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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사랑을 실천할 기회
스위스를 매년 회의차 다니면서 스위스의 옆 나라인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를 몇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친구의 안내로 그곳 시립 박물관을 관람했다. 많은 전시품 가운데 인상깊게 감명을 받은 그림은 「기회」라는 큼직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머리에 뒷머리 부분은 없이 앞머리만 길게 늘어져 있고, 발은 말과 같아서 뛰기를 잘하게 생겼으며, 괴상하여 동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한 폭의 추상화이다. 그런데 그 그림이 주는 의미는 크게 감명을 줬다. 설명하는 안내자에 의하면 ‘기회는 앞에서 잡아야지 지나가 버린 후 잡으려고 하면 불가능한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주는 그림이었다. 해설을 듣고 그 그림을 자세히 보니까, 그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앞에서 못 잡으면 뒤통수에는 머리마저 벗겨져 있어서 뒤에선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기회’와 같다는 설명이었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현재라는 기회를 잡지 못하면 후회스런 인생을 살게 되는 교훈을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기회는 순식간에 우리 앞을 지나가고 만다. 사랑의 실천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기회는 오늘이요, 바로 지금이다.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곧 섬김의 삶이다. ‘더 건강하고 더 시간이 나면 하리라’, ‘더 넉넉하면 섬기고 봉사하겠다’고 생각하면 기회는 빨리 스쳐 지나가고, 사랑의 실천은 영영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실천을 통해 보람을 찾고, 좋은 결과로 사랑의 향기가 남을 것이다. 나는 사랑의 향기를 멋지게 남긴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아본다.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 나사로의 집에 가셨을 때, 그의 여동생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은 결과 그 향유냄새가 온 집에 가득하였다는 미담이다. 가룟유다는 ‘그 아까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면’ 하고 위선을 떨었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칭찬하고 이 사랑의 향기가 온 세상에 전해질 것이라고 하셨다.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기쁘시게 한 마리아야말로 사랑을 실천한 모범 사례라고 생각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절)고 했다. 선한 일은 사랑을 지금 바로 실천하는 일이다. /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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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사랑으로 갈등을 치유하자
우리는 오는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한다. 1919년 3월 1일 선조들의 항일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1945년 8월 15일 쟁취한 광복을 기리며 1948년 8월 15일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만방에 선포하였다. 일제 식민지배의 고통과 아픔의 흔적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채 곳곳에 상채기와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해방은 되었지만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분단의 아픔과 6.25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서로 간에 지울 수 없는 증오심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배들의 헌신 덕분에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으로 앞서가는 선진국의 반열에 서 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아직도 뿌리 깊은 반일 감정, 남북의 분단과 극심한 좌우 대립, 지역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등 수많은 문제가 분출되어 대한민국이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 하면 이 모든 원한과 갈등과 상처와 아픔들을 치유하고 공존 공영하는 대한민국을 이룰 수 있을까? 우리는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마 22:37~40)고 말씀하셨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해답임을 믿는다. 설령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모든 면에서 우세하다고 해도 상대방은 승복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의 실천만이 최선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야고보서 2장 8절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더 나아가서 야고보서 2장 26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사 랑을 실천하며 살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누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 예수 생명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다. 온 세상은 거짓과 증오로 가득차 있다. 나에게 예수 생명이 가득 차 있어야 미움을 덮을 수 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려면 먼저 내가 하늘나라 주소를 소유해야 하고 물질을 소유해야 물질을 나누어 줄 수 있듯이 하늘 생명을 소유해야 천국을 얻지 못한 굶주린 헐벗은 궁핍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야고보서 2장 12절은 자유의 율법을 가진 자라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고, 요한일서 3장 24절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자들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도 많은가? 사랑을 실천하며 한걸음씩 나아갈 때 모든 원한과 고통과 갈등을 치유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늘 생명을 소유한 우리는 사랑의 실천으로 일본의 식민지배의 고통과 상처도 이겨내고 남북 분단의 골을 넘어 통일 대한민국을 열어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할 그날을 기대하며 살아가자./ 조은교회 원로목사·(사)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전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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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선물로서의 삶
성경의 전도서는 우리의 삶을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조차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감싸고 있는 자연과 우리의 가족, 그리고 우리의 직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우리의 분복이다. 특히 가족과 직업은 많은 성취 대상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허무한 것 중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행복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전도서의 저자가 안타까워하는 바는 만물을 괴롭게 하고 허무하게 만드는 인간의 한 조각, 어리석음이다.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그저 하나님의 주신 선물과 분복은 소홀히 하고 머나먼 지평선 너머의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헛된 방랑을 거듭하고 있다. 마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에서 나오는 틸틸과 미틸의 여행처럼 말이다. 그들이 찾아 헤매던 파랑새는 바로 내 집의 새장에 있었다. 경제적 풍요가 행복을 주리라 믿고 거침없이 자연을 훼손하던 인간들이 이제는 환경파괴의 저주로 불행해 하는 모습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단단히 기억하자. 선은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이므로 비록 우리의 선행에 대해 즉각적인 보상이 없더라도 선행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선한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지만 많은 사람은 일시적 욕망과 목전의 이익 때문에 선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그 헛된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악을 행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하니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혹은 교회 혹은 기독교사회단체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들이야말로 이 각박한 세상의 나그네 길을 걷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선물이며 위로이다. 우리의 이웃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처럼, 나도 우리 이웃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로 인해 하나님의 섭리가 찬양을 받을 수도 있고, 나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떠올릴 수도 있다. 남이 나에게 선물이기만을 기대하지 말고, 나도 남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되기를 다 함께 노력해보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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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이 땅에 화해와 용서를
올해는 6.25 전쟁이 끝난 지 만 70년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휴전 곧 정전협정을 맺은 지 70년이다. 같은 민족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70년 동안 휴전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분단의 세월을 모두 따지면 78년이나 된다. 여전히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분단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가 날카롭게 배어 있다.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의 기억을 바꾸어 낼 수 있을까? 베트남 출신 미국 소설가 비엣 타인 응우옌은 “모든 전쟁은 두 번 치러진다.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싸워야 하고 두 번째는 기억에서 싸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깊이 공감하는 까닭은 지금 우리 민족구성원 모두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는 과거의 기억과 여전히 다투는 중이다. 나는 10살에 6.25를 경험하였다. 내 고향 강화도는 북한과 가장 가까이 인접한 위험한 섬이었다. 유년으로 소년으로 성장하던 무렵에 겪은 전쟁은 70년이 지나도록 평생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평화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해하지 못할테지만 우리 노년 세대는 여전히 그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다. 6.25의 비극은 남과 북의 전쟁을 넘어서 미국과 소련이란 체제를 대리한 국제전으로 치달았다. 더 큰 비극은 군인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마을로 내려온 전쟁’이란 점이다. 지역과 동네마다 편을 갈랐고, 증오하였다. 그 와중에서 많은 사람이 너무 쉽게 목숨과 소중한 가정을 잃었다. 모두 쉬쉬하는 일이지만, 쌍방 간에 일어난 복수와 재복수 등 복수의 악순환은 지울 수 없는 증오심을 남겼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흘러야 심리적 종전을 선언할 수 있을까? 언제쯤 지나야 남북 갈등을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까? 우리 민족공동체는 너무나 커다란 시대의 우울과 분노를 앓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극단적 갈등이나, 무조건 상대방을 배척하는 진영논리는 모두 분단 문제에 기인하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하나님께서 너무나 오랫동안 분단 병을 앓고 있는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길 빈다. 그럼에도 희망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겪은 고난은 우리 민족에게 더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남과 북의 분단은 앞으로 화해와 평화의 물꼬를 트기만 하면 세계 어느 나라도 부러울 것 없는 민족공동체로 나아갈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을, 이 민족의 불행한 역사를 긍휼히 여기시길 기도드린다. 그리하여 화해하고, 용서하는 마음과 의지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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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기쁨으로 손해보기
인간의 역사 이래 어떤 형태로든 갈등의 문제가 존재해왔다. 그 갈등이 순조롭게 해소되기도 하고 때로는 끝내 해결의 길을 찾지 못하고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런 거시적인 갈등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네 삶속의 미시적인 갈등의 원인은 대부분 인간의 욕망에 기인한 것들이다. 나의 유익을 극대화하려는 의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상대방의 반발을 불러오고 급기야는 피할 수 없는 갈등 구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물론 때때로 내가 살고 죽는 문제로 인해 그 갈등을 피해갈 수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양보하면 그 갈등의 고리를 풀 수있는 데 그 양보가 어려워 끝내는 아픔의 상처만 남기게 된다. 이것은 국가도 가정도 교회도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이 갈등의 문제는 회피하거나 감추거나 애써 무시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수면 아래로 침잠할 수는 있어도 언젠가 어떤 경로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갈등은 당장 편하다고 회피하려 하기보다는 문제를 꺼내놓고 해소하고 치유한 다음 미래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세상의 큰 갈등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교회나 가정 안의 갈등의 문제가 정말 나의 생존권에 관한 것인가? 나의 양보가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99.99%는 죽고 사는 문제로 인한 갈등이 아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감정상의 문제이든 최소한 신앙사회 속에서는 살고 죽는 문제 때문에 갈등이 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갈등은 해결의 의지, 치유의 의지를 가지면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렇다면 크고 작은 갈등을 치유하는 방법은 없을까? 신앙안에서는 그 방법이 있다. 먼저 기쁨으로 손해 보리라고 마음먹는 것이다. 신앙사회는 이기고 지는 곳이 아니다. 내 의견이 꼭 관철되지 않으면 어떤가? 내가 조금 손해 보아 은혜롭다면 그 또한 주님께서 칭찬하시지 않을까? 상호간에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반보씩 양보하면 의외로 문제는 풀릴수 있다. 자신의 자존심을 조금만 기쁨으로 손해보라. 자신의 권위를 기쁨으로 조금만 내려놓으라 자신의 체면을 조금만 내려놓고 기쁨으로 손해 보기로 마음먹어보라. 문제는 은혜중에 해결될 수 있다. 왼뺨을 치려하면 오른뺨을 돌려대는 것은 엄청난 손해이다. 그러나 내가 먼저 기쁨으로 그 손해를 감당하려하면 못할 것도 없다. 웃으며 오른뺨을 돌려대는 사람에게 그 뺨마져 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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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톨스토이와 소녀
톨스토이가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 어느 집 앞을 걸어가는 한 소녀가 갑자기 숨이 넘어갈 듯 우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톨스토이가 그 소녀의 어머니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그 소녀는 톨스토이의 가방을 가지고 싶어서 우는 것이라고 했다. 톨스토이가 가진 그 가방은 친지의 유품이라 그에게 상당히 소중한 것이었지만 일단 소녀를 달래기 위해 그는 소녀에게 말했다. “울지말아라, 오늘은 이 가방을 줄 수 없지만 내일은 이 가방이 내게 필요하지 않으니 내가 꼭 내일주마.” 목을 놓아 울던 소녀는 그 말에 울음을 그치고 톨스토이의 목에 매달려 즐거워했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그 가방을 들고 다음날 소녀의 집에 갔을 때 소녀는 죽은 상태였다. 갑자기 세상을 뜬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미 죽고 없는 소녀의 무덤에 그 가방을 바쳤다. 소녀의 어머니가 이미 죽은 아이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렸지만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따님은 죽었지만 제 약속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중에 많은 약속을 한다. 약속의 사전적 의미는 ‘상대자와 앞으로의 어떤 일에 관하여 서로 합의하여 결정하여 둔 것’이라고 되어있다. 한번 한 약속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시간의 무덤 속에 남아 있다. 잊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을 테지만 약속은 약속으로 남아있고 상대방이 그 약속을 명확하게 믿고 있다면 뜻하지 않게 죄를 범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하나님과 한 약속은 반드시 없어지지 않는다.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 이제부터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약속했다면 꼭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건망증이 없으시다. 어허 저 놈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저렇게 거짓말을 하네 하며 기억하시곤 질타하신다. 톨스토이는 한 철없는 소녀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켰다. 하물며 만물의 근원인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의 기도제목을 이렇게 삼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약속한 것 중에서 실천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제 머리를 맑게 해주셔서 생각하게 도와주십시오. 제가 지키겠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약속은 언뜻 일방적인 나만의 약속처럼 느껴져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성령이 역사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만큼 진실한 무게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항상 내가 무슨 약속을 드렸는지, 그 약속을 실천했는지, 실천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점검하는 자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이다. 톨스토이의 가방을 받아든 소녀의 영혼은 매우 기뻤을 것이다. 내가 지키지 않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 무릎을 꿇는다면 하나님 또한 굉장히 기뻐할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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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사랑을 실천할 기회
- 스위스를 매년 회의차 다니면서 스위스의 옆 나라인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를 몇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친구의 안내로 그곳 시립 박물관을 관람했다. 많은 전시품 가운데 인상깊게 감명을 받은 그림은 「기회」라는 큼직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머리에 뒷머리 부분은 없이 앞머리만 길게 늘어져 있고, 발은 말과 같아서 뛰기를 잘하게 생겼으며, 괴상하여 동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한 폭의 추상화이다. 그런데 그 그림이 주는 의미는 크게 감명을 줬다. 설명하는 안내자에 의하면 ‘기회는 앞에서 잡아야지 지나가 버린 후 잡으려고 하면 불가능한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주는 그림이었다. 해설을 듣고 그 그림을 자세히 보니까, 그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앞에서 못 잡으면 뒤통수에는 머리마저 벗겨져 있어서 뒤에선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기회’와 같다는 설명이었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현재라는 기회를 잡지 못하면 후회스런 인생을 살게 되는 교훈을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기회는 순식간에 우리 앞을 지나가고 만다. 사랑의 실천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기회는 오늘이요, 바로 지금이다.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곧 섬김의 삶이다. ‘더 건강하고 더 시간이 나면 하리라’, ‘더 넉넉하면 섬기고 봉사하겠다’고 생각하면 기회는 빨리 스쳐 지나가고, 사랑의 실천은 영영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실천을 통해 보람을 찾고, 좋은 결과로 사랑의 향기가 남을 것이다. 나는 사랑의 향기를 멋지게 남긴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아본다.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 나사로의 집에 가셨을 때, 그의 여동생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은 결과 그 향유냄새가 온 집에 가득하였다는 미담이다. 가룟유다는 ‘그 아까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면’ 하고 위선을 떨었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칭찬하고 이 사랑의 향기가 온 세상에 전해질 것이라고 하셨다.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기쁘시게 한 마리아야말로 사랑을 실천한 모범 사례라고 생각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절)고 했다. 선한 일은 사랑을 지금 바로 실천하는 일이다. /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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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사랑으로 갈등을 치유하자
- 우리는 오는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한다. 1919년 3월 1일 선조들의 항일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1945년 8월 15일 쟁취한 광복을 기리며 1948년 8월 15일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만방에 선포하였다. 일제 식민지배의 고통과 아픔의 흔적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채 곳곳에 상채기와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해방은 되었지만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분단의 아픔과 6.25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서로 간에 지울 수 없는 증오심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배들의 헌신 덕분에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으로 앞서가는 선진국의 반열에 서 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아직도 뿌리 깊은 반일 감정, 남북의 분단과 극심한 좌우 대립, 지역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등 수많은 문제가 분출되어 대한민국이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 하면 이 모든 원한과 갈등과 상처와 아픔들을 치유하고 공존 공영하는 대한민국을 이룰 수 있을까? 우리는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마 22:37~40)고 말씀하셨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해답임을 믿는다. 설령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모든 면에서 우세하다고 해도 상대방은 승복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의 실천만이 최선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야고보서 2장 8절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더 나아가서 야고보서 2장 26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사 랑을 실천하며 살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누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 예수 생명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다. 온 세상은 거짓과 증오로 가득차 있다. 나에게 예수 생명이 가득 차 있어야 미움을 덮을 수 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려면 먼저 내가 하늘나라 주소를 소유해야 하고 물질을 소유해야 물질을 나누어 줄 수 있듯이 하늘 생명을 소유해야 천국을 얻지 못한 굶주린 헐벗은 궁핍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야고보서 2장 12절은 자유의 율법을 가진 자라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고, 요한일서 3장 24절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자들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도 많은가? 사랑을 실천하며 한걸음씩 나아갈 때 모든 원한과 고통과 갈등을 치유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늘 생명을 소유한 우리는 사랑의 실천으로 일본의 식민지배의 고통과 상처도 이겨내고 남북 분단의 골을 넘어 통일 대한민국을 열어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할 그날을 기대하며 살아가자./ 조은교회 원로목사·(사)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전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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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선물로서의 삶
- 성경의 전도서는 우리의 삶을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조차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감싸고 있는 자연과 우리의 가족, 그리고 우리의 직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우리의 분복이다. 특히 가족과 직업은 많은 성취 대상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허무한 것 중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행복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전도서의 저자가 안타까워하는 바는 만물을 괴롭게 하고 허무하게 만드는 인간의 한 조각, 어리석음이다.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그저 하나님의 주신 선물과 분복은 소홀히 하고 머나먼 지평선 너머의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헛된 방랑을 거듭하고 있다. 마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에서 나오는 틸틸과 미틸의 여행처럼 말이다. 그들이 찾아 헤매던 파랑새는 바로 내 집의 새장에 있었다. 경제적 풍요가 행복을 주리라 믿고 거침없이 자연을 훼손하던 인간들이 이제는 환경파괴의 저주로 불행해 하는 모습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단단히 기억하자. 선은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이므로 비록 우리의 선행에 대해 즉각적인 보상이 없더라도 선행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선한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지만 많은 사람은 일시적 욕망과 목전의 이익 때문에 선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그 헛된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악을 행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하니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혹은 교회 혹은 기독교사회단체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들이야말로 이 각박한 세상의 나그네 길을 걷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선물이며 위로이다. 우리의 이웃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처럼, 나도 우리 이웃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로 인해 하나님의 섭리가 찬양을 받을 수도 있고, 나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떠올릴 수도 있다. 남이 나에게 선물이기만을 기대하지 말고, 나도 남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되기를 다 함께 노력해보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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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이 땅에 화해와 용서를
- 올해는 6.25 전쟁이 끝난 지 만 70년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휴전 곧 정전협정을 맺은 지 70년이다. 같은 민족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70년 동안 휴전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분단의 세월을 모두 따지면 78년이나 된다. 여전히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분단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가 날카롭게 배어 있다.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의 기억을 바꾸어 낼 수 있을까? 베트남 출신 미국 소설가 비엣 타인 응우옌은 “모든 전쟁은 두 번 치러진다.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싸워야 하고 두 번째는 기억에서 싸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깊이 공감하는 까닭은 지금 우리 민족구성원 모두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는 과거의 기억과 여전히 다투는 중이다. 나는 10살에 6.25를 경험하였다. 내 고향 강화도는 북한과 가장 가까이 인접한 위험한 섬이었다. 유년으로 소년으로 성장하던 무렵에 겪은 전쟁은 70년이 지나도록 평생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평화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해하지 못할테지만 우리 노년 세대는 여전히 그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다. 6.25의 비극은 남과 북의 전쟁을 넘어서 미국과 소련이란 체제를 대리한 국제전으로 치달았다. 더 큰 비극은 군인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마을로 내려온 전쟁’이란 점이다. 지역과 동네마다 편을 갈랐고, 증오하였다. 그 와중에서 많은 사람이 너무 쉽게 목숨과 소중한 가정을 잃었다. 모두 쉬쉬하는 일이지만, 쌍방 간에 일어난 복수와 재복수 등 복수의 악순환은 지울 수 없는 증오심을 남겼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흘러야 심리적 종전을 선언할 수 있을까? 언제쯤 지나야 남북 갈등을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까? 우리 민족공동체는 너무나 커다란 시대의 우울과 분노를 앓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극단적 갈등이나, 무조건 상대방을 배척하는 진영논리는 모두 분단 문제에 기인하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하나님께서 너무나 오랫동안 분단 병을 앓고 있는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길 빈다. 그럼에도 희망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겪은 고난은 우리 민족에게 더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남과 북의 분단은 앞으로 화해와 평화의 물꼬를 트기만 하면 세계 어느 나라도 부러울 것 없는 민족공동체로 나아갈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을, 이 민족의 불행한 역사를 긍휼히 여기시길 기도드린다. 그리하여 화해하고, 용서하는 마음과 의지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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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실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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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이 땅에 화해와 용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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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기쁨으로 손해보기
- 인간의 역사 이래 어떤 형태로든 갈등의 문제가 존재해왔다. 그 갈등이 순조롭게 해소되기도 하고 때로는 끝내 해결의 길을 찾지 못하고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런 거시적인 갈등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네 삶속의 미시적인 갈등의 원인은 대부분 인간의 욕망에 기인한 것들이다. 나의 유익을 극대화하려는 의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상대방의 반발을 불러오고 급기야는 피할 수 없는 갈등 구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물론 때때로 내가 살고 죽는 문제로 인해 그 갈등을 피해갈 수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양보하면 그 갈등의 고리를 풀 수있는 데 그 양보가 어려워 끝내는 아픔의 상처만 남기게 된다. 이것은 국가도 가정도 교회도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이 갈등의 문제는 회피하거나 감추거나 애써 무시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수면 아래로 침잠할 수는 있어도 언젠가 어떤 경로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갈등은 당장 편하다고 회피하려 하기보다는 문제를 꺼내놓고 해소하고 치유한 다음 미래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세상의 큰 갈등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교회나 가정 안의 갈등의 문제가 정말 나의 생존권에 관한 것인가? 나의 양보가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99.99%는 죽고 사는 문제로 인한 갈등이 아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감정상의 문제이든 최소한 신앙사회 속에서는 살고 죽는 문제 때문에 갈등이 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갈등은 해결의 의지, 치유의 의지를 가지면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렇다면 크고 작은 갈등을 치유하는 방법은 없을까? 신앙안에서는 그 방법이 있다. 먼저 기쁨으로 손해 보리라고 마음먹는 것이다. 신앙사회는 이기고 지는 곳이 아니다. 내 의견이 꼭 관철되지 않으면 어떤가? 내가 조금 손해 보아 은혜롭다면 그 또한 주님께서 칭찬하시지 않을까? 상호간에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반보씩 양보하면 의외로 문제는 풀릴수 있다. 자신의 자존심을 조금만 기쁨으로 손해보라. 자신의 권위를 기쁨으로 조금만 내려놓으라 자신의 체면을 조금만 내려놓고 기쁨으로 손해 보기로 마음먹어보라. 문제는 은혜중에 해결될 수 있다. 왼뺨을 치려하면 오른뺨을 돌려대는 것은 엄청난 손해이다. 그러나 내가 먼저 기쁨으로 그 손해를 감당하려하면 못할 것도 없다. 웃으며 오른뺨을 돌려대는 사람에게 그 뺨마져 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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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기쁨으로 손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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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톨스토이와 소녀
- 톨스토이가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 어느 집 앞을 걸어가는 한 소녀가 갑자기 숨이 넘어갈 듯 우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톨스토이가 그 소녀의 어머니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그 소녀는 톨스토이의 가방을 가지고 싶어서 우는 것이라고 했다. 톨스토이가 가진 그 가방은 친지의 유품이라 그에게 상당히 소중한 것이었지만 일단 소녀를 달래기 위해 그는 소녀에게 말했다. “울지말아라, 오늘은 이 가방을 줄 수 없지만 내일은 이 가방이 내게 필요하지 않으니 내가 꼭 내일주마.” 목을 놓아 울던 소녀는 그 말에 울음을 그치고 톨스토이의 목에 매달려 즐거워했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그 가방을 들고 다음날 소녀의 집에 갔을 때 소녀는 죽은 상태였다. 갑자기 세상을 뜬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미 죽고 없는 소녀의 무덤에 그 가방을 바쳤다. 소녀의 어머니가 이미 죽은 아이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렸지만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따님은 죽었지만 제 약속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중에 많은 약속을 한다. 약속의 사전적 의미는 ‘상대자와 앞으로의 어떤 일에 관하여 서로 합의하여 결정하여 둔 것’이라고 되어있다. 한번 한 약속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시간의 무덤 속에 남아 있다. 잊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을 테지만 약속은 약속으로 남아있고 상대방이 그 약속을 명확하게 믿고 있다면 뜻하지 않게 죄를 범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하나님과 한 약속은 반드시 없어지지 않는다.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 이제부터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약속했다면 꼭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건망증이 없으시다. 어허 저 놈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저렇게 거짓말을 하네 하며 기억하시곤 질타하신다. 톨스토이는 한 철없는 소녀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켰다. 하물며 만물의 근원인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의 기도제목을 이렇게 삼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약속한 것 중에서 실천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제 머리를 맑게 해주셔서 생각하게 도와주십시오. 제가 지키겠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약속은 언뜻 일방적인 나만의 약속처럼 느껴져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성령이 역사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만큼 진실한 무게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항상 내가 무슨 약속을 드렸는지, 그 약속을 실천했는지, 실천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점검하는 자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이다. 톨스토이의 가방을 받아든 소녀의 영혼은 매우 기뻤을 것이다. 내가 지키지 않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 무릎을 꿇는다면 하나님 또한 굉장히 기뻐할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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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톨스토이와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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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사랑을 실천할 기회
- 스위스를 매년 회의차 다니면서 스위스의 옆 나라인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를 몇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친구의 안내로 그곳 시립 박물관을 관람했다. 많은 전시품 가운데 인상깊게 감명을 받은 그림은 「기회」라는 큼직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머리에 뒷머리 부분은 없이 앞머리만 길게 늘어져 있고, 발은 말과 같아서 뛰기를 잘하게 생겼으며, 괴상하여 동물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한 폭의 추상화이다. 그런데 그 그림이 주는 의미는 크게 감명을 줬다. 설명하는 안내자에 의하면 ‘기회는 앞에서 잡아야지 지나가 버린 후 잡으려고 하면 불가능한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주는 그림이었다. 해설을 듣고 그 그림을 자세히 보니까, 그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앞에서 못 잡으면 뒤통수에는 머리마저 벗겨져 있어서 뒤에선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기회’와 같다는 설명이었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현재라는 기회를 잡지 못하면 후회스런 인생을 살게 되는 교훈을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기회는 순식간에 우리 앞을 지나가고 만다. 사랑의 실천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기회는 오늘이요, 바로 지금이다.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곧 섬김의 삶이다. ‘더 건강하고 더 시간이 나면 하리라’, ‘더 넉넉하면 섬기고 봉사하겠다’고 생각하면 기회는 빨리 스쳐 지나가고, 사랑의 실천은 영영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실천을 통해 보람을 찾고, 좋은 결과로 사랑의 향기가 남을 것이다. 나는 사랑의 향기를 멋지게 남긴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아본다.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 나사로의 집에 가셨을 때, 그의 여동생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은 결과 그 향유냄새가 온 집에 가득하였다는 미담이다. 가룟유다는 ‘그 아까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면’ 하고 위선을 떨었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칭찬하고 이 사랑의 향기가 온 세상에 전해질 것이라고 하셨다.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기쁘시게 한 마리아야말로 사랑을 실천한 모범 사례라고 생각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절)고 했다. 선한 일은 사랑을 지금 바로 실천하는 일이다. /예장 통합측 증경총회장·경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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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사랑을 실천할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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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사랑으로 갈등을 치유하자
- 우리는 오는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한다. 1919년 3월 1일 선조들의 항일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1945년 8월 15일 쟁취한 광복을 기리며 1948년 8월 15일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만방에 선포하였다. 일제 식민지배의 고통과 아픔의 흔적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채 곳곳에 상채기와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해방은 되었지만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분단의 아픔과 6.25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서로 간에 지울 수 없는 증오심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배들의 헌신 덕분에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으로 앞서가는 선진국의 반열에 서 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아직도 뿌리 깊은 반일 감정, 남북의 분단과 극심한 좌우 대립, 지역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등 수많은 문제가 분출되어 대한민국이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 하면 이 모든 원한과 갈등과 상처와 아픔들을 치유하고 공존 공영하는 대한민국을 이룰 수 있을까? 우리는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마 22:37~40)고 말씀하셨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해답임을 믿는다. 설령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모든 면에서 우세하다고 해도 상대방은 승복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의 실천만이 최선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야고보서 2장 8절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더 나아가서 야고보서 2장 26절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사 랑을 실천하며 살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누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 예수 생명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다. 온 세상은 거짓과 증오로 가득차 있다. 나에게 예수 생명이 가득 차 있어야 미움을 덮을 수 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려면 먼저 내가 하늘나라 주소를 소유해야 하고 물질을 소유해야 물질을 나누어 줄 수 있듯이 하늘 생명을 소유해야 천국을 얻지 못한 굶주린 헐벗은 궁핍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야고보서 2장 12절은 자유의 율법을 가진 자라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고, 요한일서 3장 24절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자들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도 많은가? 사랑을 실천하며 한걸음씩 나아갈 때 모든 원한과 고통과 갈등을 치유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늘 생명을 소유한 우리는 사랑의 실천으로 일본의 식민지배의 고통과 상처도 이겨내고 남북 분단의 골을 넘어 통일 대한민국을 열어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할 그날을 기대하며 살아가자./ 조은교회 원로목사·(사)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전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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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사랑으로 갈등을 치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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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선물로서의 삶
- 성경의 전도서는 우리의 삶을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조차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감싸고 있는 자연과 우리의 가족, 그리고 우리의 직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우리의 분복이다. 특히 가족과 직업은 많은 성취 대상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허무한 것 중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행복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전도서의 저자가 안타까워하는 바는 만물을 괴롭게 하고 허무하게 만드는 인간의 한 조각, 어리석음이다.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그저 하나님의 주신 선물과 분복은 소홀히 하고 머나먼 지평선 너머의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헛된 방랑을 거듭하고 있다. 마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에서 나오는 틸틸과 미틸의 여행처럼 말이다. 그들이 찾아 헤매던 파랑새는 바로 내 집의 새장에 있었다. 경제적 풍요가 행복을 주리라 믿고 거침없이 자연을 훼손하던 인간들이 이제는 환경파괴의 저주로 불행해 하는 모습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단단히 기억하자. 선은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이므로 비록 우리의 선행에 대해 즉각적인 보상이 없더라도 선행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선한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지만 많은 사람은 일시적 욕망과 목전의 이익 때문에 선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그 헛된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악을 행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하니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혹은 교회 혹은 기독교사회단체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들이야말로 이 각박한 세상의 나그네 길을 걷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선물이며 위로이다. 우리의 이웃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처럼, 나도 우리 이웃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로 인해 하나님의 섭리가 찬양을 받을 수도 있고, 나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떠올릴 수도 있다. 남이 나에게 선물이기만을 기대하지 말고, 나도 남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되기를 다 함께 노력해보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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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선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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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이 땅에 화해와 용서를
- 올해는 6.25 전쟁이 끝난 지 만 70년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휴전 곧 정전협정을 맺은 지 70년이다. 같은 민족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70년 동안 휴전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분단의 세월을 모두 따지면 78년이나 된다. 여전히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분단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가 날카롭게 배어 있다.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의 기억을 바꾸어 낼 수 있을까? 베트남 출신 미국 소설가 비엣 타인 응우옌은 “모든 전쟁은 두 번 치러진다.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싸워야 하고 두 번째는 기억에서 싸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깊이 공감하는 까닭은 지금 우리 민족구성원 모두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는 과거의 기억과 여전히 다투는 중이다. 나는 10살에 6.25를 경험하였다. 내 고향 강화도는 북한과 가장 가까이 인접한 위험한 섬이었다. 유년으로 소년으로 성장하던 무렵에 겪은 전쟁은 70년이 지나도록 평생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평화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젊은이들은 이해하지 못할테지만 우리 노년 세대는 여전히 그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다. 6.25의 비극은 남과 북의 전쟁을 넘어서 미국과 소련이란 체제를 대리한 국제전으로 치달았다. 더 큰 비극은 군인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마을로 내려온 전쟁’이란 점이다. 지역과 동네마다 편을 갈랐고, 증오하였다. 그 와중에서 많은 사람이 너무 쉽게 목숨과 소중한 가정을 잃었다. 모두 쉬쉬하는 일이지만, 쌍방 간에 일어난 복수와 재복수 등 복수의 악순환은 지울 수 없는 증오심을 남겼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흘러야 심리적 종전을 선언할 수 있을까? 언제쯤 지나야 남북 갈등을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까? 우리 민족공동체는 너무나 커다란 시대의 우울과 분노를 앓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극단적 갈등이나, 무조건 상대방을 배척하는 진영논리는 모두 분단 문제에 기인하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하나님께서 너무나 오랫동안 분단 병을 앓고 있는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길 빈다. 그럼에도 희망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겪은 고난은 우리 민족에게 더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남과 북의 분단은 앞으로 화해와 평화의 물꼬를 트기만 하면 세계 어느 나라도 부러울 것 없는 민족공동체로 나아갈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을, 이 민족의 불행한 역사를 긍휼히 여기시길 기도드린다. 그리하여 화해하고, 용서하는 마음과 의지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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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이 땅에 화해와 용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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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사랑의 실천’위한 삶의 길
- 성자 예수님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의 실천’ 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사랑의 실천'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성자 예수님께서는 이웃 뿐 아니라 원수들에게 까지 '사랑의 실천'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3-45). 성자 예수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을 삶과 몸에 지니고 나타내면서 산 사람들 중에 세 사람을 지적하면 성 프랜시스와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는 예수님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라고 고백하면서 가난을 철저하게 몸에 지니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고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도 가난을 철저하게 몸에 지니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이고 게으르고 나태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사랑과 섬김’의 부스러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아프리카로 방글라데시로 파키스탄으로 중국의 연변 지역으로 때로는 일본으로 북한으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달려 다니면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려고 애를 쓰곤 했습니다. ‘사랑의 실천’만큼 귀중하고 아름답고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들도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어려움에 처해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몸과 삶에 지니고 살다가 죽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강변교회 원로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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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사랑의 실천’위한 삶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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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기쁨으로 손해보기
- 인간의 역사 이래 어떤 형태로든 갈등의 문제가 존재해왔다. 그 갈등이 순조롭게 해소되기도 하고 때로는 끝내 해결의 길을 찾지 못하고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런 거시적인 갈등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네 삶속의 미시적인 갈등의 원인은 대부분 인간의 욕망에 기인한 것들이다. 나의 유익을 극대화하려는 의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상대방의 반발을 불러오고 급기야는 피할 수 없는 갈등 구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물론 때때로 내가 살고 죽는 문제로 인해 그 갈등을 피해갈 수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양보하면 그 갈등의 고리를 풀 수있는 데 그 양보가 어려워 끝내는 아픔의 상처만 남기게 된다. 이것은 국가도 가정도 교회도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이 갈등의 문제는 회피하거나 감추거나 애써 무시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수면 아래로 침잠할 수는 있어도 언젠가 어떤 경로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갈등은 당장 편하다고 회피하려 하기보다는 문제를 꺼내놓고 해소하고 치유한 다음 미래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세상의 큰 갈등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교회나 가정 안의 갈등의 문제가 정말 나의 생존권에 관한 것인가? 나의 양보가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99.99%는 죽고 사는 문제로 인한 갈등이 아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감정상의 문제이든 최소한 신앙사회 속에서는 살고 죽는 문제 때문에 갈등이 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갈등은 해결의 의지, 치유의 의지를 가지면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렇다면 크고 작은 갈등을 치유하는 방법은 없을까? 신앙안에서는 그 방법이 있다. 먼저 기쁨으로 손해 보리라고 마음먹는 것이다. 신앙사회는 이기고 지는 곳이 아니다. 내 의견이 꼭 관철되지 않으면 어떤가? 내가 조금 손해 보아 은혜롭다면 그 또한 주님께서 칭찬하시지 않을까? 상호간에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반보씩 양보하면 의외로 문제는 풀릴수 있다. 자신의 자존심을 조금만 기쁨으로 손해보라. 자신의 권위를 기쁨으로 조금만 내려놓으라 자신의 체면을 조금만 내려놓고 기쁨으로 손해 보기로 마음먹어보라. 문제는 은혜중에 해결될 수 있다. 왼뺨을 치려하면 오른뺨을 돌려대는 것은 엄청난 손해이다. 그러나 내가 먼저 기쁨으로 그 손해를 감당하려하면 못할 것도 없다. 웃으며 오른뺨을 돌려대는 사람에게 그 뺨마져 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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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기쁨으로 손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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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톨스토이와 소녀
- 톨스토이가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 어느 집 앞을 걸어가는 한 소녀가 갑자기 숨이 넘어갈 듯 우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톨스토이가 그 소녀의 어머니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그 소녀는 톨스토이의 가방을 가지고 싶어서 우는 것이라고 했다. 톨스토이가 가진 그 가방은 친지의 유품이라 그에게 상당히 소중한 것이었지만 일단 소녀를 달래기 위해 그는 소녀에게 말했다. “울지말아라, 오늘은 이 가방을 줄 수 없지만 내일은 이 가방이 내게 필요하지 않으니 내가 꼭 내일주마.” 목을 놓아 울던 소녀는 그 말에 울음을 그치고 톨스토이의 목에 매달려 즐거워했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그 가방을 들고 다음날 소녀의 집에 갔을 때 소녀는 죽은 상태였다. 갑자기 세상을 뜬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미 죽고 없는 소녀의 무덤에 그 가방을 바쳤다. 소녀의 어머니가 이미 죽은 아이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렸지만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따님은 죽었지만 제 약속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중에 많은 약속을 한다. 약속의 사전적 의미는 ‘상대자와 앞으로의 어떤 일에 관하여 서로 합의하여 결정하여 둔 것’이라고 되어있다. 한번 한 약속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시간의 무덤 속에 남아 있다. 잊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을 테지만 약속은 약속으로 남아있고 상대방이 그 약속을 명확하게 믿고 있다면 뜻하지 않게 죄를 범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하나님과 한 약속은 반드시 없어지지 않는다.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 이제부터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약속했다면 꼭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건망증이 없으시다. 어허 저 놈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저렇게 거짓말을 하네 하며 기억하시곤 질타하신다. 톨스토이는 한 철없는 소녀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켰다. 하물며 만물의 근원인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의 기도제목을 이렇게 삼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약속한 것 중에서 실천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제 머리를 맑게 해주셔서 생각하게 도와주십시오. 제가 지키겠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약속은 언뜻 일방적인 나만의 약속처럼 느껴져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성령이 역사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만큼 진실한 무게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항상 내가 무슨 약속을 드렸는지, 그 약속을 실천했는지, 실천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점검하는 자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이다. 톨스토이의 가방을 받아든 소녀의 영혼은 매우 기뻤을 것이다. 내가 지키지 않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늘 무릎을 꿇는다면 하나님 또한 굉장히 기뻐할 것이다./예장 합동한신측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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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톨스토이와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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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주님의 사랑으로
-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에는 사랑을 의미하는 네 개의 단어가 있다. 그중에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때 쓰는 단어는 네 가지이다. 먼저, 남녀지간의 사랑을 에로스라 한다. 그리고 혈통적 사랑을 스톨게라 하며, 이는 가족간의 사랑을 가리킨다. 또, 친구지간의 우정과 사랑을 필리아라고 한다. 그리고 죄인이나 원수까지도 구원하고 복을 받게 하기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을 아가페라고 한다. 이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그리스도를 닮은 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부부지간의 사랑도 그리스도처럼 해야 한다. 이삭은 임신이 안 되는 리브가를 위해 간구하니 하나님께서 그가 구한대로 되게 하셨다.(창25:21) 요나단은 친구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다.(삼상20:17) 다윗이 왕위에 오른 것은 주님의 은혜와 함께 친구의 도움이 컸다. 가나안 여인은 개 취급을 받은 수치도 흉악한 귀신들인 딸의 구원을 위해서는 감수해야했다.(마15:21~28) 모두 다 주님의 사랑을 닮은 자들이다. 이제는 우리들 차례다.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어도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전13:1~3)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전11:1). 우리도 바울같이 해보자. 남을 구원하고 돕기 위해 지기를 희생해보라. 주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시리라. 예수님 믿어 구원받고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들이여,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자. 영광의 영 하나님이 함께하시리니(눅6:38).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행복이라.(신33:29) 그리고 내가 먼저 주지 않고 받을 것만 생각하여 불만을 품고 원만했던 일들을 회개하자. 주와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처럼 해보자. 가정과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직접 세워주신 공동체이다. 주님께서 실천으로 본을 보여주신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하게 하려하심이다.(요13:12~15) /예장 백석측 증경총회장·해오름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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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실천] 주님의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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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또 하나의 선진국 지표
- 선진국 여부를 판단하는 여러 가지 지표가 있다. 그중의 중요한 것 하나가 경제규모이다. 경제규모 측면에서만 보면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국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세계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이미 G7 국가중의 하나인 이탈리아를 추월하여 GNI (Gross National Income) 6위를 달성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경제규모만으로 선진국가임을 자부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상대적 빈곤율, 지니계수, 복지예산비중 등등 사회보장 제도가 얼마나 발전해 있는가가 또한 중요한 선진국을 가름짓는 지표가 된다. 그리고 나아가서 법과 제도, 그리고 통계로 표출되는 사회보장 제도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국민적 배려의식이다. 국민들의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식이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선진국 지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의식을 신앙적 용어로 치환하면 곧 사랑과 섬김이라는 말이 된다. 소외계층에 대한 사랑의 실천여부와 배려의식의 크기가 경제규모에 못지 않는 또 하나의 선진국을 평가하는 바로메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이 가져야할 선진의식, 곧 약자에 대한 사랑과 섬김의 정신은 어떠해야할까? 그 해답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가 가져야할 사랑과 섬김의 정신을 여실이 보여주셨다. 종이 주인의 발을 씻기고,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겨야 정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사회통념을 정반대로 뒤집으심으로써 진정한 섬김과 사랑의 무엇인지 보여주시고 계신다. 진정한 섬김과 사랑! 그것은 강자가 약자를 섬길 때 가능하다. 나아가서 또한 주님께서 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이제는 너희가 내발을 씻기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이제는 너희가 또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라는 것이다. 언젠가 칭찬릴레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릴레이 마인드이다. 진정한 선진국은 경제규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 곳곳에 온 국민들의 마음속에 이러런 약자를 향한 사랑의 실천과 섬김의 릴레이 정신이 굽이칠 때, 그때 우리는 당당하게 G7을 넘어서는 진정한 선진국이 될 것이다/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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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또 하나의 선진국 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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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사랑의 식량을 보내자
- 손양원목사는 여순 반란 사건 때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위해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한 아들은 때려 죽이고, 다른 아들은 총으로 쐈던 안재선에게 사형언도가 내리자, 손목사는 판사에게 눈물로 용서해 주라고 부탁했다. 나아가 손목사는 안재선을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함께 아침식사를 하는데, 밥이 입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나 참으면서 함께 살았다. 원수에 대한 용서와 사랑을 삶으로 나타냈다. 손목사의 위대한 삶은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으로 출판됐고, 영화도 만들어졌다. 손목사는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기도 했고, 결국 한국전쟁 중에 순교하셨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신 것이다. 우리는 북조선 사람들을 원수로 여기면서 살아왔으나, 이제는 우리의 사랑하는 동포로서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 최근 소식에 의하면, 북조선에서는 기아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60만명에서 100만명에 이른다고 하며, 개성에서도 매일 수십명이 기아로 사망하고 있다고 한다. 대북제재, 한재, 홍수, 코로나로 국경무역 완전봉쇄 등 악재가 겹치고 있다. 김정은위원장은 2023년 2월 전체회의를 소집해 ‘농업’ 하나만을 주제로 토론했고, 김여정을 개성에 보내어 실태를 조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뾰족한 수를 찾아내지 못한 듯하다. 남한에서는 버리는 음식이 30조원에 이르고, 쌀이 너무 많이 생산되어 골칫덩어리가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북에 즉시 긴급식량지원을 해야 한다. 쌀, 식량 150만톤을 보내서 기근에서 구하고, 희토류 등을 교환해 와서 북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전달해야 한다. 파주 남북세관(CIQ)에 가져다가, 북측 주차장에 쌓아 놓고 오면 된다. 주겠다고 말하지도 말고, 신문, TV, SNS에 공개하면 안된다. 필자가 신앙 간증하는 것은 북조선 사람들을 위해서 식량문제를 돕는 일을 2007년부터 고 백승인장로와 더불어 계속하고 있다. 밤, 잣, 사과, 토마토 농장 등을 조성해 많은 식량지원을 직·간접적으로 해 왔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가 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다”, “나와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라”고 하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다. 지금 가장 어려운 일들을 당하고 있는 북한동포에게 먹을 것을 주게 되면, 우리는 천국 잔치에 초대될 것이다. /연세대 명예교수,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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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사랑의 식량을 보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