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8-06(목)

신학/선교
Home >  신학/선교  >  신학

실시간뉴스

실시간 신학 기사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1
      여섯째날(4): 원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   모세는 1:28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바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וַיְבָרֶךְ אֹתָם אֱלֹהִים),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וַיְבָרֶךְ אֹתָוַיֹּאמֶר לָהֶם אֱלֹהִים פְּרוּ וּרְבוּ וּמִלְאוּ אֶת־הָאָרֶץ וְכִבְשֻׁהָ וּרְדוּ בִּדְגַת הַיָּם וּבְעֹוף הַשָּׁמַיִם וּבְכָל־חַיָּה הָרֹמֶשֶׂת עַל־הָאָרֶץ׃)고 말씀하셨다고 서술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처음으로 인간에게 오복을 주신 말씀이 원복음이다. 오복(五福) 중의 삼복(三福)은 다섯째 날 창조된 어류와 생물에게도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추가해서 인간에게만 주신 두 가지 복-① 땅을 정복하라 ②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은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목적에서 밝혔던 것과 같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첫 말씀으로 들려주신 원복음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인간에게 복으로 바꿔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원복음을 누리는 권리와 창조목적을 이행해야 하는 의무는 남자와 여자의 자손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인간에게 오복을 누리는 권리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행하는 의무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창조질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원복음으로 이 땅에 그의 창조의 질서를 세우시는 섭리를 시작하셨다. 원복음은 그 조건을 이행하는 인간에게는 복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죄의 원천이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죄는 그의 창조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원복음은 권리와 의무라는 양면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의 복을 공짜로 누릴 수 있도록 섭리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행하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 앞에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길로 가느냐, 아니면 죄악의 길로 가느냐는 선택의 기회가 항상 열려 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창조 톨레도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이 선택하여 창조를 보고 기록하게 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창조 톨레도트가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전부 서술한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 과정에서 있었던 장면들을 몇 개 골라서 모세에게 보여주셨고, 모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장면들만을 보고 창조 톨레도트를 서술했다. 그러므로 모세가 본 장면들 사이에 걸린 시간을 인간의 지식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쓸데없는 오류를 더할 뿐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고, 창조 톨레도트를 기록하게 하신 목적은 그가 창조주이심을 인간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다.   창조 톨레도트를 읽어보면 시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알고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환상으로 보고 듣고 기록한 모세의 서술 사이에 이해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이 모세의 창조 톨레도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 3,500년이라는 시간의 다리를 건너가서 모세 시대의 히브리어 용어의 개념과 모세의 서술 구조를 현대인의 과학적 눈으로 조명해봐야 한다. 모세가 창조 톨레도트를 기록할 당시 히브리인과 히브리어에는 현대인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과 용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창조 톨레도트에서 빛과 흑암, 궁창(라키아), 광명체(메오르트), 생물의 종류(민), 형상(찰렘)과 모양(데무트), 복(바라크) 등의 명사와 동사의 시제, 그리고 모세의 서술적 관점은 정확히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이해가 없는 기독교인이라면, 그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나 유대교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적 관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관점에서 창조 톨레도트를 비롯해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만이 주 하나님의 창조와 그가 주신 원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면서 과학적 무신론자들에게 반론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 신학/선교
    • 신학
    2020-08-04
  • 「존 웨슬리 저널」 완역· 출판 화제
    ◇이번 프로젝트를 기회하고 추진한 김영선박사는 이번 출간은 ‘교회사적 사건’이라고 자평했다. 55년간 웨슬리가 기록한 저널을 23명의 학자들이 번역 출간 웨슬리의 신학과 신앙을 연구하는 기초자료로 활용가치 높아   세계교회사의 영적 거장이자 감리교의 창설자인 존 웨슬리의 저작 「존 웨슬리 저널」이 우리말로 번역돼 출판됐다.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추진해 소중한 결실을 맺은 김영선박사(협성대 명예교수.사진)는 “한국을 대표하는 웨슬리안 신학자 뿐 아니라 칼빈주의 학자들도 이번 번역작업에 참여했다”며, “세계의 영적 거장 웨슬리의 생생한 목소리와 생각을 직접 듣는 다는 면에서 이번 출판은 가히 한국교회사의 기념비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이번 사건은 2012년 영국에서 시작됐다. 김영선박사는 당시 ‘웨슬리 생애 탐구’의 한 과정으로 학생들과 함께 영국을 방문했고, 브리스톨에 있는 뉴룸(New Room)에서 어떤 고서를 발견했다. 순간 김박사는 약간의 홍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1909 느헤미야 커닉이 8권으로 편집한 「The Journal of John Wesley」었다. 김박사는 즉시 이 책을 구입하고 귀국하여 대학원생들과 함께 읽는 가운데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웨슬리의 이야기들을 발견하고 이 저널의 번역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번역작업에 돌입했다. 웨슬리신학연구소를 중심으로 4년에 걸쳐 23명의 학자들에 의해 번역돼 마침내 출간을 하게 된 것이다.   김박사는 “웨슬리 신학이 웨슬리 설교에 근간을 두고 있다면, 웨슬리 목회는 웨슬리 저널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며, “대부분의 웨슬리 신학은 주로 웨슬리의 설교에 의존하여 연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 웨슬리 신학에 대한 관심이 웨슬리 저널 연구로 옮겨가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면에서 본 작품은 웨슬리의 신학을 그 자신의 직접적인 진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저널은 웨슬리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발전적 성찰은 물론 미국 조지아를 비롯하여 잉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 등지의 여행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풍물과 문화 등등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복음운동의 실태와 여정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김박사는 “설교하는 장소는 물론 설교의 본문과 제목 그리고 청중들의 규모와 그들의 상태와 반응, 또한 집회를 방해하려고 몰려온 폭도들이 청중을 향해 오물 등을 던지고, 온갖 저주와 욕설과 함께 막대기로 공격하는 등의 온갖 폭행과 폭력이 난무할 때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보호하셨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였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외에도 집회 시 나타난 다양한 영적 현상, 소송을 당했을 때 겪은 사건, 간교한 사기꾼들이 목회자 모습으로 설교하고 돈을 거두어 가는 사건 등도 자세히 나온다.   김박사는 웨슬리 저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배우게 된다고 설명했다. 첫째, 웨슬리 신학은 그의 일생을 통해 발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박사는 “웨슬리는 다양한 사건과 만남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수립하였으며, 또한 성결을 목표로 하는 신학에 도달하기까지 웨슬리의 간절했던 고민과 염려 그리고 기도 등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둘째, 저널을 통해 메소디스트의 부흥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김박사는 “웨슬리가 방문하고 설교하는 곳에서 나타나는 회심, 경련, 쓰러짐, 신유 등과 같은 많은 영적 현상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전했다. 셋째, 복음운동을 통해 영국 사회가 어떻게 변화되고 개혁되어 가는지 살펴볼 수 있다. 넷째, 웨슬리의 저널을 통해 18세기의 영국의 삶의 정황을 볼 수 있다.   김박사는 “이 사업에 관심을 주시고 후원으로 동력을 불어넣어 주신 김길수목사, 김인환목사, 노윤식목사, 윤보환목사, 이승우목사, 어형로목사, 하근수목사께 감사드린다. 또한 23명의 번역자들은 물론 간행위원장을 맡으신 김선도감독, 감수위원장을 맡으신 조종남박사를 비롯하여 여러 모양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특히 웨슬리 저널 번역 사업에 소명을 가지시고 출판을 위해 큰 힘이 되어주신 일산광림교회 박동찬목사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웨슬리 저널 출판을 결심하시고 많은 수고와 협조를 아끼지 아니한 신앙과지성사의 대표 최병천 장로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 신학/선교
    • 신학
    2020-08-03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7. 목회 설교를 병행한 실천 신앙의 신학자   고봉은 일제하에서는 일본 동경에서 1930년-1944년 엘리트 목사로서 한인교회를 성공적으로 목회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국내에서 교회와 신자를 대상으로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도달한 상황이라 자신도 우상숭배에 대한 강요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곧 바로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양아버지 영재형 선교사가 시무하고 있는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고봉은 고베에서 산호중앙교회(神戶中央敎會)를 개척하여 일본 교민들을 위한 목회활동을 시작하였다. 고봉은 일본 고베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영재형 선교사와 함께 차별과 냉대를 받는 교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31세 나이로 고배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일본에서 소외받고 무시받으며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던 교민들이 교회에 몰려 오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의 압제 속에 있는 모국이 멀지 않아 하나님의 역사로 해방될 것이라고 기독교 신앙을 민족 신앙으로 설교하였다. 고봉의 개척교회에 신자들이 날로 늘어나고 지역에서 교회 평판이 좋았다. 그는 1939년 40세의 나이로 동경의 대형 한인교회인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의 청빙을 받아 새로운 목회환경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고봉은 신주쿠중앙교회에서 영감으로 준비된 설교와 뜨거운 눈물의 기도로 청교도적 분위기로 교회를 이끌었다. 이 교회는 처음에는 작은 교회였으나 미국 유학갔다 온 신학박사가 목사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몰려와서 일본 전역에서 한인교회로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신주쿠중앙교회는 일본 전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가 되었고 조선인 유학생만 2백명 모이는 조선인교회로서는 가장 큰 교회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었다. 이곳 동경신주쿠중앙교회 목회에서 고봉은 학문과 신앙이 역동적으로 결합된 목회적 전성기요 그의 생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안양대학교 50년사』, 안양대학교 출판부, 1998, 56). 그러나 이곳에서 일본에서의 목회 사역의 한계를 느낀다. 조국이 아닌 이국에서의 목회는 영원한 일자리가 아니고 일제에 압제당한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봉은 단지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 만을 돌본 것이 아니라 양아버지인 영재형 선교사와 함께 재일교포의 선교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재일동포를 위한 순회목사 자격으로 일본의 쓰시바 · 큐슈 · 훗카이도오 · 가라후도 등지의 교회들을 돌봤으며, 1939년 동경의 잇찌(一致)신학교 강사를 겸했다.   고봉은 동경 신주쿠중앙교회 목회에서 두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는 내선일치 명목으로 일본어로 설교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둘째는 고봉의 절대적인 인기를 질투하여 담임목사직을 강탈하려는 자들이 생긴 것이다 조국 사랑을 강조하였던 고봉은 일본인들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 어느 날 난데없이 들이닥친 일본 경찰들에 의하여 연행되어 신주쿠(新宿)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사상범으로 구속되어 그곳에서 수개월이 지나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가 있었다. 이 일 후 고봉은 동경신주쿠중앙교회에서의 사역에 대한 커다란 회의와 실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고봉은 자기 자리를 탐내는 자들에게 교회를 양보하고 동경신숙중앙교회에 있으면서 개척하였던 메구로(目黑)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게 된다. 다음 해인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령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 즉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었다. 1942년 8월 솔로몬 군도가 미군에 의하여 공략된 후 전세(戰勢)가 일본 쪽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고봉은 해방의 날이 가까웠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는 1944년 3월 일본에서의 사역을 정리하고 귀국하였는데 당시 그는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하자마자 당시에는 서울역 앞에 위치하여 한국의 관문이었던 남대문교회의 청빙을 받아 6대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그는 이 교회에 부임한 뒤부터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1944년 당신의 상황에서는 무척이나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교회들에서는 새벽기도회를 쉬고 있었는데 고봉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서울에서는 처음 시작된 새벽기도회였다. 이처럼 열심 있는 기도와 은혜로운 설교로 인하여 남대문교회는 점점 그 교세가 확장되었고 마침내 남한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남대문교회에서의 그의 눈물 목회는 그를 한국의 예레미아 혹은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릴만큼 그의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감동적으로 나타났다.(김치선 저, 최선 역, 『김치선 박사의 모세와 오경』(선교횃불, 2015), 297) 그는 신학자로서 목회사역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목회 설교를 병행하여 한평생 목회 사역에 동반되는 설교를 놓지 않았다. 그의 설교 특징은 18세기 영국 뉴잉글랜드의 개혁신앙의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통한 부흥, 성령의 비상한 역사를 통한 교회의 회개와 갱신, 성도의 삶의 변화를 강조하였다.   김명혁은 그가 고봉의 설교에서 받은 은혜를 간증하고 있다: “서울로 올라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김치선 목사님께서 담임하시던 창동교회(후에 대창교회로 개명)에 다녔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어디든지 쫓아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는데 서울의 감각산과 관악산은 물론 대구의 주암산까지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김명혁, “추천사: 한국교회에서 다시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와 같은 영적 거목이 나오길 간절히 기도하며,” in: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12.).   8. 자유 민주주의 사상   고봉이 전개한 3백만명 전도운동은 큰 진전을 보았는데 그에 의하여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 손양원 목사를 비롯한 70여명 이상의 목사가 참여하는 3백만명 부흥전도회가 결성되었으며, 전국 2만 8천 동네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70여명의 목사가 선교목사로 전국에 파송되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다. 복음은 반공 및 자유 사상으로 무장되어 파송 받은 선교목사들은 실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들은 공산 게릴라들의 잦은 출몰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지역까지도 거침없이 가서 전도를 하였다. 그러던 중 몇몇 전도자들은 공산 게릴라들에 의하여 목숨을 잃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사건은 공산당은 나라에 위협이 된다는 사상을 각인하였다.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한 김구(金九)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에 출석하기 위해서 비서진들에게 한국 최고의 목사를 알아보라고 했는데 비서진은 남대문교회 김치선 목사를 추천했다. 이렇게 해서 김구 가족은 남대문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다. 김구는 고봉의 예레미아와 같은 눈물의 설교에 운혜를 받았다. 김구는 1주일에 한번 고봉을 경고장으로 초청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예배를 드렸다. 김구는 매일 남대문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고봉은 남대문교회에서 김구를 만나 민족복음화운동을 함에 있어서 해방 직후 이념의 대결이 심했던 시대에 명백하게 자유민주주의 로선을 택했다. 김구는 고봉에게 정치에 입문할 것을 종용했으나 자신은 목회자라고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한국은 1920년대 소련 볼세비키 혁명에 영향을 받은 이동휘 계열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침투되었다. 이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장악하고자 했으나 자유 민주주의 지도자 김구의 지도력에 의하여 제어되었다. 해방 이후 이들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지령을 받으면서 남한에 인민공화국을 세우고자 하였다. 따라서 고봉은 공산주의를 막는 일이 한국을 살리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고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남한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복음과 아울러 자유민주주의를 천명하면서 민족복음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고봉은 통일 방식에 따른 김구와 이승만의 갈등에 의하여 어려움도 겪었다. 김구는 아들 김신(金信)의 결혼식 때에도 그 주례를 고봉에게 부탁하였다. 이러한 김구와의 각별한 관계 때문에 이승만 쪽에서는 언제나 고봉을 요주의 인물로 설정하고 그를 감시하였다. 심지어 한 번은 형사들이 새벽 한 시에 고봉 집에 들이 닥쳐서 그를 인천구치소로 연행하였다가 풀어준 일도 있었다. 이처럼 조국의 광복과 그로 인한 정치적인 대립은 고봉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봉이 6.25 전쟁시 교인들을 피난시키지 않고 먼저 자신이 피난했다는 사실을 들어 그가 남대문교회 사임의 이유로 보고 비난하기도 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봉이 먼저 피난한 것은 그가 투철한 반공사상과 이북출신으로 공산주의의 잔혹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 그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엘리트 목사였기 때문에 공산당에게 잡히면 처형 대상 1호나 포섭 이용 대상 1호였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반공주의자들은 즉결로 처형했고 이용가치가 있는 자들은 사상전향을 미끼로 공산당 선전에 이용했다. 공산당이 1950년 6월 서울로 진군했을 때 친북 사상을 가진 한상기 장로는 고봉에게 기독교연맹 가입을 권유했다고 한다: “목사님 교회로 갑시다. 북에서 '기독교 연맹'이 내려왔는데 교회만은 자기들의 지배하에 예배 보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기별이 왔습니다. 목사님들을 해하지 않겠답니다. 그러니 도망 다니시지 말고 서울로 갑시다." 한상기 장로의 말에 대하여 김치선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안됩니다. 내가 내려가면 반드시 잡히게되고, 기독교연맹에 가입하게 되니 그렇게 되면 나는 또 한 번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됩니다. 지금 비상시에 잡힐만한 사람들은, 때를 기다리고 숨어 있어야 합니다. 나는 기독교연맹에 가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 동조하여 공산당이 될 수가 없습니다."(김의선, 고봉 김치선 목사의 생애, 金致善, 1899-1968, http://blog.daum.net/rfcdrfcd/15974672). 이에 대해서 한상기 장로는 다시 한 번 서울로 내려갈 것을 청했다: “목사님, 사태는 다 기울어졌습니다. 이제 한 주일만 지나면 적화통일이 됩니다. 우리나라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수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이제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어서 교회로 갑시다." 그러나 고봉의 태도는 강경했다: “아닙니다. 나는 끝가지 숨어 있다가 잡히면 순교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자 한상기 장로는 하는 수 없이 산을 내려갔다고 한다. 고봉은 공산주의의 실체와 기독교 연맹의 역할을 알고 있었고 그가 서울로 내려가서 기독교 연맹에 가입하였다면 그는 그의 말처럼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고봉은 몸을 피하여 무사히 전란(戰亂)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9. 회개를 강조한 개혁파 부흥 신앙 사상   고봉은 청교도 개혁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와 19세기 구학파를 좇아서 부흥운동을 추구하였다. 고봉의 신앙 사상에서 부흥 신앙이 중요하다. 그의 부흥운동은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역사를 인정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개 설교가 그 시대의 인본주의 사조에 맞서서 첫 번째 대각성운동(first great awakening movement)을 일으킨 것처럼 고봉 역시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한 인간의 철저한 회개를 강조한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죄인이 회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인간 삶의 본질적인 변화, 성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일제 신사참배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하였다. 1952년 4월 18일 대구중앙교회에서 “전쟁 중의 부흥”에서 “오늘 여러분 나부터 더러운 일본 우상에게 절하던 자입니다.” 1961년 8월 6일 인천교회에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됨이로다“라는 설교에서 자신의 신사참배를 고백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아버지를 생각지 않고 미소가라바이에게 참배할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나이까?...” 1962년 “고멜을 보라”라는 설교에서 신사참배 죄를 고백했다: “...나도 고멜과 같이 내 남편 주님을 버리고 일본 신사에 가서 그것들과 음행을 범하였습니다.”(김치선, “고멜을 보라,”(호 3장), 『김치선 박사의 설교모음집』(II), 211-212.)   고봉은 1952년 7월 10일 계성중학교 채플에서 행한 “한국의 장래”라는 설교에서 한국의 장래는 하나님이 주실 부흥운동이라고 하였다. 부흥운동이란 첫째 회개운동, 둘째, 기도, 셋째 하나님 말씀 순종, 넷째, 열심히 전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고봉은 진정한 부흥이란 회개와 갱신을 통한 회복이라고 보았다. 고봉은 참된 부흥은 인간의 프로그램과 인간의 열심있는 기도와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참된 부흥은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땅 아래로 일방적으로 임하는 신령한 사건이다.   한국전쟁 후 고봉이 남대문교회로 돌아가지 못하고 창동교회를 개척했을 때 미국 소재 순복음교단은 한국에 교단을 창립하고자 열정적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고봉에게 접근하여 순복음 교단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고봉은 이를 거절하고 장로교 전통의 회개와 기도와 말씀 실천을 통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에서도 개혁신앙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고봉의 신앙 사상을 알 수 있다.(계속)  
    • 신학/선교
    • 신학
    2020-08-03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0
      여섯째 날(3),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손들   모세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계획(1:26)에서 선포하신 인간과 실제 창조된 인간은 다르다. 그런 사실은 1:26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계획에서 말씀하신 ‘모양대로’가 창조된 인간을 서술한 1:27에서는 빠졌다는 점에서 드러났다. 그 대신에 창조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바뀌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의 ‘키데무테누(모양대로)’를 반영하지 아니하셨고, 하나님의 ‘형상대로’(뻬첼레모) 남자와 여자를 나눠 창조하셨다.   히브리어 사전과 성경의 용례를 보면, ‘형상’(첼렘)은 겉모양 또는 우상 등을, ‘모양’(데무트)은 원형을 닮은 것듣을 표현하는 말로 쓰였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남성적이고 인간에게 명령하시는 분이시다. 반면에 하나님에게 여성적인 면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데무트’를 주지 않으셨는가? 인간은 그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판단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무트’의 결여는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데무트’의 결여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의 정체성이다. 모세에 의하면 인간 ‘아담’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그들’이 온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예정하셨다. 여기서 3인칭 복수 대명사 ‘그들’은 처음 창조된 남자와 여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까지도 포괄하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아는 자들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위해 창조하신 인간과 그 자손들의 역사적 행적에서 발견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왜냐 한다면 현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각종 생물과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들의 DNA에 각각의 생명정보를 써놓으셨고, 그 생명정보가 자손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정보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게 가장 큰 죄악이 된다.   모세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이 관영함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6:5)임에 대해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서술했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부정하고 과학적 무신론을 추종하는 자들은 현실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무시하고, 죄악에 빠져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모세가 1:27에서 하나님이 ‘데무트’를 빼고, ‘첼렘’만으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나눠 창조하셨다고 서술한 것을 읽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DNA에 ‘데무트’의 결여가 죄악의 본성으로 작용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된다.   DNA에 담긴 생명정보가 생물의 종류마다 다르고, 그것이 그대로 자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이 되어 있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는 물론, 그 자손들도 ‘데무트’가 결여된 DNA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그의 DNA에 ‘데무트’가 결여된 탓으로 죄악의 본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수행하는 것은 인간의 필연적인 숙명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무시하는 것은 죄악이다. ◇DNA에 담긴 생명정보는 생물마다 다르다   인간의 자손들이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은 그들을 이끌어 하나님 나라에 살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오히려 정죄하고 살해한 자들이다. 그들의 자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이 등장했고, 현대사회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현대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하는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현대 기독교인이 그런 사회를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맞게 되돌리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죄악을 가리려는 자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외식하는 자이다. 그런 자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 신학/선교
    • 신학
    2020-07-28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19
      ‘아담’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하나님   모세는 하나님이 창조의 마지막에 인간 ‘아담’을 만드시는 모습을 매우 극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모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 창조에 대하여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יֹּאמֶר אֱלֹהִים נַעֲשֶׂה אָדָם בְּצַלְמֵנוּ כִּדְמוּתֵנוּ וְיִרְדּוּ בִדְגַת הַיָּם וּבְעֹוף הַשָּׁמַיִם וּבַבְּהֵמָה וּבְכָל־הָאָרֶץ וּבְכָל־הָרֶמֶשׂ הָרֹמֵשׂ עַל־הָאָרֶץ׃)고 선포하셨다(1:26).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이처럼 인간을 특별하게 창조하시고, 땅과 그 안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목적과 권한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창조 톨레도트에서 인간 창조에 관한 서술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엘로힘’은 복수 명사이므로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말이나, 단수 동사를 써서 단수로 표현하는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한글성경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번역한 것에서도 보듯이, 하나님은 자신을 1인칭 복수 대명사로 표현하시고, ‘나아세’(נַעֲשֶׂה: ‘우리가...만들고’)라는 복수 동사를 쓰셨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를 줄여서 직역해보면, ‘우리가 우리들의 형상과 우리들의 모양대로 사람(단수)을 만든다. 그리고 그들(사람의 복수)이 땅과 생물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구조를 보면, ‘나아세’ 동사의 목적어 사람(인간, ‘아담’)은 뒤에 나오는 ‘웨이레뚜’(וְיִרְדּו: 다스린다) 동사의 주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만든다’의 목적어인 ‘아담’(사람)은 단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이 주어가 되는 ‘다스린다’(웨이레뚜)는 동사는 복수형을 쓰셨다. 그렇게 되면 ‘아담’이 창조되는 과정에서 단수에서 갑자기 복수로 바뀌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의문에 대해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וַיִּבְרָא אֱלֹהִים אֶת־הָאָדָם בְּצַלְמֹו בְּצֶלֶם אֱלֹהִים בָּרָא אֹתֹו זָכָר וּנְקֵבָה)에 덧붙여 ‘그들을 창조하셨다’(בָּרָא אֹתָם׃-이 부분은 한글성경에서 번역되지 않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1:27). 모세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아담을 단수 명사 ‘첼렘’(צֶלֶם: 형상)을 반복 사용하여 강조하면서 그의 창조를 ‘이바라’((יִּבְרָא: 단수 미완료형) 동사로 표현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그러나 모세는 ‘빠라’((בָּרָא: 단수 완료형)를 두 번이나 쓰면서 창조된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을 각각 단수로 서술했다. 하나님이 ‘웨이레뚜’ 동사를 복수형으로 말씀하신 이유와 구조적 의문은 인간이 남자와 여자의 복수로 창조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거꾸로 남자와 여자를 단수로 표현했다.     기독교인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분 하나님이 삼위일체로서 동일본질(consubstanialis)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삼위일체의 경륜적 일치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성자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한다고 말씀하셨다(요5:19).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는 어떤 불일치도 없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론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동일본질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은 창조 톨레도트(1:27)에서 어느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직접 창조하셨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 의문에 대해 기독교적인 관점은 요한의 해석에 따르는 것이다. 요한에 의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요1:3). 요한에 의하면 그분은 창조 톨레도트에서 첫날에 빛으로 이 땅에 임재하셔서 창조를 실행하신 성자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요한의 해석과 다른 것은 기독교적인 창조론이 아니다. 그런 해석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과 유대교적 창조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 신학/선교
    • 신학
    2020-07-19
  • 정동섭교수, 김일성주체사상을 비판
    김일성을 아버지, 김정일을 아들, 김정은을 성령으로 추앙 “두개의 태양이 없듯 크리스찬 주사파란 존재할 수 없다”   상담전문가이자 종교심리학자인 정동섭박사(사진)가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학적인 관점에서 비판하는 책을 출간해서 화제이다. 정박사는 지금 북한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주체사상을 ‘기독교를 벤치마킹한 사이비종교’라고 규정했다. 정박사는 국가종교로서의 주체사상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북한의 국가종교는 교리적 차원에서 수령과 수령의 사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우고, 수령을 민족운명의 구원자이자 영생의 부여자로 고백하는 배타적 교리를 가지고 있다. 정박사는 “수령론에 따르면 김일성과 김정일은 유일신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래서 수령론은 믿음의 영역이다. 믿는 자만이 뛰어오르고 그럼으로써 유일신 사상으로 이 세례를 받는다”고 해설했다.   둘째, 북한의 국가종교는 경험적 차원에서 수령을 운명의 구원자로, 영생의 부여자로 숭배하며, 수령에게 매혹되어 그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세계-내재적 초월경험을 가지고 있다. 정박사는 “주체사상에서는 육체적 생명은 유한하지만 정치적 생명은 대를 두고 계승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 주체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수령을 영생의 수여자로 숭배하는 것이다”며, “여기서 주체사상이 이단사이비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분석했다.   셋째, 북한의 국가종교는 신화적 차원에서 수령과 그 가계를 신성시하고 수령의 역사를 거룩한 이야기로 받아들여 신화화하고 있으며 한민족의 기존신화인 단군신화 등과 연결하여 김일성이 민족의 원시조인 단군의 뒤를 잇는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라고 고백하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정박사는 “해방신화, 승리신화, 낙원신화, 통일신화, 세습신화가 수령을 절대화했다”고 분석했다.   넷째, 북한의 국가종교는 의례적인 차원에서 수령의 신화와 관련한 모든 장소를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 등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순례의 대상으로 삼으며, 모든 관공서, 학교, 기업소, 공장 등에 예배의 장소인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을 꾸려 주기적으로 주체사상의 교리와 신화를 학습하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고백하고 서로의 신앙생활을 비판하는 ‘생활총화’ 화합을 정기적으로 가지고 있다. 정박사는 “교회의 새벽기도처럼 매일 모이는 생활총화를 일일총화라하고, 주일예배 같은 것이 ‘주 생활총화’라고 한다. 한 달에 한 번의 월례회를 교회에서 모이는 것처럼 월간총화라하고, 1년에 한 번은 수련회를 하듯이 연간총화를 한다”고 설명했다.   다섯째, 북한의 국가종교는 공동체적 차원에서 조선로동당을 중심으로 외곽단체인 직맹, 여맹, 농근맹,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소년단 및 우당단체인 조선민주당, 천도교 정우당, 그리고 가가호호를 묶은 인민반 등으로 전 사회를 물샐틈없는 하나의 조직으로 만들어 놓고, 주민들의 성분을 3계층 51부류로 분류하여 관리하는 고도의 전체주의 국가조직체계를 가지고 있다.   여섯째, 북한의 국가종교는 윤리적 차원에서 수령이 베풀어주는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여 ‘충성’과 ‘효성’을 바치며, 개인보다 집단을 앞세워 집단의 최고 수뇌인 수령을 신격화하고, 무조건적으로 교리를 집행하는 것을 자발적인 신념에 의해 양심으로 생활화할 것을 요구하는 윤리를 가지고 있다. 정박사는 “기독교인은 신앙을 갖게 되면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감사하게 된다”며, “북한에서는 이것을 만2세부터 초상화를 향해 ‘아버지 원수님 고맙습니다’라고 교육시킨다”고 전했다.   정교수는 “인간의 노력과 힘에 의해서는 지상에 유토피아가 건설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한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에 의해서만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정교수는 “기독교가 신본주의라면, 주체사상은 인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주체사상과 기독교의 차이점은 사회역사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데 있다. 주체사상은 진화론을, 기독교는 창조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 주체사상은 물질을 강조하는 유물론이고, 기독교는 정신을 물질과 함께 강조하는 유심론이다”며, “북한에서는 ‘김일성 원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했는데, 그들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진리와 생명 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다”고 강조했다. 문의 010-3286-1988
    • 신학/선교
    • 신학
    2020-07-09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3. 초지일관한 청교도적 회개 부흥 신앙 사상   고봉은 당시 캐나다에서 함흥으로 처음으로 파송된 영재형 선교사의 청교도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함경도 지역에 파송된 캐나다 선교사들은 자유주의적이었다. 영재형 선교사는 뒤늦게 파송된 진보적 선교사 윌리엄 스코트(William Scott, 1886-1979)와 심각한 신앙적 갈등을 겪었고, 이에 대해 선교부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그런데 선교부는 영재형 선교사를 신앙의 불모지인 일본으로 좌천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고봉은 일본으로 건너간 영재형 선교사를 따라서 온 가족이 일본으로 떠났다. 고봉은 일본 고베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이 때부터 영재형 선교사와 선교활동을 함께 시작하였다.(김동화, 『한국의 예레미아 김치선 박사를 추모하며- 나에게 있어 영원한 것』, 서울: 기독교 연합신문사, 1998, 45-46.) 그는 보수적 신앙을 가진 양아버지 선교사를 평생 섬기면서 그로부터 복음 사역자로서의 인격과 영성을 성실하게 닦았다.   고봉의 신앙의 열정은 10살 때 마을 서당 훈장 김응보 옹의 영향 아래 신앙으로 입문 후 흔들림없이 초지 일관하였다. 16세 때 영재영 선교사를 만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실천하는 정통개혁신앙의 훈련을 받으면서 20세에 3.1운동에 참여하여 1년간 옥고를 치르면서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출옥 후 영생중학교에서 학업을 끝낸 후 연희전문을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엄재형 선교사의 권유에 따라 일본 고배신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목사 안수 후에는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와 달라스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다시 고베와 동경 신주구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해방전 귀국하여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대한 신학교를 설립운영하고 창동교회 개척, 한양교회 목회, 송파 중앙교회 개척과 300만 부흥전도단 창립으로 초지일관하였다. 고봉의 독특성은 최초의 미국 구약학 신학박사를 한 그의 학문적인 논리보다는 눈물로 청중의 영혼과 마음에 호소하고 감동을 주는 초지일관하는 청교도적인 신앙의 열정이었다.   고봉은 기도의 사람으로 3백만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복음화운동에 앞장 섰다. 그는 6.25 한국전쟁 이후에 나타난 민족의 위기를 직접 체험하면서, 한국의 예레미아로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민족의 파수꾼이 되어 한(韓)민족과 한국교회가 범한 우상숭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그의 부흥설교의 주제는 회개, 부흥, 성령이었다. 그는 눈물로 기도하고 전국을 돌면서 전도했다. 해방 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이 민족이 살길은 오직 기도, 회개 그리고 기도뿐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는 단지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한 부흥운동이 아니라 민족을 살리기 위한 한국교회의 내면적 성장을 위하여 부흥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그의 교회 부흥운동도 말씀에 입각한 회개 운동이었기 때문에 개혁신앙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창립하고 명예회장으로 계시는 김명혁은 김치선의 설교와 열정에 대해 다음같이 피력한다. “김치선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마다 회개와 은혜 사모의 메시지와 함께 전도의 메시지를 전하시곤 했습니다. 2만8천 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무조건 왕십리로 달려갔습니다. 왕십리 들판에 우물을 파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전도와 목회를 계속했습니다.... 모두가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은혜와 감동과 도전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김명혁, “추천사: 한국교회에서 다시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와 같은 영적 거목이 나오길 간절히 기도하며,” in: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12-13.) 당시 한국 기독교 인구가 30만 명 정도 되고 한국 인구가 3천만 명 정도 되었을 때 1/10이라도 전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3백만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복음화운동에 앞장섰다.   4. 사회개혁적 애국적인 눈물의 신앙 사상   고봉은 일제하에서 투철한 애국심을 가지고 사회개혁에도 적극적이었다.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한 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정도 옥고를 치렀다. 그는 하나님 나라와 역사의식이 분명하였다.   그의 애국 사상은 1935년 그가 고베에서 고베중앙교회(神戶中央敎會)를 개척한 목회에서 나타났다. 특히 이 교회 교인들은 모두 주일마다 한복(韓服)을 입고 교회에 나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획기적이고 용기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 대부분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를 꺼려하여 될 수 있으면 한복을 입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봉이 시무하는 교회의 교인들이 이처럼 당당하게 한복을 입고 교회에 출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담임목사가 그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신사참배 강요와 일본의 내선일체(內鮮一體) 강요로 나타났다.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반대로 자진 폐교했다. 일본 내에서도 한인교회에 대한 일체의 탄압이 심해졌다. 그가 1938년 청빙받아 간 동경에 있는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의 강단에서 일본어로 설교해야 한다는 내선일체 규정을 준행하지 않고 한국어로 설교했다는 이유로 일본인들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힐 수밖에 없었고 결국 1940년 경찰에 사상범으로 구속 연행되어 체포되어 여러 달동안 감옥살이를 하게되었다. 신앙이 좋다는 조선인이 목사가 한국어로 설교했다고 경찰에 밀고했던 것이다. 그는 신주쿠중앙교회(新宿中央敎會)에서 개척한 메구로(目黑)교회에서 설교할 때에도 언제나 눈물로 기도하며, 눈물로 설교하였다고 한다. 그의 눈물은 단지 감정의 눈물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과 미래를 염려하는 애국자와 선구자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귀중한 눈물이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살면서 선진국을 경험한 고봉은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를 위한 미래의 소망을 다른 곳 아닌 복음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하나님 말씀만이 민족의 아픔을 달래주고 민족의 미래를 열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 복음화만이 나라의 미래를 여는 것이었다. 그는 복음주의적 투철한 개혁주의 신학사상, 삶의 현장에 대한 열정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민족과 교회를 가슴에 품고 복음사역을 하였다.   고봉은 1944년 귀국하여 남대문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민족 복음화를 표어로 내걸었으며, 애국심이란 “우리가 한국 사람이니 그것이 골육지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골육지친인 것을 알아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겠다는 마음”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일제 강제점령 막바지의 위험한 상황에서 서울의 모든 교회들이 새벽기도회를 쉬고 있는 상황에서 남대문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처음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고 매일 새벽 강단에서 엎드려 민족을 위하여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는 매 새벽기도 때마다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조국이 광복과 더불어 고봉은 이제껏 그의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민족의 복음화의 열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새벽기도 때마다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그리고 이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 때부터 그가 전개한 운동이 3천만의 십일조 3백만을 하나님께 바치자는 운동이었다. 그는 매 설교 시마다 “한국에는 2만 8천의 자연부락이 있소. 동리마다 교회를 세웁시다. 우리 성도들이 집집마다 감나무 한 그루씩 심어서 그 수입을 몽땅 선교비에 투자한다면 민족복음화는 물론 세계를 복음으로 덮으리이다"하고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때부터 그를 조국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렀다.   고봉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민족의 살길은 로마서 9장 1-2절을 근거로 복음이라는 것을 설교하였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니 그것이 골육지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골육지친인 것을 알아.” 그는 해방 후 혼란과 위기의 극복의 유일한 길이 복음을 통한 국가의 재건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국가의 재건과 민족의 구원 이라는 두 가지 목적으로 3백만 복음화 운동을 일으켰다. 3백만 복음화 운동은 복음화일꾼 양성하는 일(신학교)과 전국 2만 8천 동네에 우물파기 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구약의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아의 심정을 갖고, “눈물의 선지자”로서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여 세상을 거룩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신학교 학생들에게 영농법과 침술법도 철저히 가르쳤다. 김명혁은 그가 김치선 목사의 설교에서 받은 은혜를 간증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예레미아’라고 불리던 김치선 목사님은 새벽기도회 시간은 물론 설교 때마다 눈물을 흘리시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고, 은혜 사모와 전도의 매시지를 선포하셨는데 그 메시지들이 저의 신앙 인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재료들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김명혁, “추천사: 한국교회에서 다시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와 같은 영적 거목이 나오길 간절히 기도하며,” in: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12.)   2009년 10월 26일 경기도 안양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민족부흥 일념 고봉 김치선 목사 유업 잇자”는 세미나에서 미국에 거주 중인 고봉의 차녀 김동화씨가 ‘나의 아버지 김치선 박사’라는 제목으로 교회사에 숨겨진 여러 가지 이야기를 연대별로 펼쳐내며 “항상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모습에서 아버지가 민족과 한국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절실히 느꼈다”고 증언했다.   최선은 고봉이 민족 복음화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먼저 김치선 박사는 한국교회와 사회가 사는 길은 오직 십자가 복음 뿐이라 생각하고 초교파적으로 복음을 전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고봉은 1950년 전후에 손양원, 밥 얼스와 함께 한국 최초의 한민 연합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민족 복음화“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그 열매가 1970년대 민족복음화 운동으로 신현균 목사에 의하여 이어졌고, 1970년 ”한국기독교 부흥협의회“가 설립되었다. 신현균으로부터 김준곤, 조용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빌리그래함 전도대회가 1973년 ”5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로 진행되었다.   고봉은 해외유학파로 일제말에 귀국해 1944년 3월 당시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남대문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인 김구를 만나게 되어 민족적인 목회를 하게된다. 그가 본래 가졌던 복음주의적 부흥신앙과 김구의 민족주의가 결합하게 된다.(박명수, “추천사: 다시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가 나오길 기대하며,” in: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23.) 그래서 김치선은 복음으로 민족을 새롭게 하는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민족 복음화운동은 해방 후에 3백만 복음화 운동으로 나타났다. 고봉은 3천만 민족복음화를 위해서는 그중의 1/10인 3백만명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 그가 시무한 남대문교회는 민족 복음화의 구심점의 역할을 했는데 서울 역 앞에 위치해서 해방 이후에 월남한 많은 신자들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곳이었다. 그러나 3백만 명 복음화운도은 6.25 한국 동란, 장로교단의 분열, 고봉의 독자노선, 1952년 남대문교회 사임으로 역사에 묻히고 말았다.(이종전, ‘김치선과 3백만 부흥운동의 의의,“ 개혁논총 39(2016), 171; 최선,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킹덤북스, 2018, 64.)(계속)  
    • 신학/선교
    • 신학
    2020-07-06
  • 김영한박사의 신학논단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고봉(高峯) 김치선(金致善, 1899-1968)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자로서의 신학적 업적보다는 대신교단과 대한신학교 창립자라는 영적 유산과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리어졌던 그의 목회적 감화력과 민족 복음화운동의 창시자로서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는 미국 유학하여 구약학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엘리트 신학자로서 바로 현장목회에 투신하여 회개와 복음화를 강조한 목회를 하였고, 그의 목회는 항상 결실이 있었다. 민족복음화 운동에도 회개가 주제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회개가 중심된 목회는 개혁신학의 전통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봉은 설교문과 신학의 글이나 강의안을 남겼으나 그의 전공인 구약학에 관해서는 박사학위 논문 「신명기의 모세저작」(Kim, Chi Syun. The Mosaic Authorship of the Pentateuch.Evangelical Theological College, 1935; 최선 역, 『김치선 박사의 오경과 모세』. 서울: 선교횃불, 2015)과 『구약사기(舊約史記)』 외에는 학술적 논문이나 저서를 남기지는 아니하였다. 그는 1948년 대한신학교를 세웠고 1951년부터 1960년에 총회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강의하였고 1955년에 391쪽이나 되는 상당한 분량의 신학적 저서 『구약사기(舊約史記)』를 출판했으나 한국구약학회에서 그의 학술적인 논문과 저작에 관하여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고봉은 구약사와 함께 에스겔, 소선지서와 함께 예레미야서를 강의하였다. 1950년대 선지서에 대한 논문이나 저서가 적었던 시기에 현재 세 권이 남아 있는 그의 구약과 관련된 강의안 소개와 평가는 없다. 구약학자로서의 그의 위상과 기여는 묻혀지고 있다. 이제 한국개혁신학회가 그의 학문적 위상과 기여를 밝혀야할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고봉이 신학적으로는 근본주의 신학자라는 평가도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봉은 장로교가 합동과 통합으로 나누어졌을 때 제3의 교단인 대신 교단의 창립자요 교계의 영적 지도자로서 위상을 가지고 있다. 고봉은 그의 인격 안에 보수신앙과 애국사상이 하나로 결합된 민족 지도자로서 기독교 1세대로서 근본적으로 역사적 개혁신학을 계승하고 이것을 목회와 신학교육에서 회개와 민족복음화로 실천하고자 했던 목회자요 신학자로서 민족 복음화운동라는 위대한 유산을 한국교회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다. 필자는 고봉의 개혁신학사상을 그의 다음 11가지 특징으로 제시해보고자 한다.   1. 정통 복음주의 신학에 근거한 민족복음화운동 효시   고봉은 함경남도 함흥(읍 서호리 바닷가 어촌)에서 조부가 40척의 배를 소유한 선주(船主)인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했다. 10대 청소년기 부터 독실한 신앙으로 애국정신을 가진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함흥지역의 리더로 낙인찍혀 1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刑)을 살고 나왔다. 함흥으로 돌아와 학업에 전념했고 선교사 함흥 파송 캐나다 선교사 영재형(Luther Lisger Young, 榮在馨, ?-1949)의 영생중학교(중고등 합제 5년제)를 1922년 졸업했다. 영재형(Luther Lisger Young, 榮在馨)은 캐나다 선교사로서 한국으로 귀화한 캐나다계 한국인이다. 그는 1906년부터 함흥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가끔 서호리에 오곤했다. 김응보 옹은 영재형 선교사에게 어린 고봉의 어려운 형편과 아울러 영특함과 착실함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신원을 책임지겠다고 추천하자 엄재형 선교사는 그런 유망한 학생이라면 자기가 키우고 공부시키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어린 고봉과 영재형 선교사 사이에 인연이 생겨난 것이다. 당시 에큐메니컬 운동의 일환으로 당시 캐나다 교회는 서로 연합하게 되는데, 영재형 선교사는 이 캐나다 연합교회에 합류하지 않은 잔류파 캐나다 장로교회에 소속된 철저한 개혁주의자 선교사였다고 한다. 예장 대신의 신학적 정체성이 이 선교사의 신학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영생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였다고 한다. 고봉은 장로교 미션학교인 영생중학교에서 특히 그의 양(養)아버지가 되어준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영재형 목사로부터 민족을 사랑하고 하나님 주권 신앙을 배웠다. 연희전문학교 영문학과 입학하여 수학하였고 1927년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평양신학교에서 한학기 수학하였다. 고봉은 장로교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서 개혁신학을 배웠다. 그리고 일본으로 전지 파송된 영재형 선교사의 권유로 평양신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개혁파 신학교인 고베(神戶) 중앙(中央)신학교(미국 남장로교에서 세운 1907년 세운 고베신학교와 1903년 북장로교에서 세운 전도동지관, 1920년 오사카(大阪) 신학원으로 개명, 다시 두 신학교가 1927년 합병하여 개명한 개혁파 신학교,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을 수용하는 역사적 개혁파 로선을 따름)에서 수학(修學)하고 1930년 졸업하였다. 고봉은 보수적인 개혁신학교인 고베신학교에서 정통개혁신학을 배웠다. 그리고 일본 선교사로 사역한 영재형 목사를 따라 다니면서 일본에 사는 한인 교포들에게 전도하면서 영재형 목사의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개혁신앙을 배웠다.   고봉은 영재형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하여 1933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석사를 취득하였다. 고봉은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의 좌경화에 반대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세워진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서 정통개혁신앙을 배웠다. 그리고 고봉은 1935년 미국 달라스신학교에서 「모세오경의 모세저작권」(The Mosaic Authorship of the Pentateuch)으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조직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제는 구약에 관한 제목이었다. 그는 1930년대 김재준, 유형기 등이 평양신학교에 도입한 모세오경 문서설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성경신학입장을 가졌고, 박형룡과 박윤선이 가졌던 정통개혁신학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고봉은 학위를 받고 1935년 귀국한 후 1936~1937년 고향인 함흥 서호리에서 목회 활동하다가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해 1937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중앙교회(神戶中央敎會), 동경 신주쿠중앙교회, 메구로(目黑) 한인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1944년 귀국하였다. 고봉은 1944년 장로교회인 남대문교회(1885.628 알렌 선교사댁에서 개척 설립) 제6대 담임목사로 취임한다. 당시 남대문교회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한국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교회가 서울역 앞에 있었기 때문에 북에서 다니러 오는 나그네들이나 남에서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 그리고 일본에서 귀국하는 사람들이 늘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따라서 이 교회는 전국적으로 상당히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교회였다.   해방이 되자 3백만 구령운동을 일으켰다. 1946년 2월 8일,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金九)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하여 출범한 사회운동단체이자 정치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에 많은 목회자들이 가담하였다.   고봉은 정치활동이나 주류교단 활동에 참여하지도 않고 3백만 구령운동이란 제3의 길을 추구하였다. 그는 민족복음화 운동에 전념하여 3백만 구령운동을 일으키면서 주경야독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1948년 야간인 대한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생을 길러내었다. 그는 장로교 총회신학교에서 1951년에서 1960년까지 9년 동안 교수로서 구약학을 가르쳤다. 그는 그가 설립한 대한신학교에서 구약학, 신약학,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남대문교회 담임목사요 장로교신학교의 교수로서 활동하였고, 강의실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학생들에게 회개와 함께 민족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당부하였고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리었다.   2. 보수적, 성실하고 실천적 인격 신앙   고봉은 마을 서당의 훈장이자 개혁 개방의 향촌의 민족주의적 유교 지식인으로서 기독교가 서호리에 들어오자 누구보다도 먼저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고 교회 영수(領袖)가 되었던 김응보 옹(翁)의 영향을 받아 신앙인이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되던 암울한 시기에 10대(代) 소년으로 6년이나 매일 새벽 내호교회 새벽기도회에 출석하였고, 그 시기에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을 가졌고, “너는 내 것이다”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으로 함흥에 와 있던 영재형 선교사가 서호리를 방문한 것이다. 김응보 옹(翁)은 어린 고봉의 신앙과 영특함에 대해 칭찬하며 학업 지속하기에 가정 형편의 어려움에 관하여 영재형 선교사에게 말하면서 신원을 보장하겠다고 그를 추천하였다. 이 말을 들은 영재형 선교사는 '그렇게 유망한 학생이라면 자신이 키우면서 공부시키겠다'하고 고봉을 함흥 발룡산 기슭에 있는 자신의 집에 데리고 가서 사환 일을 시키며 공부하게 했다. 그리하여 어린 고봉은 영재형 선교사 집으로 가게 되고 가족들은 장전을 향해 화전민으로 이사하였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10대 고봉은 선교사를 만난 후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 선교사 집에서 잡일을 도우면서 선교사와 부인의 비서 역할까지 했다. 10대 고봉은 선교사가 세운 영생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선교사 집안일을 도우는 가정 총무 역할을 했다. 요셉처럼 힘든 일을 하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착실하고 정직하고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일을 처리하여 선교사 부부의 사랑을 듬뿍받았다.   고봉은 서당에서 배운 실력으로 영재형 선교사가 세운 장로교 선교학교인 영생중학교에 입학하였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당시 선교학교는 민족정신이 강하게 강조되는 곳으로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당시 영생중 · 고등학교 내에서는, 학생들이 비밀리에 한국 애국자들의 지시를 받아 활동하고 있었는데 고봉 역시 그런 학생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함흥지역 학교 비밀학생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1919년 3월 1일에 있을 민족의 봉기를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추진하였다. 고봉의 참여는 민족 정신이 투철한 영재형 선교사의 신앙 훈련에 영향을 받았은 것이다. 고봉은 이 3.1운동 참여 일로 인하여 일경에게 체포되어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20살의 나이로 함흥에서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어 1년간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그 곳에서 그는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1년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 그는 출옥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하였다.   1년 후 김치선은 출옥하여 함흥으로 돌아와 영생중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고 1922년 3월 13일 23세의 나이로 영생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때 김치선은 학기 중에는 서울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고, 방학이 되어야 함흥으로 돌아와서 영재형 목사의 일을 도왔다. 이 때 고봉은 학기 중에는 서울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고, 방학이 되어야 함흥으로 돌아와서 영재형 목사의 일을 도왔다   1923년 어느 날 방학을 맞이하여 함흥의 집으로 돌아와 영생고등학교 옆에 세워진 신창리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하고 있던 고봉은 밖에서 들려오는 “불이야! 불이야!”하는 다급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영생 중·고등학교 쪽에서 들여오는 소리였다. 김치선이 이 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학교는 이미 커다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이 불은 당시 서양 사람인 영재형 목사가 한국 학교인 영생 중 · 고등학교의 교장이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영재형 목사를 죽이기 위해 놓은 불이었다. 그들은 영재형 목사를 교장실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근 후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불을 질렀던 것이다. 고봉은 이불에 물을 부어 자신의 몸에 뒤집어 쓰고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 선교사를 구출한다. 그는 자기를 키어주고 공부시켜준 은인(恩人)을 위기의 순간 살렸다는 보은의 자긍심을 가졌다. 이처럼 고봉의 생명을 건 구출작전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영재형 선교사는 이 일 후에 고봉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고 더욱 특별히 사랑하며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선교사 부인은 너무 놀라 화병을 얻어 별세하게 된다. 별세 전에 부인은 남편에게 “치선이를 끝까지 돌보아주고 공부시켜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다. 영 선교사는 그 유언을 실천하여 고봉을 일본으로 유학시키고 이어서 1930년대 미국 달라스신학교에 유학시켜 1935년 한국인 최초로 신학박사를 받게 지원을 해준 것이다. 1949년 영재형 선교사가 별세할 때 다음의 유언을 남겼다: “나는 한국을 사랑한다. 내가 한국에 와서 한 것이 있다면 단 한가지, 치선이를 얻은 것이다.”   1927년 3월 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평양에 있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평양신학교 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1928년 일본에 있는 한인(韓人)들을 선교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영재형 선교사가 고봉을 일본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고봉은 일본 고베 현(縣)에 있는 고베중앙신학교(現, 개혁파신학교)에 편입하였고, 그곳에서 영재형 선교사를 도와 전국을 돌아다니며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일본에 건너 온지 2년만인 1930년 2월 23일, 고봉은 31세 나이로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 영재형 선교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재일 조선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고봉은 그 다음 해인 1931년 영재형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터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29년 메이천 등 프린스턴 구학파 학자들이 세움) Th. M. 과정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하며 오직 학업에만 매진한 끝에 1933년 Th. M.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정통개혁신학을 배웠다. 고봉은 다시 텍사스주 달라스에 있는 달라스신학교(Dallas Theological Seminary)의 박사과정에 입학하였으며, 여기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1935년에 신학박사 학위(Th. D.)를 취득하였다. 이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정식 구약학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었다.   고봉은 달라스신학교 유학시에도 외부와 단절하여 오로지 학교 기숙사, 강의실, 도서관, 식당에만 오가면서 학업에 매진하였다. 자신의 신학공부를 민족 복음화를 위한 일환으로 생각하고 외로움을 참고 인내하면서 형설의 공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당시 모세오경 저작설을 부인하는 역사비평학이 지배하는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의 풍토에서 모세5경의 모세저작설을 학위논문을 쓸 만큼 보수적인 신앙과 신학을 유학생활에서 실천하였다. 그가 달라스에서 공부했을 때 달라스는 세대주의자와 복음주의자 학자들이 함께 가르쳤다. 그러나 고봉은 이미 고향교회에서부터 신앙생활에서부터 목사안수와 신학석사까지 장로교회와 장로교신학교(평양신학교, 고배신학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획득하였기 때문 그는 세대주의나 자유주의에 타협하지 않고 역사적 개혁신학의 입장을 견지하였다.(계속)
    • 신학/선교
    • 신학
    2020-06-29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18
    여섯째 날(1), 땅의 생물의 창조   모세는 창조의 여섯째 날 톨레도트에서 하나님이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וַיֹּאמֶר אֱלֹהִים תֹּוצֵא הָאָרֶץ נֶפֶשׁ חַיָּה לְמִינָהּ בְּהֵמָה וָרֶמֶשׂ וְחַיְתֹו־אֶרֶץ לְמִינָה)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고 서술했다(1:24). 하나님이 생물을 ‘종류대로’ 창조하신 사실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그런 사실을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을 반박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종류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민’(מִינָ)의 개념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 창조 톨레도트에서 ‘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물을 ‘종류대로’ 분류하는 단위이다. 하나님은 그가 종류대로 창조하신 ‘네페쉬 하이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복을 주셨다(1:22). 그러나 과학적 무신론의 영향을 받은 현대 생물학은 ‘민’의 의미를 무시한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LUCA라는 원핵생물이 지구 생물 최고의 조상이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그것의 진화 계통과 상호 유연관계를 따라서 8계급의 ‘생물 계통수’를 그려놓았다.   ‘생물 계통수’에서 3역에 속하는 원핵생물은 당시 모세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그것들은 현미경의 발달에 따라 발견되었다. 창조 톨레도트 셋째 날에 창조된 식물계와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창조된 동물계는 ‘생물 계통수’의 6계에서 2계를 차지한다. 6계의 나머지 4계도 모세가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모세에 의하면 셋째 날에 만들어진 식물계에는 풀과 씨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과목 등으로 나뉘어 있고, 그 아래에 ‘민’이 있다. 동물계에는 다섯째 날에 만들어진 바다의 큰 괴물과 떼지어 사는 어류, 그리고 날개 있는 조류, 여섯째 날에 만들어진 땅의 육축과 기는 것과 짐승등이 있고, 그 아래에 ‘민’이 있다. 그리고 인간은 특별하게 ‘민’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와 같이 모세의 분류체게는 전체적으로 3계급밖에 없다.   현대 생물학의 분류체계는 생물 세포의 리보솜에서 단백질을 생산하는 RNA의 진화 계통에 기준을 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맨눈으로 본 분류체계와는 다르다. 분류의 틀이 같지 않다면, 수평적으로 ‘민’과 강을 비교하는 것은 합리성이 없다. 그러나 과학적 무신론과의 논쟁을 위해서 기독교는 창조론에서 ‘민’의 위치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생물의 종류는 ‘민’의 단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세의 분류체계와 현대 분류체계를 비교해보면, 현대 분류체계에서 모세가 보지 못했던 3역을 제외한 7계급에서 상위 3계급은 계>문>강이다. 그렇다면 ‘민’은 강에 해당한다.   그러나 현대 생물학의 분류체계에서 ‘민’의 개념은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의 ‘종’(species)을 설명하는 데서 발견된다. 현대 생물학에서 종은 ‘교배하여 생식 능력이 있는 자손을 낳을 수 있는 개체의 집단’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종과 종 사이에 생식장벽(reproduction barrier)이 있다는 것은 생물학자들이 발견한 사실이다. 그리고 종에는 3개의 하위 계급(아종, 변종, 품종)을 둠으로써 종내(種內)의 개체에서 발현되는 다양한 특성을 분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생물학적 종의 기준을 살펴보면, 그것은 ‘민’의 기준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생물학적 생식장벽은 하나님이 생물을 ‘민’의 단위로 번성하도록 만들어놓으신 장치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결국 ‘민’이 현대 생물학의 분류체계에서 어느 계급에 해당하는 것일지라도 굳이 간여할 필요는 없다. 현실적으로 생식장벽이 있고, 그 증거로 ‘민’과 ‘민’ 사이에서 중간‘민’ 또는 중간종(中間種)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의 놀라운 다양성   그렇다면 다윈의 진화론은 종의 하위 계급에서 발현되는 다양성의 차이- 말하자면 종의 하위 계급인 아종, 변종, 품종의 변이를 진화로 확대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그러므로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현대 생물학에서 생식장벽 현상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현실에서 발견되지 않는 중간종을 화석에서 상상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화석으로 발견된 생물의 경우에는 형태와 구조가 동일하거나 유사한 개체의 집단을 기준으로 종을 분류하는데, 그런 분류방법에는 연구자의 주관에 따라 종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결함이 있다. 그래서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형태가 약간씩 다른 화석들을 모아서 중간종을 상상한 그림을 그려놓고, 중간종 화석이라고 우길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물질에서 자연발생한 LUCA가 오늘날의 생물계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생물의 계통수’가 사실이라면, 물질에서 생명이 자연발생하는 화학적 메커니즘(chemical mechanism)과 종간(種間)의 진화 과정에서 생식장벽을 뛰어넘는 중간종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메커니즘과 살아있는 중간종은 발견된 적이 없다. 창조론을 믿는 기독교는 바로 이 두 가지가 과학적 무신론의 아킬레스건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신학/선교
    • 신학
    2020-06-29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17
        다섯째 날. 진화 아닌 종류별 창조가 성경의 진리   모세는 창조 다섯째 날 톨레도트에서 하나님이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하시니(1:20), 물에서 번성하는 어류들과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새들이 종류대로 창조되었다고 서술했다. 기독교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네페쉬 하이아’(생물)를 종류별로 창조하셨다는 서술을 의심 없이 믿는다. 창세기에 의하면 ‘네페쉬 하이아’에 속하는 것들로는 이 구절에서 말하는 어류와 조류, 그리고 여섯째 날에 만들어진 땅의 생물(1:24)이 있다. 그것은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에서 식물은 ‘네페쉬 하이아’로 취급되지 않는다.   조르쥬 퀴비에는 고대 지층에서 발견된 생물 화석들이 동물군에 따라 해부학적 구조가 다른 것을 발견하여 고생물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는 라마르크가 좬동물철학좭(1809)에서 발표한 용불용설에 의한 진화를 맹렬히 비난했던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창조 이후에 생물의 종(種)들이 변화를 겪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대가 다른 지층에서 격변의 흔적을 다수 발견하고, 제임스 어셔 주교의 기원전 4004년 창조설을 강력 비판했다. 퀴비에가 죽은(1832) 뒤,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주의 유물론과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했다. 그것들이 합세하여 과학적 무신론으로 발전하면서 그 위세는 더욱 강력해졌고, 기독교는 그 세력에 밀려 점점 쇠퇴했다.   현대 고생물학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에 지배되어 지구의 모든 생물이 최초의 생명체인 원핵생물에서 계통을 따라 진화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 그려놓은 ‘생물의 계통수’를 보면, 바다의 물에서 화학작용으로 생겨난 하나의 원핵생물이 번성했고, 그 가운데서 진화한 다세포의 원생생물이 수중 동물과 수중 식물로 계속 진화했다. 수중 생물이 육지로 올라와서 육상 생물로 진화했다. 조류는 쥐라기 시대에 깃털 공룡이 진화한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생물은 진화하면서 새로운 종으로 분기하게 되고, 분기한 종은 새로운 공통조상의 계통을 따라 계속 진화한다. 그들은 지구 생물 최고의 공통조상을 LUCA라고 이름 지었다.   근대 생물 분류학의 원조 칼 린네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는 생물을 식물과 동물을 2계 5계급(계〉강〉목〉속〉종)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현대 생물학은 1977년 칼 우스가 제안한 각 생물의 리보솜 RNA 염기서열에 따라 3역(진정세균역, 고세균역, 진핵세균역)으로 나누고 그 밑에 6계(진정세균계, 고세균계, 그리고 진핵세균역에 4계-원생생물계, 동물계, 식물계, 균계)로 분류한다. LUCA는 그동안 계통별로 8계급(역〉계〉문〉강〉목〉과〉속〉종)으로 진화했다.   기독교의 창조론은 과학적 무신론에 맞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문제는 LUCA가 물질에서 화학작용으로 발생했으므로 창조주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둘째 문제는 생물의 종류별 창조를 부정하고 진화론을 수용하는 경향이다. 기독교는 1860년 옥스퍼드 논쟁에서 패배한 이후 그 문제들에 대해서 전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아직도 ‘고대 히부리인들의 우주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아직도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독교를 말살하고, 그들이 우리우주의 지배자가 되려고 한다. 기독교가 그런 위기에 몰린 것은 과학은 계속 발전했던 데 반해, 기독교의 창조론은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틈새 사이로 진화론을 수용하는 기독교인이 늘어난 것은 기독교가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기독교가 미래에도 존속하려면, 과학적 무신론이 사실이 아닌 허구적 가설임을 입증하는 한편,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창조를 과학적 사실에 맞게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설명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근본주의자들처럼 교회에서 유신진화론을 비판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유신진화론은 기독교 창조론이 과학적 무신론에 승리하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다. 대적인 과학적 무신론을 내버려 둔 채, 괜히 믿음의 형제를 공격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만약 그들 중에 하나라도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마18:6, 막9:42).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계통진화 그림  
    • 신학/선교
    • 신학
    2020-06-2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