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12-0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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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의 바람직한 사명과 역할
      반세기 남짓 동안 기독교계 언론의 사명을 감당해온 기독교신문의 창간 54주년을 축하드리면서 이 뜻깊은 날에 앞으로도 변함없이 힘써 실천해야 할 바람직한 언론의 사명과 역할을 되새겨 보고 새롭게 다짐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언론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에 이은 제4부라고 불리울 정도로 국내외적으로 참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줄 뿐 아니라, 정론직필을 통해 권력의 오남용과 공직자의 부정과 부패를 방지하는 감시기능과 국민의 통합과 사회발전을 선도하는 기능 등도 감당하고 있다. 특히 교계언론은 하나님 말씀의 터 위에서 하나님 나라 확장과 선교기능까지도 담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언론이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여러 면에서 큰 기여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언론이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언론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국가에서는 언론의 순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역기능도 있다. 수많은 언론매체들로 인해 연예인이나 인기인들의 주변 잡담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매체들의 다양한 특성과 이념들로 무장된 다양한 주장들로 인해 혼돈과 갈등의 파고는 높아만 가고 있으며, 자기중심적 사고와 이기적인 관점에서 형평성과 균형감각을 벗어난 일방통행식의 비난과 비판의 기사만 쏟아냄으로 인해 긍정과 사랑과 감사는 사라지고 부정적 사고와 불평, 갈등만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편리하고 발전된 나라에 살면서도 감사를 모른 채 지옥 속에서 사는 것처럼 불평과 불만, 혼돈, 대립, 갈등 속에서 헤매고 있다.   그러므로 언론은 이런 역기능들로 인한 문제들을 인식하면서 순기능의 역할과 사명을 더욱 잘 감당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특히 기독교계 언론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관점에서가 아니라 성경적 관점에서 비판할 것은 날카롭게 비판하여 비성서적인 이단 집단이 이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소수인권보호, 민주, 차별금지, 선진이란 미명 하에 확산되어지고 있는 동성애 등의 온갖 죄악과 불법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차단해야 한다. 동시에 기독교 자체의 연합과 갱신을 위한 방법을 찾고, 바른 방향을 제시하려는 노력도 끊임없이 경주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선행과 좋은 것은 적극 알리고, 사랑으로 덮을 것은 덮고, 선도할 것은 선도해가면서 교계와 우리나라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만들도록 최선을 다해야한다. 선행과 미담들이 잘 보도되면 선행과 옳은 일을 자신도 행하고 싶은 선한 의욕과 목표가 생겨나게 되며, 보다 더 밝은 세상, 사랑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가게 될 것이다.   반대로 좋은 일은 보도되지 않고 좋지 못한 일만 보도된다면, 교계와 사회를 어둡게 만들며, 죄와 악과 불법에 대한 경각심이 약화되고, 너무 쉽게 죄악을 범하는 세상이 되고, 미움이 사랑을 이기고, 악이 선을 이기는 살벌한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언론은 사랑과 미움, 빛과 어둠,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 속에서 미움과 어둠과 악을 하나님 편에서 날카롭게 비판하되 더욱 사랑과 빛과 선의 횃불을 더욱 높이 들어서 더욱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노력을 기독교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중단없이 계속해야 한다.   54년 동안이나 기독교계 언론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달려온 기독교신문이 계속 언론의 바람직한 사명과 역할을 잘 감당해감으로 교계와 우리나라의 발전에 앞장서는 언론이 되기로 새롭게 다짐하는 창간기념일이 되길 바란다. 성은 중 기독교신문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한국사회발전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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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2-04
  • 대림절에 이웃 돌보는 교회가 되자
      매년 대림절의 시작과 동시에 각지에서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진다. 모두가 설레고 행복해야만 하는 이때 낭만과 설렘이 아닌 추위와 배고픔을 상대해야만 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몸까지 허약하여 추위를 감당하기 버겁기 그지 없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좌절을 언제나 지켜봐왔다. 가슴 아픈 현실이다.   우리가 연탄은행과 무료급식, 노숙자쉼터 등을 통해 이들을 돕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삶이 나아지기는 하는 것일까란 질문은 언제나 머릿속을 맴돈다.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을 만큼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우리 단체이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우리의 이웃들은 여전히 춥고 배고프다. 거기에 심적인 좌절감과 외로움까지 더해 그들은 대림절의 시작에 감사할 여유가 없다.   예수께서 춥고 배고픈 자들을 건져내시기 위해 오신지 2천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왜 우리의 이웃들은 이토록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일까. 예수의 정신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이리도 넘쳐나는데 왜 아직까지도 기본적인 삶의 필요조건조차 결여한 삶의 양식이 존재하는 것일까. 평생을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하며 여전히 이러한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림절의 시작은 예수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게 만든다. 예수께서 살아계시던 그때도 가난한 이들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예수께서 그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셨던 것처럼 우리도 대림절을 맞아 그들이 아무런 추위와 배고픔 없이 이 겨울을 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예수의 다시 오심의 의미 아니겠는가. 소외된 이웃들이 더 이상 변두리에 치워지지 않는 사회를 기다리는 것이 대림절의 의미 아니겠는가.   우리는 마냥 기다릴 수 없다. 우리는 기독교인이고 예수의 제자들이다. 우리는 예수의 다시 오심을 우리 손으로 이뤄내야 한다. 예수가 그랬듯 가난한 이들을 찾아 섬기고 먹이고 위로하며 함께해야만 한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이요, 대림절과 성탄절을 맞이하는 자세다. 우리가 연탄을 나르고, 밥상을 나누는 일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우리의 일이 대수로운 것이 되어버리는 사회라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절실히 회개해야만 할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인간됨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인간됨의 길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으로써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을 염려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들이 어디 있겠는가.    얼마 전 미국에서 유학 중인 학생들이 밥상공동체를 찾아와 연탄배달을 한 적이 있다. 봉사활동을 마치고는 매년 오겠다고 약속했다. 아픔의 현장,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고국의 현장에서 흘린 땀방울을 통해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봉사활동은 이웃을 돕기 위해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 별나지 않는 지혜를 교회들이 깨닫길 바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깨닫길 바란다. 나눔은 받는 이의 즐거움보다 주는 이의 즐거움이 더 크다는 사실을. 받는 이가 느끼는 행복보다 주는 이가 느끼는 행복이 훨씬 크다는 것을.    교회들이 이번 대림절을 맞아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길 당부한다. 물론 교회들은 잘하고 있다. 어느 단체보다 열심히 구제사역을 감내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다. 이리도 교회는 많은데 이리도 춥고 배고픈 이들도 많으니 말이다. 더 열심을 내자. 이번 겨울에는 춥고 배고픈 이웃이 없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선포되는 대림절기를 맞이할 수 있길 기도한다. /밥상공동체 연탄나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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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8
  • ‘생명나눔’은 ‘건강의 복’을 나누는 방법
      필리핀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하고 싶은 일에는 방법이 보이고, 하기 싫은 일에는 변명이 보인다’ 지난 29년 동안 사랑의 장기기증운동을 펼치면서 이 속담의 깊은 뜻은 이해할 수 있었다.    1991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타인에게 신장 하나를 기증하며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을 시작했을 때에는 누가 그토록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남을 위해 나누겠냐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이들도 많았다.   처음 반응을 듣게 됐을 당시 낙담하며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장기기증’이 제게는 너무도 간절한 사명이었기에 국내에서 생명나눔 운동을 활성화시킬 방법에 대해 밤낮으로 고민하며 기도했다. 그 결과 주님의 은혜로 지금은 140만여 명이 장기기증 희망 등록에 참여했고, 96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타인을 위해 살아서 자신의 신장 하나를 기증했다.   지난 10월 10일, 인애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구신용목사가 60대 만성신부전 환자를 위해 신장 하나를 기증했다. 사실 구 목사의 기증에 앞서 2006년 아내인 홍선희사모가 먼저 신장 하나를 기증했다.    지난 2006년 부부 모두가 알고 지내던 지인이 신장이 망가져 혈액투석을 하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그때 구목사는 자신의 신장 하나를 기증하려 했지만, 혈액형이 일치하지 않는 등의 사유로 기증이 불가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생명나눔이 무산될 수도 있었지만, 홍사모가 용기 있게 나서 구목사 대신 자신의 신장 하나를 지인에게 기증했다. 그로부터 13년의 시간이 흘러 구목사 역시 자신의 신장 기증의 결심을 지키기 위해 수술대에 올랐다.    구목사의 신장을 이식받은 이는 60대 남성으로 인생에 절반 가까운 세월을 투병하며 육체적, 경제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던 환자였다. 29년 투병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혈액투석 치료를 받으며 이 환자는 ‘꿈만 같은 일’라며 ‘받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겠다’라는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이 부부가 생명을 나누는 용기를 선뜻 낼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 바로 자신의 건강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채워주신 복이라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건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에서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다. 내 의지, 내 수고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으로 인해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고 믿고, 작은 일상 가운데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작은 일상조차 누릴 수 없는 환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눈에 보기에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서 부자가 아니다. 비록 재산이 많지 않고 누추한 곳에서 생을 이어갈지언정 지금 이 순간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허락한 환경 가운데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립보서 4장 19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부족함 없는 사랑을 베풀고 채워주신다.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무고한 죽임을 감내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눌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변명이 아닐까.   주님께 받은 사랑을 나누는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돈이 없어도, 시간이 없어도 우리 생의 마지막 순간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나누며 이웃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우리가 주님께 받은 건강의 복을 떠올리며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을 위해 생명나눔 운동에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의장기기증 운동본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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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1-14
  • 마음과 말과 시가 익어가는 가을
      작자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다시 읽고 싶은 가을이다. 이 한 권의 책은 인생의 가치와 사랑의 미학으로 녹아 있다. 어쩌면 번역가 ‘아낌없이’ 라는 단어를 추가하여, 독자가 이미 다 알 수 있는 감정을 하나의 열매로 제시했기에 더 잘 그렇게 동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벚꽃의 축제 같은 인생도 아름답고 한 여름 녹음이 주는 청량감 같은 인생도 아름답지만 역시 참으로 좋은 건 안식을 가져 다 주는 가을같은 결실의 삶이다.   무엇이든 감사로 맞이하면 상처로 시름시름 앓는 마음보다는 평안의 열매를 얻을 수 있어 좋다. 미움의 가시대신 용서하는 훈련을 하다보면 인격의 품위로 요동치는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성경은 쓸모없는 말을 ‘가라지’라고 한다. ‘한담’은 우리의 속을 비게 하고 공허하게 만든다고 경계하고 있다. 속에서 익히고 삶으로 살아내지 않는 언어는 바람같이 공허하다. 느끼고 체험하고 살아낸 말만이 생명의 씨앗이 되어 누군가의 가슴으로 날아가 치유가 되고 사랑으로 깨어난다. 이런 힘을 가진 사람이 딱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그를 구주로 믿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말과 삶과 가슴과 영혼이 하나에서 나온 말의 씨는 부족하다. 어디선가 들은 것, 정보를 통해 값없이 얻어낸 것, 신기하고 재미있는 말거리들로 무성한 잎사귀처럼 생명 없는 말이 너무 난무하다. 지금은 과연 정보의 시대로 언어가 소통하는 길이 사방에 열려있다. 그 통로로 언어는 오염되고 생명을 앗아만 간다. 누가 이 소통의 통로를 단절할 수 있겠는가? 누가 이 한담을 금할 수 있는가? 마음으로 낳은 언어만이 생명을 낳고 날아가는 대로 생기가 되어 줄 것이다. 원래 말은 생기였다. 살리는 것은 말이었다. 말이 회복되는 언어의 가을이 오길 모두 지금은 바라고 있다. 말의 열매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한담을 그치라 하셨다. 가장 좋지 못한 상황이 바로 이 말이 만들기 때문이다. 새끼 빼앗긴 암곰, 미련한 자, 조급한 자 중에서 어떤 경우를 가장 최악이라고 볼 수 있을 까? 성경은 가장 최악의 상태를 조급한 사람이라고 한다.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분노는 사람을 남김없이 태울 것이다. 그런데 분노보다 더 불행한 일은 미련한 자를 만나는 일에 있다. 왜일까? 오만 불손과 교만의 상징이요 심판과 멸망의 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조급함이다. 때로는 이 조급함이 일을 성사시키기도 하고, 속도감이 있어서 민첩해 보이기도 하고 꼭 필요한 인품 같기도 하다. 그런데 성경은 분노하는 사람보다, 미련한 사람보다 가장 최악의 상황이 바로 이 조급한 사람에 있다고 한다.   생산한 것이 아닌 얻은 것으로는 배부를 수가 없다. 들은 것은 지나가고 나의 인격을 조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체험하고 고통과 눈물 속에서 얻고 배운 말들은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에도 살아 있고, 상대방으로 풍족함을 누리게 할 뿐 아니라 진심을 느끼고 마음을 나누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인사를 받아도 여전히 마음이 배고픈 것은 죽은 언어가 많기 때문이다.   언어의 가을이 온다면 언어가 익어가는 소리 가득히 우리의 혀는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완전한 말을 얻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는 가을을 맞이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고통 속에서 배운 감사라는 진심어린 말 하나를 일상에 심어본다. /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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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1-07
  • 청교도운동 본받아 교회를 개혁하자
      청교도 운동은 철저한 개혁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일어난 교회 갱신운동이다. 그것은 건전한 신학과 윤리적 삶을 강조하는 이론적이며 도덕적 운동인 동시에 뜨거운 종교적 감정과 체험적 신앙을 강조한 영적 부흥운동이었다. 청교도주의, 곧 청교도 정신이란 독실한 신앙적 태도, 부패된 것을 정화시키려는 문화적 힘, 그리고 지성, 도덕적으로 엄격한 것을 말한다.   청교도 운동은 프로테스탄트교회 개혁 목표의 원형이다. 그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 18세기 복음주의 부흥운동이요, 그 후예들이 현대 복음주의자들이다. 그렇다면 청교도 운동의 특징은 무엇인지 알아보고 반성해보면 한국교회의 개혁운동에도 큰 빛을 더해줄 것이다. 첫째, 성경 중심주의이다. 청교도들은 성경을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주권적 계시요,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그것에 절대성을 두었다. 따라서 성경을 교리나 신앙만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들은 성경에 개인, 교회, 사회, 정부에 대한 필수 지침이 담겨져 있다고 믿고, 성경의 말씀을 모든 분야에서 실천하려고 했다. 즉 자신들이 이해하는 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삶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다.   둘째, 철저한 개혁에 대한 열망이다. 청교도 운동은 미흡한 종교개혁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프로테스탄트 교회에는 아직도 로마 가톨릭적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을 일소하여 교회를 정화하고자 일어난 것이 청교도 운동이다. 청교도들은 예복과 예배의식 같은 실제적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본질과 같은 교리문제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와 영국교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교회를 철저히 개혁하려 했다.   셋째, 지성에 대한 존중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 특히 지적 엄밀성을 강조하는 개혁파 교회 전통을 이어받아 한결 같이 지성을 존중한 것이 17세기 청교도들의 특징이었다. 청교도들은 고도로 학식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많은 교육을 받은 계층들이었다. 그들은 기독교적 지성을 계발하는데 열심이었으며 방대한 양의 경건 서적과 자료들을 만들어 냈다.    청교도들의 시각은 포괄적이었다. 그들은 종교적 탐구와 삶을 분리하거나 종교적 탐구에서 비 교회적인 문제들을 배제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기독교적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이러한 특징은 종교개혁의 신학과 세상에 대한 포괄적 시각을 결합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넷째, 엄격한 규율과 도덕율에 대한 중시다. 청교도 운동은 윤리적 삶에 관심을 두는 도덕 운동이었다. 청교도들은 구약 율법의 실제적 적용을 강조한 반면,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보는 도덕 폐기론을 반대했다.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은 율법에 대한 복종을 포함한다. 또한 청교도들의 깊은 관심사는 성화와 경건의 추구였다. 그들은 청빈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으며 사회와 국가를 도덕적으로 정화하려 했다.   다섯째, 영적 체험주의이다. 청교도 운동은 건전한 신학과 윤리적 삶뿐만 아니라 종교적 감정과 경험을 강조했다. 청교도들은 체험적 신앙을 중시하여 중생을 하나님의 선택의 표준으로 간주했다. 청교도 신학의 중심 주제는 중생이었다. 특히 그들은 평범한 스타일의 설교를 통해 대중들에게 회심을 열정적으로 호소했다. 청교도들이 신비체험을 강조한 것으 이런 영적 체험주의의 결과였다. 한국교회가 사회 저변에서 신뢰를 잃고 있는 현 시대에 종교개혁의 불씨를 되살리길 기대한다. /전 서울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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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30
  •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많은 이들은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의 정문에 내붙인 사건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됐다고 알고있다. 한국에서는 루터가 촉발한 개혁의 종교적인 부분에 무게를 두어 ‘종교개혁’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원래는 ‘종교개혁’이 아니라 그냥 ‘Reformation’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의 요구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근래에는 검찰 개혁과 언론개혁에 관한 국민들의 열망을 뜨겁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사회개혁을 말하기에 앞서 그 출발점인 교회의 개혁, 신앙의 개혁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루터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부패에 저항하고 갱신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늘 자신의 신앙 문제로 인해 심한 내적 갈등을 경험했다. 그 대답이 무엇인가? 루터는 매 순간 오직 하나님 말씀에 매달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종교개혁의 출발점인 95개조 논제의 핵심은 1조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회개하라’(마태복음 4장 17절) 명하실 때, 그 회개는 우리의 전 삶이 돌아서는 것이다”   루터는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루터가 말했던 바와 같이 과연 오늘날 한국교회는 항상 개혁이 진행되고 있는가? 그래서 한국교회가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연합단체장인 A목사의 언행들은 사회의 지탄을 받으면서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는 수년간의 논의 끝에 많은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명성교회 부자 세습을 용인해주는 수습안을 통과시켰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일들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한 결과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결과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득권을 누리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나타난 결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한 진리보다는 가족의 이익과 조직의 이익을 구한 결과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모습 앞에서 우리가 진정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붙잡고 회개하는 일이다.   회개한다는 말을 여러 가지 의미로 정의할 수 있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이다. 설교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되어 선포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씨름하며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손쉽게 남의 설교를 표절해서 전하는 목사님들도 있다. 교인들은 목사의 말이라면 아무런 의심 없이 그저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다. 그렇기에 오늘한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을 먹고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웃에게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주며 살라고 하셨지만, 한국교회는 돈과 권력과 지위를 구하며 살고 있다. 진실로 한국교회의 회개가 필요한 이유이다.   루터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았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교황에게 저항할 수 있었고 교회를 개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정신이 ‘오직 성경으로’이다. 오직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고 출발점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다시 그 출발점에 서야 한다. /루터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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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23
  • 루터의 정신따라 문서선교 나서자
      10월 종교개혁의 달이다. 루터와 종교개혁에 대해서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오늘은 루터의 성경번역과 종교개혁을 완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쇄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필자는 오래전에 독일의 종교개혁 성지를 여행한 경험이 있다. 그때 발트불그 성을 방문했었다. 아이제나크 시내가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그야말로 그림같이 아름다운 동화 속의 성같은 곳이다. 바로 이곳이 루터가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한 그 역사적인 현장이다. 만약 루터가 적대자들에게 쫓겨 이곳으로 피신하지 않았다면 성서는 독일어로 번역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 갇히는 신세가 됨으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말로 성서를 읽게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루터를 이곳 발트불그 성에 가두어 놓았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 그 비밀의 섭리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안내원의 인도에 따라 루터가 성서를 번역했다는 바로 그 방으로 갔다. 그리 크지 않은 방으로 6~7평 정도 돼 보이는 방이었다. 나무로 된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옆에 창문이 나 있었다. 아마도 루터는 이 책상에 앉아서 기도했고 성서를 번역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답답하면 창문을 열고 발크불그성 주변의 숲과 저 멀리 아이제나크 시내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하게 된 그 환경을 오히려 성서를 번역하여 인류 사회에 공헌하는 기회로 역전시킨 루터의 멋진 뒤집기 한 판 승부가 가슴 뿌듯한 인생 드라마로 가슴속에 다가옴을 느꼈다. 지금도 그때 그 가슴에 벅차오르던 감격이 생생하다.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는 무엇일까? 당시의 성서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소수의 성직자 외에는 성경에 대한 접근은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또한 성서에 대한 해석권한도 교회 즉 교황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당시의 성도들은 사제가 읽어주고 해석해 주는 그 성서만을 듣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반 성도들은 사실상 성서에 대해서는 눈뜬 장님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루터는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독일어로 번역했다. 소수 사제들만의 성경을 일반 대중들에게 돌려준 것이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은 그 어떤 것보다도 위대한 종교개혁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루터의 종교개혁을 보이지 않게 도왔던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인쇄 매체였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1455년 당시 독일 남서부 마인츠라는 도시에서 가동되기 시작했다. 50여년 뒤에는 독일의 60개 도시와 유럽의 12개국에까지 보급되었다. 이 인쇄기 덕분에 일반인들도 관심거리를 신속히 대량으로 접할 수 있었다. 지금은 신문이나 방송이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대중 매스미디어가 없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발명되고서 비로소 뉴스의 다중전달이 가능해진 것이다. 루터가 작성한 95개 조항 논제도 인쇄되어 배포되었을 것이다. 교회 개혁 문제는 더는 비텐베르크의 캐슬처치 대문에 붙어있는 종이조각이 아니었다. 그 문제는 광범위하게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종교개혁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바로 인쇄술의 발달이라는 또 하나의 조력자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도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땅끝까지 복음전파라는 주님께서 주신 그 사명을 외면할 수는 없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독일어 성경번역과 당신의 인쇄술이 도왔듯이 오늘 우리들의 복음전파를 돕는 수많이 매체들이 있다. 어찌 이 시대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도구들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 도구들을 활용한 지상명령의 수행은 이제 우리 신앙인들의 몫이다.    /루터회 증경총회장·새길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10-17
  • “살아있는 기독교 문화를 세우자”
      세상사 모든 일들에 목적이 있듯이 교회에도 목적이 있고, 교회의 목적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교인들이 누구인가.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시므로 교회를 세우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교인들과 교회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빛과 소금’이 아니고 ‘소금과 빛’이다.   먼저 교인들과 교회들은 이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인들과 교회들은 기질과 특성이 ‘소금’으로 바뀌어 진 존재들이라고 주님은 말씀했다. 본래는 소금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피와 살로 그 기질과 특성이 ‘소금’으로 바뀌어 진 존재들이라고 말씀했다. 존재에 변화가 일어났을 때 행실과 역할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소금’이 하는 일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썩는 것을 막는 일이다. 생선에 소금을 뿌리면 생선이 썩지 않는다. 무와 배추에 소금을 뿌리면 무와 배추가 썩지 않는다. 소금은 썩는 일을 방지한다. 즉 방부제의 역할을 한다. 두 번째는 맛을 내는 일이다. 생선에 소금을 뿌리면 맛있는 굴비도 되고 맛있는 고등어도 된다. 무와 배추에 소금을 뿌리면 맛있는 김치가 된다. 소금은 맛을 낸다. 세 번째는 스스로 없어지는 일이다. 소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녹아서 없어지고 만다.   세상에 대한 신자들과 교회들의 사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교인들과 교회들은 썩어져 가는 세상과 사회를 위해 방부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세상과 사회는 그 대로 놔두면 썩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들은 맛이 없는 이 세상의 삶을 위해 조미료의 역할을 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삶의 보람과 의미, 재미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소명 의식과 사명 의식을 부여해 주어야 한다. 또한 교회들은 세상의 어느 곳이나 깊이 파고 들어가서 녹아 없어지는 희생의 역할을 해야 한다. 없어진다는 것은 희생을 의미하고 손해 보는 것을 뜻한다. 돈도 손해보고 시간도 손해보고 건강도 손해보고 마지막에는 생명도 손해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교인들과 교회들이 ‘소금’이 되었을 때 ‘빛’의 역할도 감당할 수 있다. ‘빛’이 하는 일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어두움을 몰아내는 일이다. 숨어 있던 더러운 것들을 밝히 드러내는 정화와 청결의 일이다. 둘째는 밝음과 따뜻함을 가져다주는 온화의 일이다. 빛이 비치면 따뜻함과 기쁨이 생긴다. 셋째는 방향을 제시하는 등대의 일이다. 등대의 빛은 배가 항해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세상에 교인들과 교회들의 사회적 책임도 마찬가지다. 교회들은 첫째로 세상의 어두움과 죄악을 드러내고 몰아내는 정화와 청결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어 어둡고 차가운 이 세상에 밝음과 따뜻함의 빛을 비치는 온화의 역할을 해야 한다. 셋째로 혼돈 가운데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안내자의 역할도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교인들과 교회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 중의 하나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선하고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할 일은 소금과 빛이 되어 착한 행실들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는 일이다. 기독교 문화는 우리 사회 전반에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는 기독교인들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세속의 문화가 우리 젊은이들의 사고를 지배할 때 우리 교인들과 교회들이 소금과 빛의 문화를 사회 속에 퍼뜨려야 한다. 세상의 문화가 쫓고 있는 썩고 음침한 것들을 정화하여 십자가가 드러나는 영생의 빛을 소개해야 한다. 기독교 문화는 세상에 맛을 내고 빛을 더하는 역할을 감당해내야 한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강변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10-02
  • 정의를 부도내지 말자
    과거 미국 오바마 정부가 부도날 뻔 한 적이 있다. 미의회는 의회의 합의에 따라서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1시간 30분 앞둔 시점에 셧다운을 끝내고 디폴트를 막기 위한 합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긴장시켰던 미국의 국가 부도 위기는 일단 모면했으며 일시 해고됐던 40만 명의 공무원은 16일 만에 다시 일터로 돌아가게 됐다. 문을 닫았던 연방 정부 기관들은 17일부터 다시 문을 열고 정상업무에 들어갔지만 2주가 넘는 셧다운의 피해액이 약 25조 7천억 원에 달하게 됐다.   세상은 신용사회다. 부도를 내면 안 된다. 79년도에 미국에 처음 가서 신학교도 다녀야 하고 교회일도 돌보아야 할 것 같아 중고차를 사려고 자동차딜러에 가서 차를 고른 뒤 계약금을 조금 내고 나머지 금액을 융자하려고 하니 크레딧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여 친구목사가 대신 보증을 서서 자동차를 산 기억이 난다. 미국은 신용사회여서 크레딧이 없으면 아파트도, 자동차도, 심지어는 전화도 놓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오래전 뉴스를 보니 신용에 신용을 가져야할 미 연방 하원의원들이 작게는 수십장에서 많게는 700여장까지 개인수표를 습관적으로 부도내어 은행들을 골탕 먹였다니 미국의 양심도 이제는 부도나기 시작하였는가 보다. 금융가의 부도, 정치인의 부도 등 여기저기 부도로 인하여 국민들이 불안해지고 있다. 이것은 돈의 부도가 아니라 양심의 부도인 것이다.   일찍이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은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D. C. 링컨 메모리얼 기념관 앞에서 열린 흑인 노예해방 100주년 기념대회에서“나는 한 꿈을 가지고 있다”란 명연설을 했는데 그는 그 연설 중에서“나는 나의 네 자녀가 언젠가는 피부 색깔에 의해 차별받는 그런 세상이 아닌 성숙한 성품에 따라 대우받는, 그런 세상에서 살 것을 꿈꾸고 있다”고 절규에 가까운 호소를 했다. 또한 킹목사는 자유를 위해 같이 투쟁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고통을 나누고 같이 감옥에 가면 어느 날인가 우리는 자유를 쟁취하게 될 것이며 그 자유의 종소리가 이 마을과 저 도시에 울려 퍼질 때 흑인과 백인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개신교와 천주교인이 손에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드디어 자유를”이란 영가를 부를 것이라는 간절한 꿈을 갖고 투정했는데 막상 헌법을 통해 자유를 얻고 보니 그것은 부도난 수표였다는 것이다.   법은 있는데 적용이 안 되고 외모는 있는데 알맹이가 없어 찾아 쓸 수 없는 부도난 수표만을 받았다고 통탄한다. 정치인이 선거철에는 공약을 하고 그리고 어느 정도 되면 그 공약을 부도낸다. 사업가가 국민의 유익을 위해서, 민생을 위해서 사업한다고 말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 말은 사라지고 개인 이익에 취하여 그 말을 부도낸다.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은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필요충분의 조건일 수밖에 없겠지만 국가를 경영하는 한 리더의 결정의 관점에서 보면 또 하나의 부도일 수밖에 없다. 교수들의 서명운동과 서울에 있는 명문대생들의 촛불시위 그리고 야당 의원들의 삭발을 허투로 봐서는 안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아담의 후손이다. 우리 속에는 탐심과 거짓과 시기와 질투가 자리 잡고 그리고 밖으로는 정의와 공의와 진리를 추구하고 있지만 실상은 본질적으로 죄의 속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나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도를 고의적으로 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 더 주님을 가까이하고 성령으로 거듭날 때 우리는 좀더 이 세상을 밝게 할 수 있는 정의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은혜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9-25
  • 고향교회와 하나 되는 한국교회
      얼마 전 민족의 명절 한가위를 맞아 기쁜 마음을 한 아름 안고 고향을 찾아온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추석은 한마디로 ‘민족의 대이동’이라 불릴정도로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았다.오늘날 명절 풍속도는 과거와 사뭇 많이 바뀌었지만, 온 가족이 한곳에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며 정을 나누는 일에는 변함이 없으리라 본다. 어린 시절 한때로 기억하기에는 우리네 고향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세월의 미동 없이 우리를 반겨주는 고향의 존재는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 얼마 남지 않은 안식처이다. 그리고 고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는 유전적 가족만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가족인 교회가 고향에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산업사회에 진입하면서 일어난 도시 집중화 현상은 고도성장 시기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귀농·귀촌 문화가 조금씩 퍼지고 있지만, 일자리와 양질의 교육을 찾고자 대도시로 몰려드는 젊은 사람들의 행렬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렇기에 학교를 끝마치고 풀밭을 뛰놀던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고 예수님 말씀을 가르치던 주일학교도 문을 닫는 일이 지금 우리네 고향의 현실이다. 이는 고향교회가 처한 위기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임계점이 넘어버린 것으로 교인 수의 회복을 넘어 교회 생존을 염려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고향교회의 현실이다.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교회만이라도 이 사회가 돌보지 못하는 저 고향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면 고통을 호소하며 삶을 지탱하기 버거워하는 우리의 고향을 돕는 일에 힘써야 한다.도시교회처럼 우리가 자주 찾아가지는 못할지언정 고향교회를 지키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서 있는 자리 또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리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할 영적 공간임을 잊어선 안 된다.이 공간을 채우고자 오랫동안 명절마다 고향교회 방문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해왔다. 오랜 울림이 한국교회에 전달되었는지 많은 이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 감회가 새롭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 구성원 모두가 지속적으로 고향교회를 위해 부단히 움직여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고향교회를 위한 헌금문화 정착을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바이다.미국사회에선 유고 시 가족들에게 필요한 만큼 재산을 남겨주고 남은 재정을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다니던 교회에 상속하는 문화가 있다. 그저 부모님과의 추억을 상기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교회를 돕기 위함 때문이다. 또한 소득 일부를 고향교회에 매달 보내기도 하기도 한다. 비록 몸은 도시에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존재임을 자각하는 기독교인들이 뜻을 모아 고향교회를 돕는 이 문화는 한국교회가 충분히 본받을만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지금까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 속에서 한국교회가 부흥한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받은 이 축복은 도시에 있는 개교회만을 위함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 공동체 전체에 나누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희망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하나님의 바람에 우리 모두 함께할 때 하나님의 나라에 한 발짝 더 다가가지 않을까. 고향교회를 향한 한국교회의 사랑이 식지 않길 소망한다. /미래목회포럼 이사장·거룩한빛광성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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