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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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못된 감사, 잘못된 기도
       올해도 추수감사의 절기를 맞았다. 이 계절에 감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추수감사’는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지상의 양식에 대한 감사만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오히려 내 영혼을 먹이고 입히시며 무시로 생명의 양식을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함을 잘 안다. 그러면서도 이 종은 오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세상을 구하며 걱정하는 부끄러운 죄인이다.    예수님이 나의 창조주요 나의 구원주이심으로 감사하기보다는 나의 현실의 문제를 들어주시는 해결사이심으로 감사하는 한심한 종이다. 잘못된 기도를 들으시거나 잘못된 감사를 받으시는 주님이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성경은 감사의 책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감사’를 가르치고 언명하시는 책이 성경이다. 감사를 권면하는 성경 말씀이 많지만, 시편 136편은 1절부터 26절까지 전체가 “감사하라”는 명령을 반복하고 있다. 이 시편은 매 절을 “여호와께 감사하라...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는 반복법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감사(感謝)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에서 인자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그 사랑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노래하면 더 실감나고 더 피부에 와 닿는다. ‘헤세드’는 인자의 의미도 있지만, ‘은혜’, ‘은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은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모궁에서 나온다. 은혜는 어머니의 사랑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젖이다. 그 구체적인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죄인(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그런데, 인류 최고의 감사시인 시편 136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른바 ‘먹고 마시는 문제’로 감사하라는 언명은 딱 한 번밖에 없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5절) 그 외에 모든 절들이 “하나님이 참 신이심으로 감사하라”(1절~3절),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으로 감사하라”(4절~9절),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주이심으로 감사하라”(10절~24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 언명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봐야 한다. 우리의 감사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진정 참 신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하나님이 진정 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하나님이 진정 내 구원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아니면 오늘도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며 그것이 충족됨으로 감사하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도 마찬가지다(마태복음 6장 9절~13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 사함과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구하는 감사의 계절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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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1-04
  • [정론] 종교개혁과 변화 그리고 경건
       2024년은 종교개혁 507주년이 되는 해이다. 종교개혁은 비진리에 대한 저항과 개혁이 개신교회의 본질임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선언한 이후 신학운동은 16세기와 17세기를 거쳐 유럽 전역에서 꽃을 피웠고, 칼뱅의 『기독교강요』는 프랑스와 영국, 스위스를 비롯한 전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 종교개혁은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청교도 신앙의 토대를 구축하여 영적 부흥을 이끌었다. 또한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경제 자본주의의 기반을 구축하는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여, 중세의 봉건적 전통과 구전문화의 잔재를 제거하고 새로운 시대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었으며, 산업혁명은 물론 유럽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를 변혁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특히 성도들에게 영적문화의 충격과 함께 성도들의 세계관과 예배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일으켰다. 종교개혁은 교회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형성하면서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 경건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종교개혁을 통한 교회의 변혁은 크게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교회 예배 문화의 변화이다. 교회의 예배가 단순해지면서 성만찬 중심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심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메시지 전달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 종교개혁을 바탕으로 평신도들이 이해하기 힘든 라틴어가 교회 내에서 사라지고 일상적인 언어들이 사용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사제와 성가대원의 전유물이었던 교회음악의 보편화이다.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인식하에 회중들은 찬송을 부르게 되었고, 성전 예배 중심에서 삶의 영역을 중심으로 한 예배로 예배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었다. 두 번째는 교회내의 비성경적인 요인들을 제거하고 성경에 기초한 기초신앙교리 교육과 예배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교회 내의 신과 성인의 상이 우상숭배임을 적시하고, 이러한 것들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됨을 비판하고 제거하였다. 종교개혁을 통해 변혁이 일어난 교회에서는, 개혁교회의 기초인 성경을 중심한 신앙과 생활이 강조되고 교회안의 거룩한 공동체와 믿음의 형제들로 채워지면서 다양한 상처들이 치유되기 시작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함으로 자유와 평등사상을 일으켜 종교, 사람의 의식을 평등화하고 민주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칼빈은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더 발전시켜 예정설을 주장하였고, 성속이원론과 사제주의에 반대하여 모든 노동이 거룩하다는 직업소명론을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정착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루터와 칼빈에 의한 종교개혁은 많은 성과를 이루어냈지만, 개신교와 가톨릭의 전쟁과 종교가 공적영역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적영역으로 밀려나는 한계도 드러냈다.    종교개혁 507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와 성직자, 교회 공동체는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고 다음의 부분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첫째, ‘하나님 말씀의 묵상과 현실화’에 힘써야 한다. 성직자는 매일 성경 40장 이상 읽고 묵상하고, 묵상한 바를 실천할 때 신비의 계시가 능히 너희를 견고하게 함을 믿어야 한다(롬 16:26). 둘째, 하나님의 메시지, 타인과의 대화에서 ‘경청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셋째, 삶의 현장에서 ‘찬양과 기도가 현실화’되어야 한다. 넷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가르치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한다(행 28:30-31). 다섯째,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며 용서운동이 있어야 한다(욥 42:6, 10).   한국 교회가 종교개혁이 제시한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 경건한 삶의 방향을 기억하고 주님의 길을 따라간다면, 모든 이들이 구원에 이르는 역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국칼빈학회 회장·아프리카미래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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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0-22
  • [정론] 하동 이병주문학관에서
       이병주 대하실록소설 <지리산>의 주인공 박태영은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그 규칙에 순응할 수 없는 체질적 회의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죽는 순간까지 버리지 못했다. 박태영에게 내연된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생명과 가치와 존중의 정신이다. 이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과 반인간적인 것과의 진실을 찾아가는 행렬인 것이다. 나는 이병주의 <지리산>을 읽으면서 <지리산>의 서사는 사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림 이병주(1921-1992)의 대표작 <지리산> 과 그 외 80여 권에 이르는 작품을 모두 모으면 동시대를 살아간 국민의 서사가 된다. 이병주에게 소설은 허구이기보다는 현실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기에 <지리산> 은 기록문학의 한계를 뛰어 넘는 증언소설로서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역사의 그물이 놓치고 있는 삶의 모습, 역사에서 소외된 삶을 기록한 것이다.    작가 이병주의 소설과 그의 작품에 나타난 삶의 실체적 진실로서의 역사의식이 여전한 분단체제에서 우리 사회의 한 인식 지표가 되어졌다고 할 것이다. 이병주는 분단 시대의 교사로서 그의 소설을 좌우의 갈등과 대립이 여전한 지금도 방향성을 제시한 풍향계라 할 것이다.    필자가 문학지에 게재한 원고지 430매에 달하는 문학비평문 ‘이병주의 지리산, 또는 회색의 군상’을 평론하여 이병주국제문학상 연구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루 일찍 시간을 내어 2024년 9월 27일 시상식 전날, 가족과 더불어 기차를 타고 진주를 찾았다. 이병주가 걸었던 소설의 주요 공간인 진주의 중앙시장 골목에 있는 1915년 개업한 천황식당에서 진주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1936년 진주공업농림학교에 입학한 이병주도 천황식당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는 진주에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을 가꾸었고, 지리산을 휩쓴 파란을 겪는 가운데 역사와 정치와 인간이 엮어내는 운명에 대해 나름대로의 지혜를 익혔다.    거북이의 걸음을 닮은 기차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고, 그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학병이 되어 중국으로 떠난 것도 진주역에서였고, 사지에서 돌아와 도착한 곳도 진주역이었다. 진주는 이병주 문학의 요람이고 향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는 진주성 촉석루에 올라 시간의 무상을 담아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 보았다.    렌트카를 빌려 하동군 북천면 이명산 자락에 있는 이병주문학관을 찾아갔다. 길에는 코스모스, 메밀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병주는 지리산의 자락이자 다도해의 안뜰이며 섬진강 베갯머리와 같은 하동에 태를 묻고 생애를 시작했다. 하동은 박경리 <토지>와 김동리 <역마>의 무대이다. 소설가 이병주, 김병총, 시인 정공채와 정호승, 수필가 강석호, 아동문학가 남대우의 출생지 하동은 한국문학사 속의 불멸하는 문향이라 하겠다. 이병주는 하동이란 문학적 토양에서 자라나 그의 문학은 진주로,부산으로, 일본과 세계로 뻗어 나갔다. 나림이 타계한지 32년이 지났지만 하동에 세워진 이병주문학관은 세월따라 퇴색한 채 찾아오는 내방객을 맞아 나림의 71년 유정한 삶과 문학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림의 전시실에서 한국기독교 140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연합해 서울 외곽에 한국기독교문학관을 지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겼다. 한국기독교 문학사에서 불멸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마주할 수 있는 기독교문학의 서정과 서사를 담은 공간이 세워졌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았다./문학평론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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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0-15
  • 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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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0-08
  • [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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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8
  •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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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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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선을 다해 최고가 되는 삶
    ▲ 황수원목사  미국의 39대 지미 카터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적인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라는 책에서 자신이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된 후 그 부대를 방문한 선배 장군으로부터 책망 받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어느 날 부대를 방문한 장군은 카터에게 “자네는 사관학교를 몇 등으로 졸업했나?” 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때 카터는 “800명 가운데서 59등을 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큰 칭찬을 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부동자세로 꽂꽂이 서 있었으나 그 장군의 대답은 의외였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면서 책망을 받았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카터는 그때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못함에 대해서 크게 후회하면서 그 때부터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선을 다한다’는 그의 수칙은 훗날 주지사로 진출 하게 하였고 거기서도 최선을 다하는 정치인으로서 미국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카터는 대통령직을 다한 후에도 전 세계를 순방하면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인 ‘해비타트 운동’을 펼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열심히 일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로마서 12장 11절~13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게을러서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다소 과격한 듯한 말씀을 던지면서 부지런히 일할 것을 요청하였다.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루손섬의 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난에 지지 않고 역경에 꺾이지 않고 열심히 일함으로 필리핀 민족의 불행과 슬픔을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운전수 노릇하면서도 그 부지런함이 인정되어 버스회사의 지배인이 되었고 세계 2차 대전 후에는 정계에 진출하여 국방장관이 되었고 마침내 그는 겨우 46세의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전과 다름없이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면서 당시 만연하고 있던 부정부패를 막고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 공직자 재산등록을 실시하여 공무원들로 하여금 부정축재를 못하게 막았으며 백성들로부터는 인정받는 대통령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비행기 사고로 조난을 당했을 때 필리핀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슬퍼할 정도로 위인의 삶을 살았다. 이광웅시인은 〈목숨을 걸고〉라는 시에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하라.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라. 무엇이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하라”고 외쳤다. 사랑의 우리 하나님께서도 창조하신 우리 사람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라고 명령하셨다. 무슨 일에든지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대신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2-13
  • 형제 사랑으로 명절을 보내자
     사람들은 신정이나 구정이 되면 단순히 새 달력을 사용하는 시기라는 의미 이상의 느낌을 가진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시점에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다짐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해서 다른 무엇이 있을까? 또는 특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지내는 것이 좋을까? 오늘날 한국교회는 거의 대부분 12월 31일 늦은 밤에 모여 새해 0시를 예배를 드리면서 보내는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를 드리거나 1월 1일 오전에 모여 ‘신정예배’를 드린다. 성경에도 없고 서양교회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교회의 새로운 문화로 정착해가는 것 같다. 어떤 교회들은 신년을 맞아 한 주간 또는 몇 주간 ‘새해맞이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지기도 한다. 역사와 시간의 주인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새해를 맞아 예배를 드리면서 감사와 헌신과 신앙고백을 드리는 기회를 가지는 일은 성경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의미가 있는 교회문화라고 보겠다. 한편 성경의 교훈에 따르면, 세상에서 말하는 ‘새해/신년’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다. 본래 성도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My times are in your hands,” NIV). 또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전도서 1:9). 그러므로 설날이 되었다 해서 영적으로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자칫 세속적인 세계관을 따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성도들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데살로니가전서 5:16, 18) 자세를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고린도후서 4:16) 삶과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종말론적인 삶(베드로후서 3:8~14)을 살아가는 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세상풍조는 변하고 국내와 국제의 정세도 늘 변화하지만 우리의 주 예수께서는 만유와 만민의 주님이 되시므로(고린도전서 3:21~22)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고 민족과 세계복음화라는 지상목표를 추구하는 데(마태복음 6:33; 28:18~20)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설 연휴 기간에 그리스도인들도 마음이 들뜨거나 풀어져서 TV 앞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기 쉽다. 신앙서적들을 읽거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기회로 삼는 이들은 영성형성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CCC나 기독실업인회 같은 단체에서는 ‘원단금식기도회’를 가진다. 어떤 작은 교회는 해마다 설 연휴 때 교인의 절반 정도가 네팔에 단기선교여행을 다녀온다.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사랑으로 섬기는 기독청년들의 활동도 있다. 설에 할 수 있는 참 아름답고 선한 일들이다. 설날에 남녀노소가 설빔을 하고 부모 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뵙고 세배드리는 오랜 전통이 있었으나, 급속한 도시화와 핵가족화가 이뤄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설 명절 문화는 많이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해 미리 성묘도 하고 고향에 다녀온 후 설 연휴 기간에 가족이 함께 놀이동산에 가거나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설 기간에나 그 이전에나 고향의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을 찾아뵙고 문안인사 드리며 용돈을 드리는 일은 꼭 지켜나가야 할 미풍양속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예절을 등한히 하는 것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며 전도 길을 막는 결과가 될 수 있다. 특히 사이비이단 교주들이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일을 무시하라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는데, 경계해야 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할 행동이 필요가 있다(고린도전서 9:19~23). 믿지 않는 부모 형제가 설 명절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경우, 믿음을 핑계로 찾아가지 않는 예가 있는데 본이 되지 않는다. 돌아가신 조상에게 절하는 행위는 해선 안 되겠으나, 음식 준비하는데 비용도 부담하고 돕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평소에 최선을 다해 부모님을 공경해드려야 할 것이며, 어려운 형제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할때 교회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 /전 칼빈대 신대원장, 현 영목신학원 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19-01-31
  •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승리하자
     2019년 새해 1월에 들어섰다. 많은 교회들이 송구영신예배 시에 ‘신년 말씀 카드’를 기도로 하나씩 뽑아서, 그 말씀을 하나님이 새해에 주신 말씀으로 받고 믿으며 기뻐한다. 어떤 성도들은 자신의 마음에 덜 흡족하면 다시 줄을 서서 뽑기도 한다. 필자도 새해 여러 교회를 말씀 사역으로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가는 교회마다 이 말씀 카드를 뽑았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의 말씀을 계속 받게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이사야 41:9)”고 말씀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고 말씀으로 격려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많은 고난과 방랑의 역사 속에서 터득한 교훈으로 일찍부터 어린 자녀들에게 말씀과 함께 하는 삶을 살도록 교육하였다. 그들의 자녀들이 학교에 갈 수 없는 환경이 또다시 올 수 있음을 예견하여 가정 학교(Family School)를 열고 부모가 선생님이 되어 말씀을 통해 험한 세상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도록 교육한 것이다. 우리는 이를 말씀 중심의 삶 교육인 ‘쉐마(말씀을 들으라) 교육’으로 알고 있다. 쉐마교육은 유대인들의 교육으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현재까지 자손들에게 신앙을 전수해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양육하며, 지금까지 굳건하게 그들만의 문화를 지키고 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류 역사 가운데 수많은 제국들이 결국 다 무너졌지만, 이스라엘의 유대 문화만큼은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몇 가지 이야기했다. 간추린다면 첫 번째는 야훼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로 무장한 유대 민족의 독특한 정체성, 두 번째는 유대 지도자들(특히 성경 교사들이었던 랍비)의 모범적인 리더십을 들 수 있겠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곁에 두어, 말씀에 기반한 삶을 살아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집트에서 노예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자유케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구름 기둥으로 고단한 광야 생활을 인도하셨던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2019년 새해도 동일하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심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길 원하시며, 말씀으로 새롭게 되길 원하신다. 말씀으로 새 일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 분의 살아있는 말씀이 여러분 말씀 카드를 넘어서 매일의 삶을 다스리심을 믿고 앞을 향해 나아가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의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홍해를 갈라서 육지를 만들어 바다 가운데로 길을 내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 대한민국 한민족의 통일문제도 준비하신 길이 있다. 우리 교회들의 기도 제목들 하나하나에도 준비하신 길이 있다. 사면초가 진퇴유곡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앞에서 준비하시며 행하셨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따라가자. 기적의 하나님,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끄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계획을 믿으며 나아간다면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어려움은 축복으로 바뀔 것이다. 그분의 살아있고 활력 있는 말씀만 의지하며 따라가는 복된 한 해가 되길 축복한다. 그분은 말씀으로 길을 인도하시는 야훼 하나님이시다. /묵동성결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1-24
  • 한국교회, 먼저 ‘죄책고백’으로 시작하자
      한국교회 역사를 되돌아보면, 복음전파는 처음부터 죄책고백과 함께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일은 1903년 원산에서 하디선교사가 동료선교사들을 감동케 한 회개의 기도에서, 1907년 평양장대현교회 부흥사경회에서 길선주장로가 회중을 감동케 한 죄고백의 기도에서 각자가 죄를 고백하는 회개운동으로 발전하여 한국교회 초기부흥의 불씨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대체로 개인의 사적인 죄는 공중 앞에서 고백하도록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행한 고해성사의 문제성 때문이며, 사적인 죄를 공중 앞에 고백하면, 이해관계에 따라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문제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직접 고백하여 죄용서의 은혜를 입도록 하고 있다(요 20:23, 시 23:5, 단 9:5, 요한1서 1:9), 그러나 인간의 죄는 언제나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지만, 역시 이웃과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그것은 행위자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에 따라, 그의 행위가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크다. 성경에서 다윗은 왕의 신분과 지위에 있었기에 그가 행한 죄가 미치는 영향과 책임은 막중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의 다윗을 향한 죄책의 지적은 죄를 회개하여 다시 회복하는 기회가 되었다(시 51).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도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교회와 모든 기독인의 죄책을 매 주일공예배의 하나님과 회중 앞에 일깨우고, 목회자가 죄책고백을 행하도록 권하였다(기독교강요, 3권 1~5장). 지금 한국교회는 실로 심각한 위기에 처한 모습이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의 지도자 된 우리 모두의 허물과 실수(죄)가 한국사회에서 너무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내적으로는 지나친 개교회주의와 개교파주의로 인하여 한국교회의 공동체성이 흔들리며, 외적으로는 교회의 공공성이 엄청난 사회적인 불신에 휩싸인 모습이다. 그래서 이전과 같은 교회성장도, 복음전도도 모두 한계에 직면한 모습이다. 더욱이 교회 내적인 문제를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도 상실한 채(교회법과 정치가 있음에도), 일반법정의 판단에 내맡겨진 교회의 문제들은 심지어 TV에 그대로 노출되어 한국교회와 목사의 권위추락 또한 심각한 상태이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이러한 위기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한국교회는 다윗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지금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모든 문제(대형교회의 목회세습, 목회자의 비윤리성 등)는 해당 교회와 그 지도자의 문제이지만,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지도자 된 우리 모두의 문제가 분명하다. 그야말로 한국교회는 “내 탓이오”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죄책고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마 18:15~20). 그것들이 남의 일, 타 교단, 타 교회, 타 목사의 일이 아니라, 바로 한국개신교회 우리 모두의 실수(죄)임을 시인하고, 우리 하나님께 엎드려 그분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죄책고백운동”이 새해에 시작되었으면 한다. 이러한 죄책 고백은 곳곳에 모이는 신년하례 예배와 매 주일 지역교회 예배에서, 장로님의 기도와 목회자의 기도 가운데서, 한국교회 전체가 년 중 한 주간(새해 첫 주간)을 기도주간으로 정하든지, 또는 국가 조찬기도회에서, 교단별 목사장로기도회에서, 통회하며 자복하는 죄책고백의 기도가 실천되었으면 한다(느 9:1~3, 삼상 7:3~12). 그것이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며, 한국교회의 본질(거룩성)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며, 지금 한국사회에 평화 시대가 도래한 것 같으나, 여전히 국가의 위기를 느끼게 되는 상황에서 그 모든 불안을 극복하고, 참 평화를 발견하는 길임을 기억하자! 우리 주님은 “회개하여 처음 행위(사랑)를 가지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고 경고한다. 아마도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 소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들이 침묵을 깨고, 이러한 죄책고백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선다면, 이 신년 새해에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크게 쓰임 받는 기관들이 되리라 기대한다.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전 총신대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19-01-22
  • 다음 세대를 위한 본질교육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자살률보다 3배나 높다. 그리고 자살이 10년째 청소년 사망원인 1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개선될 기미조차 없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8 청소년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청소년(9~24세)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었다. 평상시 스트레스를 느낀 중·고등학생은 지난해 37.2%나 됐다. 게다가 ‘최근 12개월 동안 2주 내내 일상생활을 중단할 정도로 슬프거나 절망감을 느낀 적이 있다’고 응답한 중·고등학생도 25.1%였다.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률은 외국과 비교해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그런데 자살의 원인을 살펴보면 부모와 무관하지 않다. 요즘 가출한 청소년들에게 설문 조사를 해 보았더니 가출 이유에 대해 73%가 부모 때문에 가출하게 되었다고 답변했다. 결국 부모와의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와 믿음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잘 교육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시대마다 특별한 방법을 찾았지만, 그 방법은 유행처럼 끝나버린 경우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요즘 왜 많은 목회자들이 쉐마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교회마다 청소년들이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년 각 교단마다 총회뿐 아니라, 노회 그리고 교회에서 다음 세대의 중요성을 알고 이제라도 가르쳐 보려고 하지만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자녀교육방법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께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모님들에게 “네 자녀, 네가 가르쳐라!”고 말씀하고 있다.(신 6;4~9) 즉 부모가 직접 자녀에게 신앙교육을 시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통해 신앙을 자녀에게 전수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육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쉐마교육의 핵심은 질문과 토론에 있다. 질문과 토론으로 뇌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하기 위해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질문을 많이 하면 할수록 대답하기 위해서 뇌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특별히 부모들에게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4~9) 쉐마교육은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을 교회에 데려다주는 것은 잘했지만, 부모가 직접 자녀들을 가르치진 않았다. 물론 가정예배도 시도해 보고 몇 가지 자녀를 가르치는 방법도 동원해 보았지만, 그때뿐이고 지속적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방법이 중요하다. 이미 예수님은 질문과 토론으로 성경에 310회 정도를 말씀하고 있다(눅 2:46-47). 덧붙여 말하면 질문과 토론으로 자녀들을 가르치면 얼마 큰 유익이 있는가는 이미 하버드대학을 비롯한 외국에서 많이 실시하고 있는 교육방법이기도 하다. 또한 인성교육과 부모와 소통을 위하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부모와 함께하는 금토캠프, 부모와 함께 드리는 주일예배, 인성 교육을 위한 암송, 부모와 함께는 역사탐방’ 등이 있다.  2010년부터 시작한 쉐마 사역이 현재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본질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해갈수록 많은 기관과 매스컴에서 관심을 갖고 초청을 한 이유도 성경적 방법으로 다음세대를 세워보자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한국교회 전체적으로 퍼진다면 한국교회와 다음 세대는 분명히 회복될 것이고, 한국교회 부흥의 불길도 다시 일어날 것을 확신한다. /쉐마학당연구원 원장·과천약수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8-12-31
  • ‘무례한 크리스천’서 ‘예의 바른 크리스천’으로
      〈무례한 기독교〉는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마우의 한국어로 번역된 책 이름이다. 2018년 한해를 보내면서 이 책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교회의 무례한 크리스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스천하면 예의 바르고 교양이 있으며 덕망을 갖춘 매력적인 신사숙녀로 생각나야 하는데, 왜 한국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한가? 다사다난했던 올 한해를 보내면서 또다시 ‘무례한 기독교인’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인가?   이름만 대면 외국인도 다 아는 손으로 꼽는 한국의 ‘대형교회’가 그토록 시끄럽게 또는 부끄럽게 언론에 등장하는 이유는 단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어서 그런 것만을 아닐 것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붙여서 부른다. 그냥 ‘안티’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며 그렇다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과연 꼭 그들이 맹목적으로 그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나쁜 기사의 장본인들이 알고 보면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은 아주 당혹스럽다. 선행을 베풀었다는 흐뭇한 기사의 주인공들이 크리스천이면 얼마나 바람직하며 기쁜 일이겠는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상의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도 성공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확신이 오는 것일까?   그래서 요사이 나쁜 뉴스가 등장하면 나에겐 조바심 병이 도진다. 혹시나 교회 이름이 뒤따라 나오면 어떨까 하는 걱정이다. 결국 상당수의 기존 교인들이 교회출석을 하지 않는 ‘가나안’ 교인들이 돼가고 있다. 하나님도 좋고, 예수님도 너무 좋은데, 성공만을 강조하는 설교, 너무나 큰 이질적 모습의 예배당, 상식이 떨어지는 목사의 언행과 설교, 가난한 자와 약자를 꺼려하는 교회, 거기다 교인들이 일반 상식을 뛰어넘고 무례하기까지 하다 보니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한국교회를 모욕하는 안티는 사실은 교회 밖에 있다기보다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 스스로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말다. 결국 인터넷 등 언론매체를 통해 혼자서 예배를 드린다는 ‘혼신족’까지 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를 너무 길게 말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자칫하다보면 ‘가나안’족들을 대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을 합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요청이다. 이런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남에게만 교회 타락의 이유를 전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 한국교회의 일원이며, 스스로 회개하며 거듭나야 할 죄인이다. 이러한 지적이 ‘유체이탈화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전가시키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핑계 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교회의 개혁의 출발은 바로 내 자신이어야 한다.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는 ‘진리는 시민교양과 함께 가야한다’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계발해야 한다. 그렇다고 겉껍질만으로 제시되는 예의, 곧 위선은 피해야 하는데, 유효기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우는 두 가지 전략을 제안합니다. 먼저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더 확고한 신앙 내지는 신념을 갖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신앙인들이 더욱 예의 바르고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새해에는 한국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예의와 공공성을 갖추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복음전파가 큰 힘을 얻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해본다. /백석대 부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18-12-30
  • ‘무례한 크리스천’서 ‘예의 바른 크리스천’으로
    ▲ 주도흥목사  〈무례한 기독교〉는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마우의 한국어로 번역된 책 이름이다. 2018년 한해를 보내면서 이 책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교회의 무례한 크리스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스천하면 예의 바르고 교양이 있으며 덕망을 갖춘 매력적인 신사숙녀로 생각나야 하는데, 왜 한국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한가? 다사다난했던 올 한해를 보내면서 또다시 ‘무례한 기독교인’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인가? 이름만 대면 외국인도 다 아는 손으로 꼽는 한국의 ‘대형교회’가 그토록 시끄럽게 또는 부끄럽게 언론에 등장하는 이유는 단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어서 그런 것만을 아닐 것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붙여서 부른다. 그냥 ‘안티’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며 그렇다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과연 꼭 그들이 맹목적으로 그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나쁜 기사의 장본인들이 알고 보면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은 아주 당혹스럽다. 선행을 베풀었다는 흐뭇한 기사의 주인공들이 크리스천이면 얼마나 바람직하며 기쁜 일이겠는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상의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도 성공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확신이 오는 것일까? 그래서 요사이 나쁜 뉴스가 등장하면 나에겐 조바심 병이 도진다. 혹시나 교회 이름이 뒤따라 나오면 어떨까 하는 걱정이다. 결국 상당수의 기존 교인들이 교회출석을 하지 않는 ‘가나안’ 교인들이 돼가고 있다. 하나님도 좋고, 예수님도 너무 좋은데, 성공만을 강조하는 설교, 너무나 큰 이질적 모습의 예배당, 상식이 떨어지는 목사의 언행과 설교, 가난한 자와 약자를 꺼려하는 교회, 거기다 교인들이 일반 상식을 뛰어넘고 무례하기까지 하다 보니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한국교회를 모욕하는 안티는 사실은 교회 밖에 있다기보다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 스스로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말다. 결국 인터넷 등 언론매체를 통해 혼자서 예배를 드린다는 ‘혼신족’까지 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를 너무 길게 말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자칫하다보면 ‘가나안’족들을 대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을 합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요청이다. 이런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남에게만 교회 타락의 이유를 전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 한국교회의 일원이며, 스스로 회개하며 거듭나야 할 죄인이다. 이러한 지적이 ‘유체이탈화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전가시키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핑계 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교회의 개혁의 출발은 바로 내 자신이어야 한다.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는 ‘진리는 시민교양과 함께 가야한다’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계발해야 한다. 그렇다고 겉껍질만으로 제시되는 예의, 곧 위선은 피해야 하는데, 유효기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우는 두 가지 전략을 제안합니다. 먼저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더 확고한 신앙 내지는 신념을 갖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신앙인들이 더욱 예의 바르고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새해에는 한국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예의와 공공성을 갖추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복음전파가 큰 힘을 얻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해본다. /백석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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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12-27
  • 크리스마스 - 예수가 우리를 찾아 나선 첫 날
    ▲ 정인교목사  “어머니 난 지금… 참호속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몹시 추운 날씨지만 참호속은 지푸라기가 넉넉해 꽤 아늑해요. 오늘은 세상에서 그 누구도 본적없는 기적같은 광경을 보았어요” 우연한 기회에 페이스북에서 ‘1914년 기적의 크리스마스’라는 영상은 이런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보기 시작한 영상이었지만 보는 내내 가슴을 잔잔히 적셔왔다. 앨프레드 두건 차트 소위의 편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1914년 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의 이프로 지역에서 영국군과 독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온종일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그리고 깊은 밤이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멀리서 간간히 포성이 들리는 사이로 어디선가 바람에 실려 노래 소리가 들여왔다. 스틸레 나흐트 하일리게 나흐트… 독일군 참호에서 ‘고요한밤 거룩한 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러자 영국군이 그 찬송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서로를 죽이지 못해 혈안이 된 사람들이 같은 찬송을 부르다니….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았다. 영국군 병사 하나가 비무장인 채로 참호에서 나왔다. 그것을 보고 양국 병사들이 하나둘씩 참호에서 나온다. 주님이 오신 성탄절 아침 그들은 서로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눈다. 어제 부른 찬송 이야기를 하며 함께 사진을 찍는다. 양 팀으로 나눠 축구경기를 하고 서로 상대편의 머리를 깎아 준다. 다시금 멀리서 총성이 들려오고 이들은 서로 별일 없이 건강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자신들이 소중히 아끼는 것을 상대에게 선물로 주면서 말이다. 성탄의 기적은 그렇게 전쟁터에 찾아왔다. 가슴이 먹먹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 나선 첫날인 크리스마스는 그 자체로 기적 아닌가? 피해자인 하나님이 먼저 가해자인 인간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신 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우리에게 생명의 손을 내미신 날…. 서로를 겨누던 총부리를 내려놓는 기적은 어쩌면 당연한 거 아닌가? 영상을 보니 영국군은 메리, 즐거운 크리스마스로 인사하고 독일군은 ‘프로헤 바이나흐텐’ 즉 경건한 성탄으로 인사한다. 하나님이 일으키시고 전장의 병사들이 호응한 감동의 날은 당연히 즐거운 날면서 경건한 날이다. 그런데 아기 예수가 누우실 구유는 오간데 없고 그 자리에 백화점 세일과 만원이 된 모텔, 일년 대목 보는 술집이 들어서고 술집 매상이 들어서서 즐겁다고 한다. 성탄이라는 명칭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그 자리에 Season’s Greeting을 새겨 넣은 채 말이다. 이렇게라도 즐거워야 할 만큼 우리 인생사가 각박하다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하다. 저녁에 귀가하는데 아파트 입구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통장님, 너무 수고 많으세요. 올해 제가 처음 본 성탄 트리네요” 모든 아파트 통장 중에서 역사상 가장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통장님이 방긋 웃으셨다. “다들 예전 같지 않아요.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런지 얼궁에 웃음도 사라지고 성탄절이 코앞인데도 아무 생각들이 없는 것 같아요. 제발 성탄절만이라도 서로 화목하고 즐겁게 지내면 좋겠어요” 나는 안다. 우리 통장님이 예수 믿는 권사님이라는 사실을…. 성탄트리를 장식하면서 권사님의 기도가 내 기도와 같았으면 좋겠다. ‘주님 이 땅에 평화를 주세요. 서로 싸우지 않고 사랑하며 살게 해 주세요.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예수 믿어 행복하게 해 주세요!’ 1914년의 기적이 올해 다시 이 땅에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메리 크리스마스! /서울신대 설교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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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8
  • 변질에서 희망이신 여호와께로 돌아서라
    ▲ 황인찬목사 언제부턴가 한국의 기독신자로서 자부심을 잃었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볼 때 절망하는 순간들이 많다. 정통 교회와 이단을 일반 사회가 구분하지 못하므로 이단 사이비들의 준동과 비윤리와 반사회적인 작태가 오롯이 교회의 몫이 될 때 아픔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이단과 사이비들의 행태여서 우리도 일반 사람들과 같이, 아니 더 치를 떨며 비판하고, 암 덩어리 같이 나쁜 놈들이라고 거품을 물며 그들의 해악을 말하고, 우리 교회가 진정 그렇지 않음에 자위를 했다. 하지만 정통교회와 그 목사들의 일탈과 비윤리, 비도덕의 현장이 고발될 때면, 그것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듯 한, 때로는 자랑스러워하던 인사나 교회의 것이라면 그 부끄러움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지경이 된다. 너무나도 만연한 목사들의 잘못과 부정부패, 역사의식이 실종된 망언 등을 접할 때 한국교회에 정말 희망이 있는가를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처럼 심해에 좌초된 것 같은 한국교회에 과연 희망이 있는가?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여기의 성은 환란으로 멸망에 이른 오늘의 한국교회다. 열국의 부러움을 사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열방의 수치와 모욕거리가 되었다. 선지자는 ‘슬프다’는 말로 그의 심정을 토로한다. 위로 받고자 해도 위로 자가 사라져 위로 받을 수가 없다. 상황의 악화로 그 비참함이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형편이 되었다. 선지자는 고백한다.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소망이 끊어진 것을 절망이라고 한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절망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강제로 옷 벗김을 당한 사람처럼 참담한 모습으로 손가락질 받는 조소거리가 되었다. 하나님을 마땅히 의지하고 경외해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보다 맘몬을 믿고,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을 멀리한 결과로 이렇게 되었다. 지도자들의 안중에 하나님 없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 여전히 귀 기울이지 않는다. 선지자는 이 처절한 형편에서도 희망의 불꽃을 피운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절망에 찢긴 나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포기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시는 한 희망은 있다. 우리 교회가 오물을 뒤집어쓰고,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깨어지고, 망한 자처럼 되었어도, 심판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기에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희망이 있다. 주님의 위로가 있는 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무를 베어도 그루터기는 남겨두신다. 그 남겨진 그루터기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신다. 한국교회 심장의 박동을 멎게 하지 않으시고, 의의 사람 10사람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을 찾으시고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게 하신다. 시편의 기자는 말한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의 희망, 나의 소망은 주님께만 있다. 여호와를 신뢰하고 회개의 무릎으로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변질에서 여호와께로 돌아서 희망이 되자.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하지만 고난이 인생의 큰 유익이 된다. /예장 개혁 증경총회장 의왕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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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12-04
  • 중심과 변혁
      1973년 4월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 정현숙, 박미라 선수의 한국 여자탁구가 여자단체전에서 세계를 제패했다. 8전 8승이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열렸다. 일제 강점기에 손기정 선수 이후에 한국의 어떤 스포츠가 세계를 제패한 일이 처음이었다.   이 열기로 탁구장이 많이 생겼다. 내가 중학교 때 탁구를 배운 것이 이런 흐름에서였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탁구를 가르친 코치는 늘 자신이 이에리사 선수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처음에 기본 동작을 배웠다. 붉은 벽돌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탁구장에서 동네 뒷산까지 뛰어 올라가는 일이 훈련의 시작이었다. 뒷산에서 벽돌을 들고 기본 서식을 연습했다. 한 달 동안은 탁구채를 잡지도 못하게 했다. 벽돌을 탁구채 삼아 포핸드와 백핸드 동작을 팔이 아파서 할 수 없을 때까지 반복했다.   탁구장에 돌아와서도 탁구채는 잡지 못했다. 선수급 되는 사람들이 치는 것을 관찰하게 했다. 그들의 동작을 보면서 내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한 달 정도 후에 처음으로 탁구채를 잡았는데, 신기하게 탁구가 되었다.   모든 운동에는 기본기가 있다. 그 운동에서 얼마만큼 발전하느냐는 기본기가 얼마나 잘 잡혀있느냐에 달려있다. 이것이 중심이다. 중심이 확고하면 경기를 할 때 벌어지는 다양한 변화의 상황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다. 중심이 깊고 확실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는 삶과 사회의 변화 속에서 거룩한 영향력이 강력하게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신앙의 중심이 든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을 계시라고 한다. 계시의 중핵은 성자 하나님이 사람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계시를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로 나누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을 특별계시라고 한다. 특별계시를 가장 실제적으로 말하면 66권 성경이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여기다.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이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이 기독교의 근간을 이룬다.   중심과 더불어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중심에서 밖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 또는 변혁의 탄력성이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너무도 뚜렷한 현상이 변화다. 기술의 발전과 변화의 속도는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다. 변화의 흐름에서 밀려나면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버린다. 변화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생존이 걸린 필수 항목이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 기대어 오늘날의 인간 생존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나는 변화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유일하고 완결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이와 연관된 굳건한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요 뿌리다.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자칫 잘못하면 교조주의로 빠질 수도 있다.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해명 없이 기존의 생각을 무조건 고수하는 고정관념 말이다. 성서에 대한 깊은 믿음이 교조주의의 곁길로 빠지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변화의 탄력성을 검증하는 것이다. 변화의 흐름에 문을 걸어 잠그면 교조주의로 빠진 것이다. 성경의 진리를 근간으로 시대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변혁의 역동성이 현재진행형으로 작동해야 한다. 성경은 원래 그런 책이다.   남북, 북미 관계를 중심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큰 틀이 변하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고 있다. 한국교회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중심이 분명한가, 그리고 변화의 탄력성이 충분한가?  /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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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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