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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어날 사람을 차별대우해서는 안 된다
      2020년 10월 7일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낙태죄 개정안은 여론이 자연법칙을 이기고 정치가 생명과학을 이긴, 후대에 수치스러운 시도가 될 것이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닌다”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명시하였다.   헌법 정신은 ‘모든’ 생명의 보호이며, 민법에서도 생명의 시기는 수태한 때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법 정신이나 실정법이 태아가 생명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태어날 사람의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국가가 법으로 허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결정인가! 낙태 허용과 다름없는 이 개정안의 어디에서도 태아 생명권 보호를 위한 고려와 최소한의 법적장치를 찾아볼 수 없다.   낙태죄 폐지에 대한 여성의 목소리는 낙태에 대한 책임이 남성과 사회는 빠진 채, 여성에게만 부과되어 온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러나 오늘 입법 예고된 법무부 낙태죄 개정안은 임신의 공동 주체인 남성은 합법적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하고, 수많은 여성은 피임의 수단으로 낙태를 강요당하게 만들며,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태아는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동안 지속해서 제기되었던 임신의 책임이 있는 남성에게 책임을 묻는 법안 마련 등의 노력을 해보지도 않은 채, 임신 14주까지 사유를 불문한 낙태 허용 입법 예고는 태아의 생명 보호의 최소한 장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엄연한 차별이며, 생명침해이고,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생명과학 전문가 그룹인 의학계의 의견을 겸허히 수용했는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부는 남성의 양육책임법을 제정했는가? 여성의 육아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낙태가 여성의 몸과 마음에 어떤 해를 입히는지에 관해 충분한 연구와 의견수렴을 했는가? 여성과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아무런 대책 없이 법무부의 낙태죄 개정안 입법 예고에 대해 크게 우려한다.   대한민국의 정부는 태어난 사람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악법을 예고하였다. 과학과 의학은 생명의 시작에 대한 진실을 계속 증명해내고 있고, 사회는 모든 생명이 조건과 상관없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의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는 중대한 차별을 입법 예고하였다. 우리는 어느 순간까지는 생명이 아니었다가, 어느 순간부터 생명으로 변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주까지의 태아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근거는 무엇인지 대한민국 정부에게 묻는다. 97%의 낙태 시술이 임신 14주 이전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법조문의 실제 내용은, 앞으로는 모든 낙태를 자유롭게 허용한다는 뜻이 아닌가! 의학계와 생명과학계, 그리고 여성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채, 일방의 의견만을 편들어 14주라는 생사의 구분선을 마련한 정부의 편의주의적 태도를 강력하게 규탄한다.   태아의 생명권 보호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실제적 조화를 이뤄 개정안을 발표하였다고 하였으나, 낙태 허용과 다름없는 이 개정안의 어디에서도 태아 생명권을 보호하는 고려와 최소한의 법적 장치를 찾아볼 수 없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생명을 타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반인권적 시도를 정부는 당장 철회하기를 요구한다. 태아는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고, 우리 모두 경험한 과거이다. /사단법인 프로라이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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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10-27
  • 정도를 걷는 개혁의 정신 회복하자
      두 번째 밀레니엄을 앞두고 라이프지는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 100가지와 인물 100인을 조사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쿠텐베르크의 성경인쇄와 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에 이어 세 번째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순위에 들어있다. 미국 문화권에서 선정한 것이기에 다른 문화권의 시각에서 보면 선정과 순위에 다소 불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 조사하던지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이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사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과 사건임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종교개혁은 어느새 우리의 삶에 자리잡고 있는 천 년의 사건이 되어 있는 것이다.   10월 31일은 종교개혁기념일이다. 종교개혁은 과거에 지나간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진행해야 할 현재진행형의 사건이어야 한다.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아 종교개혁의 본질과 정신을 다시 한번 생각함으로 오늘의 개혁을 이어갈 우리의 마음을 되짚어 보자. 종교개혁의 정신은 무엇인가?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본질에로의 회복이다. 개혁이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은 원래로의 회복, 원래적 진리에로의 회귀가 종교개혁의 본질이다. 15세기 가톨릭은 기독교의 본질을 무수히 왜곡시켜 놓았다. 루터의 외침은 이 왜곡으로부터 개혁하여 원래의 본질적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15세기 로마 교황권은 어떻게 기독교 진리를 왜곡시켜 놓았는가?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가장 유명한 것이 면죄부이다. 루터의 95개 논제 중 27조는 이렇게 말한다. ‘헌금함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면죄부란 간단히 말해서 세속적 돈으로 신앙적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구속의 사건은 아무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만다. 또 95개 논제의 79조는 말한다. ‘교황이 사용하는 십자가상이 그리스도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모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 교황이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는 것이다. 모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한참이나 왜곡하고 있는 것들이다. 심지어 95개 논제 10조에는 이런 언급까지 있다. ‘임종을 맞은 자에 대하여 연옥 문제를 내세워서 속죄를 보류하는 사제들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며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결국 교황은 하나님을 대신했고, 돈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대리했다. 이런 왜곡으로부터 본질을 회복하고 참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종교개혁의 바른 정신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세계는 어떠한가? 인간적인 것들이, 세속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지 묻고 싶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이 교리, 신학, 목사, 사람, 돈, 권세, 교권일지라도 하나님보다 상위 개념에 둔다면 그곳이 개혁의 자리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사회를 개혁하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개혁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비난받고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개혁의 정신을 망각하고 오늘의 한국교회가 자기의 이익추구에만 골몰하고 있을 때 이제는 교회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부단스런 짐이 되고있지는 않는지 우리 교계가 통렬한 자기반성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다. 개혁의 정신으로 다시 무장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 형성을 통해 한국교회가 상실했던 사회 신뢰를 회복하는 데에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가 처한 사회현실은 어떤가? 참 진리의 가치관이 제대로 대접받고 있는가? 정도가 아닌 꼼수와 술수가 지혜로운 처세술로 용납되고 있지는 않은가?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참 진리의 가치로 돌아가야 한다. 아무리 많은 이익이 있더라도 사도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 참 진리가 있는 정도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어제의 종교개혁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져주는 화두이다. /루터회 전 총회장, 새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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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10-22
  • 추석을 맞는 기독교의 효정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자유자가 되었다. 우리는 죄와 문제와 우리 육체를 이기기 위해서 자유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유자가 되었다. 그래서 자유자는 예배자이다.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고린도전서10:20)라고 했을 때의 제사는 제사가 아니라 고사이다. 제사와 고사는 다르다. “이방인의 고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라고 성경에 번역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와 고사를 구분하지 않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사와 고사를 구분한다. 부모님과 조상에게 하는 것은 고사가 아니라 제사라고 구분이 되어 있다.   정확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도 한국에는 무당집에 점치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며 그 중에는 교회의 제직자들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축복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영혼구원 받기 위해서이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도 잘되는 것이다. 신앙생활 잘하면 그 다음에 복이 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도 예배하는 것도 복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면, 나라를 위해서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나라가 책임을 지는 것이다. 머슴은 주인을 위해 살면 주인이 책임져줘서 영양 있는 것 맛있는 것을 다 먹게 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인격체이시고 완전한 분이시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심판주가 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음 받았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하게 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온전하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영적 순결을 지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녀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위한 고난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성경적 효는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어른을 공경하며, 제자는 스승을 존경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성실과 열심으로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부모님과 상의하고 결정하자고 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어른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존중하고, 스승은 제자의 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린이·청소년·제자를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로 봐야 한다. 그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겸손과 온유로 인내하며 가르쳐서, 신앙과 삶을 바르게 전수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나라, 가족, 교회는 밝은 미래를 갖게 될 것이다.   천국은 가족이고 가족은 작은 천국이다. 하나님은 가족공동체를 귀하게 여기신다. 가족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최초로 만들어 주신 공동체다. 가족이 행복해야 한다. 우리의 가족이 바로 설 때 신앙천대, 축복천대, 자손천대가 이루어진다.   나라 사랑은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와 더불어 대한민국에 속한 백성이다. 최고의 나라 사랑은 대한민국을 복음화하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가 제물이었다면 신약의 예배는 감사를 가지고 가야 한다. 우리가 물질을 드릴지라도 감사하며 드려야 한다. 물질을 아무리 드려도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드리는 물질은 하나님이 안 받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으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심령이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외에는 어느 누구도 직접 창조하지 않으셨다. 모든 사람은 부모님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버금가는 은혜가 부모님의 은혜인 것이다. 올 추석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부모님을 공경하는 효심을 담아 가정예배를 드릴 때 참다운 기독교의 효 정신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인천순복음교회 원로목사,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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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9-25
  • 생산적인 장로교 총회를 기대한다
      매년 9월이 오면 장로교회는 총회를 맞이한다. 총회를 통해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하고 거창하게 취임식을 하지만, 그것을 모든 것이 끝이 나고 매년 한국교회가 새로워졌다는 말을 들어볼 수 없다는 것은 나 한 사람의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다시 한번 장로교 총회에 관해 기대해본다.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곧바로 절망이기 때문이다. 위기는 위험하는 뜻도 있지만, 다시 새로워질 수 있는 기회로 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모든 교회 지도자들의 공통된 의식은 한국교회가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이번 장로교 총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산적인 총회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세계적 코로나19의 재난 속에서 하루에도 수많은 확직자들이 생기고 수많은 귀한 생명들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몇 개월씩 교회 문을 닫아야 되고 온라인 예배가 일상적인 예배가 되고 있다. 얼마 전 CTS에서 어느 대형교회에서 텅 빈 예배당 앞에 온라인 설교를 시작하는데 설교자가 기도하면서 펑펑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도 함께 울었던 일이 있었다. 어쩌면 울고 있는 이 설교자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목회자의 모습이 아닐까! 필자가 생산적인 총회를 기대하는 것은 지난날에 수없이 치러진 총회의 모습을 탈피하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대로 좀 더 생산적이고 실제적인 변화와 개혁의 총회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이 글을 쓴다. 첫 번째로 이번 장로교 총회는 개혁적인 인물을 찾아서 지도자를 세우는 총회가 되길 바란다.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천사를 통해 일하지 않으시고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기에 개혁적인 지도자가 세워져야 한국교회는 개혁되고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가 깊고 대형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보다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개혁적인 목회철학으로 목회하는 지도자를 세워야 교단도 교회도 개혁될 것이다. 40대나 50대의 지도자를 한국교회 총회장으로 세우는 일은 무리한 기대일까? 한번 다시 깊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두 번째로 한국교회는 그동안 모이는 교회 위주의 목회였다면 코로나 재난 이후에는 흩어지는 교회의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온라인 예배와 함께 온라인 교인이 더욱 많아질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앞으로 흩어지는 교회의 사명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위한 교단적인 정책과 신학이 바로 서도록 총회 차원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지도자도 훈련해야 하며 교육 받은 지도자가 전력으로 사역에 매진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기 위한 정책도 세워가도록 총회 차원에서 연구하고 토의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한국교회는 이 나라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기만 하지 말고 오늘의 교회가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동참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런 문제들이 자살예방 문제요 저출산 문제요 빠르게 가고 있는 고령화 문제이며 최근에 중요한 이슈가 되는 동성애 문제나 차별금지법 문제도 총회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도 하고 반대도 해야 할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들을 개교회 문제로만 돌리지 말고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로 생각하고 총회 차원에서 필요한 정책이나 입법화를 위해 생산적으로 숙의하는 총회가 되기를 바라고 기대한다. 이번 장로교 총회야말로 오늘날 위기의 시대에서 한국교회가 기대하는 비전과 메시지를 줄 수 있는 희망찬 성총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기감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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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9-11
  • ‘사랑제일교회사태’와 한국교회의 대응
      사랑제일교회 사태는 극우적 정치이념과 근본주의적 믿음이 결합해서 일으킨 국가적 재앙이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국민의 생명안전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몰상식의 끝판’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막말과 폭언이 횡횡하고, 그 어디에도 이성과 합리적 판단이 들어설 곳은 없다. 이론 인해 한국교회는 코로나 재유행의 진원지가 되었고 사회적 공분의 대상이 되었다. 사랑제일교회 이외에도 교회감염이 지속되고 있지만, 사랑제일교회 발 감염은 그야말로 메가톤급이어서 우리 사회의 일상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고 한국교회에도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이 좋지 않았는데, 그 추락의 속도가 무서울 정도다. ‘신천지보다 더 하다’는 표현은 의료진들의 입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 신천지 교인들은 그래도 치료에는 순종적이었는데, 이번 교회발 감염자들은 병상에서 의료진들에게 폭언을 하고 생떼를 쓰는 등 그 태도가 불량하기 짝이 없다고 한다. 결국 식당이나 마트에 ‘교회 다니는 사람은 받지 않는다.’는 공고가 붙을 정도가 되었다.    필자의 교회도 버스정류장에 ‘교회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라는 포스터를 붙여놓았는데, 지나가는 행인들이 계속 찢는다.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교회가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심각하고 비상한 상황이다. 한국교회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전광훈 현상’의 구조는 간단치 않다. 교계의 문제를 넘어 여러 사회·정치적 고리를 가지고 있다. 그동안 전광훈목사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을 역임하며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광범위한 관계를 맺었고, 보수 정치인들과의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며, ‘보수기독교의 아이콘’으로 전국적 지명도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막무가내다. 국가적 재앙을 일으키고도 ‘바이러스 테러다’, ‘확진자 조작이다’는 가짜뉴스를 유포했다. 여기에 사랑제일교회 교인들은 검사를 거부하고, 병원을 탈출하는 등 반사회적 일탈행위를 일삼고 있다. 심지어 국민생명안전을 위한 국가의 방역활동을 정치방역으로 몰고 가며 방역당국을 고발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교계원로 몇 분이 비판하는 성명을 내기는 했지만, 의외로 한국교회의 각 교단은 침묵하고 있다. 사회적 이슈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한국교회의 내로라하는 지도자들의 침묵도 계속되고 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전목사와 함께 한 사안들이 있고, 무엇보다 교인들 중에서 그의 입장을 지지하고 따르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의 상황일수록 교회지도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예’할 것을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사랑제일교회 사태’에 대해서 용기 있게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사랑제일교회 사태’가 우리사회에 끼친 해악과 그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세상의 등불인 교회로선 부끄러운 일이다. 이미 여러 교단들에서 이번 가을총회에서 전목사를 이단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공교회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가 될 것이다.    ‘전광훈 사태’는 한국교회와 우리 사회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분단된 나라에 살아가는 아픔으로 인해, 사랑과 용서라는 복음의 가치와 정반대되는 증오와 대결을 키워 온 한국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상식과 합리에 기초하여 시민사회에 소통하지 못한 우리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교회에게 이 일은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다. 뼈를 깎는 아픔의 시간이 왔다는 말은 껍질을 벗고 새롭게 태어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진실로 그렇다. /기장 총회장·성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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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9-01
  • 한국교회 신학교육의 미래위한 제언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가 지탄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다. 게다가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마이너스 성장과 사회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같은 요소들이 복음전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신학교육, 즉 목회자 양성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대처해야 한다는 긴박한 요청은 당면한 과제이다. 해방이후 여러 가지 요인과 함께 한국교회가 급격한 성장을 하면서 지도자 수급을 위한 대처를 해야 했을 때 미래를 위한 교육이 아닌 당장 필요한 인력을 수급하기에 급급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부작용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발전함께 그 이면에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970년대 후반기부터는 신학교 지망생이 급격하게 많아지면서 신학교가 돈벌이 수단이나 교단과 학교의 외양을 키우는 도구가 됨으로써 신학대학들의 양적인 성장이 이루어졌다. 그렇다보니, 신학교육의 내실과 목적에 충실하지 못함으로 바르게 준비된 일꾼을 양성하지 못한 책임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하루에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기에 하루라도 빨리 대처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부족지만 몇 가지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 첫째 진정한 소명자를 발굴해야 한다. 언젠가부터 직업인으로서, 내지는 은퇴 이후의 제2의 의미 있는 직업정도로 생각하는 신학교 지망생들이 많다는 사실에 걱정이 많다. 그럼에도 신학교들은 정원을 채우기에 급급한 상황인지라 이들을 후보생으로 양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걱정이다. 진정한 소명자, 목회자로서 소양이 갖춰진 자는 지교회 담임목사와 당회가 가장 일선에서 발굴해야 한다. 둘째 종교적 기능인이 아닌 복음의 전문가를 만들어야 한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신학교육은 단순한 종교적인 기능인을 양성해서 현장에 당장 투입하기에 급급한 면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목회는 단순히 설정한 목표를 향한 성과를 위해서 기능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는 전인적 차원의 인간관계와 삶의 나눔과 섬김을 함께하는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목회자 역시 그 공동체의 일원이면서 지도자이다. 따라서 단순한 종교적 기능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공동체와 함께하면서 지체들과 동행하는 삶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를 만들어야 한다. 목회자는 결코 기업인이나 정치인과 같은 지도자가 아니다. 셋째 철저하게 헌신할 수 있는 헌신자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한참 성장할 때 신학교에 추천하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지도자로서 부족함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신학교에 가도록 했다. 어쩌면 그러한 일들이 오늘날 비판의 대상이 된 한국교회의 모습이 있게 된 원인들 가운데 있을지 모른다. 더 이상 한국교회가 우민화되어서는 안 된다. 지도자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소양과 충분한 신학적 의식이 준비되도록 해야 한다. 넷째 경건한 신앙인격자로 양성해야 한다. 단순히 지식에 머무는 신학교육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신자들과의 관계에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자신 역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경성하는 자의 모습으로 깨어있어, 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인격이 동반되지 않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닐 수 있다. 따라서 철저하게 신앙과 인격을 하나로 드러낼 수 있는 지도자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신학교육을 해오는 필자로서 한국교회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다./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어진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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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8-21
  • 한국교회 신학교육의 미래를 위한 제언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가 지탄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다. 게다가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마이너스 성장과 사회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같은 요소들이 복음전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신학교육, 즉 목회자 양성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대처해야 한다는 긴박한 요청은 당면한 과제이다.   해방이후 여러 가지 요인과 함께 한국교회가 급격한 성장을 하면서 지도자 수급을 위한 대처를 해야 했을 때 미래를 위한 교육이 아닌 당장 필요한 인력을 수급하기에 급급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부작용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발전함께 그 이면에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970년대 후반기부터는 신학교 지망생이 급격하게 많아지면서 신학교가 돈벌이 수단이나 교단과 학교의 외양을 키우는 도구가 됨으로써 신학대학들의 양적인 성장이 이루어졌다. 그렇다보니, 신학교육의 내실과 목적에 충실하지 못함으로 바르게 준비된 일꾼을 양성하지 못한 책임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은 하루에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기에 하루라도 빨리 대처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부족지만 몇 가지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    첫째, 진정한 소명자를 발굴해야 한다. 언젠가부터 직업인으로서, 내지는 은퇴 이후의 제2의 의미 있는 직업정도로 생각하는 신학교 지망생들이 많다는 사실에 걱정이 많다. 그럼에도 신학교들은 정원을 채우기에 급급한 상황인지라 이들을 후보생으로 양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걱정이다. 진정한 소명자, 목회자로서 소양이 갖춰진 자는 지교회 담임목사와 당회가 가장 일선에서 발굴해야 한다.   둘째, 종교적 기능인이 아닌 복음의 전문가를 만들어야 한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신학교육은 단순한 종교적인 기능인을 양성해서 현장에 당장 투입하기에 급급한 면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목회는 단순히 설정한 목표를 향한 성과를 위해서 기능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는 전인적 차원의 인간관계와 삶의 나눔과 섬김을 함께하는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목회자 역시 그 공동체의 일원이면서 지도자이다. 따라서 단순한 종교적 기능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공동체와 함께하면서 지체들과 동행하는 삶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를 만들어야 한다. 목회자는 결코 기업인이나 정치인과 같은 지도자가 아니다.   셋째, 철저하게 헌신할 수 있는 헌신자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한참 성장할 때 신학교에 추천하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지도자로서 부족함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신학교에 가도록 했다. 어쩌면 그러한 일들이 오늘날 비판의 대상이 된 한국교회의 모습이 있게 된 원인들 가운데 있을지 모른다. 더 이상 한국교회가 우민화되어서는 안 된다. 지도자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소양과 충분한 신학적 의식이 준비되도록 해야 한다.   넷째, 경건한 신앙인격자로 양성해야 한다. 단순히 지식에 머무는 신학교육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신자들과의 관계에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자신 역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경성하는 자의 모습으로 깨어있어, 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인격이 동반되지 않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닐 수 있다. 따라서 철저하게 신앙과 인격을 하나로 드러낼 수 있는 지도자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신학교육을 해오는 필자로서 한국교회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다.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어진내교회 담임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08-19
  • 인권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보장돼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차별을 받는다는 것은 행복한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합법적인 이유 없이 차별이 생기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있어서는 안 된다. 즉, 구별되어야 할 인권이 차별로 규정되고 보호받아야 할 인권으로 포장되어 법을 만든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첫째, 삶을 존귀하게 만드는 인권은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 법은 윤리(도덕)의 최소한의 규범이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 지식이나 가문, 학력, 경제와 사회문화적 영역의 차이가 인권을 침해하거나 차별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자유민주주의의 인권은 소중하게 지켜져야 한다.   둘째, 자연적 질서와 인간의 윤리는 태생적 동질성을 갖는다. 즉, 자연적 질서에 위배되는 것은 윤리의 파괴이다. 성경은 자연적 질서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을 가르치는 책이다. 종교적 가치를 넘어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 이를 통해 아름다운 세상이 존재하게 되며 서로가 배려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인권이라는 말로 자연적 질서를 위배하는 것은 인권이 아니라 윤리의 파괴이다.   자연과 사람의 본질적 가치를 유지하고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자연적인 윤리가 무너질때 인간의 기본적 삶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자연적 질서가 무너지게 하는 차별금지법은반대한다.   셋째, 쾌락만을 위한 인권은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지도의 대상이다. 교회는 한 사람을 천하보다 존귀하게 여기므로 인권을 중요하게 여기며, 사회적 인권의 보호를 반대하지 않는다.사회에 악을 끼치고, 윤리를파괴하는 사람들을 법정에 세우는 것은 보호되어야 할 인권이 아니라 지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편안한 삶을 공유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동성애, 성평등은 법률적 차원에서 보호되어야 할 인권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지도해야 할인권인 것이다. 더불어 파생적 성을 통한 동성애와 성평등으로 일어나는 결과는 무서운 질병(예: 에이즈)이 생성되고 전파되어 인간의 인격적 존엄성마저 무너지게 하고 파멸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성애와 성평등은 법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인권이 아니므로 법으로 제정하지말고 스스로 윤리적 가치를 평가받게 해야 한다. 동성애자와 성평등우호자들을 잘 지도하여 인간의 잘못된 성윤리에 의한 차별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질적 성에 맞는 삶이 되도록 정부와 인권위원회는 지도하여야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랑하나 동성애와 성평등의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   넷째, 포괄적 차별금지법에서 개별적 차별금지법으로 변경하여 역차별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 자연질서, 즉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적 질서에 위배되는 것을 제외한 차별금지법은 기본 평등권에서 보호되어야할 인권이므로 반대하지 않는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기본평등권의 충돌로 인한 인권 탄압이 생기는 것이므로, 개별적차별금지법으로 변경하여 모든 국민에게 인권이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정부와 인권위원회는 윤리와 창조질서를 파생적 성으로 파괴하여 무서운 질병을 발병케 하는 동성애와 성평등을 코로나19의 확산을 잘 방지한 지혜로 그들을 지도하여 일반 사람들의 행복추구권 또는 평등권이 역차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윤리는 타협과 포용이 있지만, 법이 생기면 다툼이 생기므로, 정부와 인권위원회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행복추구권에 역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바라는 교회의 외침에 귀 기울이길 촉구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표회장·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대행
    • 오피니언
    • 정론
    2020-08-06
  • 좋은 교회가 좋은 세상을 만든다
      기윤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10명 중 7명은 ‘한국 교회’와 ‘목사’ ‘기독교인의 말과 행동’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 교회가 신뢰받기 위해선 25.9%가 ‘불투명한 재정사용 개선’을 꼽았고 ‘교회 지도자들의 삶의 변화’(22.8%), ‘타 종교에 대한 태도 고치기’ (19.9%) 순으로 나타났다.   목회자 신뢰 제고 방안으로도 ‘윤리 및 도덕성’ 개선이 51.5%로 가장 높았으며, 개신교인이 신뢰를 받기위해 개선해야 할 문제로는 ‘남에 대한 배려 부족’(26.6%), ‘정직하지 못함’(23.7%), ‘배타성’(22.7%) 등이 지목됐다.   신도수의 급감, 대 국민 신뢰도의 추락은 그대로 한국교회의 위기이다. 코로나 19 사태 국면에서 예배 등 소모임이 소원해지면서 교회 출석률이 낮아지고 신앙과 봉사의 강도도 낮아지면서 위기 국면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이나 자정 능력의 한계가 드러났고, 지나친 양적 성장과 성직, 성공주의가 기독교적 가치와 정신, 영성과 신앙의 내실화를 가로 막았다. 이런 상황을 총체적 위기로 인식하고 위기관리를 넘어 국면 전환 및 혁신을 가져와야 한다.   초대 한국교회는 서민대중의 친구가 되었고, 고단한 시민들의 기댈 언덕이 되었다. 나아가 민족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독립운동, 농촌계몽운동, 교육운동, 의료복지운동, 시민사회운동 등 다양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우리 사회는 교회의 은덕을 많이 입었고 그 덕분에 많은 분들이 개신교신도가 되었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한축은 한국전쟁과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자본의 자양분 덕에 양적 성장을 이뤘고 다른 한축은 독재와 맞서 산업선교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성장주의 교회들이 교권을 장악하면서 기독교 정신과 내면의 힘을 상실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자본과 시장 원리의 한계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금융위기와 경제위기 거기에 생태계위기까지 겹쳐 사면초과에 놓이게 되면서 교회는 더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성직자의 윤리의식과 성감수성의 퇴락과 재정 유용은 교회의 근본을 묻게 했고, 지나친 근본주의 신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보편적 사랑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복음을 정죄와 심판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교회는 독선적 사고로 시대를 제대로 보지 못하였고 나아가 시대정신을 거역함으로 시대의 핀잔을 사고 있다. 자신의 전부를 바쳐 사회를 섬겼던 교회는 이익집단이 되었고, 가난한 자들의 친구였던 교회는 부자를 대변하고 약자들을 비판함으로 그 중심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교회는 변화지 않으면 결국 사라질 위기에 직면했다.   사회의 부정적 시각을 개선하는 길은 교회에 대한 사회적 불신의 원인인 ‘불투명한 재정사용을 투명하게 개선’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삶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보내는데 있다. 아울러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의 윤리 및 도덕성을 높이고 배타성을 극복하며 남에 대한 배려를 강화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공동체로 거듭나 균형 잡힌 신학과 신앙을 형성하고 대사회적인 문제를 다룰 사회책임위원회 및 생태환경문제를 다룰 생태선교위원회를 구성하고 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혀 사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다면 사회의 부정적 시각을 교정할 수 있다. 아울러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돕고 정의로운 사회를 세우는데 앞장선다면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거기에 한국교회의 근본적 가치인 영성을 회복하고 사랑의 섬김을 활성화한다면 개신교회는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좋은 사람은 이미 좋은 세상이란 한 시인의 말처럼 좋은 교회는 이미 좋은 세상이다.  /감리회목회자모임 새물결 전국총무·가재울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정론
    2020-07-31
  • 생명존중의 사회분위기 조성이 절실하다
      또 충격이다. 박원순시장이 자살을 하였다. 오래전부터 계획된 자살이 아니라 충동 자살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었다. 그를 자살로 이끈 동기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 자살 그 자체만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분명 자살은 죄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리고 자살은 살인죄이다. 타인만 죽이는 것이 살인죄가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인 나를 내가 죽이는 것도 살인죄이다.    이미 다 알고 있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자살율 1위 이라는 것을. 그리고 매년 일만 5천여명 이상이 자살이라는 살인죄로 스스로 생명을 거두고 있다.    특별히 대통령 다음으로 영향력과 인지도가 높은 서울 시장의 자살은 연쇄 자살을 염려하게 만든다. 바로 베르테르 효과 이론 때문이다. 독일이 나은 세계적인 문호 괴테가 1774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라는 책을 쓴다. 그 책에서 주인공 베르테르가 연인 로테에게 실연을 당하자, 베르테르가 권총으로 자살을 한다. 이 자살을 모방한 자살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이를 ‘베르테르 효과’라고 이름으로 붙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최진실이라는 유명 탤런트 자살 이후 많이 이들이 따라 자살을 하였다. 바로 베르테르의 효과인 것이다.  이번 박 시장의 자살로 자살 유혹이나 충동을 받는 이들이 없기를 기도해 본다.    자살하는 동기가 다양하겠지만, 단순하다 힘들다는 것과 절망한다는 것과 결국 도피이다.    최근에 젊은 여자 청년을 만났다. 20대 중반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순간, 속으로 내내 눈물을 뿌렸다. 들려 준 이야기 정리하면 이렇다.    자신이 두 살 때, 아버지가 뺑소니 자동차 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 결과로 아버지는 정신병에 걸리게 되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자기를 버리고 가출했다 한다. 지금까지도 그 어머니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그 이후 자신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키워 주셨다고 한다. 대학교까지 졸업하게 된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아프다 하시더니 그날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할머니는 할머니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한다. 이후 급격하게 더 큰 어려움이 불어 닥쳤단다. 할머니 돌연사로 할아버지가 충격을 받아 이내 눕게 되셨다고 한다. 한순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돌보아야 하는 가장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20대 중반이라는 정말 젊은 나이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을 위해 공부를 시작하였단다. 나를 사랑해 주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스스로 돌보기 위해서, 요양 보호사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자살한 박시장과 이 여자 청년의 얼굴이 겹쳐 지나간다. 누가 더 힘들까? 아무리 보아도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혼자 몸으로 돌보아야 하는 이 여자 청년이 더 힘들지 않을까? 그런데도 이 여자 청년은 인생 운명을 이겨 내려고 한다. 그 어려움을 헤쳐 내려고 용기를 내려고 한다. 자살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 청년 안에 무엇이 있는 것일까? ‘예수’였다. ‘신앙’이었다. 예수님이 주시는 희망 한 줄 잡고, 삶을 견디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삶이 영웅적 삶이 아닐까? 신앙 영웅이다.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 속으로 웃었다. 이 여자 청년에게 이 삶의 무게를 잘 이해하고 함께 걸어가 줄 수 있는 남자 기독 청년 만나, 반려자가 되어, 인생이 꼭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고 들려주는 행복 고백을 듣고 싶다. 그렇게 기도했다.  /루터회 전 총회장, 작은예수들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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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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