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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의 기독교역사 연구 매진-서울신대 명예교수 박명수목사
    한국교회의 기독교역사 연구 매진 서울신대 명예교수 박명수목사           서울신대 명예교수인 박명수목사는 현재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해방이후 한국사회와 기독교 역할」이란 6년 프로젝트를 은퇴한 후에도 이어 오고 있다.    이 연구는 오는 8월에 마무리 된다. 또한 그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와 한미관계 정립을 위해서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논문을 발표하고 또한 목사님들을 위한 ‘자유역사포럼’이란 단체를 만들어서 목사들에게 한국근현대사를 바로 이해시키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박목사는 “한국교회는 연합이 되지 않아서 대사회적으로 발언이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점에서 빨리 한국교회가 연합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또 “대다수의 교회는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며, “그런 교회들이 모여서 다른 생각을 수용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또 “특별히 연합은 교회 내적인 문제 때문에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의 관계나 사회와의 관계를 위해서 연합을 해야 된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큰 틀에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한반도가 주로 대륙과의 관계에서 유지됐다. 그러나 개항이후에 다시 해양세력과의 관계에서 발전해왔다. 그 맥락에서 한국기독교가 이만큼 성장했다. 왜냐하면 서양문화를 전달하는 전달체로서 한국기독교가 한국사회에 자리매김을 했다”며, “근대 이후에 대륙은 망했고 해양세력은 강했다. 그런데 중국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서 한국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가 대한민국의 가장 큰 과제이다”고 말했다. 또한 “거기에서 우리 기독교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될 것인가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목사는 “한국교회가 60~70년대 크게 발전했다. 한국이 해양세력과 연결되어 있을 때이다. 38선 때문에 대륙세력은 단절되어 있고, 해양으로만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국기독교가 발전했다”며, “다시 중국을 중심으로 대륙세력이 한반도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할 때, 그 대륙세력이 민주화된 근대화된 사회라면 관계없다. 그런데 △봉건적 △중화질서적 △공산주의적인 사상이 온다고 하면 한국교회에 가장 큰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이런 국제정세를 보면서 선교전략을 세울 수 있는 지도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며, “우리 개신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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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22-07-04
  • 코로나19 이후를 묻는다
       요즘 목회자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예배의 정상화를 묻곤 한다. 회복 여부를 따지기에는 아직 이른 느낌이 들어 조심스럽다. 물론 모든 교회는 빠르면 부활주일부터 시작해 일제히 예배시간을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려 복귀하였다.물론 예배형식은 여전히 팬데믹 시절의 방식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방역당국은 5월부터 예배인원을 제한하지 않으며, 음식도 허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교회가 코로나19 상황변화에 따라 뉴노멀을 적용하는 것은 때 이른 듯하다. 예를 들어 아직 애찬을 나누는 교회를 찾아보기 힘든데, 지극히 조심스런 까닭은 안전에 대한 신중함이 아니었다. 지난 2년 이상 긴 휴지기가 교회의 주방봉사자들을 음식준비에 소극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고 푸념한다.    사실 누구나 코로나 탓으로 돌리지만, 교회 안팎에서 자발적 봉사는 점점 쉽지 않은 일이다. 감염병 상황이 아니더라도 교회는 일찌감치 대안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였다.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은 교회가 부인하고 싶은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실토하게 했을 뿐이다. 대형교회든 중소교회든 상가교회든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임기응변 능력의 차이일 뿐이다.   돌아보면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대부분 종교는 사회적 재난 앞에서 참으로 무기력하였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당국의 일방적 통제에 순종 또는 미세하게 반발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특히 재난 중에도 기존 예배형식에 집착했던 일부 교회의 행태는 사회적 비난을 불러왔다. 이 역시 초조함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교회는 ‘위드 코로나’를 말하지만, 방역당국은 ‘단계적 일상회복’을 주장한다. 이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안전한 일상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취지일 것이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 이후를 맞아 어떤 ‘뉴 노멀’을 만들어 갈 것인가?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아가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다.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여 버릴 것과 지킬 것을 분별하여 변화와 개혁의 모멘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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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실천
    2022-07-04
  • 행복신앙세미나(7)
                   (행복신앙연구소장 제임스강 목사, bog.or.kr) 분열과 불행의 경계거리, 사탄   2018년 4월 1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평화 협력기원 공연에서 마지막에 함께 부른 노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었습니다. 이어서 열린 합동 공연의 주제는 ‘우리는 하나’ 이었습니다. 통일은 말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으로 분단 후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까지 겪은 남북한의 평화는 하나가 될 때 정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통일로 말미암아 하나됨으로 평화가 정착되는 것은 인류 역사를 거쳐 오는 동안 변함없는 진리로, 하나가 될 때 모든 전쟁과 불행이 사라집니다. 반면에 하나에서 나뉘는 분열에서 모든 불행이 시작되는데, 이러한 분열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계 12:7,8)   성경은 하늘에서 일어난 최초의 전쟁에 대해 위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자기를 하나님과 같이 높이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천사장 루시퍼가 자신을 따르는 타락한 천사들과 함께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여 온 우주에서 최초로 분열을 일으킴으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엡 4:6)라는 말씀처럼, 만유인 모든 것을 통일하심으로 인류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시고자 하시는데, 사탄은 또한 이를 대적하여 인류를 하나님과 분리시킴으로 불행 속으로 빠트리고자 합니다.   이에 인류의 행복을 위하시는 하나님은, 천사장 루시퍼가 타락하여 악의 근원이 되자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인하여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경계거리가 되고”(개역성경 겔 28:19)라는 말씀처럼, 인류에게 사탄이 반드시 경계해야 될 존재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계 12:9)는 구절처럼, 사탄은 인간을 꾀어 불행 속으로 이끌어가려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첫 사람 아담의 아내인 하와는 자신을 불행케 하려는 사단을 경계하지 않은 채 그의 꾀임에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1~4)   이처럼 사탄은 ‘하나님이 너희를 정말 위하시는 줄 아느냐?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아. 그건 거짓말이야!’라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하와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고, 결국 인류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불행 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특히,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자마자 눈이 밝아졌는데, 그 눈으로 인해“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창 3:8)숨으며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과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섯째날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구절처럼, 아담과 하와를 보시면서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눈을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온 세상에 임한 심판의 대홍수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사람은 노아였습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12:1)는 구절은, 영어 성경에서는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the LORD.”로, “노아는 하나님의 눈 안에 있는 은혜를 발견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눈은 은혜를 품은 눈인데, 노아가 그 눈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인간을 보십니다. 은혜란 값없이 복을 주시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대하신다는 것은 조건 없이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의 눈 앞에서는 누구나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고 누구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탕자였던 둘째 아들이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아버지가 가진 이 은혜의 눈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악과를 따먹고 밝혀진 아담과 하와의 눈이나 아버지에 대해 불평했던 맏아들의 눈처럼,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다른 눈을 밝혀서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하게 만들어 결국 불행 속으로 빠뜨리고자 하는 경계거리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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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04
  • 기독교와 샤머니즘, 그 대립과 갈등(1) -김동리의 장편소설
        필자는 김동리작가가 그의 전작(前作) 단편소설 <무녀도>(1947)를 확대 개작해서 내어놓은 <을화>(1978)란 장편소설에 대하여 고찰해 보려고 하면서, 먼저 이 작품의 줄거리(스토리)를 독자 제위께 소개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장편소설 <을화>란 작품에 대한 평설에 있어서 독자들의 이해를 크게 도울 수 있겠기 때문이다.   여주인공 옥선이(을화)는 역졸 집안의 후손인 아버지와 함께 역촌마을에서 살았는데, 아버지는 생업(농사)보다는 노름판을 더 밝히는 자로 옥선이 세 살 때 노름방에서 칼을 맞고 죽는다. 그 뒤 홀어미 밑에서 자란 옥선이는 열여섯 살 때 이웃집 총각 이성출과 눈이 맞아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배게 된다.    살던 마을에서 쫓겨난 옥선이는 뒤에 사생아(영술이)를 낳는다. 옥선이는 영술이를 홀어미에게 맡기고 열아홉 살 때 50대의 중늙은이에게 후실로 들어갔으나, 3년 후 남편인 그 중늙은이가 병으로 죽고 만다. 그리고 석 달 뒤엔 홀어미마저 복국을 잘못 먹고 갑자기 죽어버렸다.   홀로 남게 된 옥선이는 어린 영술이를 데리고 살아가게 되지만, 영술이가 마마에 걸리자 며칠 간호하다가 효험이 없으므로 결국 을홧골 서낭당엘 찾아가 빌게 된다. 거기서 빡지무당을 만나게 되고 굿을 해 영술이는 낫게 되지만 오히려 옥선이 자신이 심하게 앓게 된다.   이러는 가운데 옥선이에게 신이 내렸기 때문에 내림굿을 한 뒤 스물한 살의 그녀는 무당으로 태어나게 된다. 빡지무당이 옥선이에게 ‘을화’라는 무녀 이름을 달아 주었는데, 이는 옥선이가 을홧골(서낭당)에서 영험을 받았다는 뜻에서였다.   을화(옥선이)는 점차 영험을 내는 무녀로 이름이 나게 되면서 빡지무당의 작은 박수 성도령(방돌)과 관계해 딸 월희를 낳게 된다. 얼마 동안 오라비 영술이와 동생 월희는 한 지붕 아래서 같이 살아가지만, 얼마 뒤 둘은 서로 헤어지게 된다. 영술이는 더 많이 배우기 위해 어머니(을화) 곁을 떠나 기림사란 절로 보내어진다. (절에서만은 반상의 차이가 없을 것이므로 제대로 배울 수 있으리라고 을화와 방돌이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을화의 굿은 점점 영험을 내고, 그녀와 남편(방돌) 사이도 좋았었지만, 성 밖 동네의 태주할미집으로 이사 가고 난 뒤부터 을화의 행실로 인해 두 사람 사이는 벌어지게 된다. 을화는 술집을 자주 찾았는데, 거기서 설화랑과 소장수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염문을 뿌리고 다녔고, 그 일로 인해 설화랑과 소장수 상호간에도 대판 싸움이 벌어지곤 하였다.    말려도 그녀가 버릇을 못 고치자 남편 성방돌이 집을 나가버렸으나, 을화는 여전히 그를 남편이라고 내세우면서 월희와 함께 살아간다. 그동안 기림사로 보내어졌던 영술이는 절에 실망하고서 평양으로 가더니 거기서 기독교에 입교해 예수교 신자가 되었다. (어미 을화의 처지에서 보자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아들 영술이 평양에서 귀향을 하던 그 전야에 어미 을화가 꿈을 꾸었는데, 곧 ‘큰 뿔 달린 몽달귀’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실제로 그 몽달귀에 해당하는 예수교도(아들 영술이)가 그 마을로 찾아들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 기림사란 절로 보내졌던 아들 영술이 장성한 청년으로, 그것도 기독청년으로 변모해 어머니 을화 앞에 나타난 것이니, 이제 무교와 기독교 간의 긴장과 갈등이 예감되는 일이 닥쳐오고야 말았다. 이때 을화는 무당으로서의 영험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또 영술은 영술이대로 기독교도로서의 사명감이 절정에 달해 있었으니 양자 간의 충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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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01
  • 기독교와 샤머니즘, 그 대립과 갈등(2) -김동리 장편소설
                평양에서 기독교도가 되어 귀향한 영술이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한 기독교 전도의 길이 뜻대로 열리지 않자 그는 기도처로 마을교회를 찾게 되고, 거기서 그 교회 설립자인 박건식 장로를 만나게 된다. 박 장로는 무당인 태주할미가 저지른 충격적인 일, 곧 명도 점(占)에 영검을 얻기 위하여 어린애를 유괴 살해해 암매장한 범죄사실을 전해 듣고서 미신타파의 방편으로 기독교에 입교한 그 지역 유지였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술이 그를 자신의 정신적 사부(師父)로 삼게 된 것이다. 오구굿판에서 정 부잣집 아들의 눈에 띄게 된 월희는 그의 후실 자리 말이 나오게 되고, 또 교회에서는 영술이가 그의 생부인 이성출을 찾아내게 된다. 그러나 월희의 후실 자리에 대해서는 오라비 영술이가 극구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또 아들이 생부의 집에 가거나 머무는 일에 대해선 어미 을화가 극력 반대의사를 표명함으로써 모자(母子)간은 갈수록 심한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어머니와의 대립 끝에 영술이 나흘간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는 동안, 을화는 아들의 귀가를 고대하며 식음을 전폐한 채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적 처사를 반성하며 영술이 귀가한 다음날 새벽, 을화는 아들의 성경책을 몰래 빼내어 부엌에서 불에 태우며 굿을 벌이고 있었고, 이 현장을 목격한 영술이 성경책에 붙은 불을 끄려고 소반 위의 물그릇을 집어든 순간 을화의 식칼이 영술이의 왼쪽 가슴을 찔러버린 것이다. 칼에 맞은 영술은 이튿날 끝내 숨을 거두고, 동생 월희는 생부 성방돌을 따라 집을 떠나게 된다. 그날 밤에도 무녀 을화의 집 처마 끝에 달린 종이등[紙燈]에는 전날과 같은 희뿌연 불이 켜져 있었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乙火’]의 개략적인 줄거리이다.)   작가 김동리가 그의 새 작품 <을화>에 대하여 설명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의 신은 철두철미하게 인격화된 초자연적인 신이며, 근대 인간주의는 신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안티테제로서 반신적(反神的) 성격을 띤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새로운 성격의 신은 좀 더 자연적인 신이라야 하며, 새로운 형의 인간은 좀 더 신을 내포한 인간, 즉 여신적(與神的) 인간형이라야 한다고 보고, 이에 대한 해답으로서 샤머니즘의 신이 철저한 자연적인 신이며 샤머니즘의 인간은 소위 ‘신들린 인간’이라고 할 만큼 여신적인 인간형이므로 바로 이러한 샤머니즘의 세계를 문학 창작에다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로 보아 <을화>가 기독교보다는 샤머니즘에 더 우위를 두고 제작한 작품이란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샤머니즘의 구원의 긍정가치를 드러내고자 시도한 이 작품이 그 의도대로 되려면 부득불 상충요인으로서의 외래 종교인 기독교와의 긴장과 갈등을 통해서 그것을 드러낼 수밖에는 없었겠는데, 과연 작가의 의도대로 작품의 결과가 수행되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봄직하다. 미리 말하기로 하면, 이 작품은 흥미 있는 무당들의 생활풍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데는 확실히 성공하고 있는 편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무당의 삶에 접한 독자들이 그 무당 정신에 심취한다거나 샤머니즘의 가치를 재인식한다거나 하는 지경에까지 끌어올리는 데에는 결코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다주었다곤 할 수 없겠다는 것이다. 전작 <무녀도>와는 달리 <을화>에서는 기독교도 영술이 죽음에 이르게 된 반면, 무녀 을화가 생존하게 됨으로써 그 인물설정 자체에서 이미 샤머니즘의 승리를 예정(의도)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작가의 그 의도가 작품상으로 실현되었다곤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그 ‘의도의 오류’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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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01
  •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13장 13절에서 믿음·소망·사랑 이 셋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첫 걸음은 믿음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정체성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에 속한 자, 그리스도의 것 됨을 가리킨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 말씀중 약속의 말씀들이 많다. 이 그리스도의 언약의 말씀을 믿는 것이 성도들에게는 절대적인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믿음으로 ‘프로스 데오’ 인 하나님과 화평함의 은혜안에서 그 다음에는 하늘의 영광의 소망으로 즐거워한다고 로마서 5장 2절에서 말씀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묻는 자들에게 주저 없이 답변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하셨다. 무슨 소망이 우리 안에 있나요? “‘내가 속히 오리라’ 그때 혼인잔치가 있으리라, 그 잔치에 청함받은 자가 복되도다”라고 하셨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간절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자가 됨이다. 즉 재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자. 재림 주님의 신부의 자리에 서서 사는 삶이 우리의 소망이다.    이런 소망이 내 안에 불일 듯하면 무엇이 따라 올까요? 환란이 온다고 했지요. 이 환란은 우리의 소망으로 인내하며 이기게 할 것이요, 그 인내는 연단을 이루어서 결국에는 우리의 소망을 다 이루어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부끄럽지 않은 소망이요, 이 소망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중요하다. 믿음, 소망이 반드시 있어야 하되 더욱 위대한 것은 사랑이다라고 본문 13절에 말씀하신다. 이 사랑이 본문 8절에 시들지 않는 것, 영원한 것이라고 했다. 그럼 이 사랑은 무엇인가? 이는 단지 개념이 아니고 존재적 의미를 나타낸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이요(요일4:8-9).   특히 재림 예수님이 사랑인 것이다. 9~12절에서 사랑은 완전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하나 온전한 것이 오면, 즉 주님이 재림하시면 부분적인 것이나 예언이 다 그치리라. 지금은 거울을 보듯 희미하나 사랑, 즉 주님이 재림하시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것 같이 완전하게 되리라.    그러니 믿음·소망·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쁄라의 기쁨, 즉 결혼한 자의 기쁨이다. 이는 약혼보다 더욱 기쁨이 승한 것이다. 즉 어린양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곧 사랑이다. (더 자세한 것은 유투브 ‘cll주사랑교회’로)/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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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01
  • 진정한 평화위한 통일운동에 앞장 ‘명예훼손’ 승소한 김성윤목사
      한국기독교 평화연구소 소장인 김성윤목사는 최근 자신에게 간첩이란 표현을 쓴 모 유튜버와의 명예훼손 재판 1심에서 승소했다. 이로써 김목사는 평화운동에 더 박차를 가한다고 밝혔다. 김목사는 “판사님의 판결에 감사하다. 그리고 저를 간첩으로 계속 몰던 유튜버의 거짓이 드러난 판결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했다..   또한 진정한 평화는 통일에서 온다고 밝히며 “평화운동은 남북중 한 곳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면서. “나는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통일이 된다면 우리나라는 크게 성장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화해와 교류와 협력과 인식을 높이는 활동을 내가 속한 교단에서 할 계획이다. 그리고 이것을 넓혀서 한국 기독교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힘쓰도록 이끌고 싶다”면서, “이를 위해서 평화통일 운동을 하는 선교단체를 설립하고자 한다”고 했다. 김목사가 선교단체를 설립하고자 하는 목적에는 많은 사람을 평화운동에 동참케 하고자 함에 있다. “한국교회만큼 북한선교와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곳은 없다”면서, “하지만 그 방향이 조금 바뀔 필요가 있다 그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한편 “기독교를 새롭게 하는 것과 민족의 통일은 무관하지 않다”면서, “한국교회가 이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 길에 평화운동이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까지 우리 믿음의 길,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민족을 위한 통일의 기도를 계속하자고 호소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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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22-07-01
  • 목자의 뜰
        변영혜작가의 「목자의 뜰」은 어린 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인화 시킨 작품이다. 선하고 사랑스런 양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구약 시대 제사 법은 인간의 속죄를 위해 양의 피를 드리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는데 이는 피 속에 생명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레위기 17:11). 이러한 피 제사를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담당했는데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는 1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피를 뿌림으로 속죄를 받게 하셨다. 이토록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매번 제사장이 필요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인간의 속죄를 위한 양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고 다시는 양의 피를 드리는 제사를 하지 않도록 만드셨다(히브리서 9:22-28 )./정재규(미술평론가·대석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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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2-07-01
  • 아름다운 동행
      박선순작가의 「아름다운 동행」은 부정형의 도자기 표면에 사랑하는 노인 한 쌍을 삽입함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동행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 세상에는 수십억의 인구가 살고 있다. 그 중에서 부부의 관계는 참으로 희귀한 만남으로 맺어진 인연인 것이다. 이 만남의 귀중함을 인식하고 서로 사랑함으로 그 인연을 기쁨으로 승화 시키도록 해야 하는데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상대방을 욕되게 하고 결국은 괴로운 동행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그래서 성경은 항상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명령하고 있다.못난 사람들의 특징은 사랑받기 만을 바라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에는 사랑하며 살아온 믿음의 노부부가 잘 표현되어 있다./정재규(미술평론가·대석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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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01
  • 마음의 생각과 정신건강(1)
      모든 일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긍정적인 일이 되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부정적인 일이 된다. 오늘날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정신질환이나 질병, 행동장애 등 75~98%가 생각과 사고에 있으며, 20~25% 정도만이 환경이나 유전에 의해 결정된다. 이처럼 부정적인 생각은 많은 질병의 원인으로 작용하며, 왜곡된 사고 및 비합리적 사고는 우울, 불안, 중독, 분노 등의 정신장애를 일으키는 것이다.   뇌의 기어변속기처럼 작동하는 곳이 전대상회이다. 전대상회는 한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이동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곳이 과잉 활성화되면 부정적인 생각으로 자동화된다. 뇌의 전대상회의 과잉활성에 따른 장애로는 강박장애, 중독, 섭식장애, 월경 전 증후군, 만성통증, 반항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등이 있다.   또한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이 부족하면 뇌의 심층변연계가 과잉 활동적이 되어 부정적 사고와 부정적 감정이 고조된다. 이에 따라 우울증, 조울증, 월경 전 증후군, 산후우울증이 발병케 된다. 이처럼 부정적 사고를 하게 되면 전대상회나 심층변연계에 영향을 끼쳐 여러 가지 정신장애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생각은 대뇌피질의 기능이다. 대뇌피질은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결정짓는 주역이기도 하다. 어떤 것을 생각하고 선택하여,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7~10초 사이에 뇌가 활동하기 시작한다. 생각은 DNA 구조를 변화시킨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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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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