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1(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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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 오피니언
    • 정론
    2024-10-08
  • [정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의 마지막 보루이다.
       종교개혁은 로마 천주교의 교황주의를 비판하고 베드로 성당을 짓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주장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써서 비테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교황의 금권주의가 성경을 왜곡하고 바티칸 성당의 배만 불리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런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초대형 예배당을 세우고, 당회장의 고급 차를 사들이고, 목사 사택에 수십억을 들이고, 소망교회가 은퇴 목사에게 전별금을 50억씩 주는 그야말로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가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109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는 이런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초저출산 문제이다. 교회 안에 미혼 청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혼했어도 무자녀 가정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대를 물려줄 수 있을까? 영아 유아 유치 유년 초등 소년부의 구분을 사라졌고, 어린이 부서를 아동부로 부르고 아예 중등 고등부까지 통폐합해서 아동청소년부로 묶어서 교육전도사 하나에게 말도 안 되게 맡기는 일이 예삿일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CBS 김진오 사장은 출산돌봄 순회예배를 「생육하는 세상, 번성하는 교회(창 1:28)」란 주제로 펼치고 있는데, 당진동일교회가 추진한 차세대 돌봄사역을 한국목회간호선교협회의 김정남 교수가 전국에 확산하는 운동을 기울이고 있다. 일단 아이를 출산하고 돌보는 문화를 한국교회가 앞장서자는 운동이다. 아이를 언제부터 낳을 것인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결혼부터 해서 출산 육아를 병행하여 아이부터 낳고 기르는 문화가 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 만연된 이단 문제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이단 규모가 전체 기독교인의 2/3에 해당한다고 하니,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통일교와 신천지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즈음은 신사도운동과 다니엘기도운동이 판을 치면서 한국교회가 정상적인 전도와 선교의 반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너도나도 교회에 온라인 와이파이를 설치하여 스크린을 통해 전 세계 네트워크로 송출되는 검증이 안 된 은사 집회와 간증과 찬양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현상이 한국교회를 뒤덮고 있다.    복음적이라는 옷을 입고 보수적인 일부 신학자까지 동원한 일각에서 성명서까지 발표하면서 지지한 로잔운동의 50주년 기념행사가 일주일 동안 송도에서 진행되었는데, 주일 저녁 개회식을 필두로 첫날 월요일 저녁에 영국 성공회의 신부인 본 로버츠가 동성애자로 CGN 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활동하는 동성애 단체인 리빙 아웃의 입장을 변호하는 지극히 파격적인 연설을 해서 큰 파문을 불러왔다.    왜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가? 반동성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면 전 세계 차별금지법 제정을 완성하려는 이른바 인도네시아의 욕자카르타에서 모인 NGO 단체가 선언한 욕아카르타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103회 통합총회는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 이단’을 결의한 바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야 한다. 목사도 주일설교에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을 선포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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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8
  •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문화예술분야도 한류열풍이 불만큼 세계인의 인기를 끌고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한 노인자살률도 높다. 2010년에 81.9명으로 최고조에 달했고 그 후 조금씩 감소하여 2017년 이후 47명대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체 자살률은 2013년 인구 10만명 당 28.5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4.1명으로 다소 낮아졌다.    자살문제와 함께 낙태문제도 심각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시행 이후 46년 만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의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까지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했지만 국회에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한 유튜버가 '36주차 임신중단(낙태)' 영상을 올려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이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사실로 밝혀져 복지부가 수사를 의뢰해 해당 유튜버와 집도의가 살인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자살과 낙태문제와 함께 생명안전 불감증도 문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를 큰 슬픔에 빠지게 하면서 생명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어준 사건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참사 또한 생명 안전을 위한 선조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2023년 7월 15일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도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살과 낙태와 생명안전문제만이 아니다. ‘묻지마 살인사건’과 폭행, 아동 폭력 및 노인학대, 애완동물 학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경시 풍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의 생명 안전도 중요한 과제다. 국내 제조업과 철도 운송업 등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등 대기업 사업장이 하청의 사고사망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청 노동자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율안전보건관리 시스템 지원, 공공기관 안전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모든 사업장에 대해 안전관리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통계를 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안전등급을 매긴 후 자율적으로 안전등급을 올리기 위해 안전교육과 시설 개선에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인된 절차에 의해 안전등급을 올린 것이 검증된 사업장에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적극적으로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입법화해야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마약 흡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번 마약을 흡입하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다고 한다. 중독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행복한 시민, 건강한 가정,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생명경시현상을 극복하고 생명존중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생명권은 천부인권이다. 생명존중사회가 되려면 생명 사랑, 생명 보호, 생명 돌봄, 생명 안전 등 생명존중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생명존중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대상을 존중하고, 우리 사회에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출생 문제도 생명존중 차원에서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한다.    42개의 국가기념일 중에는 ‘정보보호의 날’(7월 둘째 수요일), ‘푸른 하늘의 날’(9월 7일), ‘문화의 날’(10월 셋째 토요일), ‘부부의 날’(‘5월 21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생명존중의 날’이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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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24
  • [정론] 섬김의 교훈을 따라
    류성민 교수  이스라엘의 큰 명절,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고,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알려주셨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제자들을 섬기는 것이 유월절의 참 의미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신당하고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 가운데 오히려 분란이 생겼다. 그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제자들은 섬김의 교훈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혼내지 않고,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세상에서 큰 사람은 위에서 주관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눅 22:24-27)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최고의 섬김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이제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섬김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세상처럼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섬김의 정신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명절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교훈이다.    우리는 추석이라는 큰 명절을 맞이한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고향의 아늑함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가족의 편안함과 고향의 그리움은 그 시간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때로 이런 특별함은 어색함과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무 부담없이 보내던 명절이, 어른이 되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명절 이후 다양한 갈등의 후유증들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다. 사실 아무리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마찰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최고의 섬김을 받은 성도들은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마땅히 섬김의 의무가 있다. 명절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던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 곧 섬김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섬김으로 명절에 모인 가족들이 즐겁고, 고향의 편안함과 행복을 누리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 섬김은 때로 손해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손해와 희생과 억울함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위대한 섬김이다. 내가 낮아짐으로 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의 희생과 손해와 수고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존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더하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따르는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민족의 명절 추석이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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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09
  • [2024년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중요한 문제 몇 가지
        9월, 총회의 계절이다.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교단들이 결정한 정책이나 교단법 개정, 다루는 중심 의제 등이 해외의 한인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의 분위기와 방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늘 그렇듯이 교단이 어떤 문젯거리를 안고 있으면 그것을 시급하게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꺼야 할 급한 불이 전혀 없는 교단은 없는 듯하다. 어떤 경우에는 볼썽사나운 문제를 놓고 총회 내내 소란스럽게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장기적인 정책과 방향에 관한 논의는 실종된다. 급한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교단의 현재 상황을 이끌어가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급한 일에 매몰되어 중요한 의제를 놓치면 미래가 실종된다.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특별은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일반은총에 관한 것에 한정해서 제안해 본다. 장로교 총회들에서 이런 주제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제안할 내용 네 가지는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 존재한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교회의 현주소는 세상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는 고립된 섬처럼 사회에서 멀어져 갔다. 우리 사회와 한반도, 동아시아와 오늘날의 세계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도 약해졌다. 먼저 환경이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나 발등의 불이다. 지구 환경의 생태계가 더 망가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창조 세계의 돌봄과 보존에 관하여 총회에서 큰 방향을 담은 선언문이 나와야 한다. ‘자연과 사회를 가꾸는 생태적 환경윤리’를 새삼 진지하게 외치면 좋겠다.    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서민 생활에서 고통스럽게 체감되는 상황이다. 경제 구조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는 상황에서 지금까지 40년 넘게 세계를 이끌어온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명을 다했다.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할 새로운 구조가 정착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방향은 명백하다. 빈부의 격차가 지금처럼 가속화되면 모두 망한다. ‘나눔과 섬김을 목표한 상생의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는 선언이 필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규칙과 구조를 다룬다. 인류가 경험해 정치 형태 중에서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 그래도 민주주의다. 장로교의 정치 형태가 기본적으로 대의 민주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 실종이 심각하다. 물론 오늘날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견제와 균형, 포용과 협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대화와 협치를 중심한 법치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명백하게 표방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사회적인 언어에서는 윤리 도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의, 사랑, 평화, 섬김, 포용, 대화 등의 일반 언어에 담긴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력이 약해진 것은 복음의 진리가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륜의 가치는 복음의 일반은총에 해당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양심과 사랑에 근거한 인도적 인륜도덕’을 교회가 명백하게 강조해야 한다./기성 전 총회장·성락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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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9-03
  • [장로교 총회에 바란다] 양심과 신앙으로 섬기는 리더쉽을 기대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86~161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년)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이룸으로 그의 치세에는 로마의 문물이 그 절정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황제의 덕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황제가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존경까지 받기를 원하던 고집스러운 스토아 철학자라고 헐뜯었다. 그런가 하면 황제가 평생 공평하고 성실했으며 지대한 선을 베푼 것은 오직 허영심에 이끌려서였으며, 자기의 미덕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궁색하고 고의적인 험담을 못마땅했던 볼테르가 외쳤다.    “오, 하나님. 그러한 사기꾼을 저희들에게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       드디어 총회의 계절이 다가온다. 각 교단마다 교단정치의 정점에 이른 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시절이다. 교회정치는 바른 교회와 교회 바로 세우기의 첩경이어서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의 총회장은 소속 교단의 부흥과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것을 약속하며 새로운 리더쉽을 세운다. 문제는 교회의 새로운 리더쉽을 바라보는 소속 목사들의 평가 혹은 그 경쟁자들의 모습이다.       과연 지금까지 각 교단의 리더쉽은 올바른 평가를 받았는가? 돌이켜 보면 과거 우리 한국교회 각 교단 총회장에 대한 평가 중에서 존경받고 칭송받는 경우를 그리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칭찬보다 유독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부각되는 것은 상대가 있는 승리자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부정적인 내용이 내부 정화를 거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질 때 교회가 받을 충격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못과 허물을 덮자는 말이 아니라, 정당하고 올바른 평가와 칭찬받을 행적이 훼손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교단에 속한 필자가 장로교 총회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적어도 장로교단의 자기 평가는 한국교회의 평가로 인식된다는 데에서 중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열렸다.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는 외국인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다수 한국인 목사들이 투옥된 한국교회의 현실적 지도력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한국교회 총회정치는 장로교회가 그 모델이 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모범적인 리더쉽이 많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의 리더쉽에 대한 부정적 의식, 교회 정치를 꾼들의 모략 행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허물이 회자되는 것에는 내부 인사들 탓이다. 그들이 밖으로 물어낸 이야기들이 비화되고 극화된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비수가 된다. 분명한 것은 교단의 리더쉽들이 양심과 신앙의 틀 안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섬긴다면, 아무리 경쟁자 혹은 적대자들이 정확한 논리와 웅변으로 “덕을 갖추지 못했으며, 존경받기를 원하며, 평생 공평하고 성실하게 선을 베푼 삶을 허영심에 이끌려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라고 비판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시대에도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볼테르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총회에서도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선출될까? 서로 허물하고 비방하고 흠집내는 현대 정치판의 비참한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 장로교회는 그런 것을 본받지 않기를 소망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에서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제 필자도 또 한 사람의 볼테르가 되어 장로교단의 총회장을 향하여 “그러한 사기꾼을 좀 더 자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한다./강서대 전 총장·일산 그리스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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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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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교회, 어디로 가야 하나?
    지형은목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부총회장,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   교회가 살려면, 변해야 합니다.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ad fontes) 곧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기독교라는 현상에서 가장 구체적인 현장은 어쨌든 제도적인 형태로 존재하며 사역하는 가시적인 교회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처럼 제도권 교회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음녀 바벨론으로 여겨지면 거기에서 탈출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교회 역사에서 가장 과격한 형태의 개혁 운동이 이런 유형입니다. 남보다 올곧고 강직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는 제도권 교회에 대하여 이미 이런 판단을 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계속해서 지나온 시대처럼 걸어간다면 앞으로 십여 년 후에 결정적인 파국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 사회 현장의 한국 교회를 어떻게든 갱신해야 한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땅의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의 삶 모두를 포함하는 말로 한국 교회라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복음적 윤리는 고사하고 사회적 윤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한국 교회는 길을 잃었습니다. 21세기 오분의 일을 지나는 이 시대의 한국 교회 현장은 짙은 안개 속에 있습니다. 코로나19 이전부터 그랬지만 코로나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명백해졌습니다. 2007년의 평양대부흥 100주년, 2017년의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 교회는 이 두 번의 기회도 놓쳤습니다. 한국 교회가 걸어갈 큰 방향과 구체적인 행보에 관하여 어느 정도라도 통합된 의견이 없습니다. 제각각입니다. 이념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혀 심하게 갈등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거의 고스란히 교계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서울과 부산시장 선거 그리고 대선이 이어지는 2021년과 2022년에 갈등이 더 심해질 것이 뻔합니다. 이 상황을 풀어가는 방법 또는 길이 무엇입니까?   드러난 문제점들을 개별적으로 풀어가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교회의 병이 깊고 어떤 영역에서는 타락이 도를 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며 그 본질에 근거한 가치관과 세계관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교회의 생사를 걸고 이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성격을 분명히 짚는 것이 긴요합니다. 방향과 행보와는 다르게 문제점에 관해서는 의견이 상당히 일치합니다. 삶이 엉망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말씀과 그리스도인의 일상과 인격에서 나타나는 삶의 괴리가 지나치게 큽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복음적 윤리는 고사하고 사회적 윤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사회적 신뢰의 상실이 참으로 뼈아픈 현실입니다. 교회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목사의 책임이요 다음으로는 목사와 장로를 포함한 지도자들의 책임입니다. ‘사회적 신뢰’ 상실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입니다. 이 현상을 만들어낸 원인은 ‘신앙적 신뢰’ 상실입니다. 사회적 신뢰라는 것이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인데 신앙적 신뢰는 교회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의 삶에서 드러나야 하는 윤리는 성경 말씀에 토대를 둔 신앙적 윤리입니다. 이 토대 위에서 교회는 기독교적인 사회 윤리를 구성해가며 삶으로 실천합니다.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잃어버린 것은 그 이전에 신앙적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은 ‘신앙적 신뢰의 상실’입니다”   지금의 한국 교회를 진단하면서 이 점에 집중해야 합니다. 몸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 급하다면 당장 나타나는 증세를 가라앉혀야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원인을 찾아내어 치료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은 ‘신앙적 신뢰의 상실’입니다. 한국 교회는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바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구약 예언자들의 외침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정직한 마음으로 다시 새겨들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관건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어떤 형태든 신앙의 인식과 실천에서 근본적인 지점이 여기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곧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체험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셔서 신체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경험으로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계시(啓示)라고 하는데 계시의 중심이 사람 몸을 입으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분의 인격과 삶이 특별계시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가 그리스도 곧 구세주라는 고백 위에 서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부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의 기록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은 서로 안에 계시며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은 계시와 관련하여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복음이 삶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명제는 기독교 신앙의 심장입니다”   예수님을 만납시다. 그러나 신앙의 인식 과정을 엄밀하게 따지면 오늘날은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이천 년의 시공간이 있습니다. 이 간격을 넘어야 하는데, 방법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삶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명제는 기독교 신앙의 심장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이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만납니다. 복음이 삶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복음과 예수님을 동일시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니 그렇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관한 기록 특히 마가복음에서 이 점이 아주 명백합니다. 마가복음 8장, 9장, 10장에 기록된 세 번의 수난 예고에서 복음과 예수님이 동일하다는 것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복음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를 기록한 8장 3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란 표현으로써 자신과 복음을 동일시하십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 본문인 9장 37절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복음을 주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일시합니다. 마지막 수난 예고인 10장 29절에서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란 표현이 결정적으로 강조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개역개정판이 “나와 복음을 위하여”로 동일하게 번역한 8장 35절과 10장 29절은 헬라어 원문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10장이 8장보다 복음과 예수님을 더 확실하게 동격으로 표현합니다. 8장 35절을 “나와 복음을 위하여”로 옮긴다면 10장 29절은 “나를 위하여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개역개정판보다 개역성경이 낫습니다. 개역성경은 8장 35절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10장 29절은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말 ‘및’은 ‘그리고’, ‘또’의 뜻인데 같은 종류의 성분을 연결합니다. 표준새번역도 두 곳이 다릅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영어성경(KJV, NIV)이나 독일어성경(루터역, 취리히역)은 두 곳을 더 강조된 10장의 표현으로 번역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합시다. 한국 교회는 길을 잃었습니다. 신앙 윤리는 고사하고 사회 윤리로 보아도 삶이 엉망입니다.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상실한 현실이 뼈아픈데 이는 신앙적 신뢰를 상실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심장인 신앙적 신뢰를 회복하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복음을 듣고 살면서 해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기록한 것이 66권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구체적으로는 성경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적으로는 66권 성경의 내용이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 말씀에 기독교의 정체성이 걸려 있습니다.   “교회가 길을 잃은 근본 원인은 말씀에서 멀어진 것, ‘말씀과 삶의 괴리’입니다”   한국 교회의 현상적인 문제는 삶이 망가진 것입니다. 교회가 길을 잃은 근본 원인은 말씀에서 멀어진 것, ‘말씀과 삶의 괴리’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큰 방향과 구체적인 행보는 66권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일에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성서신학이 강화된다는 얘기와 다릅니다. 성서신학을 비롯한 신학의 기능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의 일부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가를 단순하고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성경이 나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깊이 깨달아 거기에 삶을 던져 순명(殉命)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에 기록된 성령에 관한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고 살게 하십니다.   이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붙잡고 가장 치열하게 씨름한 때가 종교개혁 시대였습니다. 당시에 교회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타락은 끝을 몰랐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며 기독교의 본질을 물었습니다. 그렇게 찾은 것이 말씀입니다. 참된 교회는 들리는 말씀인 설교와 보이는 말씀인 성례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작동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현장이 일차적으로 예배의 시공간이며 거기에 뗄 수 없이 연결된 것이 예배 후에 바로 이어지는 일상의 예배입니다. 그렇게 말씀이 삶이 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움직입니다. 한국 교회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생사를 걸고 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66권 성경의 내용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깊게 공부하고 연구하며 동시에 더 없이 깊은 묵상과 기도를 감행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 세계를 살피며 깨달은 말씀을 삶으로 순명해야 합니다. 이렇게 십여 년 가다 보면 갈수록 길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보수냐 진보냐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오늘날 세계의 다양한 삶과 사회 문화적인 상황에 따라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일을 어떤 사람은 보수라고도 부르고 어떤 사람은 진보라고도 부릅니다. 교회가 살려면, 변해야 합니다.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ad fontes) 곧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 오피니언
    2021-01-25
  • 뉴노멀 시대 교회의 예배 논란 성찰
      많은 학자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전과 이후의 이스라엘의 예배 신학에 있어서 차이가 두드러진다고 말한다. 포로기 이전의 예배에서는 성전이란 공간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포로기 이후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포로기 이전에는 제사와 의식, 그리고 거룩의 정도에 따른 성전의 세분화된 공간들이 예배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 생활이 시작되면서 물리적 공간인 성전이 예배의 중심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포로기 이후에는 예배가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하던 것에서 조금씩 변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바벨론 포로기에 이은 메데와 페르시아의 점령하에서 유대백성들은 본국과 타국 등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성전이 없는 제국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된 유대 백성들은 사는 곳마다 회당을 지었다. 회당은 게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첫째 안식일에 모여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는 장소였고, 둘째 유대인 나그네들을 대접하는 공간이었다. 당시 회당은 예루살렘 성전이 지니고 있던 지성소, 성소, 그리고 이방인 뜰과 같은 그런 차별화된 공간이 없었다. 회당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는 거룩은 공간이라기 보다는 안식일 그 자체로서 그것은 일종의 구별된 시간이었다.   포로기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매일 정한 시간에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예배행위로 생각했고,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신앙 전통이 되었다. 다리오 왕 시절에 관원들이 다니엘을 죽이려고 30일 동안 왕 외에는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으나, 다니엘은 죽음을 무릅쓰고 매일 정해진 기도 시간을 중단하지 않았던 사실을 통해서도 이것은 잘 드러난다(단 6:10). 다니엘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기도하는 시간을 지키는 것을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유대인 신학자인 아브라함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이란 일종의 “시간의 지성소”와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공간인 성전을 잃어버린 백성들과시간이라는 지성소에서 만나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예배 신학에서 공간은 사라진 것일까? 그렇게는 볼 수 없고 보아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고래스 왕의 칙령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 즉 스룹바벨과 일차 귀환 세대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학사 에스라와 이차 귀환 세대를 보내셔서 성전 재건을 완성 시키셨다. 이런 사건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에 있어서 공간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사건들이다. 예배에 있어서 비가시적 공간인 시간과 함께 가시적인 공간으로서의 물리적 공간도 여전히 중요했다. 이스라엘의 예배와 신학에서 시간과 공간의 균형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베푸신 특별한 선물이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지만 예배하는 그의 백성에게 특별하게 응답한다. 무한한 하나님은 인간의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에 제한된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 예배는 마치 우리가 차린 식탁에 하나님이 초대되어 대접받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천지의 주재이시고 영원에 계신 하나님이 피조계와 역사라는 시공간에 자신을 꿰맞추셔서 인간이 앉는 자리에 내려 오시고 그 인간들을 만나주시고 함께 시공간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배란 시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황공한 환대와 다를 바 없다.   2020년 한해 동안 한국 교회는 정부의 대면예배를 금지하는 행정명령 등으로 예배에 대해 큰 혼돈을 겪었다. 어쩌면 바벨론 포로기 이스라엘이 겪었던 혼란과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사한 혼란을 겪어왔다. 어떤 신학자는 코로나 19 이후의 교회의 예배와 예배 신학은 전과는 무척 달라지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사이버 교회의 탄생과 급속한 증가세를 예견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마치 디지털 시대에 들어오면서 물리적 공간은 약화되고 시간과 기술에 기반한 사이의 공간이 현대인의 삶을 상당 부분을 잠식한 것처럼, 교회와 성도의 예배 생활에 있어서도 사이버 예배가 새로운 예배 트렌드가 되고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나아가 이것을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에 이 흐름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개혁과 연관시켜 당위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가 보여주듯 예배는 시공간에 창조된 인간의 존재 양식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물리적 공간과 비물리적 공간인 시간의 조합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존재 양식 속으로 앞으로도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송하는 시공간의 예배에 성령으로 임재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예배자에게 천상의 양식을 먹여주실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떡을 공급받은 성도들은 서로서로 육신의 떡을 떼고 나누며 서로가 주안에서 형제자매임을 확인하며 살아갈 것이고 살아가야 한다.   코로나19 둘째 해를 시작하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예배에 대한 통전적인 인식을 단단히 가져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지난 한해를 지나면서 이렇게 가면 머잖아 전통 예배가 사라질 것이라고 위기감을 토로하기도 한다. 또 일부 사람들은 교회는 온라인 예배를 뉴 노멀의 예배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발전시켜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주장 모두 주의를 기울이되, 과도한 일반화와 주장은 경계해야 한다. 성도들은 시공간에서 함께 연합하여 살아가도록 지음받은 자들이다. 물리적으로 함께 모여 예배하고 떡을 떼며,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생활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우리의 존재 양식의 본질에 더 부합한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시공간을 함께 하여 예배하는 생활에 더욱 가치를 두고 힘을 써 가야 할 것이다. 비대면으로 예배드리는 이 부자연스런 시기가 속히 끝나고 예배당에 함께 모여 하나님의 영광을노래하고 성도들이 신령한 양식을 받아 먹고, 성도들끼리 나누는 그런 복된 예배를 회복하게 되는 날이 속히 오도록,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길 기도해야 할 것이다.    /고려신학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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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1-12
  • 예수님 중심의 제3의 길로 나아가자
      저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초대 교회 당시 로마의 귀족이요, 관리였던 디오그네투스에게 기독교에 관하여 쓴 편지(Letter to Diognetus)가 오늘까지 남아 있다. 그 편지 내용 가운데 당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표현으로 “제3의 길”(the third way)이라는 단어로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그 당시 제1의 종교는 로마인들이 섬기는 종교이다. 여러 신들에게 예배하고, 제물을 바치며 각 가정마다 가정 신을 따로 모시고 살았다. 제2의 종교는 유대교였다. 로마는 유대교를 존중했다.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많은 억압 속에서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로마가 점령한 모든 땅에 퍼져 있었기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그리고 제3의 길이었던 기독교가 있었다. 그런데 AD 40년경 기독교인의 숫자는 오천 명 정도였지만 AD 300년경에는 6만 5천 교회, 500만 명이 되었다. 약 250년 사이에 천 배가 증가한 것이다. 이때는 로마의 핍박과 탄압이 극심한 시기였지만,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는 계속 성장을 했던 것이다.   2021년을 마주하게 될 우리의 목회 상황은 녹록치 않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세는 여전할 것이다. 여러 가지 산적한 위기와 어려움들은 더해 갈 것이다. 이러한 위기 가운데 우리는 로마 시대의 기독교가 박해 속에서도 성장할 수 있었던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교회는 첫째 오직 예수님이 중심이었다. 힘이 있었고, 강자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이기주의가 팽배했던 당시 종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낮고 천한 곳에 친히 오셔서 섬김의 삶을 사셨다. 가난한 자의 편에서 함께 하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최악의 죄인이 당하는 십자가형으로 죽으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이기고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예수님만을 믿고 따랐다. 그 예수님이 사셨던 삶의 모습을 닮아가려고 애썼다.   예수님만을 믿고 따르며 닮아가려고 했던 그리스도인들은 환난과 핍박 그리고 순교로 점철되었던 250년간의 초대 기독교의 고난과 박해사의 한 가운데서도 성장을 했다. AD 313년에는 기독교 공인을 이루어낼 정도로 로마를 변화시켰다. 그 원동력은 단 한 가지이다.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로마의 기독교는 AD 313년 로마 내에서 공인되고, AD 379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으면서 기독교는 제3의 길이 아니라 제1의 종교가 되었다. 이렇게 그 위치가 변화되면서 자연스레 기독교 역시 그 생명력의 핵심인 ‘초심’을 잃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신앙고백 없이 그리스도인들이 되었다. 박해와 핍박은 사라지고 세상 권력에 가까이 가는 길이 열렸다. 예수님 중심,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삶을 떠나 습관적이고 문화적인 기독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마가 멸망하듯 기독교 역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2021년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다시 예수님 중심의 제3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제3의 길로 나아가며 초심을 되찾고, 생명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자랑하고 증거하고 예배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오늘도 닮아가며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Ad Fontes! 근원으로 돌아가자다. 예수님께로, 예수님 중심으로 2021년을 다시 시작하자. 비록 우리가 맞닥뜨릴 2021년이 쉽지 않겠지만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며 살아간다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누렸던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 역시 풍성히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2021년 한국교회는 초대교회 교인들이 제3의 길을 걸어간 것처럼 먼저 예수님을 알고 배우고 닮아가며 더욱 열심히 성경공부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어 신앙을 실천하고, 어려운 때일수록 현 상황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정진해야 할 것이다. /한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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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12-31
  • 2021년 국내 교계 전망
    2021년을 내다보는 일은 우리가 걸어온 2020년을 돌아봐야 가능하다. 역사는 가장 과격한 단절이라고 여기는 혁명에서조차 늘 이어져 흐르기 때문이다. 교계의 앞길을 전망하는 일은 사회의 흐름을 살펴야 가능하다. 교회는 사회속의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2020년을 돌아보며   참 유난스러운 한해였다.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일이 세계를 덮쳤다. 코로나19 말이다. 이 전염병이 인류에게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길게 보면 17세기 이래 지속해 온 생산과 소비의 확대라는 삶의 방식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경고다. 짧게 보면 지난 30여 년 가속 페달을 밟아온 전 세계적인 시장 확대와 무제한의 소비 확산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고다. 기후 환경 위기는 발등의 불이 되었다. 인류 생존의 마당인 지구행성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정신사의 흐름에서 인류의 존재 방식과 연관된 문명사적 전환이 다방면으로 논의되고 있다. 초-연결을 기반으로 삼는 기술의 발전에서 4차 산업혁명 또는 인더스트리4.0이 압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비대면 방식의 온라인 또는 온택트가 개인의 삶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면서 생활 방식과 구조뿐 아니라 이와 뗄 수 없이 연결된 삶의 태도와 사유 방식까지 변화되고 있다. 사람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올 한해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소모적 싸움에 시달려왔다. 이른바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권에 대한 극심한 찬반으로 사회 여론이 추하게 반목했다. 전통 언론과 다양한 미디어 매체의 보도를 다 보고도 사실 확인이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이런 갈등의 와중에서 코로나19의 방역까지 정쟁과 싸움의 도구로 변질됐다. 남북이 갈린 휴전 상태에서 한반도 문제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의 관심사가 되었다.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교계를 보자. 코로나19 초기 상황에서 신천지 집단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해결하지 못한 터였다. 코로나 상황은 한국 교회에 더 심각한 타격이 되었다. 교회가 사회와 소통하는 일에 얼마나 서투르고 미숙한지 그 민낯이 드러났다. 교계 안의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사회의 판박이였다. 교회가 성경에 근거한 자체의 영역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갈등과 교회의 갈등은 구분되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로나19의 매서운 상황은 개인부터 사회의 다양한 집단과 국가와 문화권까지를 막론하고 무엇보다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자기 성찰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에게 자기 성찰의 중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현재의 상황보다 더 혹독한 시대가 많았지만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과 자기 성찰을 감행한 사람들이 그 어려움을 넘어 인류를 이끌어왔다. 오늘날의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인가.     2021년, 내적인 상황과 연관된 교계 전망   섣달그믐과 정월 초하루의 시간적 흐름은 연중 여느 날이 넘어가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사람이란 존재의 인식에서는 한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 첫날의 흐름은 특별하다. 우리에게 곧 열릴 새해가 한국 교회에는 어떤 시간일까. 교회 내적인 과제가 무겁고 힘겨울 것이다. 코로나19가 2021년에도 국내에서 연말까지 이어질 것이 분명한데, 공예배 출석 인원의 감소가 불가피하다. 현실적으로는 개 교회의 예산이 감소하는 것이 힘겨운 현안이다. 완전히 폐쇄할 정도로 재정 타격이 심한 교회들이 적지 않을 것이고, 반면 많지는 않겠지만 코로나 상황에서 오히려 재정이 증가한 교회도 있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 교회들은 어떻게든 견디어내면서 2021년의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할 것이다. 기업이 어려워지면 보통은 고정비와 긴요하지 않은 간접 광고비부터 줄인다. 교회도 단체로서는 별 다를 바 없다. 교역자 수와 국내외를 포함한 외부 선교비를 줄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일 테다.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선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더 어려울 텐데 선교비만은 줄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교회들도 있겠다. 참 감사한 일이다. 국내 교계 단체들의 후원 및 모금이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 이전에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는데 코로나로 더 어렵게 됐다. 현장 교회의 재정 감소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재정과 연관된 교계의 생태 구조에 연쇄적 타격이 될 것이다. 한국 교회 사역의 총량이 줄어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별하여 선택과 집중의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교인들의 신앙 인식과 구조가 변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조사에서 이미 확인된 터다.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의 신앙 인식 변화를 충분히 인식하고 목회의 방향과 방법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코로나 때문에 광범위하게 작동하기 시작한 비대면 방식의 온라인 예배는 코로나19가 잠잠해져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신앙인들 중에 온라인 예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일단 온라인 시스템에 승차하고 보니까 여러 다른 교회의 예배와 설교에 쉽게 접근한다. 좋으나 싫으나 설교를 비롯하여 목회자들의 목회에 관한 전방위적 검증이 시작됐다. 예장 합동에서 추진을 발표했고 지난 12월 초의 한교총 총회에서도 채택된 안건 곧 한교총, 한교연, 한기총 세 연합기관의 통합을 추진한다는 구상에는 우려스러운 점이 많다. 무엇보다 한기총을 통합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이 문제다. 한교총 안에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내년의 사회 정치 일정과 연관하여 교회가 또 사회의 정치적 갈등에 휩싸일까 심히 염려된다. 보수적인 영역의 대표성은 이미 한교총으로 교통정리가 끝났다. 다시 한기총을 끌어들이려는 인식이 걱정된다. 시급한 문제는 연합기관의 통합이 아니라 지도자들 인격의 변화다.   2021년, 외적인 상황과 연관된 교계 전망   교회 외적인 상황과 연결된 과제가 결코 만만치 않다. 코로나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그동안 교회가 사회속의 섬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일반적으로는 사회의 어느 단체든 일을 해나가면서 언론이나 여론에 무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사회적인 관계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래서 그에 관한 적절한 판단이나 식견이 성숙하지 못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처럼 교회는 결코 사회속의 섬이 아니다. 교회의 사역이 그들만의 리그일 수 없다. 세상 한가운데 존재하면서 거룩한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과 빛이 교회다. 2021년에는 기후 환경 위기와 연관된 담론이 세계적으로 강하게 확산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두 요인 때문이다. 하나는 미국의 차기 바이든 정부가 트럼프가 탈퇴한 파리기후협약에 다시 가입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코로나19로 인해서 현재 지구의 기후 환경 위기가 심각하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진 것이다. 탄소 중립에 관한 논의는 어느 나라도 피해갈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그러면 한국 교회는 이 문제에 관해서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 복음주의적 교계에서 인식과 관심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와 김정은, 트럼프와 문재인과 김정은이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만나면서 한반도 문제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인 의제가 되었다. 북한은 끊임없이 한반도 문제를 국제적인 의제로 부각시키려고 노력한다. 북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조금만 생각하면, 한반도의 평화와 장기적인 통일을 위해서는 한반도 문제가 6자회담 국가들에게 뿐 아니라 세계적인 현안이 되는 게 당연히 유리하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문제에서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 사이에 견해 차이가 큰데 교계도 마찬가지다. 한국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며 넘는 평화와 통일의 구상을 가져야 한다. 2021년 4월에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선거가 있다. 2022년 3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는 사실상 내년의 일이다. 선거 때마다 교회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보수와 진보로 갈려 움직였다. 보수든 진보든 정치권이 가장 쉽게 이용하는 종교 집단이 기독교다. 현재 교계 안의 극우 세력이 시장 선거와 대선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것은 뻔하다. 기독교가 정치, 그것도 가장 통속적인 구조로 움직이는 선거에 단선적으로 뛰어들면 기독교에 독이다. 정교분리라는 이천 년 기독교의 정통 입장을 이리저리 오해들 한다. 세상 한가운데 존재하면서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거룩한 말씀의 명령에 따른 십자가의 방식 곧 사랑과 평화의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며 구원한다는 것이 정교분리의 큰 틀이다. 중도 보수와 중도 진보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이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길이다. 교회가 이 면에 기여한다면 참 감사한 일이다.   2021년, 갱신의 카이로스적 기회   한국 교회에 바라는 사회의 시각이나 교회 스스로 자신을 보는 시각에서 공통점이 있다. 한국 교회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갱신돼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명제는 교회론의 부록이 아니다. 갱신과 개혁은 교회론의 본질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일하고 완결된 계시인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 기준이다. 거룩한 말씀의 심장인 십자가 사건의 가르침에 교회의 생사가 걸려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 성서의 말씀에 자신의 삶과 세계를 비추어보며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순례자다.   외적으로는 허점이 많은 제도와 불완전한 인간의 모임인 교회에는 늘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자신을 성찰하며 날마다 죽고 다시 사는 거룩한 모임이 교회다. 한국 교회가 양적인 감소를 겪은 시간이 벌써 사반세기다.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서 갱신을 외치는 목소리와 노력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다. 코로나19가 한국 교회에 주는 각성 중에서 갱신이 핵심이다. 코로나 상황은 하나님께서 주신 한국 교회 갱신의 카이로스적 기회다. 코로나가 끝나기 전에 의미 있는 움직임들을 통해서 적어도 한국 교회 갱신의 발동은 걸려야 한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새해 인사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사회와 21세기의 인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겸손과 회개와 경외의 마음을 맞이한다. 기독교 역사의 신앙 선배들과 인류 역사의 현자들은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도 믿음과 용기로 이겨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해를 열어주신다. 깊고 강한 믿음으로 인사드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12-30
  • 한국교회정론-2
      안창호장로(전 헌법재판관)   2020년 6월 29일 정의당 장혜영 의원 등 국회의원 10명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차별금지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가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도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차별금지법과 유사한 법안(「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 시안)을 만들어, 그 입법화를 추진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헌법 제11조의 평등권을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성별 및 사상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이 좋은 것 아니냐고 질문한다. 그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이다. 차별금지법은 하나님 말씀에 배치되고,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며, 차별을 조장할 뿐 아니라, 선량한 미풍양속과 국가질서를 해칠 수 있는 아주 나쁜 법이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동성애 설교를 하면 처벌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가짜 뉴스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언론이나 방송에서, 소셜미디어 등 인터넷에서, 학교(어린이집,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미션스쿨, 신학교)에서, 공공의 장소(길거리, 군대내 교회, 경찰 신우회)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하면 법적인 제재를 받게 된다. 최근 아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 전인데도, 방통위에서는 극동방송과 CTS가 차별금지법 반대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주의를 경고했다.   그 제재는 단기 징역형, 벌금 수백만 원보다 무겁다. 한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3천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이 부과될 수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이 가능하다. 손해의 2배 내지 5배의 배상, 최소 500만 원 이상의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집단소송을 제기하면, 10명이면 5천만 원, 100명이면, 5억 원, 1만명이면 500억 원입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와 단체는 파산되고 초토화될 수밖에 없다. 단순 징역형이나 벌금형보다 훨씬 무서운 제재이다. 차별금지법을 7,80%의 국민이 지지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 법에 대하여 아무런 내용을 가르쳐 주지 않고 질문 받으면, 많은 사람들은 차별을 금지하자는데 하면서 찬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알게 되면 차별금지법이 그런 악법이냐면서 반대한다.   어떤 분들은 차별금지법이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고 차별을 조장하는 등, 아주 나쁜 법이라면,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강력하게 이를 추진하려고 하냐고 질문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사상과 이념 때문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좌파의 정체성 정치는 유럽계열의 민족, 독실한 기독교 신앙심, 농촌 거주자들, 전통적인 가족 가치관과 미국적 정체성의 정당성을 무시하거나 무력화하려 한다.”고 한다(프란시스 후쿠야마,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이수경 역, 한국경제신문, 2020년, 196면). 반기독교적 이념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은 성별,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장애, 국적 등을 이유로 공적 및 사적 영역에서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제3조). 차별금지법은 차별 대상인 ‘성별’이 남성, 여성, 그 외에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고 한다(제2조 제1호). 성별에서 ‘그 외에 분류할 수 없는 성’을 인정한 것은 성의 구별이 생물학적 성(sex)이 아니라, 인간이 선택한 사회적 성인 젠더(gender)에 의하여 이뤄져야 한다는 젠더 이데올로기(gender ideology)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이 남성과 여성 이외에 제3의 성을 인정하면, 인간이 인정하는, 인간이 만드는 제3의 성은 무한정 늘어날 수 있다. (계속)
    • 오피니언
    • 정론
    2020-12-15
  • 한국교회정론-1
    소기천(장신대 신약학교수/한국교회정론대표)   오바마가 미국에 남긴 공헌은 오바마 캐어인 전국민 의료보험체계와 동성애 인권 논리이다. 트럼프가 기적적으로 클린턴을 꺾고 45대 미국 대통령직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이 두 가지를 폐기하기 위해 연방대법원에 가지고 갔지만, 판결이 번복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과연 더는 논란이 없는 문제일까?   오바마 8년 동안 미국이 정책적으로 동성애, 젠더 정체성, 사회적 성평등, 낙태 조장, 이슬람 난민 허용,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 등을 실시하여 진보적인 소수 종교인에게는 지지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침묵하는 다수인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많은 기독교인이 민주당의 기세에 눌려서 살던 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반전이 일어나면서 기독교가 숨을 쉴 수 있었다. 물론 지난 트럼프 재임 4년 동안 온두라스에서 시작된 이민자들이 무작정으로 걸어서 미국으로 향하는 대열이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음으로써 꽉 막힌 상황에서 미국의 반이민 정서에 인권 문제까지 불을 붙임으로써 논쟁이 가중되었지만,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함으로써 어느 샌가 매스컴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국경을 봉쇄하여 미국인의 일자리를 사수해야 한다고 트럼프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어느 사이에 쿠바 난민들이 플로리다에 대거 몰려가서 터전을 마련한 이후의 상황에서 같은 히스패닉계이지만 쿠바 이민자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옹호하기 위해 멕시코 국경에 반이민 장벽을 쌓은 것을 지지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결국,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4년 전의 대선처럼 플로리다를 민주당에게 내주지 않은 보상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7천만표를 얻은 트럼프는 재임으로까지 이어지기 어렵게 되었고, 바이든이 미 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7천5백만표 이상의 득표를 하고 대의원의 과반수를 얻은 상황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승복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법적으로 반발하기 때문에 바이든은 법적으로 당선인의 신분을 얻지 못하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혼돈의 와중에 미국에서 국론 분열과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기에, 누군가는 나서서 분열을 치유하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일이 시급하다. 그동안 미국 대선은 정책 대결보다는 서로를 공격하면서 상대방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일에 급급한 것이 선거가 끝난 상황에서도 트럼프가 좀처럼 백악관을 내줄 것 같지 않은 기세를 올리고 있다. 일단 대선이 끝났고 개표가 말해주듯이 바이든이 대의원의 매직 넘버인 270표를 훌쩍 넘긴 상황이다.   바이든은 3수라는 우여곡절 끝에 당선되었지만, 과거에 그의 정치 역정이 순탄치 않은 것처럼 앞으로도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일이 전혀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바이든은 트럼프가 어려운 여건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기 이전에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늘린 정책에 대해 인정하고, 미국인의 자유를 구속할 수 없다는 트럼프에 대해서 전염병을 핑계로 사사건건 마스크만을 물고 늘어지고 여론몰이를 통해서 트럼프를 조롱하고 깎아 내린 가벼움을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동성애자의 인권을 중시하여 주례도 마다하지 않았던 바이든이 어떤 경우에서도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는 트럼프를 향해서 전염병 확산을 막는다면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남은 대선 유세를 마무리한 행보를 비난한 것이나 자신의 선거에 유리하게 거액의 광고를 통하여 계속해서 조롱한 것은 결코 세월이 지나간다고 쉽게 잊힐 일이 아니다. 그만큼 바이든은 절대다수의 언론 매체가 지지하는 기반을 바탕으로 트럼프를 공격하면서 그를 지지하면서도 침묵하는 샤이 트럼프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바이든이 대선에 이기고서도 법적으로 당선인의 신분을 쉽게 얻지 못하는 것도 이런 연유와 무관하지 않다.   오바마 8년의 재임 기간에 교회는 양분되었다. 프린스톤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미국장로교회가 동성애 합법화를 선언하고 동성애자 목회자를 허락하게 되자, 2천여 개의 교회가 교단을 탈퇴하여 1/3로 교세가 줄어들었다. 프린스톤 출신이 한국 신학교에 대거 몰려들면서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의 몇몇 교단은 동성애 인권 논리의 싸움터로 변질되었다. 이것을 거울로 삼은 미국감리교회는 동성애자 목회자를 허용한 결정을 뒤엎고, 오히려 동성애 지지파와 동성애 반대파가 교단을 분립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파국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성경은 동성애를 죄악으로 말한다. 그런데 신학교가 동성애를 성경대로 죄악이라고 규정하면서, 동시에 인권이라고 교묘하게 포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느 인권 선언문과 권리장전에 동성애가 인권이라고 명시되어 있는가? 동성애를 인권으로 옹호하는 것은 상황 윤리를 근거로 하는 논리이며, 사회적 성과 젠더 정체성을 옹호하려는 반성경적인 주장이다. 트럼프가 승복하지 않고, 미국의 몇몇 주에서 발생한 부정투표 의혹을 제기하는 것에 기독교가 동조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바이든은 깊이 생각하고, 오바마의 8년 재임 기간과는 다른 인권 정책으로 동성애 문제에 접근하여야 한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동성애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죄악이다. 인권으로 옹호를 하므로 동성애자가 파국으로 치닫다가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호스피스 병동에 가서야 뒤늦게 뉘우치고 동성애로부터 돌이켜서 탈동성애자가 되는 일이 일어나는데, 이미 때는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이후이다.   바이든은 다시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인권 논리에 빠져서 동성애자 결혼식 주례를 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대로 굳게 믿고 나가는 샤이 트럼프, 곧 다수의 보수적인 기독교인을 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이든은 4년 내내 쉽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바이든은 성경의 진리를 존중하여 동성애자가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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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11-23
  • 코로나 이전부터 문제였다
        코로나19와 연관된 논의가 사회는 물론이고 교계에서도 한창이다.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는 우리나라에서 코로나가 시작된 올해 2월에 설문조사를 시작한 이래 내년 전반기까지 다섯 번에 걸쳐 진행되는 ‘코로나19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코로나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교회의 사역은 거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대략 내년 말쯤이면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상황이 종료될 것으로 본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깔끔하게 사라지는 방식으로 끝나든 독감 바이러스처럼 인류와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끝나든, 코로나 이후 시대에 관한 예측과 대책이 중요하다. 코로나19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받는 타격을 추스르면서 내부적으로는 목회의 동력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방안에 한국 교회의 미래가 걸려 있다. 향후 5년에서 8년 어간이 한국 교회의 골든타임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골든타임, 자연재해를 비롯한 어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매몰된 사람이 생존한 채로 구조될 수 있는 한계 시간을 말한다.   1885년을 한국 선교의 기점으로 본다면 선교 역사 110년만인 1995년부터 한국 교회의 교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 벌써 25년 그러니까 사반세기가 지났다. 양적으로 성장을 구가해온 시간의 거의 사분의 일 동안 이미 쇠락해온 것이다. 1999년에 저 유명한 ‘옷 로비 사건’이 터졌다. 한국 교회의 하락과 연관해서 상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다. 2020년의 코로나 상황에서 불거진 한국 교회의 문제들은 올해의 문제가 아니다. 사반세기 전부터 현상이 시작된 것인데 코로나 상황에서 누구나 볼 수 있게 표출됐을 뿐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볼썽사납게 나타나고 있다. 목회자들의 신학적이며 인격적인 소양 저하, 지도자들의 윤리적 해이, 신학교육 기관의 동력 상실, 연합기관의 분열과 대표성 약화, 교단 및 교계 정치의 비윤리성, 기복주의에 토대를 둔 번영신학과 물량주의적 성장 신학, 교회 직분 제도의 경직성, 그리스도인 개인의 자기정체성 약화와 사회적 영향력의 상실 ……. 한국 교회에서 문제가 없는 영역이 어디인가 찾기 힘들 정도다.   한국 선교 초기에 교회는 민족의 희망이었다. 교육, 의료, 한글 교육, 생활 개선, 민족의 정체성, 국제적 연결 등 사회 전반에서 교회는 나라와 민족의 미래였다. 우리 사회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한국전쟁의 격동기를 지나고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걸어오는 동안 교회의 부침이 많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교회는 내부적으로만 아니라 사회 상황과 연관해서도 동력이 충만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친일과 신사참배를 놓고 교회의 분열과 부끄러운 자기정당화가 있었고 한국전쟁과 이후의 상황에서 좌우 대립의 극심한 반목이 교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굴곡 속에서도 복음 전도의 열정과 어려운 이들에 대한 구제가 한국 교회에 넉넉했다.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교회가 우리 사회를 이끌었던 시절이 과연 있었나 싶을 정도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나. 쇠락의 변곡점이 어디였나. 한국 교회가 신앙의 동력을 잃어온 시간이 이제는 꽤나 길어서 한두 가지 처방으로는 회복되기 힘들다. 기초 체력이 워낙 허약해져 있어서 근본적인 원인 진단과 중장기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하도 많이 들어서 진부할지 모르지만 오래된 가르침을 듣는 것이 확실하다.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라는 명제 말이다. 교회는 자신이 목적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순례하는 나그네 공동체다. 자신의 제도와 구조를 유지하고 확장시키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면서 교회는 병들고 허약해진다. 자신 스스로가 목적이 되면서 교회는 끝내 타락하고 복음에 대적하는 세속 집단이 된다.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친히 문구까지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얼마나 건강하게 작동하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힘차게 작동하는지 보면 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을 기록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제일성을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기록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거룩한 이중 국적자다.   그러면 묻자.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무릇 ‘나라’라고 할 때는 어떤 법이 구속력을 갖고 작동하는 일정한 영역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법 곧 성경 말씀이 작동하는 영역이다. 교회 역사에서 신앙이 병들고 타락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외쳤던 소리가 ‘성경으로 돌아가자’였다. 기독교 신앙의 시원(始原)이 성경이니까 이 외침은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처음 사랑을 되찾아야 한다. 광야로 나가야 한다. 광야는 주님 바라보지 않고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곳이다. 온몸과 마음과 힘을 다해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바라고 우러르는 신앙의 본질을 찾으려 몸부림해야 한다. 성경을 끌어안고 십 년 정도는 외길을 걸어야 한다. 사회적 영향력 회복은 묻지 않아도 좋다. 성서의 말씀대로 살면 사회적 신뢰는 문제도 아니다. 선교적 교회 운운할 필요도 없다. 성경 말씀대로 살면 복음 전도는 자연스럽게 강력해진다. 코로나 한참 이전부터 문제였던 한국 교회의 상황을 풀려면 코로나 한참 이후까지 바라보는 긴 호흡을 갖고 다시금 온몸을 던져야 한다. 말씀 속으로.    /지형은목사 (말씀삶공동체 성락성결교회 담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0-11-18
  • ‘있음’의 감사 ‘없음’의 감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한하고 상대적이다.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든, 아끼는 재산이든 내 옆에 항상 있을 수는 없다. 내 존재도 그렇다. 있다가도 때가 되면 사라지고 없어진다. 그래서 삶이란 “있음”과 “없음” 사이에 놓여 있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존재’, 곧 ‘있음’에 집중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직장이 “있고”, 집이 “있고”, 재산이 “있고”, 명예와 권력이 자기에게 “있게” 하기 위해 골몰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있게 되면 만족스러워하고 즐거워한다. 모두 “있음”에 방점이 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재산이 불어나고, 사업이 성공하며, 염원하던 일이 이루어질 때 자연스레 감사하게 된다.   추수감사절도 그 시작은 곡식의 풍성한 결실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주신 것’ 곧 우리에게 ‘있는 것’을 세어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만약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다면 어떻게 될까? ‘욥’처럼 모든 것을 잃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한국 기독교는 최근 들어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신앙의 선배들이 한국 사회에서 쌓아온 사회적 존중과 신뢰를 잃어버렸다. 여론조사 결과들을 보면,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는 다른 종교에 비해 매우 낮아졌다. 실제로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싸늘한 눈초리를 자주 느끼게 되었다.   일반시민들은 기독교가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며, 타협과 관용이 없는 비이성적인 집단이라고 느끼는 듯하다. 그들의 눈에 기독교는, 길거리에 나와 좌파독재 타도를 부르짖는 강경 우파의 중추세력, 코로나19 방역 상황에서 자기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감염은 아랑곳하지 않는 집단, 감염된 뒤에는 자신의 행동을 숨기고 거짓말까지 하여 방역체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들로 비쳐지고 있다. 교회는 할 말이 많을 것이고 억울한 부분도 적지 않다. 때로는 언론의 일방적인 보도 영향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건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간에 이미 교회는 어린이와 젊은이의 숫자가 급감하고, 새신자 숫자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교회는 사회와의 소통이 어려워지고 점차 노령화되고 있다. 설상가상, 코로나19로 비대면 예배가 늘어나면서 교회의 결속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다시 대면예배를 시작했지만, 출석 교인 수와 헌금이 크게 감소했다는 걱정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내년에는 교역자들을 줄이고 인건비를 삭감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듣는다. 개척은 꿈도 꾸기 어렵고, 작은 교회들은 존립이 위태하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앞으로 이어질 거라는 데 있다. 그야말로 위기다.   교회는 지난 20~30년간 한국 사회의 발전과 도시화 과정에서 크게 부흥했다. 사람도 돈도 넘쳐났고, 영향력도 권력도 커졌다. 그야말로 “있는” 시대였다. 이제 교회는 “있는” 시대에서 “없는” 시대로 넘어간다.   다시금 예언자 하박국의 기도를 기억해야 할 때가 되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참 신앙인은 “있어서만” 감사하지 않는다. “없어져도” 감사한다. 아니 “없음” 때문에 더욱 감사한다. 신앙인의 감사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우리는 명예나 부, 권력의 포장이 벗겨질 때 참 자기를 보게 될 것이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기는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먼저, 위기는 본질을 깨닫게 한다. “없음”의 시대에 신앙을 굳게 하고 더욱 감사할 준비를 해야겠다.  /대한기독교서회 사장
    • 오피니언
    • 정론
    2020-11-12
  • 태어날 사람을 차별대우해서는 안 된다
      2020년 10월 7일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낙태죄 개정안은 여론이 자연법칙을 이기고 정치가 생명과학을 이긴, 후대에 수치스러운 시도가 될 것이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닌다”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명시하였다.   헌법 정신은 ‘모든’ 생명의 보호이며, 민법에서도 생명의 시기는 수태한 때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법 정신이나 실정법이 태아가 생명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태어날 사람의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국가가 법으로 허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결정인가! 낙태 허용과 다름없는 이 개정안의 어디에서도 태아 생명권 보호를 위한 고려와 최소한의 법적장치를 찾아볼 수 없다.   낙태죄 폐지에 대한 여성의 목소리는 낙태에 대한 책임이 남성과 사회는 빠진 채, 여성에게만 부과되어 온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러나 오늘 입법 예고된 법무부 낙태죄 개정안은 임신의 공동 주체인 남성은 합법적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하고, 수많은 여성은 피임의 수단으로 낙태를 강요당하게 만들며,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태아는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동안 지속해서 제기되었던 임신의 책임이 있는 남성에게 책임을 묻는 법안 마련 등의 노력을 해보지도 않은 채, 임신 14주까지 사유를 불문한 낙태 허용 입법 예고는 태아의 생명 보호의 최소한 장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엄연한 차별이며, 생명침해이고,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생명과학 전문가 그룹인 의학계의 의견을 겸허히 수용했는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부는 남성의 양육책임법을 제정했는가? 여성의 육아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낙태가 여성의 몸과 마음에 어떤 해를 입히는지에 관해 충분한 연구와 의견수렴을 했는가? 여성과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아무런 대책 없이 법무부의 낙태죄 개정안 입법 예고에 대해 크게 우려한다.   대한민국의 정부는 태어난 사람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악법을 예고하였다. 과학과 의학은 생명의 시작에 대한 진실을 계속 증명해내고 있고, 사회는 모든 생명이 조건과 상관없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의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는 중대한 차별을 입법 예고하였다. 우리는 어느 순간까지는 생명이 아니었다가, 어느 순간부터 생명으로 변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주까지의 태아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근거는 무엇인지 대한민국 정부에게 묻는다. 97%의 낙태 시술이 임신 14주 이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법조문의 실제 내용은, 앞으로는 모든 낙태를 자유롭게 허용한다는 뜻이 아닌가! 의학계와 생명과학계, 그리고 여성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채, 일방의 의견만을 편들어 14주라는 생사의 구분선을 마련한 정부의 편의주의적 태도를 강력하게 규탄한다.   태아의 생명권 보호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실제적 조화를 이뤄 개정안을 발표하였다고 하였으나, 낙태 허용과 다름없는 이 개정안의 어디에서도 태아 생명권을 보호하는 고려와 최소한의 법적 장치를 찾아볼 수 없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생명을 타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반인권적 시도를 정부는 당장 철회하기를 요구한다. 태아는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고, 우리 모두 경험한 과거이다. /사단법인 프로라이프 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0-10-27
  • 정도를 걷는 개혁의 정신 회복하자
      두 번째 밀레니엄을 앞두고 라이프지는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 100가지와 인물 100인을 조사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쿠텐베르크의 성경인쇄와 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에 이어 세 번째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순위에 들어있다. 미국 문화권에서 선정한 것이기에 다른 문화권의 시각에서 보면 선정과 순위에 다소 불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 조사하던지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이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사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과 사건임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종교개혁은 어느새 우리의 삶에 자리잡고 있는 천 년의 사건이 되어 있는 것이다.   10월 31일은 종교개혁기념일이다. 종교개혁은 과거에 지나간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진행해야 할 현재진행형의 사건이어야 한다.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아 종교개혁의 본질과 정신을 다시 한번 생각함으로 오늘의 개혁을 이어갈 우리의 마음을 되짚어 보자. 종교개혁의 정신은 무엇인가?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본질에로의 회복이다. 개혁이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은 원래로의 회복, 원래적 진리에로의 회귀가 종교개혁의 본질이다. 15세기 가톨릭은 기독교의 본질을 무수히 왜곡시켜 놓았다. 루터의 외침은 이 왜곡으로부터 개혁하여 원래의 본질적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15세기 로마 교황권은 어떻게 기독교 진리를 왜곡시켜 놓았는가?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가장 유명한 것이 면죄부이다. 루터의 95개 논제 중 27조는 이렇게 말한다. ‘헌금함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면죄부란 간단히 말해서 세속적 돈으로 신앙적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구속의 사건은 아무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만다. 또 95개 논제의 79조는 말한다. ‘교황이 사용하는 십자가상이 그리스도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모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 교황이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는 것이다. 모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한참이나 왜곡하고 있는 것들이다. 심지어 95개 논제 10조에는 이런 언급까지 있다. ‘임종을 맞은 자에 대하여 연옥 문제를 내세워서 속죄를 보류하는 사제들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며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결국 교황은 하나님을 대신했고, 돈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대리했다. 이런 왜곡으로부터 본질을 회복하고 참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종교개혁의 바른 정신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세계는 어떠한가? 인간적인 것들이, 세속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지 묻고 싶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이 교리, 신학, 목사, 사람, 돈, 권세, 교권일지라도 하나님보다 상위 개념에 둔다면 그곳이 개혁의 자리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사회를 개혁하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개혁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비난받고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개혁의 정신을 망각하고 오늘의 한국교회가 자기의 이익추구에만 골몰하고 있을 때 이제는 교회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부단스런 짐이 되고있지는 않는지 우리 교계가 통렬한 자기반성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다. 개혁의 정신으로 다시 무장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 형성을 통해 한국교회가 상실했던 사회 신뢰를 회복하는 데에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가 처한 사회현실은 어떤가? 참 진리의 가치관이 제대로 대접받고 있는가? 정도가 아닌 꼼수와 술수가 지혜로운 처세술로 용납되고 있지는 않은가?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참 진리의 가치로 돌아가야 한다. 아무리 많은 이익이 있더라도 사도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 참 진리가 있는 정도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어제의 종교개혁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져주는 화두이다. /루터회 전 총회장, 새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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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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