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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헌절– 말씀과 교회법을 존중하는 거룩한 교회를 위하여
      7월17일, 우리는 대한민국의 헌법이 제정되고 공포된 뜻깊은 날을 맞이합니다. 헌법은 한 나라의 근본과 질서를 세우는 토대이며, 국민 모두가 지켜야 할 최상의 규범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는 이 세상의 법보다 더 영원하고 절대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 기초한 교회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존재하게 한 생명의 뿌리요, 교회법은 그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 교회가 정의롭고 질서 있게 세워지도록 인도하는 거룩한 울타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두 가지 기준을 존중히 여기며 세워가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안팎의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권위의 상실, 무분별한 다툼과 분열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때로는 작은 오해가 깊은 상처로 번지고, 사소한 이익다툼이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아픈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의 시기일수록 우리가 더욱 붙잡아야 할 것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이를 바르게 적용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법의 질서입니다.   교회 안에 갈등과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무엇보다 말씀과 교회법을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람의 편에 서거나, 세상법을 교회의 유일한 잣대로 삼아 판단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그 뜻을 구하며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사랑과 진리를 함께 가르치며, 교회법은 공의와 은혜가 조화를 이루도록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다툼과 분쟁 앞에서 화해와 중재의 은혜로운 길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억울함이 있어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하고, 내 뜻을 내려놓고 교회의 유익을 구하며,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를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다시 우뚝 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고린도전서14장 4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품위와 질서는 결코 사람의 지혜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교회법을 경외함으로 지킬 때에만 유지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떳떳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헌법을 존중하되, 그 위에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법을 가장 높은 권위로 세우는 교회가 될 때, 우리 가운데 주님의 평화와 은혜가 충만히 임할 것입니다. 주께서 이 결단 위에 은혜를 더하시고, 교회를 새롭게 하시며, 이 나라와 민족 위에 진리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교회에 평화! 세상에 빛을! 아멘”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증경대표회장, 비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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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7-08
  • [정론] 수련회를 사경회로
       신학교에서 한 학기 마지막 시험을 보는 시간이었다. 교수는 시험지를 나누어 준 후에 이렇게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한 학기 동안 성경해석학을 잘 배웠습니다. 앞으로 믿음의 생활을 할 때 이번 학기에 배운 것을 가지고 삶에 시험이 올 때 능히 이기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기도를 했다. 그날 공부한 것은 성적을 얻기 위하여 공부한 것보다 앞으로 시험이 올 때 이길 수 있는 지식을 얻었다고 깨달았다. 그 후 성도들과 성경공부를 시작할 때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그 지식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에서 시험을이기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진다” 는 말은 꼭 하게 되었다.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완전한 확신과 확고한 진리임을 믿고 있다.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하고,순수하고,영원한 지혜이며, 그것이 양심에 확신을 주고 마음을 뚫고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립한다”고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을 쓴 윌리암 퍼킨스은 말했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삶이 풍요로워졌고 편리해졌다. 삶의 속도도 빨라졌다. 그래도 모든 사람은 갈증을 안고 살고 있다. 갈증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함이라고 하고 있다.     기원전 765~755년 사이의 아모스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에게 전한 말씀으로 성경 암8:11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는 이 말씀이 오늘날 모든 사람과 그리스도인이라면 들어야 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살고 있다. 그런데도 삶의 목이 마른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앉아 있지만 정녕 마음에 깨달음은 없고, 성경공부 시간에 성경에 대한 지식은 얻지만 마음에 깨달음이 없는 지식을 쌓고 있다면 여전히 삶은 목마를 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경 막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되 마음을 기울이고 들었으면 실천을 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교회는 성경공부 시간이 있다. 성도들이 참석하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성도는 저조하다. 대부분 관심과 시간이 없고 생활이 바쁘고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성경공부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이면 분명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어렸을 때 교회 (현 용산 중앙교회)는 여름에 사경회를 열었다. 오전 10시에 모든 성도들은 교회에 모여서 성경 말씀을 배웠다. 기억나는 것은 아현교회 김현봉목사님이 오셔서 일주일간 말씀을 전하셨다. 여름이라 무더운 날씨였지만 교회 창문을 열고 성도들은 마루바닥에 앉아서 말씀을 배웠다. 초등학생이었는데 다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기도에 대하여, 성령님에 대하여, 예배에 대하여, 전도에 대하여 쉽게 가르쳐 주셨다. 특히 기도에 대하여 배울 때는 회개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다. 여름사경회 후에 성도들은 저녁마다 기도하는 일에 힘을 썼고 전도의 열기가 있어 매 주일 새신자가 등록하였다.     교회는 매년 여름이 되면 각 기관별로 수련회를 하게 된다. 수련회에 형편상 참석을 못하는 성도가 있고 교회 형편이 어려워 수련회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수련회를 사경회로 하면 좋을 것 같다. 성도들에게 성경공부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만들어서 같은 주제로 같은 내용을 새벽, 오전, 저녁에 한다면 성도들은 형편에 따라 참석할 수 있게 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될 것이다. /무디사역문화연구소 소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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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6-30
  • [정론] 나라사랑의 힘은 역사의 기억이다
      2020년(10월) 방탄소년단 BTS가 한국과 미국의 우호증진에 큰 공헌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밴 플리트 상을 받았다. 처음에 BTS가 이 상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올해로 75년이 되는 6.25한국전쟁에 미군 최고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만든 상이었는데 그의 아들 밴 플리트 주니어도 공군요원으로 함께 6.25전쟁에 참전해 작전비행 중에, 그만 북한군의 의해 요격된 비행기가 추락이 되었다.     행방이 불분명한 그를 수색하자는 부하들의 조언을 밴 플리트 장군은 “내 아들을 찾겠다고 많은 군인들을 더 희생시킬 수 없다”고 눈물을 머금고 만류했다고 한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22세의 그의 아들 주니어 밴 플리트가 그때 죽었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죽지 않고 북한 군의 포로가 되어서 중국에 인계되었고 나중에 소련군에까지 최종 넘겨져서 시베리아의 군락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2020년 방탄소년단이 밴 플리트 상을 수상하기 한달 전 그의 조카뻘 되는 조셉 맥 크리스천(미국LA 거주)발표가 되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밴 플리트 장군은 1996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도 자신의 아들이 평양인근 산야에 묻혀있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고, 그 아들이 묻혀있는 땅 한국이 어서 통일 되어 그의 시신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밴 플리트 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BTS가 이 상을 받으면서 “우리는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소중한 미국의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라는 소감을 발표하자 중국의 방탄소년단 팬들이 그 방탄소년단을 비방하고 탈퇴화는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이 한반도를 침범한 미군을 물리치고자 조선을 도와주었다는 식의 역사왜곡으로 중국 젊은이들 착각 속에 빠뜨렸다. 사상의 자유가 없고 특별히 기독교에 대한 반대적인 사상을 가진 중국은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망각시켰다. 그런데, 나중에 중국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왜곡된 역사를 잘못 알았다고 반성하는 참교육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3만 4천명의 젊은 미국 청년들이 한국의 지금의 번영과 자유를 지켜주었다는 75년전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만 하는데, 정작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망각한 채로 살고 있는 현실이 두렵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하고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에게 베푼 이 역사적인 기적과 사실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전하고 기억하라’ 했다. 젊은이들은 특별히 어린 세대와 다음세대들은 부모로부터 나라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실천할 때 힘이 생기고 가족사랑과 나라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근본적으로 주신 하나님을 사랑할 힘이 생긴다.    역사의 정확한 기억 더 분명하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역사에 어떻게 개입하시고 인도하셨느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또 분별하는 것이 나라 사랑의 힘이다. 그 역사를 아는 자들을 미래가 기억할 것이다. 신채호는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고 성경은 “너희가 옛날 애굽 땅에서 종살이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말라.”(신15;15) 고 신신당부 했다. 역사는 과거를 잊어버리면 현재의 역사도 잊혀지게 된다는 뜻이다. /기드온동족선교회 국제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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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6-24
  • [정론] 크리스천과 애국운동
         6월은 애국의 달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현충일과 6·25사변 75주년을 맞으면서 나라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에는 국경을 초월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겐 자신들이 속한 국가가 있기에 애국 애족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에 나라를 사랑하고 헌신과 충성을 다 해야만 한다. 크리스천의 애국운동은 교회 역사를 보면 늘 헌신적으로 함께 해왔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는 「금주·금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당시, 우리는 매우 가난하였다. 그런데도 술과 담배로 낭비하는 생활로 절제하지를 못했다.교회가 앞장 서서 근검 절제하는 생활운동은 지금도 꼭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도 교단별로 경건 절제운동으로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와 기타 생활 전반에 걸쳐 낭비하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애국운동임이 분명하다. 이런 운동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이되라』시는 분부의 실천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풍족한 생활을 하는 뒷면에서 어두운 음지에 살아가는 장애인들과 노숙자들을 돕는 교회의 실천은 역시 세상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크리스천은 모두 일어나 애국운동에 동참해야만 한다. 6·25사변을 생각하면 그때, 우리의 힘만으론 감당키 어려웠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엔(UN)군 16개국이 동참하여 준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지금도 이 땅에는 평화가 요구되고 있다. 북한은 핵을 무기로 삼고 위협하고 있다. 평화를 깨려는 불안과 두려움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때 평화를 구하는 기도가 있어야 하고 나라를 지키는데 솔선 수범해야 한다. 그것이 애국운동이다. 평화가 제일이다. 신곡(神曲)을 쓴 유명한 시인 단테는 이 세상의 최고 단어는 「평화」라고 했다. 그가 한번은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날 밤, 위안을 얻기위해 산타크로채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을 때 마침, 저녁 기도를 드리다가 나온 힐라리오라는 수도사가 “무엇을 구하러 왔소?”라고 물어, 단테가 “평화요”라고 해서 남겨진 말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이해 관계가 얽힌 국가 간에도 평화이고, 우리나라 안에서도 계층간의 평화와 정치적 혼란 역시 평화가 우선이고 이 사회 곳곳에, 가정마다에도 서로간의 평화가 제일이다. 애국의 달, 6월이 평화의 기쁨이 있기를 기원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4~19)”/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5-06-13
  • [정론] 애국하는 길
      세계최대 평택 주한 미군사령부 영내에 들어가면 「포 채플린즈 메모리얼 채플」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라틴어 격언이 눈에 띈다. “PRO DEO ET PATRIA”, “하나님과 나라를 위하여!”는 애국심에 대한 헌신을 표현하는 격언이다. 이 채플의 4명의 성직자는 두 명의 개신교 목사, 한 분의 유대교 랍비, 한 분의 로마카톨릭 신부들로 ‘불멸의 성직자’ 또는 ‘도체스터 성직자’라고도 불린다. 1943년 2월 3일 미군 수송선 SS 도체스터호가 침몰하면서 민간인과 군인을 구출하다 사망한 성직자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최악의 해상 참사 중 하나였다. 민간 여객선인 도체스터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선박 관리국의 병력 수송선으로 군용으로 개조되었다. 1943년 1월 23일 뉴욕을 출발하여 그린란드로 향했으며 해안 경비대의 호위를 받는 3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호송대의 일원으로 약 900명을 태웠다.     2월 3일 이른 아침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앞바다에서 독일 잠수함 U-223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 목사들은 다른 군인들이 구명보트에 탑승하도록 도왔고 구명조끼가 떨어지자 자신들의 구명조끼를 포기하고 배와 함께 가라앉으면서 팔짱을 끼고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이 네 명의 군목들의 이야기는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수많은 추모비가 세워지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사후에 수훈 십자 훈장과 퍼플하트 훈장을 받았다. 군목들은 명예훈장(미국최고의 훈장)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기에 수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대신 의회는 명예훈장과 동일한 무게와 가치를 지닌 훈장을 제정했다.    군인이 전장에서 목숨을 마다하지 않고 희생하는 것만이 애국이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길은 군인들만의 일은 아니다. 기독교신자를 포함하여 국민 모두는 군인들과 같은 무게로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애국’이 특정집단의 전유물이 될 때 공산혁명이나 나치독재,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정당화되고 만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것이 분명하다. 모든 국민의 애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사와 시대 앞에서 “나 몰라라”,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하루살이’ 일상은 애국이 아니라 망국의 고속도로를 까는 것이다.    오늘 탄핵정국과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의 역사와 현실 앞에 무관심과 체념은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짐을 내팽개치는 범죄다. 대선 정국 앞에서 골치 아픈 정치 어젠다요 세상 일이라고 외면한다면 이후에 닥쳐올 뻔한 미래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자폭행위가 된다.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개인적 희생과 사랑만으로 멈추지 말고 공동체적 행복과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 양보하는 희생이 일반화되는 나라와 국민이 되길 위해 분노 게이지는 의지로 낮추고 조절하며, 필요한 적과 상대를 인정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며 화합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모든 국민이 실천하는 ‘애국’이 될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오직 하나님만이 들을 수 있게 하는 ‘골방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지키시고 세우시는 나라, 대한민국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가는 군대를 모아 국경선을 지키지만 교회는 성도를 모아 새벽기도, 철야기도 군대를 비롯한 영적군대를 만들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적과 싸우며 사명을 다하고 있다.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할 사실은 통치자와 국민 사이에는 분명 인격과 성품의 연결이 있다. 지도자의 나쁜 정책과 성품은 전염성을 가지고 국민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지도자의 인격적 부패와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성품은 사회 전반을 파괴하고 만다. 그러기에 국가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 애국하는 길은 선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국가와 교회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함께 권선징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전국기독교수연합회 회장·칼빈대 은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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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5-23
  • [정론]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이루는 축복공간
       트럼프 대통령 2기가 시작되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남자와 여자를 성별로 인정한다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서명을 하였는데, 이에 때를 맞추어서 유럽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성별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뉴스에서 회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강력한 로비를 바탕으로 동성애를 확산시키려는 퀴어(queer/괴상한) 단체들의 활동 때문이다. 이들 동성애 단체는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매스컴과 정치를 장악하고, 이미 학교와 문화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혀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까지 동성애 이념으로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70세가 넘어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 배우까지 동성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손가락질받고 있다. 이혼녀로 혼자 자녀를 양육하며 배우 활동한 것을 필자도 한 때는 격려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자녀를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지만 잠잠해도 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 큰 파문을 불러왔다. 그것은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사위가 자랑스럽다’라는 투의 발언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은 며느리로 상대집안과 결혼한 것이라는 해괴한 일로 추정된다. 윤여정의 이런 발언은 소수 동성애 단체에는 환영받았겠지만, 대부분 일반인이 체감하는 사회적 정서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배우도 공인이다. 공인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공인의 발언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모방심리를 자극한다. 이런 점에서 윤여정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 하고, 취소하여야 한다. 사과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공인으로 활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3남매를 둔 다둥이 가정의 부모인데, 셋째에게는 국가가 국민건강보험도 제외했다. 내가 결혼하여 자녀를 출생할 때 국가가 나서서 산아제한을 실시하였다. 그 한 예로 예비군 훈련을 가면 정관수술을 간호사들이 시행할 정도였다. 집안에 의사와 간호사가 많아서 들은 이야기로는 정관과 난관수술의 인원이 의료인들에게 할당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망국적인 일을 행한 지난 정부의 의료인들은 반성과 회개를 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은 의료분쟁으로 환자의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의료인들은 정부 시책을 대할 때 자기들에게 유리하면 생명도 죽이는 불임과 낙태뿐만 아니라, 환자를 방치하고 데모하는 의료분쟁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동성애자는 자녀를 낳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망국적인 동성애와 무분별한 낙태로 가뜩이나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결혼하여도 자녀를 낳지 않는 시대에 초저출산 문제로 대한민국이 소멸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라는 통계가 심각한 상황이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까? 나는 다둥이 자녀를 둔 신학생들과 농어촌 미자립 개척교회를 돕는 사역을 위해 벌써 24차례나 예수학교로 모였다. 그랬더니 2명 이상 8명까지 자녀를 낳은 다둥이 가정이 모이는 집회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다시 여름에 홍천 시냇가의 숲 펜션에서 한국과 몽골과 일본의 어린이들을 불러서 2박3일 국제영어성경캠프를 무료로 진행한다. 미디어에 종사하는 분들은 다둥이 가정의 행사를 자주 소개하여 사회적 분위기를 고취해야 한다/한국교회정론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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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신접종과 교회 방역매뉴얼 문제점
      섬기는 성안교회에서 지난 주일까지 전체 교역자와 성도 70%가 백신 접종 완료 되었다.    젊은 교역자 중에는 백신 접종 후 잠시 통증의 시간을 지나기도 했지만 특별한 일은 없었다. 교역자들이 백신을 맞은 이유는 단순하다. 예배의 온전한 회복과 당당한 예배 인도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주의 종의 되는 이유는 예수만 보이기 때문이다. 주를 위한 도구가 되는 것에는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고 위험 군이다. 실제 어느 교인은 “목사님 제 옆에 오지 마세요.” 라고 농담도 한다. 성안교회의 백신 접종률은 경기도 지역 백신 접종율을 훨씬 웃도는 수치이다.   1차 접종만 해도 다양한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교회만 해도 인원 제한에서 자유로워지며, 교회 여러 활동도 편해진다.   백신 접종자들끼리 만나는 모든 소그룹 모임도 정상화 될 듯하다. 외적으로는 확진자와 접촉 하더라도 자가 격리가 면제되며, 해외여행 후 격리도 면제가 된다. 식당을 이용할 때도 인원 제한에서 자유로우며, 외부 활동 시 마스크를 벗을 수도 있다. 이전에 비하면 완전 해방되는 느낌일 것이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 위험한 것을 왜 맞아요? 그런 분들은 반대의 질문에 먼저 대답을 해야 한다. 그 위험한 코로나19는 왜 안 무서워할까요?   지난 시간, 우리는 자유를 잃었다. 두려움에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했고, 사람과의 만남에 긴장을 했으며 정부에서 발표하는 거리 두기 단계의 공포심을 체감하였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확진자가 나오면 주변은 초토화가 되고 마녀 사냥을 당하였다.   사람은 3개월 이상 자유를 잃어버리면 프레임에 걸리고 감각도 마비가 되어 길들여진 짐승처럼 순응을 한다는 통계를 보았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인지 모른다. 이제는 자유를 찾을 때이고 그 기회가 백신이라면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하다.   “몸이 약하니 백신을 맞으면 안돼요!”라는 말과 “몸이 약하니 코로나19 위험이 크므로 꼭 백신을 맞아야 해요!” 어느 것이 맞을까? 이처럼 성안교회는 방역당국 준칙 잘 따르고, 백신 접종도 앞장서서하고 있으므로 할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4단계서 19명으로 제한한다는 교회 방역 매뉴얼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첫째, 교회는 유급 직원이 있다. 그들은 교회가 직장이다. 모든 직장은 열려 있고 출근을 막지 못한다. 모든 종업원은 인원 계수가 안 된다. 유급 직원과 관계없는 인원 적용은 노동법에 저촉된다. 그들이 직장을 잃는다면 책임을 질것인가?   둘째, 모든 기관은 기본적으로 열려 있다. 단 두 군데, 술집과 교회만 타킷 방역을 하고 있다. 이것은 평등법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셋째, 예배는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시청하는 것이 아닌 드림공동체다. 그래서 모든 예배 요소가 살아 있어야 한다. 예배의 매뉴얼을 국가가 정하는 것은 종교자유를 심각하게 무너뜨린 것이 된다.   넷째, 백신 인센티브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70%면 국가적인 집단 면역이 가능하다고 발표했다. 교인 중 백신 접종 완료자로만 예배를 드리게 한다면 집단 면역의 테스트가 되기도 하며 모든 경제도 살아난다.   다섯째, 이제 교회들은 예배 사수와 교회 존폐의 문제의 막다른 길에 있다. 곧 생존을 위한 거룩한 반격이 일어 날 수 있을 것이다  폭풍 전야가 지금의 시간이다.   다행히도 방역당국에서 지난 7월 30일에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에서 일반교인도 참석할 수 있는 대면 예배로 전환하고, 동일 시설 내 종교활동 공간이 여러 개일 경우, 동시간대에 공간별 수용인원의 10% 범위 내로 모일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은 숨통을 트이게 하는 방안이다.단, 방역수칙 위반 시설은 제외키로 했기에 교회들이 솔선수범해서 방역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조금 더 힘을 내자 /성안교회 목사, SAMTV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1-08-08
  • 성인된 자녀와 함께 살기
      아는 분이 그런 말을 했다.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있는데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속에서 불화통이 터진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성인이 된 자녀를 집에 둔 부모들은 위의 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원하는 직업과 부모가 원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등이다. 그러다 보니 성인 자녀가 부모의 기준에 맞추어 만족스러운 삶을 살지 못할 때 부모들은 자녀들의 모습을 답답해하며 그들의 삶을 못마땅하게 여기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과 존중을 받고 싶어 하는 데 부모님의 따가운 시선과 불편한 잔소리는 성인 자녀로 하여금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만든다. 그뿐 아니라 여전히 자신을 어린아이로 여기며 통제하려 고 하는 부모님의 의도에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기기보다는 간섭과 부정적 편견이라고 여기며 부모님에게 원망을 돌리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면서, 일부 자녀들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기 보다는 가정에서 부모님이 제공하는 많은 물질적인 제공은 잘 받으면서 부모님의 간섭이나 통제는 전혀 받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도 보인다. 때로는 강한 부모님 밑에서 함께 살면서 무기력한 모습마저 보이는 젊은이들도 있다.    이렇듯 성인이 된 자녀와 부모가 함께 살아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생활비가 많이 들고 집값이 많이 오른 현재를 살아가는 자녀들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부모님과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추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인의 자녀들과 부모들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이것이 정답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각 가정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그동안의 가정의 고유한 역사와 현재의 발생하는 이야기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설명함으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생겨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인이 된 아이들과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계선(Boundaries)을 잘 설정하는 것이다. 경계선을 설정할 때는 물론, 아이들과 함께 회의를 해서 서로가 합의를 하면서 어느 정도 현실 가능하고 동의한 것을 중심으로 규칙을 세워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규칙을 세워 놓으면 함께 의논할 때는 ‘예스’를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처음에 정한 규칙이 잘 지켜질 수 있도록 지켜지지 않았을 때마다 모니터링을 하고 말을 해주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또한 지켜지지 않을 때는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지키기로 한 규칙이 느슨해질 때는 다시 가족회의를 통해서 지켜져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왜 그것이 중요한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두 번째로 성인 아이들과 잘 살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이 중요하다. 성인이 된 아이들이 아직 독립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그들을 나의 통제에 들어있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버려야 한다. 그들이 성인으로서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자녀에 대해서 부정적 감정이 올라올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비폭력 대화’의 형태로 존중하는 의사소통 방식으로 상대를 공감으로 이해하고 나의 감정과 생각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서로를 편안하게 만든다. 비폭력 대화는 마음에 갈등이 생겼을 때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듯이 표현하면서 나의 감정과 필요를 상대방에게 알게 하여 부탁으로 끝맺음을 하는 대화법이다. 성인이 된 자녀와의 관계에서 이런 대화법들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읽는 의사소통을 하게 되면 훨씬 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게 된다.    /호주기독교대학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8-06
  • 포스트팬데믹 처치의 전략 및 실례
      지난 1년 4개월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사회, 경제, 정치, 문화, 예술, 스포츠계뿐만 아니라 종교계도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기독교 예배에 직격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에 적용하는 것이 바로 ‘의료목회상담’이다. ‘의료’란 육신적·과학적·이성적 실체가 있는 대상이며, 이를 주관하는 ‘육신적 원리’를 대변한다. 그리고 ‘목회’는 영적·신학적·신앙적 실체가 있는 대상이며, 이를 주관하는 ‘영적 원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여기에 ‘상담’은 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위와 이것을 가능케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료목회상담’이란 이 세 영역을 포함하고 있는데, ‘의료’ 또는 ‘의학’이라고 하는 일반은총의 부분과, ‘목회’ 또는 ‘목양’이라고 하는 실천신학적인 부분, ‘상담’ 또는 ‘은혜’를 뜻하는 하나님의 섭리적 부분이 그것이다.   ‘메디컬처치’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목회의 본질 중 하나인 ‘의료목회상담’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시적인 사역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메디컬처치의 개념은 소강석 목사님의 아이디어에서 첫출발을 했다.   전염병과 교회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이어져 왔다. 교회가 이 전염병, 즉 팬데믹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시대의 교회의 명암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곤 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메디컬처치의 정신은 이미 우리 신앙의 선배들과 교회에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 시대를 보자. 로마제국 시대에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피하거나 숨지 않고 이웃 곁에 있음으로써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이때 그들을 보면서 생겨난 단어가 ‘파라볼라노이’(παραβολανοι)인데, 이는 ‘함께 옆에 있는 자’, ‘곁에서 위험을 무릅쓰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만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전염병의 위급한 상황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죽은 시신들을 수습하는 등 자기희생적 사랑을 주님의 이름으로 실천했다는 증거이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희생과 사랑 때문에 기독교가 로마 전역에 확산되었고 마침내 기독교 공인을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중세 시대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인한 큰 재앙, 즉 중세교회의 과오, 유대인 학살 등이 있었다.   특별히 중세교회의 일부 사제들은 전염병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고 막아보자고 하면서 무조건 교회로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질병이 하나님의 징계이자 심판이라는 확고한 종교적 신념이 팽배하였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미신적 종교 행위와 치료법들이 난무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현명한 판단을 하였다.   칼빈은 병든 자들을 전문적으로 돌보기 위한 의료 서비스 제공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네바 시에서 의사들의 급료를 담당하게 하고, 교회와 국가가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국가만이 아닌 교회도 적극적으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하면서,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성 바깥쪽에 구빈원을 따로 운영하여 치료하기도 했다. 특별히 제네바에서 칼빈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자들은 예배 못지않게 목사의 환자 심방을 의무화하였다.   구한말 한국 초대교회 당시, 1895년에 콜레라가 창궐하였을 때, 언더우드 등 서울의 북장로회 선교사들과 새문안 교인들, 제중원의 에비슨 원장 등이 서울 근교의 큰 막사를 콜레라 병원으로 정하고 환자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때 정부는 사대문에 ‘예수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왜 죽으려 하는가?’라는 벽보를 붙였다고 한다. 이로써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늘었고, 후원금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19세기 한국 초대교회는 전염병에 맞서서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헌신적으로 사랑함으로써 복음 전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었다. 이는 2-3세기 로마 시대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파라볼라노이’라고 불리며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로서 로마제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과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국가나 사회가 요구하는 단계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을 유지하여 관리해야 한다. 이는 많은 노력과 동참과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현 상황에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메디컬처치는 각 교단마다 교리적 차이를 뛰어넘는 객관적 사실(과학적·의학적 팩트)에 기초하기에 한국교회가 연합하기에 수월하다. 한국교회가 하나의 리더십, 하나의 메시지를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이템 중의 하나이다. 이를 통하여 대 사회적·대 정부적·대 언론적 대응이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짐으로써 한국교회의 하나 됨을 표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자 교회의 거룩성을 드러내는 사역이다. / 다건연세내과 대표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7-12
  • 성과 결혼의 기독교적 의미와 평등법
      동성애 동성혼을 합법화할 뿐 아니라 이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죄로 말하는 것에 대하여 처벌하는 조항을 담고 있는 차별금지법은 그동안 끈질긴 입법화 시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를 중심한 많은 시민들의 반대로 지금까지는 잘 저지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이상민 의원을 대표발의자로 하여 차별금지법은 평등법이란 이름표로 바꾸어 달고 이전보다 더 거세게 다시 한 번 시도되고 있다. 차별금지법 또는 평등법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 법적 문제점들은 차지하고, 기독교인이 이 법을 반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법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벧전 1:9)이라고 말하고 있다. 곧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영혼의 구원”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모든 일은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이고,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생(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다(요 5:39). 이 영원한 생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으로 신적 영원한 생명이다. 성부의 뜻은 성자를 믿는 자에게는 성자 안에 있는 성자의 생명을 그들에게도 주어 그들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가지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생명을 얻게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사귐에 참여하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다(요 6:40; 요일 1:1-3).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에게도 이 생명을 주어 하나님과 사랑의 사귐에 참여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죄로 타락한 이후 구주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도 인간에게 다시금 이 생명과 사랑의 사귐을 회복해 주기 위함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항상 영생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처음 창조된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된 인간에게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도 칼빈은 영생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칼빈에게 영생은 인간 창조와 구속의 목적으로서, 인간이 바라보아야 할 지고한 복락이고 영원불멸의 목표로 이해되고 있다. 처음 창조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고, 이렇게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을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창1:26-28).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다. 곧 서로 구별되는 삼위가 관계적 방식으로 존재하시면서 서로 사랑의 사귐을 사귐으로 하나가 되고 있는 것처럼, 서로 구별되는 남자와 여자가 상호관계 속에서 사랑의 사귐을 사귐으로 생명의 연합을 이루는 이것이 바로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한 남자에 한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한다(말 2:15). 그러므로 성경은 남성과 여성 외에 다른 성을 말하고 있지 않으며, 남성과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인간됨과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에 있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 아닌 동성간의 결합이나 남성과 여성 이외의 다른 성들을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으로, 평등법이 말하는 것처럼 인권이 아니라 기실 가장 반인권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같은 성경이 가르치는 성과 결혼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차별금지법 또는 평등법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성경이 가르치는 바 기독교신앙의 본질을 저버리게 하는 반기독교적이고 반신앙적인 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신앙의 본질에 위협을 당할 때 순교의 정신으로 신앙을 지켜왔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평등법 또한 기독교신앙의 본질에 해당하는 문제로 기독교는 순교의 정신으로 이를 막아내야 할 것이다.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7-09
  • 만연한 거짓 바이러스, 정직 백신으로 치료해야
      감기 바이러스의 변종인 코로나19에 의해 우리 사회는 패닉에 빠졌다. 한국 기독교 역사 처음으로 교회 스스로 모이는 예배를 폐하고 온라인으로 예배도 드리고 있다. 과학기술과 의학의 눈부신 발전도 변종 감기 바이러스 하나에 대응하지 못하고 한 순간에 사회 전체가 감염 공포에 떨며 예배를 위한 모임조차 폐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과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되겠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이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 메시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하겠다. 필자는 이번 사태를 우리 사회 그리고 한국 교회에 만연한 거짓과 위선의 바이러스를 정직의 백신으로 치료하여 다시 정한 마음과 성결함을 통해 정직의 영을 회복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강한 경고라고 믿는다.   코로나19 자체도 감기 바이러스의 변종(거짓)이고 한국 사회에 이를 본격 퍼뜨리게 된 것도 거짓 사이비 종교를 통해서였다. 거짓은 정직의 영이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악으로 미혹하기에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신다. 아담을 유혹한 사탄의 간교한 거짓으로 인한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의 거짓말에 대한 죽음의 형벌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시고, 반대로 정직한 사함은 기뻐하시고 후손까지 복을 주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시편 112:2)   필자가 흥사단 투명본부 윤리연구센터장으로서 총괄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직지수 2019년 조사결과에 의하면 성인 정직지수가 60.2 로 청소년 정직지수 77.3 보다 모든 영역에서 낮게 나타났다. 이는 청소년의 거울이라는 어른이 정직 윤리적인 측면에서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결과 ‘10억이 생긴다면 잘못을 하고 1년정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 는 항목에 청소년의 50% 정도가 그렇다고 응답하고 있다.   정직지수 응답자 중엔 기독교인도 다수 있고 2020년 기독교 윤리실천운동의 ‘교회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10명중 7명이 ‘목사와 기독교인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하고 있다. 이런 응답의 이유는 ‘목사와 기독교인이 말따로 행동을 따로하고 정직하지 못하다’ 였다.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인은 우리 사회에서 조차 정직과 윤리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식되고 있다. 정직의 영이신 하나님께서 거짓과 위선이 팽배하다고 인식되고 있는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이 경배하는 것을 기쁘게 받으실까? ‘악을 행하면서 성회를 여는 것을 참을 수 없다’(이사야 1:13)   교회와 기독교인이 정직할 때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시편112:4) 지금 정직함으로써 사회에서 당장은 손해를 감당해야 하고 때론 피해를 입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또한 거짓 바이러스가 만연해 지고 있는 우리 사회를 정직이란 백신으로 치료하여 건강한 사회로 발전케 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대적 경고 메시지를 깨달아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은 회개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코람데오 (Coram deo)’ 의 정신으로 정직 회복 운동과 정직 실천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야 할 때이다. /국제미래학회 회장·한세대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1-06-30
  • 한국교회의 회복은 근대 역사를 이룬 ‘영향력’의 회복
    ‘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찬송가사의 한 대목이다. 코로나19로 비대면예배라는 초유의 경험을 하는 교회의 현실을 보며 탄식하듯 나오는 외침 같아서 자꾸만 입가에 맴돈다.    주변에서는 코로나 팬데믹과 언컨택트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수라고 한다. 그 변화는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고 한다. 위기와 불안이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다. 교회는 코로나19 확산의 주범처럼 인식되어 더욱 큰 지탄을 받고 있어 사회적 신뢰를 잃고 있다.    역사학자 케네스 라투레트는 “영향력 면에서 본다면, 인류 역사에서 기독교만큼 큰 영향을 끼친 단일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했고, 아놀드 토인비도 “우리 서양문명은 기독교회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한국교회역사에서도 다르지 않다.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배재대학교, 배화여자대학교 등 근대교육, 세브란스병원, 이화여대병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등 근대의료, 사회복지의 시작인 태화복지재단 등 기독교의 영향력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성경을 통한 한글보급으로 문명개혁을, 여성들의 교회를 기초로 한 사회활동으로 평등구현을, 근대교육으로 교육혁신을, 근대의료의 시작으로 의료혁신을, 최초의 한글점자개발로 언어혁신을, 민족과 독립운동으로 나라사랑을 이룬 것이 한국교회이다. 교회는 변화의 아이콘이었고, 개혁과 혁신의 주역이었다.    한국교회의 회복은 복음으로 근대역사를 이룬 그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한다. 그렇다면, 코로나 팬데믹 상황으로 더 힘들어진 교회의 상황은 기회가 된다. 이 기회를 살려야 새로운 미래를 만들수 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에클레시아’로 표현했다. ‘에클레시아’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 시민의 총회인 민회를 가리키는 말로써 어떤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부름 받음 시민의 모임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사도 바울 당시 교회를 뜻하는 말로 사용할 수 있는 단어로 ‘오이코스’(성도로 구성된 거룩한 공동체)나 ‘회당’(유대교인들의 예배와 교육장소)이 있었는데 굳이 ‘에클레시아’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도 바울은 교회는 건물과 조직을 뛰어넘는 공동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요, 신분과 인종과 언어의 경계를 뛰어넘어 평등한 민주적 모임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그동안과는 다른 새로운 질서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생각한 것이다. 지금 현재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새로운 질서(New normal)’이다. 사도 바울은 그 ‘새로운 질서’를 전혀 새롭지 않은 것에서 찾았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것에서 찾았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전도서1:9)이라는 말씀이 틀리지 않다.   ‘새로운 질서’를 요구받는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 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본질에 충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면 된다. 방법에 대한 고민보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회복은 본래의 것을 되찾는 것이다. 영어로는 ‘다시 덮는다(Re-covery)’는 것이다. 무엇을 찾고, 무엇을 덮을까?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 잃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면 좋지 않을까?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6-27
  • 교회의 본질과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지금 코로나 사태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비접촉, 비대면 사회로 가면서 많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면서 본질과 기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중의 하나가 ‘기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목사와 장로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과 구원의 확신이다.   사도행전 2장 1~4절에서 교회의 태동과 그 근거 그리고 교회의 본질과 신앙생활의 기본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속사를 이루기 위한 예언의 성취이고, 교회설립의 기본이며, 교회의 시작이다. 교회 태동이 어디서부터이고, 새로운 삶의 시작과 기본이 어디로부터라고 했는가? ‘하늘로부터’이다.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 중에 토마스 프리드먼이라는 사람이 있다. 토마스 프리드먼은 중동문제에 대해서 「뉴욕타임즈」에 칼럼을 기고했는데, 이것을 묶어 『경도와 태도』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다. 그는 이 책에서 미국의 힘과 부가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물으며 그 답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는 법치와 태도, 둘째는 필수적 가치, 셋째는 영적 기초, 즉 영적 기반이라고 했다. 여기서 ‘영적 기반’이란 신앙적인 것이 기초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오늘날 미국의 부와 힘은 신앙에서 왔다는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가 “아무리 위대한 물질문명도 그것을 받쳐줄 정신적인 것이 없으면 안으로부터 붕괴된다.”라고 말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책 『로마인 이야기』에서 윤리적 타락과 정신적 타락이 로마를 망하게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교회가 시대적 상황이나 세속화로 인하여 기울어진 것보다 ‘본질’을 등한히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오늘 우리에게 세속화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은 교회의 본질과 신앙의 기본을 잃어버린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코로나 사태로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것을 등한히 여기고 있다. 많은 목사들이 한국교회가 점점 붕괴되어 가고 있음을 몸으로 느낀다고 말한다.   오늘 우리에게 최고의 적이 있다면 그것은 세속화다. 세속화는 세속적 가치관에 대한 동경,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물질적 가치를 영적 가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마음, 사람들이 추켜세워 주고 유명해지는 것을 동경하는 마음일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세속화 현상과 단호히 싸워야 한다. 내 자아의 중심에 뿌리 내리고 잠재해 있는 세상 물질을 좇는 세속적인 생각을 몰아내야 한다. 세상 것에 대한 동경과 욕심을 내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채 예배의 자리로 나아와 찬양하고 기도한다고 해도 거룩한 삶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 세상에서 아무리 옳다고 말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공의롭지 못한 생각과 가치라면 우리는 단호히 “아니요!”라고 거절해야 한다. 잘못된 관행이 일반화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고, 나의 이익과 편리함이 의사결정과 선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해서는 안된다. 세상 것을 향해 가고 있는,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은밀한 욕구를 쫓아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교회를 중심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며 봉사를 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축복인가를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서 깨닫게 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코로나 사태의 위기를 교회의 본질과 신앙의 기본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어야 함을 그 어느 때보다 실감나게 하셨다. 우리가 성전이기에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하늘의 소리 곧 하나님의 소리를 듣기에 민감해야 하고 주님을 바라보기에 힘써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영적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예배의 자리를 두려워하며 예배를 드리지 못할 정도로 영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광주중앙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1-06-20
  • 세계선교, 피할 수 없는 소명
      코로나 상황 가운데서도 한국교회는 지속적으로 세계선교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님의 선교지상명령(마28:19-20)은 아직도 끝나지 않는 사역으로 세상 끝날 때까지 이어가야할 사역이다. 1885년 조선에 입국해서 선교사 사역을 했던 호레이스 G. 언더우드는 그의 사역에 무반응하던 조선을 향해, “주여! 조선의 앞날이 보이지 않습니다” 라고 절규하듯 기도했다고 한다. 그러한 기도의 씨앗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미국교회와 함께 세계선교의 선두주자로 사역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230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한국교회 세계선교에서 그중에 예장합동측 선교사가 2,600명을 파송하여 섬기고 있다. 이것은 성경중심적인 목회와 신학의 실천으로 지속적으로 세계선교사역을 수행한 결과라고 본다. 1910년 영국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열렸던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 한국선교사 대표로 참석한 사무엘 모팻 선교사는 조선이 동북아 제국주의 열강들 러시아, 중국, 일본의 주변국들과 관계에서 조선이 군사적인 강대국이 아닐지라도 머지않아 영적인 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보고한 기록이 남아 있다. 사무엘 모펫 선교사의 보고대로 한국선교는 미국교회와 함께 지금도 세계선교사역에서 앞장서서 사역하고 있다. 선교지도자 로버트 스트래천은 미국 풀러 선교대학원에서 남긴 그의 명저 “피할 수 없는 소명”에서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선교지상명령(마28:19-20)에 대한 불순종의식으로 인해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존재 목적이 이방백성들을 위한 제사장나라로서 존재함을 보여준다(출19:5-6; 벧전2:9). 구약성경 창12:1-4은 아브라함의 선교사명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선교사역은 세계열방의 축복의 통로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고 약속과 함께 축복하신다(창12:1-2).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새로운 땅에 가기 전에 먼저 축복의 말씀으로 약속하신다(창12:2-3). 선교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과 축복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증거한다(눅24:27-48).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에 대해 말씀하시고 선교사역자로 세우신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선교사역은 먼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신분과 축복에 대해 깊이 아는 것이다(창12:2-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12:3)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 가운데 창12:3절 앞부분은 신적인 보호에 대한 말씀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리라!”(12:3). 신적인 보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아브라함이 실제로 선교여행 중에 닥치는 모든 환란에서 가정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일을 오늘날 선교는 선교사 개인의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있는 마음이 선교사이며 그리스도가 없는 마음이 선교지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교회 모든 성도의 소명이다. 화란의 선교학자 J. H. 바빙크는 선교가 단순한 교회의 활동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임을 강조한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의 선교사역도 사도들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교다(행9:3-4). 사울이 교회를 핍박한 것은 예수님을 핍박한 것으로 증거하고 있다. 선교지는 항상 가까이에 있다! 코리언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아 함께 일하는 250만여명의 이주민들에 대한 선교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선교의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하는 선교사로서 마지막 시대에 “피할 수 없는 선교소명”에 응답해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 남녀노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사하신다(엘2:28-30; 행2:17-19). /총신대학교 통합대학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6-17
  • 21세기의 교회는 시대를 거스리는 교회
      사회의 발전은 눈부시다! 너무나 말을 많이 해서 발전과 성과에 대한 말은 진부해졌다. 하지만 그 발전과 성과가 성경적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고찰이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 글도 그런 글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4차 혁명과 연관해서 교회가 유심히 살펴야 할 분야는 가상세계의 현실성 문제일 것이나 이는 차치해두고 일단 교회의 기본적인 자기 근거부터 정확하게 정립하는 일 자체도 이제는 시급한 과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야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무엇이고 성경에서 증거 되는 교회에 적합한 신학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사건의 한 순간에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와 연관된 통합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그 계시가 가져오는 전체적인 의미의 장(場)적인 변화가 어떻게 교회와 연관되며 실현되고 있을까?의 물음은 오늘날의 신학적 과제로 등장하는 것 같다. 이는 올바른 교회론은 성도의 영성생활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긴밀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성도의 삶을 주도할 수 있는 영성 이해가 교회론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성결교회의 교회론은 시의 적절하고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결교회는 사중 복음이라는 전도 표제를 갖고 있으며 이는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될 때 나타나게 될 4가지 특징적 요소들을 말해주고 있다. 즉, 중생-성결-신유-재림의 사중 복음은 우리 성결교단이 실천적으로 수행하고 지향하는 삶의 실천운동의 표지들이며 웨슬리의 복음 이해인 성결의 종말론적 특성을 드러내는 영성생활의 표지인 것이다. 마치 성례전에서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며 지향하는 것처럼 사중복음은 이제 웨슬리의 성결(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결교회가 지향하는 성도의 삶의 핵심적 지평(중생-성결-신유-재림)들은 웨슬리적 성결의 체험에서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종말론적 새로움이 우리에게서 가장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 경험들의 단면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웨슬리의 종말론적 복음 이해인 성결론에 근거한 사중복음과 그에 따른 교회론은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일까? 성경에서 제시되는 기독교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의 원형적 신앙 형태는 무엇일까? 진지한 연구에서 밝혀진 초대 교회의 모습은 성령의 강력한 충만하심과 내주의 경험에서부터 새로운 동력을 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임재한 성령은 철저하게 종말론적 성취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선물이었고 그 종말론적 성령의 역사에 기초하여 교회가 성립된 것이다. 교회는 모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비전과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정립하게 하는 그런 하나님의 가능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이를 성결(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결과가 성결이며 교회는 그 성결의 공동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였다.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은 바로 이러한 종말론적 선교의 표지들이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종말론적 선교공동체인 것이다. 세기의 변화와 더불어 성령에 대한 관심이 더 구체화되면서 성령의 예언자적이며 계시의 역할을 통한 구속사에서의 주도적 지위에 대해서는 더 많은 관심과 이해를 갖게 되었다. 즉 구원의 내적 근거로서의 성령의 사역이 내재적 삼위일체의 근거로 이해되면서 신학의 핵심적 논의에로 발전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21세기 앞으로의 신학은 이런 점에서 성령의 신학일 수밖에 없으며  웨슬리의 성결론의 신학과 초대교회로부터 유래한 성결운동의 선배들이 가졌던 신앙의 유형은 성령의 구체적인 현실로서 이해되는 종말론적 성령 체험 신학이었고 교회는 바로 그런 그런 단체로서 시대를 거스르는 선교적 공동체인 것이다.  /서울신대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1-06-08
  • ‘MZ 세대’를 위한 미래교회를 제안한다
    서로 사랑을 나누고 포옹을 하면서 격려를 해야 할 가정의 달이지만, 마스크를 쓴 채 5일 어린이날과 8일 어버이날을 보내면서 내년에는 밝은 얼굴을 서로 대할 수 있을지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 지치고 힘든 때일수록 가정이 회복되고 가정의 기초인 교회가 소외된 사람을 보듬어 주어야 하는데, 교회마저 코로나 상황에서 심각한 존폐 위기를 맞이하여 제대로 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코로나로 집회가 금지되는 상황이지만,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교회는 모이려고만 하지 말고 세상을 향해서 흩어지는 본래의 사명을 회복하여야 한다. 교회가 변화된 현실에서 미래교회를 준비하며 이 땅의 젊은이들과 소외된 자들에게 다시 희망을 노래하고 꿈과 비전을 심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시급한 일들이 무엇일까?   예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죄를 지은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을 베풀었을 때,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된 공생애 동안에 저 멀리 시리아와 요단강 건너편과 예루살렘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움을 받았다. 코로나로 모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회마다 재정을 걱정하는 일에 골똘하기 보다는 자기 목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적극적으로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교회 주위에서 고통당하는 강도만난 자에게 참된 이웃으로 다가가는 교회의 예수사랑을 회복하는 길이다.   MZ 세대를 품어야 한다.밀레니엄 시대의 M과 그 다음 세대인 Z의 합성어가 MZ 세대라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축복하면서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바로 이 시대의 MZ 세대를 품어야 할 것을 교회에 일깨우는 말씀이다.   교회 건물은 모든 이를 위한 공유물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가를 지는 일과 MZ 세대를 품는 일은 지금 고난 속에 있는 한국교회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다. 미래교회가 소외된 자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젊은이들의 활동무대가 되어 미래를 향해 날개를 펼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하려면, 교회 건물을 예배나 성경공부를 위한 장소로만 한정짓는 좁다란 로마 천주교의 암흑시대인 중세의 수도원 개념에서 탈피하여 모든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유 장소로 제공해야 한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이들이 모임이라는 근본적인 원리를 중시하여 비대면 시대에 건물 가용 공간에 20%의 인원이 자유롭게 모이는 공간으로 활용하어야 한다. 미래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공간이 되도록 사람의 모임을 중심으로 예산을 재편성하고 공유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   초기 한국교회에서는 교회를 공회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직 교회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는 시대에 누구나 교회에 와서 음식도 나누고 한글도 배우면서 일제 강점기의 고통 속에서 민족이 나아갈 희망을 보여준 것이 한국교회이다. 어떤 이는 교회를 연애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청춘 남녀가 만나 사랑도 하고 가정도 꾸리고 미래의 꿈도 같이 꾼 장소가 한국교회이다.   이제 미래한국교회는 스스로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모임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교회의 공간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사실 나도 활동 범위를 넓히기 위해 공적 장소인 연구실이 필요하지만, 3남매와 사위와 며느리와 손녀를 위해 필요한 사랑을 베풀면서 어른 노릇을 하려니 마땅한 활동 공간이 없다. 어느 교회가 나 같은 학자들에게 선뜻 장소를 제공해 주면 감사할 일이 될 것이다. 더구나 MZ 세대를 끌어안는 모임을 위해 교회 시설을 내놓는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장신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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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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