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10-18(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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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터의 정신따라 문서선교 나서자
      10월 종교개혁의 달이다. 루터와 종교개혁에 대해서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오늘은 루터의 성경번역과 종교개혁을 완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쇄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필자는 오래전에 독일의 종교개혁 성지를 여행한 경험이 있다. 그때 발트불그 성을 방문했었다. 아이제나크 시내가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그야말로 그림같이 아름다운 동화 속의 성같은 곳이다. 바로 이곳이 루터가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한 그 역사적인 현장이다. 만약 루터가 적대자들에게 쫓겨 이곳으로 피신하지 않았다면 성서는 독일어로 번역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 갇히는 신세가 됨으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말로 성서를 읽게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루터를 이곳 발트불그 성에 가두어 놓았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 그 비밀의 섭리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안내원의 인도에 따라 루터가 성서를 번역했다는 바로 그 방으로 갔다. 그리 크지 않은 방으로 6~7평 정도 돼 보이는 방이었다. 나무로 된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옆에 창문이 나 있었다. 아마도 루터는 이 책상에 앉아서 기도했고 성서를 번역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답답하면 창문을 열고 발크불그성 주변의 숲과 저 멀리 아이제나크 시내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하게 된 그 환경을 오히려 성서를 번역하여 인류 사회에 공헌하는 기회로 역전시킨 루터의 멋진 뒤집기 한 판 승부가 가슴 뿌듯한 인생 드라마로 가슴속에 다가옴을 느꼈다. 지금도 그때 그 가슴에 벅차오르던 감격이 생생하다.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게 된 근본적인 동기는 무엇일까? 당시의 성서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소수의 성직자 외에는 성경에 대한 접근은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또한 성서에 대한 해석권한도 교회 즉 교황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당시의 성도들은 사제가 읽어주고 해석해 주는 그 성서만을 듣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반 성도들은 사실상 성서에 대해서는 눈뜬 장님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루터는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독일어로 번역했다. 소수 사제들만의 성경을 일반 대중들에게 돌려준 것이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은 그 어떤 것보다도 위대한 종교개혁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루터의 종교개혁을 보이지 않게 도왔던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인쇄 매체였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1455년 당시 독일 남서부 마인츠라는 도시에서 가동되기 시작했다. 50여년 뒤에는 독일의 60개 도시와 유럽의 12개국에까지 보급되었다. 이 인쇄기 덕분에 일반인들도 관심거리를 신속히 대량으로 접할 수 있었다. 지금은 신문이나 방송이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대중 매스미디어가 없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발명되고서 비로소 뉴스의 다중전달이 가능해진 것이다. 루터가 작성한 95개 조항 논제도 인쇄되어 배포되었을 것이다. 교회 개혁 문제는 더는 비텐베르크의 캐슬처치 대문에 붙어있는 종이조각이 아니었다. 그 문제는 광범위하게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종교개혁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바로 인쇄술의 발달이라는 또 하나의 조력자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도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땅끝까지 복음전파라는 주님께서 주신 그 사명을 외면할 수는 없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독일어 성경번역과 당신의 인쇄술이 도왔듯이 오늘 우리들의 복음전파를 돕는 수많이 매체들이 있다. 어찌 이 시대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도구들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 도구들을 활용한 지상명령의 수행은 이제 우리 신앙인들의 몫이다.    /루터회 증경총회장·새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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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0-17
  • “살아있는 기독교 문화를 세우자”
      세상사 모든 일들에 목적이 있듯이 교회에도 목적이 있고, 교회의 목적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교인들이 누구인가.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시므로 교회를 세우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교인들과 교회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빛과 소금’이 아니고 ‘소금과 빛’이다.   먼저 교인들과 교회들은 이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인들과 교회들은 기질과 특성이 ‘소금’으로 바뀌어 진 존재들이라고 주님은 말씀했다. 본래는 소금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피와 살로 그 기질과 특성이 ‘소금’으로 바뀌어 진 존재들이라고 말씀했다. 존재에 변화가 일어났을 때 행실과 역할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소금’이 하는 일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썩는 것을 막는 일이다. 생선에 소금을 뿌리면 생선이 썩지 않는다. 무와 배추에 소금을 뿌리면 무와 배추가 썩지 않는다. 소금은 썩는 일을 방지한다. 즉 방부제의 역할을 한다. 두 번째는 맛을 내는 일이다. 생선에 소금을 뿌리면 맛있는 굴비도 되고 맛있는 고등어도 된다. 무와 배추에 소금을 뿌리면 맛있는 김치가 된다. 소금은 맛을 낸다. 세 번째는 스스로 없어지는 일이다. 소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녹아서 없어지고 만다.   세상에 대한 신자들과 교회들의 사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교인들과 교회들은 썩어져 가는 세상과 사회를 위해 방부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세상과 사회는 그 대로 놔두면 썩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들은 맛이 없는 이 세상의 삶을 위해 조미료의 역할을 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삶의 보람과 의미, 재미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소명 의식과 사명 의식을 부여해 주어야 한다. 또한 교회들은 세상의 어느 곳이나 깊이 파고 들어가서 녹아 없어지는 희생의 역할을 해야 한다. 없어진다는 것은 희생을 의미하고 손해 보는 것을 뜻한다. 돈도 손해보고 시간도 손해보고 건강도 손해보고 마지막에는 생명도 손해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교인들과 교회들이 ‘소금’이 되었을 때 ‘빛’의 역할도 감당할 수 있다. ‘빛’이 하는 일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어두움을 몰아내는 일이다. 숨어 있던 더러운 것들을 밝히 드러내는 정화와 청결의 일이다. 둘째는 밝음과 따뜻함을 가져다주는 온화의 일이다. 빛이 비치면 따뜻함과 기쁨이 생긴다. 셋째는 방향을 제시하는 등대의 일이다. 등대의 빛은 배가 항해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세상에 교인들과 교회들의 사회적 책임도 마찬가지다. 교회들은 첫째로 세상의 어두움과 죄악을 드러내고 몰아내는 정화와 청결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어 어둡고 차가운 이 세상에 밝음과 따뜻함의 빛을 비치는 온화의 역할을 해야 한다. 셋째로 혼돈 가운데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안내자의 역할도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교인들과 교회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 중의 하나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선하고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할 일은 소금과 빛이 되어 착한 행실들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는 일이다. 기독교 문화는 우리 사회 전반에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는 기독교인들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세속의 문화가 우리 젊은이들의 사고를 지배할 때 우리 교인들과 교회들이 소금과 빛의 문화를 사회 속에 퍼뜨려야 한다. 세상의 문화가 쫓고 있는 썩고 음침한 것들을 정화하여 십자가가 드러나는 영생의 빛을 소개해야 한다. 기독교 문화는 세상에 맛을 내고 빛을 더하는 역할을 감당해내야 한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강변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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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0-02
  • 정의를 부도내지 말자
    과거 미국 오바마 정부가 부도날 뻔 한 적이 있다. 미의회는 의회의 합의에 따라서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1시간 30분 앞둔 시점에 셧다운을 끝내고 디폴트를 막기 위한 합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긴장시켰던 미국의 국가 부도 위기는 일단 모면했으며 일시 해고됐던 40만 명의 공무원은 16일 만에 다시 일터로 돌아가게 됐다. 문을 닫았던 연방 정부 기관들은 17일부터 다시 문을 열고 정상업무에 들어갔지만 2주가 넘는 셧다운의 피해액이 약 25조 7천억 원에 달하게 됐다.   세상은 신용사회다. 부도를 내면 안 된다. 79년도에 미국에 처음 가서 신학교도 다녀야 하고 교회일도 돌보아야 할 것 같아 중고차를 사려고 자동차딜러에 가서 차를 고른 뒤 계약금을 조금 내고 나머지 금액을 융자하려고 하니 크레딧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여 친구목사가 대신 보증을 서서 자동차를 산 기억이 난다. 미국은 신용사회여서 크레딧이 없으면 아파트도, 자동차도, 심지어는 전화도 놓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오래전 뉴스를 보니 신용에 신용을 가져야할 미 연방 하원의원들이 작게는 수십장에서 많게는 700여장까지 개인수표를 습관적으로 부도내어 은행들을 골탕 먹였다니 미국의 양심도 이제는 부도나기 시작하였는가 보다. 금융가의 부도, 정치인의 부도 등 여기저기 부도로 인하여 국민들이 불안해지고 있다. 이것은 돈의 부도가 아니라 양심의 부도인 것이다.   일찍이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은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D. C. 링컨 메모리얼 기념관 앞에서 열린 흑인 노예해방 100주년 기념대회에서“나는 한 꿈을 가지고 있다”란 명연설을 했는데 그는 그 연설 중에서“나는 나의 네 자녀가 언젠가는 피부 색깔에 의해 차별받는 그런 세상이 아닌 성숙한 성품에 따라 대우받는, 그런 세상에서 살 것을 꿈꾸고 있다”고 절규에 가까운 호소를 했다. 또한 킹목사는 자유를 위해 같이 투쟁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고통을 나누고 같이 감옥에 가면 어느 날인가 우리는 자유를 쟁취하게 될 것이며 그 자유의 종소리가 이 마을과 저 도시에 울려 퍼질 때 흑인과 백인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개신교와 천주교인이 손에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드디어 자유를”이란 영가를 부를 것이라는 간절한 꿈을 갖고 투정했는데 막상 헌법을 통해 자유를 얻고 보니 그것은 부도난 수표였다는 것이다.   법은 있는데 적용이 안 되고 외모는 있는데 알맹이가 없어 찾아 쓸 수 없는 부도난 수표만을 받았다고 통탄한다. 정치인이 선거철에는 공약을 하고 그리고 어느 정도 되면 그 공약을 부도낸다. 사업가가 국민의 유익을 위해서, 민생을 위해서 사업한다고 말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 말은 사라지고 개인 이익에 취하여 그 말을 부도낸다.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은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필요충분의 조건일 수밖에 없겠지만 국가를 경영하는 한 리더의 결정의 관점에서 보면 또 하나의 부도일 수밖에 없다. 교수들의 서명운동과 서울에 있는 명문대생들의 촛불시위 그리고 야당 의원들의 삭발을 허투로 봐서는 안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아담의 후손이다. 우리 속에는 탐심과 거짓과 시기와 질투가 자리 잡고 그리고 밖으로는 정의와 공의와 진리를 추구하고 있지만 실상은 본질적으로 죄의 속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나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도를 고의적으로 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 더 주님을 가까이하고 성령으로 거듭날 때 우리는 좀더 이 세상을 밝게 할 수 있는 정의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은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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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9-25
  • 고향교회와 하나 되는 한국교회
      얼마 전 민족의 명절 한가위를 맞아 기쁜 마음을 한 아름 안고 고향을 찾아온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추석은 한마디로 ‘민족의 대이동’이라 불릴정도로 많은 이들이 고향을 찾았다.오늘날 명절 풍속도는 과거와 사뭇 많이 바뀌었지만, 온 가족이 한곳에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며 정을 나누는 일에는 변함이 없으리라 본다. 어린 시절 한때로 기억하기에는 우리네 고향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세월의 미동 없이 우리를 반겨주는 고향의 존재는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 얼마 남지 않은 안식처이다. 그리고 고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는 유전적 가족만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가족인 교회가 고향에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산업사회에 진입하면서 일어난 도시 집중화 현상은 고도성장 시기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귀농·귀촌 문화가 조금씩 퍼지고 있지만, 일자리와 양질의 교육을 찾고자 대도시로 몰려드는 젊은 사람들의 행렬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렇기에 학교를 끝마치고 풀밭을 뛰놀던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고 예수님 말씀을 가르치던 주일학교도 문을 닫는 일이 지금 우리네 고향의 현실이다. 이는 고향교회가 처한 위기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임계점이 넘어버린 것으로 교인 수의 회복을 넘어 교회 생존을 염려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고향교회의 현실이다.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교회만이라도 이 사회가 돌보지 못하는 저 고향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면 고통을 호소하며 삶을 지탱하기 버거워하는 우리의 고향을 돕는 일에 힘써야 한다.도시교회처럼 우리가 자주 찾아가지는 못할지언정 고향교회를 지키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서 있는 자리 또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리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할 영적 공간임을 잊어선 안 된다.이 공간을 채우고자 오랫동안 명절마다 고향교회 방문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해왔다. 오랜 울림이 한국교회에 전달되었는지 많은 이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 감회가 새롭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 구성원 모두가 지속적으로 고향교회를 위해 부단히 움직여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고향교회를 위한 헌금문화 정착을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바이다.미국사회에선 유고 시 가족들에게 필요한 만큼 재산을 남겨주고 남은 재정을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다니던 교회에 상속하는 문화가 있다. 그저 부모님과의 추억을 상기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교회를 돕기 위함 때문이다. 또한 소득 일부를 고향교회에 매달 보내기도 하기도 한다. 비록 몸은 도시에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존재임을 자각하는 기독교인들이 뜻을 모아 고향교회를 돕는 이 문화는 한국교회가 충분히 본받을만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지금까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 속에서 한국교회가 부흥한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받은 이 축복은 도시에 있는 개교회만을 위함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 공동체 전체에 나누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희망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하나님의 바람에 우리 모두 함께할 때 하나님의 나라에 한 발짝 더 다가가지 않을까. 고향교회를 향한 한국교회의 사랑이 식지 않길 소망한다. /미래목회포럼 이사장·거룩한빛광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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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9-06
  • 추석 명절을 믿음 안에서
      추석명절을 맞이한다. 옛날 명절은 그 의미가 상당히 컸었다. 기대감과 기다리는 마음도 있었고 헤어져 있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혈육공동체를 재삼 확인하고 우의를 다지는 기회였다. 그래서 어렸을 때 그 명절날을 손꼽아 고대하며 기다렸던 추억이 있다. 그 시대에는 사회공동체 그리고 가족공동체가 오늘같이 흩어지지 않고 강하게 결속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때에는 지금보다 훨씬 도덕과 질서와 상하관계가 분명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공동체의 건강성이 심하게 훼손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에 가서 살아갈 강령을 주실 때 모든 남자는 일년에 세차례 예루살렘에 모일 것을 당부하셨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명령하신 대로 연 3차례 예루살렘에 모여 이스라엘 공동체를 확인하고 돌아가곤 하였다. 그들은 시골길을 걸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도 그 행군을 번거로워 하지 않았다. 적어도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명절의 의미는 명절 그 이상의 날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명절에 대한 기대도 기다림도 없고, 명절이 무슨 날인지도 모른채 살아간다. 오늘은 그만큼 삶이 삭막해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잊혀져 가는 명절의 의미를 되새겨 새롭게 가정공동체 그리고 민족의 공동체를 다시 확인하고 모두들 뿔뿔히 흩어져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의 느슨한 삶을 다시 조여주고 구심점을 확인시켜 주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이 추석은 우선 감사의 날로 맞아야 한다. 설날은 일년의 삶을 하늘에 맡기는 명절이라면 추석은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날이다. 우리나라는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추석절에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다. 농사는 하늘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함을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농부들은 경거망동을 하지 않는다. 가물때에는 하늘에 비를 달라고 기우제를 드렸고 옛날 동네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모두 모여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말하자면 회개의 제사였다. 그리고 농부들은 농사를 지어 첫곡식으로 먼저 하늘에 감사하고 이웃끼리 나누어 먹었다. 그것이 인간 삶의 원형이다. 이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 그런데 오늘은 지각없는 시대가 되었다. 오늘은 지식은 있는데 지혜가 부족하고, 꾀는 있는데 덕이 부족하고, 누림은 있는데 감사가 없다.   그리고 추석은 가정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명절이다. 성경을 보면 명절날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객과 고아들과 함께 즐겁게 지키라고 하셨다. 가정을 결속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최대관심처는 가정이다. 가정에 대해서 상당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정 파괴범은 중벌로 다스리도록 하셨다. 가정은 신성해야 하고 경건이 있어야 하고 튼튼해야 한다. 가정은 몸의 심장같은 곳이다. 가정이 건강하면 삶 전체가 건강해진다.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명절은 먹고 마시고 노는 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날이다.   특히 오늘 명절의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것은 우리사회가 산업화 사회로 발전하면서 가족공동체가 전국단위로 그리고 세계로 흩어지면서 명절이 없으면 1년에 한차례의 만남도 이루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 결과 오늘 가족공동체가 느슨해지고 가족애가 사라지며 더 나아가 민족 공동체의 분열양상으로까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현대인들에게 이 명절의 의미가 다시 해석되고 새롭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흩어지는 이 시대에 소중한 우리의 가정과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결속되게 만드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촌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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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9-05
  • 장로교 총회를 향한 우리의 기대
     매년 9월이 오면 장로교는 성총회가 열리고 교단을 섬기고 이끌어 갈 지도자(총회장)를 선출하게 된다. 지도자의 책임이 참으로 중요하다. 서양 속담에 “노루가 이끄는 사자떼보다 사자가 이끄는 노루떼가 더 강하다”란 말이 있다. 지금 이 나라도 지도자로 인하여 양분되고 사람들이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이번 성총회를 통해 하나님 마음에 맞는 우리 모두가 기대하는 바른 지도자가 세워지기를 바란다. 총회를 앞두고 오늘의 한국교회를 생각하면서 한국교회의 원로로써 몇 가지 조언을 하고 싶다. 첫째로 현재 한국교회를 가르켜 위기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교회 위기는 바로 지도자의 위기이다. 그러기에 이런 위기의식으로 지도자 된 우리가 자신의 처절한 회개와 결단과 각오를 갖는 성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모 언론지에서 종교지도자들의 신뢰도가 신부나 승려보다 개신교 목사가 더 낮아지고 있다는 부끄러운 보도를 보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지도자 된 우리가 먼저 변화하고 결단하면 교인들이 변화되어 한국교회가 변화됨으로 이 사회를 향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둘째로 사분오열되고 있는 한국교회를 연합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성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 주님은 하나되기를 원하시며 하나되기를 명령하셨는데 현재 한국교회(특히 장로교회)는 교리와 신학을 핑계로 찢어지고 갈라져있지 않은가? 심지어 교회연합기관마저 연합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모습이므로 사회를 향해서도 기독교가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기에 사회로부터 실망과 무시를 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얼마전 장로교 합동측과 통합측 지도자들이 함께 연합으로 예배드린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잘하고 있다고 격려의 말도 하고 싶다. 교리나 신학도, 그리고 어떤 이해관계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 셋째로 한국교회는 우리의 자세를 더 낮추어 우리 주위에 약한 이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에 더욱 힘쓰는 성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 안에 우리가 돌봐야 할 소자들이 많이 있다. 그곳이 바로 작은 개척교회들과 목회자들이다. 외적으로는 한국교회가 큰 부흥을 가져 왔기에 세계 10대 교회 안에 한국교회가 6교회나 된다고 하며 세계 곳곳에 파송된 한국 선교사들이 미국교회 다음으로 파송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 안에 작은교회(미자립)가 70%를 넘고 있다는 현실을 우리가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큰 교회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식으로 작은교회가 자립하도록 결단을 해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 유가족 자녀를 돌보는 일에도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필자는 은퇴 후 10년이 동안 비전교회와 목회자 유가족 자녀들의 장학사업을 계속 보람있는 사역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탈북자들을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보듬어야 한다. 얼마 전 서울 관악구에서 일어난 탈북자 모자가 굶어 죽었다는 가슴 아픈 보도를 들으면서 여기에 한국교회는 책임이 없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탈북자들을 선교하고 돌봄으로 이들이 통일될 때 북한선교의 주역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총회나 총회장 선거와 이·취임식이나 거대하게 치루고 마는 모임이 되지 않길 바란다. 한마디 더 충언하고 싶은 것은 사회적으로 교회적으로 비판의 이슈가 되는 M교회 문제도 이번 총회에 신선하게 마무리되어 우리 모두 박수칠 수 있길 기대해본다. 귀 총회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좋은 결실이 있는 성총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싶다.  /기감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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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8-27
  • ‘책’이 허물어지는 시대
    대한기독교서회는 구한말에 문서선교를 위한 교회연합기관으로 설립되어 올해 6월로 129주년이 지났다. 내년 130주년 기념 준비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즈음에 생각이 복잡하다. 과연 ‘문서 선교’라는 것이 앞으로도 유효한 일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가 쉽지 않다.  한때 전자책이 출현하면서 종이책이 살아남을지를 놓고 찬반 논의가 뜨거웠다. 그러나 이 논의는 이제 진부한 일이 되었다. 종이책과 전자책 사이의 관계가 그리 적대적이지 않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지금은 종이책·전자책 상관없이 책을 읽지 않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책’이라는 ‘개념’ 자체가 기초로부터 무너져 내리는 때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요즘 사람들도 인터넷에서 글자로 된 텍스트를 읽는다. 그러나 그것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정보를 찾아서 읽을 뿐이다. 정보는 질문에 즉답을 주지만, 단편적이고 실용적이다. 그에 반해 책은 오랫동안 연구한 지식이나 지혜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묶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책에는 서론이 있고, 주제에 대한 연구사나 주제에 대한 반론까지를 포함하는 다양한 논의를 통해, 왜 저자의 논지가 옳은지를 드러내고 입증하는 본론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정리하는 결론이 있다. 그러니 한 덩이의 문서, 한 권의 책을 읽으면 거기 담긴 저자의 질문과 고뇌, 길을 찾기 위한 연구의 노력, 잘 정리된 지식과 지혜를 얻게 된다.  책은 인류가 글자를 발명한 이후 오랫동안 지식과 지혜를 담는 소중한 그릇이었다. 하지만 이제 정보를 찾기 위해 전자책이든 종이책이든 서론부터 결론까지 인내심을 갖고 읽는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 짧은 정보와 영상이나 동영상을 찾는 시대가 되었고, 공영방송에서 대한민국의 ‘난독’ 증상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에까지 이르렀다.  기독교,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책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만큼 많은 신학과 신앙서적을 생산한 종교는 없을 것이다. 종교개혁에 맞선 프랑스 구교는 개신교인을 색출할 때, 성서 ‘책’이 나오면 체포했다. ‘책’이 개혁교인의 증거였던 셈이다. 책을 가진 신앙인들은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고 처형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책’에서 멀어졌다. 간증이나 성공이야기 정도는 몰라도 진지한 질문으로 책을 정독하는 사람들은 찾기 어려워 보인다. 한쪽에서는 ‘성경필사’가 유행하지만, 예배시간조차 찬송 성경을 찾아 읽는 사람은 드물다. 예배당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성경 구절, 찬송 가사나 멜로디를 다 보여주기 때문이다. 교회 홈페이지에도 동영상이 넘쳐다.  시대를 어찌 거스르겠나 싶기는 하지만, 책에서 건지는 지혜는 다른 곳에서 얻기 힘들고, 책에서 건지는 신앙 성찰의 깊이는 다른 곳에서 구하기 어려울 것이니, 생각만 더욱 많아진다.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런 문제에 관해서 토론하는 때가 올까?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능성이 희박할 거라는 비관이 우세하지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남겨놓아야 하는가?  요즘 한일 간 대립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부당하고 무례한 아베 내각의 처사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른다. 경제적으로 일본을 넘어서자는 ‘극일’ 분위기가 팽배하다. 하지만 경제만일까. 문화적으로 책과 문서에 대한 태도에서도 일본을 앞서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문서선교’라는 개념은 나를 곤궁하게 만든다.  /대한기독교서회 사장
    • 오피니언
    • 정론
    2019-08-12
  • 통일운동은 ‘반공이데올로기’ 극복부터
     언젠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한 기독교텔레비전에서 강남의 어느 교회 예배실황을 중개하는 것을 우연히 지켜본 적이 있다. 마침 목사가 통성기도를 인도하는데 내용이 이러했다. “저 아말렉과 같은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과 남쪽의 좌익용공세력을 모조리 도말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자 그 안에서 우렁찬 함성으로 ‘아멘’이라고 응답하였다. 목사는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남한의 용공좌익세력을 하나님께 다 칼로 쳐 죽여 달라고 통성으로 기도한 것이고 교인들은 다 우렁차게 아멘을 한 것이다. 그러면 북한의 2천만을 쳐죽여야 하고 남한에서도 얼마간의 사람들을 쳐 죽여야 한다고 했을 때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심정은 참으로 착잡하실 것이다. 세상에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목사가 기도할 때 수천만 명을 대량학살해달라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수천명이 넘는 교인들이 일제히 아멘했으니 우리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착잡한 심정을 넘어 아연실색을 하셨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목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2천만 명 이상 칼로 쳐서 죽이신다면 그 하나님을 우리가 은총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몇몇의 한국교회 무리들은 예수님의 화해의 십자가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무리들 중에 서 있었다. 갈등과 대립의 한반도 위에 어떻게 예수님 십자가 고결하신 뜻을 펼치기보다는 사울의 열심을 가지고 남과 북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반기독교적인 반예수적인 행태들을 계속해 온 것이다. 십자가의 속죄의 은총을 나누어진 남과 북의 갈등과 대립의 현장에 대입시키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보수적 정권보다도 더 강한 멸공주의와 반공주의를 앞세워 실질적으로는 평화통일을 반대하고 멸공통일 흡수통일을 지향해 왔다.  역대 보수를 표방한 정권과 세력들은 남북 간의 갈등을 극대화시키고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고조시켜 자신의 독재정권을 계속 유지하려 했고 실질적으로는 같은 이해를 가진 북쪽과 적대적 공존을 해왔다. 이런 악한 정권들에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빌붙어 독재정권과 부화뇌동하며 서 반공과 멸공을 십자가 신학보다도 더 앞장세워 자기 스스로 반기독교의 세력임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한국 기독교는 통일운동을 하기 전에 먼저 그동안 기독교의 정체성과 반대로 가서 반공이데올로기를 절대화하고 그리고 정권과 빌붙어 온갖 이권을 노렸던 타락한 일들을 먼저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반공주의를 내세우던 기독교 세력에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고 침묵으로 신경을 껐던 세력들도 이제 회개를 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과거의 죄악을 회개함으로 시작해야 한다. 또한 무슨 흡수통일이 되면 북한에 내 교파 내 교단의 교회들을 세우겠다는 발상을 버려야한다. 그리고 어떻게 남과 북이 이질성을 최소화하고 동질성을 극대화하여 하나 됨을 이루는 일에 우리 교회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한반도 위에 육화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또 그 일을 실행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눈물로 씨를 뿌리는 가운데 한반도에 드리우는 먹구름 속에서도 언뜻언뜻 푸른 하늘을 보이게 하는 일에 우리 한국교회가 귀하게 쓰일 것이다. /기장 전 총무·작천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8-06
  • 한국교회의 한목소리가 필요한 때
     최근 우리 사회가 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심각한 이념대립에 휩싸이는 모습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이러한 좌와 우의 이념대립은 더 나은 역사발전에 긍정적인 부분이 있지만, 심각한 사회적인 혼란을 야기하는 하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 최근 우리 대통령이 평화와 화해를 전제한 대북정책을 내 걸고,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은 감사한 것이지만, 북한 최고권력자의 언행과 태도의 별다른 무 변화에 비해 오히려 우리는 우리 대통령의 지나친 친북적인 언행에서 대한민국 체제안정의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국민의 눈에 이념대립을 더욱 부추기는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게다가 그간 북한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소위 ‘주사파’의 여론몰이 행동에서 이념대립은 더욱 극렬해 지는 모습이다.  그러면 이러한 이념대립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먼저 우리 대통령의 포용적 리더십의 발휘가 참으로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한국교회의 대사회적인 역할이 중요해 진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념대립의 혼란극복에 기여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 이다. 그러한 역할이 한국사회를 더욱 안정하게 하며, 실제로 우리 국민들을 진리의 길로 선도하는 구원의 사회적 역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마저도 하나된 목소리로 시국의 혼란에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사회의 이념대립을 부추기는 당사자들이 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게 여겨진다.  최근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가 ‘용감하게’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면서 우리사회의 좌편향을 향한 이념전쟁을 선포했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대립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반대로 ‘한국교회원로들’을 비롯한 한쪽 진영에서는 한기총 대표의 행동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도, 좌편향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가를 내 놓지 않아 역시 한쪽에 치우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같아 역시 안타깝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한국교회가 우리사회의 좌우이념대립 극복에 기여할 기회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묻고 싶다. ‘한국교회원로모임’을 비롯한 반대측이 한기총을 끌어안으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 정권과 우리 사회의 좌편향적 행보에 대해 우려의 한목소리로 대응할 수는 없었던가? 그리고 진보적인 교회의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있는데, 이 기관은 왜 지금 정치적 상황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는가? 한기총은 지금 한국교회의 대표적 교단들의 불신으로 그 대표성이 의심되고 있다. 대표회장은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고 투명하지 않은 재정문제로 경찰조사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지난 90년대 대북식량지원에 앞장섰던 한기총 역사를 생각하면 오히려 한기총이 회개하여 연합기관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우리 모두 이제 새로운 교회연합운동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교회는 현 시국의 이념대립문제를 인지하고, 대통령을 지지하는 목소리와 반대하는 목소리 모두에게 귀를 기울여야하다. 어쨌든 한국의 보수교회와 진보교회가 서로 연대하여 한국교회가 대정부, 대사회, 대북한, 대국제적인 이슈들에 한목소리로 진리를 증언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행동이 절실히 필요한 때가 분명하다.  /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전 총신대 총장  
    • 오피니언
    • 정론
    2019-07-30
  • 상식을 지키며 살아가기
     사회적 문제로까지 번진 목회자들의 세금납부 관련 논쟁은 국민들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이러한 논쟁을 자칫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목사들의 탐욕으로 생각하는 국민이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목사들에게서 정부가 거두어들이는 세금보다 목사들에게 보조해주고 혜택을 주게 된 액수가 훨씬 많다고 한다. 1년 수입 4천만 원 이상이 되어야 세금을 내게 되는데, 그에 못 미치는 목사들의 수가 훨씬 많은 것이다. 대다수의 목사들은 세금을 낼만한 사례비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대형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들, 대형교회가 아니라도 카리스마적인 목회를 하는 목사들 중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례를 받는 이들이 있다.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이미 몇 몇 대형교회 목사들의 금전비리 등이 회자되면서 교회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모든 목사들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각인되어 버렸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오래 전에 강남에서 은퇴한 어느 목사는 “내가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인데 대통령보다 월급이 적으면 안 된다”는 논리로 수 십 년 간 대한민국 대통령보다 많은 연봉을 받았다. 현직의 어느 목사는 연봉 2억에 판공비가 매월 5000만원이라고 하고, 지금 교회헌금 횡령죄로 3년형을 받은 어느 목사는 판공비가 50억이고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적그리스도라고 말한다고 한다. 지난 40여 년 동안 금전적으로 빠듯하게 살아 온 목사로서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이게 실화냐”라며 놀라곤 한다. 목사가 꼭 가난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평균 이상의 부를 누리게 될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도하러 갈 때에 전대를 가지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2천 년이나 지나 사회적 형편과 문화가 달라진 오늘에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뜻과 정신은 살려야 할 것이다. 많이 받아서 잘 쓰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많이 받아서 잘 쓰기가 어렵다는 것은 사람의 심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왜냐하면 많이 가지게 될수록 더 탐욕스러워지는 것이 인간행동의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대형화 되고 금전적인 힘이 세어지게 된 교회가 그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써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 그러하지 못하다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교인이 많아지고 헌금이 많아지면 그것으로 땅을 넓히고 교회를 크게 지으며 자기 몸짓 불리기에 열심이었다. 또 대형화 된 만큼 담임목사에게 드리는 사례비나 판공비가 일반상식과는 거리가 있을 만큼 과하게 된 경우도 많았다. 또 그렇게 많이 받아 누리는 목사들 가운데는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도 있다. 물론 대형교회라고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상식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한국교회 전반과 목사들 전부에게 주홍글씨처럼 덧 씌어 지게 되었다는 것이 선교적으로 큰 손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억울해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일부 교회와 목사들의 비상식적인 퇴행이라지만 그것은 한국교회와 목사들 모두의 공동적인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의 언어를 회복해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감리회 목회자들의 모임 새물결 상임대표·안산 화정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19-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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