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10-18(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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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말씀 연구(25)
      예수께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이야기는 계속해서 백부장의 겸손한 태도로 전개된다. “그 백부장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여, 나는 당신이 나의 지붕 아래에 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얼마나 겸손한 모습인가? 당시 로마 식민지하에 있던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다. 100명의 군대를 호령하는 백부장은 주둔군의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는 권세 밑에 있는 사람이요, 내 밑에 군사들이 있는데, 내가 이 사람에게 가라고 말하면 그는 가고, 다른 사람에게 오라고 하면 그는 오고, 나의 종에게 이것을 하라고 하면 그는 합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사람은 자리가 만든다’라는 말도 있지 않나? 권력의 맛을 보면 언젠가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을 망각하고, 그 권력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아예 영원히 군림하려는 인간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백부장을 다르다. 그가 비록 100명을 지휘하는 중대장이지만, 그 위에 자신을 호령하는 권세자가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현명한 사람이다. 서점에 가면 자기개발서가 종종 눈길을 끄는데, 몇 년 전에 나온 책으로 〈CEO 예수〉라는 책이 있다. 아무리 최고경영자라도 그 위에 예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아주 신앙적인 책이다. 그렇다. 이것이 겸양의 덕을 간직한 참된 지도자의 모습이 아닐까?   백부장이 이어서 예수께 드리는 간청은 더욱 본받을만하다. “그러니 말씀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나의 하인이 낫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백부장이 “말씀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한 내용을 마태복음 7장 8절은 더욱 극적으로 “한 말씀만 하여 주십시오”라고 표현한다. ‘한 말씀’은 헬라어로 ‘모노 로고스’인데, 지휘관의 호령보다 백부장은 예수의 입에서 떨어지는 단 한마디 어쩌면 외마디도 놓치지 않겠다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백부장을 순종하게 하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다. 단 한 말씀이라도 그의 귀에 들릴 때 그는 행동으로 옮길 준비가 되어 있다.    왜 우리는 많은 말을 할까? 설득된 후에야 순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교회에 영성이란 말이 화두가 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세상적인 이념이나 가치관에 이끌리는 영성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신앙적 영성보다는 심리적 영성이나, 혹은 심령술사적 영성에 중독되어 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퀴어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동성애를 인권 옹호와 혐오반대의 논리로 무장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괴상한 해석을 만들어 내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면, 이미 과학적으로 유전자가 없으며 선천적이지도 않다고 결론이 내린 동성애에 대해서, 눈과 귀를 가리게 해서 속세우민 하는 지도자들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성경은 동성애에 대해 무엇이라고 가르치나? 가증한 것이다.   가증한 것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단 한 마디인 토에바, 곧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에스겔 16장 50절,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을 읽어보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동성애는 인권이 아니라, 가증한 것이다.    동성애는 레위기 19장 13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반드시 죽일지라’고 언급될 정도로 가증한 것이다. 동성애에 빠진 소돔 성에 “여호와로부터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려”(창 19장 24절, 29절) 그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하나님께서 다 엎어 멸하셨다.    왜 하나님께서 동성애 죄인을 사랑하시지만, 동성애의 죄 자체에 대해서 강경하게 심판하신 것일까? 창세기 18장 20~21절에 소돔에 대한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가정을 창조하신 계획을 다시 분명하게 세우려 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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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5
  • 곽혜원박사, ‘젠데 이데올로기’ 비판 연구
      선천적 생물학적 ‘성’ 대신에 문화·심리적 ‘젠더’ 주장 “가정중심의 성윤리로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항해야 한다”     최근 여러 지자체가 추진 중인 인권조례안이 지역 기독교연합회의 반발로 무산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교회는 인권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조례안이 포함하고 있는 ‘젠더 이데올로기’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곽혜원박사(사진)의 「젠더 이데올로기가 야기하는 가정해체와 건강한 가정공동체 구축의 당위성」이란 제목의 발표가 큰 주목을 받았다.   곽박사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의 해체를 부르짖는 최선봉에는 ‘젠더 이데올로기’가 그 중심점에 서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젠더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출생 시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생물학적 성(sex)이 아닌 사회·문화·심리적 성으로 간주되는 젠더(gender)를 통해 후천적으로 임의대로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시대사조이다.   젠더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에 대해 곽박사는 독일 튀빙엔 대학의 복음주의 선교학자 페터 바이어하우스(P. Beyerhaus)의 발언이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말한다. 즉 “바이어하우스는 1789년 프랑스혁명(정치적 신분제를 전복시킨 혁명), 1917년 볼셰비키혁명(경제적 계급제를 전복시킨 혁명)과 함께 젠더 주류화를 ‘제3의 세계사적 혁명’(생물학적 질서를 전복시킨 문화 인류학적 성혁명)이라고 말하면서 남녀의 성별 질서, 결혼과 가정의 기본 질서를 부정하는 인류 문명사적으로 매우 위험한 혁명”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것은 남녀의 생물학적 성별을 창조질서로서 주신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신론적·무신론적 이데올로기”이다.   곽박사는 오늘날 젠더 이데올로기가 휩쓸고 지나간 서구 세계에서 ‘결혼’과 ‘가족’이라는 단어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공적으로 인정되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신실하고 지속적인 결합과 그들의 자녀라는 보편적 의미를 강탈당한 채 결혼을 단지 육체적 쾌락을 즐길 수 있는 계약관계(때로는 서로의 혼외정사도 허용할 것을 요구하는)로 간주하는 상황으로 변해버렸다. 이렇게 되면 결혼의 안정성이 극도로 약화되고, 이혼율도 급증하게 된다.   특별히 곽박사는 “존엄한 삶·존엄한 죽음·존엄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과제에 몰두하면서 건강한 가정공동체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가정적 유대관계는 삶의 질은 물론 죽음의 질도 좌우하는 중요 조건을 결정하는 최대 변수라는 것이다. 곽박사는 “현대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현안 중에서 긴급히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할 사회문제인 자살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예방 기제도 건강한 가족이다”며, “가정공동체가 무너져서 가족의 따뜻한 지원을 받지 못해 발생하는 고독사 및 무연사가 최근 우리 사회에서 급증하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가족의 중요성을 확연히 인식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곽박사는 남성 동성애자들의 고립과 자살의 문제에 주목했다. 즉 “주로 40세 이전에 무수히 많은 섹스파트너들과 복수연애하면서 성적으로 방종하는 삶을 살다가, 40·50대 이후가 되면 그로 말미암은 각종 신체적 질병으로 인해 파트너들에게서 버림받고 실직하고 파탄난 인생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므로 필자는 향후 많은 남성 동성애자들이 병든 몸으로 외롭게 살아가다가 홀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고독사의 직격탄을 맞게 될 거라고 우려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곽박사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인류가 반드시 사수해야 할 보편타당한 윤리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기독교만이 감당할 수 있는 시대적 과제이다”며, “특별히 젠더 이데올로기가 성도덕과 가정을 총공격하는 상황 속에서 가정 중심의 성결한 성윤리를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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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5
  • 감신대 종교철학회 국제컨퍼런스
    ▲감신대학교 종교철학전공 학생회가 국제 컨퍼런스를 열었다.    감신대학교(총장직무대행=오성주박사) 종교철학전공 학생회는 지난 10일 동 대학 웨슬리 제1세미나실에서 「정의 신학의 인문치유적 가능성 모색」이란 주제로 ‘기호자본주의와 정신건강 국제컨퍼런스를 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사람이기보다는 감정이 없는 부품으로 소비되는 인격 상실의 시대에 신학이 개인의 감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드는 일에 주도해야만 함을 토의했다.    이날 미국 게렛신학대학의 조 안교수가 「Affect and Political Theology of Jeong」란 주제로 발표했고, 전철교수(한신대)가 「호모 센티엔스의 정치신학적 가능성」이란 제목의 논찬을 했다. 이어 박일준교수(감신대)가 「기호자본주의와 정의 신학」이란 주제로 발표했고, 이민형교수 (성결대)가 「기호자본주의와 정의 신학에 대한 논찬」이란 주제로 논찬했다.    안교수는 논문 발표를 통해 “인간의 감정은 정치학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서구권에서 동양인은 그저 감정이 없는 일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인간은 감정이 있는 한 인격체임을 늘 상기해야만 한다. 한국의 ‘정’문화는 우리 인간이 서로 격리되어 각자의 일에만 집중하는 기계가 아닌 이미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국의 ‘정’문화는 서양에서 말하는 사랑과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말 그대로 정은 끈적하게 사람들 간에 유대가 형성되어 있음을 표현한다”며, “이렇게 서로가 단절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학은 ‘정’이라는 개념을 깊이 연구하여 대안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은 이미 서양 사회가 갖지 못한 훌륭한 정서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고 전했다.   서로가 단절된 자본주의사회 한국의 ‘정’ 연구가치 충분 “우리의 고유한 신학연구를 통해 교회·사회에 기여하자”    박일준교수는 “우리 사회는 과부하가 걸린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신학과 교회는 사람을 다그치고 몰아붙이는 것이 옳은 것일까”며, “신학과 교회는 사람들을 해방시켜야 한다. 자본주의가 양산하는 무한경쟁의 피로로부터 안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교인들의 감정을 말살하고 마치 기계처럼 교회의 이익을 위해 부리는 도구나 종으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전했다.    이어 “한국에 애석하게도 고유한 신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흔치 않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유동식교수의 ‘풍류’신학이 있다”며, “우리나라 고유의 풍류와 ‘흥’을 신학은 더욱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만의 고유한 신학을 개발하고 우리에 맞는 감정을 고취시킨다면 신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사회에 많은 이로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늘 정형화된 감정선만을 자극할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감정신학을 이론화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오성주총장직무대행은 이날 국제세미나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조 안교수를 모시고 이런 국제 행사를 학생회 주최로 열 수 있었던 점이 아주 뜻깊다”며, 우리 대학이 대한민국의 신학만이 아니라 세계의 신학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훌륭한 전통과 교수진, 학생들이 있다. 우리 대학이 그동안 자랑스럽게 연구해 온 토착화신학도 감정신학과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번에 학술대회를 계기로 새로운 신학의 풍토를 세워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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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5
  • KWMA서 선교사 입문훈련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산하 연합훈련 실행위원회가 대학 교수들의 선교사 입문훈련의 첫 오프라인 과정을 시행하고 3개월 동안 온라인 과정을 진행중이다.   2박 3일간 서울 양천구 제자교회에서 진행된 1기 훈련에는 16명의 대학 교수가 참여했으며, 이번에 훈련을 받은 이선복 동서대 글로벌경영학부 교수는 “교수는 한국 학생은 물론 한국으로 유학 온 외국 학생들까지 근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며, “지난 34회 전국대학교수선교대회에 참석한 교수들은 학생 전도뿐 아니라 퇴직 후에도 선교사역을 하기로 다짐했다”고 말했다.   KWMA는 지난 6월 충남대에서 개최된 34회 전국대학교수선교대회에서 300여 명의 교수가 선교 훈련을 받은 뒤 선교사로 파송되어 선교 과업을 감당하겠다고 선언한 후 교수들을 대상으로 선교 교육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고 이번 프로그램을 처음 마련했다. KWMA는 “300명의 교수 선교사 파송을 목표로 매년 두 차례 교육을 진행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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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25
  • 예수말씀 연구(24)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예수께 오는 사람들이 전혀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마태복음 5~7장이 산상설교라면, 마태복음 8~9장은 기적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전한다. 예수께서 산상설교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이 마태복음 8장이고, 바로 그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것이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는 이야기이다.    예수의 기적 이야기는 마태복음에서 보른캄과 헬트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론, 제자도, 신앙’을 보여주는 것 외에 그리스도의 명령을 준수하는 선교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복음서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인 백부장이 직접 예수께 나아와 간청을 드린다. 이것은 인종 교차적인 관점에서 유대인에게 이방인 선교를 고취하려는 의도이다.   이와는 달리 같은 치유 이야기 같지만, 누가복음 7장은 백부장의 ‘하인’이라 단어 대신에 ‘종’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백부장의 종이 다름 아닌 노예라는 사실을 부각한다. 마태복음에서 하인은 유대 사회에서 아랫사람을 의미하지만, 종은 그보다 더 낮은 계급 곧 당시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통용되던 노예를 연상시키는 단어이다. 노예 신분이니까 무시할 수도 있지만, 소외된 사람에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는 누가복음의 관점에서 훨씬 더 적나라하게 종을 살리려는 백부장의 노력이 돋보인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예수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백성의 장로들과 친구들을 차례로 보내면서 종을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이들은 예수의 동족인 유대인들이다. 이것 역시 인종 교차적인 관점에서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인 누가복음의 독자들에게 유대인 선교를 고취하려는 의도이다.   예수말씀은 마태복음에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한 백부장이 그에게 왔다. 그가 간청하여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나의 하인이 병들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겠다”고 한다.   예수의 응답은 파격적이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는 표현은 단순과거 분사의 형태로 일회적인 사건을 강조하고, 또 미래시제는 미래의 즉각적인 응답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이는 백부장의 간청이 있자마자 예수께서 가셨고, 그 치유의 순간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순간에 미래의 사건으로 응답 될 것이라는 아주 미묘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예수의 화법은 백부장의 하인을 살리신 일이 종말론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과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치유하는 일이 인간사에 흔한 일인가? 아니다. 오직 천지를 창조하시고 생명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만이 이런 위대한 일을 행하실 수 있다. 바로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한 이야기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바로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고 선언한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신적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서가 치유 기적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당장 코앞에 가까이 계신 분으로 현현하신 놀라운 사건을 보도하는 것과는 달리,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예수의 신성을 모독하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도리어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반복적으로 비하하기까지 한다.    이런 사실을 중시할 때, 과거에 한국교회가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유물론자들인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다면, 이제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모독하는 이슬람의 총공세에 교회 구성원 모두가 힘을 모아 적극적으로 대처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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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25
  • 한국기독교사연구원서 허정윤박사 발표
      국내활동 한계에 국외망명 결정하며 독립전쟁론 채택 “신민회 ‘자유문명국’에 기독교적 가치와 이상이 내재”     한국기독교사연구원(원장=박종현박사)은 연구원 창립 22주년을 맞아 지난 6일 한국기독교사학회와 함께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권 평박사의 사회로 시작한 이날 발표회에서는 허정윤박사(케리그마신학연구소·사진)가 「신민회의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일고」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신민회는 1907년 안창호의 주도로 결성된 비밀조직으로 신민회의 창립목적은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성립케 함’이었다. 이에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는 국내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국외망명을 결정하면서 ‘독립전쟁론’을 최고의 전략으로 채택했다. 망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신민회의 존재를 알게 된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의 간부들을 대량 검거했다. 이에 대해 허박사는 “그 이후에 신민회 발기인들에게 닥친 일제의 탄압과 망명지에서의 현실 속에서 ‘독립전쟁론’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 되었다”며, “그 결과는 신민회의 분열로 나타나면서 이후 항일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에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4번의 분열을 주목했다.    첫째 단계의 분열은 1차 망명자 그룹의 청도회의에서 일어났다. 허박사는 “여기서 안창호의 점진파와 유동열의 급진파가 대립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급진파의 안이 채택되었으나, 현실적인 제약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둘째 단계의 분열은 이동영이 가족을 국내로 돌려보내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을 때 일어났다. 허박사는 “그곳에서 이동영은 이상설과 합류하여 대종교인으로 개종하고 말았다”며, 종교적 분열을 시사했다.      셋째 단계 분열의 주인공은 이동휘였다. 허박사는 “이동휘가 하바로브스크 군옥에서 남모르게 그를 구해준 하바로브스크시 볼셰비키당위원장 김알렉산드라의 후원으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당위원장이 되었다”며, “이를 계기로 그는 신민회와 기독교를 완전히 버리고 볼셰비키즘으로 기울었다”고 설명했다.  넷째 분열은 양기탁에게서 촉발됐다. 허박사는 “양기탁은 통천교를 창시하고, 선언서에서 이는 ‘기독교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며, “종교는 ‘자국을 숭배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언급했다.   허박사는 “3.1운동 이후 설립된 상해임시정부에 신민회 발기인들을 포함한 망명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며, “이때에도 신민회의 급진파와 점진파의 독립운동 방법론이 임시정부를 분열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름 붙여진 것이 ‘좌우대립’이라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또 “좌우대립 문제는 상해임시정부 시절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타났다”며, “그것이 임시정부의 정치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고, 그 존재와 권위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주된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일제의 패망 후 승전국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한반도에는 분열된 2개의 국가가 성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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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25
  • 예수말씀 연구(23)
      예수의 첫 설교는 “그가 이 말씀을 끝마치셨다. 그는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로 마무리를 짓는다. 이 구절로 짤막하게 예수의 첫 설교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에 주로 활동하신 갈릴리에는 당시에 약 204개 정도의 도시들이 있었다. 첫 설교 이후에 예수의 활동무대는 공생애 사역의 전초기지인 가버나움으로 옮겨진다. 갈릴리 공동체의 활동무대 역시 가버나움에서 다시 출발한다. 가버나움은 당시에 1,700명 정도의 인구가 모일 만큼 갈릴리에서 분주한 항구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   가버나움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 있다가 고침을 받은 후에 예수의 일행을 위해 수종을 든 이야기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공관복음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다른 병자들과 고침을 받은 이야기에 묻혀있을 뿐이다. 마태복음 8장 14~17절과 마가복음 1장 29~34절을 자세히 비교하여 읽어보라.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의 장모 사건에 앞서서 이미 제자들이 부름을 받는 장면이 먼저 나온다. 곧 베드로도 이미 제자로 부름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단지 그의 장모는 베드로 때문에 특별히 예수의 고침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누가복음 4장 38~39절은 짧지만 두 복음서와 다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야기는 5장에 가서야 비로소 나온다. 이 점에서 4장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고침을 받은 사건은 아주 특별하다. 고침을 받은 여인이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 드니라”(39절)는 표현을 통해서 아직 남성 제자들이 부름을 받기 전에, 이미 여성의 헌신을 통해 제자도의 핵심 기능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종들다’란 단어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디아코니아의 동사형인 디아코네오이다. 바로 남성 제자들이 봉사의 제자도를 감당하기 이전에 여성의 리더십을 통하여 봉사의 원리를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여성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사건이 예수의 공생애 동안에 자주 일어나는데, 그 출발점이 가버나움이다. 마태복음과는 달리,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베드로 장모의 사건을 다루면서 “회당에서 나와”(마가복음 1장 29절; 누가복음 4장 38절)라는 구절을 통해서 가버나움 회당과 이 사건을 연결 짓고자 한다. 이것은 가버나움에서 회당이 지닌 중요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마태복음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 사건 바로 직전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라는 이야기로 시작하며 하인을 고친 이야기는 아주 중요하다. 이렇게 사실상 공관복음서는 모두 가버나움을 중시한다.   왜 가버나움이 중요할까?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공생애를 이어가신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와 요단강뿐만 아니라, 동서로 움직이는 예수의 이동경로에서 핵심적인 장소이다. 마가복음은 ‘건너편’(헬라어로 페란)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하신 것을 집중적으로 보도한다. 심지어 마가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마가복음 6장 30~37절)은 유대인을 위해서 그리고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마가복음 8장 1~10절)은 이방인을 위해서 행한 기적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예수의 공생애가 미치는 활동영역은 가버나움을 넘어서 이방 여인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의 고향인 헷 족속(히타이트)이 자리를 잡았던 페니키아의 해변가인 두로와 시돈 지방까지 또한 북으로 서부 시리아인 안디옥까지 확장되어 나간다. 나사렛이 나자라 예수의 진원지라면, 가버나움은 예수말씀의 중심지이다. 나사렛이 예수께서 자라신 곳이라면, 가버나움은 제2의 고향이다. 가버나움을 기점으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나아가신다.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기에 가버나움에서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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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6
  • 정요석박사 ‘에드워즈의 언약론’ 발표
      구속언약은 삼위 안에서 구속을 이루는 특정한 수단·방법 “성부는 성자와 협약에 의해 성자에 대해 새로운 권리획득” 제 4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이 지난달 26일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과 신앙」이란 주제로 열렸다. 정요석박사(세움교회·사진)와 이상웅교수(총신대)가 강사로 나섰다. 이 중 에드워즈를 전공한 정박사의 발표에 많은 관심이 몰렸다.   정박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언약론」이란 제목의 발표에서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을 중심으로 그의 언약신학을 분석했다. 에드워즈는 “사람의 구속이라는 특별한 일에 관하여 삼위일체의 위격들 몇 사이에 영원한 언약이 있다는 것은 성경에 의하여 명백하다”고 말한다. 이 가운데 구속언약은 “삼위의 존재의 질서 하에서 구속을 달성하는 특정한 방식과 수단들”이다. 정박사는 “이미 삼위의 존재의 질서 하에서 결정된 삼위의 권한을 에드워즈는 구속언약에 의하여 새로이 결정되는 것과 면밀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점을 정박사는 예를 들어 설명했다. 즉 “삼위일체의 경륜에 의하여 이 세상의 율법수여자와 심판관과 처분자가 되는 권한은 성부에게 주어져 있는데, 구속언약에 의하여 이 권한이 성자에게 맡겨져, 성자는 성부를 대신하여 이 세상의 주와 심판자가 된다”며, “또 성부는 영원한 구속언약을 시작하는 이이고, 첫 번째 운동자이고, 수장으로서 모든 면에서 행동한다”고 말했다.   정박사는 왜 구속언약이 필요한지에 대해 “성부는 삼위일체의 다른 위격들에게 그들의 경륜적 위격을 침해하지 않는 것들은 단지 성부의 경륜적 특권만으로 그들에게 지시할 수 있지만, 신적 위격들의 영광을 침해하고 밑도는 것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협정에 의하여 이것을 행할 권한이 부여되지 않는 한, 다른 위격들에게 지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성자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 겪어야 하고, 고통을 받아야 하는 일들은 성자의 신적 위격의 영광을 침해하고 밑도는 것들에 해당하므로, 성자가 이렇게 하겠다고 성부에게 자유롭게 협정하여 주지 않는 한, 성부는 성자에게 성부의 특권으로 이것들을 요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박사는 “성부는 성자와의 협약에 의하여 성자에 대해 머리와 권위가 되는 새로운 권리를 얻어 그에게 위격 밑에 있는 것들을 지시하고, 또 그 협약에 의하여 성부는 성자에게 성공과 보상 등을 주는 새로운 의무를 갖는다는 것이다”고 요약했다. 그래서 위격들의 영광과 존엄에 밑도는 것이 사람을 구속하는 데 요구되지 않는다면, 구속언약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구속언약에 의한 두 위격의 이러한 종속은 비록 종류에 있어 새롭기는 하지만, 여전히 성부와 성자의 경륜적 질서에 역행하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 구속언약에서 성부가 성자에게 종속되지 않고, 성자가 성부에게 종속된다고 말한다”고 정박사는 지적했다. 그 결과 “에드워즈가 위격들의 영광과 존엄에 밑도는 것이 사람을 구속하는 데 요구되기 때문에 구속언약이 필요하다고 본 점은 그 주장의 정당성은 차치하고 구속언약의 필요성에 대하여 매우 독창적으로 잘 설명하였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 신학/선교
    • 신학
    2019-09-06
  • [오늘의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22)
      예수말씀은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않느냐?”라고 안타까워하면서 행함을 일차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우리말 속담이 있듯이 이러한 예수말씀에 대해서 주님의 친동생인 야고보는 가장 예수의 가르침을 가깝게 따르고 있다(야고보서 2장 14~26절). 야고보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예수말씀을 찾아보면, 예수말씀의 평행귀가 복음서 이외에서 야고보서에 가장 많이 발견된다.  ‘주여, 주여’라는 부름말은 흔히 ‘주여 삼창’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주여 삼창’이 유래된 구절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있다. 다니엘 9장의 기도를 읽어 보라. 특히 다니엘 9장 19절의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에 ‘주여 삼창’이 나온다. 인간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행동을 촉구하는 간청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런 일방적인 간청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말씀은 놀라우리만치 인간의 행동을 촉구하고 나선다.  예수말씀은 “나의 말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모든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사람과 같다. 비가 내리고 …시내…가 저 집에 밀려왔어도… 그것이 무너지지 않았다. 그것이 반석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말을 듣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비가 내리고 …시내…가 저 집에 들이쳤는데 그것이 곧바로 무너졌고, 그것의 무너짐이 컸다”고 이어진다.  마태복음은 예수말씀의 ‘반석 위에 짓는 사람’이란 전승을 그대로 따르지만, 누가복음 6장 49절은 ‘흙 위에 집 지은 사람’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왜 이렇게 예수말씀의 중요단어가 반석에서 흙으로 변경된 것일까? 마태복음이 산상설교(마태복음 5장 1절)이고 누가복음은 평지설교(누가복음 6장 17절)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마태의 유대인이 유대산지의 반석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누가의 로마인이 살던 드넓은 평지를 중시한 표현이다. 그런데 평지의 흙에 집을 바로 짓을 수는 없기 때문에 ‘주추’를 두 번씩이나 언급하면서(누가복음 6장 48~49절) 집을 짓는 사람이 나름대로 수고를 하였지만, 역시나 ‘큰물이 나고, 탁류가 부딪칠 때’(48~49절) 집이 곧 무너지게 된다.  우리말에 ‘공든 탑이 무너진다’는 속담이 있듯이 인간의 경영하는 모든 수고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시편 127편 1절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하면서 인생이 하나님을 알아야 할 것을 일깨운다. 마태복음에서는 산상설교로(마태복음 5~7장), 누가복음에서는 평지설교로(누가복음 6장) 적용되었지만, 예수말씀이 ‘반석 위에 세운 집’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교훈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사사기 55장 8~9절)  인간은 미래가 불안한 나머지 모아둔 재산을 허비하며 부질없이 신접인도 찾아가서 점도 보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다. 집 안에 부적도 들이고 심지어 우상을 모시기도 한다. 치성을 드리며 기도를 올리지만, 제 마음이 차지 않아서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까지 한다. 모두 신의 도움을 받아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인간의 연약한 모습의 발로이다.  예수말씀은 기껏 말씀을 듣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말씀하신 분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행동으로 보이며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길 것을 주문하신다. 당장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기도한 대로 행하라’는 말도 있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옮겨야 할 차원을 일깨우는 말이다. 예수말씀은 듣고 행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한국교회가 기도는 잘하고 말씀을 듣는 데는 열심이지만, 행동과 실천이 미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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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2
  • 주동홍박사, 개혁교회500주년 기념 연구발표
    ▲ 개혁교회 500주년을 맞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념대회에서 주도홍박사가 츠빙글리 연구를 발표했다.   츠빙글리는 루터주의자로 불리기보다 바울주의자로 호소 “하나님은 츠빙글리를 스위스에서 소중하게 사용하셨다”      2019년 개혁교회 500주년을 맞아 주도홍박사(전 백석대 부총장.사진)가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여기서 츠빙글리가 ‘독자적 종교개혁자’란 사실이 강조됐다.    주박사는 두 가지 면에서 츠빙글리의 독자성, 즉 루터와의 무관함을 들었다. 첫째는 1519년 츠빙글리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확신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주박사는 “이는 루터와 츠빙글리와의 정신적 무관함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이때는 츠빙글리에게 루터의 사상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시점이다”고 강조했더. 둘째는 츠빙글리가 1516년, 1519년의 자신의 새로워진 설교를 제시하는 점이다. 주박사는 “이 시점이야말로 종교개혁으로의 공개적 전환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츠빙글리가 자신의 독자적 종교개혁 행위를 드러내는 것은 루터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종교개혁이 이뤄졌음을 증명하고자 함이었다.    츠빙글리와 루터의 관계는 몇 차례의 변화를 보여준다. 주박사의 분석에 의하면 첫 번째 단계는 1518년 가을에서 1520년 여름까지로 “루터에게 매료된 단계”이며, 둘째 단계는 1520년 여름부터 1522년 초까지로 “교회 정치적 이유로 루터와 조금은 거리감이 있어지는 기간”이고, 셋째는 1522년부터 1524년까지의 단계인데, 신학적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루터와의 조심스러운 관계 설정이 이루어지는 기간”으로 볼 수 있고, 마지막 단계는 1525년에서 29년까지인데 무엇보다도 두 사람 사이 “성찬에 대한 구별된 이해로 날카로운 대립이 있었던 시기”이다.    이 가운데 주박사는 1522년 이후 1524년까지를 주목했다. 츠빙글리가 루터와의 신학적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조심스러운 행보를 하게 되는 시기이다. “우리와 함께 루터는 공동으로 복음적 교리를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루터파가 아니라, 우리는 복음적이다”는 츠빙글리의 말에 주목할 것을 주박사는 당부했다.    츠빙글리의 <67개 논제에 대한 해제>(1523년)는 루터와의 관계를 직접 말하는 문서이다. 주박사는 “18조에서 츠빙글리는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에 대해 적지 않은 분량으로 자신과의 관계를 밝힌다. 그는 루터를 ‘하나님의 성실한 종’,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전사’로 일컬으면서도, 자신을 루터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에는 사실이 아님을 밝히며 동의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주박사에 의하면 츠빙글리는 자신이 왜 루터주의자가 아닌지를 여섯 가지로 밝힌다. 츠빙글리는 △루터를 알기 전에 ‘오직 성경의 원리’를 실천했고 △오직 성경에만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으며 △교부들의 성경해석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중세교회와는 차별화된 오직 성경을 만방에 알리는 시점은 1519년이었으며 △마태복음 주석에서 주기도문 강해를 루터보다 앞서 출판했고 △교황청에서 취리히로 특사로 보낸 추기경들은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하기 전에는 츠빙글리를 루터주의자로 정죄하지도 부르지도 않았고 △츠빙글리는 자신을 루터주의자라고 일컬음을 받기보다는 바울주의자 아니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호소했다 등이다. 이렇게 츠빙글리는 자신을 루터주의로 불리는 것에는 반박하면서도 루터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마부르크 종교회의가 열렸던 1529년까지는 특히 성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로 루터와 츠빙글리가 날카롭게 대치했다. 주박사는 “이 기간에 츠빙글리는 루터와의 차별성을 내세웠는데, 루터는 종교개혁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조금은 분명하지 않은 여러 과정을 거쳤지만, 자신은 달랐다”며,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복음의 정수를 바로 터득하여, 교황권, 연옥설, 성인들의 조작된 중보기도를 거부하였”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츠빙글리의 사상이 전적으로 독자적이지는 않다고 주박사는 평가했다. 왜냐하면 “츠빙글리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특히 츠빙글리에게 있어 믿음 대신, 복음의 역할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중심사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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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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