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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하동 이병주문학관에서
이병주 대하실록소설 <지리산>의 주인공 박태영은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그 규칙에 순응할 수 없는 체질적 회의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죽는 순간까지 버리지 못했다. 박태영에게 내연된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생명과 가치와 존중의 정신이다. 이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과 반인간적인 것과의 진실을 찾아가는 행렬인 것이다. 나는 이병주의 <지리산>을 읽으면서 <지리산>의 서사는 사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림 이병주(1921-1992)의 대표작 <지리산> 과 그 외 80여 권에 이르는 작품을 모두 모으면 동시대를 살아간 국민의 서사가 된다. 이병주에게 소설은 허구이기보다는 현실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기에 <지리산> 은 기록문학의 한계를 뛰어 넘는 증언소설로서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역사의 그물이 놓치고 있는 삶의 모습, 역사에서 소외된 삶을 기록한 것이다. 작가 이병주의 소설과 그의 작품에 나타난 삶의 실체적 진실로서의 역사의식이 여전한 분단체제에서 우리 사회의 한 인식 지표가 되어졌다고 할 것이다. 이병주는 분단 시대의 교사로서 그의 소설을 좌우의 갈등과 대립이 여전한 지금도 방향성을 제시한 풍향계라 할 것이다. 필자가 문학지에 게재한 원고지 430매에 달하는 문학비평문 ‘이병주의 지리산, 또는 회색의 군상’을 평론하여 이병주국제문학상 연구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루 일찍 시간을 내어 2024년 9월 27일 시상식 전날, 가족과 더불어 기차를 타고 진주를 찾았다. 이병주가 걸었던 소설의 주요 공간인 진주의 중앙시장 골목에 있는 1915년 개업한 천황식당에서 진주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1936년 진주공업농림학교에 입학한 이병주도 천황식당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는 진주에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을 가꾸었고, 지리산을 휩쓴 파란을 겪는 가운데 역사와 정치와 인간이 엮어내는 운명에 대해 나름대로의 지혜를 익혔다. 거북이의 걸음을 닮은 기차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고, 그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학병이 되어 중국으로 떠난 것도 진주역에서였고, 사지에서 돌아와 도착한 곳도 진주역이었다. 진주는 이병주 문학의 요람이고 향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는 진주성 촉석루에 올라 시간의 무상을 담아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 보았다. 렌트카를 빌려 하동군 북천면 이명산 자락에 있는 이병주문학관을 찾아갔다. 길에는 코스모스, 메밀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병주는 지리산의 자락이자 다도해의 안뜰이며 섬진강 베갯머리와 같은 하동에 태를 묻고 생애를 시작했다. 하동은 박경리 <토지>와 김동리 <역마>의 무대이다. 소설가 이병주, 김병총, 시인 정공채와 정호승, 수필가 강석호, 아동문학가 남대우의 출생지 하동은 한국문학사 속의 불멸하는 문향이라 하겠다. 이병주는 하동이란 문학적 토양에서 자라나 그의 문학은 진주로,부산으로, 일본과 세계로 뻗어 나갔다. 나림이 타계한지 32년이 지났지만 하동에 세워진 이병주문학관은 세월따라 퇴색한 채 찾아오는 내방객을 맞아 나림의 71년 유정한 삶과 문학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림의 전시실에서 한국기독교 140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연합해 서울 외곽에 한국기독교문학관을 지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겼다. 한국기독교 문학사에서 불멸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마주할 수 있는 기독교문학의 서정과 서사를 담은 공간이 세워졌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았다./문학평론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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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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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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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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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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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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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하동 이병주문학관에서
- 이병주 대하실록소설 <지리산>의 주인공 박태영은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그 규칙에 순응할 수 없는 체질적 회의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죽는 순간까지 버리지 못했다. 박태영에게 내연된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생명과 가치와 존중의 정신이다. 이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과 반인간적인 것과의 진실을 찾아가는 행렬인 것이다. 나는 이병주의 <지리산>을 읽으면서 <지리산>의 서사는 사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림 이병주(1921-1992)의 대표작 <지리산> 과 그 외 80여 권에 이르는 작품을 모두 모으면 동시대를 살아간 국민의 서사가 된다. 이병주에게 소설은 허구이기보다는 현실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기에 <지리산> 은 기록문학의 한계를 뛰어 넘는 증언소설로서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역사의 그물이 놓치고 있는 삶의 모습, 역사에서 소외된 삶을 기록한 것이다. 작가 이병주의 소설과 그의 작품에 나타난 삶의 실체적 진실로서의 역사의식이 여전한 분단체제에서 우리 사회의 한 인식 지표가 되어졌다고 할 것이다. 이병주는 분단 시대의 교사로서 그의 소설을 좌우의 갈등과 대립이 여전한 지금도 방향성을 제시한 풍향계라 할 것이다. 필자가 문학지에 게재한 원고지 430매에 달하는 문학비평문 ‘이병주의 지리산, 또는 회색의 군상’을 평론하여 이병주국제문학상 연구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루 일찍 시간을 내어 2024년 9월 27일 시상식 전날, 가족과 더불어 기차를 타고 진주를 찾았다. 이병주가 걸었던 소설의 주요 공간인 진주의 중앙시장 골목에 있는 1915년 개업한 천황식당에서 진주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1936년 진주공업농림학교에 입학한 이병주도 천황식당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는 진주에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을 가꾸었고, 지리산을 휩쓴 파란을 겪는 가운데 역사와 정치와 인간이 엮어내는 운명에 대해 나름대로의 지혜를 익혔다. 거북이의 걸음을 닮은 기차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고, 그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학병이 되어 중국으로 떠난 것도 진주역에서였고, 사지에서 돌아와 도착한 곳도 진주역이었다. 진주는 이병주 문학의 요람이고 향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는 진주성 촉석루에 올라 시간의 무상을 담아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 보았다. 렌트카를 빌려 하동군 북천면 이명산 자락에 있는 이병주문학관을 찾아갔다. 길에는 코스모스, 메밀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병주는 지리산의 자락이자 다도해의 안뜰이며 섬진강 베갯머리와 같은 하동에 태를 묻고 생애를 시작했다. 하동은 박경리 <토지>와 김동리 <역마>의 무대이다. 소설가 이병주, 김병총, 시인 정공채와 정호승, 수필가 강석호, 아동문학가 남대우의 출생지 하동은 한국문학사 속의 불멸하는 문향이라 하겠다. 이병주는 하동이란 문학적 토양에서 자라나 그의 문학은 진주로,부산으로, 일본과 세계로 뻗어 나갔다. 나림이 타계한지 32년이 지났지만 하동에 세워진 이병주문학관은 세월따라 퇴색한 채 찾아오는 내방객을 맞아 나림의 71년 유정한 삶과 문학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림의 전시실에서 한국기독교 140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연합해 서울 외곽에 한국기독교문학관을 지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겼다. 한국기독교 문학사에서 불멸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마주할 수 있는 기독교문학의 서정과 서사를 담은 공간이 세워졌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았다./문학평론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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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하동 이병주문학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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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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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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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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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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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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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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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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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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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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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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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극복을 위한 부활절의 기도
- 교인이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예배가 가장 우선이라고 대답 할 것이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봉사하며 헌신하는 것도 성도들이 실천해야 할 덕목이지만 이것은 대상이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배는 그 대상이 만왕에 왕이시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분께서 우리를 친히 초청해 주심에 우리가 응답함이라 할 것이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하여 지자체 단체장인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가 교회를 향해 행정명령을 내린 것을 대통령이 지지하는 상황을 접하면서 종교에 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함과 아울러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언론에서도 최근 담임목사가 구속된 특정교회의 예배모습을 계속해서 며칠씩 방영하여 마치 이 나라 모든 교회가 방역지침을 거부하고 지역주민들을 불안케 하는 것처럼 당국과 언론이 함께 교회를 폄하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편향된 조치라 생각한다. 3,500여 명의 선교사를 강제 추방하고 3,000여 교회에 십자가를 부수고 파괴한 중국에서 코로나19가 발생했다. 또 사이비·이단 집단인 신천지가 우리 사회와 교회에 깊숙이 침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코로나를 전파·확산시켜 많은 국민을 힘들게 하고 있다. 성경 역대하 20:9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란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 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셨나이다”고 말씀했고,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음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말씀했다. 무슨 일이라도 우리에게 임하면 주님이 계신 성전에서 주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리하면 주께서 들으시고 구원하시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크고 놀라운 것으로 응답하신다고 미리 약속하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든 교인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우리 자신의 죄, 이단을 물리치지 못한 죄, 교회와 교단이 연합과 일치를 하지 못한 죄, 다음세대를 믿음 안에서 잘 양육하지 못한 죄를 주님 앞에 내어 놓고 부르짖어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온갖 고초와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사망의 권세를 주님이 이기신 것이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이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처럼 위대한 철학자도, 알렉산더나 시저 같은 권력자도, 화려한 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렸던 부자들도 모두 죽었고 무덤에 묻혔다. 그러나 오직 우리 주 그리스도만이 부활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소망과 영생의 복을 주셨다. 부활주일을 맞아 주님 앞에 엎드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자복하고 회개하여 고난을 이기고 부활의 영광을 이루신 예수님을 전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시는 근원적인 죄는 우리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오직 성령만이 이 죄를 책망하시고 회개하게 하신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성령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엎드리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성인과 종교 창시자도 사람의 죄값을 완전히 치르는 동시에 완전히 용서해 준 바가 없고, 자기 죽음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과 육체적 부활의 사건은 예수님만이 우리 인류의 구세주가 되실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어야 한다. 이 땅 가득히 예배가 회복되고, 교인이 교인답게, 교회가 교회되게 거룩해지는 이번 부활절이 되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대표회장·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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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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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극복을 위한 부활절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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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
-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 목회자의 비리와 성적 타락. 신학 및 신앙의식의 부족, 선거부정과 지도력의 부재, 목회자 생활의 불안정과 양극화, 교회와 성직의 세습 등 많은 문제들이 표출되면서 한국 교회는 신뢰를 잃고 있다. 이는 신앙의 진정성을 상실하고 물신숭배 등 세상풍조를 따랐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뜻을 묻기 전에 사람의 기호를 따랐기 때문이다. 이에 감리교회도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변화를 이루기 위해 길을 모색하던 사람들이 정직한 감리회 지도력을 세우고자 2020년 감독회장 선거를 주목하여 동 선거를 신중하게 준비하고 있다. 첫째, 목회자와 교인들의 영성을 강화하여 진정한 기독교회를 세워야 한다. 영성훈련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예수의 심장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민족을 사랑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웨슬리의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에 공감하며 진정한 감리교회를 세워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화로 세상을 거룩하게 지어가고 마침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셋째, 목회자의 생활 안정, 평신도 위상 정립, 제도를 개선 보완하여 합리적이고 정직한 감리교회를 지어가야 한다. 아울러 실력을 갖춰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넷째, 기후위기로 비상사태를 맞고 있는 지구생태계 문제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여 창조신앙을 배우고 환경선교에 동참하는 등 창조세계의 청지기로 나서야 한다. 다섯째, 감리교회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 되게 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학연을 넘어 연대, 세대를 넘어 통합, 성별을 넘어 평등한 감리교회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이 모든 일은 공교회성을 회복하는 일과 맞물려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 공적 교회이다. 누구도 사유화할 수 없다. 감리교회가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세상이 일어나 개혁을 요구할 것이다. 지금 개혁하지 못하면 영원히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감리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당사자들이 다시 교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감리교회 지도력 부재 15년 동안 감리교도 35만 명이 감리교회를 떠났다. 깨끗한 이미지 갱신과 정직한 지도력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감리회 교인들의 이탈 현상은 급속도로 가속화될 것이다. 시급하게 위기를 돌파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제도개혁, 영성형성, 선교정책, 목회자 정책 등 공공성 강화를 위한 정책을 차분히 만들어야 하고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지도력을 세우는 일과 맞물려 있다. 많은 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는 감리회를 세워나가야 한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일은 너무나 소중한 일이다. 움직여야할 때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우리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코로나19로 인해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러할 때일수록 오히려 교회는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아니 정부의 조치가 있기 전에 먼저 예배당 예배를 중단하고 가정예배로 전환하고 새로운 신앙의식을 고민했어야 한다. 그렇게 했다면 비기독교인들도 교회를 신뢰하고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부 교회는 집단 감염소가 되었고 사회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각성해야할 때이다. 자존심만 내세워 성심을 다하는 정부와 국민들을 대적할 게 아니다. 교회는 코로나 정국을 지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신앙을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코로나는 자연이 보내는 경고이며 하나님의 경고이기도 하다. 삶의 철학과 사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이 보다 더 위험한 전염병이 창궐할 수도 있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생각하고 창조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감리회목회자모임새물결 전국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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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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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한복판에 십자가를 세우자
- 2020년 사순절은 특별하다. 고난의 한복판을 지나면서 맞는 사순절이기 때문이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을 전후해서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급격히 확산되었다. 사이비 종교집단인 신천지가 감염의 진원지가 되면서 다중이 모이는 교회의 예배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고, 예배의 자제를 요청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 교회 역시 이 어려운 상황의 극복을 위해 앞장서야 할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등을 중심으로 주중예배 자제와 주일예배를 온라인 가정예배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고 나섰다. 필자 역시 교단장으로서 총회장 목회서신을 통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향후 2.3주, 주일예배를 영상예배로 가정에서 드릴 것을 요청하였다. 총회장 목회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요 3;16)처럼,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요, 세상을 살리는 생명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생명에 해를 끼치는 전염 확산의 진원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사회 전체의 안녕과 유익을 위해 주일예배를 가정별로 드리는 일은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되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신앙고백적 행위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언급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고백이다. 이 고백은 에베소서 1장 23절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교회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incarnation)이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나사렛 예수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성육신의 역사를 계속하신다. 당신이 세우신 이 땅의 교회를 통해서 성육신의 역사를 계속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또 하나의 성육신 사건이다. 교회 하나가 세워질 때마다 매번 성육신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의 삶을 통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너를 위해 나를 내어 준’ 희생적 사랑의 결정체이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말씀 그대로다. 예수는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으로, '세상의 밥‘으로 오셨다.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우리를 살리셨다. 코로나 19 현장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이 있다. 바로 대구로 달려가는 의료진들의 모습이다. 지난 2월 25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제목이 “주변엔 ’차출됐다‘ 말하고.. 대구로 달려온 ’백의의 전사들‘” 이다. 실제로는 자원해서 대구로 내려갔으면서도 주변에서 걱정할까봐 차출되었다 말하고 내려간 의료진들의 모습을 기사화한 것이다. 거룩하고 향기롭다. 이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헌신과 희생 속에서 십자가의 그림자를 본다. 3월 첫 주 온라인 영상예배를 드리고 나니, CBS 노컷 뉴스에서 우리 교회를 비롯해서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전환한 교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노컷 뉴스 실시간 검색 1위였고, 기사에 댓글이 무려 1,500여개가 달렸다. 댓글보기가 무서웠지만 교회를 향한 원성과 충고, 기대들을 채찍을 맞는 심정으로 보았다. 그 중에 기사제목을 패러디한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 “예배를 멈추니 예배가 보이네”가 기사 타이틀 인데, 누군가 “예배를 멈추니 예수가 보이네.”라고 댓글을 달았다. 아픈 말이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교회공동체에 얼마나 소중한가. 그러나 예배하는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때, 세상은 예배를 멈추라고 소리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교회를 통해, 우리의 예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원하는 것이다. 사순절이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고난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계절이다. 우리의 기억이 예수의 고난을 슬퍼하는 감상에 그치고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는 기억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코로나 19의 상황은 실로 그러한 상황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사순절에, 코로나 19의 상황 한 복판에 십자가를 세우기를 원한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으로 세상을 살리고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절, 사순절이기를 소망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성북교회 담임 ◇성북교회(담임=육순종목사)는 온라인으로 주일예배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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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한복판에 십자가를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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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의 의미와 과제
- 지금 한국은 정치적으로 교회적으로 심각한 대결구도로 달리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3·1독립정신에 기초를 둔 국가라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한데 국가 기초가 된 3·1독립운동은 교회가 주도하고 있었고 거기 민족 대통합과 역량의 대본이 게시되고 있었다. 3·1독립운동 궐기 때에 한국교회는 전인구 16,913,000 중 253,043명으로 1.49%에 겨우 미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시 인적 물적 피해는 전체의 25% 이상을 교회가 당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의 주체가 기독교라는 판단때문이었다. 지금은 30%가 교인비율이다. 무슨 일인들 교회가 나서면 못할 일이 무엇인가. 한국 백지도 두 장을 가지고 한 장에는 3·1독립운동 궐기장소, 다른 한 장에는 교회 소재지를 표시한다. 그리고 두 장을 겹치면 궐기장소와 교회소재지가 꼭 겹친다. 1919년 당시 한국의 전국적인 확고한 자발적 민간조직은 기독교회밖에 없었다. 한국교회는 1907년 전국적인 전민죽 단위의 독로회(獨老會)를 조직하고 있었다. 교회는 전민족의 동력을 동원하는 유일한 체제였다. 3·1독립운동 당시 심지어 기생, 술장사, 달구지꾼 등 전국민이 완전 일체 동원되고 있었다. 교회에는 그런 동원력이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선을 동원할 힘, 의를 동원할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기독교회뿐이다. 교회에게는 집결력이 있다. 총동원력이 있다. 한국기독교회는 처음부터 세계의식이 빛났다. 3·1독립운동 당시 한국기독교회는 세계 역사의 흐름에 민감하였다. 당시 세계는 민족 독립 평화 자유의 조류가 도도하였다. 그것을 포착하고 있었다. 1892년 우리가 만든 찬송가에 이미 만민 만국 만왕 과 같은 말들이 줄비하다. 1907년 독로회 창설 때에는 그 회의장에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3·1독립운동 당시 거리에 통고문이 붙어 있었다. 독립운동 기간 동안 연일 성경을 읽으라는 것이었다. 요일마다 읽을 성경이 명시되어 있었다. 3·1독립운동은 성경을 기반으로 일어났던 운동이다. 어떤 운동이든지 이 정도의 표준 거점위에 서서 하여야 한다. 주님은 천국을 아야기하시면서 사역을 시작하신다. 무엇이든, 정치든 경제든, 성경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야 한다. 한국교회는 근대 한국의 지도자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백정 출신을 한국최초 대학의 교수로 일으키는 것과 같은 일을 한 것이다. 교회는 근대학교 교육을 통해서 새로운 지도층을 배출하고 있었다. 심지어 공산주의자들도 교회출신이 많았다. 조선총독부는 1918년 주초세가 국가예산의 48%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창녀촌을 곳곳에 국가가 국세로 세운다. 아편은 전매청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정신과 몸을 악으로 해체시키려 하고 있었다. 교회의 공격은 날카로웠다. 국가는 도덕성이 있어야한다는 외침이었다. 3·1독립운동의 기록과 증언은 교회에서만 정직하고 그리고 대담하게 하였다. 신문보도는 일본에서조차도 1919.3.7부터 가능했고 계속 통제아래 있었다. 독립만세는 소동 폭동으로 몰고 있었다. 그런데 장로교 총회록에는 <3·1독립운동>이한 글이 나온다. 더구나 각 노회상황보고서에는 궐기 진행상황과 피해 상황자 수자 성함 등이 정확하게 기록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유일한 실록이다. 3·1독립운동 때 전국의 피해 특히 교회의 피해는 막대하였다. 전국이 황폐하고 눈물과 피로 물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교회는 삼천리반도금수강산을 찬송으로 외친다. 봉선화 노래를 지어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외친다. 교회는 거대환 민족의 계시록을 울린다. 전국이 하나가 된 이 거대동력은 밖으로 뻗쳐나가는 힘이 막대하였다. 일본 정상급 거물 로 천황과도 가까웠던 도꾸도미 소호가 계속 일본의 진압방법이 야만적이라 공격한다. 3·1독립운동에서 한국을 이끌 거대 동력의 거점이 기독교회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특히 난시에는 민족의 거대 동력동원체제요 예언자요 계시록이란 사실을 증명하였다. 우리 한국교회, 앞으로 그럴 것이다. /백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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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의 의미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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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연합과 일치
-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세운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이 떠난 뒤 심한 분열을 겪었다. 그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쓴 글이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고 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장 3절~7절)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아볼로나 바울 모두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밭이요, 집이라고 했다. 즉 하나님에게 모두 속했다는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8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가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면서 화목케 하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려고 했다. 그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있었다. 그때 누가복음 9:54에서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돌아보시고 꾸짖으셨다고 했다. 이처럼 예수님은 나누고 가르는 것에 대해서 진노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선을 그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안식일을 지키냐 그렇지 않느냐”는 등의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어온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선을 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선이 없었다. 세리 마태를 부르셨고, 그가 베푼 만찬에 참여하셨다. 모두가 죄인이라고 여기는 삭개오의 집에 가셨다. 그리고 나병 환자는 가까이 하지 말라고 율법에는 쓰여져 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무시하고 나병 환자를 안아주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에게는 선을 긋고 너는 하나님과 화목의 대상이 되고 너는 하나님과 화목의 대상이 못 된다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분명하다. 그것은 예수님을 아는 일과 믿는 일과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과 한국 교회는 해야 될 일이 있다. 첫째,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선을 그으면 화목은 없고 정죄만 있을 뿐이다. 너는 우파고 너는 좌파라는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너는 반공주의자고 너는 용공주의자라는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해서 광화문 집회에 나간 자는 보수주의자고 반공주의자고, 반대로 서초동 집회에 나간 자는 진보주의자고 용공주의자라는 선을 긋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밭이요 집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어느 책에서 기독교 2천 년 역사 속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인과 결탁했을 때 종교는 항상 정치에 이용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종교는 타락했다고 했다. 우리가 아는대로 19세기에 러시아 정교회가 그 당시 왕권과 결탁했을 때 러시아 정교회는 타락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느 한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자를 지도자로 선출해야 하는 것이다./한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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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기회로 삼자
- 중국 우한지역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한국사회가 고통을 받고 있다. 공공장소에서 접촉을 금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한국교회는 다중집회 시설로 감염에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어 예배를 드리는데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교회는 지난 주일에도 거의 모든 교회에서 악수를 피하고, 마스크를 착용하는 등 개인위생을 강화하여 예방에 앞장서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시기일수록 우리 교인들은 더욱 말씀과 성경공부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인 바이러스 위기로 인해 집회나 모임보다는 개인이 각자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일상화 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교회들이 첨단 IT기술을 활용하면서 꼭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교회 내 행정실과 로비, 카페 등 교인들이 머무는 공간에 무선 공유기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교회 소식을 접할 수 있으며, 성경공부와 화상회의 등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특히 트위터나 페이스북, 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와 연계해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전도활동에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각종 스마트기기와 SNS의 발전으로 목회환경도 함께 바뀌고 있다. 오프라인을 통해 이뤄졌던 기존의 전도 패러다임을 넘어서 더욱 스마트한 전도전략이 요청되고 있다. 기성세대들에게 있어 스마트 전도법은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다음 세대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스마트폰 사용자가 급증하면서 예배시간에도 스마트폰을 이용해 성경과 찬송가를 보는 기독교인들도 많아졌으며, 시대의 흐름에 맞춰 말씀 묵상이나 찬양, 기독교 문화 콘텐츠 등을 제공하는 다양한 크리스천 앱들도 개발되었다. 요즘처럼 모이기 힘든 시기에는 이러한 앱을 활용하여 자신에게 맞는 예배나 성경공부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보고 들을 수 있어 신앙성장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함께 모이는 예배가 어려운 만큼 스마트시대에 각자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좋은 성경공부는 이러한 어플을 이용하는 것이다. 휴대성이 좋은 스마트폰의 특성을 이용해 직장과 학교 등지에서 적은 시간을 이용해 성경 전체를 공부한다면 매우 유용한 성경공부 도구가 될 것이다. 우리 선교회는 바이블아카데미 앱을 통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구약 성경 66권에 대한 강해를 수록하여 한국교회에 전파해 왔다. 다른 성경공부 앱들에 비해 시각적으로 발전되고 강의를 듣는 도중 의문점이 생기면 인터넷 검색을 활용할 수 있어 편의성도 극대화 했다. 이단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올바른 성경공부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교인들에게 쉽고 전문성 있는 성경공부를 제공해야 한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성경 66권 강해 동영상은 다양성과 근접성, 전문성의 장점을 갖는다. 최근 군대에서도 스마트폰이 허용이 되어 연간 7만여 명의 청년들이 군복무 중에도 바이블아카데미 앱을 통한 군 선교가 가능해졌다. 각 교회에서 입대하는 청년들이 군복무를 하며 스마트폰을 통해 성경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하면 군 선교사역에도 큰 힘이 될 것이다. 특히 이번사태와 같이 전 세계적인 바이러스 확산으로 모이는 일이 힘들어질 때 스마트 성경 앱은 더욱 가치가 높아진다. 저명한 신학자들의 강의를 7개 국어로 번역하여 2만 7천 명의 해외선교사들이 성경 66권을 언제 어디서든지 접하고 배우며, 선교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스마트 사역은 한국교회가 함께 나서야 할 중요한 사명이다. 바이러스로 인한 사회·경제적 위축을 이겨내고 주님이 명하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스마트’한 대응이 더욱 절실하다. /한국미디어선교회 이사장·영락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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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기회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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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교회를 향한 바람
- 지난 2년 7개월 동안 우리 사회는 거대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침체를 겪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작년 6월부터 기독교인들이 중심으로 광화문 구국 모임과 기도회가 시작되었고, 지난 10월 세 차례 모임을 통하여 해방 이후에 가장 많은 시민들이 자유민주화와 시장 경제 위기를 염려하여 시민적 의사를 표출시켰다. 이런 가운데 진정하게 시민들을 존중하는 지도자라면 집권 후반기를 맞이하여 궤도수정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를 보면 전혀 집권 후반기의 정국운영 구상에서 이러한 전환의 기미기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헌법적 가치를 중시하는 국가의 정체성과 진로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한다. 문대통령은 취임 후 3년 연속 6·25 기념식 당일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고, 6·25 때 북에 희생된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는 날인 현충일 기념사에서도 3년간 6·25와 침략 주체인 북한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6·25 때 북한 편에서 공을 세운 사람 김원봉을 일제 때 광복군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국군의 뿌리인 것처럼 추켜세웠다. 북한 남침사실은 소련 해체 이후에 드러난 군사기밀 서류에서 이미 드러나 역사적 사실로 입증된 바 있다. 이러한 심각한 민족에 대해 이렇게 심각한 범죄적 전쟁에 관한 대한민국 국가의 대통령의 인식이 이러하니 애국적 양심을 지닌 지식인들이 나라의 안보에 대하여 걱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헌법정신을 유리하는 정권에 대하여 침묵하게 되면 결국 신앙의 자유까지 잃게된 다는 엄중한 현실을 알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독일교회의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독일 국민들은 1930년대 나치가 등장하여 공산주의자를 척결했을 때, ‘나는 아니다’라고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치는 유대인들을 척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는 아니다’고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치는 자유노조를 척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는 아니다’고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치는 천주교를 척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는 아니다’고 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나치는 개신교를 척결하고자 했다. 이때 비로소 개신교도들은 이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이미 모든 자유가 상실된 상태로 때는 늦은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국민 마음을 빼앗아 가는 현 정권의 국가주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며 기독교 신앙의 기반인 대한민국 헌법, 자유민주화와 시장 경제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 오늘날 세계경제 10위권에 든 대한민국의 정치는 경제 발전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챙피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집권당이 장기집권을 위하여 탄력선거제를 요점으로 하는 정치전문가도 이해할 수 없는 당리당략적 선거법과 정권의 입맛에 맞지않는 고위 공직자들을 마음대로 수사하고 처벌하는 공위공직자 수사법을 제1야당과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처리하여 4월 15일 총선에서 승리하고자 모든 정략을 구사하고 있다. 야당들은 자유민주화와 시장 경제 수호를 위하여 당리당략을 버리고 하나로 뭉쳐서 나라를 바르게 이끌고 나가야 하는데 분열되고 무기력하여 국가가 난파되도록 이끌려가고 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포로되어 간 이스라엘 국민들을 향하여 비록 바벨론 국가라 할찌라도 주민들의 안녕을 위하여 그 성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였다. 대한민국은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살아야할 고국이요 보금자리다. 한국교회는 우리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기독교인들은 신앙양심으로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바르게 이끌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공정한 선거가 이루어져야 하고 올바른 지도자가 국회의언으로 선출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절차적으로 공정한 선거가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한국사회를 위한 한국교회의 소금과 빛의 사명이다. 하나님이 이 나라의 진로와 운명을 주관하신다. 한국교회는 민족교회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샬롬나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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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교회를 향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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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는 서로의 환대를 통해 드러난다
- 혈액순환은 몸을 살게 하고 생명을 유지해 준다. 죽은 자에게는 혈액순환이 멈춘다. 생명력을 상실한 때문이다. 신앙생활로 사는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순환하는 혈액이고, 은혜를 갈구하고 누리는 신앙이 혈액을 순환시키는 힘이다. 그렇게 은혜와 신앙은 만난다. 서로 말을 나눈다. 뜻을 교류한다. 서로 섞여 생명을 만든다. 만나고 말하고 교류하고 급기야 생명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합하여 기도라 한다. 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신앙의 주체인 인간은 기도로 만난다. 기도로 서로 묻고 답하고 대화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서로 하나가 되어 선을 이룬다. 이렇게 만나고 교류하고 하나 되어 사는 방식은 “서로가 서로 안에 사는 방식”이다. 예수께서 마지막 대제사장으로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하실 때 주신 말씀이 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성부와 성자가 성령 안에서 서로서로 안에 사시기에 그 분 하나님을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 부른다. 이 삼위의 하나님이 우리 모두 안에 계시고, 우리는 이 삼위의 하나님 안에 산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앙이다. 동시에 우리들 서로가 같은 방식으로 서로 서로 안에 사는 것이 삼위일체 신앙적 일치의 모습이다. 서로 서로 안에 살게 엮어주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치를 추구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가 우리 인류와 세계의 구세주이심을 믿게 하려는 때문이고, 우선 기도로 구원을 향한 일치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교파로, 지역으로, 교리로, 역사전통으로 다양하게 분리되어 있지만 때로는 꼴사나운 분열로 아픔을 겪고 있는 교회와 교인들이 먼저 함께 기도하는 일에서부터 일치를 시작해 보자면서 영국 성공회의 폴 왓슨( Paul Wattson) 사제가 들고 나온 것이 “한 옥타브의 교회 일치”(a church unity octave) 프로그람 제안이다. 8개의 음정이 한 옥타브(도~도)를 이루듯이 한 주간 매일같이 합동하여 일치를 위해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하자는 제안이다. 그래서 옥타브의 출발(“도”)과 마감(“도)을 우리의 믿음의 모범이고 선배인 베드로와 사도 바울을 표본으로 삼자고 했다. 수제자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한 날(1월 18일)을 시작 일로 하고.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한 날(1월25일)을 기도 옥타브의 출발과 마감으로 삼자는 제안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면 차례의 변화 확대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을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으로 지키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기독교 역사의 거대한 세 물줄기인 로마 천주교, 동방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회 모두가 동참하고 있는 아름다운 전통이다. 다만 이 기도주간은 세계 각국의 교회들이 순번을 따라 그 해에 함께 간구하고 추구할 일치의 소원과 희망을 주제로 제시하고 정해진 성경본문을 함께 명상하며 기도의 일치를 전 세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고귀한 운동이다. 금년에는 몰타의 그리스도인들이 제안한 일치기도를 함께 드린다. 기도의 주제와 본문은 이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각별한 인정을 베풀었다”(사도행전27:18~29:10). 초대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 등장한 선교여행 중에서 일어난 조난과 조난 가운데에서도 외딴 섬에 도달하여 원주민들로부터 환대받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전 세계 이민 행렬이 던지는 세계의 문제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함께 기도하자는 뜻이다. 환대는 그리스도인 일치를 추구하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미덕이다. 이러한 환대를 실천하려면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더욱 큰 너그러움을 보여야 한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에게 각별한 인정을 보여 준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아직 알지 못했지만, 바로 그들의 각별한 인정 덕분에, 분열되어 있던 사람들이 서로 가까워졌다. 우리 그리스도인 일치는 무엇보다도 우리 서로에 대한 환대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와 다른 언어, 문화, 신앙을 지닌 사람들과의 사랑의 만남을 통해서도 드러날 것이다. /경동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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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는 서로의 환대를 통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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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가족 공동체성의 회복
- 설날은 음력으로 한 해를 처음 시작하는 날로서 신라시대로부터 전해오는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이다. 설날이란 말의 어원과 관련해서는 대략 세 가지 설이 있다. 먼저는 ‘낮설다’는 말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고, 다음으로는 개시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이 점차 연음화되어 설날로 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또 한편 삼가다’ 또는 ‘조심하다’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설날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공동체, 특별히 가족공동체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것이며, 이런 공동체의 핵심요소로서 부모님의 권위를 중심으로 가족간의 질서 있는 화목을 다시금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설날은 따뜻한 정과 사랑의 울타리가 되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오늘날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그런 공동체 안에서 이기주의와 탐욕주의를 넘어 이타적인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는 나눔과 배려의 삶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오늘날 이 사회에 만연한 단절과 소외,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용서와 화합, 화목과 결속의 지혜를 배우는 계기가 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설날은 단순히 명절 이상의 의미와 기능을 갖는다 할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나 비기독교인에게 설날은 이처럼 우리에게 공동체 특별히 가족공동체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고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설날을 맞아 더욱 성숙한 성경적 가족공동체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먼저 기독교인의 가정은 오늘날 가정 안에서 조차 생명이 경시되는 시대풍조 가운데서 생명의 공동체로서 건강한 가정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생명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육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한 생명의 공동체이다. 성경은 가정을 교회에 투사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남편인 그리스도와 아내인 교회가 생명의 연합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장차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의 연합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 말한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장차 남편인 하나님과 신부인 우리 곧 교회가 생명의 연합을 이루게 될 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믿는다.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이 설날에 그들의 가족들과 더불어 부모님의 집에 함께 모여 먼저 말씀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정이 단순히 육적 생명의 공동체일 뿐 아니라 영적 생명의 공동체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럼으로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건강한 생명의 공동체, 생명이 충만한 가정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설 명절을 통해 기독교인의 가정은 가족 상호간 사랑의 섬김 안에 규모 있고 질서 있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생명의 연합을 이룬 가운데 서로 사랑의 사귐을 가지면서 관계와 질서 속에 존재하듯, 또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몸인 교회가 생명의 연합을 이루어 사랑의 사귐을 사귀면서 서로 관계와 질서를 이루고 있듯, 그리스도인의 가정도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가족들 상호간에 생명의 연합을 이루어 사랑의 섬김 가운데 바른 관계와 질서가 세워지고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는 마치 건강한 몸이 각 지체들 간에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바른 관계와 질서를 유지함으로 왕성한 생명력을 나타내는 것과도 같다. 하나님의 나라나 교회나 가정은 모두 생명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동일한 모습을 보여준다. 건강한 생명의 공동체는 그 속에 사랑의 섬김이 있으며 동시에 바른 관계와 질서가 세워지는 규모 있고 화목한 공동체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여러 면에서 병들어 신음하고 고통하고 있다. 개인의 선택권과 행복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낙태, 증오심에 찬 좌우의 분열과 갈등, 무너진 공의와 혼란, 개인주의와 탐욕주의의 만연 가운데 탈북민이나 이주민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소외 등으로 병들어 신음하고 고통하는 사회에 설 명절에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생명의 공동체로서 건강한 가정의 모습은 한줄기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다.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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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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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가족 공동체성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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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여! 하나님 앞으로 나가자
- 요즘 세상이 참 어수선하다. 들려오는 소리 소문도 어느 것 하나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은 없는 듯하다. 한일갈등은 갈수록 골이 깊어가는 것 같고, 여야 갈등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거 같다. 오랜 우방 국가를 자랑하던 미국과의 관계도 진심이 아니었던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그런데 가장 우리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것이 있다. 이런 세상의 풍조 속에서 교회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빛을 비추며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할 교회가 빛을 잃은 느낌이다. 목회자들도 흔들리고 있는 것 같고, 교회 교인들 역시 제각각이란 생각이 든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능력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 것일까? 예수님이 오늘 우리의 현장 속에 오신다면 어느 편을 들 것인가? 어떤 하나의 이슈가 수면위로 부각되면 국민들은 광화문파와 서초동파로 나뉜다. 법원 앞 큰 길을 중심으로 이쪽과 저쪽에서 다른 목소리를 높이며 서로 대립하기에 바쁘다. 교회 역시 방향을 잃고 좌우로 나뉘어 있다. 우리 예수님은 누구의 편을 드실지가 궁금해진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던 때의 이스라엘은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주권을 잃고 로마의 지배를 받아야했던 시기였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로 나뉘어 있었고, 종교지도자들과 죄인들로 구분이 되어있던 시기였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향해 말씀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친구로 오셨고, 그래서 그들을 위로하셨지만 그들의 삶이 옳다고 편을 드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셨다. 진짜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전하셨고, 그 말씀을 듣던 대중들은 좌파나 우파로 나뉜 것이 아니라 권세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좌나 우보다 더 중요한 세상, 더 가치 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복음의 능력이 되어 세상 속에서 복음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어둠의 세상을 밝히기 시작했고, 130여 년 전 어둠 가운데 있던 이 땅에도 비취게 되었다. 일제의 억압 속에 있던 이 땅에서도 그 복음의 빛은 희망이 되었고, 그 빛을 따라 오늘의 대한민국이 형성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복음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희망의 등불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주변 상황이 어두워졌다고 생각되면 불을 밝히면 될 일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복음의 불을 밝히는 것을 잊어버린 듯하다. 아니 복음의 불로는 세상을 밝힐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복음 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목회를 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그 말씀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한 교인이 울면서 나를 찾아왔다. 아들이 무슨 충격을 받았는지 갑자기 청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큰 슬픔에 하염없이 우는 교인 앞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자는 것이었고, 이 교인은 그 말씀에 의지해서 하루하루 성경 필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필사하기를 한 달 가량 했을 무렵 아들의 청력이 회복되는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다. 부도의 위기 속에서 울던 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고 얼마 후 상황이 급반전 되면서 문제가 해결된 교인도 있었다. 이 교인을 볼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오늘 답이 없어 보이는 우리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의 길과 해답이 되심을 고백해야 한다. 복음이 해답이고 기도가 해답이다. 한국교회는 광화문이나 서초동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 성경을 들고 골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도움은 미국이나 일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복음의 능력을 잊지 말자. 기도의 능력을 잊지 말자. /일산광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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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여! 하나님 앞으로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