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9-19(토)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실시간뉴스

실시간 사랑의 실천 기사

  •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란
      “형제들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성경에서 처음 예배드린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삭을 번제(제물)로 드림으로 시작됐다. 이러한 예배는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것으로서 명 설교나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닌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현대 종교인들의 예배는 신전에 가서 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들의 모임이 곧 성전이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 모인 숫자에 관계없이 드리는 예배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온라인 예배는 어떨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을 살리는 영으로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임해서 말씀하셨고, 신약에서는 거듭난 사람의 영 안에 들어가셔서 말씀 하셨다. 생명의 말씀 선포는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의 영 안에 들어가 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온라인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났을까? 온라인에 사람의 영이 존재할까? 온라인으로 하나님의 영이 흘러나올 수도 없고, 학문과 종교, 철학 등으로 혼에 감동이 있더라도 그것은 영 안으로 들어 올 수 없고, 영의 생명없는 고자사역이다. 말씀은 거듭난 영을 통해 상대방 영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기존 종교적 설교는 특정 사람이 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다 제사장으로 그들 스스로가 매일 지성소에서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통해 은혜의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고 나눈다. 그리스도로 인한  승리한 삶을 간증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말씀선포였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거듭난 생명을 영이 없는 기계를 통해 말씀하실 수 없다. 이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기계로서 영에 생명을 줄 수 없고 영을 분배할 수 없는 사탄의 사악한 발상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대로 드리려야만 하고, 사람이 만든 도구와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면 죽는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드리다 그 불로 죽었음을 기억하자. 온라인 예배는 사람들의 편리함과 이익을 위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사)성경원형회복연합 대표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0-09-16
  • 예배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예배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만남이다. 그 만남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신앙고백으로 우리의 죄악을 용서받고, 기도로 우리의 연약을 아뢰고, 주의 종의 복음적 말씀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생명의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하고, 각자의 일터에서 소명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배의 본질에 대해서 몇 가지 말해보자. 첫째,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과 더불어(With God’의 예배여야 한다. 즉, 예배는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이 예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모든 순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며, 응답하기도 한다. 둘째,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으로 부터(of God)’의 예배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찾지 않으셨다면,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인간 자신의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 셋째,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Unto God)’이다. 오늘 많은 한국교회 예배들이 매우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수행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효과를 얻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헌금을 많이 나오도록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예배하고 있다면 잘못된 예배인 것이다. 예배의 목적이 자신의 위안과 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화려한 쑈나 재미있는 개그 프로그램 같은 것으로 청중을 울고, 웃기는 일에 만족을 주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배라 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나 온라인 예배는 처음부터 예배가 아니었고, 그냥 예배장면을 눈으로 보는 것이었다. 예배는 보는 것도 아니요, 구경하는 것도 아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는 온전한 헌신으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당국에서 ‘비대면 예배’를 강요했을 때, 아무 말도 못하고, 고운 새색시처럼 순종만 하고 있다.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0-09-11
  • 수해민 아픔 보듬는 교회 되자
        코로나19로 인한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또 온 나라에 폭우와 홍수의 아픔이 찾아왔다. 이제는 사라진 단어인 줄 알았던 홍수피해, 수재민, 하천범람, 침수, 제방 붕괴라는 단어를 또다시 접하게 되었다. 바다로 변한 도시, 떠내려가는 자동차, 지붕 위에 올라가 어찌할 줄 모르는 소들,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길 등등. 바라보는 마음이 애절하다 못해 아리다. 침수 후 찾아온 폭염 속에서 무너진 집과 사라진 농경지를 바라보며 절망밖에 남은 것이 없다며 눈물 흘리는 수재민들, 무너진 벽과 쓰러진 종탑을 어루만지며 한숨 짓는 피해 교회의 목사님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먼저 홍수 피해를 입고 망연자실하실 전국의 수재민과 교회에게 삼가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마저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전해드리고 싶다. 이제 우리 모두가 해야할 일이 있다. 자연은 우리를 아프게 했지만 그 아픔의 상처를 보듬어 안고 치유해야 하는 일이 오늘 우리 믿음의 성도들과 교회들의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한 두가지 있다. 첫째는 이번 홍수피해로 인해 아픔을 당한 모든 수재민들과 한국교계 나아가서 우리 한국사회가 이 재난을 이겨내리라는 의지를 가지는 일이다. 희망을 가지는 일이다. 온 세상이 물에 잠기는 홍수 속에도 하나님은 한가지 희망을 남겨놓으셨다. 바로 무지개이다.   무지개는 희망이다. 무지개는 회복이다. 무지개는 홍수피해를 이겨내리라는 의지와 약속의 징표이다.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이 회복과 치유의 무지개를 품어야 한다. 이번 홍수피해도 극복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자. 나아가서 피해를 입고 한숨짓는 분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자연재해가 터질 때 마다 우리 사회가 잘하는 것이 있다. 그 피해가 천재냐 인재냐를 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인재라면 그것이 누구 책임이냐를 추궁하는 것이다. 그런 것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하다. 평소에 예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리를 게을리하여 피해를 증폭시키고 국민에게 더 큰 아픔을 준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시점에서는 망우보뢰이다. 물론 소를 잃었어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다. 지금은 외양간을 고치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 그것은 소를 찾는 일이며 소를 잃은 사람의 아픔을 보듬고 온 교회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일이다.   그런가하면 우리 교인들과 교계가 해야 할 일은 수해 재난민과 교회 지원을 위해 힘을 모으는 일이다. 관심을 모으는 일이다. 이런 대형 재난이 생길 때마다 여러교회에서 현장으로 달려가는 고마운 분들이 있다. 정말로 감사하고 격려할 일이다.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이고 뭉쳐 이번 물 재난을 당한 분들이나 교회에게 큰 힘이 되어주기를 소망해 본다. 몸으로 물질로 돕는 것이 진정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관심과 배려이다.   물론 모든 수해 피해를 우리 교인이나 교계의 힘으로 다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큰 것은 나라나 지방자치 단체가 하더라도 작은 것은 얼마든지 우리가 할 수 있다.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다. 수재민 돕기 의연금 모금은 물로 능력과 관심을 가진 교회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 수재민, 혹은 교회들과 일대일로 결연을 맺고 그들이 다시 건강하게 삶의 터전위에 우뚝 설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안은 찾아보는 것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번 홍수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우리 교계가 따뜻한 사랑의 관심과 배려를 보냈으면 한다. 더 큰 어려움도 이겨낸 우리 민족이다. 관심과 배려로 수재민이나 큰 피해를 입은 교회의 눈물을 닦아주자. 그리고 아무리 큰 홍수라도 그 뒤에는 반드시 무지개가 떠 오름을 잊지 말자. /새길교회 목사, 루터회 전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0-08-21
  • 민족의 통일과 사명
      기독교는 해방의 종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 애굽의 4백 년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고, 이후 유다 왕 여호야김 11년에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으나 70년 만에 고레스에 의해 2차로 해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과 블레셋, 앗수르, 바사, 헬라, 로마 등 강대국의 압제하에서 고통받을 때마다 특별한 섭리로 해방을 시켜주셨다.   우리는 북에는 이스라엘, 남에는 유다로 갈라진 나라를 남쪽 유다를 통하여 북쪽 이스라엘을 흡수 통일시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남북통일도 대한민국을 통해 북한을 해방시키고 통일시키실 것을 먼저 믿어야 한다.    일제강점 시절 우리 국민은 해방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와 무수한 폭격, 두 번의 핵 투하로 인해 패망을 맞이한 일본이 미국을 필두로 하는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에 서명하면서 그들의 모진 매질을 맞고 숱한 착취에 시달리며 처절하게 억압받고 있던 우리가 민족의 해방을 맞이하게 된 기적을 체험하지 않았는가.   한반도의 통일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시기에 갑자기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통일을 함께 기도하며 준비할 때 그날이 속히 올 줄로 믿는다. 그러나 통일은 평화의 통일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력으로 남북 간 소중한 생명이 사라지는 비극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한다.   이는 비단 동족 상잔의 비극을 되풀이하는 비극을 막는 것일 뿐만 아니라 평화를 희구하며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과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인류애를 나누는 공동체를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여호사밧 왕은 나라가 전쟁으로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때에 하나님은 응답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무력으로라도 통일을 얻고자 하는 북한이 전쟁을 도발하지 않도록 여호사밧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한다.   남북 간 평화의 순풍이 멈추고 있는 지금 동·서 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교회끼리 자매결연을 통해 서로의 교회가 교우의 집을 왕래하면서부터 자유를 맛보고 통일의 길을 열었던 독일을 본받아야 한다. 서독의 교회는 정치성을 배제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으로 오늘의 통일 독일을 이루는데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남북의 교회가 교류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여 통일의 길을 여는 데 앞장서야 한다. 독일의 통일처럼 피 흘림 없는 통일을 한국교회가 열어나갈 때 통일의 날은 속히 다가올 것이다. /예장(합동한신) 전 총회장·목포중부교회 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0-08-12
  • 예배 회복에 힘써야 한다
      코로나 사태이후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이 하나같이 우려하는 외침이 예배회복이라는 구호이다. 코로나가 단기간에 끝났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장기화되면서 많은 피해와 부작용과 우려를 낳게 되었다. 더구나 코로나 사태는 앞으로도 얼마나 더 오래갈지도 모르는게 현실이다. 이러는 사이 한국교회의 예배가 무너진게 사실이다.     회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지금의 수준과 과정이 정상수준이 아니라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니까 기준에 못 미친다든지 정상적이지 않다는 말이 아닌가? 물론 예배학적으로 여러 가지 이론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예배는 회집예배를 말하고 있으나 여기에 반하여 회집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예배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배는 단순히 찬양 몇 곡 부르고 설교를 들었다고 예배의 기능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회중예배를 구약 성경에서는 물론이고 신약교회의 태동이라 할 수 있는 사도행전적 교회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 2장 42~47절에서 찾을 수 있는데 초대교회는 일단 모이는 교회였음은 분명하다. 물론 장소의 개념은 별개로 하더라도 말이다.    집에서 모이는 소그룹 예배의 모임도 있었지만 이런 소그룹들이 다 함께 모이는 대 그룹의 예배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배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종합예술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예배가 무너진 이유가 무엇일까? 코로나로 인함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는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이미 한국교회 예배는 서서히 무너져 왔다고 본다. 미디어의 발달로 교회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원하는 영적 기호에 따라 접할 수 있는 설교의 홍수시대가 교인들을 교회 밖으로 내 몰았다고 본다. 가뜩이나 이런 추세로 기울어지던 판에 코로나 사태로 회집이 제약을 받게 되고 교회마다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면서 회집예배는 멀어지고 개별예배가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이제는 온라인 예배가 더 자유스럽고 편리하다는 편의주의에 빠져 버리게 되었다.    시간이 장기화되면서 이제는 개별예배의 익숙함에 빠져버렸다. 물론 미디어 시대에 무조건 미디어를 부정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미디어를 잘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디어 예배가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성도들이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 교인들과 이 사회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방편임을 강조하여 성도들이 대면예배의 정당성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어차피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 될거라고 본다면 철저한 예방수칙과 함께 대면예배 그러니까 교회에 회집하는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강조해야 한다. 교인들의 생각의 전환이 없이는 예배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다. 회중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회중예배가 훨씬 은혜롭다는 사실도 확인시켜 주어야 할 것이다. 온라인 예배와 차별화된 분위기 조성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면 강력한 기도운동을 통해 성도들의 심령을 채우고 새롭게 하는 일 등. 어느 목사님은 온라인 중계를 모두 중단했다는 말을 들었다. 사태가 많이 안정이 되었음에도 교회 출석을 외면하는 교인들 때문이란다. 그런데 그것 마저 끊으면 다른 교회 채널로 옮겨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 전체가 온라인 중계를 끊지 않는 한. 예배회복 이는 한국교회 전체에게 던져진 숙제이다.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 이 숙제를 풀어야 할 것이다. 하루 속히 예배가 회복되어 모든 교회가 정상화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뿐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대신측 총회장·수원명성교회 담임목사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0-07-14
  • 나눔으로 행복 창조를
      세상은 불공평한 사회로 보인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있고 병든 자와 건강한 자가 있다. 많이 먹어 병든 자가 있고 먹지 못해 병든 자도 있다. 세상은 언뜻 보면 이렇게 불공평하게 보인다. 그래서 생각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왜 이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냐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의 세상을 운영하시는 섭리일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자와 병든 자와 가난한 자와 우는 자들을 통해서 세상의 양심을 깨우치려 하신다. 즉 그 돌봄의 대상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양심이 마비되지 않고 깨우치고 회복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TV 화면을 통해 보면서 안타까워 눈물짓고 그들을 도와주려고 애를 쓴다. 그렇다면 그 사실만 해도 잠자고 있던 세상의 양심들을 일깨우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이 세상은 그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통해서 건강성을 회복하고 도와주려는 애타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일 것이다.   또한 약자를 돕는 과정을 통해서 세상은 행복을 창조한다. 동물은 번식기가 끝나면 동시에 생명도 끝난다. 그런데 사람은 번식기가 끝나도 훨씬 더 오래 산다. 그것은 낳아놓은 자손들을 양육하고 돌보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유독 나누고 베풀고 사랑하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과 감사와 삶의 맛이 나누고 베풀고 사랑할 때 주어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평안한 삶과 안정된 삶과 쌓아놓은 삶에서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의 주제가 나눔이다. 섬김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이웃이 있고 나눌 대상이 있고 사랑해야 하는 영혼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돌봄의 대상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서 모두 위축되어 있다. 모두 위기감에 싸여 있다. 지금이 우리 주변을 살피고 섬길 기회이다. 함께 나누고 섬기면 이 위기가 기회가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모두 너 때문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은 모두 함께 더불어 격려하며 나누며 살아갈 때이다./기성 전 총회장·신촌교회 원로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0-07-08
  • 먼저 한국을 배워라
      카터가 단임 대통령으로 끝나고 레이건이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나는 카터와 사귄 것처럼 약소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미국의 권력자들을 사귀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나라를 위한 일이며, 특히 나라가 어떤 어려운 경우에 처한다면 그때 절대 필요한 것이 민간 외교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민간 외교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생각한 대로 미국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우호국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항상 내가 귀를 기울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레이건이 대통령에 입후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은 그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할 때 국장을 하던 자니 존슨목사였다. 그는 레이건과 대단히 가까워서 주정부의 국장인가를 지냈으며 대통령 선거 후에는 백악관에 비서진으로 들어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으나 주변의 중상모략 때문에 결국은 백악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레이건이 대통령직을 물러났을 때 반관반민의 무슨 조직의 장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큰 어려움 없이 레이건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우선 카터와의 인연을 닿게 해준 웨인 스미스를 꼽을 수 있다. 또한 나는 그동안 에디 알리슨이라고 하는 사람과도 오래 교분을 나누었는데 그는 레이건이나 부시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나와 레이건의 만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다. 여러 차례 만나는 과정에서 레이건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가졌던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나를 잊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한국 사람으로 처음 레이건을 만난 사람이 나였다는 것만 보아도 그와의 친분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레이건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공화당 당직자들과도 상당히 좋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들에게 우리나라를 바로 알게 하는데 일조를 할 수 있었다. 내가 누구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무슨 대가를 바라고 그 일에 뛰어든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내가 한 일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한편으로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0-07-02
  •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는 목회
      인류 역사를 크게 나눌 때 B.C와 A.D로 나눈다. B.C.는 예수 탄생 이전과 A.D.는 예수 탄생 이후라는 뜻이다. 그런데 코로나19는 세계사적으로 큰 변화를 낳았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코로나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생긴 말이 B.C와 A.C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B.C.는 코로나19 이전을 말하고, A.C.는 코로나19 이후라는 뜻이다. 그만큼 코로나19로 인한 충격은 세계적인 동시에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의학 전문가들은 올가을이나 늦어도 겨울철까지 2차 펜데믹이 올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는 어떤 충격을 받았으며 교회지도자들은 어떻게 크게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목회를 해야 할 것인가를 크게 고민하고 대응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예장 통합측이 전문회사에 의뢰해서 발표한 설문 결과, 70%의 교회에서 헌금이 줄었는데 평균 30% 정도 헌금 액수가 줄었다고 한다.   10주 이상 현장예배를 온라인 예배로 대체한 후에 출석교인 회복이 60%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목회자들의 40%가 ‘교인들의 주일성수 인식 및 소속감이 약해지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라고 답을 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목회방안에 관해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먼저 본질에 더욱 집중하는 목회를 생각해야 한다. 비본질적이고 형식적이며 성장지상주의적 목회에 함몰되어 있었던 여러 요소를 잘라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 다음 건물 위주의 보이는 교회 목회를 지양하고 보이지 않는 교회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목회는 담을 쌓고 문으로 들어온 사람을 대상으로 양육하고 심방하는 관리형 목회였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가두리 양식장과 같은 목회라 하겠다.   코로나19가 닥칠 것이라고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인간이 어떻게 미래를 알 것인가. 우리 모두 겸손하게 무릎꿇고 간절하게 기도하며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사도행전적 목회의 원형질을 찾아가자. 인간이 할 수 없다고 백기투항을 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크로스로드 이사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0-06-24
  • 전쟁의 역사가 주는 교훈
      금년은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전쟁과 관련해서 단편적으로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이민족들로부터 무려 993회나 침략을 당했으며, 외세에 의해 침략을 당할 때마다 우리의 조정과 백성들이 큰 수모를 당하기도 하고 피해를 입었음을 읽을 수 있다. 일례로 1637년 1월 30일은 조선왕 인조가 청 태종 앞에서 소위 삼배구고두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이나 무릎을 꿇은’ 치욕적인 날이었다. 인조 왕은 청나라의 강요에 의해 용포를 벗고 청나라 옷으로 갈아입은 뒤 백마를 타고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강화 삼전도에서 이 의식을 치렀다. 당시 청나라 군사 3만 명이 쳐들어올 때까지, 임금과 신하들은 주지육림에 빠져있었고 태만한 군의 수뇌들과 병졸들은 국방에는 관심이 없이 안일 무사한 태도로 방만했다. 침략자인 청군이 난폭한 행동을 하며 횡포를 하자, 섬에 살던 부녀들은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으며, 60만 명의 인질들이 청나라로 끌려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일본 침략사에서 잊을 수 없는 또 다른 사건은 소위 ‘을미사변’이다. 일본의 무장군인들이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왕실을 침투해서 민비를 시해하고 황후의 시신을 토막 낸 후 경복궁 뒤뜰에서 재가 되기까지 장작불로 태웠다. 당시 고종의 둘째왕자인 의화군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으로 피신을 했고, 고종은 선교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공포 속에 지내다가, 1896년 2월 9일에 조정을 드나드는 신하를 가장해서 가마를 타고 일본군의 눈을 피해 아관으로 가서 피신하다가 1897년 2월 20일에 경운궁으로 환어했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부른다.   또 하나의 우리 민족이 근세사에서 상기되는 6·25전쟁은 동족상잔이란 글자 그대로 동족끼리 총을 겨누며 강산이 피바다가 되도록 싸운 비극 중에 비극인 전쟁이다. 삼천리강산은 초토화 되었고, 600만의 사상자와 20만의 전쟁미망인, 10만의 전쟁고아, 1천만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그리고 우리와 피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16개국 유엔참전국의 수많은 장병들이 이 땅에 와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거나 전사를 하기도 했다.   전쟁을 통해 얻은 역사적인 교훈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의 발견이다. 전쟁에서 지면 자유가 없는 불행한 노예로 탈락된다. 그리고 전쟁의 폐허에서 오늘날의 경제적 대국과 복음주의 국가를 이루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믿음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는 ‘믿음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끝으로 국력이 있어야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킬 수 있으니 ‘국력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다시는 이 땅에서 불행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을 모아 하나님 사랑, 나라사랑, 이웃사랑으로 자유와 평화적인 국가를 이루도록 기도하자. /예장합동선목총회·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0-06-18
  • 한국 신학대학의 미래
      한국전쟁 70년. 우리나라가 전쟁의 폐허에서 오늘날의 경제적 대국을 이루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교회의 성장과 함께 자란 신학교는 대학이 되었고 신학교는 본래의 모습보다는 일반 대학의 신학과의 모습으로 많이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학교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 왔고 복음으로 이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뜻으로 세워진 설립의 본래의 뜻은 희석되고 대학의 발전이라는 일반적 논리에 휘말리게 되었다.    인구절벽이라는 문제는 신학교에 또 하나의 악재로 덮치고 있다. 최근 뉴스앤조이 보도는 금년도 20개 전국주요대학 신학과 정시입시에서 7개 대학은 미달이고 20개 대학 입시경쟁율 평균이 1.5:1로 겨우 인원을 채우고 있다고 한다. 신학과 지원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이런 현상은 앞으로 계속될 터인데 그렇다면 문제는 정규 교육을 받은 내일의 교회지도자를 어떻게 공급하느냐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이 시점에서 내일의 교회의 지도자를 누가 키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말 할 것도 없이 지금의 교인들 외에 아무도 없다. 심고 가꾸지 않고 자라는 나무는 없다. 고3 학부모들이 모여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도 기도회를 하는 것도 좋지만 한나 같이 자녀들이 주의 일을 할 일꾼이 우리 교회에서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임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몇 년 안에 많은 신학교가 사라질 수도 있다. 교육부는 칼을 갈고 있다. 학생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학교는 문을 닫게 하겠다는 것이 2021년 교육부의 ‘구조조정 원칙’이다.   신학교를 재정적으로 돕는 일는 중요하다. 2018년에 교육부가 대학기본역량 평가를 하였는데 대부분의 신학대학들이 진단 제외를 신청하여 평가를 받지 않았다. 재정지원도 받지 못했다. 신학대학들은 대부분 소규모 대학들이다. 왜 당당히 평가를 받고 재정 지원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대학평가는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모럴 서포트와 재정적 뒷받침이 없으면 해내기 힘든 싸움이다. 교육부가 소규모라 해서 대학에 요구되는 여러 가지 기본적인 조직, 학습을 위한 기구와 인원을 감해 주지 않는다. 교회와 교단이 재정적으로 일정 금액을 지속적으로 도와야 한다. 해외선교비, 사회구제 등 현시성 예산과 함께 당장 효과가 보이지는 않지만 주의 일꾼을 기르는 교육에 투자를 해야 할 때이다. 좋은 교역자를 모시는 일이 불가피한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교역자를 양성하는 일은 내일 우리 교회를 위해 그리고 주를 위해 더욱 귀한 일이다. 교단 배경이 없는 대학이야 알아서 하겠지만 입만 열면 큰 교단임을 자랑하는 분들은 이 기회에 귀 교단의 소속 대학들에 대한 특단의 지원을 하기를 바란다.  /한국성서대 총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0-06-1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