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6-0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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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6월, 보훈과 항쟁의 달에 생각한다
    온 세상이 시끄럽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고 있고, 반도체를 비롯한 경제문제와 대만 문제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윤석렬정부는 취임 1년을 지났지만, 아직까지 국제정세와 국내의 산적한 문제를 잘 관리하거나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소위 한미일체제에 편입되어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고, 그 결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도 예사롭지 않다. 남북대화는커녕, 상호불신과 비방은 도를 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러다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국내적으로는 야당대표와의 대화 거부가 상징하듯 대화와 협력, 협치의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갈등과 분열을 고조시키고 있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비판적 언론과 시민사회를 제갈 물리고, 우리 사회 경제체제의 한 축인 노동조합을 악마화 하고 있다. 검찰권력을 동원한 통치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피흘리며 쓰러지는 노조간부를 볼때 노동조합을 이렇게까지 몰아 붙인다면 과연 국민통합이 가능할까?하는 우려가 마음을 가득채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면서 6월 민주화운동이 벌어진 항쟁의 달이다 6.25전쟁의 상처와 기억이 복수와 대결로 이어질 것인가, 아니면 전쟁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화해와 평화의 새역사를 펼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6월 항쟁의 기억 역시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가, 민주화와 생존권을 요구하는 대중에게 다시금 폭력과 강압으로 대응할 것인가도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우리 시대는 갈등과 대결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화해와 평화, 민주와 번영의 역사를 이룰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민주화와 시대발전을 통해 이루어 졌던 국민통합과 미래 발전의 자부심은 사라져 버리고 극단적인 진영대립 만이 지배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이런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동시에 품고 있다. 6월을 맞으며 대결과 갈등을 지속하고자하는 신앙과 세력도 있고,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열자는 신앙과 세력도 있다. 그 양적 대비는 크게 의미가 없다. 교회의 신앙과 선교가 올바른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성장과 부흥, 민주와 통일 등 역사적 기여의 균형을 이루어 왔다. 성장과 부흥의 힘을 가난한 사람과의 연대, 사회 봉사와 섬김으로 연결시켰다. 또한 성장과 부흥의 힘을 민족의 화해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해 한국사회을 선도해가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변화하는 시대를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 미흡한 모습을 보여왔다. 코로나 이후에는 회복에 주력하지만, 그 안에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세력도 고개를 들고 있다. 또한 변화하는 미래정세를 보고 예언자적으로 시대를 이끌어가는 모습 또한 부족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올바른 시대의 방향을 밝히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높여야한다. 한미일 체제에 묶여 식민지 피해자를 외면하고, 노동자를 탄압하고 시대를 거꾸로 돌리려는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통해, 진정한 갈등을 극복한 통합의 빛과 소금 역할을 통해 진정한 호국보훈의 길과 민주항쟁의 제도화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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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6-07
  • [‘그 십자가’ 지는 헌신 9회] 겸손과 온유의 지혜로 주와 화평케
    주 안에서 말씀에 순복은 성령의 구속사역에 참예 제자화 하는 선한 일   성경은 성도가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믿음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임을 발견케 한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며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자들로서 존재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확증이다. 주께서 부르심의 이유와 사명을 아는 자들은 오직 주와 복음을 위해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하는 성령의 동역자들임을 밝히 증거하신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일깨워 행함이 따르는 성화가 있어야 함을 확증해 준다. 이 일에 달란트를 남기는 여정으로 계명을 지켜 주를 사랑해야 한다는 강조이다. 곧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주의 뜻을 아는 자로서 성령의 지체임을 연계하여 확증케 한다.     이 일에 환란이나 핍박을 당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앎과 성령께서 내주 동행하심의 은혜라는 사실과 확증이다. 말씀의 앎이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을 행함으로 옮겨 주와 더불어 동행하는 일에 이김을 주시는 견인임을 확증케 한다. 이 일로 선한 열매를 맺혀 주의 제자화로 주님의 기쁨이 되며 주신 기쁨이 충만케 되는 비결이다. 거듭나게 하심의 목적대로 쓰임받는 지체로써 존재의 목적을 주의 나라 확장에 두고 이를 지켜나가는 여정이다.  마태복음5장 9절~12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을 본다. 거듭난 자들은 모든 것을 견디며 인내함이 마땅함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빌립보서1장29절 증거와 같다.    즉 주께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이유로 연계이다. 이를 위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다. 이미 육체는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죽었다고 하는 설정이다. 다만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시는 주께서 사신 것임을 새기며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 분명한 앎의 지혜를 얻게 한다.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자기를 부인하며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성화의 여정을 위한 삶...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으로 제시하셨다.    그러기에 육체의 일을 분별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을 악으로 규제하시어 교회의 덕과 남에게 유익하도록 목표를 갖고 선을 좇아 성화로 열매를 맺도록 이끄심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여 맺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하심이다.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 자의 실행 기준이다.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화답이요 주의 제자화로 성령과 하나되게 하심임을 확증케 한다. 그런즉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하시어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경계해 주셨다. 오직 겸손과 온유로 성령과 동행하여 선한 열매를 맺어가는 성도가 앎의 지혜로 행함있는 믿음을 가진 지체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말씀의 순복은 주의 제자화를 위한 성령과 동행으로 구속사역에 참예이기에.../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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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7
  • 순교와 배교의 일대 서사시④-김성일의
      이와 같이 김성일의 소설 <제국과 천국>은 평소에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 채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 잠재해 있는 무의식적 배교에 대하여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다. 우리가 작품 내의 요한처럼 자신의 욕망과 야심으로 주님을 이용하려고만 할 때 우리 역시 별 수 없는 배교자가 되고 마는 법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욕망과 야심과 같은 그 세속적 유혹을 극복, 참회함으로써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한 해방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소설 속에서의 실제적 영웅은, 이런 표현이 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노사도 요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가위 기독교적 영웅의 삶의 극치라고 해야만 할 것 같다. 이 작품 속에서 요한은 확실히 한 위대한 신앙의 영웅이다.   이 소설 속에는 가혹한 박해자들과 위대한 순교자들이 허다하게 등장하고 있다. 가히 1세기에 걸치는 장수를 누린 사도 요한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상 그럴 수밖에는 없겠다. 세례 요한의 이야기, 예수의 이야기,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이야기, 열심당 지도자 기스칼라의 요한의 이야기,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이야기, 그리고 서머나 감독 폴리캅의 이야기까지 등장하고 있다.   한편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된 박해와 수난의 사화가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를 거쳐 도미티아누스에 이르고, 이어서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황제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 장기간의 박해와 교회수난의 역사가 이 소설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대하드라마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거창한 줄거리의 전개가 하나의 추리소설적 기법의 원용으로 말미암아 독자들에게 대단한 흥미를 자아내고 있으며, 이리하여 소설 작품이 일차적으로 뛰어넘어야 하는 ‘재미’란 벽은 이 소설이 가볍게 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재미’를 동반한 어떤 ‘의미’의 추구라고 하는, 일반적으로 소설의 세계가 목표로 해야 하는 지향점을 찾음에 있어서 이 작품은 일단 득의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이 성서 전체와 초대교회 역사에 대한 오랜 연구를 거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쓸 수 없는 노작임을 이 소설 스스로가 증명해 주고 있다. 작가는 성서를 평면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입체적으로 구조화시켜 들여다보는 훈련을 쌓은 신자라는 사실도 알만한 독자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의 입체적 구성의 독특성이 크게 드러나고 있는 편이다.   이 작가의 성서 해석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신앙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그러나 최근의 성서해석법의 영향을 다분히 받으면서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절충·조화시켜 보려는 건실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성서 해석, 또는 교회사 연구를 토대로 하여 작가 특유의 사회-역사적 및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기독교 역사물로서의 문학적 형상화를 제대로 이루어냈다는 데 대하여 격려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작가의 <땅끝…> 시리즈가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작품들임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비하여 이 작품, <제국과 천국>이 훨씬 수작이란 평가에는 결코 이의가 없을 줄로 안다.   성서에 대한 해석과 소설 작품의 창작은 상호 별개의 사항이므로, 성서에 대하여 아무리 훌륭한 해석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구성하는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따로 없이는 역시 훌륭한 문학 작품의 생산이란 불가능한 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 <제국과 천국>에 대한 가치 평가는 더욱 높아져야 하리라고 보는 것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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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5
  • 장막절 명절
      장막절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최장·최대·최종의 종결 축제일이다(레23:33-44). 일주일간을 189마리의 제물을 드리며, 땅의 열매를 거둔 후에 지키는 명절이다. 일반적으로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것도 이와 유사한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절은 그 실상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육적인 농사 거둔후는 그림자요, 영적 그리스도 안에서의 농사가 실상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농부시요,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는 붙은 가지와 같고 한 몸 이룬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열매 맺는 농사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장막절 되기 전에 한 톨이라도 더 많은 열매를 맺어야 되겠다는 신앙 의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 장막절은 7일간 초막을 지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추억한다(41-43절). 역시 이 초막 생활도 그림자요, 그 실상은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살게 될 때이다.   이때 과거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던 때를 추억하며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회상, 감격하며 기뻐하는 것이 그 실상이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던 때를 회상하는 것과 같다. 과거 육적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광야 40년의 삶을 인도 섭리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그림자이다.   이와 같이 장막절 전까지 우리는 말씀과 성령으로서 마치 불 기둥·구름 기둥같이 인도받았음을 추억한다. 또한 최종적인 7년 대환란의 날도 겪었다. 그 때 바로 주님이 감추인 만나 등을 주시며 이기게 하셨다. 또 적그리스도를 철장 권세로 멋지게 싸워 증거케 했던 일들을 하늘에서 회상했을 때 이는 오직 주님의 절대적 은혜 역사요, 인도하심으로 된 일이었음을 감격하며 더욱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영원히 돌리게 된다. 이것이 초막의 실상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 3절부터 7절에서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시리라. 그때 이기는 자들에게 아버지의 상속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분의 아들이 되리라.’”고 하신다. 그러면 장막절이 내게 이뤄짐이 무엇인가?   나팔절에 재림 주님을 맞이했고 속죄일에 부활했고, 장막절에 주님과 함께 거하며 아버지의 것을 상속받아 영광 입은 자가 된 것이 장막절이 내게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장막절 명절이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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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5
  • [향유옥합] 여성 안수에 대한 단상
      스폰지, 이것은 어떤 형태든 물기가 있는 것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7살 때 유치원 선생님을 통해서 처음 복음을 들었다. 너무 좋았다. 그 이후 매일 예수님과 동행했다. 스폰지처럼 성경 말씀을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후에 신대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합동교단에서 자랐기에 당연히 고민 없이 총신신대원에 들어갔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미취학 전문사역을 2000년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미취학 사역은 전문사역이므로 합동교단 뿐만 아니라, 합신, 통합교단의 교회에서도 사역을 할 수 있었다. 통합교단의 한 교회 유치부 전도사로 사역한 지 3년차 되던 해에, 그곳에 나와 동갑의 여자 목사님이 교육 총괄 목사로 부임하셨다. 동갑의 통합교단 여성 목사님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합동교단에서 자랐고, 그 여성 목사님은 통합교단에서 자랐다. 나는 사역을 한 지 17년차가 되었지만, 그 여성 목사님은 10여년 정도 되셨을 때였다. 나는 여전히 전도사로 한 부서를 맡아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여성 목사님은 한 부서를 담당하면서 교육 총괄 목사로서 특강도 준비하고, 정기적으로 오후예배에서 설교할 수 있었다.    나는 미취학 전문 전도사였지만, 그 여성 목사님은 교육 전문가이자 말씀 선포자였다. 무엇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었을까? 차이는 다름 아닌, 난 합동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니면서 큰 은혜를 받았었고, 그 여성 목사님은 통합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니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속한 교단에 따라서 결과가 너무 다르게 한 여성을 키워내고 있었다. 마치 북한과 남한에 태어난 여성 마냥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는 것 같다.    두 교단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한 교단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개혁하여 ‘여성안수’를 허용했고, 한 교단은 여전히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성경해석의 차이로 남녀를 구분하고 있어서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합동 교단의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안수 안주는 거 알고 총신신대원에 들어오지 않았나요? 왜 이제 와서 그러신가요?”    은혜를 스폰지처럼 흡수하는 존재가 총신신대원생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은혜를 받고 총신에 입학할 때만 해도 안수가 큰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부르심 받았다는 은혜에 감격하여 여성안수 이슈는 염두에 두지조차 않는다. 하지만 총신신대원 여동문들은 졸업 후 수년 안에 깨닫는다. ‘아, 총신신대원의 한계가 여기까지구나. 다른 데 갈 걸….’     하지만, 총신신대원을 졸업한 여동문으로서 꿈꾸는 것이 있다. 하나, 남녀가 차별 없이 공부했듯이 졸업 후 사역에 있어서도 제약받지 않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공동체를 꿈꾼다. 둘, 남녀가 사역의 제한 없는 진정한 동역자가 되어 인권적인 침해가 없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가 되길 꿈꾼다. 셋, 변화하는 시대에 총신공동체가 도태되지 않고 세계선교를 앞에서 이끄는 공동체로 세워지길 꿈꾼다. 넷,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외칠 날을 꿈꾼다. “멋지다~! 총신여동문!”    합동 교단에서 여성안수의 길이 속히 열려서, 이 교단에서 은혜 받은 여성이 큰 일꾼으로 아름답게 성장해 가는 것을 보길 소망하며 기도한다.  /총신신대원 여동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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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2
  • 순교와 배교의 일대 서사시④-김성일의
      이와 같이 김성일의 소설 <제국과 천국>은 평소에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 채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 잠재해 있는 무의식적 배교에 대하여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다. 우리가 작품 내의 요한처럼 자신의 욕망과 야심으로 주님을 이용하려고만 할 때 우리 역시 별 수 없는 배교자가 되고 마는 법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욕망과 야심과 같은 그 세속적 유혹을 극복, 참회함으로써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한 해방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소설 속에서의 실제적 영웅은, 이런 표현이 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노사도 요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가위 기독교적 영웅의 삶의 극치라고 해야만 할 것 같다. 이 작품 속에서 요한은 확실히 한 위대한 신앙의 영웅이다.   이 소설 속에는 가혹한 박해자들과 위대한 순교자들이 허다하게 등장하고 있다. 가히 1세기에 걸치는 장수를 누린 사도 요한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상 그럴 수밖에는 없겠다. 세례 요한의 이야기, 예수의 이야기,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이야기, 열심당 지도자 기스칼라의 요한의 이야기,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이야기, 그리고 서머나 감독 폴리캅의 이야기까지 등장하고 있다.   한편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된 박해와 수난의 사화가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를 거쳐 도미티아누스에 이르고, 이어서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황제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 장기간의 박해와 교회수난의 역사가 이 소설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대하드라마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거창한 줄거리의 전개가 하나의 추리소설적 기법의 원용으로 말미암아 독자들에게 대단한 흥미를 자아내고 있으며, 이리하여 소설 작품이 일차적으로 뛰어넘어야 하는 ‘재미’란 벽은 이 소설이 가볍게 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재미’를 동반한 어떤 ‘의미’의 추구라고 하는, 일반적으로 소설의 세계가 목표로 해야 하는 지향점을 찾음에 있어서 이 작품은 일단 득의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이 성서 전체와 초대교회 역사에 대한 오랜 연구를 거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쓸 수 없는 노작임을 이 소설 스스로가 증명해 주고 있다. 작가는 성서를 평면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입체적으로 구조화시켜 들여다보는 훈련을 쌓은 신자라는 사실도 알만한 독자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의 입체적 구성의 독특성이 크게 드러나고 있는 편이다.   이 작가의 성서 해석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신앙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그러나 최근의 성서해석법의 영향을 다분히 받으면서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절충·조화시켜 보려는 건실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성서 해석, 또는 교회사 연구를 토대로 하여 작가 특유의 사회-역사적 및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기독교 역사물로서의 문학적 형상화를 제대로 이루어냈다는 데 대하여 격려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작가의 <땅끝…> 시리즈가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작품들임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비하여 이 작품, <제국과 천국>이 훨씬 수작이란 평가에는 결코 이의가 없을 줄로 안다.   성서에 대한 해석과 소설 작품의 창작은 상호 별개의 사항이므로, 성서에 대하여 아무리 훌륭한 해석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구성하는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따로 없이는 역시 훌륭한 문학 작품의 생산이란 불가능한 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 <제국과 천국>에 대한 가치 평가는 더욱 높아져야 하리라고 보는 것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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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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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6월, 보훈과 항쟁의 달에 생각한다
    온 세상이 시끄럽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고 있고, 반도체를 비롯한 경제문제와 대만 문제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윤석렬정부는 취임 1년을 지났지만, 아직까지 국제정세와 국내의 산적한 문제를 잘 관리하거나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소위 한미일체제에 편입되어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고, 그 결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도 예사롭지 않다. 남북대화는커녕, 상호불신과 비방은 도를 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러다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국내적으로는 야당대표와의 대화 거부가 상징하듯 대화와 협력, 협치의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갈등과 분열을 고조시키고 있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비판적 언론과 시민사회를 제갈 물리고, 우리 사회 경제체제의 한 축인 노동조합을 악마화 하고 있다. 검찰권력을 동원한 통치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피흘리며 쓰러지는 노조간부를 볼때 노동조합을 이렇게까지 몰아 붙인다면 과연 국민통합이 가능할까?하는 우려가 마음을 가득채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면서 6월 민주화운동이 벌어진 항쟁의 달이다 6.25전쟁의 상처와 기억이 복수와 대결로 이어질 것인가, 아니면 전쟁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화해와 평화의 새역사를 펼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6월 항쟁의 기억 역시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가, 민주화와 생존권을 요구하는 대중에게 다시금 폭력과 강압으로 대응할 것인가도 현재 책임자들에게 달려있다. 우리 시대는 갈등과 대결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화해와 평화, 민주와 번영의 역사를 이룰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민주화와 시대발전을 통해 이루어 졌던 국민통합과 미래 발전의 자부심은 사라져 버리고 극단적인 진영대립 만이 지배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이런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동시에 품고 있다. 6월을 맞으며 대결과 갈등을 지속하고자하는 신앙과 세력도 있고,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열자는 신앙과 세력도 있다. 그 양적 대비는 크게 의미가 없다. 교회의 신앙과 선교가 올바른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성장과 부흥, 민주와 통일 등 역사적 기여의 균형을 이루어 왔다. 성장과 부흥의 힘을 가난한 사람과의 연대, 사회 봉사와 섬김으로 연결시켰다. 또한 성장과 부흥의 힘을 민족의 화해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해 한국사회을 선도해가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근래에는 변화하는 시대를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 미흡한 모습을 보여왔다. 코로나 이후에는 회복에 주력하지만, 그 안에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세력도 고개를 들고 있다. 또한 변화하는 미래정세를 보고 예언자적으로 시대를 이끌어가는 모습 또한 부족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올바른 시대의 방향을 밝히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높여야한다. 한미일 체제에 묶여 식민지 피해자를 외면하고, 노동자를 탄압하고 시대를 거꾸로 돌리려는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통해, 진정한 갈등을 극복한 통합의 빛과 소금 역할을 통해 진정한 호국보훈의 길과 민주항쟁의 제도화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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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6-07
  • [‘그 십자가’ 지는 헌신 9회] 겸손과 온유의 지혜로 주와 화평케
    주 안에서 말씀에 순복은 성령의 구속사역에 참예 제자화 하는 선한 일   성경은 성도가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믿음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임을 발견케 한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며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자들로서 존재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확증이다. 주께서 부르심의 이유와 사명을 아는 자들은 오직 주와 복음을 위해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하는 성령의 동역자들임을 밝히 증거하신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일깨워 행함이 따르는 성화가 있어야 함을 확증해 준다. 이 일에 달란트를 남기는 여정으로 계명을 지켜 주를 사랑해야 한다는 강조이다. 곧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주의 뜻을 아는 자로서 성령의 지체임을 연계하여 확증케 한다.     이 일에 환란이나 핍박을 당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앎과 성령께서 내주 동행하심의 은혜라는 사실과 확증이다. 말씀의 앎이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을 행함으로 옮겨 주와 더불어 동행하는 일에 이김을 주시는 견인임을 확증케 한다. 이 일로 선한 열매를 맺혀 주의 제자화로 주님의 기쁨이 되며 주신 기쁨이 충만케 되는 비결이다. 거듭나게 하심의 목적대로 쓰임받는 지체로써 존재의 목적을 주의 나라 확장에 두고 이를 지켜나가는 여정이다.  마태복음5장 9절~12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을 본다. 거듭난 자들은 모든 것을 견디며 인내함이 마땅함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빌립보서1장29절 증거와 같다.    즉 주께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이유로 연계이다. 이를 위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다. 이미 육체는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죽었다고 하는 설정이다. 다만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시는 주께서 사신 것임을 새기며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 분명한 앎의 지혜를 얻게 한다.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자기를 부인하며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성화의 여정을 위한 삶...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으로 제시하셨다.    그러기에 육체의 일을 분별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을 악으로 규제하시어 교회의 덕과 남에게 유익하도록 목표를 갖고 선을 좇아 성화로 열매를 맺도록 이끄심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여 맺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하심이다.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 자의 실행 기준이다.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화답이요 주의 제자화로 성령과 하나되게 하심임을 확증케 한다. 그런즉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하시어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경계해 주셨다. 오직 겸손과 온유로 성령과 동행하여 선한 열매를 맺어가는 성도가 앎의 지혜로 행함있는 믿음을 가진 지체임을 확증하는 바이다. 말씀의 순복은 주의 제자화를 위한 성령과 동행으로 구속사역에 참예이기에.../오이코스대 교수·바이블아카데미 학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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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7
  • 순교와 배교의 일대 서사시④-김성일의
      이와 같이 김성일의 소설 <제국과 천국>은 평소에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 채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 잠재해 있는 무의식적 배교에 대하여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다. 우리가 작품 내의 요한처럼 자신의 욕망과 야심으로 주님을 이용하려고만 할 때 우리 역시 별 수 없는 배교자가 되고 마는 법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욕망과 야심과 같은 그 세속적 유혹을 극복, 참회함으로써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한 해방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소설 속에서의 실제적 영웅은, 이런 표현이 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노사도 요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가위 기독교적 영웅의 삶의 극치라고 해야만 할 것 같다. 이 작품 속에서 요한은 확실히 한 위대한 신앙의 영웅이다.   이 소설 속에는 가혹한 박해자들과 위대한 순교자들이 허다하게 등장하고 있다. 가히 1세기에 걸치는 장수를 누린 사도 요한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상 그럴 수밖에는 없겠다. 세례 요한의 이야기, 예수의 이야기,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이야기, 열심당 지도자 기스칼라의 요한의 이야기,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이야기, 그리고 서머나 감독 폴리캅의 이야기까지 등장하고 있다.   한편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된 박해와 수난의 사화가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를 거쳐 도미티아누스에 이르고, 이어서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황제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 장기간의 박해와 교회수난의 역사가 이 소설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대하드라마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거창한 줄거리의 전개가 하나의 추리소설적 기법의 원용으로 말미암아 독자들에게 대단한 흥미를 자아내고 있으며, 이리하여 소설 작품이 일차적으로 뛰어넘어야 하는 ‘재미’란 벽은 이 소설이 가볍게 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재미’를 동반한 어떤 ‘의미’의 추구라고 하는, 일반적으로 소설의 세계가 목표로 해야 하는 지향점을 찾음에 있어서 이 작품은 일단 득의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이 성서 전체와 초대교회 역사에 대한 오랜 연구를 거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쓸 수 없는 노작임을 이 소설 스스로가 증명해 주고 있다. 작가는 성서를 평면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입체적으로 구조화시켜 들여다보는 훈련을 쌓은 신자라는 사실도 알만한 독자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의 입체적 구성의 독특성이 크게 드러나고 있는 편이다.   이 작가의 성서 해석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신앙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그러나 최근의 성서해석법의 영향을 다분히 받으면서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절충·조화시켜 보려는 건실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성서 해석, 또는 교회사 연구를 토대로 하여 작가 특유의 사회-역사적 및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기독교 역사물로서의 문학적 형상화를 제대로 이루어냈다는 데 대하여 격려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작가의 <땅끝…> 시리즈가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작품들임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비하여 이 작품, <제국과 천국>이 훨씬 수작이란 평가에는 결코 이의가 없을 줄로 안다.   성서에 대한 해석과 소설 작품의 창작은 상호 별개의 사항이므로, 성서에 대하여 아무리 훌륭한 해석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구성하는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따로 없이는 역시 훌륭한 문학 작품의 생산이란 불가능한 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 <제국과 천국>에 대한 가치 평가는 더욱 높아져야 하리라고 보는 것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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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5
  • 장막절 명절
      장막절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최장·최대·최종의 종결 축제일이다(레23:33-44). 일주일간을 189마리의 제물을 드리며, 땅의 열매를 거둔 후에 지키는 명절이다. 일반적으로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것도 이와 유사한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절은 그 실상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육적인 농사 거둔후는 그림자요, 영적 그리스도 안에서의 농사가 실상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농부시요,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는 붙은 가지와 같고 한 몸 이룬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열매 맺는 농사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장막절 되기 전에 한 톨이라도 더 많은 열매를 맺어야 되겠다는 신앙 의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 장막절은 7일간 초막을 지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추억한다(41-43절). 역시 이 초막 생활도 그림자요, 그 실상은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살게 될 때이다.   이때 과거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던 때를 추억하며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회상, 감격하며 기뻐하는 것이 그 실상이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던 때를 회상하는 것과 같다. 과거 육적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광야 40년의 삶을 인도 섭리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그림자이다.   이와 같이 장막절 전까지 우리는 말씀과 성령으로서 마치 불 기둥·구름 기둥같이 인도받았음을 추억한다. 또한 최종적인 7년 대환란의 날도 겪었다. 그 때 바로 주님이 감추인 만나 등을 주시며 이기게 하셨다. 또 적그리스도를 철장 권세로 멋지게 싸워 증거케 했던 일들을 하늘에서 회상했을 때 이는 오직 주님의 절대적 은혜 역사요, 인도하심으로 된 일이었음을 감격하며 더욱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영원히 돌리게 된다. 이것이 초막의 실상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 3절부터 7절에서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시리라. 그때 이기는 자들에게 아버지의 상속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분의 아들이 되리라.’”고 하신다. 그러면 장막절이 내게 이뤄짐이 무엇인가?   나팔절에 재림 주님을 맞이했고 속죄일에 부활했고, 장막절에 주님과 함께 거하며 아버지의 것을 상속받아 영광 입은 자가 된 것이 장막절이 내게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장막절 명절이다. 할렐루야./예장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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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5
  • [향유옥합] 여성 안수에 대한 단상
      스폰지, 이것은 어떤 형태든 물기가 있는 것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7살 때 유치원 선생님을 통해서 처음 복음을 들었다. 너무 좋았다. 그 이후 매일 예수님과 동행했다. 스폰지처럼 성경 말씀을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후에 신대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합동교단에서 자랐기에 당연히 고민 없이 총신신대원에 들어갔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미취학 전문사역을 2000년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미취학 사역은 전문사역이므로 합동교단 뿐만 아니라, 합신, 통합교단의 교회에서도 사역을 할 수 있었다. 통합교단의 한 교회 유치부 전도사로 사역한 지 3년차 되던 해에, 그곳에 나와 동갑의 여자 목사님이 교육 총괄 목사로 부임하셨다. 동갑의 통합교단 여성 목사님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합동교단에서 자랐고, 그 여성 목사님은 통합교단에서 자랐다. 나는 사역을 한 지 17년차가 되었지만, 그 여성 목사님은 10여년 정도 되셨을 때였다. 나는 여전히 전도사로 한 부서를 맡아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여성 목사님은 한 부서를 담당하면서 교육 총괄 목사로서 특강도 준비하고, 정기적으로 오후예배에서 설교할 수 있었다.    나는 미취학 전문 전도사였지만, 그 여성 목사님은 교육 전문가이자 말씀 선포자였다. 무엇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었을까? 차이는 다름 아닌, 난 합동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니면서 큰 은혜를 받았었고, 그 여성 목사님은 통합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니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속한 교단에 따라서 결과가 너무 다르게 한 여성을 키워내고 있었다. 마치 북한과 남한에 태어난 여성 마냥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는 것 같다.    두 교단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한 교단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개혁하여 ‘여성안수’를 허용했고, 한 교단은 여전히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성경해석의 차이로 남녀를 구분하고 있어서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합동 교단의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안수 안주는 거 알고 총신신대원에 들어오지 않았나요? 왜 이제 와서 그러신가요?”    은혜를 스폰지처럼 흡수하는 존재가 총신신대원생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은혜를 받고 총신에 입학할 때만 해도 안수가 큰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부르심 받았다는 은혜에 감격하여 여성안수 이슈는 염두에 두지조차 않는다. 하지만 총신신대원 여동문들은 졸업 후 수년 안에 깨닫는다. ‘아, 총신신대원의 한계가 여기까지구나. 다른 데 갈 걸….’     하지만, 총신신대원을 졸업한 여동문으로서 꿈꾸는 것이 있다. 하나, 남녀가 차별 없이 공부했듯이 졸업 후 사역에 있어서도 제약받지 않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공동체를 꿈꾼다. 둘, 남녀가 사역의 제한 없는 진정한 동역자가 되어 인권적인 침해가 없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가 되길 꿈꾼다. 셋, 변화하는 시대에 총신공동체가 도태되지 않고 세계선교를 앞에서 이끄는 공동체로 세워지길 꿈꾼다. 넷,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외칠 날을 꿈꾼다. “멋지다~! 총신여동문!”    합동 교단에서 여성안수의 길이 속히 열려서, 이 교단에서 은혜 받은 여성이 큰 일꾼으로 아름답게 성장해 가는 것을 보길 소망하며 기도한다.  /총신신대원 여동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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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2
  • 뇌를 알면 가정이 보인다(13)
      상담 등을 통해 회복된 자녀는 가정에서 편안한 소통을 하게 되고, 자존감 회복, 학업과 진로, 친구관계에서 스트레스 관리능력이 향상된다. 또, 미래지향적이고 긍정적인 열린 사고를 하게 된다.   요즈음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는 어린아이들의 또래 학교폭력 소식을 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낀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부모의 양육이 자녀에게 미치는 신경생물학적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린 시절의 모성적 관심과 모성박탈이 사회적 뇌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모성박탈(Maternal Deprivation)은 아동학대나 분리, 무관심이나 방임 및 거부, 그리고 외상이나 스트레스 또는 사랑의 상실, 우울증 등으로 일어난다. 모성박탈은 뇌의 신경회로를 약화시키고 뇌의 신경가소성을 억제하며 BDNF(뇌유래 신경영양인자)를 감소시킨다. 우울증이나 어린 시절의 모성분리를 경험한 사람은 뇌 기능이 감소되고 고도의 불안증세를 보인다. 그리고 이후 성인에 이르러서도 애착에 어려움을 보인다.   어릴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면 부신에서 코르티솔을 분비케 하여 많은 정서적, 정신적 문제를 야기한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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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2
  • 뇌를 알면 가정이 보인다(12)
      ‘내 아이는 왜 이럴까? 내가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도대체 이해가 안 돼’하면서 자신을 탓할 수도 있다. 결국 부모도 자녀도 행복하지 못한 것이다.   대화가 안 되는 가정, 갈등만 쌓이는 가정, 자녀의 소질이나 자질이 뭔지 모르고 막연히 추측하는 부모, 부모의 말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에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녀, 이 모두가 상담하고 치유해야 할 대상이다. 치유되지 않으면, 부모는 계속 자녀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자녀는 자기 방어의 차원에서 저항이나 보복을 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   자녀는 자신에 대한 이해와 적성, 그리고 진로 등의 차원에서 상담이 필요하며 부모님은 부모의 미해결된 마음을 치유하는 상담이 필요하다. 자녀만 상담 받는 것은 100% 효과적이지 않다. 부모의 양육태도는 자녀의 정신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녀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차원에서 부모님이 오셔서 함께 검사와 상담을 받아야 한다.   부모는 자신의 미해결 문제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상담의 시간이 필요하다. 부모의 정신건강과 자녀의 정신건강이 서로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어서 동시에 상담의 시간을 가진다면 승승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경기대 뇌·심리전문연구원·한국상담개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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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2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7)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영원 전에 내게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신 아버지 당신 닮은 영을 주시고 그로 인해 소망을 갖게 하신 아버지 내게 빛을 주시고 더러움에 찌든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셔서 죄에 대해 분노하게 하시는 아버지 처음 나의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나를 지으시고 아름답다고 기뻐하신 아버지 욕심과 교만과 불순종에 얽혀 어둠 속을 헤메일 때 당신의 가슴은 또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때로는 솟구쳐 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곤두박질치며 내닫기도 하고 때로는 당신의 침묵 앞에 무너져 내리기도 하지만 어느 날 새벽 찬 이슬 속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시면 저린 가슴에 두 손 얹고 고개만 끄덕이며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언젠가 그 어느 날, 당신 앞에 서는 날 기쁨의 찬양 부를 때 목이 터져 가슴이 터져 온전하신 당신의 사랑 안에 영원히 거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 참 마음으로 영의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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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2
  • [건강교실] 위암(하)
    90년대 중반 이후 조기 위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복강경수술이 시행되기 시작해서 현재는 진행 위암에서도 복강경 수술법을 적용하고 있다. 이런 복강경 위암수술법의 일반화 및 국제화에는 국내 다기관 주도의 연구들이 주요 역할을 했다. 이는 그 수술법의 효용성이 국제적 논문 등에 편찬되면서 인정받고 있다.   또한 로봇 위암 수술의 시행이 늘고 있다. 국내 몇몇 빅센터에서는 로봇 위암수술이 복강경 위암수술 만큼 환자의 빠른 회복을 돕고, 수술후 합병증이나 장기 생존율에서도 차이가 없다고 보고 있다. 두 수술법을 비교하는 국내 다기관 전향적 연구가 진행중이다.   더불어 최근 많이 시행되고 있는 수술적 접근 방법은 ‘단일공 복강경 수술’이다. 복강경 수술법 중 한 가지로, 다공 복강경 수술보다 숙련된 기술을 요하기 때문에 제한된 환자들을 대상으로 제한적인 센터에서 시행되고 있다.   최근 환자들은 암 수술 이후 아프기 전과 같은 삶의 질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크다. 최근 조기 발견에 의한 조기 위암의 비율의 증가로, 위암 수술후 장기 생존환자가 증가하면서 광범위한 절제를 시행하는 종양의 근치적 절제도 중요하지만, 수술후 삶의 질도 중요한 이슈가 된 것이다.   위암 수술을 시행하는 외과의들은 치료 후 환자들의 삶의 질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데 좀 더 효과적인 수술법을 고민, 개발하고 있다. 이러한 수술은 ‘기능 보존 수술’이라고 칭한다. 기능 보존 수술에는 △근위부 위절제술 △유문부 보존 위절제술 △감시 림프절 탐색 수술법 등이 있다. 이 수술들은 모든 환자에서 시행이 가능한 것은 아니고, 상기한 수술의 근치성이 증명된 일부 조기 위암을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다.   수술후 관리와 관련해서는 개인적인 환자 진료 경험상 위암 수술후 삶의 질 저하를 막는 방법은 없다. 우리 병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병원에서 환우들을 위한 수술후 관리와 관련된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 환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삶의 질이 완만히 회복되는 경향을 보인다. 치료와 경과 관찰기간 동안 의료진과 잘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면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위암 수술 준비를 위해 환자가 고려해야할 사항은 수술전 최소 2주는 담배는 끊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선은 수술후 잘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니 수술후 입원 회복 기간 동안 의료진의 지시에 잘 따라야 한다. 수술 후에는 술 담배는 끊고, 식습관의 개선이 필요하다. 과식이나 빨리 먹는 식습관을 고치고, 가공된 고기류 섭취 등은 금지이다. 장기적으로는 정기적인 경과 관찰을 통해 재발을 빨리 진단받고 적절한 치료를 조기에 받는 것이 장기 생존율 향상에 도움이 된다.   끝으로, 많은 치료법들이 개발되어 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종양학적으로든 합병증의 발생 측면이든 환자의 안전이다. 다행히도 200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 대부분의 위암 수술 외과의들은 다기관 전향 연구들을 통해 수술법의 표준화를 이뤘고, 그 수술 방법들의 좋은 장기 성적을 증명해오고 있다. 이렇듯 기술이 발전하고 치료 성적이 좋아지고 있지만, 환자 개개인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항상 치료 과정 중 돌발 상황이라는 것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치료성적을 향상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의료진과 적절한 의사소통을 통해 개개인에 맞는 적절한 치료 방법을 결정하는 것이다. /한양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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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2
  • [건강교실] 위암 (상)
      우리나라는 위암 발생률이 높은 편이다. 정확히는 남자에서 2위, 여자에서는 4위의 발생률을 보이고 있다. 과거에 비해 발생률이 많이 감소하고 있지만 여전히 매년 약 3만명의 환자가 위암을 진단받고 있다. 위암은 유전성보다는 산재성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고, 위암은 어느 하나의 원인에 의해 발생하기보다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다.   다만 위험 요소로 거론되는 것들이 있고, 위암의 발생은 식습관이나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려진 위험 요소로는 △헬리코박터균 △가공된 (염장 또는 훈제) 고기 또는 생선류 △짠 음식 △저단백 고탄수화물 식이 △술·담배 등이 있다. 주로 개발 도상국에서 발생률이 높은 암종이기는 하지만 일본이나 선진국에서도 발생률이 높고, 일본의 경우 이에 대한 원인으로 헬리코박터 균의 특정 아형의 감염률이 외국에 비해 높은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국내 위암 발생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이유는 헬리코박터 균의 감염률이 외국에 비해 높은 편이고, 주식이 탄수화물인 점 등이 이유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국내 발생률이 높은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다.   연간 약 1만5000건 정도의 위암 수술이 시행되고 있다. 먼저, 수술이 가능하다는 것은 타 장기로의 전이나 광범위한 림프절 전이가 없어서 수술적으로 완전절제가 가능한 상태라는 것이다. 또, 예후는 병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정 기간(최소 5년 이상) 경과 관찰후 완치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범위한 전이로 인해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수술적 치료가 환자 생존기간의 향상이 도움이 되지 않으며, 완화 약물치료가 유일한 치료이다.   국내 조기 암 건강검진의 일반화에 의해 위암의 조기 발견 사례가 많아졌다. 이는 지난 수년간 위암 수술 후 장기 생존율의 향상에 기여했고, 여러 수술법의 개발과 발전은 수술후 합병증과 사망률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현재 위암 수술후 합병증은 10-15%정도로 보고되고 있고, 사망률은 1% 이내이다. 위암 수술후 완치율은 평균 60-70%정도이다. 위암수술 후 재발 확률은 위암의 병기에 따라 다르며, 조기위암의 경우 5~10%로 매우 낮지만, 3기 이상의 진행성 위암에서는 40~70%가 재발한다.   위암 수술은 종양의 완전절제를 목적으로 하는 근치적절제와, 종양에 의한 증상(폐색, 출혈, 천공 등)만을 완화해주기 위해 시행하는 완화절제술로 나뉜다. 먼저, 근치적 절제술은 암이 발생한 부위를 포함하고 암이 확산되거나 전이될 수 있는 모든 통로와 영역을 가능한 한 모두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위에 암이 발생하게 되면 림프절을 따라 암세포가 퍼져 나가기 때문에, 반드시 위절제시에 포함하여 주변 림프절 절제를 해야만 정확한 병기 결정과 함께 치료효과를 높일 수 있다. 이런 근치적절제술이 유일한 위암의 완치 방법이다.   90년대 중반이전에는 위암은 개복 수술만이 시행되어 왔다. 90년대 중반 이후 조기 위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복강경수술이 시행되기 시작해서 현재는 진행 위암에서도 복강경 수술법을 적용하고 있다. 이런 복강경 위암 수술법의 일반화 및 국제화에 국내 다기관 주도의 연구들이 주요 역할을 했으며, 이는 그 수술법의 효용성이 국제적 논문 등에 편찬되면서 인정되고 있다. /한양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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