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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19의 한복판에 십자가를 세우자
         2020년 사순절은 특별하다. 고난의 한복판을 지나면서 맞는 사순절이기 때문이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을 전후해서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급격히 확산되었다. 사이비 종교집단인 신천지가 감염의 진원지가 되면서 다중이 모이는 교회의 예배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고, 예배의 자제를 요청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 교회 역시 이 어려운 상황의 극복을 위해 앞장서야 할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등을 중심으로 주중예배 자제와 주일예배를 온라인 가정예배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고 나섰다.   필자 역시 교단장으로서 총회장 목회서신을 통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향후 2.3주, 주일예배를 영상예배로 가정에서 드릴 것을 요청하였다. 총회장 목회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요 3;16)처럼,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요, 세상을 살리는 생명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생명에 해를 끼치는 전염 확산의 진원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사회 전체의 안녕과 유익을 위해 주일예배를 가정별로 드리는 일은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되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신앙고백적 행위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언급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고백이다. 이 고백은 에베소서 1장 23절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교회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incarnation)이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나사렛 예수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성육신의 역사를 계속하신다. 당신이 세우신 이 땅의 교회를 통해서 성육신의 역사를 계속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또 하나의 성육신 사건이다. 교회 하나가 세워질 때마다 매번 성육신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의 삶을 통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너를 위해 나를 내어 준’ 희생적 사랑의 결정체이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말씀 그대로다. 예수는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으로, '세상의 밥‘으로 오셨다.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우리를 살리셨다. 코로나 19 현장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이 있다. 바로 대구로 달려가는 의료진들의 모습이다. 지난 2월 25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제목이 “주변엔 ’차출됐다‘ 말하고.. 대구로 달려온 ’백의의 전사들‘” 이다. 실제로는 자원해서 대구로 내려갔으면서도 주변에서 걱정할까봐 차출되었다 말하고 내려간 의료진들의 모습을 기사화한 것이다. 거룩하고 향기롭다. 이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헌신과 희생 속에서 십자가의 그림자를 본다.   3월 첫 주 온라인 영상예배를 드리고 나니, CBS 노컷 뉴스에서 우리 교회를 비롯해서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전환한 교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노컷 뉴스 실시간 검색 1위였고, 기사에 댓글이 무려 1,500여개가 달렸다. 댓글보기가 무서웠지만 교회를 향한 원성과 충고, 기대들을 채찍을 맞는 심정으로 보았다. 그 중에 기사제목을 패러디한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 “예배를 멈추니 예배가 보이네”가 기사 타이틀 인데, 누군가 “예배를 멈추니 예수가 보이네.”라고 댓글을 달았다. 아픈 말이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교회공동체에 얼마나 소중한가. 그러나 예배하는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때, 세상은 예배를 멈추라고 소리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교회를 통해, 우리의 예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원하는 것이다.   사순절이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고난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계절이다. 우리의 기억이 예수의 고난을 슬퍼하는 감상에 그치고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는 기억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코로나 19의 상황은 실로 그러한 상황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사순절에, 코로나 19의 상황 한 복판에 십자가를 세우기를 원한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으로 세상을 살리고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절, 사순절이기를 소망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성북교회 담임   ◇성북교회(담임=육순종목사)는 온라인으로 주일예배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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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3-10
  • 3·1독립운동의 의미와 과제
      지금 한국은 정치적으로 교회적으로 심각한 대결구도로 달리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3·1독립정신에 기초를 둔 국가라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한데 국가 기초가 된 3·1독립운동은  교회가 주도하고 있었고 거기 민족 대통합과 역량의 대본이 게시되고 있었다.   3·1독립운동 궐기 때에 한국교회는 전인구 16,913,000 중 253,043명으로 1.49%에 겨우 미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시 인적 물적 피해는 전체의 25% 이상을 교회가 당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의 주체가 기독교라는 판단때문이었다. 지금은 30%가 교인비율이다. 무슨 일인들 교회가 나서면 못할 일이 무엇인가.    한국 백지도 두 장을 가지고 한 장에는 3·1독립운동 궐기장소, 다른 한 장에는 교회 소재지를 표시한다. 그리고 두 장을 겹치면 궐기장소와 교회소재지가 꼭 겹친다. 1919년 당시 한국의 전국적인 확고한 자발적 민간조직은 기독교회밖에 없었다. 한국교회는 1907년 전국적인 전민죽 단위의 독로회(獨老會)를 조직하고 있었다.    교회는 전민족의 동력을 동원하는 유일한 체제였다. 3·1독립운동 당시 심지어 기생, 술장사, 달구지꾼 등 전국민이 완전 일체 동원되고 있었다. 교회에는 그런 동원력이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선을 동원할 힘, 의를 동원할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기독교회뿐이다. 교회에게는 집결력이 있다. 총동원력이 있다.   한국기독교회는 처음부터 세계의식이 빛났다. 3·1독립운동 당시 한국기독교회는 세계 역사의 흐름에 민감하였다. 당시 세계는 민족 독립 평화 자유의 조류가 도도하였다. 그것을 포착하고 있었다. 1892년 우리가 만든 찬송가에 이미 만민 만국 만왕 과 같은 말들이 줄비하다. 1907년 독로회 창설 때에는 그 회의장에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3·1독립운동 당시 거리에 통고문이 붙어 있었다. 독립운동 기간 동안 연일 성경을 읽으라는 것이었다. 요일마다 읽을 성경이 명시되어 있었다. 3·1독립운동은 성경을 기반으로 일어났던 운동이다. 어떤 운동이든지 이 정도의 표준 거점위에 서서 하여야 한다.  주님은 천국을 아야기하시면서 사역을 시작하신다. 무엇이든, 정치든 경제든, 성경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야 한다.   한국교회는 근대 한국의 지도자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백정 출신을 한국최초 대학의 교수로 일으키는 것과 같은 일을 한 것이다. 교회는 근대학교 교육을 통해서 새로운 지도층을 배출하고 있었다. 심지어 공산주의자들도 교회출신이 많았다. 조선총독부는 1918년 주초세가 국가예산의 48%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창녀촌을 곳곳에 국가가 국세로 세운다. 아편은 전매청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정신과 몸을 악으로 해체시키려 하고 있었다. 교회의 공격은 날카로웠다. 국가는 도덕성이 있어야한다는 외침이었다.    3·1독립운동의 기록과 증언은 교회에서만 정직하고 그리고 대담하게 하였다. 신문보도는 일본에서조차도 1919.3.7부터 가능했고 계속 통제아래 있었다. 독립만세는 소동 폭동으로 몰고 있었다. 그런데 장로교 총회록에는 <3·1독립운동>이한 글이 나온다. 더구나 각 노회상황보고서에는 궐기 진행상황과 피해 상황자 수자 성함 등이 정확하게 기록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유일한 실록이다.    3·1독립운동 때 전국의 피해 특히 교회의 피해는 막대하였다. 전국이 황폐하고 눈물과 피로 물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교회는 삼천리반도금수강산을 찬송으로 외친다. 봉선화 노래를 지어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외친다. 교회는 거대환 민족의 계시록을 울린다. 전국이 하나가 된 이 거대동력은 밖으로 뻗쳐나가는 힘이 막대하였다. 일본 정상급 거물 로 천황과도 가까웠던 도꾸도미 소호가 계속 일본의 진압방법이 야만적이라 공격한다.    3·1독립운동에서 한국을 이끌 거대 동력의 거점이 기독교회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특히 난시에는 민족의 거대 동력동원체제요 예언자요 계시록이란 사실을 증명하였다. 우리 한국교회, 앞으로 그럴 것이다.  /백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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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2-26
  • 교회의 연합과 일치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세운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이 떠난 뒤 심한 분열을 겪었다. 그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쓴 글이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고 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장 3절~7절)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아볼로나 바울 모두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밭이요, 집이라고 했다. 즉 하나님에게 모두 속했다는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8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가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면서 화목케 하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려고 했다. 그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있었다. 그때 누가복음 9:54에서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돌아보시고 꾸짖으셨다고 했다. 이처럼 예수님은 나누고 가르는 것에 대해서 진노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선을 그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안식일을 지키냐 그렇지 않느냐”는 등의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어온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선을 넘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선이 없었다. 세리 마태를 부르셨고, 그가 베푼 만찬에 참여하셨다. 모두가 죄인이라고 여기는 삭개오의 집에 가셨다. 그리고 나병 환자는 가까이 하지 말라고 율법에는 쓰여져 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무시하고 나병 환자를 안아주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에게는 선을 긋고 너는 하나님과 화목의 대상이 되고 너는 하나님과 화목의 대상이 못 된다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분명하다. 그것은 예수님을 아는 일과 믿는 일과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과 한국 교회는 해야 될 일이 있다.   첫째,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선을 그으면 화목은 없고 정죄만 있을 뿐이다. 너는 우파고 너는 좌파라는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너는 반공주의자고 너는 용공주의자라는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해서 광화문 집회에 나간 자는 보수주의자고 반공주의자고, 반대로 서초동 집회에 나간 자는 진보주의자고 용공주의자라는 선을 긋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밭이요 집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어느 책에서 기독교 2천 년 역사 속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인과 결탁했을 때 종교는 항상 정치에 이용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종교는 타락했다고 했다. 우리가 아는대로 19세기에 러시아 정교회가 그 당시 왕권과 결탁했을 때 러시아 정교회는 타락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느 한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자를 지도자로 선출해야 하는 것이다./한신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02-19
  • 위기를 기회로 삼자
      중국 우한지역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한국사회가 고통을 받고 있다. 공공장소에서 접촉을 금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한국교회는 다중집회 시설로 감염에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어 예배를 드리는데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교회는 지난 주일에도 거의 모든 교회에서 악수를 피하고, 마스크를 착용하는 등 개인위생을 강화하여 예방에 앞장서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시기일수록 우리 교인들은 더욱 말씀과 성경공부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인 바이러스 위기로 인해 집회나 모임보다는 개인이 각자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일상화 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교회들이 첨단 IT기술을 활용하면서 꼭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교회 내 행정실과 로비, 카페 등 교인들이 머무는 공간에 무선 공유기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교회 소식을 접할 수 있으며, 성경공부와 화상회의 등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특히 트위터나 페이스북, 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와 연계해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전도활동에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각종 스마트기기와 SNS의 발전으로 목회환경도 함께 바뀌고 있다. 오프라인을 통해 이뤄졌던 기존의 전도 패러다임을 넘어서 더욱 스마트한 전도전략이 요청되고 있다. 기성세대들에게 있어 스마트 전도법은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다음 세대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스마트폰 사용자가 급증하면서 예배시간에도 스마트폰을 이용해 성경과 찬송가를 보는 기독교인들도 많아졌으며, 시대의 흐름에 맞춰 말씀 묵상이나 찬양, 기독교 문화 콘텐츠 등을 제공하는 다양한 크리스천 앱들도 개발되었다. 요즘처럼 모이기 힘든 시기에는 이러한 앱을 활용하여 자신에게 맞는 예배나 성경공부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보고 들을 수 있어 신앙성장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함께 모이는 예배가 어려운 만큼 스마트시대에 각자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좋은 성경공부는 이러한 어플을 이용하는 것이다. 휴대성이 좋은 스마트폰의 특성을 이용해 직장과 학교 등지에서 적은 시간을 이용해 성경 전체를 공부한다면 매우 유용한 성경공부 도구가 될 것이다.   우리 선교회는 바이블아카데미 앱을 통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구약 성경 66권에 대한 강해를 수록하여 한국교회에 전파해 왔다. 다른 성경공부 앱들에 비해 시각적으로 발전되고 강의를 듣는 도중 의문점이 생기면 인터넷 검색을 활용할 수 있어 편의성도 극대화 했다.    이단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올바른 성경공부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교인들에게 쉽고 전문성 있는 성경공부를 제공해야 한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성경 66권 강해 동영상은 다양성과 근접성, 전문성의 장점을 갖는다.     최근 군대에서도 스마트폰이 허용이 되어 연간 7만여 명의 청년들이 군복무 중에도 바이블아카데미 앱을 통한 군 선교가 가능해졌다. 각 교회에서 입대하는 청년들이 군복무를 하며 스마트폰을 통해 성경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하면 군 선교사역에도 큰 힘이 될 것이다.    특히 이번사태와 같이 전 세계적인 바이러스 확산으로 모이는 일이 힘들어질 때 스마트 성경 앱은 더욱 가치가 높아진다. 저명한 신학자들의 강의를 7개 국어로 번역하여 2만 7천 명의 해외선교사들이 성경 66권을 언제 어디서든지 접하고 배우며, 선교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스마트 사역은 한국교회가 함께 나서야 할 중요한 사명이다.    바이러스로 인한 사회·경제적 위축을 이겨내고 주님이 명하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스마트’한 대응이 더욱 절실하다.  /한국미디어선교회 이사장·영락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02-12
  • 한국사회와 교회를 향한 바람
      지난 2년 7개월 동안 우리 사회는 거대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침체를 겪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작년 6월부터 기독교인들이 중심으로 광화문 구국 모임과 기도회가 시작되었고, 지난 10월 세 차례 모임을 통하여 해방 이후에 가장 많은 시민들이 자유민주화와 시장 경제 위기를 염려하여 시민적 의사를 표출시켰다. 이런 가운데 진정하게 시민들을 존중하는 지도자라면 집권 후반기를 맞이하여 궤도수정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를 보면 전혀 집권 후반기의 정국운영 구상에서 이러한 전환의 기미기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헌법적 가치를 중시하는 국가의 정체성과 진로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한다. 문대통령은 취임 후 3년 연속 6·25 기념식 당일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고, 6·25 때 북에 희생된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는 날인 현충일 기념사에서도 3년간 6·25와 침략 주체인 북한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6·25 때 북한 편에서 공을 세운 사람 김원봉을 일제 때 광복군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국군의 뿌리인 것처럼 추켜세웠다. 북한 남침사실은 소련 해체 이후에 드러난 군사기밀 서류에서 이미 드러나 역사적 사실로 입증된 바 있다. 이러한 심각한 민족에 대해 이렇게 심각한 범죄적 전쟁에 관한 대한민국 국가의 대통령의 인식이 이러하니 애국적 양심을 지닌 지식인들이 나라의 안보에 대하여 걱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헌법정신을 유리하는 정권에 대하여 침묵하게 되면 결국 신앙의 자유까지 잃게된 다는 엄중한 현실을 알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독일교회의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독일 국민들은 1930년대 나치가 등장하여 공산주의자를 척결했을 때, ‘나는 아니다’라고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치는 유대인들을 척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는 아니다’고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치는 자유노조를 척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는 아니다’고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치는 천주교를 척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는 아니다’고 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나치는 개신교를 척결하고자 했다. 이때 비로소 개신교도들은 이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이미 모든 자유가 상실된 상태로 때는 늦은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국민 마음을 빼앗아 가는 현 정권의 국가주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며 기독교 신앙의 기반인 대한민국 헌법, 자유민주화와 시장 경제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   오늘날 세계경제 10위권에 든 대한민국의 정치는 경제 발전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챙피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집권당이 장기집권을 위하여 탄력선거제를 요점으로 하는 정치전문가도 이해할 수 없는 당리당략적 선거법과 정권의 입맛에 맞지않는 고위 공직자들을 마음대로 수사하고 처벌하는 공위공직자 수사법을 제1야당과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처리하여 4월 15일 총선에서 승리하고자 모든 정략을 구사하고 있다. 야당들은 자유민주화와 시장 경제 수호를 위하여 당리당략을 버리고 하나로 뭉쳐서 나라를 바르게 이끌고 나가야 하는데 분열되고 무기력하여 국가가 난파되도록 이끌려가고 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포로되어 간 이스라엘 국민들을 향하여 비록 바벨론 국가라 할찌라도 주민들의 안녕을 위하여 그 성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였다. 대한민국은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살아야할 고국이요 보금자리다. 한국교회는 우리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기독교인들은 신앙양심으로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바르게 이끌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공정한 선거가 이루어져야 하고 올바른 지도자가 국회의언으로 선출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절차적으로 공정한 선거가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한국사회를 위한 한국교회의 소금과 빛의 사명이다. 하나님이 이 나라의 진로와 운명을 주관하신다. 한국교회는 민족교회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샬롬나비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0-02-04
  • 일치는 서로의 환대를 통해 드러난다
      혈액순환은 몸을 살게 하고 생명을 유지해 준다. 죽은 자에게는 혈액순환이 멈춘다. 생명력을 상실한 때문이다. 신앙생활로 사는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순환하는 혈액이고, 은혜를 갈구하고 누리는 신앙이 혈액을 순환시키는 힘이다. 그렇게 은혜와 신앙은 만난다. 서로 말을 나눈다. 뜻을 교류한다. 서로 섞여 생명을 만든다. 만나고 말하고 교류하고 급기야 생명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합하여 기도라 한다.    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신앙의 주체인 인간은 기도로 만난다. 기도로 서로 묻고 답하고 대화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서로 하나가 되어 선을 이룬다. 이렇게 만나고 교류하고 하나 되어 사는 방식은 “서로가 서로 안에 사는 방식”이다. 예수께서 마지막 대제사장으로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하실 때 주신 말씀이 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성부와 성자가 성령 안에서 서로서로 안에 사시기에 그 분 하나님을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 부른다. 이 삼위의 하나님이 우리 모두 안에 계시고, 우리는 이 삼위의 하나님 안에 산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앙이다. 동시에 우리들 서로가 같은 방식으로 서로 서로 안에 사는 것이 삼위일체 신앙적 일치의 모습이다. 서로 서로 안에 살게 엮어주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치를 추구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가 우리 인류와 세계의 구세주이심을 믿게 하려는 때문이고, 우선 기도로 구원을 향한 일치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교파로, 지역으로, 교리로, 역사전통으로 다양하게 분리되어 있지만 때로는 꼴사나운 분열로 아픔을 겪고 있는 교회와 교인들이 먼저 함께 기도하는 일에서부터 일치를 시작해 보자면서 영국 성공회의 폴 왓슨( Paul Wattson) 사제가 들고 나온 것이 “한 옥타브의 교회 일치”(a church unity octave) 프로그람 제안이다. 8개의 음정이 한 옥타브(도~도)를 이루듯이 한 주간 매일같이 합동하여 일치를 위해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하자는 제안이다. 그래서 옥타브의 출발(“도”)과 마감(“도)을 우리의 믿음의 모범이고 선배인 베드로와 사도 바울을 표본으로 삼자고 했다.    수제자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한 날(1월 18일)을 시작 일로 하고.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한 날(1월25일)을 기도 옥타브의 출발과 마감으로 삼자는 제안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면 차례의 변화 확대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을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으로 지키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기독교 역사의 거대한 세 물줄기인 로마 천주교, 동방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회 모두가 동참하고 있는 아름다운 전통이다.   다만 이 기도주간은 세계 각국의 교회들이 순번을 따라 그 해에 함께 간구하고 추구할 일치의 소원과 희망을 주제로 제시하고 정해진 성경본문을 함께 명상하며 기도의 일치를 전 세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고귀한 운동이다. 금년에는 몰타의 그리스도인들이 제안한 일치기도를 함께 드린다. 기도의 주제와 본문은 이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각별한 인정을 베풀었다”(사도행전27:18~29:10). 초대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 등장한 선교여행 중에서 일어난 조난과 조난 가운데에서도 외딴 섬에 도달하여 원주민들로부터 환대받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전 세계 이민 행렬이 던지는 세계의 문제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함께 기도하자는 뜻이다.   환대는 그리스도인 일치를 추구하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미덕이다. 이러한 환대를 실천하려면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더욱 큰 너그러움을 보여야 한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에게 각별한 인정을 보여 준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아직 알지 못했지만, 바로 그들의 각별한 인정 덕분에, 분열되어 있던 사람들이 서로 가까워졌다. 우리 그리스도인 일치는 무엇보다도 우리 서로에 대한 환대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와 다른 언어, 문화, 신앙을 지닌 사람들과의 사랑의 만남을 통해서도 드러날 것이다.  /경동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01-20
  • 건강한 가족 공동체성의 회복
      설날은 음력으로 한 해를 처음 시작하는 날로서 신라시대로부터 전해오는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이다. 설날이란 말의 어원과 관련해서는 대략 세 가지 설이 있다. 먼저는 ‘낮설다’는 말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고, 다음으로는 개시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이 점차 연음화되어 설날로 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또 한편 삼가다’ 또는 ‘조심하다’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설날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공동체, 특별히 가족공동체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것이며, 이런 공동체의 핵심요소로서 부모님의 권위를 중심으로 가족간의 질서 있는 화목을 다시금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설날은 따뜻한 정과 사랑의 울타리가 되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오늘날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그런 공동체 안에서 이기주의와 탐욕주의를 넘어 이타적인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는 나눔과 배려의 삶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오늘날 이 사회에 만연한 단절과 소외,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용서와 화합, 화목과 결속의 지혜를 배우는 계기가 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설날은 단순히 명절 이상의 의미와 기능을 갖는다 할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나 비기독교인에게 설날은 이처럼 우리에게 공동체 특별히 가족공동체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고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설날을 맞아 더욱 성숙한 성경적 가족공동체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먼저 기독교인의 가정은 오늘날 가정 안에서 조차 생명이 경시되는 시대풍조 가운데서 생명의 공동체로서 건강한 가정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생명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육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한 생명의 공동체이다. 성경은 가정을 교회에 투사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남편인 그리스도와 아내인 교회가 생명의 연합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장차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의 연합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 말한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장차 남편인 하나님과 신부인 우리 곧 교회가 생명의 연합을 이루게 될 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믿는다.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이 설날에 그들의 가족들과 더불어 부모님의 집에 함께 모여 먼저 말씀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정이 단순히 육적 생명의 공동체일 뿐 아니라 영적 생명의 공동체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럼으로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건강한 생명의 공동체, 생명이 충만한 가정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설 명절을 통해 기독교인의 가정은 가족 상호간 사랑의 섬김 안에 규모 있고 질서 있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생명의 연합을 이룬 가운데 서로 사랑의 사귐을 가지면서 관계와 질서 속에 존재하듯, 또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몸인 교회가 생명의 연합을 이루어 사랑의 사귐을 사귀면서 서로 관계와 질서를 이루고 있듯, 그리스도인의 가정도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가족들 상호간에 생명의 연합을 이루어 사랑의 섬김 가운데 바른 관계와 질서가 세워지고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는 마치 건강한 몸이 각 지체들 간에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바른 관계와 질서를 유지함으로 왕성한 생명력을 나타내는 것과도 같다. 하나님의 나라나 교회나 가정은 모두 생명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동일한 모습을 보여준다. 건강한 생명의 공동체는 그 속에 사랑의 섬김이 있으며 동시에 바른 관계와 질서가 세워지는 규모 있고 화목한 공동체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여러 면에서 병들어 신음하고 고통하고 있다. 개인의 선택권과 행복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낙태, 증오심에 찬 좌우의 분열과 갈등, 무너진 공의와 혼란, 개인주의와 탐욕주의의 만연 가운데 탈북민이나 이주민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소외 등으로 병들어 신음하고 고통하는 사회에 설 명절에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생명의 공동체로서 건강한 가정의 모습은 한줄기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다.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20-01-14
  • 한국교회여! 하나님 앞으로 나가자
      요즘 세상이 참 어수선하다. 들려오는 소리 소문도 어느 것 하나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은 없는 듯하다. 한일갈등은 갈수록 골이 깊어가는 것 같고, 여야 갈등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거 같다. 오랜 우방 국가를 자랑하던 미국과의 관계도 진심이 아니었던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그런데 가장 우리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것이 있다. 이런 세상의 풍조 속에서 교회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빛을 비추며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할 교회가 빛을 잃은 느낌이다. 목회자들도 흔들리고 있는 것 같고, 교회 교인들 역시 제각각이란 생각이 든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능력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 것일까? 예수님이 오늘 우리의 현장 속에 오신다면 어느 편을 들 것인가? 어떤 하나의 이슈가 수면위로 부각되면 국민들은 광화문파와 서초동파로 나뉜다. 법원 앞 큰 길을 중심으로 이쪽과 저쪽에서 다른 목소리를 높이며 서로 대립하기에 바쁘다. 교회 역시 방향을 잃고 좌우로 나뉘어 있다. 우리 예수님은 누구의 편을 드실지가 궁금해진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던 때의 이스라엘은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주권을 잃고 로마의 지배를 받아야했던 시기였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로 나뉘어 있었고, 종교지도자들과 죄인들로 구분이 되어있던 시기였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향해 말씀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친구로 오셨고, 그래서 그들을 위로하셨지만 그들의 삶이 옳다고 편을 드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셨다. 진짜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전하셨고, 그 말씀을 듣던 대중들은 좌파나 우파로 나뉜 것이 아니라 권세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좌나 우보다 더 중요한 세상, 더 가치 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복음의 능력이 되어 세상 속에서 복음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어둠의 세상을 밝히기 시작했고, 130여 년 전 어둠 가운데 있던 이 땅에도 비취게 되었다. 일제의 억압 속에 있던 이 땅에서도 그 복음의 빛은 희망이 되었고, 그 빛을 따라 오늘의 대한민국이 형성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복음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희망의 등불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주변 상황이 어두워졌다고 생각되면 불을 밝히면 될 일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복음의 불을 밝히는 것을 잊어버린 듯하다. 아니 복음의 불로는 세상을 밝힐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복음 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목회를 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그 말씀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한 교인이 울면서 나를 찾아왔다. 아들이 무슨 충격을 받았는지 갑자기 청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큰 슬픔에 하염없이 우는 교인 앞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자는 것이었고, 이 교인은 그 말씀에 의지해서 하루하루 성경 필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필사하기를 한 달 가량 했을 무렵 아들의 청력이 회복되는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다. 부도의 위기 속에서 울던 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고 얼마 후 상황이 급반전 되면서 문제가 해결된 교인도 있었다. 이 교인을 볼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오늘 답이 없어 보이는 우리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의 길과 해답이 되심을 고백해야 한다. 복음이 해답이고 기도가 해답이다. 한국교회는 광화문이나 서초동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 성경을 들고 골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도움은 미국이나 일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복음의 능력을 잊지 말자. 기도의 능력을 잊지 말자. /일산광림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12-31
  • 예수의 성육신 따라 바른 성탄 지키자
      2019년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라틴어 ‘Christus’와 ‘Maese’가 합쳐진 말이다. Maese는 로마가톨릭의 미사를 뜻하고, 이는 기독교의 예배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날을 기념해 예배를 드리고 서로 축복한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세계적인 종교로 도약한 로마시대의 이교적 풍습 태양절 축제가 그리스도 축제로 변모된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 확산 위해 ‘태양절’을 ‘예수 탄생일’로 바꾼 것이다. 1년 중 가장 큰 축제였던 태양절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날로 정하면 로마제국에 더 많은 기독교적 정서를 불어넣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지중해 연안의 로마에서 12월은 가장 나쁜 절기이자 가장 좋은 절기였다. 해가 짧아져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시기였고, 당연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시기이기도 했다. 태양의 신 미트라가 동지까지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숨기다가 그 다음날부터 다시 더 드러내는 날을 태양절로 정해 축제를 열었다. 태양절이 예수 탄생일로 바뀜에 띠라, 수많은 대중들은 당시의 로마가톨릭 전통에 따라 미사에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였다.   이러한 이교도의 태양신 절기인 크리스마스가 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성육신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었다. 태양신 절기는 기독교 신앙에 의하여 녹여 졌다. 태양신이란 자취는 없어졌다. 기독교는 자유케하는 복음의 능력으로 이교도의 절기인 형식에 메이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기독교의 비주류 종파인 메노파에서는 주류 기독교가 로마의 태양절을 성탄절로 정했다고 주류기독교가 우상숭배를 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메노파의 비판은 복음의 자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절기에 고착하기 때문에 나오는 헛된 공론이다.   크리스마스때 등장하는 선물 갖다주는 산타클로스는 고향인 북극에서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전 세계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빨간 옷을 입은 좋은 할아버지다. 이것은 네덜란드어 ‘Sinter Klaas’에서 유래되었다. 산타클로스 신화는 3세기 실존했던 터키의 수도사 성 니콜라스에서 기원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니콜라스는 상속받은 재산을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빈곤한 자들을 돕는 데 일생을 보냈다. 그리하여 니콜라스는 선물과 너그러움, 그리고 넉넉함의 상징이자 신화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성 니콜라스의 날(12월 6일) 풍속에서 쿠키와 사탕을 받기 위해 신발을 깔아놓는 풍습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성 니콜라스의 네덜란드어 ‘신터 클라스’가 18세기 이후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주해온 네덜란드 사람들을 통해 미국에 퍼지면서 산타클로스가 된 것이다.   산타클로스는 20세기 대량소비·대량생산 자본주의 사회로 탈바꿈한 미국의 크리스마스 풍습과 결합되며 전 세계로 확산됐다. 오늘날 성탄절은 그 본래적인 의미가 상실되고 세속적인 쾌락과 자유방종의 소비와 향락의 날로 변질되었다. 인류대속을 위한 구세주가 나신 날은 즐거운 날임에는 틀림 없으나 경건, 헌신, 절제는 없어지고 마냥 즐거움, 쾌락과 선물 나누기, 대량 소비, 연인 만나기 등 낭만의 절기로 변질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정부는 NAP정책으로 오늘날 서구사회의 풍조에 그대로 휘말리고 있다. 이때 한국교회는 동성애 대책 협의회를 만들어서 세속적 쾌락 흐름에 역행하면서 서구의 동성애 흐름을 차단시키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것이다. 올바른 성탄절 지킴이란 세상의 죄를 대신지기 위하여 이 세상에 들어오셨으나 이 세상에 동화되지 않으시고 이 세상을 변혁시킨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하나님 아들의 낮아지심과 자기 비우심의 그 정신과 의미를 다시 살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학술원 원장·숭실대 명예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19-12-18
  • 성탄 설교, 별미를 준비하라
      설교학 시간에 학생들에게 설교자에게 가장 어려운 설교본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요한계시록입니다’ ‘다니엘서입니다’ ‘비유본문입니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다른 의견은 없나요?’ 마감용 멘트를 날리자마자 교실 뒤편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들여왔다. ‘너무 잘 알려진 성경본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이 설교하기 가장 힘듭니다’ 와! 내가 기대했던 대답을 여기서 들을 줄이야! 성경 어느 것 하나 부담되지 않는 본문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설교자를 당혹게 하는 구절은 너무나 잘 알려져서 설교 전에 이미 회중이 설교의 메시지와 전개방향을 다 예측하는 본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설교하기 가장 힘든 성경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오랜 목회경험을 지닌 설교자들은 절기 설교가 또 하나의 정답임을 잘 알고 있다. 부활절, 성탄절, 추수감사절 등 절기 자체가 지닌 의미와 성격은 이미 회중에게 노출되어 있고 또 설교자는 절기 본래의 특성을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절기 설교는 힘들다. 겉으로는 미소를 머금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지만 설교자의 마음은 편하지 않다. 매주 설교마다 홈런을 쳐야겠다는 의욕을 불태우지만, 성탄 설교를 앞두고는 삼진만 먹지 않으면 좋겠다는 소심으로 전락한다. 또 어차피 회중 역시 성탄절이 갖는 축제적 분위기에 취해 설교에 큰 기대를 갖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자위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바로 잡아야 한다.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치고 삼진을 작심하는 자가 없다면 역설적으로 어떤 설교도, 어떤 설교자도 홈런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님 말씀이 무능하단 말인가! 어느 설교자가 능력의 말씀을 무능의 말씀으로 바꾸길 원한단 말인가!   성탄설교의 홈런은 성탄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날! 하늘 하나님이 절망의 땅에 하늘의 생명을 입맞춤 한 날! 죽음의 불가능에 생명의 가능을 열어 놓은 날! 피해자 하나님이 가해자 인간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 미신 날! 하나님이 인간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은 날! 죽음에 갇힌 동질의 생명의 이질이 파입한 날! 전능자 하나님이 무능자 인간을 도운 날! 죽음의 땅에 하늘의 평화가 임한 날! 이것이 성탄의 의미이다.   현실적으로 성탄절은 기독교 최대의 축제절기이다. 많이 시들해졌다 해도 여전히 많은 교회에서 성탄절 이브에 성탄축하 교회학교 발표회를 갖고 한동안 뜸했던 새벽송도 다시 고개드는 분위기이다. 그런 들뜬 분위기가 정작 성탄 당일 예배에는 묘한 피로감과 함께 큰 기대감 없는 잔칫집 인사말 정도의 기대를 설교에 넌지시 요구하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속에 위에서 언급한 성탄의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축제분위기에 필요한 것은 축제에 걸맞는 설교이다!   예를 들어 만일 성탄당일 예배에 많은 순서가 들어 있다면 그래서 설교가 시간적으로 충분히 보장되지 못한다면 설교자와 성도가 함께 참여하는 교독식 설교를 시도해 봄직하다. 성시교독하듯 스크린에 설교문을 설교자와 회중이 번갈아 교독하는 형식으로 띄워놓고 교독으로 설교하는 이 형태는 미국 테네시주의 제일 장로교회에서 목회하는 레이 다이크스목사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간략하면서도 회중이 함께 동참한다는 점에서 큰 유익이 있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성탄과 관련된 찬송가 한 장을 택해 가사에서 메시지를 추출하고 설교 전개 시에 노래 부르기, 악기연주, 가사낭송 등을 설교 중간중간 배치하며 설교를 진행하는 찬송설교는 회중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성탄설교로서 매우 적합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성탄은 축제이다! 축제의 의미를 놓치지 않으면서 축제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는 ‘별미’ 설교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리되면 절기설교를 누가 뻔하다 하겠으며 어느 설교자가 어렵다 하겠는가?  /서울신대 설교대학원 원장
    • 오피니언
    • 정론
    2019-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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