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1-17(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정론

실시간뉴스
  • 미래로 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예수정신
         2025년 새해, 을사년은 푸른 뱀의 해라고 한다. 을사(乙巳)는 60간지 중 42번째에 해당하는 순서인데, 청색을 의미하는 ‘을’과 뱀을 뜻하는 ‘사’가 합쳐져 푸른 뱀의 해가 된다고 설명한다. 을사년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으로는 왕규의 난(9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 을사 추조 적발사건(일명 명례방 사건, 1785),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 을사의병(乙巳義兵, 1905) 등이 있다. 모두 이념 갈등이 불러온 가슴 아픈 역사이지만, 지금은 이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념 갈등으로 인한 고통도 있었지만, 온 민족이 하나 되어 화합한 역사도 분명 존재했다. 나에게 가장 인상깊은 노래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조르조 모르더가 작곡하고 그룹 코리아나가 부른, 1988년 서울 올림픽 공식 주제가 ‘손에 손잡고’(Hand in Hand)이다. 나뿐 아니라 88서울올림픽 주제가를 따라 부르며 감동을 느꼈던 순간이 누구에게나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 노래는 온 민족을 넘어서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에 진출하는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한국은 사상 최초의 월드컵 준결승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룩했지만 아쉽게 패하며 3, 4위전으로 향했으나 선수들을 비난하는 팬들은 아무도 없었다. 월드컵 4강까지 진출하는 과정 모두가 우리 민족에게 이미 신화가 된 후였기 때문이다. 이런 화합의 역사는 어느 과거보다 우리에게 깊은 감흥을 준다.    그러나 최근 5년을 돌아보면 전 세계적으로 가슴 아픈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2019년 말 시작된 코로나19는 2020년 3월부터 약 3년 간 전 세계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인 재앙은 정치, 경제, 문화와 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 ‘멈춤’이라는 큰 장벽을 안겨다 주었고, 이 기간 온 인류는 숨을 죽이듯이 살아갔다. 코로나19가 만든 장벽이 사라진 후에도 전 세계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2022년2월24일 발생하여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중동의 한복판이라 부를 수 있는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2023년10월7일 오전 06시 30분에 시작되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랍의 봄 이후 끝없는 내전 속에서 53년 동안 건재했던 알 아사드 가문의 바트주의 시리아 정권은 2주도 안 되는 기간에 주요 도시와 기지들을 빼앗기고, 2024년12월8일 반군에게 수도 다마스쿠스가 함락되면서 완전히 패망하였다. 전쟁과 테러, 내전으로 겪는 육체적·정신적 기근 등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고통은 현재 진행 중이다. 각국의 정치적 불안정은 경제적 빈곤과 식량안보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때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미래의 방향을 어디로 어떻게 설정하고 가야 할까’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교회와 신학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신학적 갈등과 이념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답을 찾는 일’과 ‘기도가 답이다’라는 루터와 칼빈, 리차드 십스가 외쳤던 기도의 신학으로 갈등을 풀어야 한다. 전쟁과 테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욕심’을 버려야 하는 것처럼, 주의 자녀인 우리는 회개하는 자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세상의 비판과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받고 있던 삭개오에게 손을 내밀었던 예수의 정신과 신명기 6장 4-9절의 신명기적 사관,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화합의 세상을 만든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88 올림픽 주제가처럼 ‘손에 손잡고 벽을 넘는 일’이다. 주께서 사랑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죄의 벽’을 허무셨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으로 화합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아프리카미래협회 회장·백석대 은퇴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5-01-14
  • 한국교회의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한국교회는 2025년 어떤 모습을 가질까? 한국교회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새로운 빛의 세계로 나가고 있을까? 우리는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희망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처해있는 어둠과 아픔 그리고 부정적인 전망, 이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 스스로 온전하게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갖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복음의 계시에 남아있다면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암울해 보여도 우리는 확실히 희망을 가질 수 있다. 2025년에는 그런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2024년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교회는 지속적으로 감소 추세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막막하다. 여러 가지 통계들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교회가 처해있는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011년에 국민통계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숫자는 881만 명인데 비해 2020년에는 741만 명으로 무려 140여 만명 16%이상의 감소를 기록하고 있다.    좀 더 최근의 여러 가지 통계들은 이러한 현실의 내밀한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주고 있다.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이 신자의 감소 현상이 주로 20~40대라는 다음 세대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 이후 3040의 현장 예배 이탈 비율이 대략 40%에 이르고 그들 3040중 장차 10년 후 현장예배 이탈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서 그럴수 있다고 대답한 비율이 무려 70%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암울한 현장의 섬뜩한 전망들이 우세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교회를 이탈하고 있는 현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많은 분들이 이 현상에 대하여 다름대로 여러 가지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을 제공하고 있다. 교회의 현재가 어두운 까닭은 교회가 권위주의적이고 지속적으로 상식밖의 일탈 행위를 하고 있으며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하는 비본질적, 자본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뼈아픈 지적은 교회가 자폐환자들처럼 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기준과는 점차 동떨어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여기서 벗어나려는 개선의 징조가 너무 미력하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런 지적을 통해 배워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민주적 자유정신과 그에 부합한 리더쉽, 사회적 봉사를 우선으로 하는 가치 의식을 받아들이고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 부끄럽지만 이제라도 그렇게 해야한다. 얼마 전부터 한국교회는 지속적으로 회개를 말하고 성숙을 위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계속해야 한다! 이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아직 그 진정성을 의심받더라도 계속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것이고 환경도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이제 교회의 본질적 측면을 고려해 보고자 한다. 한국교회와 그 지도자들은 그 중심에 성경적 복음주의에 서 있는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중 일부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가 하면, 이데올로기를 신앙의 표준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중요한 위치에 계신 많은 지도자들이 복음의 절대적 배타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안창호 국가 위원장과 같은 신앙적 단호함이 필요하고 메시지의 선명성이 요청되는 때이다. 세상의 학문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은 기독교적 형이상학의 고귀한 정신이 필요하다. 성령의 지혜로 이해되는 차원 높은 그리스도의 계시의 학문이 요구된다. 이 시대의 정신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깊고, 가장 높은 영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영적 각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지금처럼 성장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나님 말씀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했을 때 그렇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그렇게 될 수 있다.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의 부흥운동이 일어나는 2025년의 한국교회는 그렇게 될 수 있다. 이 세상의 희망이 되는 한국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서울신대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5-01-02
  • [정론] 손님접대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이웃을 돌보고 사랑을 베푸는 일이 그 위력을 다분히 잃어가고 있음을 본다 그나마 손님대접을 중시하는 기독교에서도 진정한 영성의 추구라기 보다는 다소 희석된 경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경에는 나그네를 집에 맞아들이는 게 우리의 중요한 의무이며, 또한 손님도 귀한 선물을 가져온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마므레에서 세 나그네를 영접하여 물과 떡과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고기를 대접하자 그들은 그의 아내 사라에게 장차 아들이 있을 것을 예고했다(창 18:1-15). 사르밧의 과부가 엘리야에게 음식과 거처를 내주자 엘리야는 기름과 양식을 풍성히 채워주고, 과부의 죽은 아들까지 살려냈다(왕상17:9-24).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길에서 합류한 낯선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묵게 되자 그분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떡을 떼어 주었다(눅 24:13-35). 성경은 여러 일화를 통하여 부지불식간 만나는 손님을 대접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교훈을 준다. 손님대접이 중요한 덕목이 되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네게 있는 것 중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라고 질문했다. 여기에는 오직 아무것도 없다라는 한 가지 대답만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일생동안 단 하나의 예외없이 모든 좋은 것들을 은혜로 받았다. 그래서 욥은 내가 이나왔으니 또한 돌아갈것이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욥1:21)고 찬양했다.   조선의27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44세로 주로 종기, 당뇨, 중풍 등의 병을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조선 왕들의 가장 흔했던 사인은 요즈음 질환 축에도 들지 않는 종기였다. 소독약이나 항생제가 없었고, 의료기술이 전무한 시절에 종기는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병이 들면 어떻게 했을까.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에서 감기와 같은 작은 병이면 인내하며 참고, 중한 병에 걸리면 조용히 죽음을 준비한다. 18세기 중엽 유럽에서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경우 백내장으로 진단 받았다. 바흐의 눈을 시술한 치료사는 영국왕 조지2세의 궁정의사인 테일러였지만 그의 의료수준은 형편없었다.    백내장 수술은 혼탁해진 수정체를 제거하고 인공 수정체를 대신 넣는 수술이다. 가열멸균되지 않은 천공용 바늘을 사용했고 수술 후 출혈과 감염이 심각해졌다. 안구에서 시작된 감염증상이 바흐의 온몸으로 퍼지면서 극심한 고열을 가져왔고, 신체기능전반에 이상을 일으켰다. 결국 바흐는 수술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오늘날 우리는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가서 치료받고, 중한 병도 발전된 의료기술로 걱정없이 병을 이겨나간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감사함이 넘쳐나야 한다. 마태복음25장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복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말해주고 있다.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떨고 있을 때 옷을 주었고, 옥에 갇혔을 때 돌보아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준 자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를 지나쳐가는 배고픈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나그네 된 자, 감옥에 갇힌 자, 병든 자들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인식할 수 있다면 모두다 천국에서 칭찬받을 것이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 모두 이런 자들이 주변에 없는 지 살펴보고, 다가가 도움을 주는 일에 능동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전 성신여대 부총장, 미드웨스트대학원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5-01-02
  • [정론] 사랑의 실천에 꼭 필요한 일들은 무엇인가?
       사랑은 이론만도 아니고 실천만도 아니다. 그래서 사랑의 실천이란 말은 아주 기가 막힌 조합이다. 사랑이 실천으로 열매를 맺게 될 때, 꽃이 향기를 넘어서 사람의 마음까지도 움직이는 열매로 결실하게 된다. 향나무는 피톤치드 향기를 내뿜은 나무의 대명사이다. 소나무보다 향기가 진하여 향나무이다. 어렸을 때 붓글씨를 쓰기 위해 벼루에 먹을 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향나무 열매를 빻아 넣고 먹을 갈면 끈끈한 액이 붓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고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는 것을 방지해준다. 향나무 향기가 코끝에 전해지며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향나무가 가장 향기를 많이 품어내는 때가 언제인지 아는가? 장작으로 패어서 아궁이에 태워질 때이다. 자기를 불사르는 그 순간에 향나무는 향기를 온 누리에 널리 퍼뜨린다. 여기서 몇 가지 사랑의 실천에 필요한 일들이 숨어있다.    첫째, 향나무는 향기를 품는 나무이다. 성도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 병 속에 담긴 비밀인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의 향기가 전해지는 곳에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다. 자기의 잔을 비워서 나의 빈 잔을 넘치도록 채워주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본받아서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길을 걸어가는 인생에게 그리스도는 이정표와 같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목표로 해서 살아가는 인생은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고, 이웃에게 물질을 나누는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을 실천한다.    둘째,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자기를 희생할 때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간다. 33년의 짧은 인생을 사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 몸을 찢기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성도를 구원하셨다. 크리스마스카드의 빛이 바래고 성탄절의 주인공이 산타와 백화점 트리로 변질한 시대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림절 네 주간을 지키면서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성도마다 죽기까지 자기를 비우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 사랑의 실천은 구세군 자선냄비에 얼마간의 돈을 넣고 연말연시에 각종 모금회에 목돈을 보낸 대가로 얻은 사랑의 열매를 상징하는 배지를 양복에 달고 크리스마스 쌀을 사서 더는 연하장을 보내지 않기에 그냥 서랍에 처박아 두는 것을 넘어서 내 손과 발이 사랑의 마음에 이끌려서 사랑의 쌀 나누기와 사랑의 김치 나누기와 얼굴에 검은 칠을 하면서 연탄을 나르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날마다 이어져야 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런 질문이 구체적으로 나의 머리와 생각에서 마음의 길을 따라 행동으로 우러나도록 사랑은 샘물이 솟듯이 펑펑 흘러나와야 한다.    넷째, 어쩌다 떠오르는 사랑의 마음은 금방 식어서 사라진다. 연인들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다가 결혼하여 애를 낳아 가정을 꾸리고 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대단하게 싸운 것도 아닌데 헤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제 자식들을 찬밥 돌리듯이 나 몰라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인생사 다반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결혼을 사랑의 무덤이라고 빈정거리며 자식을 짐처럼 여기고 결혼해도 무 자식이 상팔자라고 아이 낳을 시도는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애완동물만을 끌어 안고서 마치 부부간의 사랑이 영원할 것같이 이상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는 무자녀 가정이 많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의 본질과 목적에 가장 어긋나는 모습인데, 여기에 동생애 부부까지 가세하여 한국이 전 세계에서 초저출산 위기로 내몰리는 악순환 속에서 인구소멸의 위기에 봉착해있다.    사랑은 이론적으로 친구 간의 사랑인 우정도 있고, 플라톤이 그리스-로마 신화에 만연된 심포지엄에서 그리는 정신적 사랑인 에로스도 있다. 그런데 우정은 친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거룩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에로스는 처음에는 정신적인 사랑을 하다가 점차 동물적인 육체의 쾌락과 욕망에 빠져서 동성애의 사랑으로 변질하는 경우가 많다. 우정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출산하는 재창조로 이어지지만, 동성애는 정욕과 음란의 노예가 되어서 가정을 파괴하고 국가적 재앙을 초래하는 비극을 낳는다. 결혼하여도 자녀를 출산하지 않는 것과 아예 동성혼과 동성결혼을 통하여 자녀를 출산할 수 없는 혐오의 늪에 빠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에 눈을 떠야 한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은 우정도 아니고 에로스로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주고 주어도 더 주고 싶은 사랑의 원천이다. 인간 세상에서 이런 아가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에 일부 녹아 있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사랑은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고 우주보다 넓고 어머니의 희생보다 길다. 예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보여주신 아가페의 사랑만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사랑의 실천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예수 학교로 모인 사람들이 있다. 인터넷을 뒤져보았지만 놀랍게도 예수 학교가 없어서 이들이 만든 예수 학교에 초청되는 교사들과 강사들은 다둥이 가정에 오신 예수님처럼 부부가 결혼한 신학생과 농어촌 개척교회 목회자들이다. 그래서 모인 예수 학교에는 몽골과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강사로 초청되는데 세 명에서 여덟 명까지 자녀를 낳은 다둥이 가정의 부모이다. 우리는 예수 학교에서 희망을 본다. 실력 있는 강사는 신학자가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고 다둥이 자녀를 출산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가정에 모신 부모이다./한국교회 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4-12-04
  • [정론] 사람을 움직이는 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결혼을 앞둔 리츠코는 이삿짐에서 발견한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계기로 약혼자 사쿠에게 짧은 편지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녀의 행선지가 '시코쿠'임을 안 사쿠는 그녀를 찾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첫사랑 아키와의 추억과 마주한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사쿠는 모두의 선망 대상이던 아키와 우연히 하교 길에 만나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라디오 심야방송에 응모하고, 워크맨으로 음성편지를 주고받으며 순수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무인도 여행 후 귀가하던 날, 아키는 갑자기 쓰러지고 만다.    병원에 입원한 아키는 밝은 모습을 잃지 않지만, 그녀가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 사쿠는 큰 슬픔에 잠긴다. 사쿠는 아키의 꿈인 호주의 울룰루로 데려가기로 결심하고 병원을 탈출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공항에서 아키는 다시 쓰러진다.    성인이 된 사쿠는 리츠코를 찾으러 가는 길에 과거의 기억 속 아키를 만나게 된다. 리츠코도 자신의 과거를 되짚으며 두 사람은 숨겨져 있던 진실과 마주한다. 결국, 전달되지 못했던 아키의 마지막 음성편지가 십여 년의 시간을 넘어 사쿠에게 도착한다.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찾아온 수채화 빛 슬픔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우리에게 사랑의 힘과 위대함, 그리고 추억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눈부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진정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움직이는 그러한 사랑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서로를 용서하고 희생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사랑이 없는 교육은 반항하게 만들고, 사랑이 없는 친절은 위선적으로 만든다. 또한 사랑이 없는 지식은 군림하게 만들고, 사랑이 없는 믿음은 광신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꿈과 비전은 야망이 되고 만다. 남아프리카에 있는 바벰바 족은 미개 부족 중 하나이지만 범죄 행위가 극히 드물다고 한다. 부족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죄를 지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그를 마을 한복판의 광장에 데려다 세운다. 그리고 광장에 몰려 죄인을 중심으로 큰 원을 만든 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아주 큰 소리로 죄를 지은 사람을 향해 외친다. 바로 그 죄인이 과거에 했던 좋은 일을 칭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의 장점, 착한 행동, 그리고 미담들을 하나씩 열거하는데 한 명도 빠짐없이 말해야 한다. 심지어 판사조차도 죄인을 비난하거나 욕하거나 책망하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다. 반드시 좋은 것만 말해야 한다.    몇 시간 동안, 때로는 며칠이 걸려서 하는 이러한 칭찬이 바닥나면 그때부터 축제가 벌어진다. 이 놀라운 칭찬은 죄인의 위축된 자존심을 회복시켜 즌다. 이러한 칭찬 축제로 인해 바벰바 족 사회에서는 범죄 행위가 극히 드물다고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장 8절)라고 교훈하고 있다. 인간이 지은 수많은 죄와 허물을 덮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밖에 없다. 갈보리 언덕에서 온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온 인류를 변화시다. 주님이 주신 그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미래를 꿈꾸는 청소년과 젊은이가 되기를 기원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4-12-04
  • [정론] 만종(晩鐘)의 감사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만종(晩鐘)이라는 그림의 주제는 ‘감사’이다. 밀레의 만종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감사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첫째로, 고개 숙인 감사이다.만종의 화폭에 저녁기도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감사를 아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다. 반면에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사람은 가진 지식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높은 지위 때문에, 또는 종교적 경력 때문에 교만해질 수 있다.    만종에 나오는 사람들은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니고 종교적 고위층도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 하루의 삶을 감사하고 있다. 열심히 일할 터전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건강을 주셔서 활동하게 하심도 감사하고 있다. 고개가 숙여지면 고난을 당해도 감사할 수 있고, 시련을 만나도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로, 말 없는 감사이다. 만종의 그림에서 우리는 고개 숙인 채, 입도 다문 채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말이 없다는 것은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감사이다.    가슴 저미는 감사의 마음이 있다면, 오히려 할 말이 없게 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9장 15절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할 말을 잃었다는 것이다. 진정한 감사는 입에서 나오지 않고 마음에서 나온다.    셋째로, 함께 하는 감사이다.만종에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고개 숙인 모습이 있다. 나 혼자가 아닌 이웃과 함께, 한마음으로 드리는 공동체적 감사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웃이 보여야 한다. 남의 불행을 나의 감사의 조건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고, 함께 복 받고, 함께 누리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수직적인 문화만이 너무 강조되고 있다. 즉 나와 하나님밖에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수평적인 생각, 즉 이웃이 보이고 귀하게 여겨지는 신앙이 아쉽다. 불신자들은 교회의 몸집을 불리는데 동원되는 수단이 아니다. 그들 자신이 교회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고난 속에서의 감사이다. 만종이라는 그림의 배경은 가난한 부부의 감사의 모습이다.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의 감사의 모습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이는 물질이나 명예가 주어질 때 하는 감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무엇 때문에 하는 감사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어도 근원적인 감사를 드리는 귀한 감사의 모습을 배워야 하겠다.    일부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만종은 원래의 그림에서 수정된 것이라고 한다. 즉 가난한 부부의 앞에 놓인 바구니에는 본래 감자가 아니라 죽은 아기의 시체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그림 속의 부부의 모습은 슬픔이 아닌 감사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아이를 잃은 슬픔조차도 그들의 감사의 마음을 빼앗지 못하였다. 그 슬픔조차도 가슴에 묻고 두 손 모아 조용히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에서 참 신앙인의 자세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 속에서도 감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요, 다니엘과 세 친구의 감사요, 바울의 감사였다. 만종이 가르쳐주는 진정한 감사의 자세를 배우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다./한국찬송가개발원 원장·서울장신대 전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4-11-05

실시간 정론 기사

  • 미래로 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예수정신
         2025년 새해, 을사년은 푸른 뱀의 해라고 한다. 을사(乙巳)는 60간지 중 42번째에 해당하는 순서인데, 청색을 의미하는 ‘을’과 뱀을 뜻하는 ‘사’가 합쳐져 푸른 뱀의 해가 된다고 설명한다. 을사년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으로는 왕규의 난(9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 을사 추조 적발사건(일명 명례방 사건, 1785),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 을사의병(乙巳義兵, 1905) 등이 있다. 모두 이념 갈등이 불러온 가슴 아픈 역사이지만, 지금은 이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념 갈등으로 인한 고통도 있었지만, 온 민족이 하나 되어 화합한 역사도 분명 존재했다. 나에게 가장 인상깊은 노래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조르조 모르더가 작곡하고 그룹 코리아나가 부른, 1988년 서울 올림픽 공식 주제가 ‘손에 손잡고’(Hand in Hand)이다. 나뿐 아니라 88서울올림픽 주제가를 따라 부르며 감동을 느꼈던 순간이 누구에게나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 노래는 온 민족을 넘어서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에 진출하는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한국은 사상 최초의 월드컵 준결승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룩했지만 아쉽게 패하며 3, 4위전으로 향했으나 선수들을 비난하는 팬들은 아무도 없었다. 월드컵 4강까지 진출하는 과정 모두가 우리 민족에게 이미 신화가 된 후였기 때문이다. 이런 화합의 역사는 어느 과거보다 우리에게 깊은 감흥을 준다.    그러나 최근 5년을 돌아보면 전 세계적으로 가슴 아픈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2019년 말 시작된 코로나19는 2020년 3월부터 약 3년 간 전 세계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인 재앙은 정치, 경제, 문화와 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 ‘멈춤’이라는 큰 장벽을 안겨다 주었고, 이 기간 온 인류는 숨을 죽이듯이 살아갔다. 코로나19가 만든 장벽이 사라진 후에도 전 세계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2022년2월24일 발생하여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중동의 한복판이라 부를 수 있는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2023년10월7일 오전 06시 30분에 시작되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랍의 봄 이후 끝없는 내전 속에서 53년 동안 건재했던 알 아사드 가문의 바트주의 시리아 정권은 2주도 안 되는 기간에 주요 도시와 기지들을 빼앗기고, 2024년12월8일 반군에게 수도 다마스쿠스가 함락되면서 완전히 패망하였다. 전쟁과 테러, 내전으로 겪는 육체적·정신적 기근 등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고통은 현재 진행 중이다. 각국의 정치적 불안정은 경제적 빈곤과 식량안보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때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미래의 방향을 어디로 어떻게 설정하고 가야 할까’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교회와 신학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신학적 갈등과 이념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답을 찾는 일’과 ‘기도가 답이다’라는 루터와 칼빈, 리차드 십스가 외쳤던 기도의 신학으로 갈등을 풀어야 한다. 전쟁과 테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욕심’을 버려야 하는 것처럼, 주의 자녀인 우리는 회개하는 자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세상의 비판과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받고 있던 삭개오에게 손을 내밀었던 예수의 정신과 신명기 6장 4-9절의 신명기적 사관,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화합의 세상을 만든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88 올림픽 주제가처럼 ‘손에 손잡고 벽을 넘는 일’이다. 주께서 사랑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죄의 벽’을 허무셨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으로 화합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아프리카미래협회 회장·백석대 은퇴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5-01-14
  • 한국교회의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한국교회는 2025년 어떤 모습을 가질까? 한국교회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새로운 빛의 세계로 나가고 있을까? 우리는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희망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처해있는 어둠과 아픔 그리고 부정적인 전망, 이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 스스로 온전하게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갖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복음의 계시에 남아있다면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암울해 보여도 우리는 확실히 희망을 가질 수 있다. 2025년에는 그런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2024년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교회는 지속적으로 감소 추세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막막하다. 여러 가지 통계들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교회가 처해있는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011년에 국민통계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숫자는 881만 명인데 비해 2020년에는 741만 명으로 무려 140여 만명 16%이상의 감소를 기록하고 있다.    좀 더 최근의 여러 가지 통계들은 이러한 현실의 내밀한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주고 있다.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이 신자의 감소 현상이 주로 20~40대라는 다음 세대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 이후 3040의 현장 예배 이탈 비율이 대략 40%에 이르고 그들 3040중 장차 10년 후 현장예배 이탈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서 그럴수 있다고 대답한 비율이 무려 70%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암울한 현장의 섬뜩한 전망들이 우세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교회를 이탈하고 있는 현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많은 분들이 이 현상에 대하여 다름대로 여러 가지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을 제공하고 있다. 교회의 현재가 어두운 까닭은 교회가 권위주의적이고 지속적으로 상식밖의 일탈 행위를 하고 있으며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하는 비본질적, 자본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뼈아픈 지적은 교회가 자폐환자들처럼 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기준과는 점차 동떨어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여기서 벗어나려는 개선의 징조가 너무 미력하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런 지적을 통해 배워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민주적 자유정신과 그에 부합한 리더쉽, 사회적 봉사를 우선으로 하는 가치 의식을 받아들이고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 부끄럽지만 이제라도 그렇게 해야한다. 얼마 전부터 한국교회는 지속적으로 회개를 말하고 성숙을 위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계속해야 한다! 이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아직 그 진정성을 의심받더라도 계속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것이고 환경도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이제 교회의 본질적 측면을 고려해 보고자 한다. 한국교회와 그 지도자들은 그 중심에 성경적 복음주의에 서 있는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중 일부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가 하면, 이데올로기를 신앙의 표준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중요한 위치에 계신 많은 지도자들이 복음의 절대적 배타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안창호 국가 위원장과 같은 신앙적 단호함이 필요하고 메시지의 선명성이 요청되는 때이다. 세상의 학문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은 기독교적 형이상학의 고귀한 정신이 필요하다. 성령의 지혜로 이해되는 차원 높은 그리스도의 계시의 학문이 요구된다. 이 시대의 정신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깊고, 가장 높은 영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영적 각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지금처럼 성장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나님 말씀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했을 때 그렇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그렇게 될 수 있다.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의 부흥운동이 일어나는 2025년의 한국교회는 그렇게 될 수 있다. 이 세상의 희망이 되는 한국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서울신대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5-01-02
  • [정론] 손님접대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이웃을 돌보고 사랑을 베푸는 일이 그 위력을 다분히 잃어가고 있음을 본다 그나마 손님대접을 중시하는 기독교에서도 진정한 영성의 추구라기 보다는 다소 희석된 경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경에는 나그네를 집에 맞아들이는 게 우리의 중요한 의무이며, 또한 손님도 귀한 선물을 가져온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마므레에서 세 나그네를 영접하여 물과 떡과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고기를 대접하자 그들은 그의 아내 사라에게 장차 아들이 있을 것을 예고했다(창 18:1-15). 사르밧의 과부가 엘리야에게 음식과 거처를 내주자 엘리야는 기름과 양식을 풍성히 채워주고, 과부의 죽은 아들까지 살려냈다(왕상17:9-24).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길에서 합류한 낯선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묵게 되자 그분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떡을 떼어 주었다(눅 24:13-35). 성경은 여러 일화를 통하여 부지불식간 만나는 손님을 대접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교훈을 준다. 손님대접이 중요한 덕목이 되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네게 있는 것 중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라고 질문했다. 여기에는 오직 아무것도 없다라는 한 가지 대답만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일생동안 단 하나의 예외없이 모든 좋은 것들을 은혜로 받았다. 그래서 욥은 내가 이나왔으니 또한 돌아갈것이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욥1:21)고 찬양했다.   조선의27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44세로 주로 종기, 당뇨, 중풍 등의 병을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조선 왕들의 가장 흔했던 사인은 요즈음 질환 축에도 들지 않는 종기였다. 소독약이나 항생제가 없었고, 의료기술이 전무한 시절에 종기는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병이 들면 어떻게 했을까.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에서 감기와 같은 작은 병이면 인내하며 참고, 중한 병에 걸리면 조용히 죽음을 준비한다. 18세기 중엽 유럽에서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경우 백내장으로 진단 받았다. 바흐의 눈을 시술한 치료사는 영국왕 조지2세의 궁정의사인 테일러였지만 그의 의료수준은 형편없었다.    백내장 수술은 혼탁해진 수정체를 제거하고 인공 수정체를 대신 넣는 수술이다. 가열멸균되지 않은 천공용 바늘을 사용했고 수술 후 출혈과 감염이 심각해졌다. 안구에서 시작된 감염증상이 바흐의 온몸으로 퍼지면서 극심한 고열을 가져왔고, 신체기능전반에 이상을 일으켰다. 결국 바흐는 수술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오늘날 우리는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가서 치료받고, 중한 병도 발전된 의료기술로 걱정없이 병을 이겨나간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감사함이 넘쳐나야 한다. 마태복음25장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복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말해주고 있다.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떨고 있을 때 옷을 주었고, 옥에 갇혔을 때 돌보아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준 자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를 지나쳐가는 배고픈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나그네 된 자, 감옥에 갇힌 자, 병든 자들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인식할 수 있다면 모두다 천국에서 칭찬받을 것이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 모두 이런 자들이 주변에 없는 지 살펴보고, 다가가 도움을 주는 일에 능동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전 성신여대 부총장, 미드웨스트대학원 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5-01-02
  • [정론] 사랑의 실천에 꼭 필요한 일들은 무엇인가?
       사랑은 이론만도 아니고 실천만도 아니다. 그래서 사랑의 실천이란 말은 아주 기가 막힌 조합이다. 사랑이 실천으로 열매를 맺게 될 때, 꽃이 향기를 넘어서 사람의 마음까지도 움직이는 열매로 결실하게 된다. 향나무는 피톤치드 향기를 내뿜은 나무의 대명사이다. 소나무보다 향기가 진하여 향나무이다. 어렸을 때 붓글씨를 쓰기 위해 벼루에 먹을 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향나무 열매를 빻아 넣고 먹을 갈면 끈끈한 액이 붓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고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는 것을 방지해준다. 향나무 향기가 코끝에 전해지며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향나무가 가장 향기를 많이 품어내는 때가 언제인지 아는가? 장작으로 패어서 아궁이에 태워질 때이다. 자기를 불사르는 그 순간에 향나무는 향기를 온 누리에 널리 퍼뜨린다. 여기서 몇 가지 사랑의 실천에 필요한 일들이 숨어있다.    첫째, 향나무는 향기를 품는 나무이다. 성도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 병 속에 담긴 비밀인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의 향기가 전해지는 곳에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다. 자기의 잔을 비워서 나의 빈 잔을 넘치도록 채워주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본받아서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길을 걸어가는 인생에게 그리스도는 이정표와 같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목표로 해서 살아가는 인생은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고, 이웃에게 물질을 나누는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을 실천한다.    둘째,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자기를 희생할 때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간다. 33년의 짧은 인생을 사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 몸을 찢기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성도를 구원하셨다. 크리스마스카드의 빛이 바래고 성탄절의 주인공이 산타와 백화점 트리로 변질한 시대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림절 네 주간을 지키면서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성도마다 죽기까지 자기를 비우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 사랑의 실천은 구세군 자선냄비에 얼마간의 돈을 넣고 연말연시에 각종 모금회에 목돈을 보낸 대가로 얻은 사랑의 열매를 상징하는 배지를 양복에 달고 크리스마스 쌀을 사서 더는 연하장을 보내지 않기에 그냥 서랍에 처박아 두는 것을 넘어서 내 손과 발이 사랑의 마음에 이끌려서 사랑의 쌀 나누기와 사랑의 김치 나누기와 얼굴에 검은 칠을 하면서 연탄을 나르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날마다 이어져야 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런 질문이 구체적으로 나의 머리와 생각에서 마음의 길을 따라 행동으로 우러나도록 사랑은 샘물이 솟듯이 펑펑 흘러나와야 한다.    넷째, 어쩌다 떠오르는 사랑의 마음은 금방 식어서 사라진다. 연인들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다가 결혼하여 애를 낳아 가정을 꾸리고 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대단하게 싸운 것도 아닌데 헤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제 자식들을 찬밥 돌리듯이 나 몰라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인생사 다반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결혼을 사랑의 무덤이라고 빈정거리며 자식을 짐처럼 여기고 결혼해도 무 자식이 상팔자라고 아이 낳을 시도는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애완동물만을 끌어 안고서 마치 부부간의 사랑이 영원할 것같이 이상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는 무자녀 가정이 많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의 본질과 목적에 가장 어긋나는 모습인데, 여기에 동생애 부부까지 가세하여 한국이 전 세계에서 초저출산 위기로 내몰리는 악순환 속에서 인구소멸의 위기에 봉착해있다.    사랑은 이론적으로 친구 간의 사랑인 우정도 있고, 플라톤이 그리스-로마 신화에 만연된 심포지엄에서 그리는 정신적 사랑인 에로스도 있다. 그런데 우정은 친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거룩한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에로스는 처음에는 정신적인 사랑을 하다가 점차 동물적인 육체의 쾌락과 욕망에 빠져서 동성애의 사랑으로 변질하는 경우가 많다. 우정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출산하는 재창조로 이어지지만, 동성애는 정욕과 음란의 노예가 되어서 가정을 파괴하고 국가적 재앙을 초래하는 비극을 낳는다. 결혼하여도 자녀를 출산하지 않는 것과 아예 동성혼과 동성결혼을 통하여 자녀를 출산할 수 없는 혐오의 늪에 빠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에 눈을 떠야 한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은 우정도 아니고 에로스로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주고 주어도 더 주고 싶은 사랑의 원천이다. 인간 세상에서 이런 아가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에 일부 녹아 있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사랑은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고 우주보다 넓고 어머니의 희생보다 길다. 예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보여주신 아가페의 사랑만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사랑의 실천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예수 학교로 모인 사람들이 있다. 인터넷을 뒤져보았지만 놀랍게도 예수 학교가 없어서 이들이 만든 예수 학교에 초청되는 교사들과 강사들은 다둥이 가정에 오신 예수님처럼 부부가 결혼한 신학생과 농어촌 개척교회 목회자들이다. 그래서 모인 예수 학교에는 몽골과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강사로 초청되는데 세 명에서 여덟 명까지 자녀를 낳은 다둥이 가정의 부모이다. 우리는 예수 학교에서 희망을 본다. 실력 있는 강사는 신학자가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고 다둥이 자녀를 출산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가정에 모신 부모이다./한국교회 정론 대표·장신대 은퇴교수
    • 오피니언
    • 정론
    2024-12-04
  • [정론] 사람을 움직이는 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결혼을 앞둔 리츠코는 이삿짐에서 발견한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계기로 약혼자 사쿠에게 짧은 편지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녀의 행선지가 '시코쿠'임을 안 사쿠는 그녀를 찾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첫사랑 아키와의 추억과 마주한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사쿠는 모두의 선망 대상이던 아키와 우연히 하교 길에 만나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라디오 심야방송에 응모하고, 워크맨으로 음성편지를 주고받으며 순수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무인도 여행 후 귀가하던 날, 아키는 갑자기 쓰러지고 만다.    병원에 입원한 아키는 밝은 모습을 잃지 않지만, 그녀가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 사쿠는 큰 슬픔에 잠긴다. 사쿠는 아키의 꿈인 호주의 울룰루로 데려가기로 결심하고 병원을 탈출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공항에서 아키는 다시 쓰러진다.    성인이 된 사쿠는 리츠코를 찾으러 가는 길에 과거의 기억 속 아키를 만나게 된다. 리츠코도 자신의 과거를 되짚으며 두 사람은 숨겨져 있던 진실과 마주한다. 결국, 전달되지 못했던 아키의 마지막 음성편지가 십여 년의 시간을 넘어 사쿠에게 도착한다.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찾아온 수채화 빛 슬픔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우리에게 사랑의 힘과 위대함, 그리고 추억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눈부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진정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움직이는 그러한 사랑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서로를 용서하고 희생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사랑이 없는 교육은 반항하게 만들고, 사랑이 없는 친절은 위선적으로 만든다. 또한 사랑이 없는 지식은 군림하게 만들고, 사랑이 없는 믿음은 광신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꿈과 비전은 야망이 되고 만다. 남아프리카에 있는 바벰바 족은 미개 부족 중 하나이지만 범죄 행위가 극히 드물다고 한다. 부족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죄를 지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그를 마을 한복판의 광장에 데려다 세운다. 그리고 광장에 몰려 죄인을 중심으로 큰 원을 만든 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아주 큰 소리로 죄를 지은 사람을 향해 외친다. 바로 그 죄인이 과거에 했던 좋은 일을 칭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의 장점, 착한 행동, 그리고 미담들을 하나씩 열거하는데 한 명도 빠짐없이 말해야 한다. 심지어 판사조차도 죄인을 비난하거나 욕하거나 책망하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다. 반드시 좋은 것만 말해야 한다.    몇 시간 동안, 때로는 며칠이 걸려서 하는 이러한 칭찬이 바닥나면 그때부터 축제가 벌어진다. 이 놀라운 칭찬은 죄인의 위축된 자존심을 회복시켜 즌다. 이러한 칭찬 축제로 인해 바벰바 족 사회에서는 범죄 행위가 극히 드물다고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장 8절)라고 교훈하고 있다. 인간이 지은 수많은 죄와 허물을 덮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밖에 없다. 갈보리 언덕에서 온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온 인류를 변화시다. 주님이 주신 그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미래를 꿈꾸는 청소년과 젊은이가 되기를 기원한다. /백석대 교수·비전스타트 대표
    • 오피니언
    • 정론
    2024-12-04
  • [정론] 만종(晩鐘)의 감사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만종(晩鐘)이라는 그림의 주제는 ‘감사’이다. 밀레의 만종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감사의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첫째로, 고개 숙인 감사이다.만종의 화폭에 저녁기도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감사를 아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다. 반면에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사람은 가진 지식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높은 지위 때문에, 또는 종교적 경력 때문에 교만해질 수 있다.    만종에 나오는 사람들은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니고 종교적 고위층도 아닌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 하루의 삶을 감사하고 있다. 열심히 일할 터전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건강을 주셔서 활동하게 하심도 감사하고 있다. 고개가 숙여지면 고난을 당해도 감사할 수 있고, 시련을 만나도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로, 말 없는 감사이다. 만종의 그림에서 우리는 고개 숙인 채, 입도 다문 채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말이 없다는 것은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감사이다.    가슴 저미는 감사의 마음이 있다면, 오히려 할 말이 없게 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9장 15절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할 말을 잃었다는 것이다. 진정한 감사는 입에서 나오지 않고 마음에서 나온다.    셋째로, 함께 하는 감사이다.만종에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고개 숙인 모습이 있다. 나 혼자가 아닌 이웃과 함께, 한마음으로 드리는 공동체적 감사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웃이 보여야 한다. 남의 불행을 나의 감사의 조건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고, 함께 복 받고, 함께 누리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수직적인 문화만이 너무 강조되고 있다. 즉 나와 하나님밖에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수평적인 생각, 즉 이웃이 보이고 귀하게 여겨지는 신앙이 아쉽다. 불신자들은 교회의 몸집을 불리는데 동원되는 수단이 아니다. 그들 자신이 교회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고난 속에서의 감사이다. 만종이라는 그림의 배경은 가난한 부부의 감사의 모습이다.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의 감사의 모습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이는 물질이나 명예가 주어질 때 하는 감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무엇 때문에 하는 감사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어도 근원적인 감사를 드리는 귀한 감사의 모습을 배워야 하겠다.    일부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만종은 원래의 그림에서 수정된 것이라고 한다. 즉 가난한 부부의 앞에 놓인 바구니에는 본래 감자가 아니라 죽은 아기의 시체가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그림 속의 부부의 모습은 슬픔이 아닌 감사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아이를 잃은 슬픔조차도 그들의 감사의 마음을 빼앗지 못하였다. 그 슬픔조차도 가슴에 묻고 두 손 모아 조용히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에서 참 신앙인의 자세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 속에서도 감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요, 다니엘과 세 친구의 감사요, 바울의 감사였다. 만종이 가르쳐주는 진정한 감사의 자세를 배우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다./한국찬송가개발원 원장·서울장신대 전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24-11-05
  • 잘못된 감사, 잘못된 기도
       올해도 추수감사의 절기를 맞았다. 이 계절에 감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추수감사’는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지상의 양식에 대한 감사만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오히려 내 영혼을 먹이고 입히시며 무시로 생명의 양식을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함을 잘 안다. 그러면서도 이 종은 오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세상을 구하며 걱정하는 부끄러운 죄인이다.    예수님이 나의 창조주요 나의 구원주이심으로 감사하기보다는 나의 현실의 문제를 들어주시는 해결사이심으로 감사하는 한심한 종이다. 잘못된 기도를 들으시거나 잘못된 감사를 받으시는 주님이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성경은 감사의 책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감사’를 가르치고 언명하시는 책이 성경이다. 감사를 권면하는 성경 말씀이 많지만, 시편 136편은 1절부터 26절까지 전체가 “감사하라”는 명령을 반복하고 있다. 이 시편은 매 절을 “여호와께 감사하라...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는 반복법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감사(感謝)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에서 인자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그 사랑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노래하면 더 실감나고 더 피부에 와 닿는다. ‘헤세드’는 인자의 의미도 있지만, ‘은혜’, ‘은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은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모궁에서 나온다. 은혜는 어머니의 사랑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젖이다. 그 구체적인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죄인(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그런데, 인류 최고의 감사시인 시편 136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른바 ‘먹고 마시는 문제’로 감사하라는 언명은 딱 한 번밖에 없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5절) 그 외에 모든 절들이 “하나님이 참 신이심으로 감사하라”(1절~3절),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으로 감사하라”(4절~9절),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주이심으로 감사하라”(10절~24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 언명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봐야 한다. 우리의 감사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진정 참 신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하나님이 진정 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하나님이 진정 내 구원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감사하는가? 아니면 오늘도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며 그것이 충족됨으로 감사하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도 마찬가지다(마태복음 6장 9절~13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 사함과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구하는 감사의 계절을 살자.
    • 오피니언
    • 정론
    2024-11-04
  • [정론] 종교개혁과 변화 그리고 경건
       2024년은 종교개혁 507주년이 되는 해이다. 종교개혁은 비진리에 대한 저항과 개혁이 개신교회의 본질임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선언한 이후 신학운동은 16세기와 17세기를 거쳐 유럽 전역에서 꽃을 피웠고, 칼뱅의 『기독교강요』는 프랑스와 영국, 스위스를 비롯한 전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 종교개혁은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청교도 신앙의 토대를 구축하여 영적 부흥을 이끌었다. 또한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경제 자본주의의 기반을 구축하는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여, 중세의 봉건적 전통과 구전문화의 잔재를 제거하고 새로운 시대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기독교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었으며, 산업혁명은 물론 유럽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를 변혁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특히 성도들에게 영적문화의 충격과 함께 성도들의 세계관과 예배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일으켰다. 종교개혁은 교회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형성하면서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 경건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종교개혁을 통한 교회의 변혁은 크게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교회 예배 문화의 변화이다. 교회의 예배가 단순해지면서 성만찬 중심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심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메시지 전달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 종교개혁을 바탕으로 평신도들이 이해하기 힘든 라틴어가 교회 내에서 사라지고 일상적인 언어들이 사용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사제와 성가대원의 전유물이었던 교회음악의 보편화이다.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인식하에 회중들은 찬송을 부르게 되었고, 성전 예배 중심에서 삶의 영역을 중심으로 한 예배로 예배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었다. 두 번째는 교회내의 비성경적인 요인들을 제거하고 성경에 기초한 기초신앙교리 교육과 예배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교회 내의 신과 성인의 상이 우상숭배임을 적시하고, 이러한 것들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됨을 비판하고 제거하였다. 종교개혁을 통해 변혁이 일어난 교회에서는, 개혁교회의 기초인 성경을 중심한 신앙과 생활이 강조되고 교회안의 거룩한 공동체와 믿음의 형제들로 채워지면서 다양한 상처들이 치유되기 시작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함으로 자유와 평등사상을 일으켜 종교, 사람의 의식을 평등화하고 민주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칼빈은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더 발전시켜 예정설을 주장하였고, 성속이원론과 사제주의에 반대하여 모든 노동이 거룩하다는 직업소명론을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정착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루터와 칼빈에 의한 종교개혁은 많은 성과를 이루어냈지만, 개신교와 가톨릭의 전쟁과 종교가 공적영역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적영역으로 밀려나는 한계도 드러냈다.    종교개혁 507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와 성직자, 교회 공동체는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고 다음의 부분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첫째, ‘하나님 말씀의 묵상과 현실화’에 힘써야 한다. 성직자는 매일 성경 40장 이상 읽고 묵상하고, 묵상한 바를 실천할 때 신비의 계시가 능히 너희를 견고하게 함을 믿어야 한다(롬 16:26). 둘째, 하나님의 메시지, 타인과의 대화에서 ‘경청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셋째, 삶의 현장에서 ‘찬양과 기도가 현실화’되어야 한다. 넷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가르치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한다(행 28:30-31). 다섯째,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며 용서운동이 있어야 한다(욥 42:6, 10).   한국 교회가 종교개혁이 제시한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 경건한 삶의 방향을 기억하고 주님의 길을 따라간다면, 모든 이들이 구원에 이르는 역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국칼빈학회 회장·아프리카미래협회 회장
    • 오피니언
    • 정론
    2024-10-22
  • [정론] 하동 이병주문학관에서
       이병주 대하실록소설 <지리산>의 주인공 박태영은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그 규칙에 순응할 수 없는 체질적 회의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죽는 순간까지 버리지 못했다. 박태영에게 내연된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생명과 가치와 존중의 정신이다. 이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과 반인간적인 것과의 진실을 찾아가는 행렬인 것이다. 나는 이병주의 <지리산>을 읽으면서 <지리산>의 서사는 사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림 이병주(1921-1992)의 대표작 <지리산> 과 그 외 80여 권에 이르는 작품을 모두 모으면 동시대를 살아간 국민의 서사가 된다. 이병주에게 소설은 허구이기보다는 현실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기에 <지리산> 은 기록문학의 한계를 뛰어 넘는 증언소설로서 역사적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역사의 그물이 놓치고 있는 삶의 모습, 역사에서 소외된 삶을 기록한 것이다.    작가 이병주의 소설과 그의 작품에 나타난 삶의 실체적 진실로서의 역사의식이 여전한 분단체제에서 우리 사회의 한 인식 지표가 되어졌다고 할 것이다. 이병주는 분단 시대의 교사로서 그의 소설을 좌우의 갈등과 대립이 여전한 지금도 방향성을 제시한 풍향계라 할 것이다.    필자가 문학지에 게재한 원고지 430매에 달하는 문학비평문 ‘이병주의 지리산, 또는 회색의 군상’을 평론하여 이병주국제문학상 연구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루 일찍 시간을 내어 2024년 9월 27일 시상식 전날, 가족과 더불어 기차를 타고 진주를 찾았다. 이병주가 걸었던 소설의 주요 공간인 진주의 중앙시장 골목에 있는 1915년 개업한 천황식당에서 진주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1936년 진주공업농림학교에 입학한 이병주도 천황식당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는 진주에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을 가꾸었고, 지리산을 휩쓴 파란을 겪는 가운데 역사와 정치와 인간이 엮어내는 운명에 대해 나름대로의 지혜를 익혔다.    거북이의 걸음을 닮은 기차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고, 그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학병이 되어 중국으로 떠난 것도 진주역에서였고, 사지에서 돌아와 도착한 곳도 진주역이었다. 진주는 이병주 문학의 요람이고 향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는 진주성 촉석루에 올라 시간의 무상을 담아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 보았다.    렌트카를 빌려 하동군 북천면 이명산 자락에 있는 이병주문학관을 찾아갔다. 길에는 코스모스, 메밀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병주는 지리산의 자락이자 다도해의 안뜰이며 섬진강 베갯머리와 같은 하동에 태를 묻고 생애를 시작했다. 하동은 박경리 <토지>와 김동리 <역마>의 무대이다. 소설가 이병주, 김병총, 시인 정공채와 정호승, 수필가 강석호, 아동문학가 남대우의 출생지 하동은 한국문학사 속의 불멸하는 문향이라 하겠다. 이병주는 하동이란 문학적 토양에서 자라나 그의 문학은 진주로,부산으로, 일본과 세계로 뻗어 나갔다. 나림이 타계한지 32년이 지났지만 하동에 세워진 이병주문학관은 세월따라 퇴색한 채 찾아오는 내방객을 맞아 나림의 71년 유정한 삶과 문학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림의 전시실에서 한국기독교 140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연합해 서울 외곽에 한국기독교문학관을 지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겼다. 한국기독교 문학사에서 불멸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마주할 수 있는 기독교문학의 서정과 서사를 담은 공간이 세워졌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았다./문학평론가·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4-10-15
  • 뷰카시대의 기독교문화, 다시 본질로
       <한국 기독교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용어이다. 현대가 복잡다단한데 여기에 세 가지 거대한 개념이 만나니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뷰카(VUCA)이니 어떻게 손쉬운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뷰카는 복합, 복잡, 불확정, 불투명성이 현대의 모호성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 기독교문화를 이해하기에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1885년을 깃점으로 보면 그 역사가 140년 가까이 되니 한국 기독교문화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소월의 <초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한국 기독교문화의 현주소처럼 보인다. 뷰카라는 현대적 특성에 이데올로기적 분파까지 생겨났다. 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 코드, 예를 들면 극좌, 진보, 중도, 보수, 극우 등 이런 요소들이 막가파식 대립과 막무가내 투쟁으로 건전한 문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기독교 안으로 파고들어 기독교문화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문화, 존재는 하되 위기 상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성경 말씀을 제쳐놓고 인본주의에 휩쓸린 결과가 아니었는가.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한국 기독교문화의 본질과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증거,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교인들이 그 삶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기독교문화이다. 한국 기독교문화가 회복력을 갖고 구원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하여 세속적 삶을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일으킨 개혁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다시 본질로!”(ad fontes),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기독교문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믿음이 기독교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거룩한 문화는 새 영으로! 이때 필수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 뒤에 개혁이고 변혁이 가능하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회개를 잃어버리고, 기복신앙적 축복, 성공신학적 성취에 빠져 있었다. 자본주의적 성장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 현상이 교회성장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포장되어졌다. 루터(M.Luther)는 중세교회를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 판단했는데, 종교개혁가들이 본다면 현대 기독교는 “교회의 자본주의 포로”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할 때 한국 기독교문화는 ‘양들의 풍성한 생명의 문화’(요 10:10)가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주께서 단호히 심판하시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28). 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진노로부터 옮기시옵시고, 사랑과 긍휼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 오피니언
    • 정론
    2024-10-0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