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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만종(晩鐘)의 감사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만종(晩鐘)이라는 그림의 주제는 ‘감사’이다. 밀레의 만종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감사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첫째로, 고개 숙인 감사이다.만종의 화폭에 저녁기도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감사를 아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다. 반면에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사람은 가진 지식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높은 지위 때문에, 또는 종교적 경력 때문에 교만해질 수 있다.    만종에 나오는 사람들은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니고 종교적 고위층도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 하루의 삶을 감사하고 있다. 열심히 일할 터전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건강을 주셔서 활동하게 하심도 감사하고 있다. 고개가 숙여지면 고난을 당해도 감사할 수 있고, 시련을 만나도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로, 말 없는 감사이다. 만종의 그림에서 우리는 고개 숙인 채, 입도 다문 채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말이 없다는 것은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감사이다.    가슴 저미는 감사의 마음이 있다면, 오히려 할 말이 없게 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9장 15절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할 말을 잃었다는 것이다. 진정한 감사는 입에서 나오지 않고 마음에서 나온다.    셋째로, 함께 하는 감사이다.만종에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고개 숙인 모습이 있다. 나 혼자가 아닌 이웃과 함께, 한마음으로 드리는 공동체적 감사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웃이 보여야 한다. 남의 불행을 나의 감사의 조건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고, 함께 복 받고, 함께 누리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수직적인 문화만이 너무 강조되고 있다. 즉 나와 하나님밖에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수평적인 생각, 즉 이웃이 보이고 귀하게 여겨지는 신앙이 아쉽다. 불신자들은 교회의 몸집을 불리는데 동원되는 수단이 아니다. 그들 자신이 교회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고난 속에서의 감사이다. 만종이라는 그림의 배경은 가난한 부부의 감사의 모습이다.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의 감사의 모습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이는 물질이나 명예가 주어질 때 하는 감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무엇 때문에 하는 감사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어도 근원적인 감사를 드리는 귀한 감사의 모습을 배워야 하겠다.    일부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만종은 원래의 그림에서 수정된 것이라고 한다. 즉 가난한 부부의 앞에 놓인 바구니에는 본래 감자가 아니라 죽은 아기의 시체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그림 속의 부부의 모습은 슬픔이 아닌 감사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아이를 잃은 슬픔조차도 그들의 감사의 마음을 빼앗지 못하였다. 그 슬픔조차도 가슴에 묻고 두 손 모아 조용히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에서 참 신앙인의 자세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 속에서도 감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요, 다니엘과 세 친구의 감사요, 바울의 감사였다. 만종이 가르쳐주는 진정한 감사의 자세를 배우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다./한국찬송가개발원 원장·서울장신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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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1-05
  • 잘못된 감사, 잘못된 기도
       올해도 추수감사의 절기를 맞았다. 이 계절에 감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추수감사’는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지상의 양식에 대한 감사만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오히려 내 영혼을 먹이고 입히시며 무시로 생명의 양식을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함을 잘 안다. 그러면서도 이 종은 오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세상을 구하며 걱정하는 부끄러운 죄인이다.    예수님이 나의 창조주요 나의 구원주이심으로 감사하기보다는 나의 현실의 문제를 들어주시는 해결사이심으로 감사하는 한심한 종이다. 잘못된 기도를 들으시거나 잘못된 감사를 받으시는 주님이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성경은 감사의 책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감사’를 가르치고 언명하시는 책이 성경이다. 감사를 권면하는 성경 말씀이 많지만, 시편 136편은 1절부터 26절까지 전체가 “감사하라”는 명령을 반복하고 있다. 이 시편은 매 절을 “여호와께 감사하라...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는 반복법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감사(感謝)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에서 인자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그 사랑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노래하면 더 실감나고 더 피부에 와 닿는다. ‘헤세드’는 인자의 의미도 있지만, ‘은혜’, ‘은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은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모궁에서 나온다. 은혜는 어머니의 사랑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젖이다. 그 구체적인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죄인(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그런데, 인류 최고의 감사시인 시편 136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른바 ‘먹고 마시는 문제’로 감사하라는 언명은 딱 한 번밖에 없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5절) 그 외에 모든 절들이 “하나님이 참 신이심으로 감사하라”(1절~3절),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으로 감사하라”(4절~9절),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주이심으로 감사하라”(10절~24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 언명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봐야 한다. 우리의 감사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진정 참 신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하나님이 진정 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하나님이 진정 내 구원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아니면 오늘도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며 그것이 충족됨으로 감사하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도 마찬가지다(마태복음 6장 9절~13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 사함과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구하는 감사의 계절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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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1-04
  • [정론] 종교개혁과 변화 그리고 경건
       2024년은 종교개혁 507주년이 되는 해이다. 종교개혁은 비진리에 대한 저항과 개혁이 개신교회의 본질임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선언한 이후 신학운동은 16세기와 17세기를 거쳐 유럽 전역에서 꽃을 피웠고, 칼뱅의 『기독교강요』는 프랑스와 영국, 스위스를 비롯한 전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 종교개혁은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청교도 신앙의 토대를 구축하여 영적 부흥을 이끌었다. 또한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경제 자본주의의 기반을 구축하는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여, 중세의 봉건적 전통과 구전문화의 잔재를 제거하고 새로운 시대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었으며, 산업혁명은 물론 유럽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를 변혁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특히 성도들에게 영적문화의 충격과 함께 성도들의 세계관과 예배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일으켰다. 종교개혁은 교회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형성하면서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 경건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종교개혁을 통한 교회의 변혁은 크게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교회 예배 문화의 변화이다. 교회의 예배가 단순해지면서 성만찬 중심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심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메시지 전달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 종교개혁을 바탕으로 평신도들이 이해하기 힘든 라틴어가 교회 내에서 사라지고 일상적인 언어들이 사용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사제와 성가대원의 전유물이었던 교회음악의 보편화이다.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인식하에 회중들은 찬송을 부르게 되었고, 성전 예배 중심에서 삶의 영역을 중심으로 한 예배로 예배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었다. 두 번째는 교회내의 비성경적인 요인들을 제거하고 성경에 기초한 기초신앙교리 교육과 예배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교회 내의 신과 성인의 상이 우상숭배임을 적시하고, 이러한 것들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됨을 비판하고 제거하였다. 종교개혁을 통해 변혁이 일어난 교회에서는, 개혁교회의 기초인 성경을 중심한 신앙과 생활이 강조되고 교회안의 거룩한 공동체와 믿음의 형제들로 채워지면서 다양한 상처들이 치유되기 시작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함으로 자유와 평등사상을 일으켜 종교, 사람의 의식을 평등화하고 민주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칼빈은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더 발전시켜 예정설을 주장하였고, 성속이원론과 사제주의에 반대하여 모든 노동이 거룩하다는 직업소명론을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정착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루터와 칼빈에 의한 종교개혁은 많은 성과를 이루어냈지만, 개신교와 가톨릭의 전쟁과 종교가 공적영역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적영역으로 밀려나는 한계도 드러냈다.    종교개혁 507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와 성직자, 교회 공동체는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고 다음의 부분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첫째, ‘하나님 말씀의 묵상과 현실화’에 힘써야 한다. 성직자는 매일 성경 40장 이상 읽고 묵상하고, 묵상한 바를 실천할 때 신비의 계시가 능히 너희를 견고하게 함을 믿어야 한다(롬 16:26). 둘째, 하나님의 메시지, 타인과의 대화에서 ‘경청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셋째, 삶의 현장에서 ‘찬양과 기도가 현실화’되어야 한다. 넷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가르치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한다(행 28:30-31). 다섯째,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며 용서운동이 있어야 한다(욥 42:6, 10).   한국 교회가 종교개혁이 제시한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 경건한 삶의 방향을 기억하고 주님의 길을 따라간다면, 모든 이들이 구원에 이르는 역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국칼빈학회 회장·아프리카미래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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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0-22
  • [정론] 하동 이병주문학관에서
       이병주 대하실록소설 <지리산>의 주인공 박태영은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그 규칙에 순응할 수 없는 체질적 회의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죽는 순간까지 버리지 못했다. 박태영에게 내연된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생명과 가치와 존중의 정신이다. 이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과 반인간적인 것과의 진실을 찾아가는 행렬인 것이다. 나는 이병주의 <지리산>을 읽으면서 <지리산>의 서사는 사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림 이병주(1921-1992)의 대표작 <지리산> 과 그 외 80여 권에 이르는 작품을 모두 모으면 동시대를 살아간 국민의 서사가 된다. 이병주에게 소설은 허구이기보다는 현실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기에 <지리산> 은 기록문학의 한계를 뛰어 넘는 증언소설로서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역사의 그물이 놓치고 있는 삶의 모습, 역사에서 소외된 삶을 기록한 것이다.    작가 이병주의 소설과 그의 작품에 나타난 삶의 실체적 진실로서의 역사의식이 여전한 분단체제에서 우리 사회의 한 인식 지표가 되어졌다고 할 것이다. 이병주는 분단 시대의 교사로서 그의 소설을 좌우의 갈등과 대립이 여전한 지금도 방향성을 제시한 풍향계라 할 것이다.    필자가 문학지에 게재한 원고지 430매에 달하는 문학비평문 ‘이병주의 지리산, 또는 회색의 군상’을 평론하여 이병주국제문학상 연구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루 일찍 시간을 내어 2024년 9월 27일 시상식 전날, 가족과 더불어 기차를 타고 진주를 찾았다. 이병주가 걸었던 소설의 주요 공간인 진주의 중앙시장 골목에 있는 1915년 개업한 천황식당에서 진주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1936년 진주공업농림학교에 입학한 이병주도 천황식당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는 진주에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을 가꾸었고, 지리산을 휩쓴 파란을 겪는 가운데 역사와 정치와 인간이 엮어내는 운명에 대해 나름대로의 지혜를 익혔다.    거북이의 걸음을 닮은 기차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고, 그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학병이 되어 중국으로 떠난 것도 진주역에서였고, 사지에서 돌아와 도착한 곳도 진주역이었다. 진주는 이병주 문학의 요람이고 향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는 진주성 촉석루에 올라 시간의 무상을 담아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 보았다.    렌트카를 빌려 하동군 북천면 이명산 자락에 있는 이병주문학관을 찾아갔다. 길에는 코스모스, 메밀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병주는 지리산의 자락이자 다도해의 안뜰이며 섬진강 베갯머리와 같은 하동에 태를 묻고 생애를 시작했다. 하동은 박경리 <토지>와 김동리 <역마>의 무대이다. 소설가 이병주, 김병총, 시인 정공채와 정호승, 수필가 강석호, 아동문학가 남대우의 출생지 하동은 한국문학사 속의 불멸하는 문향이라 하겠다. 이병주는 하동이란 문학적 토양에서 자라나 그의 문학은 진주로,부산으로, 일본과 세계로 뻗어 나갔다. 나림이 타계한지 32년이 지났지만 하동에 세워진 이병주문학관은 세월따라 퇴색한 채 찾아오는 내방객을 맞아 나림의 71년 유정한 삶과 문학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림의 전시실에서 한국기독교 140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연합해 서울 외곽에 한국기독교문학관을 지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겼다. 한국기독교 문학사에서 불멸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마주할 수 있는 기독교문학의 서정과 서사를 담은 공간이 세워졌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았다./문학평론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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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0-15
  • 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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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0-08
  • [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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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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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많은 이들은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의 정문에 내붙인 사건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됐다고 알고있다. 한국에서는 루터가 촉발한 개혁의 종교적인 부분에 무게를 두어 ‘종교개혁’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원래는 ‘종교개혁’이 아니라 그냥 ‘Reformation’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의 요구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근래에는 검찰 개혁과 언론개혁에 관한 국민들의 열망을 뜨겁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사회개혁을 말하기에 앞서 그 출발점인 교회의 개혁, 신앙의 개혁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루터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부패에 저항하고 갱신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늘 자신의 신앙 문제로 인해 심한 내적 갈등을 경험했다. 그 대답이 무엇인가? 루터는 매 순간 오직 하나님 말씀에 매달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종교개혁의 출발점인 95개조 논제의 핵심은 1조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회개하라’(마태복음 4장 17절) 명하실 때, 그 회개는 우리의 전 삶이 돌아서는 것이다”   루터는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루터가 말했던 바와 같이 과연 오늘날 한국교회는 항상 개혁이 진행되고 있는가? 그래서 한국교회가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연합단체장인 A목사의 언행들은 사회의 지탄을 받으면서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는 수년간의 논의 끝에 많은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명성교회 부자 세습을 용인해주는 수습안을 통과시켰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일들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한 결과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결과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득권을 누리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나타난 결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한 진리보다는 가족의 이익과 조직의 이익을 구한 결과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모습 앞에서 우리가 진정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붙잡고 회개하는 일이다.   회개한다는 말을 여러 가지 의미로 정의할 수 있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이다. 설교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되어 선포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씨름하며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손쉽게 남의 설교를 표절해서 전하는 목사님들도 있다. 교인들은 목사의 말이라면 아무런 의심 없이 그저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다. 그렇기에 오늘한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을 먹고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웃에게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주며 살라고 하셨지만, 한국교회는 돈과 권력과 지위를 구하며 살고 있다. 진실로 한국교회의 회개가 필요한 이유이다.   루터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았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교황에게 저항할 수 있었고 교회를 개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정신이 ‘오직 성경으로’이다. 오직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고 출발점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다시 그 출발점에 서야 한다. /루터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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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0-23
  • 루터의 정신따라 문서선교 나서자
      10월 종교개혁의 달이다. 루터와 종교개혁에 대해서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오늘은 루터의 성경번역과 종교개혁을 완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쇄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필자는 오래전에 독일의 종교개혁 성지를 여행한 경험이 있다. 그때 발트불그 성을 방문했었다. 아이제나크 시내가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그야말로 그림같이 아름다운 동화 속의 성같은 곳이다. 바로 이곳이 루터가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한 그 역사적인 현장이다. 만약 루터가 적대자들에게 쫓겨 이곳으로 피신하지 않았다면 성서는 독일어로 번역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 갇히는 신세가 됨으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말로 성서를 읽게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루터를 이곳 발트불그 성에 가두어 놓았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 그 비밀의 섭리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안내원의 인도에 따라 루터가 성서를 번역했다는 바로 그 방으로 갔다. 그리 크지 않은 방으로 6~7평 정도 돼 보이는 방이었다. 나무로 된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옆에 창문이 나 있었다. 아마도 루터는 이 책상에 앉아서 기도했고 성서를 번역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답답하면 창문을 열고 발크불그성 주변의 숲과 저 멀리 아이제나크 시내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하게 된 그 환경을 오히려 성서를 번역하여 인류 사회에 공헌하는 기회로 역전시킨 루터의 멋진 뒤집기 한 판 승부가 가슴 뿌듯한 인생 드라마로 가슴속에 다가옴을 느꼈다. 지금도 그때 그 가슴에 벅차오르던 감격이 생생하다.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는 무엇일까? 당시의 성서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소수의 성직자 외에는 성경에 대한 접근은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또한 성서에 대한 해석권한도 교회 즉 교황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당시의 성도들은 사제가 읽어주고 해석해 주는 그 성서만을 듣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반 성도들은 사실상 성서에 대해서는 눈뜬 장님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루터는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독일어로 번역했다. 소수 사제들만의 성경을 일반 대중들에게 돌려준 것이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은 그 어떤 것보다도 위대한 종교개혁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루터의 종교개혁을 보이지 않게 도왔던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인쇄 매체였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1455년 당시 독일 남서부 마인츠라는 도시에서 가동되기 시작했다. 50여년 뒤에는 독일의 60개 도시와 유럽의 12개국에까지 보급되었다. 이 인쇄기 덕분에 일반인들도 관심거리를 신속히 대량으로 접할 수 있었다. 지금은 신문이나 방송이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대중 매스미디어가 없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발명되고서 비로소 뉴스의 다중전달이 가능해진 것이다. 루터가 작성한 95개 조항 논제도 인쇄되어 배포되었을 것이다. 교회 개혁 문제는 더는 비텐베르크의 캐슬처치 대문에 붙어있는 종이조각이 아니었다. 그 문제는 광범위하게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종교개혁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바로 인쇄술의 발달이라는 또 하나의 조력자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도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땅끝까지 복음전파라는 주님께서 주신 그 사명을 외면할 수는 없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독일어 성경번역과 당신의 인쇄술이 도왔듯이 오늘 우리들의 복음전파를 돕는 수많이 매체들이 있다. 어찌 이 시대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도구들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 도구들을 활용한 지상명령의 수행은 이제 우리 신앙인들의 몫이다.    /루터회 증경총회장·새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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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0-17
  • “살아있는 기독교 문화를 세우자”
      세상사 모든 일들에 목적이 있듯이 교회에도 목적이 있고, 교회의 목적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교인들이 누구인가.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시므로 교회를 세우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교인들과 교회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빛과 소금’이 아니고 ‘소금과 빛’이다.   먼저 교인들과 교회들은 이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인들과 교회들은 기질과 특성이 ‘소금’으로 바뀌어 진 존재들이라고 주님은 말씀했다. 본래는 소금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피와 살로 그 기질과 특성이 ‘소금’으로 바뀌어 진 존재들이라고 말씀했다. 존재에 변화가 일어났을 때 행실과 역할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소금’이 하는 일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썩는 것을 막는 일이다. 생선에 소금을 뿌리면 생선이 썩지 않는다. 무와 배추에 소금을 뿌리면 무와 배추가 썩지 않는다. 소금은 썩는 일을 방지한다. 즉 방부제의 역할을 한다. 두 번째는 맛을 내는 일이다. 생선에 소금을 뿌리면 맛있는 굴비도 되고 맛있는 고등어도 된다. 무와 배추에 소금을 뿌리면 맛있는 김치가 된다. 소금은 맛을 낸다. 세 번째는 스스로 없어지는 일이다. 소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녹아서 없어지고 만다.   세상에 대한 신자들과 교회들의 사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교인들과 교회들은 썩어져 가는 세상과 사회를 위해 방부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세상과 사회는 그 대로 놔두면 썩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들은 맛이 없는 이 세상의 삶을 위해 조미료의 역할을 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삶의 보람과 의미, 재미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소명 의식과 사명 의식을 부여해 주어야 한다. 또한 교회들은 세상의 어느 곳이나 깊이 파고 들어가서 녹아 없어지는 희생의 역할을 해야 한다. 없어진다는 것은 희생을 의미하고 손해 보는 것을 뜻한다. 돈도 손해보고 시간도 손해보고 건강도 손해보고 마지막에는 생명도 손해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교인들과 교회들이 ‘소금’이 되었을 때 ‘빛’의 역할도 감당할 수 있다. ‘빛’이 하는 일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어두움을 몰아내는 일이다. 숨어 있던 더러운 것들을 밝히 드러내는 정화와 청결의 일이다. 둘째는 밝음과 따뜻함을 가져다주는 온화의 일이다. 빛이 비치면 따뜻함과 기쁨이 생긴다. 셋째는 방향을 제시하는 등대의 일이다. 등대의 빛은 배가 항해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세상에 교인들과 교회들의 사회적 책임도 마찬가지다. 교회들은 첫째로 세상의 어두움과 죄악을 드러내고 몰아내는 정화와 청결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어 어둡고 차가운 이 세상에 밝음과 따뜻함의 빛을 비치는 온화의 역할을 해야 한다. 셋째로 혼돈 가운데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안내자의 역할도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교인들과 교회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 중의 하나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선하고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할 일은 소금과 빛이 되어 착한 행실들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는 일이다. 기독교 문화는 우리 사회 전반에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는 기독교인들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세속의 문화가 우리 젊은이들의 사고를 지배할 때 우리 교인들과 교회들이 소금과 빛의 문화를 사회 속에 퍼뜨려야 한다. 세상의 문화가 쫓고 있는 썩고 음침한 것들을 정화하여 십자가가 드러나는 영생의 빛을 소개해야 한다. 기독교 문화는 세상에 맛을 내고 빛을 더하는 역할을 감당해내야 한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강변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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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0-02
  • 정의를 부도내지 말자
    과거 미국 오바마 정부가 부도날 뻔 한 적이 있다. 미의회는 의회의 합의에 따라서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1시간 30분 앞둔 시점에 셧다운을 끝내고 디폴트를 막기 위한 합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긴장시켰던 미국의 국가 부도 위기는 일단 모면했으며 일시 해고됐던 40만 명의 공무원은 16일 만에 다시 일터로 돌아가게 됐다. 문을 닫았던 연방 정부 기관들은 17일부터 다시 문을 열고 정상업무에 들어갔지만 2주가 넘는 셧다운의 피해액이 약 25조 7천억 원에 달하게 됐다.   세상은 신용사회다. 부도를 내면 안 된다. 79년도에 미국에 처음 가서 신학교도 다녀야 하고 교회일도 돌보아야 할 것 같아 중고차를 사려고 자동차딜러에 가서 차를 고른 뒤 계약금을 조금 내고 나머지 금액을 융자하려고 하니 크레딧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여 친구목사가 대신 보증을 서서 자동차를 산 기억이 난다. 미국은 신용사회여서 크레딧이 없으면 아파트도, 자동차도, 심지어는 전화도 놓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오래전 뉴스를 보니 신용에 신용을 가져야할 미 연방 하원의원들이 작게는 수십장에서 많게는 700여장까지 개인수표를 습관적으로 부도내어 은행들을 골탕 먹였다니 미국의 양심도 이제는 부도나기 시작하였는가 보다. 금융가의 부도, 정치인의 부도 등 여기저기 부도로 인하여 국민들이 불안해지고 있다. 이것은 돈의 부도가 아니라 양심의 부도인 것이다.   일찍이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은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D. C. 링컨 메모리얼 기념관 앞에서 열린 흑인 노예해방 100주년 기념대회에서“나는 한 꿈을 가지고 있다”란 명연설을 했는데 그는 그 연설 중에서“나는 나의 네 자녀가 언젠가는 피부 색깔에 의해 차별받는 그런 세상이 아닌 성숙한 성품에 따라 대우받는, 그런 세상에서 살 것을 꿈꾸고 있다”고 절규에 가까운 호소를 했다. 또한 킹목사는 자유를 위해 같이 투쟁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고통을 나누고 같이 감옥에 가면 어느 날인가 우리는 자유를 쟁취하게 될 것이며 그 자유의 종소리가 이 마을과 저 도시에 울려 퍼질 때 흑인과 백인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개신교와 천주교인이 손에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드디어 자유를”이란 영가를 부를 것이라는 간절한 꿈을 갖고 투정했는데 막상 헌법을 통해 자유를 얻고 보니 그것은 부도난 수표였다는 것이다.   법은 있는데 적용이 안 되고 외모는 있는데 알맹이가 없어 찾아 쓸 수 없는 부도난 수표만을 받았다고 통탄한다. 정치인이 선거철에는 공약을 하고 그리고 어느 정도 되면 그 공약을 부도낸다. 사업가가 국민의 유익을 위해서, 민생을 위해서 사업한다고 말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 말은 사라지고 개인 이익에 취하여 그 말을 부도낸다.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은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필요충분의 조건일 수밖에 없겠지만 국가를 경영하는 한 리더의 결정의 관점에서 보면 또 하나의 부도일 수밖에 없다. 교수들의 서명운동과 서울에 있는 명문대생들의 촛불시위 그리고 야당 의원들의 삭발을 허투로 봐서는 안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아담의 후손이다. 우리 속에는 탐심과 거짓과 시기와 질투가 자리 잡고 그리고 밖으로는 정의와 공의와 진리를 추구하고 있지만 실상은 본질적으로 죄의 속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나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도를 고의적으로 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 더 주님을 가까이하고 성령으로 거듭날 때 우리는 좀더 이 세상을 밝게 할 수 있는 정의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은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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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9-25
  • 고향교회와 하나 되는 한국교회
      얼마 전 민족의 명절 한가위를 맞아 기쁜 마음을 한 아름 안고 고향을 찾아온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추석은 한마디로 ‘민족의 대이동’이라 불릴정도로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았다.오늘날 명절 풍속도는 과거와 사뭇 많이 바뀌었지만, 온 가족이 한곳에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며 정을 나누는 일에는 변함이 없으리라 본다. 어린 시절 한때로 기억하기에는 우리네 고향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세월의 미동 없이 우리를 반겨주는 고향의 존재는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 얼마 남지 않은 안식처이다. 그리고 고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는 유전적 가족만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가족인 교회가 고향에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산업사회에 진입하면서 일어난 도시 집중화 현상은 고도성장 시기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귀농·귀촌 문화가 조금씩 퍼지고 있지만, 일자리와 양질의 교육을 찾고자 대도시로 몰려드는 젊은 사람들의 행렬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렇기에 학교를 끝마치고 풀밭을 뛰놀던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고 예수님 말씀을 가르치던 주일학교도 문을 닫는 일이 지금 우리네 고향의 현실이다. 이는 고향교회가 처한 위기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임계점이 넘어버린 것으로 교인 수의 회복을 넘어 교회 생존을 염려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고향교회의 현실이다.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교회만이라도 이 사회가 돌보지 못하는 저 고향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면 고통을 호소하며 삶을 지탱하기 버거워하는 우리의 고향을 돕는 일에 힘써야 한다.도시교회처럼 우리가 자주 찾아가지는 못할지언정 고향교회를 지키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서 있는 자리 또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리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할 영적 공간임을 잊어선 안 된다.이 공간을 채우고자 오랫동안 명절마다 고향교회 방문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해왔다. 오랜 울림이 한국교회에 전달되었는지 많은 이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 감회가 새롭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 구성원 모두가 지속적으로 고향교회를 위해 부단히 움직여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고향교회를 위한 헌금문화 정착을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바이다.미국사회에선 유고 시 가족들에게 필요한 만큼 재산을 남겨주고 남은 재정을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다니던 교회에 상속하는 문화가 있다. 그저 부모님과의 추억을 상기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교회를 돕기 위함 때문이다. 또한 소득 일부를 고향교회에 매달 보내기도 하기도 한다. 비록 몸은 도시에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존재임을 자각하는 기독교인들이 뜻을 모아 고향교회를 돕는 이 문화는 한국교회가 충분히 본받을만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지금까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 속에서 한국교회가 부흥한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받은 이 축복은 도시에 있는 개교회만을 위함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 공동체 전체에 나누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희망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하나님의 바람에 우리 모두 함께할 때 하나님의 나라에 한 발짝 더 다가가지 않을까. 고향교회를 향한 한국교회의 사랑이 식지 않길 소망한다. /미래목회포럼 이사장·거룩한빛광성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9-06
  • 추석 명절을 믿음 안에서
      추석명절을 맞이한다. 옛날 명절은 그 의미가 상당히 컸었다. 기대감과 기다리는 마음도 있었고 헤어져 있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혈육공동체를 재삼 확인하고 우의를 다지는 기회였다. 그래서 어렸을 때 그 명절날을 손꼽아 고대하며 기다렸던 추억이 있다. 그 시대에는 사회공동체 그리고 가족공동체가 오늘같이 흩어지지 않고 강하게 결속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때에는 지금보다 훨씬 도덕과 질서와 상하관계가 분명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공동체의 건강성이 심하게 훼손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에 가서 살아갈 강령을 주실 때 모든 남자는 일년에 세차례 예루살렘에 모일 것을 당부하셨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명령하신 대로 연 3차례 예루살렘에 모여 이스라엘 공동체를 확인하고 돌아가곤 하였다. 그들은 시골길을 걸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도 그 행군을 번거로워 하지 않았다. 적어도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명절의 의미는 명절 그 이상의 날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명절에 대한 기대도 기다림도 없고, 명절이 무슨 날인지도 모른채 살아간다. 오늘은 그만큼 삶이 삭막해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잊혀져 가는 명절의 의미를 되새겨 새롭게 가정공동체 그리고 민족의 공동체를 다시 확인하고 모두들 뿔뿔히 흩어져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의 느슨한 삶을 다시 조여주고 구심점을 확인시켜 주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이 추석은 우선 감사의 날로 맞아야 한다. 설날은 일년의 삶을 하늘에 맡기는 명절이라면 추석은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날이다. 우리나라는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추석절에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다. 농사는 하늘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함을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농부들은 경거망동을 하지 않는다. 가물때에는 하늘에 비를 달라고 기우제를 드렸고 옛날 동네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모두 모여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말하자면 회개의 제사였다. 그리고 농부들은 농사를 지어 첫곡식으로 먼저 하늘에 감사하고 이웃끼리 나누어 먹었다. 그것이 인간 삶의 원형이다. 이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 그런데 오늘은 지각없는 시대가 되었다. 오늘은 지식은 있는데 지혜가 부족하고, 꾀는 있는데 덕이 부족하고, 누림은 있는데 감사가 없다.   그리고 추석은 가정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명절이다. 성경을 보면 명절날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객과 고아들과 함께 즐겁게 지키라고 하셨다. 가정을 결속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최대관심처는 가정이다. 가정에 대해서 상당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정 파괴범은 중벌로 다스리도록 하셨다. 가정은 신성해야 하고 경건이 있어야 하고 튼튼해야 한다. 가정은 몸의 심장같은 곳이다. 가정이 건강하면 삶 전체가 건강해진다.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명절은 먹고 마시고 노는 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날이다.   특히 오늘 명절의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것은 우리사회가 산업화 사회로 발전하면서 가족공동체가 전국단위로 그리고 세계로 흩어지면서 명절이 없으면 1년에 한차례의 만남도 이루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 결과 오늘 가족공동체가 느슨해지고 가족애가 사라지며 더 나아가 민족 공동체의 분열양상으로까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현대인들에게 이 명절의 의미가 다시 해석되고 새롭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흩어지는 이 시대에 소중한 우리의 가정과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결속되게 만드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촌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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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5
  • 장로교 총회를 향한 우리의 기대
     매년 9월이 오면 장로교는 성총회가 열리고 교단을 섬기고 이끌어 갈 지도자(총회장)를 선출하게 된다. 지도자의 책임이 참으로 중요하다. 서양 속담에 “노루가 이끄는 사자떼보다 사자가 이끄는 노루떼가 더 강하다”란 말이 있다. 지금 이 나라도 지도자로 인하여 양분되고 사람들이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이번 성총회를 통해 하나님 마음에 맞는 우리 모두가 기대하는 바른 지도자가 세워지기를 바란다. 총회를 앞두고 오늘의 한국교회를 생각하면서 한국교회의 원로로써 몇 가지 조언을 하고 싶다. 첫째로 현재 한국교회를 가르켜 위기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교회 위기는 바로 지도자의 위기이다. 그러기에 이런 위기의식으로 지도자 된 우리가 자신의 처절한 회개와 결단과 각오를 갖는 성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모 언론지에서 종교지도자들의 신뢰도가 신부나 승려보다 개신교 목사가 더 낮아지고 있다는 부끄러운 보도를 보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지도자 된 우리가 먼저 변화하고 결단하면 교인들이 변화되어 한국교회가 변화됨으로 이 사회를 향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둘째로 사분오열되고 있는 한국교회를 연합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성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 주님은 하나되기를 원하시며 하나되기를 명령하셨는데 현재 한국교회(특히 장로교회)는 교리와 신학을 핑계로 찢어지고 갈라져있지 않은가? 심지어 교회연합기관마저 연합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모습이므로 사회를 향해서도 기독교가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기에 사회로부터 실망과 무시를 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얼마전 장로교 합동측과 통합측 지도자들이 함께 연합으로 예배드린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잘하고 있다고 격려의 말도 하고 싶다. 교리나 신학도, 그리고 어떤 이해관계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 셋째로 한국교회는 우리의 자세를 더 낮추어 우리 주위에 약한 이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에 더욱 힘쓰는 성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 안에 우리가 돌봐야 할 소자들이 많이 있다. 그곳이 바로 작은 개척교회들과 목회자들이다. 외적으로는 한국교회가 큰 부흥을 가져 왔기에 세계 10대 교회 안에 한국교회가 6교회나 된다고 하며 세계 곳곳에 파송된 한국 선교사들이 미국교회 다음으로 파송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 안에 작은교회(미자립)가 70%를 넘고 있다는 현실을 우리가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큰 교회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식으로 작은교회가 자립하도록 결단을 해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 유가족 자녀를 돌보는 일에도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필자는 은퇴 후 10년이 동안 비전교회와 목회자 유가족 자녀들의 장학사업을 계속 보람있는 사역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탈북자들을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보듬어야 한다. 얼마 전 서울 관악구에서 일어난 탈북자 모자가 굶어 죽었다는 가슴 아픈 보도를 들으면서 여기에 한국교회는 책임이 없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탈북자들을 선교하고 돌봄으로 이들이 통일될 때 북한선교의 주역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총회나 총회장 선거와 이·취임식이나 거대하게 치루고 마는 모임이 되지 않길 바란다. 한마디 더 충언하고 싶은 것은 사회적으로 교회적으로 비판의 이슈가 되는 M교회 문제도 이번 총회에 신선하게 마무리되어 우리 모두 박수칠 수 있길 기대해본다. 귀 총회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좋은 결실이 있는 성총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싶다.  /기감 전 감독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19-08-27
  • ‘책’이 허물어지는 시대
    대한기독교서회는 구한말에 문서선교를 위한 교회연합기관으로 설립되어 올해 6월로 129주년이 지났다. 내년 130주년 기념 준비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즈음에 생각이 복잡하다. 과연 ‘문서 선교’라는 것이 앞으로도 유효한 일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가 쉽지 않다.  한때 전자책이 출현하면서 종이책이 살아남을지를 놓고 찬반 논의가 뜨거웠다. 그러나 이 논의는 이제 진부한 일이 되었다. 종이책과 전자책 사이의 관계가 그리 적대적이지 않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지금은 종이책·전자책 상관없이 책을 읽지 않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책’이라는 ‘개념’ 자체가 기초로부터 무너져 내리는 때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요즘 사람들도 인터넷에서 글자로 된 텍스트를 읽는다. 그러나 그것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정보를 찾아서 읽을 뿐이다. 정보는 질문에 즉답을 주지만, 단편적이고 실용적이다. 그에 반해 책은 오랫동안 연구한 지식이나 지혜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묶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책에는 서론이 있고, 주제에 대한 연구사나 주제에 대한 반론까지를 포함하는 다양한 논의를 통해, 왜 저자의 논지가 옳은지를 드러내고 입증하는 본론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정리하는 결론이 있다. 그러니 한 덩이의 문서, 한 권의 책을 읽으면 거기 담긴 저자의 질문과 고뇌, 길을 찾기 위한 연구의 노력, 잘 정리된 지식과 지혜를 얻게 된다.  책은 인류가 글자를 발명한 이후 오랫동안 지식과 지혜를 담는 소중한 그릇이었다. 하지만 이제 정보를 찾기 위해 전자책이든 종이책이든 서론부터 결론까지 인내심을 갖고 읽는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 짧은 정보와 영상이나 동영상을 찾는 시대가 되었고, 공영방송에서 대한민국의 ‘난독’ 증상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에까지 이르렀다.  기독교,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책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만큼 많은 신학과 신앙서적을 생산한 종교는 없을 것이다. 종교개혁에 맞선 프랑스 구교는 개신교인을 색출할 때, 성서 ‘책’이 나오면 체포했다. ‘책’이 개혁교인의 증거였던 셈이다. 책을 가진 신앙인들은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고 처형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책’에서 멀어졌다. 간증이나 성공이야기 정도는 몰라도 진지한 질문으로 책을 정독하는 사람들은 찾기 어려워 보인다. 한쪽에서는 ‘성경필사’가 유행하지만, 예배시간조차 찬송 성경을 찾아 읽는 사람은 드물다. 예배당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성경 구절, 찬송 가사나 멜로디를 다 보여주기 때문이다. 교회 홈페이지에도 동영상이 넘쳐다.  시대를 어찌 거스르겠나 싶기는 하지만, 책에서 건지는 지혜는 다른 곳에서 얻기 힘들고, 책에서 건지는 신앙 성찰의 깊이는 다른 곳에서 구하기 어려울 것이니, 생각만 더욱 많아진다.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런 문제에 관해서 토론하는 때가 올까?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능성이 희박할 거라는 비관이 우세하지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남겨놓아야 하는가?  요즘 한일 간 대립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부당하고 무례한 아베 내각의 처사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른다. 경제적으로 일본을 넘어서자는 ‘극일’ 분위기가 팽배하다. 하지만 경제만일까. 문화적으로 책과 문서에 대한 태도에서도 일본을 앞서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문서선교’라는 개념은 나를 곤궁하게 만든다.  /대한기독교서회 사장
    • 오피니언
    • 정론
    2019-08-12
  • 통일운동은 ‘반공이데올로기’ 극복부터
     언젠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한 기독교텔레비전에서 강남의 어느 교회 예배실황을 중개하는 것을 우연히 지켜본 적이 있다. 마침 목사가 통성기도를 인도하는데 내용이 이러했다. “저 아말렉과 같은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과 남쪽의 좌익용공세력을 모조리 도말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자 그 안에서 우렁찬 함성으로 ‘아멘’이라고 응답하였다. 목사는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남한의 용공좌익세력을 하나님께 다 칼로 쳐 죽여 달라고 통성으로 기도한 것이고 교인들은 다 우렁차게 아멘을 한 것이다. 그러면 북한의 2천만을 쳐죽여야 하고 남한에서도 얼마간의 사람들을 쳐 죽여야 한다고 했을 때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심정은 참으로 착잡하실 것이다. 세상에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목사가 기도할 때 수천만 명을 대량학살해달라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수천명이 넘는 교인들이 일제히 아멘했으니 우리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착잡한 심정을 넘어 아연실색을 하셨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목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2천만 명 이상 칼로 쳐서 죽이신다면 그 하나님을 우리가 은총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몇몇의 한국교회 무리들은 예수님의 화해의 십자가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무리들 중에 서 있었다. 갈등과 대립의 한반도 위에 어떻게 예수님 십자가 고결하신 뜻을 펼치기보다는 사울의 열심을 가지고 남과 북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반기독교적인 반예수적인 행태들을 계속해 온 것이다. 십자가의 속죄의 은총을 나누어진 남과 북의 갈등과 대립의 현장에 대입시키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보수적 정권보다도 더 강한 멸공주의와 반공주의를 앞세워 실질적으로는 평화통일을 반대하고 멸공통일 흡수통일을 지향해 왔다.  역대 보수를 표방한 정권과 세력들은 남북 간의 갈등을 극대화시키고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고조시켜 자신의 독재정권을 계속 유지하려 했고 실질적으로는 같은 이해를 가진 북쪽과 적대적 공존을 해왔다. 이런 악한 정권들에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빌붙어 독재정권과 부화뇌동하며 서 반공과 멸공을 십자가 신학보다도 더 앞장세워 자기 스스로 반기독교의 세력임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한국 기독교는 통일운동을 하기 전에 먼저 그동안 기독교의 정체성과 반대로 가서 반공이데올로기를 절대화하고 그리고 정권과 빌붙어 온갖 이권을 노렸던 타락한 일들을 먼저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반공주의를 내세우던 기독교 세력에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고 침묵으로 신경을 껐던 세력들도 이제 회개를 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과거의 죄악을 회개함으로 시작해야 한다. 또한 무슨 흡수통일이 되면 북한에 내 교파 내 교단의 교회들을 세우겠다는 발상을 버려야한다. 그리고 어떻게 남과 북이 이질성을 최소화하고 동질성을 극대화하여 하나 됨을 이루는 일에 우리 교회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한반도 위에 육화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또 그 일을 실행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눈물로 씨를 뿌리는 가운데 한반도에 드리우는 먹구름 속에서도 언뜻언뜻 푸른 하늘을 보이게 하는 일에 우리 한국교회가 귀하게 쓰일 것이다. /기장 전 총무·작천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8-06
  • 한국교회의 한목소리가 필요한 때
     최근 우리 사회가 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심각한 이념대립에 휩싸이는 모습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이러한 좌와 우의 이념대립은 더 나은 역사발전에 긍정적인 부분이 있지만, 심각한 사회적인 혼란을 야기하는 하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 최근 우리 대통령이 평화와 화해를 전제한 대북정책을 내 걸고,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은 감사한 것이지만, 북한 최고권력자의 언행과 태도의 별다른 무 변화에 비해 오히려 우리는 우리 대통령의 지나친 친북적인 언행에서 대한민국 체제안정의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국민의 눈에 이념대립을 더욱 부추기는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게다가 그간 북한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소위 ‘주사파’의 여론몰이 행동에서 이념대립은 더욱 극렬해 지는 모습이다.  그러면 이러한 이념대립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먼저 우리 대통령의 포용적 리더십의 발휘가 참으로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한국교회의 대사회적인 역할이 중요해 진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념대립의 혼란극복에 기여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 이다. 그러한 역할이 한국사회를 더욱 안정하게 하며, 실제로 우리 국민들을 진리의 길로 선도하는 구원의 사회적 역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마저도 하나된 목소리로 시국의 혼란에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사회의 이념대립을 부추기는 당사자들이 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게 여겨진다.  최근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가 ‘용감하게’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면서 우리사회의 좌편향을 향한 이념전쟁을 선포했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대립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반대로 ‘한국교회원로들’을 비롯한 한쪽 진영에서는 한기총 대표의 행동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도, 좌편향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가를 내 놓지 않아 역시 한쪽에 치우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같아 역시 안타깝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한국교회가 우리사회의 좌우이념대립 극복에 기여할 기회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묻고 싶다. ‘한국교회원로모임’을 비롯한 반대측이 한기총을 끌어안으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 정권과 우리 사회의 좌편향적 행보에 대해 우려의 한목소리로 대응할 수는 없었던가? 그리고 진보적인 교회의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있는데, 이 기관은 왜 지금 정치적 상황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는가? 한기총은 지금 한국교회의 대표적 교단들의 불신으로 그 대표성이 의심되고 있다. 대표회장은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고 투명하지 않은 재정문제로 경찰조사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지난 90년대 대북식량지원에 앞장섰던 한기총 역사를 생각하면 오히려 한기총이 회개하여 연합기관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우리 모두 이제 새로운 교회연합운동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교회는 현 시국의 이념대립문제를 인지하고, 대통령을 지지하는 목소리와 반대하는 목소리 모두에게 귀를 기울여야하다. 어쨌든 한국의 보수교회와 진보교회가 서로 연대하여 한국교회가 대정부, 대사회, 대북한, 대국제적인 이슈들에 한목소리로 진리를 증언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행동이 절실히 필요한 때가 분명하다.  /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전 총신대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1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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