 찬양하게 된다. 이 가을 우리는 들판에 가득 찬 오곡백과들을 본다. 나의 힘으로 이것을 수확한 것이 아니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 자연에 살며 주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금년의 추수감사절에도 우리를 먹이시는 주님의 은혜를 다시 바라보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가 없이 주신 이 자연이 나 자신만을 위한 나 자신의 것인 양 살 때가 많다. 이 자연의 선물들은 내가 노력하여 얻은 것이 아닌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녹색은총을 나 혼자의 것으로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땅도 우리만을 위한 주거지이기보다는 서로 나누어야 할 대상이며,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이웃과 나누어야 할 것으로 알고, 감사의 나눔이 있는 이 추수감사절이 되어야겠다. / 총회한국교회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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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녹색은총에 대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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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종교개혁과 오늘의 교회 공동체
- 오늘의 세계는 평화와 안전, 성장과 번영, 그리고 ‘자신감’이라는 단 하나의 신호로 정치·경제·사회·교육의 흐름을 빠르게 예측하려 한다.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일상이 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갖고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세계 경제는 이제 데이터보다 ‘확신’으로 움직이며, 그 뒤에 숨은 감정의 파동은 예측할 수 없는 충격을 준다. AI 관련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들은 줄어들고, 대신 기술과 세속사회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내면의 신호를 포착하라”는 메시지에 더 많이 이끌리고 있다. 더 나아가 현대는 기술이 국경이 되고, 경제가 무기가 되는 시대 속에 우리는 ‘제2차 냉전’이라 불리는 새로운 질서 속에 살아간다. 21세기 냉전의 파고는 지정학적 갈등을 넘어 경제, 금융, 공급망, 기술, 안보 전반의 영역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방심하거나, 선한 의도를 가지고도 행동하지 않으면 악이 활개 치는 현실이 된다. 공동체의 부패와 공모 구조 속에서 정직과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세상이 불확실하다고 해서 모든 교회가 방향을 잃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히려 보다 나은 교회 공동체 회복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변화와 개혁의 영성 곧 말씀과 기도로 대응하는 것이다. 교회와 사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공동체를 세우려 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끝없는 개혁’(“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외치며 교회와 세상의 어둠을 밝힌 교회 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그의 외침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울림이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루터 이후, 칼뱅은 성경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칭의 이후의 삶을 성령 내주하심에 의한 성화와 삶의 개혁 여정으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오직 성경’이라는 신앙의 유일한 근거를 확립하였다. 칼뱅의 사상은 예정론과 성화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 칼뱅은 사회 속에서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 멈추지 않고 사회와 정치, 경제와 교육, 지정학적 경계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생활의 관점에서 교회와 사회 개혁, 신자의 삶과 연결했다. 이는 오늘날 성경을 기초로 한 신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적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루터와 칼뱅은 교회 개혁을 넘어 삶과 사회 전체의 개혁을 추구했다. 그들의 복음은 사회 변혁으로 이어졌고, 신앙의 열정은 어두운 세상을 새롭게 했다. 루터, 칼뱅은 모두 이원론적 신앙을 넘어, 일원론적 신앙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했다. 종교 개혁자는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도 성령의 확신으로 새로운 ‘통찰’을 주었다. 그 확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믿음”이었다. 오늘 교회는 매년, 종교개혁 기념의 달 10월마다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오늘 교회는 개혁되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은 예수의 정신으로 가득한가?” “예배는 말씀에 대한 충실한 응답과 찬양으로 충만한가?” “믿음은 세상 속에서 살아 있는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등이다. 루터와 칼뱅은 단지 교회의 전통적 제도와 교리를 개혁한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사회 전 영역에 실천한 참된 개혁자였다. 이들의 종교개혁 운동은 16세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 요청이다. 종교개혁 508주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는 다시 그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위에 설 때, 오늘의 교회 공동체는 다시 살아나 성령의 바람과 생명의 불길을 일으키게 된다./한국칼빈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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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종교개혁과 오늘의 교회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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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이 때를 위하여 일어나라!
- 뷰카라는 시대 상황 복잡다단한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위해 신조어가 생겼으니 이른바 VUCA: 즉 불안정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을 그 특징으로 한다. 급변하는 시대상황을 파악하고 만든 용어이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 현대 세계 정세는 유감스럽게도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자행하는 자국이기주의, 극단적 민족주의, 변형된 파시즘, 극좌의 선동과 극우의 부상 등등. 이런 결과 세계 곳곳에서 선진국이라는 자들이 벌이는 전쟁을 3차 세계대전의 서막과 같은 불안감을 짙게 하고 있다. 지구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있는 실감이 든다. 우리는 내우외환(內憂外患) 그런 시대적 징후 속에서 대한민국은 어떤가. 우리도 예외없이 그런 와중에 깊이 들어와 있다. 뷰카 VUCA 속 내우외환.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분열의 고질병은 이미 조선시대 사화와 당파싸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동인서인, 남인북인, 노론소론으로 나눠어져 피비린내 나는 정파투쟁을 벌인 과거가 있다. 이 분열이 치유되지 못하자 실학사상은 그야말로 미완의 실험으로 끝나고 구한말을 맞는다. 하지만 허약해진 나라가 어찌 열강의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일본제국주의에 제물이 되고 수탈당하니 국력은 그야말로 피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8.15 독립으로 백성들이 민심을 추스르는가 했더니 열강의 이데올로기로 6.25 전쟁이라는 막심한 피해를 보게 된다. 이로서 대한민국 영토 안에 좌우 대립이 극명해지고, 현재는 진보, 보수를 표방하는 대의명분은 희박해지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치는 정치판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여기에 느닷없는 계엄령, 관세 전쟁이라니, 실로 내우외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때를 위한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 세상은 이렇게 소란하고 요동치고 있다. 마치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 그 세상같다. 메시야 오셨다는 소식에 오히려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마 2:2). 진리의 빛이 오셨는데 세상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하여 정작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형국이다(요 1:10-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근거로 주셨으니, 그 십자가 사랑으로 인해 세워진 교회, 곧 세상을 위한 빛의 등대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의 보혈로 세워진 교회는 혼란한 시대의 마지막 보루가 되신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이제 믿음으로 ‘남은 자’들이 성도(聖徒)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때, 교회는 교회 될 것이요,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하리라. 교회는 곧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에 4:14).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참회의 영을 부어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거룩과 진실, 사랑과 공평(공의와 평화)을 회복하며, 나라의 분열을 치유하고, 복음통일 하는 역사를 허락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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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이 때를 위하여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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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
- 국제 연합은 10월 1일을 ‘국제 노인의 날’로 제정하였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10월 1일을 ‘노인의 날’로 제정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10월 1일은 이미 ‘국군의 날’로 지정되었기에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지정하였다. 더불어 10월을 ‘경로의 달’로 지정하였다. 이번 10월의 6일은 특별히 우리나라의 고유 명절인 추석이다. 추석이 되면 민족의 대이동이 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요즈음 가족들이 함께 모인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임에도 서로 대화를 나누는 중, 자칫 사소한 말싸움이 후에는 심각한 가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특별히 최근에는 가족끼리라도 아주 민감한 우리나라의 정치를 이야기하면 마치 양당 체제처럼 서로 나뉘어 논쟁한다. 그러면 가족이라도 예민한 주제는 아예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말아야 할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끝에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그리고 종과 상전에 대한 서로의 태도에 대해 권면한다(엡 5:22-6:9). 이런 이유로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말씀을 ‘가정 준칙’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가정 준칙에는 먼저 한 가지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에베소서 5장 21절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라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면 결코 경솔하게 대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태도와 말로 대한다. 그러므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는 서로를 대할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와 말로 행동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우리 주변의 이웃에게도 확장하라는 권면이다. 사실 태도는 곧 그 사람의 자체이다.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속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가정 준칙의 말씀 뒤에 그 유명한 영적 전쟁에 대한 권면(엡 6:10-20)을 덧붙인다. 올바른 삶의 태도를 먼저 갖출 때 비로소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에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올해 추석 연휴는 10월 3일 개천절과 10월 9일 한글날이 합쳐져 최대 10일까지로 매우 길다.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서로에게 경솔하게 대할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서, 자녀는 부모가 편해서. 하지만 사랑해서 편해서 무심코 던진 말과 태도에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그러므로 이번 추석에는 가족을 대할 때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서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대하자. 그러면 분명히 감사하고 화목한 추석 연휴를 보내게 될 것이다. 또한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하더라도, 가족끼리 예민한 주제를 논하더라도 상대방을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태도로 서로를 대하면 다툼과 상처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이다. 끝으로 10월이 ‘경로의 달’인만큼, 자녀들은 그래도 삶을 오래 산 어른의 지혜에 먼저 귀를 기울이자. 또한 어른들은 젊은 세대를 그저 훈계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경청하며 격려하자.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대하는 나의 태도가 곧 이웃과 국가를 대하는 태도를 형성한다./팔복루터교회 목사·NCCK 에큐메니칼신학과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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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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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공동체의 축제
- 종교는 공동체 자신의 궁극적 관심을 문화라는 그릇을 통해 드러내며, 복음의 씨는 문화라는 토양을 전제로 성장한다. 그러기에 선교에서 문화를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한국 전통문화 속을 지나면서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 안에서 성장일로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므로 대부분 기독교 교단들은 <대한예수교>나 <한국기독교>로 지칭하면서 ‘기독교’ 앞에 ‘대한’이나 ‘한국’을 넣었다. 이제 기독교는 한민족의 얼과 삶의 자리로 신앙 고백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명절은 조상들의 얼을 신나는 멋으로 그리고 살맛 나는 삶을 찾기 위해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로 한국교회는 토착화했으면 한다. 그러한 축제 문화에서 소외되어 겉도는 것은 결코 기독교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에서도 민속명절을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로 잘 지켜왔다.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아이들은 꼬까옷을 입고, 어른들은 한복차림에 선물을 마련해서 서로 나누었고, 아침에는 온 가족이 모여 하느님과 조상에게 감사를 드리는 차례(추도예배)를 지내고 성묘를 하였다. 한가위 추석에는 새로 수확한 햅쌀과 햇곡식들로 밥을 지을 뿐만 아니라, 쌀가루로 빚어 송편을 만들어 먹었다. 가족을 비롯해 여러 구성원들이 모여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 놀이가 있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토착화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레위기 23:5-14에 무교절 또는 유월절은 보리 추수를 시작하는 때이다. 성경주석가에 의하면 무교절은 본래 가나안의 절기로 보리 추수의 시작을 알리는 기쁨을 축하하는 축제였다. 추수한 처음 이삭을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은 일찍부터 있었던 의식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이 명절을 받아들여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보리 추수감사제사를 드렸다. 단순히 추수감사의 의미만이 아니라, 자기 조상들의 출애굽 사건의 의미와 관련하여 이 절기를 받아들였다. 땅의 소산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보리의 열매로 누룩을 넣지 않고 떡을 빚어 출애굽 사건을 상기케 하였다. 또한 그들 조상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 고난의 떡을 먹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정체성을 지키는 문화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왔다. 이와 같이 그 땅의 추수감사제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 사건과 연결을 지어서 민족사적 의미를 가지고 유월절로 지키며 그들과 함께 보리 추수의 기쁨을 나누는 축제로 만들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도 그 나라를 건국하게 된 민족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마침내 자기네 종교와 문화가 융합되어진 것이다. 자기네 축제 문화에 신앙고백을 담은 것이다. 이제는 한국교회도 민속 축제에 신앙고백을 담을 수 있을 만한 교인 수를 가지고 있다. 이 땅에서도 우리 민족과 고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축제가 한국교회의 명절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성숙은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문화 속에 기독교 선교가 파고 들어가는 ‘문화 선교’에 있다. 그런데 우리의 민속명절은 농경사회에서 일어난 문화로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변화하지 못해 위기를 맞이했다. 그저 이름뿐이지 개인주의 성향으로 바뀌어 요식행위로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는 사라지고 있다. 한 조상으로 살아온 민족의 혼과 얼을 엮을 수 있는 문화가 거의 쇠퇴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과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축제는 열린 마당이다. 이러한 축제에 담기는 의미와 놀이는 언제나 어디서나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명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누구나 하나님께 감사하며 서로 기쁨을 나누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한민족 공동체의 축제로 선도해가는 사회적 책임의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면 참으로 살맛나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강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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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공동체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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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언더우드의 정신을 본받아
- 선교사 언더우드가 입국했던 1885년 당시, 문명한 서양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조선은 개화가 절실히 필요한 나라였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개화를 위해 어렵고도 힘든 신문 발행을 결심한다. 언더우드는 신문이 조선의 인민을 개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은 것 같다. 즉 기독교인들이 이 신문을 열독하여 각지역의 의견선도자가 됨으로써 신문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주위 사람들에게 기독교와 함께 전달하게 되면 조선의 인민과 사회가 개화될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가 시작한 〈그리스도신문〉의 창간호 사설은 “누가 와서 우리에게 묻기를 조선이 이 때를 당하여 그중 요긴한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우리들이 첫째로 말할 것은 지식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지식이라」는 창간호 사설의 제목에서 그 정도로 그는 조선의 개화를 강하게 열망하였다. 그래서 신문 발행을 위해 관련 공부와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의 평민들이 사용하는 문자인 언문(諺文, 한글)과 양반들이 사용하는 문자인 한자와 한문을 모두 배웠고, 또 그들의 일상 언어를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신문에 적용함으로써 기독교 복음의 전파뿐 아니라 무지몽매한 인민을 깨우는 수고를 하였다. 언더우드의 사역은 신문 발행뿐이 아니었다. 그는 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의 젊은이들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복음 전파를 위해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지방에까지 여러 주간 여러 달을 고생하는 전도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성경 번역을 위해 헤아릴 수 없는 노력과 수고를 집중하였으며, 조선 사람들의 자주의식을 고취시키고 애국 정신을 드높이기 위한 노력 역시 수도 없이 시도하였다. 그런 와중에 풍토병이 들었다. 〈그리스도신문〉 1897.8.6.일자에서 “월전부터 원목사께서 열병이 들어 만만 위중한 상태였다 (중략) 목사의 아들 한경이도 병이 들었다. 더욱 황황(遑遑)한 것은 조선 사람도 열병을 두려워하는 병인데, 외국 사람은 수토(水土)가 다른 고로 열병이 들면 나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걸렸다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죽게 되는 풍토병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사랑하는 조선을 위해 다시 일어나게 된다. 또 같은 기사에서 “원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조선을 불쌍히 여기사 구주의 도를 펴라 하시는 명령을 받들고 (중략) 한 때도 한가한 틈이 없이 몸이 매우 곤할지라도 자기 몸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항상 열심을 내어 주를 위하는 일만 하였다.” 이처럼 헌신적으로 주의 일을 한 언더우드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역자들의 믿음과 기도와 수고를 기반으로 한국교회는 시작되었고 성장해 왔다. 그 결과 신자의 수가 많지 않은 미미한 교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사회를 선도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정신은 무뎌졌고, 오늘날 교회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독교는 ‘개독교’로 목사는 ‘먹사’로 교회는 ‘사업장’으로 불리고 있다. 복음과 믿음보다는 돈과 권력과 시스템을 우선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각 교단의 임원 선거 과정에 돈이 ‘억’ 소리 나게 뿌려지고 있다고 한다. 복음으로 돌아가자며 믿음을 강조하고 교회 갱신을 부르짖는 목사는 오히려 홀대를 당할 정도라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숨을 담보로 헌신했던 선교사들의 정신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까지도 내던진 순교자들의 자세,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복음과 예수를 따르자는 정신을 기반으로 교회가 갱신되며 다시금 사회를 선도하게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언론학박사, 전 김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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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언더우드의 정신을 본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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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개혁으로 새로움을 주는 총회 기대
- 한국교회가 어느덧 총회의 계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언컨텍트 상황에서 맞는 두 번째 총회이다. 삶의 모든 것에 상상할 수 없는 변화를 가져다준 코로나19 상황에서 각 교단의 총회는 개최 여부를 놓고 고심하며 분주했던 지난해와는 다른 총회가 준비될 것으로 기대한다. 어느 집단이든지 총회는 그 집단의 수준과 역량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자리이다.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형제들끼리 동일한 신앙을 확인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교제하는 기회가 되는 자리가 총회이다. 정체성을 위협하는 도전들에 대한 공동 대처의 장이 되는 것도 총회이다. 그러므로 총회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전국적 총회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임이 될 능력과 자격을 스스로 갖추고 있는지 자문하며 전국의 모든 교회와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19 상황을 겪으며 이제는 ‘위드 코로나(with-corona)’라는 말이 들려지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위드 코로나’라는 포스트 코비드(Post-Covid,코로나19 이후) 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목회적 과제를 주는 상황인지 목회적 환경의 변화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대면예배가 전면 허용이 되어도 온라인예배가 지속되기를 바라고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교회라는 공간과 주일이라는 시간은 가정과 일상으로 대체되고 있다. 주일예배가 가지고 있는 교회공동체의 응집력이 사라져가고 있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절박함이 느껴진다. 올해 장로교 총회는 무엇보다 교회 회복을 위한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예배’ 중심의 공동체보다 ‘신앙’ 중심의 공동체가 중요해지고 있다. 온라인예배는 예배의 형태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형태 자체에 변화를 주고 있다. 전통적인 ‘예배’를 강조하는 모습에서 이제는 일상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며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선교 회복을 위한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국내외 할 것 없이 선교의 길이 막혔다. 선교 회복이 절실하다. 다음 세대 회복도 절실한 과제이다. 25년 안에 ‘종교에 대한 경외심 증발’이 미래세대의 특징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인터넷의 발달과 휴대전화를 통한 정보의 확산은 종교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과 편견을 갖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회복, 선교 회복, 다음세대 회복이 절실한 상황에서 열리는 이번 총회가 복음의 가치를 드러내고, 복음이 삶으로 드러나는 총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믿음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 경험되는 총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기독교인을 시대와 동떨어진 채 살아가며 상대방의 입장은 헤아리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해대는 매우 이기적인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다. 믿음과 삶이 연결되지 않아서 생긴 오해이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은 삶 속에서의 ‘행함’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행함’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쁨과 사랑 안에서 자발적으로 ‘행함’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이는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며 믿음에서 진정한 ‘행함’이 나온다는 것이다. 루터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장로교회는 개혁의 전통에 서 있다. 언제나 개혁으로 새로움을 주는 장로교회를 경험하고 확인하고 선포하는 이번 총회가 되기를 기대하며 기도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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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개혁으로 새로움을 주는 총회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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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들에 바란다
- 한국 교계에서 장로교의 비중은 아주 크다. 지역으로는 몰라도 나라의 단위로 본다면 전 세계에서 장로교가 이렇게 주도적인 경우가 드물다. 구한말 선교 상황에서 장로교 선교사들이 헌신하며 애썼고 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고 본다. 2021년은 특별한 해다. 어느 해든지 그럴 것이지만 코로나19를 두 해째 겪으면서 우리 사회와 한국 교회가 존재하는 상황이 지금의 시간을 유별나게 만들었다. 현재의 우리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땅의 기독교에 관한 진단과 처방과 결단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교회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텐데, 위기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것을 넘어설 방법은 무엇인가? 한국 교회에서 가장 비중이 큰 장로교 교단들이 가진 책무는 무엇인가? 시각과 가치관에 따라서 같은 상황 속에서 같은 주제를 놓고도 해석과 판단이 영 딴판일 수 있다. 2020년 1월에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까지 현장 교회를 포함한 한국 기독교 전체에서 교회 갱신이 주요 관심사였다. 교단과 교계 단체들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한국 교회의 병과 타락을 진단하면서 나름대로 논의하며 변화의 행동도 시도했다. 그러나 코로나 상황이 되면서 갱신에 관한 주제는 옆으로 밀렸고 코로나19 감염 및 방역에 관련한 상황이 교계의 중심 주제가 됐다. 코로나 초기의 신천지 관련 사태와 기독교 극우 집단의 행동이 이 주제를 교계와 사회의 중심에 놓은 주요 원인이었다. 이른바 ‘대면예배와 비대면예배’에 관한 논의와 논쟁에서 정부의 방역 조치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일부 교회의 행동도 교계와 사회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코로나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차별 금지에 관한 법안과 평등에 관한 법안에 관한 주제도 현재 한국 교계의 중심 사안이다. 여기에 건강가정기본법안도 흐름으로 보아 한 묶음이다. 위 법안들의 내용 자체에 입법의 상식에 벗어나는 과잉입법의 논란도 있지만 교회로서는 성경에서 죄로 규정하는 동성애와 동성 결혼이 법제화되면 안 된다는 것이 이 법안들을 반대하는 절박한 이유다. 최근 교계 단체들의 행보를 살펴보면 코로나 방역과 동성애 관련 법안들에 관한 논란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교회는 그 본질상 세상 한가운데 존재하며 세상을 진리의 말씀으로 변화시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 현상에 관한 교회의 대응적 행동은 기독교 윤리에서 참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행동이 교회의 자기 성찰과 갱신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현상에 관한 분석과 판단, 입장 표명과 행동은 그 집단이 가진 가치관에서 나온다. 기독교의 가치관은 유일하고 완결된 하나님의 계시인 66권 성경에 근거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이 성서의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면서 끊임없이 개혁하는 존재다. 코로나를 20개월이나 겪고 있는 지금 한국 교회는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교세의 측면에서 한국 교회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 장로교단들이 교단 총회를 앞두고 있다. 장로교단들이 지금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장로교회를 신학 전통을 따라 말할 때 ‘개혁교회’라는 표현을 쓴다. 이런 정신에서 저 유명한 말이 나왔다.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 바로 지금 교회가 약해지고 병들고 타락하는 것을 돌이키는 개혁이 시급하다. 지금 장로교단들이 그 멋진 별명, 그 이름값을 할 때다. /말씀삶공동체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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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들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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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접종과 교회 방역매뉴얼 문제점
- 섬기는 성안교회에서 지난 주일까지 전체 교역자와 성도 70%가 백신 접종 완료 되었다. 젊은 교역자 중에는 백신 접종 후 잠시 통증의 시간을 지나기도 했지만 특별한 일은 없었다. 교역자들이 백신을 맞은 이유는 단순하다. 예배의 온전한 회복과 당당한 예배 인도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주의 종의 되는 이유는 예수만 보이기 때문이다. 주를 위한 도구가 되는 것에는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고 위험 군이다. 실제 어느 교인은 “목사님 제 옆에 오지 마세요.” 라고 농담도 한다. 성안교회의 백신 접종률은 경기도 지역 백신 접종율을 훨씬 웃도는 수치이다. 1차 접종만 해도 다양한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교회만 해도 인원 제한에서 자유로워지며, 교회 여러 활동도 편해진다. 백신 접종자들끼리 만나는 모든 소그룹 모임도 정상화 될 듯하다. 외적으로는 확진자와 접촉 하더라도 자가 격리가 면제되며, 해외여행 후 격리도 면제가 된다. 식당을 이용할 때도 인원 제한에서 자유로우며, 외부 활동 시 마스크를 벗을 수도 있다. 이전에 비하면 완전 해방되는 느낌일 것이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 위험한 것을 왜 맞아요? 그런 분들은 반대의 질문에 먼저 대답을 해야 한다. 그 위험한 코로나19는 왜 안 무서워할까요? 지난 시간, 우리는 자유를 잃었다. 두려움에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했고, 사람과의 만남에 긴장을 했으며 정부에서 발표하는 거리 두기 단계의 공포심을 체감하였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확진자가 나오면 주변은 초토화가 되고 마녀 사냥을 당하였다. 사람은 3개월 이상 자유를 잃어버리면 프레임에 걸리고 감각도 마비가 되어 길들여진 짐승처럼 순응을 한다는 통계를 보았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인지 모른다. 이제는 자유를 찾을 때이고 그 기회가 백신이라면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하다. “몸이 약하니 백신을 맞으면 안돼요!”라는 말과 “몸이 약하니 코로나19 위험이 크므로 꼭 백신을 맞아야 해요!” 어느 것이 맞을까? 이처럼 성안교회는 방역당국 준칙 잘 따르고, 백신 접종도 앞장서서하고 있으므로 할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4단계서 19명으로 제한한다는 교회 방역 매뉴얼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첫째, 교회는 유급 직원이 있다. 그들은 교회가 직장이다. 모든 직장은 열려 있고 출근을 막지 못한다. 모든 종업원은 인원 계수가 안 된다. 유급 직원과 관계없는 인원 적용은 노동법에 저촉된다. 그들이 직장을 잃는다면 책임을 질것인가? 둘째, 모든 기관은 기본적으로 열려 있다. 단 두 군데, 술집과 교회만 타킷 방역을 하고 있다. 이것은 평등법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셋째, 예배는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시청하는 것이 아닌 드림공동체다. 그래서 모든 예배 요소가 살아 있어야 한다. 예배의 매뉴얼을 국가가 정하는 것은 종교자유를 심각하게 무너뜨린 것이 된다. 넷째, 백신 인센티브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70%면 국가적인 집단 면역이 가능하다고 발표했다. 교인 중 백신 접종 완료자로만 예배를 드리게 한다면 집단 면역의 테스트가 되기도 하며 모든 경제도 살아난다. 다섯째, 이제 교회들은 예배 사수와 교회 존폐의 문제의 막다른 길에 있다. 곧 생존을 위한 거룩한 반격이 일어 날 수 있을 것이다 폭풍 전야가 지금의 시간이다. 다행히도 방역당국에서 지난 7월 30일에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에서 일반교인도 참석할 수 있는 대면 예배로 전환하고, 동일 시설 내 종교활동 공간이 여러 개일 경우, 동시간대에 공간별 수용인원의 10% 범위 내로 모일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은 숨통을 트이게 하는 방안이다.단, 방역수칙 위반 시설은 제외키로 했기에 교회들이 솔선수범해서 방역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조금 더 힘을 내자 /성안교회 목사, SAM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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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접종과 교회 방역매뉴얼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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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된 자녀와 함께 살기
- 아는 분이 그런 말을 했다.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는데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속에서 불화통이 터진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성인이 된 자녀를 집에 둔 부모들은 위의 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원하는 직업과 부모가 원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등이다. 그러다 보니 성인 자녀가 부모의 기준에 맞추어 만족스러운 삶을 살지 못할 때 부모들은 자녀들의 모습을 답답해하며 그들의 삶을 못마땅하게 여기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과 존중을 받고 싶어 하는 데 부모님의 따가운 시선과 불편한 잔소리는 성인 자녀로 하여금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만든다. 그뿐 아니라 여전히 자신을 어린아이로 여기며 통제하려 고 하는 부모님의 의도에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기기보다는 간섭과 부정적 편견이라고 여기며 부모님에게 원망을 돌리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면서, 일부 자녀들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기 보다는 가정에서 부모님이 제공하는 많은 물질적인 제공은 잘 받으면서 부모님의 간섭이나 통제는 전혀 받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도 보인다. 때로는 강한 부모님 밑에서 함께 살면서 무기력한 모습마저 보이는 젊은이들도 있다. 이렇듯 성인이 된 자녀와 부모가 함께 살아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생활비가 많이 들고 집값이 많이 오른 현재를 살아가는 자녀들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부모님과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추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인의 자녀들과 부모들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이것이 정답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각 가정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그동안의 가정의 고유한 역사와 현재의 발생하는 이야기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설명함으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생겨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인이 된 아이들과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계선(Boundaries)을 잘 설정하는 것이다. 경계선을 설정할 때는 물론, 아이들과 함께 회의를 해서 서로가 합의를 하면서 어느 정도 현실 가능하고 동의한 것을 중심으로 규칙을 세워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규칙을 세워 놓으면 함께 의논할 때는 ‘예스’를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처음에 정한 규칙이 잘 지켜질 수 있도록 지켜지지 않았을 때마다 모니터링을 하고 말을 해주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또한 지켜지지 않을 때는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지키기로 한 규칙이 느슨해질 때는 다시 가족회의를 통해서 지켜져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왜 그것이 중요한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두 번째로 성인 아이들과 잘 살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이 중요하다. 성인이 된 아이들이 아직 독립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그들을 나의 통제에 들어있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버려야 한다. 그들이 성인으로서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자녀에 대해서 부정적 감정이 올라올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비폭력 대화’의 형태로 존중하는 의사소통 방식으로 상대를 공감으로 이해하고 나의 감정과 생각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서로를 편안하게 만든다. 비폭력 대화는 마음에 갈등이 생겼을 때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듯이 표현하면서 나의 감정과 필요를 상대방에게 알게 하여 부탁으로 끝맺음을 하는 대화법이다. 성인이 된 자녀와의 관계에서 이런 대화법들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읽는 의사소통을 하게 되면 훨씬 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게 된다. /호주기독교대학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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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된 자녀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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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팬데믹 처치의 전략 및 실례
- 지난 1년 4개월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사회, 경제, 정치, 문화, 예술, 스포츠계뿐만 아니라 종교계도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기독교 예배에 직격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에 적용하는 것이 바로 ‘의료목회상담’이다. ‘의료’란 육신적·과학적·이성적 실체가 있는 대상이며, 이를 주관하는 ‘육신적 원리’를 대변한다. 그리고 ‘목회’는 영적·신학적·신앙적 실체가 있는 대상이며, 이를 주관하는 ‘영적 원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여기에 ‘상담’은 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위와 이것을 가능케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료목회상담’이란 이 세 영역을 포함하고 있는데, ‘의료’ 또는 ‘의학’이라고 하는 일반은총의 부분과, ‘목회’ 또는 ‘목양’이라고 하는 실천신학적인 부분, ‘상담’ 또는 ‘은혜’를 뜻하는 하나님의 섭리적 부분이 그것이다. ‘메디컬처치’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목회의 본질 중 하나인 ‘의료목회상담’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시적인 사역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메디컬처치의 개념은 소강석 목사님의 아이디어에서 첫출발을 했다. 전염병과 교회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이어져 왔다. 교회가 이 전염병, 즉 팬데믹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시대의 교회의 명암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곤 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메디컬처치의 정신은 이미 우리 신앙의 선배들과 교회에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 시대를 보자. 로마제국 시대에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피하거나 숨지 않고 이웃 곁에 있음으로써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이때 그들을 보면서 생겨난 단어가 ‘파라볼라노이’(παραβολανοι)인데, 이는 ‘함께 옆에 있는 자’, ‘곁에서 위험을 무릅쓰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만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전염병의 위급한 상황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죽은 시신들을 수습하는 등 자기희생적 사랑을 주님의 이름으로 실천했다는 증거이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희생과 사랑 때문에 기독교가 로마 전역에 확산되었고 마침내 기독교 공인을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중세 시대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인한 큰 재앙, 즉 중세교회의 과오, 유대인 학살 등이 있었다. 특별히 중세교회의 일부 사제들은 전염병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고 막아보자고 하면서 무조건 교회로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질병이 하나님의 징계이자 심판이라는 확고한 종교적 신념이 팽배하였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미신적 종교 행위와 치료법들이 난무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현명한 판단을 하였다. 칼빈은 병든 자들을 전문적으로 돌보기 위한 의료 서비스 제공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네바 시에서 의사들의 급료를 담당하게 하고, 교회와 국가가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국가만이 아닌 교회도 적극적으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하면서,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성 바깥쪽에 구빈원을 따로 운영하여 치료하기도 했다. 특별히 제네바에서 칼빈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자들은 예배 못지않게 목사의 환자 심방을 의무화하였다. 구한말 한국 초대교회 당시, 1895년에 콜레라가 창궐하였을 때, 언더우드 등 서울의 북장로회 선교사들과 새문안 교인들, 제중원의 에비슨 원장 등이 서울 근교의 큰 막사를 콜레라 병원으로 정하고 환자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때 정부는 사대문에 ‘예수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왜 죽으려 하는가?’라는 벽보를 붙였다고 한다. 이로써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늘었고, 후원금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19세기 한국 초대교회는 전염병에 맞서서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헌신적으로 사랑함으로써 복음 전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었다. 이는 2-3세기 로마 시대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파라볼라노이’라고 불리며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로서 로마제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과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국가나 사회가 요구하는 단계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을 유지하여 관리해야 한다. 이는 많은 노력과 동참과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현 상황에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메디컬처치는 각 교단마다 교리적 차이를 뛰어넘는 객관적 사실(과학적·의학적 팩트)에 기초하기에 한국교회가 연합하기에 수월하다. 한국교회가 하나의 리더십, 하나의 메시지를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이템 중의 하나이다. 이를 통하여 대 사회적·대 정부적·대 언론적 대응이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짐으로써 한국교회의 하나 됨을 표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자 교회의 거룩성을 드러내는 사역이다. / 다건연세내과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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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팬데믹 처치의 전략 및 실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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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결혼의 기독교적 의미와 평등법
- 동성애 동성혼을 합법화할 뿐 아니라 이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죄로 말하는 것에 대하여 처벌하는 조항을 담고 있는 차별금지법은 그동안 끈질긴 입법화 시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를 중심한 많은 시민들의 반대로 지금까지는 잘 저지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이상민 의원을 대표발의자로 하여 차별금지법은 평등법이란 이름표로 바꾸어 달고 이전보다 더 거세게 다시 한 번 시도되고 있다. 차별금지법 또는 평등법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 법적 문제점들은 차지하고, 기독교인이 이 법을 반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법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벧전 1:9)이라고 말하고 있다. 곧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영혼의 구원”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모든 일은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이고,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생(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다(요 5:39). 이 영원한 생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으로 신적 영원한 생명이다. 성부의 뜻은 성자를 믿는 자에게는 성자 안에 있는 성자의 생명을 그들에게도 주어 그들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가지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생명을 얻게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사귐에 참여하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다(요 6:40; 요일 1:1-3).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에게도 이 생명을 주어 하나님과 사랑의 사귐에 참여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죄로 타락한 이후 구주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도 인간에게 다시금 이 생명과 사랑의 사귐을 회복해 주기 위함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항상 영생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처음 창조된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된 인간에게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도 칼빈은 영생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칼빈에게 영생은 인간 창조와 구속의 목적으로서, 인간이 바라보아야 할 지고한 복락이고 영원불멸의 목표로 이해되고 있다. 처음 창조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고, 이렇게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을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창1:26-28).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다. 곧 서로 구별되는 삼위가 관계적 방식으로 존재하시면서 서로 사랑의 사귐을 사귐으로 하나가 되고 있는 것처럼, 서로 구별되는 남자와 여자가 상호관계 속에서 사랑의 사귐을 사귐으로 생명의 연합을 이루는 이것이 바로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한 남자에 한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한다(말 2:15). 그러므로 성경은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을 말하고 있지 않으며, 남성과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인간됨과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에 있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 아닌 동성간의 결합이나 남성과 여성 이외의 다른 성들을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으로, 평등법이 말하는 것처럼 인권이 아니라 기실 가장 반인권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같은 성경이 가르치는 성과 결혼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차별금지법 또는 평등법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성경이 가르치는 바 기독교신앙의 본질을 저버리게 하는 반기독교적이고 반신앙적인 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신앙의 본질에 위협을 당할 때 순교의 정신으로 신앙을 지켜왔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평등법 또한 기독교신앙의 본질에 해당하는 문제로 기독교는 순교의 정신으로 이를 막아내야 할 것이다.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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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결혼의 기독교적 의미와 평등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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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연한 거짓 바이러스, 정직 백신으로 치료해야
- 감기 바이러스의 변종인 코로나19에 의해 우리 사회는 패닉에 빠졌다. 한국 기독교 역사 처음으로 교회 스스로 모이는 예배를 폐하고 온라인으로 예배도 드리고 있다. 과학기술과 의학의 눈부신 발전도 변종 감기 바이러스 하나에 대응하지 못하고 한 순간에 사회 전체가 감염 공포에 떨며 예배를 위한 모임조차 폐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과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되겠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이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 메시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하겠다. 필자는 이번 사태를 우리 사회 그리고 한국 교회에 만연한 거짓과 위선의 바이러스를 정직의 백신으로 치료하여 다시 정한 마음과 성결함을 통해 정직의 영을 회복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강한 경고라고 믿는다. 코로나19 자체도 감기 바이러스의 변종(거짓)이고 한국 사회에 이를 본격 퍼뜨리게 된 것도 거짓 사이비 종교를 통해서였다. 거짓은 정직의 영이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악으로 미혹하기에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신다. 아담을 유혹한 사탄의 간교한 거짓으로 인한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의 거짓말에 대한 죽음의 형벌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시고, 반대로 정직한 사함은 기뻐하시고 후손까지 복을 주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시편 112:2) 필자가 흥사단 투명본부 윤리연구센터장으로서 총괄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직지수 2019년 조사결과에 의하면 성인 정직지수가 60.2 로 청소년 정직지수 77.3 보다 모든 영역에서 낮게 나타났다. 이는 청소년의 거울이라는 어른이 정직 윤리적인 측면에서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결과 ‘10억이 생긴다면 잘못을 하고 1년정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 는 항목에 청소년의 50% 정도가 그렇다고 응답하고 있다. 정직지수 응답자 중엔 기독교인도 다수 있고 2020년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의 ‘교회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10명중 7명이 ‘목사와 기독교인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하고 있다. 이런 응답의 이유는 ‘목사와 기독교인이 말따로 행동을 따로하고 정직하지 못하다’ 였다.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인은 우리 사회에서 조차 정직과 윤리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식되고 있다. 정직의 영이신 하나님께서 거짓과 위선이 팽배하다고 인식되고 있는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이 경배하는 것을 기쁘게 받으실까? ‘악을 행하면서 성회를 여는 것을 참을 수 없다’(이사야 1:13) 교회와 기독교인이 정직할 때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시편112:4) 지금 정직함으로써 사회에서 당장은 손해를 감당해야 하고 때론 피해를 입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또한 거짓 바이러스가 만연해 지고 있는 우리 사회를 정직이란 백신으로 치료하여 건강한 사회로 발전케 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대적 경고 메시지를 깨달아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은 회개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코람데오 (Coram deo)’ 의 정신으로 정직 회복 운동과 정직 실천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야 할 때이다. /국제미래학회 회장·한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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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연한 거짓 바이러스, 정직 백신으로 치료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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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회복은 근대 역사를 이룬 ‘영향력’의 회복
- ‘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찬송가사의 한 대목이다. 코로나19로 비대면예배라는 초유의 경험을 하는 교회의 현실을 보며 탄식하듯 나오는 외침 같아서 자꾸만 입가에 맴돈다. 주변에서는 코로나 팬데믹과 언컨택트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수라고 한다. 그 변화는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고 한다. 위기와 불안이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다. 교회는 코로나19 확산의 주범처럼 인식되어 더욱 큰 지탄을 받고 있어 사회적 신뢰를 잃고 있다. 역사학자 케네스 라투레트는 “영향력 면에서 본다면, 인류 역사에서 기독교만큼 큰 영향을 끼친 단일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했고, 아놀드 토인비도 “우리 서양문명은 기독교회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한국교회역사에서도 다르지 않다.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배재대학교, 배화여자대학교 등 근대교육, 세브란스병원, 이화여대병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등 근대의료, 사회복지의 시작인 태화복지재단 등 기독교의 영향력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성경을 통한 한글보급으로 문명개혁을, 여성들의 교회를 기초로 한 사회활동으로 평등구현을, 근대교육으로 교육혁신을, 근대의료의 시작으로 의료혁신을, 최초의 한글점자개발로 언어혁신을, 민족과 독립운동으로 나라사랑을 이룬 것이 한국교회이다. 교회는 변화의 아이콘이었고, 개혁과 혁신의 주역이었다. 한국교회의 회복은 복음으로 근대역사를 이룬 그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한다. 그렇다면, 코로나 팬데믹 상황으로 더 힘들어진 교회의 상황은 기회가 된다. 이 기회를 살려야 새로운 미래를 만들수 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에클레시아’로 표현했다. ‘에클레시아’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 시민의 총회인 민회를 가리키는 말로써 어떤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부름 받음 시민의 모임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사도 바울 당시 교회를 뜻하는 말로 사용할 수 있는 단어로 ‘오이코스’(성도로 구성된 거룩한 공동체)나 ‘회당’(유대교인들의 예배와 교육장소)이 있었는데 굳이 ‘에클레시아’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도 바울은 교회는 건물과 조직을 뛰어넘는 공동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요, 신분과 인종과 언어의 경계를 뛰어넘어 평등한 민주적 모임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그동안과는 다른 새로운 질서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생각한 것이다. 지금 현재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새로운 질서(New normal)’이다. 사도 바울은 그 ‘새로운 질서’를 전혀 새롭지 않은 것에서 찾았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것에서 찾았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전도서1:9)이라는 말씀이 틀리지 않다. ‘새로운 질서’를 요구받는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 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본질에 충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면 된다. 방법에 대한 고민보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회복은 본래의 것을 되찾는 것이다. 영어로는 ‘다시 덮는다(Re-covery)’는 것이다. 무엇을 찾고, 무엇을 덮을까?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 잃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면 좋지 않을까?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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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회복은 근대 역사를 이룬 ‘영향력’의 회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