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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치는 서로의 환대를 통해 드러난다
      혈액순환은 몸을 살게 하고 생명을 유지해 준다. 죽은 자에게는 혈액순환이 멈춘다. 생명력을 상실한 때문이다. 신앙생활로 사는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순환하는 혈액이고, 은혜를 갈구하고 누리는 신앙이 혈액을 순환시키는 힘이다. 그렇게 은혜와 신앙은 만난다. 서로 말을 나눈다. 뜻을 교류한다. 서로 섞여 생명을 만든다. 만나고 말하고 교류하고 급기야 생명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합하여 기도라 한다.    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신앙의 주체인 인간은 기도로 만난다. 기도로 서로 묻고 답하고 대화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서로 하나가 되어 선을 이룬다. 이렇게 만나고 교류하고 하나 되어 사는 방식은 “서로가 서로 안에 사는 방식”이다. 예수께서 마지막 대제사장으로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하실 때 주신 말씀이 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성부와 성자가 성령 안에서 서로서로 안에 사시기에 그 분 하나님을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 부른다. 이 삼위의 하나님이 우리 모두 안에 계시고, 우리는 이 삼위의 하나님 안에 산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앙이다. 동시에 우리들 서로가 같은 방식으로 서로 서로 안에 사는 것이 삼위일체 신앙적 일치의 모습이다. 서로 서로 안에 살게 엮어주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치를 추구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가 우리 인류와 세계의 구세주이심을 믿게 하려는 때문이고, 우선 기도로 구원을 향한 일치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교파로, 지역으로, 교리로, 역사전통으로 다양하게 분리되어 있지만 때로는 꼴사나운 분열로 아픔을 겪고 있는 교회와 교인들이 먼저 함께 기도하는 일에서부터 일치를 시작해 보자면서 영국 성공회의 폴 왓슨( Paul Wattson) 사제가 들고 나온 것이 “한 옥타브의 교회 일치”(a church unity octave) 프로그람 제안이다. 8개의 음정이 한 옥타브(도~도)를 이루듯이 한 주간 매일같이 합동하여 일치를 위해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하자는 제안이다. 그래서 옥타브의 출발(“도”)과 마감(“도)을 우리의 믿음의 모범이고 선배인 베드로와 사도 바울을 표본으로 삼자고 했다.    수제자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한 날(1월 18일)을 시작 일로 하고.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한 날(1월25일)을 기도 옥타브의 출발과 마감으로 삼자는 제안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면 차례의 변화 확대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을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으로 지키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기독교 역사의 거대한 세 물줄기인 로마 천주교, 동방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회 모두가 동참하고 있는 아름다운 전통이다.   다만 이 기도주간은 세계 각국의 교회들이 순번을 따라 그 해에 함께 간구하고 추구할 일치의 소원과 희망을 주제로 제시하고 정해진 성경본문을 함께 명상하며 기도의 일치를 전 세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고귀한 운동이다. 금년에는 몰타의 그리스도인들이 제안한 일치기도를 함께 드린다. 기도의 주제와 본문은 이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각별한 인정을 베풀었다”(사도행전27:18~29:10). 초대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 등장한 선교여행 중에서 일어난 조난과 조난 가운데에서도 외딴 섬에 도달하여 원주민들로부터 환대받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전 세계 이민 행렬이 던지는 세계의 문제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함께 기도하자는 뜻이다.   환대는 그리스도인 일치를 추구하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미덕이다. 이러한 환대를 실천하려면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더욱 큰 너그러움을 보여야 한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에게 각별한 인정을 보여 준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아직 알지 못했지만, 바로 그들의 각별한 인정 덕분에, 분열되어 있던 사람들이 서로 가까워졌다. 우리 그리스도인 일치는 무엇보다도 우리 서로에 대한 환대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와 다른 언어, 문화, 신앙을 지닌 사람들과의 사랑의 만남을 통해서도 드러날 것이다.  /경동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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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1-20
  • 건강한 가족 공동체성의 회복
      설날은 음력으로 한 해를 처음 시작하는 날로서 신라시대로부터 전해오는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이다. 설날이란 말의 어원과 관련해서는 대략 세 가지 설이 있다. 먼저는 ‘낮설다’는 말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고, 다음으로는 개시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이 점차 연음화되어 설날로 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또 한편 삼가다’ 또는 ‘조심하다’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설날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공동체, 특별히 가족공동체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것이며, 이런 공동체의 핵심요소로서 부모님의 권위를 중심으로 가족간의 질서 있는 화목을 다시금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설날은 따뜻한 정과 사랑의 울타리가 되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오늘날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그런 공동체 안에서 이기주의와 탐욕주의를 넘어 이타적인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는 나눔과 배려의 삶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오늘날 이 사회에 만연한 단절과 소외,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용서와 화합, 화목과 결속의 지혜를 배우는 계기가 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설날은 단순히 명절 이상의 의미와 기능을 갖는다 할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나 비기독교인에게 설날은 이처럼 우리에게 공동체 특별히 가족공동체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고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설날을 맞아 더욱 성숙한 성경적 가족공동체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먼저 기독교인의 가정은 오늘날 가정 안에서 조차 생명이 경시되는 시대풍조 가운데서 생명의 공동체로서 건강한 가정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생명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육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한 생명의 공동체이다. 성경은 가정을 교회에 투사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남편인 그리스도와 아내인 교회가 생명의 연합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장차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의 연합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 말한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장차 남편인 하나님과 신부인 우리 곧 교회가 생명의 연합을 이루게 될 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믿는다.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이 설날에 그들의 가족들과 더불어 부모님의 집에 함께 모여 먼저 말씀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정이 단순히 육적 생명의 공동체일 뿐 아니라 영적 생명의 공동체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럼으로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건강한 생명의 공동체, 생명이 충만한 가정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설 명절을 통해 기독교인의 가정은 가족 상호간 사랑의 섬김 안에 규모 있고 질서 있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생명의 연합을 이룬 가운데 서로 사랑의 사귐을 가지면서 관계와 질서 속에 존재하듯, 또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몸인 교회가 생명의 연합을 이루어 사랑의 사귐을 사귀면서 서로 관계와 질서를 이루고 있듯, 그리스도인의 가정도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가족들 상호간에 생명의 연합을 이루어 사랑의 섬김 가운데 바른 관계와 질서가 세워지고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는 마치 건강한 몸이 각 지체들 간에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바른 관계와 질서를 유지함으로 왕성한 생명력을 나타내는 것과도 같다. 하나님의 나라나 교회나 가정은 모두 생명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동일한 모습을 보여준다. 건강한 생명의 공동체는 그 속에 사랑의 섬김이 있으며 동시에 바른 관계와 질서가 세워지는 규모 있고 화목한 공동체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여러 면에서 병들어 신음하고 고통하고 있다. 개인의 선택권과 행복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낙태, 증오심에 찬 좌우의 분열과 갈등, 무너진 공의와 혼란, 개인주의와 탐욕주의의 만연 가운데 탈북민이나 이주민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소외 등으로 병들어 신음하고 고통하는 사회에 설 명절에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생명의 공동체로서 건강한 가정의 모습은 한줄기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다.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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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1-14
  • 한국교회여! 하나님 앞으로 나가자
      요즘 세상이 참 어수선하다. 들려오는 소리 소문도 어느 것 하나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은 없는 듯하다. 한일갈등은 갈수록 골이 깊어가는 것 같고, 여야 갈등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거 같다. 오랜 우방 국가를 자랑하던 미국과의 관계도 진심이 아니었던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그런데 가장 우리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것이 있다. 이런 세상의 풍조 속에서 교회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빛을 비추며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할 교회가 빛을 잃은 느낌이다. 목회자들도 흔들리고 있는 것 같고, 교회 교인들 역시 제각각이란 생각이 든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능력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 것일까? 예수님이 오늘 우리의 현장 속에 오신다면 어느 편을 들 것인가? 어떤 하나의 이슈가 수면위로 부각되면 국민들은 광화문파와 서초동파로 나뉜다. 법원 앞 큰 길을 중심으로 이쪽과 저쪽에서 다른 목소리를 높이며 서로 대립하기에 바쁘다. 교회 역시 방향을 잃고 좌우로 나뉘어 있다. 우리 예수님은 누구의 편을 드실지가 궁금해진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던 때의 이스라엘은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주권을 잃고 로마의 지배를 받아야했던 시기였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로 나뉘어 있었고, 종교지도자들과 죄인들로 구분이 되어있던 시기였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향해 말씀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친구로 오셨고, 그래서 그들을 위로하셨지만 그들의 삶이 옳다고 편을 드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셨다. 진짜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전하셨고, 그 말씀을 듣던 대중들은 좌파나 우파로 나뉜 것이 아니라 권세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좌나 우보다 더 중요한 세상, 더 가치 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복음의 능력이 되어 세상 속에서 복음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어둠의 세상을 밝히기 시작했고, 130여 년 전 어둠 가운데 있던 이 땅에도 비취게 되었다. 일제의 억압 속에 있던 이 땅에서도 그 복음의 빛은 희망이 되었고, 그 빛을 따라 오늘의 대한민국이 형성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복음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희망의 등불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주변 상황이 어두워졌다고 생각되면 불을 밝히면 될 일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복음의 불을 밝히는 것을 잊어버린 듯하다. 아니 복음의 불로는 세상을 밝힐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복음 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목회를 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그 말씀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한 교인이 울면서 나를 찾아왔다. 아들이 무슨 충격을 받았는지 갑자기 청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큰 슬픔에 하염없이 우는 교인 앞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자는 것이었고, 이 교인은 그 말씀에 의지해서 하루하루 성경 필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필사하기를 한 달 가량 했을 무렵 아들의 청력이 회복되는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다. 부도의 위기 속에서 울던 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고 얼마 후 상황이 급반전 되면서 문제가 해결된 교인도 있었다. 이 교인을 볼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오늘 답이 없어 보이는 우리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의 길과 해답이 되심을 고백해야 한다. 복음이 해답이고 기도가 해답이다. 한국교회는 광화문이나 서초동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 성경을 들고 골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도움은 미국이나 일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복음의 능력을 잊지 말자. 기도의 능력을 잊지 말자. /일산광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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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2-31
  • 예수의 성육신 따라 바른 성탄 지키자
      2019년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라틴어 ‘Christus’와 ‘Maese’가 합쳐진 말이다. Maese는 로마가톨릭의 미사를 뜻하고, 이는 기독교의 예배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날을 기념해 예배를 드리고 서로 축복한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세계적인 종교로 도약한 로마시대의 이교적 풍습 태양절 축제가 그리스도 축제로 변모된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 확산 위해 ‘태양절’을 ‘예수 탄생일’로 바꾼 것이다. 1년 중 가장 큰 축제였던 태양절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날로 정하면 로마제국에 더 많은 기독교적 정서를 불어넣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지중해 연안의 로마에서 12월은 가장 나쁜 절기이자 가장 좋은 절기였다. 해가 짧아져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시기였고, 당연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시기이기도 했다. 태양의 신 미트라가 동지까지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숨기다가 그 다음날부터 다시 더 드러내는 날을 태양절로 정해 축제를 열었다. 태양절이 예수 탄생일로 바뀜에 띠라, 수많은 대중들은 당시의 로마가톨릭 전통에 따라 미사에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였다.   이러한 이교도의 태양신 절기인 크리스마스가 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성육신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었다. 태양신 절기는 기독교 신앙에 의하여 녹여 졌다. 태양신이란 자취는 없어졌다. 기독교는 자유케하는 복음의 능력으로 이교도의 절기인 형식에 메이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기독교의 비주류 종파인 메노파에서는 주류 기독교가 로마의 태양절을 성탄절로 정했다고 주류기독교가 우상숭배를 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메노파의 비판은 복음의 자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절기에 고착하기 때문에 나오는 헛된 공론이다.   크리스마스때 등장하는 선물 갖다주는 산타클로스는 고향인 북극에서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전 세계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빨간 옷을 입은 좋은 할아버지다. 이것은 네덜란드어 ‘Sinter Klaas’에서 유래되었다. 산타클로스 신화는 3세기 실존했던 터키의 수도사 성 니콜라스에서 기원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니콜라스는 상속받은 재산을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빈곤한 자들을 돕는 데 일생을 보냈다. 그리하여 니콜라스는 선물과 너그러움, 그리고 넉넉함의 상징이자 신화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성 니콜라스의 날(12월 6일) 풍속에서 쿠키와 사탕을 받기 위해 신발을 깔아놓는 풍습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성 니콜라스의 네덜란드어 ‘신터 클라스’가 18세기 이후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주해온 네덜란드 사람들을 통해 미국에 퍼지면서 산타클로스가 된 것이다.   산타클로스는 20세기 대량소비·대량생산 자본주의 사회로 탈바꿈한 미국의 크리스마스 풍습과 결합되며 전 세계로 확산됐다. 오늘날 성탄절은 그 본래적인 의미가 상실되고 세속적인 쾌락과 자유방종의 소비와 향락의 날로 변질되었다. 인류대속을 위한 구세주가 나신 날은 즐거운 날임에는 틀림 없으나 경건, 헌신, 절제는 없어지고 마냥 즐거움, 쾌락과 선물 나누기, 대량 소비, 연인 만나기 등 낭만의 절기로 변질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정부는 NAP정책으로 오늘날 서구사회의 풍조에 그대로 휘말리고 있다. 이때 한국교회는 동성애 대책 협의회를 만들어서 세속적 쾌락 흐름에 역행하면서 서구의 동성애 흐름을 차단시키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것이다. 올바른 성탄절 지킴이란 세상의 죄를 대신지기 위하여 이 세상에 들어오셨으나 이 세상에 동화되지 않으시고 이 세상을 변혁시킨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하나님 아들의 낮아지심과 자기 비우심의 그 정신과 의미를 다시 살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학술원 원장·숭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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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2-18
  • 성탄 설교, 별미를 준비하라
      설교학 시간에 학생들에게 설교자에게 가장 어려운 설교본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요한계시록입니다’ ‘다니엘서입니다’ ‘비유본문입니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다른 의견은 없나요?’ 마감용 멘트를 날리자마자 교실 뒤편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들여왔다. ‘너무 잘 알려진 성경본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이 설교하기 가장 힘듭니다’ 와! 내가 기대했던 대답을 여기서 들을 줄이야! 성경 어느 것 하나 부담되지 않는 본문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설교자를 당혹게 하는 구절은 너무나 잘 알려져서 설교 전에 이미 회중이 설교의 메시지와 전개방향을 다 예측하는 본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설교하기 가장 힘든 성경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오랜 목회경험을 지닌 설교자들은 절기 설교가 또 하나의 정답임을 잘 알고 있다. 부활절, 성탄절, 추수감사절 등 절기 자체가 지닌 의미와 성격은 이미 회중에게 노출되어 있고 또 설교자는 절기 본래의 특성을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절기 설교는 힘들다. 겉으로는 미소를 머금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지만 설교자의 마음은 편하지 않다. 매주 설교마다 홈런을 쳐야겠다는 의욕을 불태우지만, 성탄 설교를 앞두고는 삼진만 먹지 않으면 좋겠다는 소심으로 전락한다. 또 어차피 회중 역시 성탄절이 갖는 축제적 분위기에 취해 설교에 큰 기대를 갖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자위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바로 잡아야 한다.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치고 삼진을 작심하는 자가 없다면 역설적으로 어떤 설교도, 어떤 설교자도 홈런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님 말씀이 무능하단 말인가! 어느 설교자가 능력의 말씀을 무능의 말씀으로 바꾸길 원한단 말인가!   성탄설교의 홈런은 성탄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날! 하늘 하나님이 절망의 땅에 하늘의 생명을 입맞춤 한 날! 죽음의 불가능에 생명의 가능을 열어 놓은 날! 피해자 하나님이 가해자 인간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 미신 날! 하나님이 인간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은 날! 죽음에 갇힌 동질의 생명의 이질이 파입한 날! 전능자 하나님이 무능자 인간을 도운 날! 죽음의 땅에 하늘의 평화가 임한 날! 이것이 성탄의 의미이다.   현실적으로 성탄절은 기독교 최대의 축제절기이다. 많이 시들해졌다 해도 여전히 많은 교회에서 성탄절 이브에 성탄축하 교회학교 발표회를 갖고 한동안 뜸했던 새벽송도 다시 고개드는 분위기이다. 그런 들뜬 분위기가 정작 성탄 당일 예배에는 묘한 피로감과 함께 큰 기대감 없는 잔칫집 인사말 정도의 기대를 설교에 넌지시 요구하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속에 위에서 언급한 성탄의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축제분위기에 필요한 것은 축제에 걸맞는 설교이다!   예를 들어 만일 성탄당일 예배에 많은 순서가 들어 있다면 그래서 설교가 시간적으로 충분히 보장되지 못한다면 설교자와 성도가 함께 참여하는 교독식 설교를 시도해 봄직하다. 성시교독하듯 스크린에 설교문을 설교자와 회중이 번갈아 교독하는 형식으로 띄워놓고 교독으로 설교하는 이 형태는 미국 테네시주의 제일 장로교회에서 목회하는 레이 다이크스목사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간략하면서도 회중이 함께 동참한다는 점에서 큰 유익이 있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성탄과 관련된 찬송가 한 장을 택해 가사에서 메시지를 추출하고 설교 전개 시에 노래 부르기, 악기연주, 가사낭송 등을 설교 중간중간 배치하며 설교를 진행하는 찬송설교는 회중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성탄설교로서 매우 적합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성탄은 축제이다! 축제의 의미를 놓치지 않으면서 축제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는 ‘별미’ 설교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리되면 절기설교를 누가 뻔하다 하겠으며 어느 설교자가 어렵다 하겠는가?  /서울신대 설교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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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2-12
  • 언론의 바람직한 사명과 역할
      반세기 남짓 동안 기독교계 언론의 사명을 감당해온 기독교신문의 창간 54주년을 축하드리면서 이 뜻깊은 날에 앞으로도 변함없이 힘써 실천해야 할 바람직한 언론의 사명과 역할을 되새겨 보고 새롭게 다짐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언론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에 이은 제4부라고 불리울 정도로 국내외적으로 참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줄 뿐 아니라, 정론직필을 통해 권력의 오남용과 공직자의 부정과 부패를 방지하는 감시기능과 국민의 통합과 사회발전을 선도하는 기능 등도 감당하고 있다. 특히 교계언론은 하나님 말씀의 터 위에서 하나님 나라 확장과 선교기능까지도 담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언론이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여러 면에서 큰 기여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언론이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언론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국가에서는 언론의 순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역기능도 있다. 수많은 언론매체들로 인해 연예인이나 인기인들의 주변 잡담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매체들의 다양한 특성과 이념들로 무장된 다양한 주장들로 인해 혼돈과 갈등의 파고는 높아만 가고 있으며, 자기중심적 사고와 이기적인 관점에서 형평성과 균형감각을 벗어난 일방통행식의 비난과 비판의 기사만 쏟아냄으로 인해 긍정과 사랑과 감사는 사라지고 부정적 사고와 불평, 갈등만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편리하고 발전된 나라에 살면서도 감사를 모른 채 지옥 속에서 사는 것처럼 불평과 불만, 혼돈, 대립, 갈등 속에서 헤매고 있다.   그러므로 언론은 이런 역기능들로 인한 문제들을 인식하면서 순기능의 역할과 사명을 더욱 잘 감당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특히 기독교계 언론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관점에서가 아니라 성경적 관점에서 비판할 것은 날카롭게 비판하여 비성서적인 이단 집단이 이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소수인권보호, 민주, 차별금지, 선진이란 미명 하에 확산되어지고 있는 동성애 등의 온갖 죄악과 불법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차단해야 한다. 동시에 기독교 자체의 연합과 갱신을 위한 방법을 찾고, 바른 방향을 제시하려는 노력도 끊임없이 경주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선행과 좋은 것은 적극 알리고, 사랑으로 덮을 것은 덮고, 선도할 것은 선도해가면서 교계와 우리나라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만들도록 최선을 다해야한다. 선행과 미담들이 잘 보도되면 선행과 옳은 일을 자신도 행하고 싶은 선한 의욕과 목표가 생겨나게 되며, 보다 더 밝은 세상, 사랑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가게 될 것이다.   반대로 좋은 일은 보도되지 않고 좋지 못한 일만 보도된다면, 교계와 사회를 어둡게 만들며, 죄와 악과 불법에 대한 경각심이 약화되고, 너무 쉽게 죄악을 범하는 세상이 되고, 미움이 사랑을 이기고, 악이 선을 이기는 살벌한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언론은 사랑과 미움, 빛과 어둠,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 속에서 미움과 어둠과 악을 하나님 편에서 날카롭게 비판하되 더욱 사랑과 빛과 선의 횃불을 더욱 높이 들어서 더욱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노력을 기독교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중단없이 계속해야 한다.   54년 동안이나 기독교계 언론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달려온 기독교신문이 계속 언론의 바람직한 사명과 역할을 잘 감당해감으로 교계와 우리나라의 발전에 앞장서는 언론이 되기로 새롭게 다짐하는 창간기념일이 되길 바란다. 성은 중 기독교신문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한국사회발전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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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2-04
  • 대림절에 이웃 돌보는 교회가 되자
      매년 대림절의 시작과 동시에 각지에서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진다. 모두가 설레고 행복해야만 하는 이때 낭만과 설렘이 아닌 추위와 배고픔을 상대해야만 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몸까지 허약하여 추위를 감당하기 버겁기 그지 없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좌절을 언제나 지켜봐왔다. 가슴 아픈 현실이다.   우리가 연탄은행과 무료급식, 노숙자쉼터 등을 통해 이들을 돕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삶이 나아지기는 하는 것일까란 질문은 언제나 머릿속을 맴돈다.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을 만큼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우리 단체이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우리의 이웃들은 여전히 춥고 배고프다. 거기에 심적인 좌절감과 외로움까지 더해 그들은 대림절의 시작에 감사할 여유가 없다.   예수께서 춥고 배고픈 자들을 건져내시기 위해 오신지 2천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왜 우리의 이웃들은 이토록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일까. 예수의 정신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이리도 넘쳐나는데 왜 아직까지도 기본적인 삶의 필요조건조차 결여한 삶의 양식이 존재하는 것일까. 평생을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하며 여전히 이러한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림절의 시작은 예수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게 만든다. 예수께서 살아계시던 그때도 가난한 이들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예수께서 그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셨던 것처럼 우리도 대림절을 맞아 그들이 아무런 추위와 배고픔 없이 이 겨울을 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예수의 다시 오심의 의미 아니겠는가. 소외된 이웃들이 더 이상 변두리에 치워지지 않는 사회를 기다리는 것이 대림절의 의미 아니겠는가.   우리는 마냥 기다릴 수 없다. 우리는 기독교인이고 예수의 제자들이다. 우리는 예수의 다시 오심을 우리 손으로 이뤄내야 한다. 예수가 그랬듯 가난한 이들을 찾아 섬기고 먹이고 위로하며 함께해야만 한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이요, 대림절과 성탄절을 맞이하는 자세다. 우리가 연탄을 나르고, 밥상을 나누는 일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우리의 일이 대수로운 것이 되어버리는 사회라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절실히 회개해야만 할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인간됨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인간됨의 길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으로써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을 염려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들이 어디 있겠는가.    얼마 전 미국에서 유학 중인 학생들이 밥상공동체를 찾아와 연탄배달을 한 적이 있다. 봉사활동을 마치고는 매년 오겠다고 약속했다. 아픔의 현장,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고국의 현장에서 흘린 땀방울을 통해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봉사활동은 이웃을 돕기 위해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 별나지 않는 지혜를 교회들이 깨닫길 바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깨닫길 바란다. 나눔은 받는 이의 즐거움보다 주는 이의 즐거움이 더 크다는 사실을. 받는 이가 느끼는 행복보다 주는 이가 느끼는 행복이 훨씬 크다는 것을.    교회들이 이번 대림절을 맞아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길 당부한다. 물론 교회들은 잘하고 있다. 어느 단체보다 열심히 구제사역을 감내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다. 이리도 교회는 많은데 이리도 춥고 배고픈 이들도 많으니 말이다. 더 열심을 내자. 이번 겨울에는 춥고 배고픈 이웃이 없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선포되는 대림절기를 맞이할 수 있길 기도한다. /밥상공동체 연탄나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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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1-28
  • ‘생명나눔’은 ‘건강의 복’을 나누는 방법
      필리핀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하고 싶은 일에는 방법이 보이고, 하기 싫은 일에는 변명이 보인다’ 지난 29년 동안 사랑의 장기기증운동을 펼치면서 이 속담의 깊은 뜻은 이해할 수 있었다.    1991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타인에게 신장 하나를 기증하며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을 시작했을 때에는 누가 그토록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남을 위해 나누겠냐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이들도 많았다.   처음 반응을 듣게 됐을 당시 낙담하며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장기기증’이 제게는 너무도 간절한 사명이었기에 국내에서 생명나눔 운동을 활성화시킬 방법에 대해 밤낮으로 고민하며 기도했다. 그 결과 주님의 은혜로 지금은 140만여 명이 장기기증 희망 등록에 참여했고, 96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타인을 위해 살아서 자신의 신장 하나를 기증했다.   지난 10월 10일, 인애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구신용목사가 60대 만성신부전 환자를 위해 신장 하나를 기증했다. 사실 구 목사의 기증에 앞서 2006년 아내인 홍선희사모가 먼저 신장 하나를 기증했다.    지난 2006년 부부 모두가 알고 지내던 지인이 신장이 망가져 혈액투석을 하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그때 구목사는 자신의 신장 하나를 기증하려 했지만, 혈액형이 일치하지 않는 등의 사유로 기증이 불가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생명나눔이 무산될 수도 있었지만, 홍사모가 용기 있게 나서 구목사 대신 자신의 신장 하나를 지인에게 기증했다. 그로부터 13년의 시간이 흘러 구목사 역시 자신의 신장 기증의 결심을 지키기 위해 수술대에 올랐다.    구목사의 신장을 이식받은 이는 60대 남성으로 인생에 절반 가까운 세월을 투병하며 육체적, 경제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던 환자였다. 29년 투병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혈액투석 치료를 받으며 이 환자는 ‘꿈만 같은 일’라며 ‘받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겠다’라는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이 부부가 생명을 나누는 용기를 선뜻 낼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 바로 자신의 건강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채워주신 복이라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건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에서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다. 내 의지, 내 수고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으로 인해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고 믿고, 작은 일상 가운데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작은 일상조차 누릴 수 없는 환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눈에 보기에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서 부자가 아니다. 비록 재산이 많지 않고 누추한 곳에서 생을 이어갈지언정 지금 이 순간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허락한 환경 가운데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립보서 4장 19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부족함 없는 사랑을 베풀고 채워주신다.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무고한 죽임을 감내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눌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변명이 아닐까.   주님께 받은 사랑을 나누는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돈이 없어도, 시간이 없어도 우리 생의 마지막 순간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나누며 이웃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우리가 주님께 받은 건강의 복을 떠올리며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을 위해 생명나눔 운동에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의장기기증 운동본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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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1-14
  • 마음과 말과 시가 익어가는 가을
      작자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다시 읽고 싶은 가을이다. 이 한 권의 책은 인생의 가치와 사랑의 미학으로 녹아 있다. 어쩌면 번역가 ‘아낌없이’ 라는 단어를 추가하여, 독자가 이미 다 알 수 있는 감정을 하나의 열매로 제시했기에 더 잘 그렇게 동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벚꽃의 축제 같은 인생도 아름답고 한 여름 녹음이 주는 청량감 같은 인생도 아름답지만 역시 참으로 좋은 건 안식을 가져 다 주는 가을같은 결실의 삶이다.   무엇이든 감사로 맞이하면 상처로 시름시름 앓는 마음보다는 평안의 열매를 얻을 수 있어 좋다. 미움의 가시대신 용서하는 훈련을 하다보면 인격의 품위로 요동치는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성경은 쓸모없는 말을 ‘가라지’라고 한다. ‘한담’은 우리의 속을 비게 하고 공허하게 만든다고 경계하고 있다. 속에서 익히고 삶으로 살아내지 않는 언어는 바람같이 공허하다. 느끼고 체험하고 살아낸 말만이 생명의 씨앗이 되어 누군가의 가슴으로 날아가 치유가 되고 사랑으로 깨어난다. 이런 힘을 가진 사람이 딱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그를 구주로 믿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말과 삶과 가슴과 영혼이 하나에서 나온 말의 씨는 부족하다. 어디선가 들은 것, 정보를 통해 값없이 얻어낸 것, 신기하고 재미있는 말거리들로 무성한 잎사귀처럼 생명 없는 말이 너무 난무하다. 지금은 과연 정보의 시대로 언어가 소통하는 길이 사방에 열려있다. 그 통로로 언어는 오염되고 생명을 앗아만 간다. 누가 이 소통의 통로를 단절할 수 있겠는가? 누가 이 한담을 금할 수 있는가? 마음으로 낳은 언어만이 생명을 낳고 날아가는 대로 생기가 되어 줄 것이다. 원래 말은 생기였다. 살리는 것은 말이었다. 말이 회복되는 언어의 가을이 오길 모두 지금은 바라고 있다. 말의 열매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한담을 그치라 하셨다. 가장 좋지 못한 상황이 바로 이 말이 만들기 때문이다. 새끼 빼앗긴 암곰, 미련한 자, 조급한 자 중에서 어떤 경우를 가장 최악이라고 볼 수 있을 까? 성경은 가장 최악의 상태를 조급한 사람이라고 한다.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분노는 사람을 남김없이 태울 것이다. 그런데 분노보다 더 불행한 일은 미련한 자를 만나는 일에 있다. 왜일까? 오만 불손과 교만의 상징이요 심판과 멸망의 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조급함이다. 때로는 이 조급함이 일을 성사시키기도 하고, 속도감이 있어서 민첩해 보이기도 하고 꼭 필요한 인품 같기도 하다. 그런데 성경은 분노하는 사람보다, 미련한 사람보다 가장 최악의 상황이 바로 이 조급한 사람에 있다고 한다.   생산한 것이 아닌 얻은 것으로는 배부를 수가 없다. 들은 것은 지나가고 나의 인격을 조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체험하고 고통과 눈물 속에서 얻고 배운 말들은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에도 살아 있고, 상대방으로 풍족함을 누리게 할 뿐 아니라 진심을 느끼고 마음을 나누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인사를 받아도 여전히 마음이 배고픈 것은 죽은 언어가 많기 때문이다.   언어의 가을이 온다면 언어가 익어가는 소리 가득히 우리의 혀는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완전한 말을 얻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는 가을을 맞이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고통 속에서 배운 감사라는 진심어린 말 하나를 일상에 심어본다. /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 오피니언
    • 정론
    2019-11-07
  • 청교도운동 본받아 교회를 개혁하자
      청교도 운동은 철저한 개혁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일어난 교회 갱신운동이다. 그것은 건전한 신학과 윤리적 삶을 강조하는 이론적이며 도덕적 운동인 동시에 뜨거운 종교적 감정과 체험적 신앙을 강조한 영적 부흥운동이었다. 청교도주의, 곧 청교도 정신이란 독실한 신앙적 태도, 부패된 것을 정화시키려는 문화적 힘, 그리고 지성, 도덕적으로 엄격한 것을 말한다.   청교도 운동은 프로테스탄트교회 개혁 목표의 원형이다. 그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 18세기 복음주의 부흥운동이요, 그 후예들이 현대 복음주의자들이다. 그렇다면 청교도 운동의 특징은 무엇인지 알아보고 반성해보면 한국교회의 개혁운동에도 큰 빛을 더해줄 것이다. 첫째, 성경 중심주의이다. 청교도들은 성경을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주권적 계시요,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그것에 절대성을 두었다. 따라서 성경을 교리나 신앙만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들은 성경에 개인, 교회, 사회, 정부에 대한 필수 지침이 담겨져 있다고 믿고, 성경의 말씀을 모든 분야에서 실천하려고 했다. 즉 자신들이 이해하는 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삶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다.   둘째, 철저한 개혁에 대한 열망이다. 청교도 운동은 미흡한 종교개혁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프로테스탄트 교회에는 아직도 로마 가톨릭적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을 일소하여 교회를 정화하고자 일어난 것이 청교도 운동이다. 청교도들은 예복과 예배의식 같은 실제적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본질과 같은 교리문제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와 영국교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교회를 철저히 개혁하려 했다.   셋째, 지성에 대한 존중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 특히 지적 엄밀성을 강조하는 개혁파 교회 전통을 이어받아 한결 같이 지성을 존중한 것이 17세기 청교도들의 특징이었다. 청교도들은 고도로 학식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많은 교육을 받은 계층들이었다. 그들은 기독교적 지성을 계발하는데 열심이었으며 방대한 양의 경건 서적과 자료들을 만들어 냈다.    청교도들의 시각은 포괄적이었다. 그들은 종교적 탐구와 삶을 분리하거나 종교적 탐구에서 비 교회적인 문제들을 배제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기독교적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이러한 특징은 종교개혁의 신학과 세상에 대한 포괄적 시각을 결합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넷째, 엄격한 규율과 도덕율에 대한 중시다. 청교도 운동은 윤리적 삶에 관심을 두는 도덕 운동이었다. 청교도들은 구약 율법의 실제적 적용을 강조한 반면,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보는 도덕 폐기론을 반대했다.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은 율법에 대한 복종을 포함한다. 또한 청교도들의 깊은 관심사는 성화와 경건의 추구였다. 그들은 청빈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으며 사회와 국가를 도덕적으로 정화하려 했다.   다섯째, 영적 체험주의이다. 청교도 운동은 건전한 신학과 윤리적 삶뿐만 아니라 종교적 감정과 경험을 강조했다. 청교도들은 체험적 신앙을 중시하여 중생을 하나님의 선택의 표준으로 간주했다. 청교도 신학의 중심 주제는 중생이었다. 특히 그들은 평범한 스타일의 설교를 통해 대중들에게 회심을 열정적으로 호소했다. 청교도들이 신비체험을 강조한 것으 이런 영적 체험주의의 결과였다. 한국교회가 사회 저변에서 신뢰를 잃고 있는 현 시대에 종교개혁의 불씨를 되살리길 기대한다. /전 서울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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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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