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20(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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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우리의 고유 명절인 한가위 추석을 맞는다. 추석은 한국의 추수감사절로 생각해도 된다. 햇 곡식의 결실로 송편을 빚고 조상들에게 감사의 예절을 온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명절이 우리의 추석 명절이다. 그래서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는 추석 명절에 맞추어 추수감사절 예배로 드리는 교회도 있다. 이번 추석 명절을 감사와 섬김으로 교회마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사랑의 실천을 한다면 그 얼마나 뜻있는 명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추석 명절이 하늘의 밝은 달을 바라보며 옛날부터 온 동네 이웃들과 함께 두둥실 춤을 추며 민속놀이로 기뻐했던 우리의 전통관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전통이다. 우리의 신앙이 그러하다고 본다. 신앙의 꽃은 감사이다. 예배도 감사로 드리고 기도도 감사로 드림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추석 명절이 모든 곡식의 첫 열매로 감사제를 드림과 같이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는 신앙이 합당한 믿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우리의 감사하는 신앙을 추석 명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들 끼리만 감사할 게 아니라 소외받고 있는 이웃을 찾아 사랑의 실천을 직접 함께 한다면 이번 추석 명절은 진정 뜻있고 보람된 우리의 모습이 되리라 확신한다. 누구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섬김을 받는 우리의 이웃이 얼마나 즐거울까 상상만 해도 흐뭇한 섬김이 될 것이다.    교회마다 이런 섬김은 작고 크고를 막론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고 교회 안의 각급 기관들이 몸으로 함께 즐긴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축제가 되리라고 본다. 이런 봉사는 규모가 작은 교회도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섬김은 섬기는 자도 기쁨이고 섬김을 받는 사람들 역시 피부로 느끼는 감사요 기쁨이 될 것이다.    금년은 무더위도 그 어느해보다 심했었고 우리의 살림살이 역시 넉넉하지 못해서 그늘진 삶을 사는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 주변엔 많이 있음을 본다. 음식을 함께 나누고 직접 몸으로 섬기는 좋은 기회가 이번 추석 명절이다. 감사는 신앙의 꽃이라고 서두에서 밝혔다. 추석 명절 한가위는 감사의 명절이다. 그렇다면 꽃은 향기로 나비와 벌떼들을 불러 모으듯이 결국 열매로 연결시키는 축복이 온다. 감사를 실천하면 신앙의 열매 역시 이번 추석에 주렁 주렁 열리는 축복이 교회마다 찾아 올 것이다./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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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9-10
  • [사랑의 실천]오늘을 위한 기도
     9월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  날마다 똑같은 오늘을 사는데, 시간은 내일로 날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시간에 대한 강박은 지금을 붙잡아 두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묻고 또 대답한다. “시간은 왜 그토록 빨리, 허망하게 지나가 버리는 것일까? 바쁘게 살았음에도 어째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모모한 철학자의 말보다 더 실감나는 명언이 있다. 지하철 화장실에 붙어 있는 “오늘은 내 생애의 남은 날 가운데 가장 첫 날이다”는 대중의 입말에 오르내리는 경구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지금을 붙잡아 두는 일은 큰 관심사이다. 시간만큼 좋은 선물은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실감하는 중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하루 안에 갇힌 24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이 과거의 연장선 위에 있듯이, 내 미래 역시 시간의 연속선에 위치한다.     따라서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는 일은 내 과거를 바탕으로 하며, 내 미래를 향하고 있다. 현재란 과거가 차곡차곡 쌓여 온 것이고, 오늘을 축적하면서 그 결과가 내일이 된다. 그러니 오늘과 무관한 시간은 없는 셈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마태복음 6장 11절)가 포함된다. 하루하루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에 의지하도록 이끌어 준다. 비록 일상을 살아가는 하루지만, 성경의 ‘오늘’은 분명한 시간적 의미를 지닌다. “성서에 오늘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니, 날마다 서로 격려하십시오”(히브리서 13장 13절).     장차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 날은 막연히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일 것이다. 인생의 길이는 ‘생일부터 오늘까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든 오늘마다 부르심을 받는 그 날처럼 감지덕지 감사함으로 살 일이다.   그러니 날마다 오늘을 제대로 살아야 한다. 수 많은 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오늘’이다. 매일 맞이하는 오늘은 낭비해도 좋은 수 많은 날들 중 하루가 아니라, 바로 ‘모든 날 중의 날’로서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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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9-06
  • [사랑의 실천] 두 개의 손
           사람은 날마다 두 개의 손을 맞잡고 산다.한 손은 두려움의 손이고 한 손은 믿음의 손이다. 두려움의 손이 공포와 불안이라면 믿음의 손은 평안과 축복의 손이다. 이 두 가지 손은 어디를 가나 따라 붙는다. 두려움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고 축복의 손이 이기는 순간도 있다. 여기에서 희비가 엇갈린다.    문제는 내가 어느 손을 들어 일을 처리할 것인가에 있다. 그러나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가만히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공포와 불안에 떤다. 두 가지 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이것의 사용법이 결정되지 않은 결과이다.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나면 자기 안에서 그것들이 손을 내미는 것을 차단할 줄 아는 힘이 생긴다. 평안과 축복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나면 그것들에 양분을 주는 지혜가 생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한 낙원을 잃어버린 것도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작은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도 공포의 실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두려워해야 할 것을 가릴 줄 아는 지혜의 눈은 그래서 필요하다. 그러나 살아가다보면 안 보일 때가 있다. 어느 것이 나에게 해가 되는 독인지 나에게 이로움을 주는 약인지 가려지지 않는 것이다. 이 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일생 발등을 찧고 싶은 후회와 절망을 떠안게 된다. 이것을 식별하게 해주는 힘은 바로 말씀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 인간에게 가야할 길과 가서는 안 될 길을 자상하게 일러주고 계신다. 지혜의 눈이 말씀 속에는 들어 있다. 아무리 안개 속을 헤맬지라도 그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단지 인간적인 욕망이 그 길로 접어드는 것은 자꾸만 방해하는 것이다. 평소에 말씀을 음미하고 탐독하다보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두려움의 손을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판단해야 할 뚜렷한 선을 알고 있는데 엉뚱한 길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알고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죽어도 저는 이 길을 가야겠습니다” 라고 고집을 피우면 하나님은 “그래 네 마음대로 한 번 해봐” 라고 내버려두신다. 결과는 뻔하다.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해 지칠 대로 지쳐서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석고대죄 한다.    믿음의 손을 내 안에서 키우는 일은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진리의 불은 너무 뜨거워서 데이지도 않고 너무 밝아서 눈을 멀게 하지도 않는다. 귓가에서 나지막하게 말해주는 세미한 음성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생 말씀에 살고 말씀대로 행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자라나는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로고스교회 설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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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8-07
  • [사랑의 실천] 창조신앙과 환경운동
      전능하신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되 특별히 지구를 둘러싼 태양계와 대기권, 아름다운 산하(山河)와 비옥한 땅을 만드시고,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수만 종의 생명체들을 지으셨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을 지배하고 훼손하는 자가 아니라 피조물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청지기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산업주의와 소비주의가 인간의 가치이자 미덕이 되어버리면서 경쟁적으로 대량생산을 위한 자원의 훼손과 낭비로 인해 이산화탄소와 메탄, 일산화질소를 대량 배출하여 지구의 온난화의 주범이 되었고, 독성유해물질을 강과 바다에 투기하고 녹색자연을 훼손하므로 대기권과 땅과 물이 오염되어 지구가 중병에 들어있다. 그 결과 창조질서가 무너지면서 자연이 역반응으로 자연재해를 일으켜서 인간은 물론 수만 종의 생태계가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인간을 비롯하여 생명체들이 서식하고 있는 지구는 종말이 다가왔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 한편에서는 가뭄과 폭염으로 사람이 죽어 가는데 한쪽에서는 노아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대량 홍수사태로 인해 수없이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고 있다. 계절을 의심할 정도로 불시에 40도를 육박하는 더위와 폭우, 겨울철에는 눈사태나 강추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고, 때로는 대형 태풍으로 도시 전체가 사라지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공해로 인해 각종 질병이 만연되고 있고, 생태계가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기형화하거나 공해로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상 이변과 자연 재해는 이제 그 시작에 불과 하며 앞으로 어떤 위험이 불시에 닥쳐올지 모를 정도로 지구와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두려운 징후들이 속출할 것이다. 하루속히 지구를 원초적으로 복원시키지 않는 한 자연은 환경보호의 책임을 물어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보복을 감행하여 수시로 자연재해를 통해 공포와 죽음을 경험하는 불행한 사태가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환경을 복원시켜서 녹색환경을 만들고 생산과 소비를 줄여서 지구 기온을 정상화 시키고 공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원낭비를 줄여야 한다. 후손들에게 건강하고 행복한 지구촌을 물려주기 위하여서는 온 인류가 환경운동가가 되어서 자신부터 환경을 보호하는데 적극 힘써야 할 것이다/예장합동선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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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7-08
  • [사랑의 실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얼마 전 고산 고정일의 소설 <장진호>를 읽었다. 6.25 전쟁 중 하나의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장진호는 개마고원에 위치한 호수로 해발 2천미터 평균기온 영하 20~30도의 가장 추운곳이기도 한다.    이곳에서 미국 제 10군단 제 1사단과 중공군 제9집단 제3사단간의 충돌로 17일간 전개된 말도 안되는 처참한 모습의 전투를 그려낸 소설이 <장진호>이다.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독백이다. 미군병사가 “거센 눈보라와 온몸이 꽁꽁어는 칼추위와 온통 하얗게 얼어붙은 지옥같은 남립산맥 안에서 우리는 살아 남았다. 수 많은 전우를 눈 속에 묻어 버린 채”, “장진호의 얼어붙은 땅에서 뛰고 또 뛰었습니다. 얼어붙은 땅을 손으로 팠습니다. 그들을 땅에 묻었습니다. 고향생각이 꿈처럼 밀려 왔습니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나요?”고 말한다.    중공군 병사는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고귀한 생명을 값싼 소모품처럼 여기는 야만스러운 전투가”, “저들이나 우리나 대체 누구를 위해 이러고 있는가. 조국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목숨까지 내놓고 말이야 정말로 서글픈 일이군”고 말한다.     쏟아지는 폭탄과 불바다 견딜 수 없는 추위로 동상·동사, 배고픔과 아사 등 전쟁의 참상이 애처롭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장진호를 둘러싼 지역은 군사작전을 치룰 수 있는 곳이 못됨에도 그곳에서 어처구니 없이 끔찍하고 비참한 전쟁이 없었던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소설이기에 약간의 논픽션적 요소가 가미되기도 했지만 이 소설은 실제 있었던 사실과 역사자료를 근거로 한 전쟁사이기도 하다.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은 금년으로 74주년이다. 적어도 70대 이전의 세대에게는 6.25 전쟁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부재할 것이다. 해방·건국·전쟁·재건의 과정에 있었던 고통스러운 역사를 방기한채 오늘의 대한민국에 취해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전쟁은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까지 말살할 수 있기에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도록 하려는 다짐과 노력이 요청되는 것이다. 동시에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하는 책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부산 대연동에 있는 UN기념공원 교회에 쓰여있는 글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한기총 전 총무·서울신대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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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6-25
  • [사랑의 실천]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삶
       우리는 ‘눈물’이라고 하면, 슬프고 힘든 일을 먼저 떠올린다. 물리적인 눈물의 원인은 눈에 해로운 물질을 밖으로 씻어 내기 위한 반사운동이다. 그런데 눈물이 먼지나 이물질만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상처를 내보내기도 한다.  아마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람다움을 잘 드러내는 현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삶은 고비마다 대체로 눈물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끼게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눈물은 해방감이 극치에 달할 때도 나오고, 분노의 표현으로도 나타나며, 기쁘고 즐거움이 넘쳐 흘러나오기도 한다. 또한 사랑하는 깊은 감정의 눈물,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흘리는 눈물도 있다.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사회는 눈물이 메말랐다. 어느 누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릴만한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울음이 없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울면서 살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내 마음속 깊은데서부터 느껴져 올 때, 눈물을 한없이 흘릴 수 있어야 한다.  눈물은 우리 인생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다. 외로움과 쓸쓸함, 힘듦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아픔을 겪을 때,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삭막한 심정일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난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내는 위로의 눈물이다. 마치 늙은 어머니가 어루만져 주는 듯한 부드럽게 달래주는 손길같은 것이다.  이 울음으로 후회와 미련, 고독과 괴로움도 다 흘려버리는 것이다. 이 울음의 눈물에는 아픔도 있고 즐거움과 기쁨도 있다. 이 중에 사람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다.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 어린 뉘우침의 눈물을 흘릴 때에 인생은 즐거운 울음인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용서하며 다시 인간관계를 시작하고 사랑으로 풍성한 인생 눈물골짜기를 인내하면서 한발짝 한발짝 내디딜 때,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같은 인생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위해 울어야 진정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예장 개혁혁신측 총회장 엘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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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4-06-21

실시간 사랑의 실천(칼럼) 기사

  • [사랑의 실천]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하자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존재감을 들어내면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서는 세속적인 어떤 인물보다 더 탁월하고 월등한 차원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특히 영적 지도자로 진취적인 삶을 살며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삶의 질, 신앙의 질, 사고의 질을 높여야만 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목표를 정하고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신을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 하려면 첫째로 거듭나야한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셨다. 거듭남의 증거는 외형적인 것보다 내면적이고 영적인데 있다. 거듭남이란 생명의 본체이시며 근본인 하나님 말씀을 통해 우리 영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 웨슬레는 거듭남의 의미를 신적변화, 내적변화, 완전한 변화, 신비로운 변화라고 했다. 거듭나야할 이유는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적인 것은 항상 죄와 연결되어 있고 영은 항상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게 살아야하기 때문에 구습을 버리고 자신을 날마다 새롭게 변화하기 위해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하나님은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하셨고, 베드로 사도는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라고 했다. 바울은 “자신을 죄에 내맡겨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 성령을 좇아 살라”고 했다. 거룩함을 동반한 성장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지만 성화(聖化)가 없는 성장은 많은 사람들을 실망케 하며 파괴로 이끌기 위한 마귀의 방해공작이다.        셋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서는 학문의 질을 업그레이드해야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고등학문이고 세상학문을 초등학문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항상 내적 전환, 마음의 변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하여서는 성경에서 주는 교훈을 항상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시듯 성경에서 영감을 얻어 인간을 긍정하고 인간됨을 확인하고 인간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서는 복음화가 우선되어야 하며, 복음화는 인간화,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한 삶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하자./ 예장합동선목측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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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10-10
  • 거룩성 회복이 한국교회의 미래이다
      주요 장로교단의 총회가 마무리됐다. 장로교회는 총회 앞에 꼭 ‘거룩한 성’자를 붙여 ‘성총회’라고 말한다. 다른 감리교나 성결교 등 다른 교파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총회는 거룩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자칫하면 총회가 거룩성을 잃어버린 채 정치싸움의 장으로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것이고, 실제로 역사 속에서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났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거리에 버려지듯이 교회와 교회의 회의도 거룩성을 잃으면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코로나를 거치면서 위기는 한층 더 심화됐다. 특히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감소와 이에 따른 지방의 소멸에 한국교회는 존립을 걱정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주일학교는 갈수록 줄고, 2030 청년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결코 녹록치 않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이다. 위기에 대처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성의 회복이다. 총회장이 되고, 대표회장이 되는 것은 어떤 권력과 힘과 명예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할 때 진정한 리더십이 생기는 것이다.    교회의 거룩함을 회복하려면 당연히 목회자 스스로가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말씀과 기도에 전력하며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세우고 날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영성 위에서 교인들을 거룩한 길로 인도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거룩성이다.    목회자부터 거룩함을 회복하고, 교회가 거룩함 위에 견고히 세워지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교인이 몇 명 모이고, 교회건물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거룩성의 회복이 한국교회의 미래이다. 지금부터 거룩함의 회복을 위한 연습과 훈련에 돌입한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4~45)” /한기총·한장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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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9-25
  • [사랑의실천] 사랑을 실천할 기회
      스위스를 매년 회의차 다니면서 스위스의 옆 나라인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를 몇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친구의 안내로 그곳 시립 박물관을 관람했다.    많은 전시품 가운데 인상깊게 감명을 받은 그림은 「기회」라는 큼직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머리에 뒷머리 부분은 없이 앞머리만 길게 늘어져 있고, 발은 말과 같아서 뛰기를 잘하게 생겼으며, 괴상하여 동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한 폭의 추상화이다. 그런데 그 그림이 주는 의미는 크게 감명을 줬다. 설명하는 안내자에 의하면 ‘기회는 앞에서 잡아야지 지나가 버린 후 잡으려고 하면 불가능한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주는 그림이었다. 해설을 듣고 그 그림을 자세히 보니까, 그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앞에서 못 잡으면 뒤통수에는 머리마저 벗겨져 있어서 뒤에선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기회’와 같다는 설명이었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현재라는 기회를 잡지 못하면 후회스런 인생을 살게 되는 교훈을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기회는 순식간에 우리 앞을 지나가고 만다.   사랑의 실천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기회는 오늘이요, 바로 지금이다.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곧 섬김의 삶이다. ‘더 건강하고 더 시간이 나면 하리라’, ‘더 넉넉하면 섬기고 봉사하겠다’고 생각하면 기회는 빨리 스쳐 지나가고, 사랑의 실천은 영영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실천을 통해 보람을 찾고, 좋은 결과로 사랑의 향기가 남을 것이다.   나는 사랑의 향기를 멋지게 남긴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아본다.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 나사로의 집에 가셨을 때, 그의 여동생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은 결과 그 향유냄새가 온 집에 가득하였다는 미담이다. 가룟유다는 ‘그 아까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면’ 하고 위선을 떨었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칭찬하고 이 사랑의 향기가 온 세상에 전해질 것이라고 하셨다.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기쁘시게 한 마리아야말로 사랑을 실천한 모범 사례라고 생각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절)고 했다. 선한 일은 사랑을 지금 바로 실천하는 일이다. /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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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8-31
  • [사랑의실천] 선물로서의 삶
    성경의 전도서는 우리의 삶을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조차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감싸고 있는 자연과 우리의 가족, 그리고 우리의 직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우리의 분복이다. 특히 가족과 직업은 많은 성취 대상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허무한 것 중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행복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전도서의 저자가 안타까워하는 바는 만물을 괴롭게 하고 허무하게 만드는 인간의 한 조각, 어리석음이다.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그저 하나님의 주신 선물과 분복은 소홀히 하고 머나먼 지평선 너머의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헛된 방랑을 거듭하고 있다. 마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에서 나오는 틸틸과 미틸의 여행처럼 말이다.   그들이 찾아 헤매던 파랑새는 바로 내 집의 새장에 있었다. 경제적 풍요가 행복을 주리라 믿고 거침없이 자연을 훼손하던 인간들이 이제는 환경파괴의 저주로 불행해 하는 모습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단단히 기억하자. 선은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이므로 비록 우리의 선행에 대해 즉각적인 보상이 없더라도 선행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선한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지만 많은 사람은 일시적 욕망과 목전의 이익 때문에 선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그 헛된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악을 행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하니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혹은 교회 혹은 기독교사회단체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들이야말로 이 각박한 세상의 나그네 길을 걷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선물이며 위로이다.    우리의 이웃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처럼, 나도 우리 이웃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로 인해 하나님의 섭리가 찬양을 받을 수도 있고, 나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떠올릴 수도 있다. 남이 나에게 선물이기만을 기대하지 말고, 나도 남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되기를 다 함께 노력해보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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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7-21
  • [사랑의실천] 이 땅에 화해와 용서를
       올해는 6.25 전쟁이 끝난 지 만 70년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휴전 곧 정전협정을 맺은 지 70년이다. 같은 민족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70년 동안 휴전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분단의 세월을 모두 따지면 78년이나 된다.  여전히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분단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가 날카롭게 배어 있다.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의 기억을 바꾸어 낼 수 있을까? 베트남 출신 미국 소설가 비엣 타인 응우옌은 “모든 전쟁은 두 번 치러진다.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싸워야 하고 두 번째는 기억에서 싸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깊이 공감하는 까닭은 지금 우리 민족구성원 모두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는 과거의 기억과 여전히 다투는 중이다.    나는 10살에 6.25를 경험하였다. 내 고향 강화도는 북한과 가장 가까이 인접한 위험한 섬이었다. 유년으로 소년으로 성장하던 무렵에 겪은 전쟁은 70년이 지나도록 평생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평화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해하지 못할테지만 우리 노년 세대는 여전히 그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다.  6.25의 비극은 남과 북의 전쟁을 넘어서 미국과 소련이란 체제를 대리한 국제전으로 치달았다. 더 큰 비극은 군인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마을로 내려온 전쟁’이란 점이다. 지역과 동네마다 편을 갈랐고, 증오하였다. 그 와중에서 많은 사람이 너무 쉽게 목숨과 소중한 가정을 잃었다. 모두 쉬쉬하는 일이지만, 쌍방 간에 일어난 복수와 재복수 등 복수의 악순환은 지울 수 없는 증오심을 남겼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흘러야 심리적 종전을 선언할 수 있을까? 언제쯤 지나야 남북 갈등을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까? 우리 민족공동체는 너무나 커다란 시대의 우울과 분노를 앓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극단적 갈등이나, 무조건 상대방을 배척하는 진영논리는 모두 분단 문제에 기인하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하나님께서 너무나 오랫동안 분단 병을 앓고 있는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길 빈다.      그럼에도 희망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겪은 고난은 우리 민족에게 더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남과 북의 분단은 앞으로 화해와 평화의 물꼬를 트기만 하면 세계 어느 나라도 부러울 것 없는 민족공동체로 나아갈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을, 이 민족의 불행한 역사를 긍휼히 여기시길 기도드린다. 그리하여 화해하고, 용서하는 마음과 의지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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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7-18
  • [사랑의실천]‘사랑의 실천’위한 삶의 길
       성자 예수님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의 실천’ 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사랑의 실천'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성자 예수님께서는 이웃 뿐 아니라 원수들에게 까지 '사랑의 실천'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3-45).   성자 예수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을 삶과 몸에 지니고 나타내면서 산 사람들 중에 세 사람을 지적하면 성 프랜시스와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는 예수님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라고 고백하면서 가난을 철저하게 몸에 지니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고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도 가난을 철저하게 몸에 지니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이고 게으르고 나태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사랑과 섬김’의 부스러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아프리카로 방글라데시로 파키스탄으로 중국의 연변 지역으로 때로는 일본으로 북한으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달려 다니면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려고 애를 쓰곤 했습니다. ‘사랑의 실천’만큼 귀중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들도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어려움에 처해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몸과 삶에 지니고 살다가 죽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강변교회 원로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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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6-20
  • [사랑의 실천]기쁨으로 손해보기
         인간의 역사 이래 어떤 형태로든 갈등의 문제가 존재해왔다. 그 갈등이 순조롭게 해소되기도 하고 때로는 끝내 해결의 길을 찾지 못하고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런 거시적인 갈등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네 삶속의 미시적인 갈등의 원인은 대부분 인간의 욕망에 기인한 것들이다. 나의 유익을 극대화하려는 의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상대방의 반발을 불러오고 급기야는 피할 수 없는 갈등 구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물론 때때로 내가 살고 죽는 문제로 인해 그 갈등을 피해갈 수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양보하면 그 갈등의 고리를 풀 수있는 데 그 양보가 어려워 끝내는 아픔의 상처만 남기게 된다. 이것은 국가도 가정도 교회도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이 갈등의 문제는 회피하거나 감추거나 애써 무시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수면 아래로 침잠할 수는 있어도 언젠가 어떤 경로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갈등은 당장 편하다고 회피하려 하기보다는 문제를 꺼내놓고 해소하고 치유한 다음 미래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세상의 큰 갈등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교회나 가정 안의 갈등의 문제가 정말 나의 생존권에 관한 것인가? 나의 양보가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99.99%는 죽고 사는 문제로 인한 갈등이 아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감정상의 문제이든 최소한 신앙사회 속에서는 살고 죽는 문제 때문에 갈등이 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갈등은 해결의 의지, 치유의 의지를 가지면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렇다면 크고 작은 갈등을 치유하는 방법은 없을까? 신앙안에서는 그 방법이 있다. 먼저 기쁨으로 손해 보리라고 마음먹는 것이다. 신앙사회는 이기고 지는 곳이 아니다. 내 의견이 꼭 관철되지 않으면 어떤가? 내가 조금 손해 보아 은혜롭다면 그 또한 주님께서 칭찬하시지 않을까? 상호간에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반보씩 양보하면 의외로 문제는 풀릴수 있다. 자신의 자존심을 조금만 기쁨으로 손해보라. 자신의 권위를 기쁨으로 조금만 내려놓으라 자신의 체면을 조금만 내려놓고 기쁨으로 손해 보기로 마음먹어보라. 문제는 은혜중에 해결될 수 있다. 왼뺨을 치려하면 오른뺨을 돌려대는 것은 엄청난 손해이다. 그러나 내가 먼저 기쁨으로 그 손해를 감당하려하면 못할 것도 없다. 웃으며 오른뺨을 돌려대는 사람에게 그 뺨마져 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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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6-13
  • [사랑의실천]톨스토이와 소녀
         톨스토이가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 어느 집 앞을 걸어가는 한 소녀가 갑자기 숨이 넘어갈 듯 우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톨스토이가 그 소녀의 어머니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그 소녀는 톨스토이의 가방을 가지고 싶어서 우는 것이라고 했다. 톨스토이가 가진 그 가방은 친지의 유품이라 그에게 상당히 소중한 것이었지만 일단 소녀를 달래기 위해 그는 소녀에게 말했다.   “울지말아라, 오늘은 이 가방을 줄 수 없지만 내일은 이 가방이 내게 필요하지 않으니 내가 꼭 내일주마.” 목을 놓아 울던 소녀는 그 말에 울음을 그치고 톨스토이의 목에 매달려 즐거워했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그 가방을 들고 다음날 소녀의 집에 갔을 때 소녀는 죽은 상태였다. 갑자기 세상을 뜬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미 죽고 없는 소녀의 무덤에 그 가방을 바쳤다. 소녀의 어머니가 이미 죽은 아이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렸지만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따님은 죽었지만 제 약속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중에 많은 약속을 한다. 약속의 사전적 의미는 ‘상대자와 앞으로의 어떤 일에 관하여 서로 합의하여 결정하여 둔 것’이라고 되어있다. 한번 한 약속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시간의 무덤 속에 남아 있다. 잊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을 테지만 약속은 약속으로 남아있고 상대방이 그 약속을 명확하게 믿고 있다면 뜻하지 않게 죄를 범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하나님과 한 약속은 반드시 없어지지 않는다.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 이제부터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약속했다면 꼭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건망증이 없으시다. 어허 저 놈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저렇게 거짓말을 하네 하며 기억하시곤 질타하신다.   톨스토이는 한 철없는 소녀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켰다. 하물며 만물의 근원인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의 기도제목을 이렇게 삼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약속한 것 중에서 실천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제 머리를 맑게 해주셔서 생각하게 도와주십시오. 제가 지키겠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약속은 언뜻 일방적인 나만의 약속처럼 느껴져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성령이 역사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만큼 진실한 무게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항상 내가 무슨 약속을 드렸는지, 그 약속을 실천했는지, 실천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점검하는 자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이다. 톨스토이의 가방을 받아든 소녀의 영혼은 매우 기뻤을 것이다. 내가 지키지 않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 무릎을 꿇는다면 하나님 또한 굉장히 기뻐할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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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5-18
  • [사랑의실천] 주님의 사랑으로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에는 사랑을 의미하는 네 개의 단어가 있다. 그중에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때 쓰는 단어는 네 가지이다. 먼저, 남녀지간의 사랑을 에로스라 한다. 그리고 혈통적 사랑을 스톨게라 하며, 이는 가족간의 사랑을 가리킨다. 또, 친구지간의 우정과 사랑을 필리아라고 한다. 그리고 죄인이나 원수까지도 구원하고 복을 받게 하기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을 아가페라고 한다. 이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그리스도를 닮은 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부부지간의 사랑도 그리스도처럼 해야 한다. 이삭은 임신이 안 되는 리브가를 위해 간구하니 하나님께서 그가 구한대로 되게 하셨다.(창25:21) 요나단은 친구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다.(삼상20:17) 다윗이 왕위에 오른 것은 주님의 은혜와 함께 친구의 도움이 컸다. 가나안 여인은 개 취급을 받은 수치도 흉악한 귀신들인 딸의 구원을 위해서는 감수해야했다.(마15:21~28) 모두 다 주님의 사랑을 닮은 자들이다.   이제는 우리들 차례다.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어도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전13:1~3)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전11:1). 우리도 바울같이 해보자. 남을 구원하고 돕기 위해 지기를 희생해보라. 주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시리라.   예수님 믿어 구원받고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들이여,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자. 영광의 영 하나님이 함께하시리니(눅6:38).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행복이라.(신33:29)   그리고 내가 먼저 주지 않고 받을 것만 생각하여 불만을 품고 원만했던 일들을 회개하자. 주와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처럼 해보자. 가정과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직접 세워주신 공동체이다. 주님께서 실천으로 본을 보여주신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하게 하려하심이다.(요13:12~15) /예장 백석측 증경총회장·해오름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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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5-04
  • [사랑의 실천] 또 하나의 선진국 지표
         선진국 여부를 판단하는 여러 가지 지표가 있다. 그중의 중요한 것 하나가 경제규모이다. 경제규모 측면에서만 보면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국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세계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이미 G7 국가중의 하나인 이탈리아를 추월하여 GNI (Gross National Income) 6위를 달성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경제규모만으로 선진국가임을 자부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상대적 빈곤율, 지니계수, 복지예산비중 등등 사회보장 제도가 얼마나 발전해 있는가가 또한 중요한 선진국을 가름짓는 지표가 된다. 그리고 나아가서 법과 제도, 그리고 통계로 표출되는 사회보장 제도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국민적 배려의식이다. 국민들의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식이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선진국 지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의식을 신앙적 용어로 치환하면 곧 사랑과 섬김이라는 말이 된다. 소외계층에 대한 사랑의 실천여부와 배려의식의 크기가 경제규모에 못지 않는 또 하나의 선진국을 평가하는 바로메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이 가져야할 선진의식, 곧 약자에 대한 사랑과 섬김의 정신은 어떠해야할까? 그 해답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가 가져야할 사랑과 섬김의 정신을 여실이 보여주셨다. 종이 주인의 발을 씻기고,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겨야 정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사회통념을 정반대로 뒤집으심으로써 진정한 섬김과 사랑의 무엇인지 보여주시고 계신다. 진정한 섬김과 사랑! 그것은 강자가 약자를 섬길 때 가능하다. 나아가서 또한 주님께서 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이제는 너희가 내발을 씻기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이제는 너희가 또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라는 것이다.    언젠가 칭찬릴레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릴레이 마인드이다. 진정한 선진국은 경제규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 곳곳에 온 국민들의 마음속에 이러런 약자를 향한 사랑의 실천과 섬김의 릴레이 정신이 굽이칠 때, 그때 우리는 당당하게 G7을 넘어서는 진정한 선진국이 될 것이다/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칼럼)
    2023-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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