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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4
      ‘알파 창조론’과 ‘오메가 창조론’   ▲지금까지 ‘알파창조론’을 연재했는데 알파창조론은 무엇인가? = 알파창조론은 창세기 1장을 범위로 하고, 히브리어 원어를 텍스트로 삼았다. 창세기 1장 안에 알파창조론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고, 나머지는 불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모세의 설명을 구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저자인 모세는 그가 살았던 고대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으로 창조의 계시를 설명했다. 그래서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설명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알파창조론은 가장 큰 성과는 무엇인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탈피하여 과학적 사실과 일치하는 기독교 창조론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연구와 연재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현대과학의 사실과 모순되지 않게 하는 해석의 틀을 찾는 것이 어려운 과제였다. 성경과 과학이 충돌할 때 많은 현대인들은 과학을 따르고 성경을 배제한다. 이런 면에서 현대 과학적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 창조론을 제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동안의 ‘창조론’에 대한 문제는 무엇인가? =1920년대에 안식교회에서 시작한 창조과학의 전통을 청산할 필요성이 있다. 첫째, 창조론의 범위를 벗어난 주장이 들어 있다. 단일격변설은 노아홍수가 현재 지구의 지질을 형성했다는 주장인데, 홍수 지질학은 현대 지질학과 전혀 맞지 않으므로 현대인들이 수용하지 않는다. 둘째로 지구나이를 6천년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현대 물리학과 전혀 맞지 않는 주장으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수준이다.   ▲인간창조의 목적을 새롭게 해석했는데 설명해 달라. =창세기1:26, 28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간이 수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것이 창조목적이다. 지금의 코로나사태는 이러한 창조명령을 인간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창조론의 경쟁이론인 과학적 무신론에 대해 설명해 달라. =과학적 무신론은 진화론과 유물론의 결합이론이다. 이 이론을 과학적으로, 신학적으로 비판하고 반대하는 기독교적 운동의 필요하다. 생명의 기원과 종의 기원에서 창조론과 무신론은 대립한다. 생명의 기원에 있어서 생명이 물질에서 자연 발생하는 화학적 메커니즘이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또 종의 기원에서 생물이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이른바 ‘오메가창조론’을 구상하는데 이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로 계시했다. 알파창조론이 있으면 논리적으로 오메가 창조론이 있어야 한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의 창조계시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데, 신천지를 비롯한 여러 이단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여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절실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과학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과학적 지식을 갖춘 인재들을 길러내야 한다는 점이다. 과학과 자연에서 관심을 돌리게 되면 결국 진화론과 유물론이 과학을 점령하게 되고, 기독교는 점점 축소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는 과학적 지식을 아는 일에 힘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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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0-08-27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금세기 최고 복음주의 신학자이자 ‘현대판 청교도’로 불리던 캐나다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 (Regent College) 명예교수 제임스 인넬 패커(James Innell Packer, 1926-2020)가 지난 2020년 7월 17일(현지시간) 향년 93세로 별세했다. 패커는 영국 성공회 저교회파 개혁신학 전통(the low church Anglican and Reformed traditions)의 대표 신학자로 평가받는다. 패커는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1981),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와 함께 20세기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패커는 영국 성공회 소속 목회자로 안수받았으며 생애 후반부에는 캐나다에서 활동했다. 1952년부터 1979년까지 영국에서 27년 동안 교수 및 설교 사역을 했다. 1979년 캐나다 밴쿠버의 초교파 대학인 리젠트 칼리지로 옮겨가 교수 사역을 하였다. 그는 역사신학 및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의 수석 편집자로 25년간 섬기며, 문화적 비판 주제(topics of cultural critique)를 자주 다루면서 신학과 기독교적 삶이 분리된 현실에서 신학이 어떻게 신앙을 도울 수 있는지에 주목했다.   1996년 리젠트 칼리지에서 은퇴하고 명예교수로서 연구와 강의, 강연을 이어갔다. 연사로서의 패커의 유명세는 저자로서의 그의 모습에 필적했다. 패커의 전기 저자인 미국 희턴대 영문학 명예교수 라이켄(Leland Ryken)은 다음같이 패커의 청교도적 인물됨에 대하여 평가한다: “출판과 연설 두 영역에 있어서 패커는 청교도적 학자(a Puritan scholar)로서 유명했으나 또한 그는 그의 가르침이 일차적으로 미래의 목회자 교육을 목표로 하며 교회 위원회에 봉사하는 데 수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말한 헌신적 성직자(a dedicated churchman)였다.” 패커는 영국 출신으로 캐나다 밴쿠버의 리전트 칼리지의 초교파적 분위기에서 조직신학 및 역사신학 교수로서 "교육받은자, 개혁신앙가, 성공회교인, 복음주의자“(an educated, Reformed, Anglican, evangelical)라는 네 가지 특성으로 활동하였다. 이것은 그의 활동의 폭을 넓혔다.   I. 기독교 이후 시대를 향하여 정통적 복음주의 진리를 변호하는 저술활동   패커가 살았던 오늘날 시대는 유럽에 기독교 이후 시대가 도래하여 자유주의신학이 팽배(澎湃)해져서 자유주의자들의 영향력이 맹렬한 기세를 떨치던 시대다, 이처럼 ‘정통적인 복음주의’(orthodox evangelicalism)가 활력을 상실한 사상적으로 혼란한 시대적 상황에서 패커는 복음주의 전통을 열정적으로 변호하고 수호하기 위하여 수많은 강연과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며 자유주의 신학의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복음주의의 가치를 신학적으로 높이고 공고히 하는 사명을 다했다. 패커는 그의 93년 생애 중 70년을 저술 활동과 교수 사역에 힘썼다. 패커는 영국 성공회 안의 복음주의 그룹을 대변하며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 1898-1963)의 위상에 견주어지며 성공회에 복음주의적 영향을 미치기 위해 애썼고 세계 복음주의 운동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유산을 남겼다.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 속에서 무오한 성경의 권위를 지켰다. 패커는 복음주의 가치 수호에도 앞장서, 동성결혼에 찬성하던 캐나다 성공회(ACC)에서 탈퇴했으며, 자신의 성공회 주교 면허도 반납했다. 제임스 패커(J I Packer)는 1926년 7월 22일 영국 글로체스터셔(Gloucestershire) 북부 트위닝 마을에서 성공회 신앙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4년 옥스퍼드 코르푸스 크리스티 칼리지(Corpus Christi College)에 입학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하다, 신학으로 전공을 바꿔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1년 성공회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신학교수로 봉직했다. 학위를 하기 전 버밍험에 있는 하-본 히스 교회에서 부목사(Assistant Curate of Harborne Heath in Birmingham 1952–1954)로 봉직하였다. 1954년 옥스퍼드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브리스톨에 있는 틴델 홀(Tyndale Hall, Bristol)에서 전임 강사(조교수에 해당하는 Lecturer, 1955–1961)로 가르치기를 시작하고, 옥스포드에 세워진 복음주의자들의 연구센터인 라티머 하우스(Latimer House, Oxford)에서 사서(司書)(Libarian,1961–1962), 학감(Warden, 1962–1969)으로 봉직했다.   패커는 다시 브리스톨로 돌아가 틴데일 홀의 학장(Principal of Tyndale Hall, Bristol, 1970)으로 봉직하고, 틴데일 홀과 클리프톤 컬리지(Clifton College)와 달톤 하우스-세인트 마이클스(Dalton House-St Michael's) 등 세 컬리지가 합하여 구성된 틴델홀의 부학장(Associate Principal, 1971-1979)을 하면서, 영국 성공회 신부들을 교육하는 일을 하였다. 옥스포드의 라티머 하우스, 브리스톨의 틴데일 홀은 성공회 안에서 복음주의적인 목회자들을 키워내는 학교로 알려져 있다. 1979년부터는 캐나다 밴쿠버 리젠트 칼리지(Regent College)에서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을 가르쳤으며, 명예교수에 올랐다. D. A. 카슨 미국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 교수는 패커 별세 후 다음날 7월 18일 패커 교수가 남긴 유산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중요성, 청교도 신학의 재발견 등을 꼽았다.   패커는 전 세계적으로 100만권 이상 팔린 그의 대표작 『하나님을 아는 지식』(IVP);Knowing God/IVP (1973, reprinted 1993) 외에도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그 중에는 『근본주의와 하나님 말씀』,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Fundamentalism’ and the Word of God: Some Evangelical Principles(1958; reprinted 1984), 『제임스 패커의 복음전도란 무엇인가: 복음전도 인간의 일인가 하나님의 일인가』; 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1961 by Inter-Varsity Fellowship) (reprinted 1991), Our Lord's Understanding of the Law of God(1962), The Church of England and the Methodist Church: Ten Essays (1963), God Speaks To Man: Revelation and the Bible (1965),『제임스 패커의 절대진리:성경은 왜 우리 인생을 걸 만한 책인가?』(국제제자훈련원, 2019);God has Spoken(1965), 『인간을 아는 지식』; Knowing , Man (1979), 『성령을 아는 지식』; Keep in Step With the Spirit,『청교도 인물사』 (CLC, 2020); Puritan Portraits,(Christian Focus Publications, 2012) 『제임스 패커의 절대 진리』, (국제제자훈련원, 2012); 『기독교 기본진리』, (아바서원, 2012); Growing in Christ(Crossway, 1994), The Ten Commandments(1977), 『자유, 권위, 성경』, 엠마오; Freedom, Authority and Scripture[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82], 『성령을 아는 지식』(홍성사);Keep In Step With The Spirit: Finding Fullness In Our Walk With God (1984, reprinted 2005), 『청교도 사상』, CLC; Among God's Giants: Aspects of Puritan Christianity (1991), 『제임스 패커의 거룩의 재발견』(토기장이); Rediscovering Holiness(1992), A Quest for Godliness: The Puritan Vision of the Christian Life(1994), 『아름다운 노년』(디모데),, 『꼭 알아야 할 기독교 핵심 용어 17』, 『약함이 길이다』; Weakness Is the Way: Life with Christ Our Strength(2013),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의 인도』; Guard Us Guide Us : Divine Leading in Lifes Decision,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The Spirit Within You, 『복음에 뿌리를 내려라』; Grounded in the gospel, 『제임스 패커의 기도』(IVP), 『복음주의 신앙 선언』(공저), 『칭의의 여러 얼굴(공저)』(이레서원, 2016); Here We Stand: Justification by Faith Today,(Oak Hill College, 1986)등 300여권의 책과 사전 편집, 기고글 등이 있다. 그는 많은 저서를 통하여 청교도적 복음주의 신학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패커는 16-17세기 종교개혁과 청교도 신학의 강점들을 현대에 재적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II.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무오와 절대적·신적 권위 수호   패커는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 『근본주의와 성경의 권위』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신적 권위를 변호하였다. 성경 권위의 변호는 패커가 우리 시대 복음주의 교회와 신학에 기여한 가장 의미있는 공헌으로 평가된다.   그의 첫 번째 책인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1958년 초판)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역사적 개신교의 위상을 제시한 저서였다. 이 저서는 첫해에 2만 부가 팔렸으며 그 이후로 계속 인쇄되었다. 이 저서에서 패커는 당시 팽배하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복음주의의 답변과 변증을 시도하였다. 패커는 2000년 4월 제자 목사와의 인터뷰에서 이 책을 쓰게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 책의 영국 판에는 ‘근본주의’에 인용부호가 달려 있다. 왜냐하면 ‘근본주의’란 말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당시는 영국의 교회지도자들이 잇달아 다 양무리같이 그릇행하며 제 길로 가며 복음주의 신앙을 공격하기 시작한지 3년이 지난 1956년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영국의 근본주의자라 부르며 비판했었다. 나는 IVF 졸업생들을 위한 한 모임에서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요청받은 강의제목은 ”좁은 마음인가, 좁은 길인가?"(Narrow Mind or Narrow Way?)라는 것이었다...나는 그 제목에 만족했고,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답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강의를 듣고 좋았고, IVP에서는 내 강의를 작은 책으로 낼 수 있게 글로 써 달라고 요청했다....그것이 오늘날 존재하는 ‘근본주의와 하나님 말씀’이라는 내용이다. 그 책은 1958년에 출간되었다.”   패커는 이 저서에서 성경의 무오성을 확신있게 천명했으며 성경 말씀이 하나님 말씀으로서 고차원적 의미에서 진리임을 제시하였다. 근본주의란 용어는 좁은 의미에서 극우파적 기독교 관점으로 인식되고 있는 데 반하여 패커는 이 용어를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벗어나 기독교 진리의 근본 내지 핵심이라는 본질적 차원에서 신학적 유산의 공통점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성경에 대한 패커의 애초의 태도는 회의주의적이었다. 그는 성경을 단지 ‘다양한 종교적 잡동사니를 모아놓은 것’으로 보았기에 성경의 전반적인 윤곽 정도만 받아들일 뿐이었다. 이것은 그 당시 영국의 성공회 교육에서 얻어진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옥스퍼드 대 입학하고 회심한 후 6주가 지났을 때, 패커는 옥스포드 기독학생연합(Oxford Inter-Collegiate Christian Union: OICCU)의 토요일 저녁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여 초청 강사의 요한계시록 강해를 듣다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즉 성경이 인간의 가르침이거나, 하나님에 대한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이 가르치신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패커는 나중에 칼빈을 공부하면서 그가 말한 ‘성령의 내적 증거’가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를 이때 경험하였다. 칼빈이 전하고자 했던 뜻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권위의 독특성과 성경의 능력에 대해서 인식하도록 하려는 방법이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패커의 복음주의적 증거는 단지 이성적 합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인격적 체험에 기초한 것이다.   패커는 이 저서에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균형잡힌 성경 해석과 합리성과 역사적 맥락성에서 설득력있게 제시하였다. 패커의 제시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변호였으며, 이것은 평생의 열정이자 복음주의 교회에 대한 패커의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 남았다. 패커는 성경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견해를 강력하게 믿었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오래된 교리를 옹호했고, 성경의 확실성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패커는 영어 표준판 성경 작업의 편집장으로 봉사하면서 그 프로젝트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과로 여겼다.   패커는 이 저서에서 그가 의미한 ‘근본주의’(fundamentalism)란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믿는 것을 반대하면서 이들을 근본주의자라고 비판한 것에 대하여 복음주의를 변호하기 위하여 그의 첫번째 책을 썼던 것이라고 피력한다: “그 책의 주제는 두 가지 논쟁을 하나로 묶어준다. 두 가지 논쟁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선상에 있다. 궁극적으로 그 논쟁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관한 것이다. 최대한 간단히 말해서 ‘영국 근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성경의 영감과 권위는 기독교의 근본진리인데 근본주의를 비판한 사람들은 사실은 기독교 진리를 모르며 기독교 진리와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패커는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며 그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옹호하였다. 그는 성경을 아주 중요시면서 성경 외의 어떤 것도 우리 시대의 계시라고 하지 않고, 이 성경에 근거해 참으로 (그가 이 책의 앞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려고 애썼다.   패커의 복음주의적 정통주의 신학은 성경 무오와 권위에 대한 그의 확신 때문에 가능했다. 초창기에도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 그는 1978년에 미국의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성경 무오에 대한 복음주의적 입장을 천명하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시카고 선언(the 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에 서명하고, 선언서를 발표했으며, 그 의미를 설명하는 소책자를 내기도 하였다. 패커는 성경의 절대적, 신적 권위를 변증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정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성경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논의하였다.   III. 복음전도와 하나님 주권의 균형적 강조   패커는 1961년 두 번째 저서 『제임스 패커의 복음전도: 복음전도 인간의 일인가 하나님의 일인가』을 출간하였다. 이에 대하여 패커는 2000년 인터뷰에서 이 저서 집필의 배경을 다음같이 설명하고 있다:   " 『복음전도란 무엇인가』는 영국 IVF에서 두 번째 책으로 1961년에 출간되었다. 그것은 1959년에 한 강의를 기록한 것으로 영국 IVF연합예배에서 설교한 것이었다. 당시 기독학생연합회는 분열되어 있었다. 대학생들 전도하는데 복음증거 방법에 있어서 내부적으로 의견이 상이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들이 알게 된 것은 영국에서 복음전도를 할 때에 전통적인 방식인 예수를 영접하도록 촉구하고 상담받을 사람들에게 상담해주는 것이 리차드 뱁스터, 조지 알렌, 조나단 에드워즈 등 전통적 청교도들의 방법보다는 찰스 피니, D. L. 무디 등의 방법에 훨씬 더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체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할 것인지에 대해 논쟁했다. 이들은 이 두 가지 측면을 통합할 수 있는 내용으로 설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 설교를 책으로 낸 것이 『복음전도란 무엇인가』이었다.”   패커는 찰스 피니, D. L. 무디 등이 강조하는 복음증거와 리차드 백스터, 조나단 에드워즈가 강조하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모두 강조하고자 하였다: “논쟁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성경에서는 우리는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진리라는 것을 설득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본성으로는 아무도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거나 응답하지 못하고, 오직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역사하셔서 우리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변화된 심령이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패커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 안에서 복음 전도와 성령의 사역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두 가지 진리를 모두 받아들일 때 논쟁은 끝난다. 궁극적인 전도자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전도할 때 우리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 때, 그것은 우리의 복음전도에 도움과 격려가 된다. 사람을 회심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이 회심시키심을 알 때 사람들은 더욱 활발히, 더욱 열심히 더욱 확신있게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계속)  
    • 신학/선교
    2020-08-20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3
      여섯째 날(6),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과 그가 주신 계시   모세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וַיַּרְא אֱלֹהִים אֶת־כָּל־אֲשֶׁר עָשָׂה וְהִנֵּה־טֹוב מְאֹד)고 찬양하고, 마지막 후렴구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וַיְהִי־עֶרֶב וַיְהִי־בֹקֶר יֹום הַשִּׁשִּׁי׃ ף)고 서술했다(1:31). 모세가 서술했던 6일간의 창조 톨레도트는 이로써 끝났다. 필자는 모세의 창조 톨레도트를 바탕으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진행했던 연구 결과를 ‘알파 창조론’으로 명명하면서 다음 몇 가지를 주장한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과 요한에게 주신 계시를 바라보고자 한다.   1. 창조 톨레도트는 모세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에서 하나님이 태초에 진행하신 창조의 장면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것들을 그의 관점에 따라 서술한 것이다.   2. 모세의 서술적 관점은 그가 살았던 당시의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창조 톨레도트를 문자적으로 읽으면, 유대교에 전해진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수준의 이해를 벗어날 수 없다.   3.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교의 전통을 개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독교인은 창조 톨레도트를 비롯한 구약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그런 관점을 가진 기독교인은 구약성경을 결코 문자적으로 읽지 않는다.   4. 창조 톨레도트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현대 과학적 사실 사이에는 상위(相違)한 점이 전혀 없다. 그러나 모세의 관점으로 서술된 부분에는 상위한 점이 없지 않다. 따라서 현대 기독교인은 창조 톨레도트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모세의 서술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5. 기독교 창조론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은 그의 복을 누리면서 그의 창조목적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창조론은 창세기 1장의 범위를 벗어날 이유가 없다. 기독교 창조론을 아는 기독교인의 사명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지배하는 땅에서 선교하기 위해 과학적 무신론의 허구성을 반론하는 일도 수행해야 한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는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그 말씀은 유대교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이 했던 말(마3:2)과 똑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셉과 정혼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태어났다. 성장한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말씀하시기를 “그는 내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3:17)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십일을 금식하고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는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네게 주리라”고 유혹했다(마4:9). 마귀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그의 기독교 사역을 시작하심으로써 유대교와 기독교를 명확히 구분하셨다.   요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태초의 말씀이었고, 만물을 지으신 주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창조목적과 원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고 하신 말씀은 주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수행하여 마귀의 것이 된 천하만국을 주 하나님의 것으로 회복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최우선으로 수행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가 창조하시고 복을 주신 인간들이 마귀의 유혹에서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좌절되었고,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회개하고 마귀가 차지한 천하만국을 그리스도의 천국으로 회복하지 못한다면, 주 하나님은 그가 사도 바울과 요한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옛 하늘과 옛 땅을 불살라 버리실 것이다. 그때 주 하나님은 그의 창조목적을 알지도 못하고, ‘주여 주여’ 했던 쭉정이들을 같이 불사르실 것이다. 그때 주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만드시고, 그의 창조목적에 따라 살았던 알곡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곳에서 영생을 누리는 복을 허락하실 것이다.     
    • 신학/선교
    • 신학
    2020-08-18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2
      여섯째 날(5), 먹거리를 정해주신 하나님   하나님은 인간에게 원복음을 주신 후에 인간과 그가 창조하신 모든 동물에게 필요한 먹거리를 정해주셨다.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1:29)고 말씀하셨고, 인간 이외의 모든 동물에게는 “모든 푸른 풀”(כָּל־יֶרֶק עֵשֶׂב: 콜 에레크 에셰브)을 식물로 주셨다(1:30). 하나님이 ‘오클라’(אָכְלָה: 먹거리)를 정해주시니 인간과 각 동물은 그들의 먹거리를 찾아 먹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에 그가 창조하신 인간과 모든 동물의 생명 활동에 가장 필요한 에너지를 식물이 만든 유기물 섭취를 통해 획득하도록 섭리하셨다. 동물의 유기물 섭취 과정을 현대 생물학에서는 metabolism(신진대사, 물질대사 또는 대사)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이하 인간을 포함한다)의 물리적 구조는 약 70%의 물을 제외하면, 세 가지 생화학적 유기물 분자-아미노산, 탄수화물, 지질-와 극소량의 무기물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처음에 지구에는 무기물밖에 없었다. 생물이 살아가는 생태계는 유기물이 없으면 만들어질 수 없다. 하나님이 서둘러 식물계를 먼저 만드신 것도 광합성을 통하여 무기물을 유기물로 바꿔야 할 필요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식물의 몸체도 물론 유기물로 만들어져 있다. 초기 지구의 유기물은 대개 식물의 광합성 작용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처음에 생겨난 식물의 몸체는 하나님이 만드신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생물이 물질대사를 통해 생명활동에 필요한 영양소와 에너지를 얻는 형태를 보면, 식물은 무기물질을 섭취하여 광합성 작용으로 자기에게 필요한 고분자 화합물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독립영양체다. 그러나 동물은 섭취한 먹거리에서 고분자 화합물을 분해하여 저분자 화합물질로 바꿨다가 다시 자기에게 필요한 고분자 화합물로 바꾸는 종속영양체다. 물질대사 과정에는 이화작용(異化作用 catabolism)과 동화작용(同化作用 anabolism)이 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유기 화합물의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다.   이화작용은 먹거리에서 고분자 화합물을 섭취하면, 소화기관에서 분해하여 생명활동에 필요한 저분자 화합물인 영양소를 얻고, 찌꺼기는 다시 밖으로 배출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탄수화물, 지질, 단백질과 같은 큰 유기물 분자를 단당류, 지방산, 아미노산과 같은 작은 단위로 분해한다. 동화작용은 이화작용을 거쳐 획득한 저분자 화합물을 자기에게 필요한 단백질이나 핵산과 같은 고분자 화합물로 다시 바꾸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세포의 증식 등에 필요한 분자들을 합성하기 위해 복잡한 효소 반응이 일어난다. 식물의 광합성과 동물이 아미노산으로 단백질을 합성하여 자가 세포의 유지와 성장, 그리고 생명 활동에 필요한 유기물 분자를 제조하는 물질대사의 방법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각 생물의 생명 정보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각 생물에게 주신 생명 정보는 각 세포 안에 있는 DNA와 RNA에서 발현되고, 각 세포는 DNA를 복제하여 새 세포에 공급한다. 생명 정보는 그런 과정에서 물리적으로 생겨나는 DNA 변이를 수선하는 기능이 있으며, 자손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리보솜에 있는 RNA는 DNA의 지시에 따라 단백질을 만든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RNA 유전체만 가진 바이러스는 자체 내에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바이러스는 반드시 다른 생물의 세포에 침투해서 그 생물의 DNA에 역전사를 통해서만이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고, 자손을 증식시킬 수 있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각 생물의 생명 정보인 DNA 구조와 기능을 알게 되면, 생명 정보가 물질의 화학작용으로 저절로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적 무신론을 반박할 수 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모세 시대의 문자주의 수준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을 반론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수행하는 일도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 신학/선교
    • 신학
    2020-08-10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10. 보수주의적 개혁주의 신앙 사상: 세대주의적 견해 대신 개혁신학적 창세기 해석 수용   고봉은 복음주의적 개혁주의 신학의 노선으로 초교파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1948년 야간신학교인 대한신학교(현 안양 대학교)를 세워 “헌신 전도자 양성을 지속했다. 장로교단의 분열과정에서 독자 노선을 택하여 더 이상 주류 교단과 목회자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어 부득히 대신교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김치선 목사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혼란 가운데 1951년 5월 30일에 열렸던 총회신학교 이사회에서 교수로 결정되었다. 1961년 총회신학교를 떠나기까지 총신에서 구약학을 가르쳤다. 원용국교수는 “예과 학년 때는 에스겔서 강해였고, 본과 학년때는 소선지서 강해”였다고 회고하고 있다.(원용국, “김치선 목사와 나,” 「신학지평J 13 (2000), 3.). 현재 그의 강의 원고들이 남아 있는데 구약과 관련하여, 구약사 강의안, 예레미야서 강의안, 소선지서 강의안의 권이 남아 있고 출판된 『구약사기(舊約史記)』. (서울: 복음세계사, 1955)가 남아 있다.   고봉은 구약학 교수이면서도 「신학지남」이나 다른 학술지에 구약에 관련된 글을 전혀 기고하지 않았다. 그는 1954년에서부터 1960년까지 「신학지남」에 4편의 글을 기고하였는데,신약학과 조직신학에 속하는 글들이었다. 1954년부터 1955년에 걸쳐 “그리스도의 4초상(肖像)”,“기독교의 본질,” “기독교란 무엇인가?(설교)"를 계속적으로 발표하였고,1960년에 “복음의 진수에 대한 도전자들”이란 글을 기고하였다. 이 논문은 1960년도에 출판된 『복음의 진수』의 내용 요약과 도전자들을 첨부한 내용이었다. “그리스도의 4초상(肖像)”은 신약학 논문, 나머지 3논문들은 조직신학 논문이었다. 고봉은 1961년 총신을 떠난 후 대한신학교에서 보수적 정통개혁신학을 주도적 이념으로 가르쳤다.   고봉은 달라스 소재 복음주의신학교(달라스신학교의 옛 이름)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였고 모세오경에 대한 박사학위논문을 썼고 1935년 귀국 당시 복음주의신학교 등 미국 보수주의 신학교와 교회에서 지배한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하여 기독교 복음의 근본진리를 수호하는 보수주의적 개혁신학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의 완전 축자 영감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신체적 부활과 재림, 지옥의 실재성, 사탄과 귀신의 실재성 등 성경적 근본진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를 이해하고 수용하였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건과 인간 운명이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스코필드의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를 받아들이지 않고 개혁신학의 구속사 중심의 성경해석을 수용하였다. 고봉은 그의 저서 『구약사기』에서 구약성경을 세대주의적 7세대(무죄 세대, 양심 세대, 인생 정치의 세대, 약속의 세대, 율법의 세대, 은혜의 세대, 천년왕국 세대)로 구분하지 않고 구속사적으로 나눈다. 그것은 1) 원시시대(창 1-11 장) 2) 족장시대(창 12-13장) 3) 이스라엘 민국시대(출애굽14 장 -삼상장) 4) 왕국시대 (삼상8장, 역대하 성문서 선지서 대부분) 5) 무정부시대 이 시기는 다시 (1) 포로 시대 (2) 귀국 시대 (3) 중간 시대의 세 시기로 나누고 있다.   고봉은 한국 장로교 정통신학의 역사적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을 수용하였고 당시의 자유주의 사상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참가와 협력을 신앙의 타협과 동화라고 비판하였다. 고봉은 구약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도 스코필드의 세대주의 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독론적 구속사적 해석을 일관되게 하고 있다. 창세기 3장 15절을 원복음(최초의 은혜 언약이며 메시아 약속)으로 해석하고, 그리스도의 의로 믿음으로 구원 얻는 구속사적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인류 중에 한 가족을 하나님이 선택하사 당신이 우주에 주인이 되시며 구원자 되심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 가족으로 하여금 세계 만방과 만민을 구원하실 이는 오직 독일무이하신 삼위일체니 하나님뿐인 것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손을 통하여 구주되신 그리스도를 보내시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봉은 대한신학교에서는 구약학과 신약학과 조직신학을 강의하였는데, 그의 조직신학 강의 내용은 화란 개혁주의 출신의 미국 신학자 벌코프(Berkhof)와 답네(Dabney)의 미국 남북 장로교의 개혁신학에 일치한다. 고봉의 조직신학 총론은 3장에서 6장까지의 내용은 답네 총론 가운데 7장부터 12장까지와 상당히 겹치고있다. 특히 답네의 조직신학을 많이 참고한 것은 고봉이 미국 남장로교회가 세운 고베중앙신학교 졸업생이기 때문이다. 고봉의 신학서론은 벌코프 조직신학과 남장로교의 답네 의 조직신학 서론을 주로 이용하여 총론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고봉의 신학 사상은 근본주의 신학이라고 하기 보다는 개혁신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고봉은 벌코프와 답네의 신학을 우리 상황에 맞게 가져다 놓았다. 고봉의 부흥신학을 보면 부흥이란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의 부흥이라는 것을 피력하는 데서도 그의 부흥 신앙사상이 인본주의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 절대주권의 개혁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신학은 고등 비평의 역사비평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는 정통개혁신학이었다.   고봉은 함경도 출신이었으나 동향인 김재준, 송창근이 신정통주의 신학노선과는 달리 길선주, 박형룡, 박윤선으로 이어지는 정통 보수주의 신학을 견지하였다. 그는 성경과 신조의 관계에 있어서 ‘성경이 신조 규범성이 된다’는 정통 보수주의 사상을 천명하였다; 성경은 ‘규범을 주는 규범’(norma normans)이요 신조는 ‘규범화된 규범’(norma narmata)이다. 고봉은 신학과 신조의 상호보완을 언급하였다: “신학은 신조를 무시할 수 없고 신조는 신학을 갖지 아니할 수 없다. 이 둘이 완전히 서 있을 때 기독교는 생명이 있고, 또한 신학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고봉은 박형룡과 친분도 있었다. 그가 성공적으로 목회하는 중 박형룡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에서 박형룡은, 고봉에게 자신이 일본으로 건너 올 것이니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1938년 일본이 신사참배 강요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고봉은 이러한 박해를 피하여 중국으로 피신하였다가 그 곳보다는 일본이 더욱 안전하다는 소문을 듣고 일본으로 피신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고봉은 자신이 사는 집에서 몇 집 건너에 집을 마련하고 그곳으로 박형룡의 가정을 안내했다. 이 때로부터 고봉은 일본을 떠나기 전까지 박형룡과 한 집안 식구처럼 가까이 지냈다. 고봉이 동경신숙중앙교회애서 메구로 교회의 사역지를 옮겼을 때 박형룡도 고봉이 목회하는 메구로 교회에 출석하였다.   11. 복음만 전파하는 초교파의 제3의 장로교 신학 사상: 보수적 개혁신학   1948년 8월 고봉의 주도(主導)로 '대한신학교(現, 안양대학교)'가 '장로교 야간 신학교'라는 이름으로 남대문 교회당에서 개교하게 되었다. 초대 교장에 평양여자신학교 교장을 지낸 윤필성 목사가 취임하였다. 신학교 설립은 300만부흥전도운동의 일환이었으며,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대한신학교의 교훈은 ‘주님께 충성, 타인에게 겸손, 자신에게 진실’이었다.”   이듬해인 1949년 1월 서울 서소문구(현 중앙일보사 근처)에 건물을 얻어 신학교를 이전한 후 고봉 자신이 친히 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그 다음 해인 1950년 1월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대한신학교(大韓神學校)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피난 시절 대한신학교는 부산과 제주에 분교를 설립하고 계속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분교장으로는 윤필성, 이환수 목사가 각기 임명되었고 얼마 후 부산중앙교회의 노진현 목사가 부산분교의 분교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1952년 9월에 문교부로부터 4년제 신학교 인가를 받게 되자 고봉은 인가된 대한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1953년 7월에 휴전협정이 이루어지자 1953년 9월에는 부산분교와 제주분교를 서울로 복귀시켰다. 1961년 〈대한예수교 성경장로회〉 (현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총회)를 조직하고 대신교단의 초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62년 서울중앙교회(현 청파중앙교회) 목사로 시무하고 1965년에는 대한신학교명예교장이 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가 남산의 대한신학교 땅을 빼앗아 그 자리에 KBS TV 방송국, 중앙정보부 건물을 지어버린 것이다. 학교를 빼앗긴 고봉은 난감해하다가 반(反)WCC단체인 ICCC(국제기독교연합)의 칼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총재를 만나 한국에서 성경장로회를 창립한다는 조건으로 용산구에서 신학교 건물을 매입했다. 이후 ICCC와의 계약 내용에 따라 1961년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를 설립하고 초대총회장에 오르게 된다.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는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이하 예장대신)으로 개칭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가 극심한 분립 과정을 겪는 동안, 예장 대신은 순전히 김치선 목사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단이라 예장 계열 교단 중 분립 과정과 상관 없는 자생 교단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1970년 성경장로회가 탈퇴하여 교단이 없어지려 한 위기를 겪는다. 그 후 고봉은 더 이상 외국의 선교비를 받지 않고, 한국 내의 자본으로 대한신학교 중흥의 길을 나서게 되었는데, ‘한국인에 의해, 한국인의 돈’으로 대한신학교 건물을 세우려고 했다. 나름 ‘한국인의 힘으로 세워진 자생교단’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우게 된다. 대신 증경총회장과 현 안양대학교(구대한신학대학교) 학장 등을 역임한 이의완 목사는 1975-76년도에는 당시 합동 통합으로만 분리되는 한국교회 현실에서 순수 대신 출신 후학인 고창곤(함양), 강경원(가례), 이재호 목사(하동), 이병부(부산), 이재봉 목사(남해 상주) 등으로 지방으로 직접 파송해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그는 그때 30여 개 교회에 선교비를 개인적으로 지원해가면서 학교와 교단을 지켜온 분이다. 교단 설립자는 김치선 목사이고 이의완 목사는 대신교단의 이름이 지금까지 있게 한 대신교단을 키워주신 교단지도자로 평가받는다(대신총회, 김치선 목사가 세웠고, 이의완 목사 지키고, 성장 디딤돌. 신현기 목사 “대신교단 30여개 남았을때, 매달 백불씩 후원으로 지켜낸 산증인”, 뉴스에이).   고봉이 세운 대한신학교는 다음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처음부터 야간신학교로 출발하였다. 북에서 내려 온 사람들 중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주의 일에 헌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낮에 일하지 않고는 생계를 이을 길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고봉은 이들이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도록 하기 위하여 대한신학교를 야간 신학교로 운영하였던 것이다. 둘째, 이 신학교는 처음부터 지적인 추구보다는, 복음 전도를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라는 점이다. 학교에서 가르쳤던 과목들은 고차원적인 학문성을 추구하는 과목보다는 복음전도와 성도 양육을 위하여 실질적으로 필요한 과목들이었다. 고차원적인 신학 교육보다는 순수한 성경공부와 전도 운동을 위주로 교과가 편성되었는데, 거기에는 심지어 영농법과 침술법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셋째, 이 학교가 초교파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학교의 강사진은 초기부터 장로교인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감리교회의 변홍규 박사를 비롯한 다수의 타교단 출신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초교파적인 이유로는 3가지를 들 수 있다. ① 대한신학교가 300만 구령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학교였다. 3천만의 십일조 300만 구령운동은 실로 거국적이었고, 당연히 초교파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② 고봉이 열정적인 복음운동가였다. 유일한 관심사는 신학의 성향보다는 민족의 복음화에 있었다. 복음전도를 위하여 누구든지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초교파적이었던 것이다 ③ 당시 초교파는 복음주의와 동일시되는 때였다. 아직 자유주의 신학이 크게 부각 되지 아니했으므로 교파적으로 복잡하지 아니하였다. 장로교가 합동과 통합으로 나누어졌을 때 그는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제3의 길을 걸었다. 이 제3의 길은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이었다. 고봉이 세운 대신 교단과 대한신학교는 오늘날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을 대변하는 신학의 전당과 교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맺음말   고봉은 오늘날 신학계와 교계에 큰 지식의 강단신학자로서 보다는 개혁신학 정신을 설교한 목회자와 교회지도자로서 복음주의적 개혁신학의 실천, 회개와 논물과 기도를 그의 목회와 신학교 강의에서 하나의 화신(化身)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한국교회에서 강단 신학자라기 보다는 눈물의 선지자요 한국의 예레미아로 더 각인된 것이다.   고봉은 300만구령운동을 지속하면서 그는 신학도들에게 "2만 8,000여 우물을 파는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오늘 여러분이나 내가 할 일은 이 우물 파는 사업이다"라고 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설교했다. 민족복음화를 필생의 과제로 삼고 ‘300만 구령운동, 2만 8,000 동네에 우물을 파라’는 그의 열정에서 그의 복음주의적인 개혁신학이 가장 목회실천적인 부흥신학적으로 구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 모든 것 다 준다 해도 나는 30명 양(羊)을 바꿀 수 없다. 나는 평생 선한 목자 되기 원한다.”라는 그의 고백처럼 고봉은 참으로 목자의 삶을 살았다. 그의 묘비에 쓰여진 성구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였다”(히 11:38)가 그의 신앙적 열정과 헌신을 말해준다. 고봉의 확고한 삶의 중심에는 예수. 성경. 교회가 있었다. 그에게는 눈물의 기도와 열심, 겸손, 사랑이 따라다녔다. 고봉은 강단 신학자라기 보다는 민족 복음화를 최초로 제창한 기독교 선구자요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교단)과 대신신학교를 세운 개혁신학정신의 지주로 자리매김한다.   이은선이 고봉의 예레미아 성경주석에 대한 훌륭한 논문에서 밝힌바 같이 그의 구약학 강의안은 성경의 완전 영감성과 무오성을 믿는 신학적 태도에서 만이 아니라 학문적 우수성에 있어서 귀하게 평가받고 있다. 이제 복음주의적 개혁신학의 구약학자들이 고봉의 구약학자로서의 위상과 공헌을 밝혀내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끝)   ◇고봉이 설립한 대한신학교의 명맥을 잇고 있는 대신총회신학연구원(학장=이종전박사)   대신총회신학연구원 http://daeshints.org/  정통신학 이어가는 대신총회신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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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0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1
      여섯째날(4): 원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   모세는 1:28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바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וַיְבָרֶךְ אֹתָם אֱלֹהִים),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וַיְבָרֶךְ אֹתָוַיֹּאמֶר לָהֶם אֱלֹהִים פְּרוּ וּרְבוּ וּמִלְאוּ אֶת־הָאָרֶץ וְכִבְשֻׁהָ וּרְדוּ בִּדְגַת הַיָּם וּבְעֹוף הַשָּׁמַיִם וּבְכָל־חַיָּה הָרֹמֶשֶׂת עַל־הָאָרֶץ׃)고 말씀하셨다고 서술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처음으로 인간에게 오복을 주신 말씀이 원복음이다. 오복(五福) 중의 삼복(三福)은 다섯째 날 창조된 어류와 생물에게도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추가해서 인간에게만 주신 두 가지 복-① 땅을 정복하라 ②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은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목적에서 밝혔던 것과 같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첫 말씀으로 들려주신 원복음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인간에게 복으로 바꿔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원복음을 누리는 권리와 창조목적을 이행해야 하는 의무는 남자와 여자의 자손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인간에게 오복을 누리는 권리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행하는 의무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창조질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원복음으로 이 땅에 그의 창조의 질서를 세우시는 섭리를 시작하셨다. 원복음은 그 조건을 이행하는 인간에게는 복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죄의 원천이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죄는 그의 창조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원복음은 권리와 의무라는 양면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의 복을 공짜로 누릴 수 있도록 섭리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행하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 앞에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길로 가느냐, 아니면 죄악의 길로 가느냐는 선택의 기회가 항상 열려 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창조 톨레도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이 선택하여 창조를 보고 기록하게 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창조 톨레도트가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전부 서술한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 과정에서 있었던 장면들을 몇 개 골라서 모세에게 보여주셨고, 모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장면들만을 보고 창조 톨레도트를 서술했다. 그러므로 모세가 본 장면들 사이에 걸린 시간을 인간의 지식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쓸데없는 오류를 더할 뿐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고, 창조 톨레도트를 기록하게 하신 목적은 그가 창조주이심을 인간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다.   창조 톨레도트를 읽어보면 시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알고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환상으로 보고 듣고 기록한 모세의 서술 사이에 이해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이 모세의 창조 톨레도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 3,500년이라는 시간의 다리를 건너가서 모세 시대의 히브리어 용어의 개념과 모세의 서술 구조를 현대인의 과학적 눈으로 조명해봐야 한다. 모세가 창조 톨레도트를 기록할 당시 히브리인과 히브리어에는 현대인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과 용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창조 톨레도트에서 빛과 흑암, 궁창(라키아), 광명체(메오르트), 생물의 종류(민), 형상(찰렘)과 모양(데무트), 복(바라크) 등의 명사와 동사의 시제, 그리고 모세의 서술적 관점은 정확히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이해가 없는 기독교인이라면, 그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나 유대교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적 관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관점에서 창조 톨레도트를 비롯해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만이 주 하나님의 창조와 그가 주신 원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면서 과학적 무신론자들에게 반론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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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4
  • 「존 웨슬리 저널」 완역· 출판 화제
    ◇이번 프로젝트를 기회하고 추진한 김영선박사는 이번 출간은 ‘교회사적 사건’이라고 자평했다. 55년간 웨슬리가 기록한 저널을 23명의 학자들이 번역 출간 웨슬리의 신학과 신앙을 연구하는 기초자료로 활용가치 높아   세계교회사의 영적 거장이자 감리교의 창설자인 존 웨슬리의 저작 「존 웨슬리 저널」이 우리말로 번역돼 출판됐다.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추진해 소중한 결실을 맺은 김영선박사(협성대 명예교수.사진)는 “한국을 대표하는 웨슬리안 신학자 뿐 아니라 칼빈주의 학자들도 이번 번역작업에 참여했다”며, “세계의 영적 거장 웨슬리의 생생한 목소리와 생각을 직접 듣는 다는 면에서 이번 출판은 가히 한국교회사의 기념비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이번 사건은 2012년 영국에서 시작됐다. 김영선박사는 당시 ‘웨슬리 생애 탐구’의 한 과정으로 학생들과 함께 영국을 방문했고, 브리스톨에 있는 뉴룸(New Room)에서 어떤 고서를 발견했다. 순간 김박사는 약간의 홍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1909 느헤미야 커닉이 8권으로 편집한 「The Journal of John Wesley」었다. 김박사는 즉시 이 책을 구입하고 귀국하여 대학원생들과 함께 읽는 가운데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웨슬리의 이야기들을 발견하고 이 저널의 번역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번역작업에 돌입했다. 웨슬리신학연구소를 중심으로 4년에 걸쳐 23명의 학자들에 의해 번역돼 마침내 출간을 하게 된 것이다.   김박사는 “웨슬리 신학이 웨슬리 설교에 근간을 두고 있다면, 웨슬리 목회는 웨슬리 저널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며, “대부분의 웨슬리 신학은 주로 웨슬리의 설교에 의존하여 연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 웨슬리 신학에 대한 관심이 웨슬리 저널 연구로 옮겨가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면에서 본 작품은 웨슬리의 신학을 그 자신의 직접적인 진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저널은 웨슬리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발전적 성찰은 물론 미국 조지아를 비롯하여 잉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 등지의 여행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풍물과 문화 등등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복음운동의 실태와 여정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김박사는 “설교하는 장소는 물론 설교의 본문과 제목 그리고 청중들의 규모와 그들의 상태와 반응, 또한 집회를 방해하려고 몰려온 폭도들이 청중을 향해 오물 등을 던지고, 온갖 저주와 욕설과 함께 막대기로 공격하는 등의 온갖 폭행과 폭력이 난무할 때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보호하셨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였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외에도 집회 시 나타난 다양한 영적 현상, 소송을 당했을 때 겪은 사건, 간교한 사기꾼들이 목회자 모습으로 설교하고 돈을 거두어 가는 사건 등도 자세히 나온다.   김박사는 웨슬리 저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배우게 된다고 설명했다. 첫째, 웨슬리 신학은 그의 일생을 통해 발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박사는 “웨슬리는 다양한 사건과 만남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수립하였으며, 또한 성결을 목표로 하는 신학에 도달하기까지 웨슬리의 간절했던 고민과 염려 그리고 기도 등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둘째, 저널을 통해 메소디스트의 부흥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김박사는 “웨슬리가 방문하고 설교하는 곳에서 나타나는 회심, 경련, 쓰러짐, 신유 등과 같은 많은 영적 현상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전했다. 셋째, 복음운동을 통해 영국 사회가 어떻게 변화되고 개혁되어 가는지 살펴볼 수 있다. 넷째, 웨슬리의 저널을 통해 18세기의 영국의 삶의 정황을 볼 수 있다.   김박사는 “이 사업에 관심을 주시고 후원으로 동력을 불어넣어 주신 김길수목사, 김인환목사, 노윤식목사, 윤보환목사, 이승우목사, 어형로목사, 하근수목사께 감사드린다. 또한 23명의 번역자들은 물론 간행위원장을 맡으신 김선도감독, 감수위원장을 맡으신 조종남박사를 비롯하여 여러 모양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특히 웨슬리 저널 번역 사업에 소명을 가지시고 출판을 위해 큰 힘이 되어주신 일산광림교회 박동찬목사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웨슬리 저널 출판을 결심하시고 많은 수고와 협조를 아끼지 아니한 신앙과지성사의 대표 최병천 장로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 신학/선교
    • 신학
    2020-08-03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7. 목회 설교를 병행한 실천 신앙의 신학자   고봉은 일제하에서는 일본 동경에서 1930년-1944년 엘리트 목사로서 한인교회를 성공적으로 목회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국내에서 교회와 신자를 대상으로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도달한 상황이라 자신도 우상숭배에 대한 강요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곧 바로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양아버지 영재형 선교사가 시무하고 있는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고봉은 고베에서 산호중앙교회(神戶中央敎會)를 개척하여 일본 교민들을 위한 목회활동을 시작하였다. 고봉은 일본 고베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영재형 선교사와 함께 차별과 냉대를 받는 교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31세 나이로 고배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일본에서 소외받고 무시받으며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던 교민들이 교회에 몰려 오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의 압제 속에 있는 모국이 멀지 않아 하나님의 역사로 해방될 것이라고 기독교 신앙을 민족 신앙으로 설교하였다. 고봉의 개척교회에 신자들이 날로 늘어나고 지역에서 교회 평판이 좋았다. 그는 1939년 40세의 나이로 동경의 대형 한인교회인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의 청빙을 받아 새로운 목회환경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고봉은 신주쿠중앙교회에서 영감으로 준비된 설교와 뜨거운 눈물의 기도로 청교도적 분위기로 교회를 이끌었다. 이 교회는 처음에는 작은 교회였으나 미국 유학갔다 온 신학박사가 목사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몰려와서 일본 전역에서 한인교회로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신주쿠중앙교회는 일본 전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가 되었고 조선인 유학생만 2백명 모이는 조선인교회로서는 가장 큰 교회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었다. 이곳 동경신주쿠중앙교회 목회에서 고봉은 학문과 신앙이 역동적으로 결합된 목회적 전성기요 그의 생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안양대학교 50년사』, 안양대학교 출판부, 1998, 56). 그러나 이곳에서 일본에서의 목회 사역의 한계를 느낀다. 조국이 아닌 이국에서의 목회는 영원한 일자리가 아니고 일제에 압제당한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봉은 단지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 만을 돌본 것이 아니라 양아버지인 영재형 선교사와 함께 재일교포의 선교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재일동포를 위한 순회목사 자격으로 일본의 쓰시바 · 큐슈 · 훗카이도오 · 가라후도 등지의 교회들을 돌봤으며, 1939년 동경의 잇찌(一致)신학교 강사를 겸했다.   고봉은 동경 신주쿠중앙교회 목회에서 두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는 내선일치 명목으로 일본어로 설교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둘째는 고봉의 절대적인 인기를 질투하여 담임목사직을 강탈하려는 자들이 생긴 것이다 조국 사랑을 강조하였던 고봉은 일본인들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 어느 날 난데없이 들이닥친 일본 경찰들에 의하여 연행되어 신주쿠(新宿)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사상범으로 구속되어 그곳에서 수개월이 지나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가 있었다. 이 일 후 고봉은 동경신주쿠중앙교회에서의 사역에 대한 커다란 회의와 실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고봉은 자기 자리를 탐내는 자들에게 교회를 양보하고 동경신숙중앙교회에 있으면서 개척하였던 메구로(目黑)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게 된다. 다음 해인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령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 즉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었다. 1942년 8월 솔로몬 군도가 미군에 의하여 공략된 후 전세(戰勢)가 일본 쪽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고봉은 해방의 날이 가까웠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는 1944년 3월 일본에서의 사역을 정리하고 귀국하였는데 당시 그는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하자마자 당시에는 서울역 앞에 위치하여 한국의 관문이었던 남대문교회의 청빙을 받아 6대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그는 이 교회에 부임한 뒤부터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1944년 당신의 상황에서는 무척이나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교회들에서는 새벽기도회를 쉬고 있었는데 고봉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서울에서는 처음 시작된 새벽기도회였다. 이처럼 열심 있는 기도와 은혜로운 설교로 인하여 남대문교회는 점점 그 교세가 확장되었고 마침내 남한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남대문교회에서의 그의 눈물 목회는 그를 한국의 예레미아 혹은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릴만큼 그의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감동적으로 나타났다.(김치선 저, 최선 역, 『김치선 박사의 모세와 오경』(선교횃불, 2015), 297) 그는 신학자로서 목회사역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목회 설교를 병행하여 한평생 목회 사역에 동반되는 설교를 놓지 않았다. 그의 설교 특징은 18세기 영국 뉴잉글랜드의 개혁신앙의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통한 부흥, 성령의 비상한 역사를 통한 교회의 회개와 갱신, 성도의 삶의 변화를 강조하였다.   김명혁은 그가 고봉의 설교에서 받은 은혜를 간증하고 있다: “서울로 올라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김치선 목사님께서 담임하시던 창동교회(후에 대창교회로 개명)에 다녔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어디든지 쫓아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는데 서울의 감각산과 관악산은 물론 대구의 주암산까지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김명혁, “추천사: 한국교회에서 다시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와 같은 영적 거목이 나오길 간절히 기도하며,” in: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12.).   8. 자유 민주주의 사상   고봉이 전개한 3백만명 전도운동은 큰 진전을 보았는데 그에 의하여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 손양원 목사를 비롯한 70여명 이상의 목사가 참여하는 3백만명 부흥전도회가 결성되었으며, 전국 2만 8천 동네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70여명의 목사가 선교목사로 전국에 파송되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다. 복음은 반공 및 자유 사상으로 무장되어 파송 받은 선교목사들은 실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들은 공산 게릴라들의 잦은 출몰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지역까지도 거침없이 가서 전도를 하였다. 그러던 중 몇몇 전도자들은 공산 게릴라들에 의하여 목숨을 잃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사건은 공산당은 나라에 위협이 된다는 사상을 각인하였다.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한 김구(金九)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에 출석하기 위해서 비서진들에게 한국 최고의 목사를 알아보라고 했는데 비서진은 남대문교회 김치선 목사를 추천했다. 이렇게 해서 김구 가족은 남대문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다. 김구는 고봉의 예레미아와 같은 눈물의 설교에 운혜를 받았다. 김구는 1주일에 한번 고봉을 경고장으로 초청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예배를 드렸다. 김구는 매일 남대문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고봉은 남대문교회에서 김구를 만나 민족복음화운동을 함에 있어서 해방 직후 이념의 대결이 심했던 시대에 명백하게 자유민주주의 로선을 택했다. 김구는 고봉에게 정치에 입문할 것을 종용했으나 자신은 목회자라고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한국은 1920년대 소련 볼세비키 혁명에 영향을 받은 이동휘 계열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침투되었다. 이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장악하고자 했으나 자유 민주주의 지도자 김구의 지도력에 의하여 제어되었다. 해방 이후 이들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지령을 받으면서 남한에 인민공화국을 세우고자 하였다. 따라서 고봉은 공산주의를 막는 일이 한국을 살리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고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남한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복음과 아울러 자유민주주의를 천명하면서 민족복음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고봉은 통일 방식에 따른 김구와 이승만의 갈등에 의하여 어려움도 겪었다. 김구는 아들 김신(金信)의 결혼식 때에도 그 주례를 고봉에게 부탁하였다. 이러한 김구와의 각별한 관계 때문에 이승만 쪽에서는 언제나 고봉을 요주의 인물로 설정하고 그를 감시하였다. 심지어 한 번은 형사들이 새벽 한 시에 고봉 집에 들이 닥쳐서 그를 인천구치소로 연행하였다가 풀어준 일도 있었다. 이처럼 조국의 광복과 그로 인한 정치적인 대립은 고봉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봉이 6.25 전쟁시 교인들을 피난시키지 않고 먼저 자신이 피난했다는 사실을 들어 그가 남대문교회 사임의 이유로 보고 비난하기도 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봉이 먼저 피난한 것은 그가 투철한 반공사상과 이북출신으로 공산주의의 잔혹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 그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엘리트 목사였기 때문에 공산당에게 잡히면 처형 대상 1호나 포섭 이용 대상 1호였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반공주의자들은 즉결로 처형했고 이용가치가 있는 자들은 사상전향을 미끼로 공산당 선전에 이용했다. 공산당이 1950년 6월 서울로 진군했을 때 친북 사상을 가진 한상기 장로는 고봉에게 기독교연맹 가입을 권유했다고 한다: “목사님 교회로 갑시다. 북에서 '기독교 연맹'이 내려왔는데 교회만은 자기들의 지배하에 예배 보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기별이 왔습니다. 목사님들을 해하지 않겠답니다. 그러니 도망 다니시지 말고 서울로 갑시다." 한상기 장로의 말에 대하여 김치선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안됩니다. 내가 내려가면 반드시 잡히게되고, 기독교연맹에 가입하게 되니 그렇게 되면 나는 또 한 번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됩니다. 지금 비상시에 잡힐만한 사람들은, 때를 기다리고 숨어 있어야 합니다. 나는 기독교연맹에 가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 동조하여 공산당이 될 수가 없습니다."(김의선, 고봉 김치선 목사의 생애, 金致善, 1899-1968, http://blog.daum.net/rfcdrfcd/15974672). 이에 대해서 한상기 장로는 다시 한 번 서울로 내려갈 것을 청했다: “목사님, 사태는 다 기울어졌습니다. 이제 한 주일만 지나면 적화통일이 됩니다. 우리나라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수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이제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어서 교회로 갑시다." 그러나 고봉의 태도는 강경했다: “아닙니다. 나는 끝가지 숨어 있다가 잡히면 순교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자 한상기 장로는 하는 수 없이 산을 내려갔다고 한다. 고봉은 공산주의의 실체와 기독교 연맹의 역할을 알고 있었고 그가 서울로 내려가서 기독교 연맹에 가입하였다면 그는 그의 말처럼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고봉은 몸을 피하여 무사히 전란(戰亂)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9. 회개를 강조한 개혁파 부흥 신앙 사상   고봉은 청교도 개혁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와 19세기 구학파를 좇아서 부흥운동을 추구하였다. 고봉의 신앙 사상에서 부흥 신앙이 중요하다. 그의 부흥운동은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역사를 인정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개 설교가 그 시대의 인본주의 사조에 맞서서 첫 번째 대각성운동(first great awakening movement)을 일으킨 것처럼 고봉 역시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한 인간의 철저한 회개를 강조한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죄인이 회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인간 삶의 본질적인 변화, 성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일제 신사참배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하였다. 1952년 4월 18일 대구중앙교회에서 “전쟁 중의 부흥”에서 “오늘 여러분 나부터 더러운 일본 우상에게 절하던 자입니다.” 1961년 8월 6일 인천교회에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됨이로다“라는 설교에서 자신의 신사참배를 고백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아버지를 생각지 않고 미소가라바이에게 참배할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나이까?...” 1962년 “고멜을 보라”라는 설교에서 신사참배 죄를 고백했다: “...나도 고멜과 같이 내 남편 주님을 버리고 일본 신사에 가서 그것들과 음행을 범하였습니다.”(김치선, “고멜을 보라,”(호 3장), 『김치선 박사의 설교모음집』(II), 211-212.)   고봉은 1952년 7월 10일 계성중학교 채플에서 행한 “한국의 장래”라는 설교에서 한국의 장래는 하나님이 주실 부흥운동이라고 하였다. 부흥운동이란 첫째 회개운동, 둘째, 기도, 셋째 하나님 말씀 순종, 넷째, 열심히 전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봉은 진정한 부흥이란 회개와 갱신을 통한 회복이라고 보았다. 고봉은 참된 부흥은 인간의 프로그램과 인간의 열심있는 기도와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참된 부흥은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땅 아래로 일방적으로 임하는 신령한 사건이다.   한국전쟁 후 고봉이 남대문교회로 돌아가지 못하고 창동교회를 개척했을 때 미국 소재 순복음교단은 한국에 교단을 창립하고자 열정적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고봉에게 접근하여 순복음 교단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고봉은 이를 거절하고 장로교 전통의 회개와 기도와 말씀 실천을 통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에서도 개혁신앙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고봉의 신앙 사상을 알 수 있다.(계속)  
    • 신학/선교
    • 신학
    2020-08-03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0
      여섯째 날(3),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손들   모세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계획(1:26)에서 선포하신 인간과 실제 창조된 인간은 다르다. 그런 사실은 1:26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계획에서 말씀하신 ‘모양대로’가 창조된 인간을 서술한 1:27에서는 빠졌다는 점에서 드러났다. 그 대신에 창조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바뀌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의 ‘키데무테누(모양대로)’를 반영하지 아니하셨고, 하나님의 ‘형상대로’(뻬첼레모) 남자와 여자를 나눠 창조하셨다.   히브리어 사전과 성경의 용례를 보면, ‘형상’(첼렘)은 겉모양 또는 우상 등을, ‘모양’(데무트)은 원형을 닮은 것듣을 표현하는 말로 쓰였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남성적이고 인간에게 명령하시는 분이시다. 반면에 하나님에게 여성적인 면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데무트’를 주지 않으셨는가? 인간은 그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판단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무트’의 결여는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데무트’의 결여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의 정체성이다. 모세에 의하면 인간 ‘아담’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그들’이 온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예정하셨다. 여기서 3인칭 복수 대명사 ‘그들’은 처음 창조된 남자와 여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까지도 포괄하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아는 자들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위해 창조하신 인간과 그 자손들의 역사적 행적에서 발견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왜냐 한다면 현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각종 생물과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들의 DNA에 각각의 생명정보를 써놓으셨고, 그 생명정보가 자손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정보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게 가장 큰 죄악이 된다.   모세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이 관영함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6:5)임에 대해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서술했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부정하고 과학적 무신론을 추종하는 자들은 현실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무시하고, 죄악에 빠져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모세가 1:27에서 하나님이 ‘데무트’를 빼고, ‘첼렘’만으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나눠 창조하셨다고 서술한 것을 읽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DNA에 ‘데무트’의 결여가 죄악의 본성으로 작용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된다.   DNA에 담긴 생명정보가 생물의 종류마다 다르고, 그것이 그대로 자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이 되어 있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는 물론, 그 자손들도 ‘데무트’가 결여된 DNA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그의 DNA에 ‘데무트’가 결여된 탓으로 죄악의 본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수행하는 것은 인간의 필연적인 숙명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무시하는 것은 죄악이다. ◇DNA에 담긴 생명정보는 생물마다 다르다   인간의 자손들이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은 그들을 이끌어 하나님 나라에 살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오히려 정죄하고 살해한 자들이다. 그들의 자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이 등장했고, 현대사회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현대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하는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현대 기독교인이 그런 사회를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맞게 되돌리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죄악을 가리려는 자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외식하는 자이다. 그런 자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 신학/선교
    • 신학
    2020-07-28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19
      ‘아담’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하나님   모세는 하나님이 창조의 마지막에 인간 ‘아담’을 만드시는 모습을 매우 극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 창조에 대하여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יֹּאמֶר אֱלֹהִים נַעֲשֶׂה אָדָם בְּצַלְמֵנוּ כִּדְמוּתֵנוּ וְיִרְדּוּ בִדְגַת הַיָּם וּבְעֹוף הַשָּׁמַיִם וּבַבְּהֵמָה וּבְכָל־הָאָרֶץ וּבְכָל־הָרֶמֶשׂ הָרֹמֵשׂ עַל־הָאָרֶץ׃)고 선포하셨다(1:26).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이처럼 인간을 특별하게 창조하시고, 땅과 그 안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목적과 권한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창조 톨레도트에서 인간 창조에 관한 서술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엘로힘’은 복수 명사이므로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말이나, 단수 동사를 써서 단수로 표현하는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한글성경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번역한 것에서도 보듯이, 하나님은 자신을 1인칭 복수 대명사로 표현하시고, ‘나아세’(נַעֲשֶׂה: ‘우리가...만들고’)라는 복수 동사를 쓰셨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를 줄여서 직역해보면, ‘우리가 우리들의 형상과 우리들의 모양대로 사람(단수)을 만든다. 그리고 그들(사람의 복수)이 땅과 생물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구조를 보면, ‘나아세’ 동사의 목적어 사람(인간, ‘아담’)은 뒤에 나오는 ‘웨이레뚜’(וְיִרְדּו: 다스린다) 동사의 주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만든다’의 목적어인 ‘아담’(사람)은 단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이 주어가 되는 ‘다스린다’(웨이레뚜)는 동사는 복수형을 쓰셨다. 그렇게 되면 ‘아담’이 창조되는 과정에서 단수에서 갑자기 복수로 바뀌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의문에 대해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וַיִּבְרָא אֱלֹהִים אֶת־הָאָדָם בְּצַלְמֹו בְּצֶלֶם אֱלֹהִים בָּרָא אֹתֹו זָכָר וּנְקֵבָה)에 덧붙여 ‘그들을 창조하셨다’(בָּרָא אֹתָם׃-이 부분은 한글성경에서 번역되지 않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1:27). 모세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아담을 단수 명사 ‘첼렘’(צֶלֶם: 형상)을 반복 사용하여 강조하면서 그의 창조를 ‘이바라’((יִּבְרָא: 단수 미완료형) 동사로 표현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그러나 모세는 ‘빠라’((בָּרָא: 단수 완료형)를 두 번이나 쓰면서 창조된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을 각각 단수로 서술했다. 하나님이 ‘웨이레뚜’ 동사를 복수형으로 말씀하신 이유와 구조적 의문은 인간이 남자와 여자의 복수로 창조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거꾸로 남자와 여자를 단수로 표현했다.     기독교인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분 하나님이 삼위일체로서 동일본질(consubstanialis)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삼위일체의 경륜적 일치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성자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한다고 말씀하셨다(요5:19).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는 어떤 불일치도 없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론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동일본질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은 창조 톨레도트(1:27)에서 어느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직접 창조하셨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 의문에 대해 기독교적인 관점은 요한의 해석에 따르는 것이다. 요한에 의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요1:3). 요한에 의하면 그분은 창조 톨레도트에서 첫날에 빛으로 이 땅에 임재하셔서 창조를 실행하신 성자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요한의 해석과 다른 것은 기독교적인 창조론이 아니다. 그런 해석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과 유대교적 창조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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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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