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6-05(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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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인간상을 위한 교육적 과제
      입시를 통하여 미래를 담당할 준재들을 받아들이는 대학이 해야 할 많은 일들 중에서도 인간성 회복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당면 문제이다. 우리나라 대학이 산업 사회 건설을 위한 지도자·기술자·경제인·공무원 등등을 훈련하여 공급하며, 산업에 필요한 조사·연구·자료수집·구상·발명 등의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결과 인간의 문제가 등한시되며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인간 상실의 상황에까지 밀려가게 된다. 그래서 근년에는 대학에서의 인간 형성의 문제가 대학 교육의 중요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어떠한 인간상을 지향할 것이냐의 문제도 함께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현대 문명 안에서는 인간이 전인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기계의 부품처럼 되어 개성이 없는 기능으로만 행동하고 있다는 것, 윤리적으로 중성화하여 다만 효능이나 이해관계로만 행동 기준을 찾는다는 것 등일 것이다. 이런 처지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독자적인 초월성을 되찾지 못한다면 인간은 물욕에 사로잡힌 꼴이 되고 기계의 종이 되어 인간 상실의 비운에 빠지고 말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중세의 인간상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것은 지나간 일이어서 역사를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간성 상실의 현대를 솔직하게 시인함과 동시에 그 상황 안에서 살출 될 수 있는 최선의 인간상을 모색하고 그런 인간상의 창출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인은 과학의 혜택에서 동떨어져 살 수가 없다. 그런데 과학이란 인종도, 국가도, 사상도, 종교도 편파적인 행위를 할 수 없는 공통 또는 초월된 보편성을 지닌다. 과학의 기본 법칙이나 그 활용은 인간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인간성도 진실과 정직의 토대 위에서 인간성을 구체화하는 방향으로 모색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기술의 세계에 있어서는 효능이 매우 중요한 것이 되게 마련이다.   현대 인간이 기능적으로 분화되고 그 지식이 세밀한 분과적 성질의 것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인간으로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 이외의 모든 다른 인간들이 공동체적으로 나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 소외를 극복하고 인간으로서의 위상을 지킬 수 잇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대학에서도 현대의 인간 소외와 인간 상실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 형성’과 ‘새 인간상’ 모색에 진지한 관심을 지녀야 할 줄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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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0-06-04
  •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
      코로나19가 발생한 지 단 몇 개월 만에 지구촌의 모든 산업과 인간관계가 제한적 형태로 바뀌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코로나19 확진자가 세계 굴지의 도시마다 매일 수백, 혹은 수천 명씩 발생하고 있다.   전염병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힘이 있다. 14세기 유럽 전역을 강타한 흑사병이 그렇다. 전염병의 공포로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4분의 1을 잃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라 여겼던 흑사병 속에서 인간이 맡을 역할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고민은 이성의 해방을 촉구하는 르네상스 시대로 이어졌다. 동시에 교회의 역할을 비판하며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교회 권력이 무너지고 하나님과 교인의 관계가 회복됐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권력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시켰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처럼, 코로나19 이후의 우리 생활은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비대면 생활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도시화, 집중화된 사회 환경이 개별화된 생활 방식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한국교회도 코로나19 이후의 변화 앞에서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코로나 이후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첫째, 예배의 변화가 필요하다. 신학적 신념은 공고히 하되 예배의 문화는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이전에는 예배 참여의 횟수가 신앙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이제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    둘째, 강단을 낮춰야 한다. 예배당의 구조를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 주입식 예배에서 묻고 답하는 예배로 바꿔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제자들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규모의 예배를 탈피하고 교인 모두가 알차고 내실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강단의 높이를 낮춰야 한다.   셋째, 대면 전도를 사회봉사의 형태로 바꿔야 한다. 불신자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대면 전도를 지양하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질서를 지키고 정직하며 친절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    넷째, 청소년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청소년은 교회의 미래이다. 그러나 주일 학생이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신앙을 잃고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교회는 이들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사회적 격랑 속에서도 교회는 언제나 이 땅의 중심에 있었다. 교회는 역사의 주체이지 방관자가 아니다. 코로나19 이후의 한국교회는 더 큰 사명을 부여받았다.    1907년, 나라의 위기 속에서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한국교회가 재난 속에서 회개와 변화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새로운 부흥 운동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교통문화선교협의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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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0-05-28
  • 위기를 이기는 유연성
      2020년 한국 땅의 봄은 6·25 전쟁 이후 가장 혹독한 봄이 분명하다.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로 특별히 대구 도시가 가장 큰 치명타를 입고 있다. 대구 시민, 경북 도민,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국민에게 신의 보호하심이 있기를 바란다.   어려움이나 위기는 예기치 못한 때에 공격해 온다. 이때 필요한 것이 유연성이다. 유연성은 우리 신체를 먼저 떠올린다. 신체에 유연성이 부족하면 다치기 쉽다. 어린 아기는 유연성이 엄청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유연성을 급격히 떨어진다. 살짝 넘어져도 뼈가 부러지고, 몸에 이상이 온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유연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려움이 닥칠 때, 생각의 유연성이 필요하다. 신체적 유연성이 우리 몸을 보호하듯이, 생각의 유연성은 닥친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우리를 크게 돕는다. 생각의 유연성을 심리학에서는 방어기제라고 한다. 방어기제에는 신경증적 방어기제와 건강한 방어기제가 있다. 도전해 온 어려움으로 인해 더 어려움으로 이끌어 가는 방어기제를 신경증적 방어기제라고 한다. 그러나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서 다시 평온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건강한 방어기제이다. 건강한 방어기제의 다른 말이 생각의 유연성이다.   신경증적 방어기제가 있다면 건강한 방어기제도 있기 마련이다. 미국 하버드의대 정신의학자 베일런트가 소개하는 네 가지의 건강한 방어기제이다. 첫째로 억제이다. 참는 것이다. 무의식적 참는 것은 억압으로 화병을 유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억제란 의식적 참음이다. 감정 조절 능력이다. 그러므로 억제는 힘이 필요하다. 둘째로, 이타주의를 언급한다. 어려움의 도전을 더 어려운 사람을 도우므로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해 내는 것이다. 셋째로, 승화이다. 누구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데, 승화시켜 복서가 되는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넷째로 유머를 꼽는다. 유머는 농담과 다르다. 농담은 타인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유머는 자신의 어려움을 승화시키고 이기기 위한 것이다. 유머로 유명한 민족이 유대인이요, 그래서 그들의 희락을 후대에 남기고자 탈무드의 유머라는 문화 장르를 남기었다.   이 위기에 스데반 돌봄 사역원에서는 건강한 방어기제로 유머를 강조하고 싶다. 지금 어렵다고 울 것인가, 아니면, ‘이 또한 지나 가리라’라는 생각의 유연성으로 이겨낼 것인가?   정신과 의사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한 가지를 밝힌다. 홀로코스트라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의 공포까지도 이겨낸 것은 유대인 그들의 유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할 때, 한가지 유연성이 더 필요하다. 한가지 유연성이 아니라 유일한 유연성이다. 바로 영적인 유연성이다. 신앙의 유연성이라고 불러도 좋다. 어려움을 당할 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떠 올릴 수도 있다. 신앙의 유연성은 지금의 불행 한복판에서 나와 함께 울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연성이다.   바로 13년의 감옥에서 절망하지 않는 요셉의 신앙적 유연성이요, 고난의 대표 주자 욥을 붙들어 준 것이 바로 신앙인 안에 숨쉬고 있던 신앙의 유연성이다.   유연성이 필요하다. 몸도 유연성이 필요하다. 생각의 유연성도 필요하다. 그러나 필자는 어려움 속에 우리와 더욱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신앙의 유연성을 강조하고 싶다.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루터회 전 총회장, 작은예수들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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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0-05-21
  • 코로나19와 한국교회
      중국발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공포와 혼돈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나라는 의료진의 희생적인 헌신 덕분에 진정국면에 접어드는가 싶더니 황금연휴에 이태원의 클럽을 찾은 사람들 때문에 온 국민이 다시 긴장하고 있다. 이 같은 국면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는 코로나의 완전한 극복을 위하여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가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온 국민이 모든 역량을 모아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해 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야말로 코로나로 인하여 가장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두 달여 동안 대부분 교회는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지나왔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해 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온라인 예배를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다른 형태의 예배라고 평가하면서 이제 한국교회는 여러 형태의 예배에 적응해야 한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온라인 예배를 완전한 형태의 예배라고 하기는 무리라는 생각이다.   두 달도 넘게 교회당은 텅 비어있었고, “모이는 교회”로서의 기능은 상실된 상태로 지나오게 되어 예배의 회복은 물론 영적인 회복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코로나 때문에 입은 손실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예배의 회복은 물론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교회가 입은 영적인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교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를 재개한 교회마다 예배에 참례하는 교인이 코로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감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다는 소문이다. 이것은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아마도 지난 두 달여 동안 주일마다 교회당에서 당국이 요구하는 것을 철저히 지키면서 예배를 드려온 교회들은 예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교회가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모이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성실하게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동안 오직 온라인 예배만을 고수해 온 교회들로서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모든 교인들이 다시 교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우리나라가 코로나를 잘 극복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의료진들이 몸을 던져 희생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코로나로 인한 타격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있음을 세계교회 앞에 보여줄 차례이다. 코로나로 인한 고통과 손실은 너무나도 크지만 힘주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우리의 본분을 다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바꿔나가는 한국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 염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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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0-05-21
  • 효와 가정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속담은 “세 살 교육이 여든 간다”는 긍정적 교훈으로 고쳐야 한다. 우리 선조들은 영,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태중에서부터 바른 교육을 시키기 위해 태교에 노력했다. 애굽 왕실에서 바로의 딸로 자란 모세는 애굽이 아니라 히브리 민족을 위해 헌신했는데 그 이유는 모세가 자기 친어머니에게서 받은 영, 유아기 교육의 영향 때문이다(출2:9). 사랑하는 자녀에게 유산으로 남겨 줘야할 것은 재산이 아니라 부모의 가르침이다.    성경에 ‘효’라는 단어는 한글 개역성경에서 오직 한 군데 있을 뿐이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것이니라”(딤전5:4). 효를 배우는 곳은 ‘자기 집’이다. 가정교육이 효교육이며, 효교육은 뿌리 교육이다.   성경 66권에서 효교육의 핵심을 빼낸 것이 성경7효이다. 성경7효는 첫째,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김 둘째, 부모·어른·스승 공경 셋째, 어린이·청소년·제자사랑 넷째, 가족사랑 다섯째, 나라사랑·국민사랑 여섯째, 자연사랑·환경보호 일곱째, 이웃사랑·인류봉사이다. 이 중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하나님 사랑과 부모공경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람됨은 하나님의 효자, 부모의 효자로서 완성된다. 효는 자연발생적인 결과가 아니라 가정에서 가르쳐야 할 하나님의 목적의식적인 명령이다.    내가 효운동을 하게 된 것은 우리 가문의 내력과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 할아버지가 9대 독자였다. 9대이면 300년 동안 외아들로만 온 것이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우리 아버지 4형제 고모 둘, 6남매를 낳았다. 그런데 6·25가 우리 아버지 형제 삼형제를 다 죽게 했다. 그 때가 우리 아버지는 32세, 둘째 작은 아버지는 29세, 셋째 작은 아버지는 26세였다. 아버지 삼형제가 한 해에 다 돌아가셨다. 우리 할아버지가 9대에 독자이시며 내가 전쟁 통에도 죽지 않은 이유는 효운동하는 목사가 되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는 지금까지 생각해왔다.    효자는 그 자체로 이미 행복이다. “하나님께는 자녀만 있지 손자는 없다”는 말이 있다. 부모의 신앙이 곧 자녀의 신앙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과 1대1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도 다음 세대가 신앙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자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내 자녀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필요할 때는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가르쳐야 한다(잠22:15). 자녀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인 어린이들을 학교와 학원에만 맡겨두고 있지 않는가? 가정의 달 5월, 효를 가르치고 신앙을 전수하는 5월의 가정이 되어야겠다.  /인천순복음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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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0-05-15
  • [본지 창업자 고 김연준박사 어록] 사랑의 철학을 지닌 교육자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참교육을 실천하는 교육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정치나 경제가 보여 주는 화려한 역할도 중요하겠지만, 먼 장래를 생각할 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역시 교육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교육이 평생 계속되는 것이므로 다만 학교 교육만을 교육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실 지식 전달이나 품격 조성의 가장 중요한 일을 학교에서 담당하는 것이고 가정에서도 사랑하는 자녀들을 맡기고 모든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정에서 경제력 획득에 성공하여 많은 부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 자녀의 품성이 경솔하고 불성실하며 또는 패악 무도하게 된다면 조상이 일궈낸 부도 계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패가망신하기 쉬울 것이다. 이런 일은 국가도 마찬가지여서 경제 건설에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국민의 품성이 저열하고 무뢰하다면 그 국가의 경제뿐 아니라 사회도 무질서와 무법이 난무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여기서 교육자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국가의 품격을 조성하는 책임이 교육자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기계가 아니므로 다만 기계적인 과정으로서는 소기의 성과밖에 거둘 수가 없다. 피교육자도 인간인 만큼 교육자는 피교육자개개인에게 사랑으로 대하여 성심으로 그 피교육자의 인간됨에 보탬이 되기를 기약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심정, 즉 남이 나에게 가장 사랑하는 자녀를 맡겼으니 그를 나의 자녀와 같이 생각하고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심정부터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교육자로서의 가장 기본되는 자세라 할 것이다.    교육자는 설령 그가 어려운 여건에 처하여 다소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참고 견디어 꾸준히 신성한 교육적 사명을 다할 자세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평생을 시골의 벽지에서 꾸준히 교육에 종사하고 백발과 노구로 현직에서 물러나는 수많은 교직자의 모습을 볼 때, 그 앞에 머리를 수르려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의 장래가 교육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기억하고,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사랑으로 한 몸이 되어 교육 본래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의 교육에 의해서 조성된 인격의 소유자만이 생을 통해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사랑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우리가 이룩해 놓은 근대화의 자산을 수호할 뿐만 아니라 더욱 꽃피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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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0-04-28
  • 기독교 복음과 사랑의 실천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에서 요약되어 있다. 또한 어떤 점에서 그 복음의 가르침은 예수의 산상설교에 압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우리가 예수님의 팔복의 가르침에 주목할 때,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즉 구약 전체의 계명이 총괄됨을 본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서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단지 듣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 실천하고 준행하라고 하셨다.    먼저 그 사랑은 주 하나님을 마음과 영혼(생명)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하여 유혹을 받고 우상을 섬기며 사랑하는 데에 집착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를 때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계명이 완성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동시에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예수의 복음을 완성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두 가지 사랑의 균형과 통합을 어렵게 여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가지에 더 집중하면서 온전함과 균형을 잃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온전한 기독교 복음은 이 두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성취된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의 목적은 바로 그 완전한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고 그 형상대로 회복되지 않는 한, 참되고 온전한 기독교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산상수훈의 처음에 나오는 천국의 팔복을 보면, 먼저 가난하고 겸손하며, 온유하고 깨끗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나아가서 화평하게 하며 의를 갈망하는 복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참 사랑을 실현하는 길을 보여준다. 산상설교의 전체를 묵상하며 읽어보면 이웃 사랑에 관한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오늘 우리 교회는 개혁되고 새롭게 되어야 한다. 그러한 개혁을 위해 무엇보다도 복음의 회복이 일차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고 속죄의 제물이 되신 어린 양 예수의 능력을 받아야만 거듭남과 성화의 증거가 이 땅에 돌아올 것이다. 이 역사적으로 크나큰 위기가 온 세상에 편만한 시대에, 한국교회는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일꾼들을 요청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것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이다. 열렬하고 순결한 사랑,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를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처럼 감당하라는 부르심이 있다.    사랑의 실천은 말과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참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힌 사람들만이 이웃을 위해 삶을 드리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지금 허상을 버리고 그 우상의 잔치에서 뛰쳐나와 참된 사랑의 고귀한 실천에 투신할 때이다. /감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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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0-04-24
  • 분별하여 기도하기에 힘쓰자
      사이비와 이단의 영이 발악하는 때가 곧 짐승의 때이다. 택한 백성이라도 자기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우는 사자와 같이 발악한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려 전신갑주를 취해야 하며,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여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여, 끝까지 견디는 욥과 같은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사이비와 이단의 영은 간교하고 간사하다. 모든 사람을 미혹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명예와 재산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미혹하여 무릎 꿇게 한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말씀에 접붙임 되어 그 나라와 그 의의 말씀 안에서만 생활해야 하고, 깨어 근신하여 기도에 힘써야 한다.   사이비와 이단의 영의 특징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간교한 말쟁이라 그 말에 미혹되기 쉬우나, 감동과 감화도 없고 심장에 자극도 없다. 따라서 철두철미한 시인과 회개가 있을 수 없다. 참 진리는 생명이 있어 감동과 감화와 생명력이 약동하고 비진리는 육체의 쾌락으로 끝난다.   말에 미혹되어 미혹의 영에 이끌려가서 결국은 사망에 침몰된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려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과 명철이 필요한 세대이다. 참 진리는 빛이요, 비진리는 어둠이다. 빛은 생명이요, 어둠은 사망이다. 하나님 아는 지식과 예수님 아는 지식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이 지식이 없는 자에겐 생명이 없다.    성령과 물과 피, 이 셋이 합하여 하나 될 때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권능이 생긴다. 우리가 영을 다 믿지 않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잘 분별한다면, 이미 많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나왔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알고 그리스도의 영을 알아 시시초초 시인하고 회개하여 적그리스도의 영을 잘 분별해야 할 때이다. 이단의 영은 시인과 회개에 대하여 철두철미하지 않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며, 세상은 그들의 말을 좋아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 아는 지식이 있는 자들은 우리의 말을 듣되,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분간할 수 있다. /제일성민교회 목사·서산중앙병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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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0-04-14
  • 부활신앙과 회복의 비전
      시인 엘리엇은 그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하였다. 4월은 만물이 소생하고 꿈이 부풀어 오르는 계절임에 비해 실망과 좌절의 벽에 부딪혀 생을 포기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달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잔인한 달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는 지금 전 세계인이 마치 전쟁이 발발한 것과도 같이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해 가장 잔인한 4월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4월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소망이 넘치는 달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마귀의 권세를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부활의 달이다.   한때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유골이 발견되어 그 뼈가 인도의 한 거리에 진열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석가의 유골 앞에 가서 참배하려고 줄을 지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 한 기독교 선교사가 그 광경을 보고 친구에게 말하기를 “만약에 예수의 뼈가 발견되었다면 기독교는 끝장났을 걸세”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독교는 예수의 빈 무덤과 그의 부활을 자랑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많은 영웅들은 생전에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며 웅장한 묘를 만들어 놓고 죽은 자를 추모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2천 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이면서도, 그는 지금도 살아서 부활의 영으로 인간에게 다가와 동행하며 역사의 현장에서 일하고 계신다. 예수 부활 후에 선교적 사명과 영적권능을 부여받은 사도들과 교회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의 핵심복음을 전하며, 당시 어둡고 불행한 사회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했다. 복음을 듣고 죄인들이 어찌 할꼬! 가슴을 치며 죄를 회개했고, 죽은 자를 살리며, 병든자들을 치유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과 물질을 나누었다. 부활절을 맞아 잔인한 4월을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생명의 달로, 어둡고 우울한 세상을 밝고 활기찬 세상으로 회복시키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원한다.       /예장 합동선목측 전 총회장
    • 오피니언
    • 사랑의 실천
    2020-04-09
  • 영적 건강지키며 생명나눔
      코로나19로 인해 나라 전체가 혼란스러움에 빠진 지도 수 주일이 지났다. 자고 일어나면 늘어나 있는 확진자의 수를 볼 때마다 기독교인으로서 이 어지러운 시국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제대로 된 일상생활조차 마음껏 할 수 없는 오늘의 이런 현상은 무엇 때문에 일어난 것일까? 그 중심에는 신천지가 있다. 그들로 인해 무섭도록 빠르게 퍼져간 전염병을 바라볼 때 사이비 종교가 우리 사회를 얼마나 멍들게 하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와 맞물려 우리 사회에 그 민낯을 공개한 사이비 종교를 바라볼 때, 둘이 참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도 않아 소리소문없이 사람의 몸을 잠식하는 바이러스처럼 사이비 종교도 우리가 생각지 못한 순간 사회 깊은 곳에 뿌리내려 많은 이들의 영을 잠식하고 있다. 많은 젊은이가, 한때는 열심히 교회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 진실된 믿음마저 저버린 모습을 볼 때 선배 신앙인으로서 몹시 마음이 아프다. 왜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바이러스와도 같은 사이비 종교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것일까? 건강관리의 실패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건강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영적 건강도 중요하다. 우리의 인간 됨은 먼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의 목적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삶의 목적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깨어있어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의 믿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믿음인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와 겉모습만 그럴싸한 거짓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를 공격하는 바이러스를 이기기 위해 육체적 건강이 중요하듯 사이비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영적 면역력을 기르는 일이 중요하다. 말씀 중심에 서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나의 삶을 돌아보며 철저하게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인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우리 교회만의 성장과 부흥을 위해 달려왔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소외되고 상처받았던 이들을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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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0-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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