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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20
      (사단법인)한국작은도서관협회 소속으로 독서 동아리를 통해 국내외에 기독교 독서리뷰를 널리 전하고, 독서운동과 작은도서관을 운영하고 계시는 송광택 목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항상 곁에 계셨던 주님을 기억한다고 말한다. 송목사의 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교회를 다니셨기에 그가 살던 집에는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가지고 오신 손때 묻은 작은 성경과 찬송이 있었다. 찬송가는 실로 묶인 무곡 찬송가였는데, 어머니는 특히 <새벽부터 우리 사랑함으로써>라는 찬송을 즐겨 부르셨다. 젊은 시절에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에서 그 찬송을 제일 많이 불렀다. 송목사는 고등학교 시절, 참고서 하나 마음대로 살 수 없었고, 학원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고3 시절을 붙들어 준 짧은 이야기가 있었다. 스파르타의 소년들은 짧은 창으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묻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훈련을 받을 때, 짧은 창을 가지고 긴 창을 가진 자를 이길 수 있어야,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라고 말이다.   1971년 2월 어느 주일 아침, 송목사는 일신교회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일신교회는 그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때에 안길옹 목사님이 개척한 교회였다. 예배 시간 오래 전부터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기에 발이 저려 왔으나, 꾹 참고 두 시간 이상을 그 자세로 예배를 드렸다. 담임목사님은 누가복음 19:1-10을 본문으로 하여, <지나가시는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셨다. 말씀의 요지는 2천 년 전에 여리고를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오늘, 아침에도 우리 앞을 지나가신다는 것이요, 우리 각 사람이 그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설교 후에 회중은 조용히 묵상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날 송광택은 정직한 기도의 첫 마디를 생각해 내려고 끙끙거렸다. 이제 막 입을 열어 “만일...”이라고 기도 첫마디를 입 밖으로 내놓으려는 순간, 정말 순간이었다. 그의 망가지고 상처 난 영혼 깊은 곳을 향해 큰 꾸지람의 소리가 임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이 무엇이냐?” 그의 부끄러운 내면이, 가장 약한 부분이 그대로 노출되고 지적당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엄중한 책망의 말씀은 차갑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까지 접해본 적이 없는 ‘거룩한 무게’를 지닌 사랑의 음성이었다. 그 책망의 말씀이 광택의 영혼에 임하는 순간, 그의 안에서 그 무엇인가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거의 동시에 그는 고백하고 있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삭개오를 찾아오신 예수님.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그 분의 사랑.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그에게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감히 고백한다. 그 순간 빛을 경험했다고 말이다.   그 후 송광택은 신학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1971년 10월 24일 세례를 받은 그는 이미 성경을 공부하고 그 말씀을 전해야한다는 소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1973년 총신대학교 신학과에 합격했지만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수중에는 교통비도 없었다. 이모저모로 궁리하다가 손목시계를 들고 전당포를 찾아갔다. 시계를 맡기고 천 원을 받고 그 길로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동태를 샀다. 동태장사를 한지 십여 일이 지났을 때, 그는 “동태를 사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학비를 보태 주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이 동태를 사는 사람은 복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동태를 사는 분이 복을 받으라고 ‘복(福)동태’ 라고 이름을 붙였다. “복동태 사려”라고 외치며 골목골목을 다닐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기쁨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동태 장수가 아니라, 복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기분이었다, 송목사는 책사랑에서 독서운동으로, 80년대 말 한 신학교에서 독서모임 <글사랑>, <코람 데오>를 조직하였다. 그 모임을 통해 독서의 신앙적 의미를 조금씩 인식하면서 독서회원들의 책사랑은 뜻을 같이하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 일종의 독서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총신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는 13년간 독서지도사 과정을 운영하기도 했다(2004-2016년).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며 살아야 한다. 기독서적들도 읽으며 책의 주인공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발자취들을 통해 교훈을 삼고 자신도 후대에 물려 줄 수 있는 그릇으로 성장해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독서와 인문 관련 책들을 계속 적으로 읽어야 한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이다. 바로 지금이 기독교 지성의 책임이 매우 큰 시대다. 내 손 가까이 책을 둔 영적 지도자들이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음을 인식하고, 성경과 인문학 서적들을 즐겁게 읽으며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같이하는 독자들이 되기를 기대한다.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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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0
  • [쉽게 배우는 한의학 23] 소아는 보약이 필요하다
      소아기 때는 성장위해 충분한 영양공급 필수 영양상태 부실한 아이 총명할 가능성도 적어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소아는 신체적으로 장부와 조직이 형성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연약할 뿐 아니라, 특히 정신적 심리적으로 정상적인 작용이 이루어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여 성인과는 판이하다. 즉 소아는 성인의 축소판이 아니며, 동의보감에 의하면 10명의 부인을 치료하는 것이 소아 1명을 치료하는 것보다 쉽고, 10명의 남자를 치료하는 것이 1명의 부인을 치료하기가 쉽다고 했다.   옛부터 한방에서는 소아기를 소양지기(少陽之氣)가 왕성하여 생리적인 자연발육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시기로 보았다. 소양(少陽)이란 陽(양)의 기운은 왕성하고 陰(음)의 기운은 부족한 상태(陽有餘 陰不足)로 소아기에는 발육하려는 체내의 기운이 인생의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왕성하고(陽有餘), 이에 따라 충분한 영양분이 계속 공급되어야하므로 항상 영양분이 필요하다고(陰不足) 여기는 관점이다. 이런 상태이므로 다른 시기에 비해 열이 많이 발생하기도 하고 열성질환에 유달리 과민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흔히 쓰이는 처방이 귀룡탕(歸茸湯)이라는 것으로 當歸(당귀)와 鹿茸(녹용)을 포함한 여러가지 약재로 구성되어 있다. 이 귀룡탕은 감기에 잘 걸리고, 밥을 잘 안먹어 식사 시간이면 밥과의 전쟁을 하는 아이, 잔병치레가 많으며, 알러지성 비염을 앓고 있거나, 성장발육이 느려서 걸음이나 말이 늦고, 소변을 자주 보거나 야간에 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아이, 간혹 코피를 흘리는 아이 등의 몸의 氣血(기혈)이 약하여 생체의 정상적 기능이 발휘되지 않을 때 흔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當歸(당귀)와 鹿茸(녹용)을 포함한 여러가지 약재로 구성되어 있다.    녹용의 주된 성분은 성장 발육의 기운을 돕는 작용이 강하고, 신진대사의 항진과 강장효과가 있어 조혈기관을 보익하고, 근골을 튼튼히 하며, 빈혈, 심장쇠약, 퇴행성관절질환, 성기능감퇴, 산전산후의 빈혈등에 주로 쓰이는 약이다. 당귀는 보혈작용을 대표하며, 빈혈이나 생리불순을 조절하며, 혈중의 노폐물을 제거하고, 체내가 건조한 것을 윤택하게 하여 대장의 배변을 원활하게 하기도 한다. 따라서 귀룡탕은 발육부전과 영양장애에 주로 사용되는 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    소아에 있어 체력적으로 가장 절실하게 보약을 복용할 시기를 꼽아 본다면, 걷기 시작하는 시기로 소비되는 에너지가 급격히 증가하는 첫 돌 무렵과 3세 전후, 그리고 6-7세 경이라고 할 수 있다. 3세 경에는 외부 활동량이 많아짐에 따라 소비량은 물론 충분한 영양섭취를 못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며, 6-7세 경에는 두뇌 활동의 증가로 역시 영양보충이 필요한 때이며, 3-7세 정도인 유아기는 두뇌도 가장 왕성하게 발달하는데 이 시기에 적절한 영양공급이 안되고 열성경련(驚氣)를 하는 아이는 총명해질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약의 힘을 빌어 영양섭취를 증가시키는 것이 좋으나, 복용량이나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다르므로 전문적인 한의사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나이의 반을 먹인다든가, 나이 수(數)대로 먹인다든가 하는 속설이 있지만, 용량은 전적으로 아이의 건강 상태에 따라 자기 나이보다 적게 먹이기도 하고 나이의 몇 배를 먹이기도 한다.  /경희신창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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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6
  • 하나님이 계획하신 비전
    고등학교 시절 하루빨리 군대에 가서 국방의 의무를 마친 후 영미권으로 유학을 하러 가기로 다짐했었다. 성공적인 유학길을 준비하고자 군대에 들어가기 전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목사님에게 영어를 배우고 전역 후 유학원을 찾아다니면서 유학을 준비했다. 유학 비용을 모으고자 일을 하다가 잠시 쉬던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중국어를 공부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영미권 유학을 준비하고자 영어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계신 어머니가 중국어 공부를 권했다는 점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머니의 제안을 따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 있는 선교중국어학과를 지원했지만, 지금까지 영어공부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는데 이를 포기하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지금까지 한자 공부를 소홀히 한 것도 중국어를 선뜻 선택하기 힘들었던 요인 중 하나였다.   어떻게 중국어 공부를 해야 할지 막막한 상태에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학과장을 맡고 있던 우심화교수님의 수업을 듣던 도중 지금까지 품고 있던 걱정을 모두 날려버릴 한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너희가 4년을 나에게 바치면, 40년을 주겠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중국어 공부에 관한 막연한 공포심이 있어 선뜻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었다. 한자 한 글자를 익히기도 쉽지 않았을뿐더러 매일 수업 퀴즈로 중국어 시험을 치르느라 우심화교수님이 남긴 말은 자연스럽게 의식 뒤편으로 사라져 갔다.   하지만 학교에서 진행하는 어학연수를 통해 방학 동안 중국과 대만을 방문하게 된 일을 계기로 중국어에 흥미를 붙일 수 있게 됐다.    공부에 재미를 느끼니 자연스레 중국어 실력이 향상하게 됐고, 처음 학교에 입학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공부에 임했다. 처음에는 포기할 줄 알았던 대학 생활 4년을 모두 마치면서 큰 만족 속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   한 가지 더 만족스러운 것은 중국어를 배우고자 들어오긴 했지만, 신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되면서 4년간 중국어 공부에 매진한 만큼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시간이 생겨났다. 이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삶을 다루시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과 삶의 목표에 관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졸업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우심화교수님이 남기셨던 말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심어져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중국어를 배우는 원동력이 되었던 듯싶다. 그리고 4년을 신학교에서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과 목표가 우리를 이끄는 삶에 얼마나 존귀한지 배울 수 있었다.   정말 뻔한 말이지만 일상에 지쳐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내려주신 비전과 우리 삶의 목표를 잊고 산다. 졸업을 한다면 사회라는 거친 현실의 벽을 마주치게 될 터이다. 4년이라는 배움의 시절 속에서 깨달은 것을 소중하고 여겨 사회로 나가 세상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을 지키는 마음의 기둥이 될 수 있길 희망한다. /양평교회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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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2020-08-06
  • [성경의 죽음 23] 아하스 왕의 죽음
      아하스 왕의 기사는 열왕기하 16장과 역대하 28장에 나온다. 아하스가 유다의 왕이 될 때에 나이는 이십 세라고 했다(열왕기하 16장 2절). 그는 16년 동안 다스렸으나 다윗 왕과 같지 않아 하나님 여호와께 정직하게 행하지도 않았고 우상 숭배하는 자였다. 대표적인 악행들을 성경은 기록하여 그의 인생을 악하게 표현한다. 첫째는 바알들의 우상을 만든 것이다(역대하 28장 2절). 둘째는 그의 자녀들을 불살라 인신제물로 바친 것이다(역대하 28:3). 셋째는 산당들과 작은 산 위에서, 그리고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한 것이다(열왕기하 16장 4절; 역대하 28장 4절).   이런 악행 때문에 결국 하나님은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셨다. 아람 왕은 많은 무리들을 사로 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 베가의 손에 넘겨 죽게했다(열왕기하 16장 5절; 역대하 28장 5절). 특히 이스라엘 왕 베가는 유다에서 하루 동안에 용사 십이만 명을 죽였다고 했다(역대하 28장 6절). 이 전쟁에서 왕은 아들을 잃고, 궁내대신과 총리대신을 잃게 된다. 그리고 약 20만 명의 백성들이 사마리아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스라엘에는 오뎃이라는 선지자가 있어, 형제인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오는 것을 반대하여 결국 돌려보내게 되었다(역대하 28:15).   하나님의 은혜로 백성들이 돌아오게 된 것을 모르고 아하스 왕은 도리어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한다(열왕기하 16장 7절; 역대하 28장 16절). 이때 에돔 사람들이 다시 와서 유다를 치고 그의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기 때문에 아하스 왕은 사방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역대하 28장 16절). 성경은 이런 재앙들이 모두 아하스 왕의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유다 왕인 그를 ‘이스라엘 왕’이라고 불러 우상숭배자들인 이스라엘 왕들처럼 행했다고 조롱한다(역대하 28장 19절). 도움을 요청하여 지원에 나선 앗수르 왕은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한다(역대하 28장 20절).   결국 아하스 왕은 죽어 왕들의 무덤에 들어가지 못하고 예루살렘 성에 장사되었고, 아들 히스기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역대하 28장 27절). 아하스 왕의 모습을 보며, 오늘의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를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한국 사회가 발전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르고, 여전히 사람들은 아하스 왕과 같이 어리석게 우상숭배와 온갖 죄에 빠지고 있다. 국가 지도자들은 속히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희망이 있다. 한국교회는 아하스 왕의 전철을 밟지 말고 과감하게 개혁하고 변해야 소망이 있다. /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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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08-06
  • [마라나타 9] 아담 유감
      아담은 흙으로 지음을 받을 때 이미 청년이었다. 어린 시절도 없었으며 태아로 열 달을 기다려야 하지도 않았다. 기다림이 무엇인지 모르니 그리움을 알까, 서러움을 이해할까. 미어질 가슴도, 쓸어내릴 한숨도 없었을 터이다. 그가 혼자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으셔서, 깊이 잠들게 하고, 갈비뼈 하나로 돕는 배필 하와를 빗으셨다.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로다” 최상의 사랑을 고백하였지만, 유일하게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후 변명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여자가 나무 열매를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약속은 하와 이전에 하나님과 아담 둘이서 맺은 사랑의 언약이다. 매일 아침 바람과 함께 동산에 오신 하나님은 약속한 선악과가 여전히 나무 위에 달려있는 것을 보시며 기뻐하셨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사랑을 이어가는 행복의 증표이다. 하나님께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아담에게 전해 들은 하와는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에게 말했다. 에덴에서는 하나의 언어였다. “너희는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빛을 등지면 그림자가 보인다. 갑자기 죄의식이 생겨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다. 아담 대신 죽은 것은 양이었다. 에덴에서 첫 번째 피 흘림은 대속의 결과였다. 기다림의 훈련이 없었던 아담이 시간 속에 살게 되니 필연적으로 선악과를 따먹게 되어 있었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으나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으니, 호기심 발동한 하와를 앞세워 단 하나의 계명을 어기고, 어느 날 손을 들어 따 먹을 수밖에 없었겠지. 아담 유감입니다! 마라나타 주여 이제 오시옵소서.  /한강교회 권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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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6
  • 인권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보장돼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차별을 받는다는 것은 행복한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합법적인 이유 없이 차별이 생기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있어서는 안 된다. 즉, 구별되어야 할 인권이 차별로 규정되고 보호받아야 할 인권으로 포장되어 법을 만든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첫째, 삶을 존귀하게 만드는 인권은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 법은 윤리(도덕)의 최소한의 규범이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 지식이나 가문, 학력, 경제와 사회문화적 영역의 차이가 인권을 침해하거나 차별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자유민주주의의 인권은 소중하게 지켜져야 한다.   둘째, 자연적 질서와 인간의 윤리는 태생적 동질성을 갖는다. 즉, 자연적 질서에 위배되는 것은 윤리의 파괴이다. 성경은 자연적 질서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을 가르치는 책이다. 종교적 가치를 넘어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 이를 통해 아름다운 세상이 존재하게 되며 서로가 배려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인권이라는 말로 자연적 질서를 위배하는 것은 인권이 아니라 윤리의 파괴이다.   자연과 사람의 본질적 가치를 유지하고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자연적인 윤리가 무너질때 인간의 기본적 삶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자연적 질서가 무너지게 하는 차별금지법은반대한다.   셋째, 쾌락만을 위한 인권은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지도의 대상이다. 교회는 한 사람을 천하보다 존귀하게 여기므로 인권을 중요하게 여기며, 사회적 인권의 보호를 반대하지 않는다.사회에 악을 끼치고, 윤리를파괴하는 사람들을 법정에 세우는 것은 보호되어야 할 인권이 아니라 지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편안한 삶을 공유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동성애, 성평등은 법률적 차원에서 보호되어야 할 인권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지도해야 할인권인 것이다. 더불어 파생적 성을 통한 동성애와 성평등으로 일어나는 결과는 무서운 질병(예: 에이즈)이 생성되고 전파되어 인간의 인격적 존엄성마저 무너지게 하고 파멸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성애와 성평등은 법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인권이 아니므로 법으로 제정하지말고 스스로 윤리적 가치를 평가받게 해야 한다. 동성애자와 성평등우호자들을 잘 지도하여 인간의 잘못된 성윤리에 의한 차별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질적 성에 맞는 삶이 되도록 정부와 인권위원회는 지도하여야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랑하나 동성애와 성평등의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   넷째, 포괄적 차별금지법에서 개별적 차별금지법으로 변경하여 역차별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 자연질서, 즉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적 질서에 위배되는 것을 제외한 차별금지법은 기본 평등권에서 보호되어야할 인권이므로 반대하지 않는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기본평등권의 충돌로 인한 인권 탄압이 생기는 것이므로, 개별적차별금지법으로 변경하여 모든 국민에게 인권이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정부와 인권위원회는 윤리와 창조질서를 파생적 성으로 파괴하여 무서운 질병을 발병케 하는 동성애와 성평등을 코로나19의 확산을 잘 방지한 지혜로 그들을 지도하여 일반 사람들의 행복추구권 또는 평등권이 역차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윤리는 타협과 포용이 있지만, 법이 생기면 다툼이 생기므로, 정부와 인권위원회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행복추구권에 역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바라는 교회의 외침에 귀 기울이길 촉구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표회장·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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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8-06
  • 부끄러움이 영광인가?
      창세기에 보면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처음 부끄러움을 깨달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양심에 거리끼게 되면,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사실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은 인간뿐이다.    민족시인 윤동주는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리라」고 했다. 그의 고결하고 아름다움은 오늘 우리 사회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요즘 모든 예술, 영화는 앞다투어 남녀가 하체를 들어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세상이다. 성경대로 배를 하나님으로,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세상이다.    사실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인생이면 그래도 희망이 있다. 옛날 선비들은 부끄럽지 않은 신하, 부끄럽지 않은 스승, 부끄럽지 않은 아비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자기 자신을 갈고 다듬었던가를 생각해본다. 차라리 생명을 버릴지언정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었다. 종교가 있건 없건 한 인간으로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게 살아가려는 것이 옛 선비들의 사고 방식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른바 〈도덕 불감증〉과 〈물질 만능주의〉를 살아가는 인간들로 하나같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한국 사회가 되었다. 부끄럽고, 낮 뜨겁고, 민망스러운 것은 모든 분야가 똑같다. 특히 권력에 중독된 자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흰 것을 검다고 하고, 검은 것을 희다고 속여도 눈도 깜짝 안한다.    일찍이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R. Niebuhr)는 그의 유명한 〈도덕적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 Moral Man and in Moral Society〉란 책을 썼다. 그의 책 제목을 보면 사회가 썩고 부패했기에 세상이 망가졌고, 그래도 인간은 도덕적 이라고 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니버의 책은 차라리 〈부도덕한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라고 해야 옳았을 것 같다. 결국 먼저 인간의 전적부패와 죄악의 문제를 해결해야 이 세상에 정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역사에 부끄럼이 없으려면 법과 양심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 〈이현령 비현령, 녹비에 가로 왈 자〉란 말이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노루 가죽을 당기면 날일자가 되고, 밀면 가로 왈 자가 되는 제멋 대로의 법 적용은 참으로 부끄럽다. 결국 인간은 전적 부패(Total Depravity)를 했으므로, 인간이 새롭게 변화 되기 전에는 세상은 새롭게 될 수 없다. 인간을 새롭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잘사는 나라이다. 한국 교회는 세계에 내어놓을 만한 큰 교회들이 많다. 우리의 꿈은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 부끄럽지 않은 정부, 국회, 법조계, 부끄럽지 않은 교회가 되어서, 말 그대로 세계에 모범이 되면 참 좋겠다.  부끄러움이 결코 영광이 될 수는 없다!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 오피니언
    • 칼럼
    2020-08-06
  • “하나님의 약속 믿는 믿음은 ‘의지적 결단’, 믿어질 때까지 기다리면 평생 안 믿어져, 믿으면 믿어지는 것”
    ◇복음회복운동에 대해 설명하는 진태호장로   평생 교회 다녀도 복음에 대해 단 한마디도 말할 수 없는 폐단 발견 “복음을 말할 수 없다면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    ◇진장로는 매일아침 예배로 업무를 시작하고 있다.  복음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한국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는 한국복음회복운동 대표 진태호장로를 만났다. 진장로는 한 교회에서 30년간 신앙생활을 하고 50년이 넘는 오랜 기간 교회를 다녔지만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성경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단 한마디도 말할 수 없는 ‘유구무언’의 ‘복음치’였다고 한다. “수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되지 않고, 능력이 되지도 않고, 평안이 되지도 않았다”고 밝힌 진장로는 “말씀을 들어도 여전히 마음이 괴롭고, 여전히 문제가 풀리지 않고 여전히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이런 부자유한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몸부림치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보시고 복음을 깨닫게 해주셨다”라며 복음회복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이어 “평생 교회를 다녀도 성경을 모르고, 내가 누구인지 자기 정체성이 희미하고, 내가 믿는 복음을 단 한마디도 말할 수 없는 이 폐단을 하나님이 발견케 하셨다”고 부연했다.   -복음회복운동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믿음회복운동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로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사실임을 몰라서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자들에게 또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서 종교생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 안에 감춰진 생명, 권능, 평안, 영광, 부유를 회복하여 그것을 누리며 살자는 것이다.”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로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사실이라는 것” “복음회복운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서 종교생활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복음 안에 감춰진 생명, 권능, 평안, 영광, 부유를 회복하여 그것을 누리며 살자는 것”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복’으로 보시고 임마누엘로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인데, 이 단순한 사실을 몰라서 대다수 교인들은 어떻게 하면 이 힘든 현실에서 벗어날까, 문제에서 해방될까, 괴로운 마음에서 자유 할까 늘 고민하고 있다.”   -믿음이란. “성도들이 ‘믿음’을 믿어지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또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도 있다. 그런데 믿음은 믿어지는 게 아니다. ‘믿어지는 것이 믿음이다’라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맞는 말일지라도 그러나 그것을 삶에 적용할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믿음은 ‘의지적 결단’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믿어」(롬 10:10)라는 말은 정확히 표현하면 ‘믿기로 마음먹으면’이란 뜻이다. (내가 의지적으로)믿어야 역사가 일어나지, 믿어질 때까지 기다리면 죽을 때 까지 평생 믿어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게 육신의 마음이다. 보이는 것에 반응하고 오감에 반응하는 것이 육신의 마음이다. 육신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세상적인 것에 반응하는 마음이지, 절대로 믿어지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굳이 ‘믿어진다’라는 말을 주제로 삼고 얘기하자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1:17) 이 말씀이 ‘믿으면 믿어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서울 강남에서 40년째 운영 중인 부동산 사무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로 하는 믿음 안에서는 문제도 답, 현실도 복, 괴로움도 은혜”  “평생 교회 다녀도 성경을 모르고, 내가 믿는 복음을 단 한마디도 말할 수 없는 이 폐단을 하나님이 발견케 해”   -무엇을 믿어야 하나. “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하시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확실한 증거를 세우셨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 문제, 죽음의 문제, 마귀의 저주 등 모든 문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미래형이 아니다. 과거완료형이다. 많은 교인들이 ‘나는 왜 안 믿어지지’, ‘많이 기도하면 믿어질 거야’, ‘성경 많이 보면 믿어질 거야’, ‘여러 과정을 거치면 믿어질 거야’ 라고 하는데 이런 말들은 맞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2천 년이 훨씬 지난 이전에 이미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놓으셨다. 그런데 신앙 생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그걸 믿지 않고 어둠의 영, 세상의 영, 거짓의 영들에게 사로잡혀 부자유한 삶을 살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로 하는 믿음 안에서는 문제도 답이고, 현실도 복이고, 괴로움도 은혜다. 형광등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불빛이 밝혀지는 것처럼, 실제적으로 믿으면 바로 역사가 일어난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모든 것이 감사요. 은혜요. 기쁨이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해 달라. “그리스도는 왕, 선지자, 제사장인데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영원한 제사, 완전한 제사, 확실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셨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아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아는 진리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생명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끝냈는데, 왜 우리가 문제를 붙잡고 있을 필요가 있는가. 그 사실을 몰랐을 때는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알고 있음에도 믿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괴로움과 고통이 있는 현실에 사로잡히지 말고 ‘믿음으로 자유를 누림’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참 아들이 되자.”   -복음회복운동에서 주장하는 복음은. “복음적인 것은 알았다. 그러나 복음은 몰랐다. 복음 안에 있는 능력, 복음 안에 있는 생명, 복음 안에 있는 권세, 영광 이런 것들은 몰랐었다.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로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절망을 경험케 하셨다. 교회적 절망, 내 개인적 삶의 절망, 가정의 절망 등이다. 그러한 완전한 절망 속에서 오직 복음만이 생명이고, 약속만이 능력이고, 믿음만이 실제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다.”   “생명 없는 설교, 하나님의 약속을 말하지 않는 가르침이 얼마나 많은 교인들에게 종의 멍에를 메게 하는지 알아야” “형광등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불빛이 밝혀지는 것처럼, 실제적으로 믿으면 바로 역사가 일어나”   -복음을 깨닫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50년간 수많은 설교를 들었다. 한 교회에서 30년 신앙생활하면서 여러 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었다. 설교에 낙담을 한 적도 많았다. 교회를 떠나려고 고민했다. 건축헌금을 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섬겨왔던 교회인데 막상 떠나려니 만감이 교차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도 해 보았다. 조용한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께 여쭙기로 하고 차를 타고 가다 기도중에 시골 ‘촌로’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은 자식을 위해 평생을 살았고, 자식의 죄 때문에 자식을 위해 형무소에 가서 맞아 죽은 얼굴이었다. ‘내가 너를 위해 죽었는데 너는 그 교회 하나 감당하지 못하니’하는 음성이 들려오는 순간 펑펑 울었다. 폐 일언하고, 다시 마음을 추스리고 교회를 잘 섬기기로 했다. 그 뒤 4년여 동안 하나님께서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복음을 열어 주셨다.”     -운동의 방향과 향후 계획에 대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와 죽음의 문제, 마귀의 저주를 이미 끝냈는데, 대부분의 교인들은 아직도 현실에 묶여있고, 문제에 사로잡혀있고, 괴로운 마음에 갇혀있다. 이러한 육신의 거짓된 자아에서의 해방과 자유는 하나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아니면 결코 누릴 수 없다. 거짓 된 자아는 현실에만 반응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참 자아만이 실체요 생명이다. 우리는 다 죽는다. 죽음이 믿음 밖에 있다면 그 죽음은 저주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믿는 자는 죽음도 복이다. 복음의 능력은 알고 있으나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서 세상을 향해 외치지 못하는 목회자들이나 사역자들이 있다면 그들과 함께 신문, 방송, 유튜브 등 사회매체를 통하여 이 운동을 전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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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6
  • 기독교중독연구소 유성필소장
      “중독에는 사회적인 문제를 시작으로 영적인 문제, 신앙의 문제, 가정·정서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동시에 깃들어 있다”고 말하는 유성필소장(사진).   유성필소장은 현대사회에 만연한 중독문제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를 치유하는 방법을 찾아 전파하는 데에 힘쓰고 있다. 유소장은 “기독교중독연구소는 스마트폰 중독이나 약물중독, 도박중독 등 여러 중목문제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며, “중독문제는 결국 말씀 안에서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 일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유소장은 많은 이들이 중독에 빠지는 현 세태를 한국교회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는가 하고 질문을 던졌다. 유소장은 “산업화로 인해 각박해지는 현실 속에서 중독문제가 불거지는 추세는 계속해서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고 있다”며, “이는 하나님을 의존하기보다는 재화나 인간관계 등에 의존해 여기에서 해결책을 찾는 데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이어 “가정 안에서 이뤄지지 못하는 가족 간의 돌봄과 애착, 사랑의 결핍감을 다른 것을 통해 채우고자 하는 욕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며, “성경 안에서 중독문제가 어떻게 다뤄지고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고 교회가 이들을 치유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유성필소장은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중독문제를 죄의 문제로 치부하면서 많은 관심을 두지 않은 듯하다”며, “중독문제 해결을 위한 모임을 진행하는 환경을 갖추는 데에 교회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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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3
  • [독자기고] ‘차별하는’ 차별금지법
      서충원목사(샬롬누리영광교회 담임)   퀴어이론에 근거한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와 이성애자 사이의 평등을 양성평등과 인종평등과 같은 차원에 두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양성평등이나 인종평등에 적용되었던 차별금지를 성소수자의 인권에 적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양자는 전혀 다른 범주이기 때문에 이 논리는 엄청난 법적 질서의 혼란을 가져온다. 성차별 인종차별에서는 강자와 약자가 나뉘고 강자에 의한 약자의 차별이 이루어진다. 과거 가부장제 사회에서 강자 남성이 약자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한 것은 허용되었지만 지금은 보편적으로 부정된다. 백인우월주의 사회에서 약자 흑인이 강자 백인에 의해 억압, 차별당하는 것 역시 보편적 이성에 의해 비난을 받는다. 그런데 기독인들이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도 강자로서 약자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것으로 비난을 받아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현대사회에서 이슬람을 제외하고서는 종교간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즉 어떤 종교가 타종교를 억압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기독교 국가가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나 사상을 억압하고 차별하여 불이익을 준다면 기독교가 차별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종교간에는 다원주의를 인정한다. 국가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각 종교는 타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 그렇다 해도 기독교 신자는 불교를 반대하고 비판할 수 있고 불교 신자도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비판할 수 있다. 그러면 동성애를 정상으로 보는 퀴어이론은 어떤가? 비판해도 되는가? 물론이다. 동성애를 정상이라 주장하는 퀴어이론은 오늘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나 불교와 마찬가지의 하나의 상대적인 신념으로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한다. 동시에 이에 대한 비판 역시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한다. 동성애를 악으로 보는 기독교입장이 맞는지 동성애를 선으로 보는 퀴어이론이 맞는지에 대해 보편적인 이성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만일 국가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동성애를 불법화한다면 이것은 차별이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동성애를 죄라 하고 자신의 신앙에 근거하여 자신의 공동체에 동성애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이다. 교회나 기독교단체에서 스님을 직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정당하듯이 동성애자를 직원으로 채용하지 않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이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은 보편적 이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급진적 현대 이데올로기를 보편적 윤리로 둔갑시켜 종교적 다양성과 자유라는 현대의 기본가치를 거슬러 기독교 신앙을 차별하고 억압한다. 오늘날 서구국가들에서 퀴어이론이 지배이데올로기로 부상하면서 기독교신앙을 불법화하는 것은 이슬람국가나 공산국가에서 기독교신앙을 불법화하는 것과 동일하게 종교의 자유라는 기본인권에 반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이다. 종교는 현대 민주국가들에서 차별과 평등과 인권의 이슈가 아니다. 종교는 다원주의와 관용과 자유를 상호간 인정하면 되고 보편적 도덕과 정의에 협력하면 된다. 동성애를 옹호한다 해도 서로 이성과 도덕에 근거하여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다. 그런데 서구에서처럼 종교가 차별금지법에 의해 통제되면 종교나 사상들이 서로 대화할 수 없는 적으로 화하고, 시대의 주류 가치를 거스르는 기독교신앙은 차별받고 억압된다. 차별을 금지하기 위한 차별금지법이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의 기독교 신앙을 차별하는 아이러니가 일어난다. 서구사회는 아마도 기독교가 타종교나 다른 사상을 박해한 역사적 과오를 속죄하는 의미에서 이런 퇴행이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는 서구가 지향한 자유, 평등 가치와 모순된 행보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 없음을 경험한 자로서 온갖 차별을 반대한다. 지금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것은 서구의 흐름에 편승한, 보편적 도덕성을 거스르는 성소수자이데올로기의 전횡을 방지하고, 관용과 평화의 민주국가로 나아가고자 함이다. 우리나라가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장소가 되길, 교회가 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각오하고 자유와 평화의 통로로서 소명을 감당하길 소망한다.
    • 오피니언
    20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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