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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우리의 고유 명절인 한가위 추석을 맞는다. 추석은 한국의 추수감사절로 생각해도 된다. 햇 곡식의 결실로 송편을 빚고 조상들에게 감사의 예절을 온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명절이 우리의 추석 명절이다. 그래서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는 추석 명절에 맞추어 추수감사절 예배로 드리는 교회도 있다. 이번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교회마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사랑의 실천을 한다면 그 얼마나 뜻있는 명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추석 명절이 하늘의 밝은 달을 바라보며 옛날부터 온 동네 이웃들과 함께 두둥실 춤을 추며 민속놀이로 기뻐했던 우리의 전통관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전통이다. 우리의 신앙이 그러하다고 본다. 신앙의 꽃은 감사이다. 예배도 감사로 드리고 기도도 감사로 드림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추석 명절이 모든 곡식의 첫 열매로 감사제를 드림과 같이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는 신앙이 합당한 믿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우리의 감사하는 신앙을 추석 명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들 끼리만 감사할 게 아니라 소외받고 있는 이웃을 찾아 사랑의 실천을 직접 함께 한다면 이번 추석 명절은 진정 뜻있고 보람된 우리의 모습이 되리라 확신한다. 누구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섬김을 받는 우리의 이웃이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만 해도 흐뭇한 섬김이 될 것이다. 교회마다 이런 섬김은 작고 크고를 막론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고 교회 안의 각급 기관들이 몸으로 함께 즐긴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축제가 되리라고 본다. 이런 봉사는 규모가 작은 교회도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섬김은 섬기는 자도 기쁨이고 섬김을 받는 사람들 역시 피부로 느끼는 감사요 기쁨이 될 것이다. 금년은 무더위도 그 어느해보다 심했었고 우리의 살림살이 역시 넉넉하지 못해서 그늘진 삶을 사는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 주변엔 많이 있음을 본다. 음식을 함께 나누고 직접 몸으로 섬기는 좋은 기회가 이번 추석 명절이다. 감사는 신앙의 꽃이라고 서두에서 밝혔다. 추석 명절 한가위는 감사의 명절이다. 그렇다면 꽃은 향기로 나비와 벌떼들을 불러 모으듯이 결국 열매로 연결시키는 축복이 온다. 감사를 실천하면 신앙의 열매 역시 이번 추석에 주렁 주렁 열리는 축복이 교회마다 찾아 올 것이다./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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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오늘을 위한 기도
9월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 날마다 똑같은 오늘을 사는데, 시간은 내일로 날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시간에 대한 강박은 지금을 붙잡아 두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묻고 또 대답한다. “시간은 왜 그토록 빨리, 허망하게 지나가 버리는 것일까? 바쁘게 살았음에도 어째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모모한 철학자의 말보다 더 실감나는 명언이 있다. 지하철 화장실에 붙어 있는 “오늘은 내 생애의 남은 날 가운데 가장 첫 날이다”는 대중의 입말에 오르내리는 경구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지금을 붙잡아 두는 일은 큰 관심사이다. 시간만큼 좋은 선물은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실감하는 중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하루 안에 갇힌 24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이 과거의 연장선 위에 있듯이, 내 미래 역시 시간의 연속선에 위치한다. 따라서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는 일은 내 과거를 바탕으로 하며, 내 미래를 향하고 있다. 현재란 과거가 차곡차곡 쌓여 온 것이고, 오늘을 축적하면서 그 결과가 내일이 된다. 그러니 오늘과 무관한 시간은 없는 셈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마태복음 6장 11절)가 포함된다. 하루하루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에 의지하도록 이끌어 준다. 비록 일상을 살아가는 하루지만, 성경의 ‘오늘’은 분명한 시간적 의미를 지닌다. “성서에 오늘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니, 날마다 서로 격려하십시오”(히브리서 13장 13절). 장차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 날은 막연히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일 것이다. 인생의 길이는 ‘생일부터 오늘까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든 오늘마다 부르심을 받는 그 날처럼 감지덕지 감사함으로 살 일이다. 그러니 날마다 오늘을 제대로 살아야 한다. 수 많은 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오늘’이다. 매일 맞이하는 오늘은 낭비해도 좋은 수 많은 날들 중 하루가 아니라, 바로 ‘모든 날 중의 날’로서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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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두 개의 손
사람은 날마다 두 개의 손을 맞잡고 산다.한 손은 두려움의 손이고 한 손은 믿음의 손이다. 두려움의 손이 공포와 불안이라면 믿음의 손은 평안과 축복의 손이다. 이 두 가지 손은 어디를 가나 따라 붙는다. 두려움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고 축복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다. 여기에서 희비가 엇갈린다. 문제는 내가 어느 손을 들어 일을 처리할 것인가에 있다. 그러나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공포와 불안에 떤다. 두 가지 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이것의 사용법이 결정되지 않은 결과이다.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나면 자기 안에서 그것들이 손을 내미는 것을 차단할 줄 아는 힘이 생긴다. 평안과 축복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나면 그것들에 양분을 주는 지혜가 생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한 낙원을 잃어버린 것도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작은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도 공포의 실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두려워해야 할 것을 가릴 줄 아는 지혜의 눈은 그래서 필요하다. 그러나 살아가다보면 안 보일 때가 있다. 어느 것이 나에게 해가 되는 독인지 나에게 이로움을 주는 약인지 가려지지 않는 것이다. 이 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일생 발등을 찧고 싶은 후회와 절망을 떠안게 된다. 이것을 식별하게 해주는 힘은 바로 말씀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인간에게 가야할 길과 가서는 안 될 길을 자상하게 일러주고 계신다. 지혜의 눈이 말씀 속에는 들어 있다. 아무리 안개 속을 헤맬지라도 그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단지 인간적인 욕망이 그 길로 접어드는 것은 자꾸만 방해하는 것이다. 평소에 말씀을 음미하고 탐독하다보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두려움의 손을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판단해야 할 뚜렷한 선을 알고 있는데 엉뚱한 길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알고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죽어도 저는 이 길을 가야겠습니다” 라고 고집을 피우면 하나님은 “그래 네 마음대로 한 번 해봐” 라고 내버려두신다. 결과는 뻔하다.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해 지칠 대로 지쳐서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석고대죄 한다. 믿음의 손을 내 안에서 키우는 일은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진리의 불은 너무 뜨거워서 데이지도 않고 너무 밝아서 눈을 멀게 하지도 않는다. 귓가에서 나지막하게 말해주는 세미한 음성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생 말씀에 살고 말씀대로 행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자라나는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로고스교회 설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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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창조신앙과 환경운동
전능하신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되 특별히 지구를 둘러싼 태양계와 대기권, 아름다운 산하(山河)와 비옥한 땅을 만드시고,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수만 종의 생명체들을 지으셨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을 지배하고 훼손하는 자가 아니라 피조물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청지기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산업주의와 소비주의가 인간의 가치이자 미덕이 되어버리면서 경쟁적으로 대량생산을 위한 자원의 훼손과 낭비로 인해 이산화탄소와 메탄, 일산화질소를 대량 배출하여 지구의 온난화의 주범이 되었고, 독성유해물질을 강과 바다에 투기하고 녹색자연을 훼손하므로 대기권과 땅과 물이 오염되어 지구가 중병에 들어있다. 그 결과 창조질서가 무너지면서 자연이 역반응으로 자연재해를 일으켜서 인간은 물론 수만 종의 생태계가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체들이 서식하고 있는 지구는 종말이 다가왔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 한편에서는 가뭄과 폭염으로 사람이 죽어 가는데 한쪽에서는 노아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대량 홍수사태로 인해 수없이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고 있다. 계절을 의심할 정도로 불시에 40도를 육박하는 더위와 폭우, 겨울철에는 눈사태나 강추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때로는 대형 태풍으로 도시 전체가 사라지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공해로 인해 각종 질병이 만연되고 있고, 생태계가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기형화하거나 공해로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상 이변과 자연 재해는 이제 그 시작에 불과 하며 앞으로 어떤 위험이 불시에 닥쳐올지 모를 정도로 지구와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두려운 징후들이 속출할 것이다. 하루속히 지구를 원초적으로 복원시키지 않는 한 자연은 환경보호의 책임을 물어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보복을 감행하여 수시로 자연재해를 통해 공포와 죽음을 경험하는 불행한 사태가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환경을 복원시켜서 녹색환경을 만들고 생산과 소비를 줄여서 지구 기온을 정상화 시키고 공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원낭비를 줄여야 한다. 후손들에게 건강하고 행복한 지구촌을 물려주기 위하여서는 온 인류가 환경운동가가 되어서 자신부터 환경을 보호하는데 적극 힘써야 할 것이다/예장합동선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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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얼마 전 고산 고정일의 소설 <장진호>를 읽었다. 6.25 전쟁 중 하나의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에 위치한 호수로 해발 2천미터 평균기온 영하 20~30도의 가장 추운곳이기도 한다. 이곳에서 미국 제 10군단 제 1사단과 중공군 제9집단 제3사단간의 충돌로 17일간 전개된 말도 안되는 처참한 모습의 전투를 그려낸 소설이 <장진호>이다.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독백이다. 미군병사가 “거센 눈보라와 온몸이 꽁꽁어는 칼추위와 온통 하얗게 얼어붙은 지옥같은 남립산맥 안에서 우리는 살아 남았다. 수 많은 전우를 눈 속에 묻어 버린 채”, “장진호의 얼어붙은 땅에서 뛰고 또 뛰었습니다. 얼어붙은 땅을 손으로 팠습니다. 그들을 땅에 묻었습니다. 고향생각이 꿈처럼 밀려 왔습니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나요?”고 말한다. 중공군 병사는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고귀한 생명을 값싼 소모품처럼 여기는 야만스러운 전투가”, “저들이나 우리나 대체 누구를 위해 이러고 있는가. 조국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목숨까지 내놓고 말이야 정말로 서글픈 일이군”고 말한다. 쏟아지는 폭탄과 불바다 견딜 수 없는 추위로 동상·동사, 배고픔과 아사 등 전쟁의 참상이 애처롭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장진호를 둘러싼 지역은 군사작전을 치룰 수 있는 곳이 못됨에도 그곳에서 어처구니 없이 끔찍하고 비참한 전쟁이 없었던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소설이기에 약간의 논픽션적 요소가 가미되기도 했지만 이 소설은 실제 있었던 사실과 역사자료를 근거로 한 전쟁사이기도 하다.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은 금년으로 74주년이다. 적어도 70대 이전의 세대에게는 6.25 전쟁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부재할 것이다. 해방·건국·전쟁·재건의 과정에 있었던 고통스러운 역사를 방기한채 오늘의 대한민국에 취해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전쟁은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까지 말살할 수 있기에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도록 하려는 다짐과 노력이 요청되는 것이다. 동시에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하는 책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부산 대연동에 있는 UN기념공원 교회에 쓰여있는 글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한기총 전 총무·서울신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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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삶
우리는 ‘눈물’이라고 하면, 슬프고 힘든 일을 먼저 떠올린다. 물리적인 눈물의 원인은 눈에 해로운 물질을 밖으로 씻어 내기 위한 반사운동이다. 그런데 눈물이 먼지나 이물질만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상처를 내보내기도 한다. 아마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람다움을 잘 드러내는 현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삶은 고비마다 대체로 눈물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끼게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눈물은 해방감이 극치에 달할 때도 나오고, 분노의 표현으로도 나타나며, 기쁘고 즐거움이 넘쳐 흘러나오기도 한다. 또한 사랑하는 깊은 감정의 눈물,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흘리는 눈물도 있다.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사회는 눈물이 메말랐다. 어느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릴만한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울음이 없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울면서 살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내 마음속 깊은데서부터 느껴져 올 때, 눈물을 한없이 흘릴 수 있어야 한다. 눈물은 우리 인생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다. 외로움과 쓸쓸함, 힘듦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아픔을 겪을 때,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삭막한 심정일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난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내는 위로의 눈물이다. 마치 늙은 어머니가 어루만져 주는 듯한 부드럽게 달래주는 손길같은 것이다. 이 울음으로 후회와 미련, 고독과 괴로움도 다 흘려버리는 것이다. 이 울음의 눈물에는 아픔도 있고 즐거움과 기쁨도 있다. 이 중에 사람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다.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 어린 뉘우침의 눈물을 흘릴 때에 인생은 즐거운 울음인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용서하며 다시 인간관계를 시작하고 사랑으로 풍성한 인생 눈물골짜기를 인내하면서 한발짝 한발짝 내디딜 때,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같은 인생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위해 울어야 진정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예장 개혁혁신측 총회장 엘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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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 우리의 고유 명절인 한가위 추석을 맞는다. 추석은 한국의 추수감사절로 생각해도 된다. 햇 곡식의 결실로 송편을 빚고 조상들에게 감사의 예절을 온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명절이 우리의 추석 명절이다. 그래서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는 추석 명절에 맞추어 추수감사절 예배로 드리는 교회도 있다. 이번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교회마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사랑의 실천을 한다면 그 얼마나 뜻있는 명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추석 명절이 하늘의 밝은 달을 바라보며 옛날부터 온 동네 이웃들과 함께 두둥실 춤을 추며 민속놀이로 기뻐했던 우리의 전통관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전통이다. 우리의 신앙이 그러하다고 본다. 신앙의 꽃은 감사이다. 예배도 감사로 드리고 기도도 감사로 드림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추석 명절이 모든 곡식의 첫 열매로 감사제를 드림과 같이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는 신앙이 합당한 믿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우리의 감사하는 신앙을 추석 명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들 끼리만 감사할 게 아니라 소외받고 있는 이웃을 찾아 사랑의 실천을 직접 함께 한다면 이번 추석 명절은 진정 뜻있고 보람된 우리의 모습이 되리라 확신한다. 누구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섬김을 받는 우리의 이웃이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만 해도 흐뭇한 섬김이 될 것이다. 교회마다 이런 섬김은 작고 크고를 막론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고 교회 안의 각급 기관들이 몸으로 함께 즐긴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축제가 되리라고 본다. 이런 봉사는 규모가 작은 교회도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섬김은 섬기는 자도 기쁨이고 섬김을 받는 사람들 역시 피부로 느끼는 감사요 기쁨이 될 것이다. 금년은 무더위도 그 어느해보다 심했었고 우리의 살림살이 역시 넉넉하지 못해서 그늘진 삶을 사는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 주변엔 많이 있음을 본다. 음식을 함께 나누고 직접 몸으로 섬기는 좋은 기회가 이번 추석 명절이다. 감사는 신앙의 꽃이라고 서두에서 밝혔다. 추석 명절 한가위는 감사의 명절이다. 그렇다면 꽃은 향기로 나비와 벌떼들을 불러 모으듯이 결국 열매로 연결시키는 축복이 온다. 감사를 실천하면 신앙의 열매 역시 이번 추석에 주렁 주렁 열리는 축복이 교회마다 찾아 올 것이다./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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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오늘을 위한 기도
- 9월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 날마다 똑같은 오늘을 사는데, 시간은 내일로 날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시간에 대한 강박은 지금을 붙잡아 두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묻고 또 대답한다. “시간은 왜 그토록 빨리, 허망하게 지나가 버리는 것일까? 바쁘게 살았음에도 어째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모모한 철학자의 말보다 더 실감나는 명언이 있다. 지하철 화장실에 붙어 있는 “오늘은 내 생애의 남은 날 가운데 가장 첫 날이다”는 대중의 입말에 오르내리는 경구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지금을 붙잡아 두는 일은 큰 관심사이다. 시간만큼 좋은 선물은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실감하는 중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하루 안에 갇힌 24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이 과거의 연장선 위에 있듯이, 내 미래 역시 시간의 연속선에 위치한다. 따라서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는 일은 내 과거를 바탕으로 하며, 내 미래를 향하고 있다. 현재란 과거가 차곡차곡 쌓여 온 것이고, 오늘을 축적하면서 그 결과가 내일이 된다. 그러니 오늘과 무관한 시간은 없는 셈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마태복음 6장 11절)가 포함된다. 하루하루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에 의지하도록 이끌어 준다. 비록 일상을 살아가는 하루지만, 성경의 ‘오늘’은 분명한 시간적 의미를 지닌다. “성서에 오늘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니, 날마다 서로 격려하십시오”(히브리서 13장 13절). 장차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 날은 막연히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일 것이다. 인생의 길이는 ‘생일부터 오늘까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든 오늘마다 부르심을 받는 그 날처럼 감지덕지 감사함으로 살 일이다. 그러니 날마다 오늘을 제대로 살아야 한다. 수 많은 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오늘’이다. 매일 맞이하는 오늘은 낭비해도 좋은 수 많은 날들 중 하루가 아니라, 바로 ‘모든 날 중의 날’로서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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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두 개의 손
- 사람은 날마다 두 개의 손을 맞잡고 산다.한 손은 두려움의 손이고 한 손은 믿음의 손이다. 두려움의 손이 공포와 불안이라면 믿음의 손은 평안과 축복의 손이다. 이 두 가지 손은 어디를 가나 따라 붙는다. 두려움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고 축복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다. 여기에서 희비가 엇갈린다. 문제는 내가 어느 손을 들어 일을 처리할 것인가에 있다. 그러나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공포와 불안에 떤다. 두 가지 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이것의 사용법이 결정되지 않은 결과이다.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나면 자기 안에서 그것들이 손을 내미는 것을 차단할 줄 아는 힘이 생긴다. 평안과 축복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나면 그것들에 양분을 주는 지혜가 생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한 낙원을 잃어버린 것도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작은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도 공포의 실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두려워해야 할 것을 가릴 줄 아는 지혜의 눈은 그래서 필요하다. 그러나 살아가다보면 안 보일 때가 있다. 어느 것이 나에게 해가 되는 독인지 나에게 이로움을 주는 약인지 가려지지 않는 것이다. 이 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일생 발등을 찧고 싶은 후회와 절망을 떠안게 된다. 이것을 식별하게 해주는 힘은 바로 말씀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인간에게 가야할 길과 가서는 안 될 길을 자상하게 일러주고 계신다. 지혜의 눈이 말씀 속에는 들어 있다. 아무리 안개 속을 헤맬지라도 그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단지 인간적인 욕망이 그 길로 접어드는 것은 자꾸만 방해하는 것이다. 평소에 말씀을 음미하고 탐독하다보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두려움의 손을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판단해야 할 뚜렷한 선을 알고 있는데 엉뚱한 길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알고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죽어도 저는 이 길을 가야겠습니다” 라고 고집을 피우면 하나님은 “그래 네 마음대로 한 번 해봐” 라고 내버려두신다. 결과는 뻔하다.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해 지칠 대로 지쳐서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석고대죄 한다. 믿음의 손을 내 안에서 키우는 일은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진리의 불은 너무 뜨거워서 데이지도 않고 너무 밝아서 눈을 멀게 하지도 않는다. 귓가에서 나지막하게 말해주는 세미한 음성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생 말씀에 살고 말씀대로 행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자라나는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로고스교회 설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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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창조신앙과 환경운동
- 전능하신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되 특별히 지구를 둘러싼 태양계와 대기권, 아름다운 산하(山河)와 비옥한 땅을 만드시고,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수만 종의 생명체들을 지으셨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을 지배하고 훼손하는 자가 아니라 피조물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청지기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산업주의와 소비주의가 인간의 가치이자 미덕이 되어버리면서 경쟁적으로 대량생산을 위한 자원의 훼손과 낭비로 인해 이산화탄소와 메탄, 일산화질소를 대량 배출하여 지구의 온난화의 주범이 되었고, 독성유해물질을 강과 바다에 투기하고 녹색자연을 훼손하므로 대기권과 땅과 물이 오염되어 지구가 중병에 들어있다. 그 결과 창조질서가 무너지면서 자연이 역반응으로 자연재해를 일으켜서 인간은 물론 수만 종의 생태계가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체들이 서식하고 있는 지구는 종말이 다가왔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 한편에서는 가뭄과 폭염으로 사람이 죽어 가는데 한쪽에서는 노아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대량 홍수사태로 인해 수없이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고 있다. 계절을 의심할 정도로 불시에 40도를 육박하는 더위와 폭우, 겨울철에는 눈사태나 강추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때로는 대형 태풍으로 도시 전체가 사라지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공해로 인해 각종 질병이 만연되고 있고, 생태계가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기형화하거나 공해로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상 이변과 자연 재해는 이제 그 시작에 불과 하며 앞으로 어떤 위험이 불시에 닥쳐올지 모를 정도로 지구와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두려운 징후들이 속출할 것이다. 하루속히 지구를 원초적으로 복원시키지 않는 한 자연은 환경보호의 책임을 물어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보복을 감행하여 수시로 자연재해를 통해 공포와 죽음을 경험하는 불행한 사태가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환경을 복원시켜서 녹색환경을 만들고 생산과 소비를 줄여서 지구 기온을 정상화 시키고 공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원낭비를 줄여야 한다. 후손들에게 건강하고 행복한 지구촌을 물려주기 위하여서는 온 인류가 환경운동가가 되어서 자신부터 환경을 보호하는데 적극 힘써야 할 것이다/예장합동선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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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창조신앙과 환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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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 얼마 전 고산 고정일의 소설 <장진호>를 읽었다. 6.25 전쟁 중 하나의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에 위치한 호수로 해발 2천미터 평균기온 영하 20~30도의 가장 추운곳이기도 한다. 이곳에서 미국 제 10군단 제 1사단과 중공군 제9집단 제3사단간의 충돌로 17일간 전개된 말도 안되는 처참한 모습의 전투를 그려낸 소설이 <장진호>이다.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독백이다. 미군병사가 “거센 눈보라와 온몸이 꽁꽁어는 칼추위와 온통 하얗게 얼어붙은 지옥같은 남립산맥 안에서 우리는 살아 남았다. 수 많은 전우를 눈 속에 묻어 버린 채”, “장진호의 얼어붙은 땅에서 뛰고 또 뛰었습니다. 얼어붙은 땅을 손으로 팠습니다. 그들을 땅에 묻었습니다. 고향생각이 꿈처럼 밀려 왔습니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나요?”고 말한다. 중공군 병사는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고귀한 생명을 값싼 소모품처럼 여기는 야만스러운 전투가”, “저들이나 우리나 대체 누구를 위해 이러고 있는가. 조국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목숨까지 내놓고 말이야 정말로 서글픈 일이군”고 말한다. 쏟아지는 폭탄과 불바다 견딜 수 없는 추위로 동상·동사, 배고픔과 아사 등 전쟁의 참상이 애처롭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장진호를 둘러싼 지역은 군사작전을 치룰 수 있는 곳이 못됨에도 그곳에서 어처구니 없이 끔찍하고 비참한 전쟁이 없었던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소설이기에 약간의 논픽션적 요소가 가미되기도 했지만 이 소설은 실제 있었던 사실과 역사자료를 근거로 한 전쟁사이기도 하다.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은 금년으로 74주년이다. 적어도 70대 이전의 세대에게는 6.25 전쟁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부재할 것이다. 해방·건국·전쟁·재건의 과정에 있었던 고통스러운 역사를 방기한채 오늘의 대한민국에 취해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전쟁은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까지 말살할 수 있기에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도록 하려는 다짐과 노력이 요청되는 것이다. 동시에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하는 책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부산 대연동에 있는 UN기념공원 교회에 쓰여있는 글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한기총 전 총무·서울신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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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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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삶
- 우리는 ‘눈물’이라고 하면, 슬프고 힘든 일을 먼저 떠올린다. 물리적인 눈물의 원인은 눈에 해로운 물질을 밖으로 씻어 내기 위한 반사운동이다. 그런데 눈물이 먼지나 이물질만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상처를 내보내기도 한다. 아마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람다움을 잘 드러내는 현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삶은 고비마다 대체로 눈물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끼게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눈물은 해방감이 극치에 달할 때도 나오고, 분노의 표현으로도 나타나며, 기쁘고 즐거움이 넘쳐 흘러나오기도 한다. 또한 사랑하는 깊은 감정의 눈물,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흘리는 눈물도 있다.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사회는 눈물이 메말랐다. 어느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릴만한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울음이 없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울면서 살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내 마음속 깊은데서부터 느껴져 올 때, 눈물을 한없이 흘릴 수 있어야 한다. 눈물은 우리 인생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다. 외로움과 쓸쓸함, 힘듦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아픔을 겪을 때,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삭막한 심정일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난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내는 위로의 눈물이다. 마치 늙은 어머니가 어루만져 주는 듯한 부드럽게 달래주는 손길같은 것이다. 이 울음으로 후회와 미련, 고독과 괴로움도 다 흘려버리는 것이다. 이 울음의 눈물에는 아픔도 있고 즐거움과 기쁨도 있다. 이 중에 사람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다.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 어린 뉘우침의 눈물을 흘릴 때에 인생은 즐거운 울음인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용서하며 다시 인간관계를 시작하고 사랑으로 풍성한 인생 눈물골짜기를 인내하면서 한발짝 한발짝 내디딜 때,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같은 인생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위해 울어야 진정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예장 개혁혁신측 총회장 엘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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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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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가장 좋은 사랑의 실천도장
- ‘사랑의 실천’은 입으로 떠드는 것이 아니라 몸소 사회에 실천함으로써 완성된다. 그것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는 어두운 곳이 너무나 많다. 그 어두운 곳이 우리 주변에서 말끔히 사라질 때 내가 추구하는 ‘사랑의 실천’은 비로소 사회에 실현되는 날이 된다. 이와 같은 생각에서 나는 많은 반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들을 설득하여 한양대학에 의과 대학을 신설하고 부속 병원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지만 그 중에도 병들어 고통을 받는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절실하게 필요하고도 가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는데, 그 당시 내가 반드시 병원을 설립해야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동기를 꼽는다면 두 가지 정도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한국이 가난한 나라로서 병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그때만 해도 사실 의료의 빈곤으로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돈 없어도 치료를 받아서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혜택을 베풀자고 했다. 그러나 이것을 공개하면 병원이 며칠 못 견디므로 간부들끼리 약속을 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대체로 지식인들이고 교양인들이고 기독교신자이고 또 교육자이고 하니까 우선 그런 사람 중에 중병에 걸렸어도 돈이 없어 어려워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가 무료로 치료해주자’고 비밀 약속을 해서 많은 사람을 치료해 주었다. 둘째는 일반인들로서 아주 가난한 층의 사람들에 대하여 무료치료를 해 주자는 것이엇다. 우리의 불우한 이웃들이 약 한 번 제대로 사먹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는다고 할 때 그것은 너무나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을 배려하는 것도 잊지 말자고 했다. 인간이란 무엇보다 귀한 존재인데 그런 귀한 존재에게 고난은 수시로 닥쳐온다. 심지어 훌륭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돈 때문에 생명을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병에 걸려서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하여 많은 사람을 구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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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가장 좋은 사랑의 실천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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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향한 바람에 지혜롭게 맞섭시다
- 우리나라는 전국 방방곡곡이 십자가로 뒤덮힐 정도로 세계 교회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기독교는 큰 성장을 하여 130여년의 짧은 선교역사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최대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는 일제의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킨 선조들이 흘린 눈물과 기도를 불쌍히 보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교회는 복음 전파와 함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봉사와 구제를 통해 국민의 마음에 기독교를 향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초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역대 정권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서 교회는 국가 권력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50여년간 지켜져 왔던 정교분리라는 안전판이 종교인과세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교회를 향한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그 선봉에는 기독교에 적대적인 언론들이 국민 여론이라는 이름의 깃발을 들고 있습니다. 주님은 12사도를 파송하시면서 이 세상은 양떼를 삼키려는 이리이고 양이 이리를 이기려면 뱀같이 지혜로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주님이 말씀하신 교회를 삼키려는 이리의 이빨이 바로 ‘적대적 여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여론의 힘을 빌어 교회를 국민들의 마음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공평 과세라는 여론으로 밀어부친 종교인과세, 코로나 방역이라는 국민적 염원을 바탕으로 하는 공권력의 예배 관여, 평등한 세상 구현이라는 여론에 편승한 차별금지법 추진, 법적 정의 실현을 내세운 가이사 법정(법원)의 노골적인 교회의 자율성 무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여론몰이를 앞세운 낙태법 폐지, 문화 보호라는 국민적 공감대를 빌미로 하는 특정 종교에 대한 편파적 재정지원 등이 대표적 사례일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은 여론 형성의 전진기지인 언론을 통한 기독교 혐오, 안티 기독교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나 천주교와는 달리 기독교 하면 국민의 마음에는 ‘무조건 반대만 하는 종교’, ‘교권다툼과 분열’, ‘재정전횡’, ‘공격적 선교와 독선’ 등 부정적 이미지를 떠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이대로 두면 교회는 큰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젊은 이들의 교회인 대학교회를 시무하는 저에게는 피부로 와 닿습니다. 교회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려면 뱀같이 지혜로와야 합니다. 뱀의 지혜 이상으로 교회가 지혜로와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교인 개개인이나 특정 교회만이 아니라 공교회로서의 한국교회 전체를 향한 명령일 것입니다. 교회가 어둠의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이 일으키는 바람에 맞설 지혜와 용기를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교회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방안과 일꾼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대응하기를 기도합시다. / 한국교회법학회 회장, 중앙대학교 대학교회 목사, 명예교수, 전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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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향한 바람에 지혜롭게 맞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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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의 연주로 ‘행복’을 전한다
- 병마와 싸우는 환우들에게 음악봉사로 ‘위로’와 ‘사랑’을 전해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장애인들로 예술단구성해 활동 ⃟ 리플리히청소년오케스트라의 연주회 모습 리플리히청소년오케스트라는 청소년들과 주민, 그리고 발달장애인과 함께하는 오케스트라이다. 악기연주를 통하여 청소년들의 성취감을 고취시킬 뿐 아니라, 취약계층 청소년들, 시니어세대, 다문화가정의 자녀들과 함께 교류한다. 또한 한 부모 가정 아이들과 함께 마을 행사에 참여하여 지역문화와 연계해 연주를 함으로서 청소년들과 주민이 함께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비영리 민간단체오케스트라이다. 이 오케스트라는 지난 2017년에 창단됐으며, 소수의 일반 청소년과 다수의 사회적 약자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무료 레슨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삶의 원동력을 불어 넣어 주고 있다. 이렇게 배운 청소년들은 다시금 어르신 기관, 지역마을 행사, 주민센터, 구청 등을 통하여 음악 무료봉사와 아울러 천연 수제비누를 만들어 전해 드리는 행사를 해마다 20~30회나 진행하며 선한 영향력을 널리 펼쳐 왔다. 아울러 발달장애인들로 구성된 '리플씨앗소리'로도 나눔을 넓혀 왔으며, 이곳에서는 발달장애의 특성과 관심에 맞는 악기를 선정, 배움을 줌으로써 장애를 극복하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도록 도와 왔다. 리플리히청소년오케스트라의 주재련단장(공감예수마을교회 반주자, 사진)은 “2016년에 구청에서 실시하는 지원 사업으로 선정되어 취약계층과 발달장애인들에게 적성과 관심분야에 맞는 악기를 선택하게 하여 지도하면서 봉사활동을 지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업이 1년 단기사업이다 보니 더 이상은 지원을 받을 수도 없고, 그토록 행복해 하는 이들을 내 보낼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껴안은 이들과 아무 지원 없이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해오다가 2017년 1월부터 비영리단체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단장은 “한 장소에서 두가지 일을 할 수 없다하여 운영하던 음악학원마저 폐업신고를 하고 비영리단체인 리플리히청소년오케스트라만을 현재까지 이끌고 오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보증금은 모두 소진되고 임대료까지 지불하지 못하게 되어 쫓겨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말했다. 주단장은 이런 사면초과의 상황에서 갈 곳이 없어 서울시의원 한분에게 무조건 편지를 썼다고 했다. “이 아이들을 잘 가르칠 사람이 있으면 저는 여기서 이 일들을 그만 두겠다. 하지만 이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다면 제가 돌보겠으니 장소만 빌려 달라”는 주단장의 읍소에 서울시의원은 능동 어린이 대공원을 기존 사용자와 함께 사용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코로나발생 이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공간을 사용 못하는 것은 리플리히의 모든 연습과 연주일정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실망은 엄청났다. 리플리히단원들은 잠정적 휴식의 시간을 가졌으나, 발달장애인들 경우에는 쉴 수가 없었다. 주단장은 자신이 살고 있는 옥탑방에서 보면대 몇 개, 전자 피아노, 첼로3대 만을 가지고 모여 연습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부활주일과 군종모임, 기독교100주년 기념관 연주회때 나눠 드리려고 천연수제비누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만 불이 나서 모든 가전제품과 악기 등 모든게 재가 되어 버렸다. 경찰차와 소방차 수십 대가 와서야 불이 소각되고 모든 전원과 수도관을 막은 상태로 1층 3층 사람들은 구청에서 마련해 준 모텔로 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며 주단장은 그 당시의 막막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 또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시금 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주단장은 “우리는 후원을 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냥 끝까지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면 된다.”라고 말하며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이들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지켜 보았던 대한민국 리더스포럼 박창수 대표는 “장애인 청소년들이 장애를 극복하며 아름다운 연주를 보여줘 감동적인 무대였다”,며 “특히 장애인을 두고 있는 부모와 가족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다 장애인이 될 수 있기에 함께하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이런 면에서 리플리히 청소년 오케스트라 공연은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밝힌 멋진 공연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사)한국범죄퇴치운동본부 범죄예방위원회 윤태한 상임대표도 “장애인들이 저희 사무실에서 한 달 동안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 봤다. 처음 사무실에 왔을 때는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연습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운율이 되고 하나의 노래가 탄생했다”며 보는 자체로도 뿌듯했으며, 이들의 공연이 성공할 것임을 예감했다고 피력했다. 이렇게 모든 어려움을 딛고 다시 모인 발달장애인들만의 명칭을 ‘리플리히 거북이 음악예술단’이라 칭하고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주단장은 “리플리히 거북이 음악예술단원은 모두 발달장애 2급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고 대화는 잘 못하고 행동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오래 그리고 끝까지 간다.”라고말한다. 또한 “첼로의 네 줄을 긋는 연습을 3년동안 했다. 모두가 성인 연령이지만 생각과 마음은 아직도 어린 아기이다. 긴긴 세월 연습한 솜씨를 이제는 심신이 지쳐있는 환우를 위해 우리의 웃음과 함께 우리의 정성이 담겨있는 마음과 음악으로 빠른 회복을 기원하는 장거리 음악여행을 떠난다.”며, ‘7명이 떠나는 행복한 음악연주 여행’을 말했다. “우리 친구들은 혼자서 다니지 못하는 친구들이다. 아침 10시 가가호호 방문하여 우리 아이들을 태우고 속초 민박집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숙박을 하면서 마지막 연습을 한다. 부모를 떠나 밖에서 자본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지만 지금은 조금씩 적응도하고 좋아한다.”고 전했다. 이들의 공연은 지난 8일 강원도 속초시 뉴스타트센터에서 있었으며 놀라운 감동을 전했다. 주단장은 “궁극적으로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약자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오케스트라’라는 부유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함께 누리는 문화 프로그램으로 문화적으로 변방에 있는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즐거운 기회를 주고 싶다.”라는소망을 피력한다. 또한 주단장은 “화재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당장 갈아 입을 옷조차 없어진 현실에 마음이 막막했는데, 순간 ‘아 맞아 내겐 리플리히가 있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며, ‘시편121편’말씀을 전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최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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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의 연주로 ‘행복’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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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기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한국교회 위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넘치길 기도합니다. 코로나19는 한국교회에 영향을 주어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길을 가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은 눈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물의 기도를 원하고 계십니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고통의 순간도 동반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물을 씻겨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중병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 처한 히스기야는 통곡의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의 응답을 이사야 38장 5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년을 더하고”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시고 응답과 회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는 지난 3월 7일 의정부 광명교회에서 시작해 6월 27일 새에덴교회에서 마무리하며 프레어어게인(prayer again) 기도운동을 했습니다. 전국 9개 권역에서 기도운동을 했습니다. 또한 제58회 목사장로기도회를 통해 다시금 강단을 눈물로 적시는 기도운동이 힘차게 전개되었습니다. 이에 더 나아가 한국장로교총연합회(대표회장 김종준 목사)는 7월 8일 오후 2시 꽃동산교회에서 한국장로교회의 날 기념예배를 개최하면서 미래세대를 위한 기도할 할 예정입니다. 지금은 한국교회의 위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위기를 만나면 항상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지금의 위기도 눈물의 기도를 통해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코로나19 정국 속에도 이처럼 잇따른 기도회와 예배를 개회케 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용단 있게 기도회와 예배를 개회한 관계자들에게 감사한다. /예장 합동 총회 총무·상암월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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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주권
- 오늘날 한국 사회와 정치의 화두는 ‘인권’이다. 그래서 ‘여성인권’, ‘인권 사각지대’란 말도 있고, 〈인권변호사〉라는 말도 있었다. 우리나라는 인권이란 말로 지경을 넓혀 세력을 크게 만들어 정권도 창출하고 대통령들이 되었다. 급기야 지금의 정부 또한 국가인권위원회라는 우산아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군사, 종교를 두고 그것을 국민통제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인권이란, 말 그대로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권리이다. 그런데 인권이란 말의 뜻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바로 주인이며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 사상이다. 인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주권’이다. 주권이란, 말 그대로 ‘주인 된 권리’이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이란 말도 있다. 즉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권에 대한 이해가 일반인의 생각과 다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이다. 불신자나 비중생자가 볼 때는 참으로 생뚱맞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역주권사상은 이 세상 어디든지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이 우주는 우연히 생성되어 어찌어찌 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불신자들은 인간이 땅위에 주인이므로 인간의 결심 여하에 따라서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진화론적, 유물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사상과는 다르다. 이 우주와 세상은 주인 없는 황량한 공간이 아니고, 태초에 영존하시고 유일하신 인격적 하나님이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만드시고, 인생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인간이 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데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우주와 세상의 주권, 즉 주인 된 권리는 하나님이 가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영적전쟁의 최전방에 서 있다. 불신세력들은 인권이라는 매우 설득력 있는 무기로, 모든 정치행각을 합법화하고 사회주의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 거대한 영적 쓰나미에 맞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참된 인권과 하나님의 영역주권 사상을 구체화하는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전 총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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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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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사변, 상기, 기념할 건가?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잔혹하고 치열했던 전쟁은 6·25사변이다. 세계적으로 역사에 남을 『한국전쟁』 으로 기록되고 있다. 유엔(United Nation)의 16개국 우방들이 참전해 준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저 멀리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와 남아메리카의 콜롬비아를 비롯한 필리핀까지 그야말로 우리의 우방 나라들이 참전하여 우리 이상으로 피를 흘리며 생명을 바쳐 싸워준 한국전쟁, 6·25사변이었다. 6·25사변이 있은지 금년은 71년째를 맞는다. 71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 대한민국은 여러차례 정치적 소용돌이를 경험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화를 이루어냈으며 경제적으로도 시장경제의 안착으로 세계에 빛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반면, 북한은 어떤가? 71년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 정도로 1인 독재 체재하에 경제는 더 어렵고 인권과 주민들의 고통은 날로 심해졌으며 3대 세습으로 더욱 고립화된 현실이다. 오직 핵무장을 통한 체제 유지를 고집하다 보니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한반도의 긴장은 남과 북만이 풀지 못하는 어려움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6·25사변(한국전쟁) 71주년을 맞으면서 그 당시 전쟁의 쓰라린 경험을 했던 세대는 6·25사변의 뼈아팠던 경험을 상기하면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몸서리를 치는 게 사실이다. 왜냐하면 1950년 6월 25일, 그날은 주일(일요일) 새벽이었다. 자다가 홍두깨로 한 대 얻어맞는 격으로 우리는 불법남침을 받은 것이다. 전방은 쉽게 탱크에 짓밟혔으며 속수무책으로 서울도 빼앗기고 남으로 남으로 후퇴하였고 피난을 가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 날들을 다시 생각하며 해마다 호국의 달 6월이 되면 특별히 6월 25일이 되면 6·25사변, 한국전쟁을 다시 상기(想起)하자는 것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사변(事變)이란 “외국에 대하여 선전포고없이 무력을 쓰는 일”이라고 하였고 상기(想起)란 “전에 있었던 일을 도로 생각해 냄”이라고 하였다. 6·25사변의 역사를 경험한 우리 모든 국민들은 6·25사변을 상기해야지, 기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장 통합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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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마지막 경고, 회개하라
-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심을 믿고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라고 분부하셨으나 대부분 불순종하고 롯의 사위들처럼 인류 종말의 도래를 농담으로 여기며 지나쳐 버린다. 하나님은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어도 통회자복을 하면 용서해 주시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이끄는 성군이 되게 하셨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보면 그는 어린 십대에 방탕함과 타락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한 어거스틴이 후에 성경을 읽고 심령에 찔림을 받아 통회자복을 함으로 용서를 받았으며 후에 하나님의 종이 되어 성자라는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다윗이나 어거스틴이 죄를 짓고도 용서를 받은 후에 하나님이 특별한 인물로 쓰셨다고 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고, 다만 죄를 회개치 않은 사람은 결국 거의가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죄를 짓고도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처럼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약간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 후회하는 정도에 그치는 사람이 있고, 또 다른 소수의 사람은 지은 죄를 부끄럽게 여기면서 하나님 앞에 통회를 하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가룟 유다와 베드로는 같은 주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목전에 두고 각각 배신하는 죄를 지었다. 한국교회의 부흥의 역사를 보면 1907년 1월 15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서 길선주목사가 회개의 고백을 하자 함께 집회에 참석했던 교인들 각자가 자신들이 지은 추악한 죄를 토해내기 시작하면서 뜨거운 회개와 부흥운동이 전개되었고 전국적으로 성령의 불이 번져 나가면서 한국이 복음의 빛을 발하게 되었다. 회개하면 살고 회개가 없으면 죽는다. 회개하면 천국가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회개시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만들고 천국가게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주님이 우리시대에 마지막 경고를 하셨는지도 모른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장 합동선목총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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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마지막 경고, 회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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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 중 하나님의 은혜
-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실체가 된 지 벌써 한 해를 넘기고 있다. 여전히 그 기세는 꺾일 줄 모르고 있으며, 그 위세에 전 인류는 불안과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백신 개발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만, 변형 바이러스 형태의 팬데믹이 과연 온전히 다스려질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더욱이 코로나 팬데믹의 근본 원인은 기후변화에 있으며, 이 때문에 기후변화는 기후위기의 심각성 문제로 치닫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결과는 이미 산업화가 추진된 이래, 전 세계가 경제발전과 함께 온통 자연을 이용한 생산 활동에 집중하였고, 이에 따른 과도한 에너지 사용은 마침내 지구 기온을 상승시켰으며, 그것이 오늘날 기후위기를 초래하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 중세기 유럽에서는 페스트 팬데믹 창궐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되었을 때, 그 질병의 주된 원인은 하나님의 징계요, 심판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기후위기와 팬데믹은 오늘날 사람들의 인식도 대체로 천재(天災)로 인식하기보다, 인간 스스로 초래한 인재(人災)로 보는 경향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인재를 뒷받침하는 이론은 자연과학자들에게서 이미 “인류세”(Anthropocene)란 개념을 통하여 합리화되고 있으며, 생존을 위해 자연생태계를 파괴한 인간의 행위가 지구환경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 결과가 오늘의 기후위기와 팬데믹 위기초래의 원인이라는 해명이 더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유엔 산하에 설치된 ‘유엔 환경프로그램’(UNEP)과 ‘세계기후기구’(WMO)가 1988년 ‘기후변화에 관한 각 나라의 정부간 패널’(IPCC)이란 단체를 조직하면서 본격적인 기후변화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이래로 이 기구(IPCC)는 인간의 활동이 초래하는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구체적인 통계로 제시하며, 국제협력의 중요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일을 수행해왔다. 기후위기와 팬데믹은 이 시대를 향한 종말론적인 하나님 심판의 경고요, 경종과 각성으로 알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염원한다. /총신대학교 전 총장·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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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 중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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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가정의 원리
- 인생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가정이라는 것이 잠언의 관점이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어도 가정생활에 실패하면 다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성공적인 가정을 위해 네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공적인 가정을 이루려면 가장에게 적절한 직업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무엇보다도 일을 해서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잠 24:27). 둘째, 성공적인 가정을 이루려면 가정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지식과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잠 24:3~4) 가족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위치에 맞는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셋째, 화목한 가정이 되도록 서로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가정의 덕목은 화목입니다. ‘가화만사성.’ 성경적인 문구입니다. 물질적인 부요보다도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1:9). 늘 비판적이고, 부정적이고, 불친절하고, 감사치 않는 사람은 가정의 화목을 깨고 배우자로 하여금 방황하게 합니다. 네 번째로 가정이 성공적인 가정이 되려면 의로운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버리느니라”(잠 21:20).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의인의 건강이나 재정이나 혹은 자녀들에게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의롭게 사는 가정은 위기가 여섯 번 와도 능히 다 이겨내고 일어날 수 있지만 악인의 가정은 한 번의 위기에서도 넘어지고 맙니다. 의로움은 가장의 태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장이 늘 말씀을 읽고 말씀에 바로 서서 의로운 삶을 살아갈 때 가족은 그대로 따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강남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한국기독교화해중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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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깨어난 생명
- 들꽃 사진을 찍는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요즘 피는 꽃 중에 옥녀꽃대와 홀아비 꽃대가 있단다. 둘이 이름 그대로 암꽃과 수꽃이다. 안타깝게도 두 남녀는 서로 만나지 못한다. 남쪽 땅에 피는 옥녀와 달리 홀아비는 북쪽지역에 분포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식생대가 점점 근접하여 두 꽃 모두 충청도에서 발견되지만, 옥녀는 안면도등 해안지역에 살고 홀아비는 충북 괴산 같은 산골에 산다고 한다. 두 사진을 비교해 보니 서로 모양은 달라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암수한몸 꼴들도 많은데 암꽃과 수꽃 혹은 암그루와 수그루로 나뉘어 있으며 어느 천 년에 서로 만날 수 있을까 안타깝다. 물론 가까이 살면 나비가 꽃들에게 희망을 주겠지만, 해안과 산악으로 멀리 떨어져 사는 옥녀와 홀아비에게는 그런 중신아비도 아직 없는 셈이다. 장년을 맞는 후배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자녀 결혼문제로 걱정을 한다. 베이비붐 세대인 그들은 젊은 시절의 자신들과 비교해 자녀들의 혼인관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자녀 세대인 에코세대는 부모의 기대처럼 소리가 되돌 아 오는 메아리(에코)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기존 통과의례의 하나인 결혼 따위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점이 주요한 특징이다. 요즘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젠더이슈는 혼란스러움 그 자체이다. 예전에 쉬쉬하던 일이 우리 사회의 표면으로 드러나면서 부모 입장에서는 행여 결혼에 소극적인 자녀에게 남모를 사연이 있을까 싶어 염려가 크다. 세상이 너무 달라졌다. 우리 세대는 동성동본 혼인이 가장 큰 고민이었는데, 이젠 양성평등의 단계를 넘어, 다양한 젠더의 존재로 확장하고 있다. 수용성이 빠른 에코세대의 존재는 베이비붐 세대의 불안감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논의 수준은 찬반의 절대성만 있을 뿐 약간의 혜안도 찾지 못한다. 어떤 모양이든 관용과 차별사이에서 불화와 대결의 경계선을 넘어야 할 것이다. 일방적인 무시와 정죄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 특히 교회가 성을 쌓고 심판하고 남에게 원치 않는 차별의 이름을 더하기 시작하면 조직교회가 갖는 마성과 조직우상이 주님을 대신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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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깨어난 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