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16(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실시간뉴스
  • [사랑의 실천]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우리의 고유 명절인 한가위 추석을 맞는다. 추석은 한국의 추수감사절로 생각해도 된다. 햇 곡식의 결실로 송편을 빚고 조상들에게 감사의 예절을 온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명절이 우리의 추석 명절이다. 그래서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는 추석 명절에 맞추어 추수감사절 예배로 드리는 교회도 있다. 이번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교회마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사랑의 실천을 한다면 그 얼마나 뜻있는 명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추석 명절이 하늘의 밝은 달을 바라보며 옛날부터 온 동네 이웃들과 함께 두둥실 춤을 추며 민속놀이로 기뻐했던 우리의 전통관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전통이다. 우리의 신앙이 그러하다고 본다. 신앙의 꽃은 감사이다. 예배도 감사로 드리고 기도도 감사로 드림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추석 명절이 모든 곡식의 첫 열매로 감사제를 드림과 같이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는 신앙이 합당한 믿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우리의 감사하는 신앙을 추석 명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들 끼리만 감사할 게 아니라 소외받고 있는 이웃을 찾아 사랑의 실천을 직접 함께 한다면 이번 추석 명절은 진정 뜻있고 보람된 우리의 모습이 되리라 확신한다. 누구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섬김을 받는 우리의 이웃이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만 해도 흐뭇한 섬김이 될 것이다.    교회마다 이런 섬김은 작고 크고를 막론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고 교회 안의 각급 기관들이 몸으로 함께 즐긴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축제가 되리라고 본다. 이런 봉사는 규모가 작은 교회도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섬김은 섬기는 자도 기쁨이고 섬김을 받는 사람들 역시 피부로 느끼는 감사요 기쁨이 될 것이다.    금년은 무더위도 그 어느해보다 심했었고 우리의 살림살이 역시 넉넉하지 못해서 그늘진 삶을 사는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 주변엔 많이 있음을 본다. 음식을 함께 나누고 직접 몸으로 섬기는 좋은 기회가 이번 추석 명절이다. 감사는 신앙의 꽃이라고 서두에서 밝혔다. 추석 명절 한가위는 감사의 명절이다. 그렇다면 꽃은 향기로 나비와 벌떼들을 불러 모으듯이 결국 열매로 연결시키는 축복이 온다. 감사를 실천하면 신앙의 열매 역시 이번 추석에 주렁 주렁 열리는 축복이 교회마다 찾아 올 것이다./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9-10
  • [사랑의 실천]오늘을 위한 기도
     9월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  날마다 똑같은 오늘을 사는데, 시간은 내일로 날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시간에 대한 강박은 지금을 붙잡아 두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묻고 또 대답한다. “시간은 왜 그토록 빨리, 허망하게 지나가 버리는 것일까? 바쁘게 살았음에도 어째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모모한 철학자의 말보다 더 실감나는 명언이 있다. 지하철 화장실에 붙어 있는 “오늘은 내 생애의 남은 날 가운데 가장 첫 날이다”는 대중의 입말에 오르내리는 경구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지금을 붙잡아 두는 일은 큰 관심사이다. 시간만큼 좋은 선물은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실감하는 중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하루 안에 갇힌 24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이 과거의 연장선 위에 있듯이, 내 미래 역시 시간의 연속선에 위치한다.     따라서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는 일은 내 과거를 바탕으로 하며, 내 미래를 향하고 있다. 현재란 과거가 차곡차곡 쌓여 온 것이고, 오늘을 축적하면서 그 결과가 내일이 된다. 그러니 오늘과 무관한 시간은 없는 셈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마태복음 6장 11절)가 포함된다. 하루하루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에 의지하도록 이끌어 준다. 비록 일상을 살아가는 하루지만, 성경의 ‘오늘’은 분명한 시간적 의미를 지닌다. “성서에 오늘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니, 날마다 서로 격려하십시오”(히브리서 13장 13절).     장차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 날은 막연히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일 것이다. 인생의 길이는 ‘생일부터 오늘까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든 오늘마다 부르심을 받는 그 날처럼 감지덕지 감사함으로 살 일이다.   그러니 날마다 오늘을 제대로 살아야 한다. 수 많은 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오늘’이다. 매일 맞이하는 오늘은 낭비해도 좋은 수 많은 날들 중 하루가 아니라, 바로 ‘모든 날 중의 날’로서의 오늘이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9-06
  • [사랑의 실천] 두 개의 손
           사람은 날마다 두 개의 손을 맞잡고 산다.한 손은 두려움의 손이고 한 손은 믿음의 손이다. 두려움의 손이 공포와 불안이라면 믿음의 손은 평안과 축복의 손이다. 이 두 가지 손은 어디를 가나 따라 붙는다. 두려움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고 축복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다. 여기에서 희비가 엇갈린다.    문제는 내가 어느 손을 들어 일을 처리할 것인가에 있다. 그러나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공포와 불안에 떤다. 두 가지 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이것의 사용법이 결정되지 않은 결과이다.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나면 자기 안에서 그것들이 손을 내미는 것을 차단할 줄 아는 힘이 생긴다. 평안과 축복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나면 그것들에 양분을 주는 지혜가 생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한 낙원을 잃어버린 것도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작은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도 공포의 실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두려워해야 할 것을 가릴 줄 아는 지혜의 눈은 그래서 필요하다. 그러나 살아가다보면 안 보일 때가 있다. 어느 것이 나에게 해가 되는 독인지 나에게 이로움을 주는 약인지 가려지지 않는 것이다. 이 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일생 발등을 찧고 싶은 후회와 절망을 떠안게 된다. 이것을 식별하게 해주는 힘은 바로 말씀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인간에게 가야할 길과 가서는 안 될 길을 자상하게 일러주고 계신다. 지혜의 눈이 말씀 속에는 들어 있다. 아무리 안개 속을 헤맬지라도 그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단지 인간적인 욕망이 그 길로 접어드는 것은 자꾸만 방해하는 것이다. 평소에 말씀을 음미하고 탐독하다보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두려움의 손을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판단해야 할 뚜렷한 선을 알고 있는데 엉뚱한 길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알고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죽어도 저는 이 길을 가야겠습니다” 라고 고집을 피우면 하나님은 “그래 네 마음대로 한 번 해봐” 라고 내버려두신다. 결과는 뻔하다.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해 지칠 대로 지쳐서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석고대죄 한다.    믿음의 손을 내 안에서 키우는 일은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진리의 불은 너무 뜨거워서 데이지도 않고 너무 밝아서 눈을 멀게 하지도 않는다. 귓가에서 나지막하게 말해주는 세미한 음성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생 말씀에 살고 말씀대로 행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자라나는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로고스교회 설교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8-07
  • [사랑의 실천] 창조신앙과 환경운동
      전능하신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되 특별히 지구를 둘러싼 태양계와 대기권, 아름다운 산하(山河)와 비옥한 땅을 만드시고,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수만 종의 생명체들을 지으셨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을 지배하고 훼손하는 자가 아니라 피조물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청지기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산업주의와 소비주의가 인간의 가치이자 미덕이 되어버리면서 경쟁적으로 대량생산을 위한 자원의 훼손과 낭비로 인해 이산화탄소와 메탄, 일산화질소를 대량 배출하여 지구의 온난화의 주범이 되었고, 독성유해물질을 강과 바다에 투기하고 녹색자연을 훼손하므로 대기권과 땅과 물이 오염되어 지구가 중병에 들어있다. 그 결과 창조질서가 무너지면서 자연이 역반응으로 자연재해를 일으켜서 인간은 물론 수만 종의 생태계가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체들이 서식하고 있는 지구는 종말이 다가왔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 한편에서는 가뭄과 폭염으로 사람이 죽어 가는데 한쪽에서는 노아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대량 홍수사태로 인해 수없이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고 있다. 계절을 의심할 정도로 불시에 40도를 육박하는 더위와 폭우, 겨울철에는 눈사태나 강추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때로는 대형 태풍으로 도시 전체가 사라지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공해로 인해 각종 질병이 만연되고 있고, 생태계가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기형화하거나 공해로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상 이변과 자연 재해는 이제 그 시작에 불과 하며 앞으로 어떤 위험이 불시에 닥쳐올지 모를 정도로 지구와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두려운 징후들이 속출할 것이다. 하루속히 지구를 원초적으로 복원시키지 않는 한 자연은 환경보호의 책임을 물어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보복을 감행하여 수시로 자연재해를 통해 공포와 죽음을 경험하는 불행한 사태가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환경을 복원시켜서 녹색환경을 만들고 생산과 소비를 줄여서 지구 기온을 정상화 시키고 공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원낭비를 줄여야 한다. 후손들에게 건강하고 행복한 지구촌을 물려주기 위하여서는 온 인류가 환경운동가가 되어서 자신부터 환경을 보호하는데 적극 힘써야 할 것이다/예장합동선목측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7-08
  • [사랑의 실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얼마 전 고산 고정일의 소설 <장진호>를 읽었다. 6.25 전쟁 중 하나의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에 위치한 호수로 해발 2천미터 평균기온 영하 20~30도의 가장 추운곳이기도 한다.    이곳에서 미국 제 10군단 제 1사단과 중공군 제9집단 제3사단간의 충돌로 17일간 전개된 말도 안되는 처참한 모습의 전투를 그려낸 소설이 <장진호>이다.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독백이다. 미군병사가 “거센 눈보라와 온몸이 꽁꽁어는 칼추위와 온통 하얗게 얼어붙은 지옥같은 남립산맥 안에서 우리는 살아 남았다. 수 많은 전우를 눈 속에 묻어 버린 채”, “장진호의 얼어붙은 땅에서 뛰고 또 뛰었습니다. 얼어붙은 땅을 손으로 팠습니다. 그들을 땅에 묻었습니다. 고향생각이 꿈처럼 밀려 왔습니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나요?”고 말한다.    중공군 병사는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고귀한 생명을 값싼 소모품처럼 여기는 야만스러운 전투가”, “저들이나 우리나 대체 누구를 위해 이러고 있는가. 조국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목숨까지 내놓고 말이야 정말로 서글픈 일이군”고 말한다.     쏟아지는 폭탄과 불바다 견딜 수 없는 추위로 동상·동사, 배고픔과 아사 등 전쟁의 참상이 애처롭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장진호를 둘러싼 지역은 군사작전을 치룰 수 있는 곳이 못됨에도 그곳에서 어처구니 없이 끔찍하고 비참한 전쟁이 없었던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소설이기에 약간의 논픽션적 요소가 가미되기도 했지만 이 소설은 실제 있었던 사실과 역사자료를 근거로 한 전쟁사이기도 하다.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은 금년으로 74주년이다. 적어도 70대 이전의 세대에게는 6.25 전쟁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부재할 것이다. 해방·건국·전쟁·재건의 과정에 있었던 고통스러운 역사를 방기한채 오늘의 대한민국에 취해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전쟁은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까지 말살할 수 있기에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도록 하려는 다짐과 노력이 요청되는 것이다. 동시에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하는 책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부산 대연동에 있는 UN기념공원 교회에 쓰여있는 글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한기총 전 총무·서울신대 전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6-25
  • [사랑의 실천]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삶
       우리는 ‘눈물’이라고 하면, 슬프고 힘든 일을 먼저 떠올린다. 물리적인 눈물의 원인은 눈에 해로운 물질을 밖으로 씻어 내기 위한 반사운동이다. 그런데 눈물이 먼지나 이물질만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상처를 내보내기도 한다.  아마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람다움을 잘 드러내는 현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삶은 고비마다 대체로 눈물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끼게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눈물은 해방감이 극치에 달할 때도 나오고, 분노의 표현으로도 나타나며, 기쁘고 즐거움이 넘쳐 흘러나오기도 한다. 또한 사랑하는 깊은 감정의 눈물,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흘리는 눈물도 있다.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사회는 눈물이 메말랐다. 어느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릴만한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울음이 없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울면서 살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내 마음속 깊은데서부터 느껴져 올 때, 눈물을 한없이 흘릴 수 있어야 한다.  눈물은 우리 인생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다. 외로움과 쓸쓸함, 힘듦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아픔을 겪을 때,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삭막한 심정일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난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내는 위로의 눈물이다. 마치 늙은 어머니가 어루만져 주는 듯한 부드럽게 달래주는 손길같은 것이다.  이 울음으로 후회와 미련, 고독과 괴로움도 다 흘려버리는 것이다. 이 울음의 눈물에는 아픔도 있고 즐거움과 기쁨도 있다. 이 중에 사람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다.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 어린 뉘우침의 눈물을 흘릴 때에 인생은 즐거운 울음인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용서하며 다시 인간관계를 시작하고 사랑으로 풍성한 인생 눈물골짜기를 인내하면서 한발짝 한발짝 내디딜 때,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같은 인생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위해 울어야 진정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예장 개혁혁신측 총회장 엘림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6-21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사랑의실천] 꼭 필요한 인생을 살자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인생(人生)과 인간(人間)은 그 의미가 다르게 쓰인다. 인생은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란 것이고, 인간이란 ‘사람의 본질은 무엇인가’란 말이다.   사람을 두고 쓰는 이 두 말은 사람에게 가장 값지고 엄숙한 말이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는 사람의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에는 저마다 목적이 있는 것이기에 엄숙하고 보람있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서로를 위해 사랑을 실천하면서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일생이라야 한다고,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요 수필가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곤충에 비유하여 인간의 세 종류를 말하였다.   그는 첫째의 인간으로 거미처럼 인생을 사는 인간이 있다고 한다. 거미는 그늘진 곳에 거미줄을 쳐놓고 가만히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생명이 걸리면 슬그머니 나와서 피를 빨아먹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의 삶을 그렇게 비유한 것이다.   그는 또 두 번째의 인간으로 개미형의 인생을 사는 사람을 지적했다. 개미는 부지런하고 조직력도 강하지만 누구에게 유익을 주거나 헌신함 없이 오직 자기들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개인주의라는 것이다. 이 세상엔 공동체 정신없이 남에게 해를 주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이웃에게 유익도 끼치지 않고 자기만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음을 꼬집었다.   베이컨은 세 번째로 꿀벌형의 인생을 사는,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꿀벌은 개미처럼 부지런하고 조직력이 매우 강하다. 그런데 꿀벌은 질서있게 활동하여 많은 꿀을 만들어 자기들도 먹지만 상당한 꿀을 생산해주는 이타주의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상의 세 타입의 인생을 사는 인간들을 곤충에 비유한 프란시스 베이컨은 거미형의 인간은 이 세상에 있어선 아니 될 사람이라 했고, 개미형의 인간을 가리키면서 그런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되는, 즉 있으나 마나한 인간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세상, 사회 곳곳에 꼭 필요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꿀벌과 같은 인간이라고 칭찬했다. 없어선 아니 될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 인생철학이 뚜렷하고 이웃을 위해서도 존재감이 확실한 인간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철학자 룻소가 말했듯,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혼자 살 수 없다. 구경꾼처럼 따라가는 인생이 아니라, 목적이 분명하여 귀한 생명의 존엄을 꼭 인식하고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사는 멋진 인간이 돼야 한다. /경천교회 원로목사·예장통합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9-30
  • 약자와의 동행
      요즘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말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얼마나 좋은 말이면 정치인들이 너나없이 애용하는 구호가 될 정도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는 말도 결국은 약자와의 동행으로 귀결되고 이웃에 대한 관심이라는 행위도 마지막에는 약자와의 동행에 이르게 된다. 약자와의 동행은 동물에게는 없는 우리 인간만이 가진 고귀한 가치이며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덕목이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도 약자에게 기울일 때 귀한 것이 된다. 약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이지만 강자를 사랑하면 아부가 된다. 약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애정어린 관심이 되지만 강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자기 욕심의 성취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고귀하고 가치있는 약자와의 동행이라고 해도 그것이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수단이나 구호에 머물거나 유명인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도구로 쓰인다면 그것은 한낱 화려하고 현란한 언어의 유희에 그칠 뿐이다. 행동화, 실천화가 안되면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 바로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말이다.   목사님들이 설교예화로 즐겨 사용하는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눈덮인 산고갯길을 친구와 함께 넘다가 추위에 얼어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친구는 어차피 살기 어려우니 그냥 지나쳐가자고 했고 썬 다싱은 그래도 같이 데리고 가야한다고 했다. 의견이 맞지 않아 친구는 홀로 먼저 떠났고 썬다 싱은 그 얼어 죽어가는 사람을 등에 업고 고갯길을 넘는다. 땀과 열기가 등에 업힌 사람에게 전해져 마침내 살아나게 된다. 함께 눈보라 산길을 넘던 두 사람은 추위에 이미 얼어 죽은 또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앞서 먼저 떠났던 그 친구였다. 약자와의 동행은 약자만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내가 사는 길이다. 아니 모두 함께 사는 길이다.   예수님의 성육신도 쉬운 말로 하면 이 땅의 약자와 동행하기기 위해서 오신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종교적 약자, 경제적 약자, 육체적 약자,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약자를 위해 오셨고 그들을 위해 살다가 그 약자들에게 생명까지 주시고자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곧 약자와의 동행을 의미하며 그 약자를 위한 사랑이 행동화한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행동으로 표출되는 약자와의 동행이 단순히 사회복지라는 제도를 넘어 우리 사회 전반에 넘쳐나기를 소망해본다./기독교한국루터회 전임총회장·베델성서연구원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9-15
  • 행복의 조건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 자체가 자신이 행복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행복의 기본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이다. 평화가 깨지면 행복은 없다. 우리가 폭력을 증오하고 전쟁을 끔찍이 싫어하는 것도 평화가 해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인간이 추구해 온 낙원 그것은 바로 폭력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끊임없이 수양하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이다. 옳지 않은 길을 갈 때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스스로에게 경종을 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속에 평화라는 낙원을 만들기는 쉽지 않고 인간 사회 속에서 거의 불가능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나는 잠잠하고자 하나 바람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 것이다. 항상 선택의 기로에서 불안해하며 원치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상황에 갈등하고, 피를 나눈 가족간에도 서로간의 상처로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 경우가 허다하다.혼자 산다면 이런 갈등들과 만나지 않을 테지만 인간인 이상 혼자 살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숱한 선택과 갈등의 상황들을 해쳐나가 마음의 참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을 보면 “감사할 줄 모르는 아이는 뱀의 이빨보다 더 날카롭게 부모의 마음을 찌른다”란 구절이 나온다. 감사가 없이는 모든 것이 해가 된다는 말이다.   행복의 기본은 감사이다.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더라도 감사하는 마음만 있다면 아무리 커다란 문제일지라도 그것의 비중은 아주 작아지고 만다. 예를 들어보면 한밤중에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났는데 그 강도가 나에게 칼을 들이대며 위협해 지갑을 빼앗아 달아났다고 하자.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강도에게 지갑만 뺏기고 목숨이 온전한 것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처음에는 잘 되지 않을 것이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도 저렇게 다 잘 사는데 왜 나에게만 이런 힘든 상황과 억울한 상황들이 일어나는지 불평과 불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습관처럼 가지려고 노력해 보자.  /예장(합동한신)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8-23
  • 자신은 속일 수 없다.
        수해지역은 일년내 복구하고 다음해 또 물난리를 만난다. 수재민돕기 성금보다, 수해대비 성금을 잊어버리고 당한다. 참으로 인간은 어리석은가. 그런데 긴 장마철인데 뜨겁게 태양 마저 내려 쪼이는 날이다. 올 여름 무더위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들으니,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인데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나는 좀 짜증스럽다. 사람이 사람 같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철면피라니 인면수심(人面獸心)이나 하는 말을 하게 된다.   맹자는 동물과 사람을 구별하는 척도로써 사람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진 마음 곧 ‘인(仁)’이 있기 때문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창피하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의로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 사랑하는 마음과 남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예가 있기 때문이다. 또 시비(是非)를 가릴 줄 아는 것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며, 인간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까닭이라 했다. 이러한 희미를 가진 인의예지의 인생을 최대로 실현하는 것을 맹자는 ‘군자도’라고 했다.   이 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직이란 대인관계에 있어서 솔직하고 진실해야 한다. 자기에 대해서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요, 남의 눈과 남의 마음을 속이려면 속일 수 있지만 자신을 속일 수 없다. 무엇을 하든 자신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8절에는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한다. 사실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남이 숨겨진 내 마음을 모르니, 속일 수도 있지만 자신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기상대의 일기예보가 오보인가 아니면 하늘이 사람을 속이는가. 이 시대 사람들처럼 비가 오락가락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정직한 사회 같은데 어찌 보면 전부가 다 거짓말이고 속이는 세상이 되었는지 한탄스러울 뿐이다.    사람이 악한 꾀를 부리면 더 악해지고 솔직하지 못하면 세상에서 도태된다. 정직한 사랑을 가진 자 만이 승리할 수 있다./엘림교회 목사·예장 개혁 혁신측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8-08
  • 코로나19 이후를 묻는다
       요즘 목회자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예배의 정상화를 묻곤 한다. 회복 여부를 따지기에는 아직 이른 느낌이 들어 조심스럽다. 물론 모든 교회는 빠르면 부활주일부터 시작해 일제히 예배시간을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려 복귀하였다.물론 예배형식은 여전히 팬데믹 시절의 방식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방역당국은 5월부터 예배인원을 제한하지 않으며, 음식도 허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교회가 코로나19 상황변화에 따라 뉴노멀을 적용하는 것은 때 이른 듯하다. 예를 들어 아직 애찬을 나누는 교회를 찾아보기 힘든데, 지극히 조심스런 까닭은 안전에 대한 신중함이 아니었다. 지난 2년 이상 긴 휴지기가 교회의 주방봉사자들을 음식준비에 소극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고 푸념한다.    사실 누구나 코로나 탓으로 돌리지만, 교회 안팎에서 자발적 봉사는 점점 쉽지 않은 일이다. 감염병 상황이 아니더라도 교회는 일찌감치 대안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였다.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은 교회가 부인하고 싶은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실토하게 했을 뿐이다. 대형교회든 중소교회든 상가교회든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임기응변 능력의 차이일 뿐이다.   돌아보면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대부분 종교는 사회적 재난 앞에서 참으로 무기력하였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당국의 일방적 통제에 순종 또는 미세하게 반발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특히 재난 중에도 기존 예배형식에 집착했던 일부 교회의 행태는 사회적 비난을 불러왔다. 이 역시 초조함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교회는 ‘위드 코로나’를 말하지만, 방역당국은 ‘단계적 일상회복’을 주장한다. 이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안전한 일상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취지일 것이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 이후를 맞아 어떤 ‘뉴 노멀’을 만들어 갈 것인가?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아가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다.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여 버릴 것과 지킬 것을 분별하여 변화와 개혁의 모멘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7-04
  • 6.25 한국전쟁의 현대적 의미
      6월은 보훈의 달이며 특별히 6.25 한국전쟁을 상기하는 달이다. 이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이 남침하여 3년 1개월 동안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전쟁이었다. 이와 같은 큰 전쟁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째, 6.25전쟁은 인구 대이동이었다. 북한 사람이 1.4 후퇴 때 남으로 피난 오고 서울 사람이 시골로 이동했다. 서울의 영락교회는 피난민이 세운 교회이다. 남한에서는 전쟁을 피하여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피난하고 보니 가족과 씨족사회의 붕괴로 청년들과 부녀자들이 자유롭게 교회 출석하게 되어 교회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둘째, 한국전쟁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이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말3:17)라 했다. 한국은 값없이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다. 이때 38선 이북은 김일성이 공산 독재로 다스리고 남한은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로 입국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북한은 일제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김일성 삼부자의 세습 독재로 일제시대보다 더 낙후된 국가로 전락했고 남한은 1953년 전쟁 후에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로 현재 국민소득 3만불이 넘는 선진국이 되었다. 이것은 말세 하나님이 한국을 쓰시기 위해 위기 때마다 기회를 주신 것이다.   셋째, 한국은 재림의 예수를 맞이할 나라로 선택되었다는 뜻이다. 초림(初臨)의 예수는 이스라엘 나라에 탄생하시어 인류구원을 이루셨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다(눅13:34-35). 재림(再臨)의 예수는 열매 맺는 나라를 선택한다 했는데(마21:43) 한국은 짧은 기간에 한국 인구의 사분지 일인 일천만 명을 신자화 했고 순교의 피를 흘린 나라이기에 재림의 예수를 맞이할 자격이 있는 나라로 하나님이 선택해 주셨음을 믿는다.       결론적으로 코로나19와 오미크론 펜데믹으로 교회가 위축되어 있으나 사명이 있기에 불원 간에 한국의 헌법으로 남북통일도 있을 것이며 교회는 큰 부흥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재림의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해야 할 섭리가 있음을 알고 성령충만으로 대비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6-14
  • 인생의 보배
        세상의 보석들에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빛이 있다. 영롱하고 찬란한 그 빛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소유한다고 해서 배가 부른것도 아닌데 기를 쓰고 보석들을 긁어 모으는 것은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보석의 아름다운 광채는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흐려놓기도 한다. 본래 아름다움에는 독이 있는 법이고 그 독은 사람의 눈을 멀게한다. 그래서 탐스러운 꽃을 보면 꺽어서 내 방에 놓아두고 싶어지고, 기름진 음식을 보면 내 배 안에 채우고 싶어지고 또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내 여자로 만들고 싶어진다.   이렇듯 모든 욕망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눈에서 시작된 욕망은 순식간에 마음으로 전달되고 마음은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탐욕으로 채워진다. 어리석은 인간들의 욕망은 보여지는 이 보석으로만 치닫고 혹여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보석을 숨기느라 여념이 없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기려던 첫 마음은 오간데 없고 오로지 보석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내 정신과 육신을 포박하는 이런 보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보석이 있다. 그것은 썩지도 누가 훔쳐가지도 않으며 돈으로는 도저히 살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천만금을 준대도 팔수 없는 그런 보석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보석이 돈이 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외면하며, 눈에 보이는 보석들만을 쫒으며 자신의 지위와 명예, 권위를 위해 탐욕스럽게 살아간다. 이는 바로 세상의 가치관만을 추구하는 인생들을 뜻한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이 숱한 보석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천년만년 살고자 그렇게 노력했던 진시황제도, 천하를 주름잡던 영웅호걸들도 하늘이 부르면 자신의 수명을 단 하루도 거스르지 못하고 올라가야 하는데 말이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은 인간의 유한함에 초조해 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불안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안들을 말끔히 씻어줄 보석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다. 주님은 “너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시며 영원한 보물을 얻고 싶으면 주님을 믿으라고 하신다. 그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자. 그리하면 이 세상 모든 불안과 초조, 공포에서 해방되고 영원히 썩지 않는 내 영혼의 가장 귀한 보석을 우리 모두 소유하게 될 것이다./예장(합동한신)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6-06
  • 은혜로운 동행
      오늘날 한국교회는 역사상 가장 큰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휘몰아치는 세속화와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수많은 성도가 교회를 떠나고, 예배는 심각한 수준으로 축소되어버렸습니다. 교회마다 부모의 신앙을 이어갈 다음 세대들이 없어서 주일학교가 사라지고, 전도의 문도 닫히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참담하고,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이 시대의 유일한 소망은 교회에 있음을 믿습니다. 교회만이 이 시대의 해답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회복됨으로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움츠리고 있던 신앙적 활동이 모두 정상화되고, 기도의 자리를 통해 이 땅의 모든 성도의 가슴이 다시 한 번 뜨겁게 타오르기를 기대합니다.   위기는 동시에 기회이기도 합니다. 지난 코로나 팬데믹 2년 1개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가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오직 기도만이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장 시급한 것은 기도의 자리를 회복하는 일이요,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은혜로운동행기도운동’이었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8개 지역과 163개 노회에서 90% 이상의 적극적인 참여로 ‘은혜로운동행기도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기도운동을 통하여 주의 종들의 식었던 가슴이 다시 열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은혜로운동행기도회’는 대장정의 막을 내렸지만, 오늘 우리는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우리 총회의 아름다운 전통인 ‘전국목사장로기도회’를 통해 이제는 전국 노회 산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로 기도의 불길이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 땅의 교회들이 문을 닫고, 신앙의 활동이 멈춰버리는 일을 그저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 시간을 통해 우리의 사명의 날이 더 날카롭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얼어붙었던 우리의 심령이 복음의 열정으로 타오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하나가 되는 은혜로운 동행이 시작되기를 원합니다.   이번 제59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 기도의 불길을 재점화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애써주신 총회 임원들과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5-19
  • 풍요로움이 진정한 축복일까?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등장한 것은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죽은 직후 즉,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입성한지 불과 30년만의 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축복의 땅에 입성하여 행복과 감사와 기쁨이 넘쳐야 할 바로 그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후에 38년의 광야의 생활을 통해 불순종의 세대는 전부 죽고, 오로지 새로운 순종의 세대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눈으로 보고 느끼며 경험한 세대, 즉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던 시대로부터 불과 30년 만에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등장했다’고 말하고 있는 사사기 2장 10절은 사사기에 여러 번 반복하여 언급되고 있습니다. 실로 기가 막히는 상황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민족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어 경제적으로 부흥해집니다. 그런데 그 경제적 풍요와 안정이 오히려 축복이 아니라 패망으로 가는 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감사할 것들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한국의 주민등록증을 갖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너무도 감사할 것들이 많은 시대인데,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세상을 더욱더 사랑하고 섬기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영적으로는 사사기와 같이 더욱더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사기로 우리를 인도하는 두 가지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태복음 6장24절에서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하십니다.    둘째 거짓말은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체험의 신앙을 반드시 우리의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을 때 우리의 자녀들 즉 다음세대는 너무도 쉽게 너무도 많은 풍요로움을 거저 받아서 가나안 땅에 입성했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하나님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는 백성들이 될 수 있습니다.  /호주기독교대학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5-11
  •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은혜
      인간이 예수 부활의 진리를 부정한다고 해도 진리가 거짓으로 바뀌지 않는다. 굴을 파서 만든 예수의 무덤 앞에 큰 돌로 가로막고, 로마 군인들이 주야로 철통같이 지키며, 지혜나 온갖 술수를 써서 부활을 부정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려도 예수는 부활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지난 4월 17일 부활절 아침에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K집사가 목양실에 찾아와서 요즈음 왼쪽 발에 통증이 와서 어찌나 아팠던지 오늘 교회에 못나오는 줄로 알았는데 아픔을 참고 억지로 나왔다면서 자신의 고충을 호소했다. 그는 온종일 서서 일을 해야만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몹시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내가 잘 아는 발 교정사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어 서로 상담을 하도록 연결해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나기로 약속을 한 후 K집사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 예배실로 올라갔다. 순간 성령님이 나에게 책망을 하시는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목사냐? 내가 너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었거늘 어찌 내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 기도를 해주지 않느냐?” 나는 즉시 K집사를 불러서 안수 기도를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성령님을 소멸한 죄를 용서해달라고 통회하면서 환자의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그 다음 주일에 K집사가 담임목사에게 기도를 받고 통증이 치유되었다는 소문이 교회 내에 순식간에 퍼지면서, 2부 예배를 드린 후에 다수의 성도들이 기도를 해달라고 요청해서 별도로 3부 안수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기도는 인간이 하지만 예수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이 권능을 베푸셔서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치유사역을 해왔지만 최근에 와서는 교회가 세속화 되고, 코로나로 인해 대면을 꺼려하고, 성도들이 기도받기를 사모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안수기도를 중단한 상태였다.   초대교회처럼 부활하신 예수님, 부활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힘써 일하면 지금도 많은 일을 하도록 도와주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믿음과 사역의 가치를 이뤄나가도록 역사하신다. 부활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 다시 사셨음을 체험하고 만방에 전하자.  /예장합동선목총회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2-05-0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