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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건강한 설교이론 - ①
      박영식 목사     누구처럼 살아라, 누구를 본 받아라, 누구처럼 행하여 복 받아라, 누구처럼 살아야 성공한다 등의 말들은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나 청중들에게 매우 익숙하고 친숙한 표현들이다. 성경은 그 본문에 등장하는 족장이나 성인을 모범으로 제시하기보다는, 허점투성이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설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본문의 의미와 의도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단지 성경의 인물들을 영웅화하고, 마치 위인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미화하여 좋은 모범으로 삼으라는 식의 전형적인 인간 중심적 설교를 주로 하고 있다.   설교는 인간의 사상·철학이 아닌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  그러나 설교가 어떤 인간의 사상, 철학, 관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역이라고 할 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말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에 관한 책이다. 성경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행복한 결혼이라든지, 성, 직업, 혹은 체중 조절 등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경전 같은 책이 아니다. 비록 성경이 수많은 문제들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성경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은 무엇을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말하는 책이다. 설교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며,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설교에서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자리가 확보되어야 한다. 즉 설교자는 성경의 어느 본문에서든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신적 계시의 자리를 먼저 확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는 성경신학적 관점을 토대로 본문을 전체적인 맥락, 즉 설교 본문을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구속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본문을, 성경신학적 관점으로 면면히 흐르고 있는 구속사라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성경을 인간의 영웅담이나 위인 전기식 같은 인간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신적 계시의 자리를 먼저 확보해야  그런데 한국교회 설교의 특징은 본문을 전체적인 맥락에서가 아닌 설교자의 주관적 관점에서 본문을 파편적이고 원자적으로 보아 온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 설교의 특징에 대하여 김운용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교회 설교의 특징은 본문의 배경이 고려되지 않는 문자적 해석이 많고 알레고리칼한 해석도 자주 사용된다. 특히 본문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설교자가 정한 설교의 주제나 명제를 위한 보조 도구화하는(proof text) 경향과 ‘추출식 성서해석’의 방식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설교는 기본적으로 성경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그리고 제대로 드러내는 강해설교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적 설교로서 강해설교를 “성경 본문의 배경에 관련하여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 신학적으로 연구하여 발굴하고 알아낸 성경적 개념, 즉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할 때, 과연 작금의 ‘∼처럼 살아라’, ‘∼를 본 받아라’ 등 인간이 중심이 되고, 도덕적 교훈이 주를 이루는 이런 설교들을 성경적 설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또 성경신학적 토대 위에서 본문을 정당하게 다루며 성경 본문의 의도와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는 설교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된다.       / 실천신학박사, 건강한설교사역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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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4
  • 히스기야의 신앙
    하경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가 갑자기 죽는 일이 발생했다. 정권 이양 시 보통은 어수선하기 마련이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후계 작업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왕위에 오른 사르곤 2세는 곧바로 북이스라엘을 항복시키고, 그 백성들을 할라, 하볼, 메대 등으로 분산하여 이주시켰다. 이러한 강제 이주를 통한 혼혈정책은 피정복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아시리아의 독특한 통치 방식이었다. 이리하여 호세아 왕 통치 9년 차에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세자 시절부터 부왕의 곤경과 실패, 종교적 타락 및 불명 예스러운 죽음을 보았던 히스기야는 왕이 되고 나서 몇 년 지나지 않아 형제 국가가 멸망하는 모습까지 지켜 보았다. 더군다나 그가 왕이 되었을 때는 아시리아가 남유다까지 공격하려고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보다 크고 강한 나라였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힘없이 멸망하는 모습은 히스기야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는 금송아지 및 바알 숭배가 끊이지 않았던 북이스라엘의 모습은 분명히 잘못되었음을 느꼈을 것이다. 부왕의 정치적-종교적으로 부패한 통치, 또한 이로 인해 조상들의 묘실에 묻히지 못한 모습 또한 히스기야에게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히즈키-야후,’ 즉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의미이다.  이 진리를 깨달은 그는 가장 먼저 부왕에 의해 무너져 버린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쌓았다. 더 나아가 부왕이 들여온 우상들을 제거하며, 여호와만이 자신의 유일한 힘이 되심을 선포했을 것이다. 히스기야의 선왕 아하스는 아시리아를 의지하여 실패했고, 자신과 동시대에 통치했던 호세아는 아시리아에게 반항하다가 멸망하고 말았다. 따라서 진퇴양난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 외에는 다른 길이 전혀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로써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오히려 진정한 희망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C.S. 루이스의 표현처럼, 고난은 우리를 가까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정말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 이때가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문제 속에 함몰되지 않고,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나아간 히스기야의 신앙은 가히 감동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 희망이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그를 찾아오셔서, 친히 그의 힘이 되어 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더욱 감동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사면초가와 같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친히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길 소망한다     / 서울한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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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 [신학] 창조 이야기 - 2
    하경지교수   고대 근동에서 창조라는 개념이 우리의 현대적 개념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조직신학적 접근에 익숙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는 ‘무’로부터 어떠한 ‘존재’가 생겨난 사건으로 이해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개념을 부정할 의도는 없지만, 적어도 고대 근동의 창조 개념에서는 어떤 물질의 존재 여부가 큰 관심거리는 아니었다. 고대근동의 창조에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점은 창조된 존재에게 부여된 ‘역할’과 ‘기능’이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2절에 기록된 ‘공허’는 반드시 거기에 있어야만 하는 가치와 목적, 진실, 유익, 온전함이라는 개념이 결여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하심으로써 나타난 결과는 빛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점보다는 그 빛이 제 ‘기능’과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흔히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다고 하지만 땅에서 취한 ‘먼지, 티끌’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창 2:7). 이 재료는 고대 근동에서 알려진 신의 눈물(코핀 텍스트), 신의 살(아트라하시스), 신의 피(에누마 엘리쉬)와 같은 신성한 재료에 비해 턱없이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재료이다. 더 나아가 흙과 달리 티끌은 빚으려 해도 빚을 수조차 없는 형편 없는 재료에 불과할 뿐이다. 고대 근동 배경에서 읽는 창세기 1-2장의 창조 이야기는 올바른 창조 신앙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역할과 기능을 잘 감당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해와 달과 별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얼마나 성실하게 잘 담당하고 있는지 묘사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시 19:1-4). 이에 반해 하나님의 최초 대리자였던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불순종과 거짓말(창 3:1-13)로 인해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했다(창 3:18). 또한 그들의 자녀들 사이에 시기와 살인(창 4:3-10)이 있었으며, 가인의 자손 라멕은 자신의 잔인함과 포악(창 4:19-24)을 자랑으로 삼을 정도였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은 커녕 이스라엘은 자신의 계속된 죄로 인해 이방 땅으로 끌려간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사야를 통해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 선포되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 42:5-7). 하나님께서는 ‘먼지, 티끌’과 같은 우리를 빚어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셨다. 고대 근동의 배경 속에서 읽는 창조 기사는 우리로 하여금 더 적극적인 창조 신앙을 가지게 한다.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자,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게 하신 놀라운 은혜를 성도여,찬양하세!   / 서울한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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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4-04-26
  • [신학]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 4
    .   오늘날 공공신학은 신학의 여러 분과에 적용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선교학과의 대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공공신학과 선교학은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려는 목적을 공유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실천에 있어서도 비슷한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공공신학이 공적 영역에서 다양한 주체들과 상호협력을 통해 공동선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 선교학은 이방인(타 문화)과의 만남을 통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선교학은 오늘날 현대 사회의 맥락을 파악하고 분석하기 위해 공공신학을 필요로 하고, 공공신학은 신학의 형식과 방법을 넘어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내기 위해 선교학을 필요로 한다. 공공신학과 선교학의 교차점에 대한 연구는 조지 헌스버거(선교학자)로부터 시작됐다. 헌스버거는 ‘공적 선교학’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면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복음의 공공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교회는 복음을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종교적 표현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복음선포는 공적인 선언이자, 고백이었고, 선언문이었다. 뉴비긴이 말한 것처럼 복음은 “열린 비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신비가 공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고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공적으로 선포된 사건이다.   초대교회의 ‘에클레시아’는 복음의 공공성을 추구했다 어떤 이들은 교회가 세상 속에 대안 공동체로 세워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헌스버거는 그보다 세상과 동료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는 겸손한 자세로 세상과 동료애를 가져야 한다. 세상과 대결하고 대항하려는 자세보다 포용하고 감싸 안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을 향해 ‘겸손, 개방, 환대, 진실 말하기’ 등과 같은 자세를 취해야 한다. 복음 선포는 동료 시민들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과 겸손한 봉사 그리고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 속에서 꽃을 피울 것이다. 이런 자세가 바로 세속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덕목이며, 공공성을 증진하려 할 때 반드시 갖춰야 할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선교학에서는 문화인류학이나 선교역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바 있지만, 사회를 분석하는 틀로서 ‘공공성’은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현대사회학에서는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 형성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전개되고 있으며, 공공성에 대한 복합적인 개념들이 등장하고 있다. 공공신학은 주로 이런 사회적 역동과 그것이 전개되는 공론장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연구가 선교학에 접목된다면 복음과 문화에 대한 더욱 심층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레슬리 뉴비긴(신학자)이 제안하고, 데이비드 보쉬(신학자)가 확증한 것처럼 선교는 교회 전체의 삶을 아우르는 학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공공신학 역시 선교학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민주주의와 다원화된 세상 속에서 복음과 교회의 공적 차원을 연구하는 것은 결국 기독교적 증언의 새로운 차원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복음과 문화, 교회와 세상을 구분해 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지양하고, 복잡하고 다양하게 얽혀 있는 다원적 공론장 속에서 복음의 역할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 지점에서 공공신학이 선교학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 신학박사,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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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4-04-26
  • [신학]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 - 2
    최경환 박사 공공신학, 보편성과 합리성을 중요한 특징으로    공공신학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은 그 개념 규정의 모호성만큼이나 다양하다. 공공신학의 목적, 신학적 근거 혹은 ‘공공성’에 대한 의미 규정에 이르기까지 단일한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공신학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 자체가 공공신학에 대한 담론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이자, 그 내용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공공신학을 정의하고 규정하는 방식 자체가 신학적 공론장에서 하나의 의미 있는 신학 활동이면서 동시에 실천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공공신학’이라는 말은 마틴 마티(신학자)가 라인홀드 니버(기독윤리학자)의 사상을 연구한 과정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티는 이 논문에서 니버가 이후에 전개된 모든 공공신학을 위한 하나의 패러다임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이 용어는 다시 데이비드 트레이시(신학자)에 의해서 차용되었는데, 트레이시가 밝히고자 한 것은 공적인 삶 속에서 신학이 단순히 윤리적인 이슈들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학문으로서의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 근본적으로 질문한 것이다. 다시 말해 ‘신학이 공적인 담론 속에서 허용될 수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특별히 트레이시가 제시한 신학의 공적 영역은 ‘교회, 학문, 사회’로 요약된다. 모든 신학은 이 세 가지 영역에서 유의미한 담론을 제공해야 하고, 이들의 관심사를 포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학의 공공성은 특정한 전통이나 도덕성이 아닌 비판적인 기준을 갖춘 보편성을 통해 구성되어야 한다. 스택하우스(공공신학자) 역시 신앙은 철학이나 타종교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의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진정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기독교 신앙이 비판적인 검증을 통해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신적 현실은 반드시 보편적 현실이어야 하고, 신학자는 이 현실을 간문화적인 연구를 통해 적절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신학은 윤리, 법, 사회의 각 영역에서 모든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보편성과 합리성을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삼는다. 공공신학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 형식을 가져야 하고, 이는 공론장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 형성되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변증적 성격을 취한다.   반면, 공공신학을 보편성과 합리성, 세속화,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맥락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시도와 달리, 신앙과 공적인 삶의 관계를 갈등과 투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신학자들은 보편성에 근거한 공공신학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신학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저항 담론에 집중한다. 이들은 공공신학이 사용되고 있는 맥락과 상황을 강조함으로 시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신학의 초월성을 비판한다.    따라서 이들은 보편적인 공공신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존 드그루치(신학자)는 남아공의 공공신학이 북미의 공공신학과 다른 점은 고통받고 주변화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들을 돕기 위한 신학을 전개하는 것, 그리고 공적 영역의 변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신학박사,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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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4-04-22
  • [신학]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 - 3
    최경환 박사 교회는 민주 시민의 정신을 배양할 수 있는 모판이다    공공신학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다국적 기업을 옹호하는 보수적인 신학부터 전통적인 해방신학의 의제를 더욱 급진적으로 확장시키는 신학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세계화에 대한 의견도 저마다 다르고, 정치 참여에 대한 의견도 모두 다르다. 공공신학이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공론장의 성격에 대해서도 저마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정체를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하는 것이 공공신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공공신학은 각 지역의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이슈를 가지고 신학으로 대답하는 방식, 즉 귀납적으로 혹은 아래로부터 신학을 구성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한다고 하면 먼저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공공신학은 학제 간 연구이고, 다양한 학문과의 교류를 통해 신학을 재구성한다. 사회학, 정치학, 행정학, 철학, 문화연구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공공신학이 이런 학문의 도움을 받아 한국사회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도 갱신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점에서 공공신학은 어쩌면 신학의 내용이 아닌 그것의 전달 방식 혹은 태도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갖는다. 무엇을 선포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고 볼 수 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독선적이거나 배타적일 필요는 없다.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얼마든지 온유하고 겸손하게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핵심을 차지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을 자신 있게 그러면서도 온유하게 전하는 것과 타자의 신념을 존중하고 그들을 포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중요한 정체성이다. 심지어 세속 사회와 문화가 기독교에서 보기에 틀렸거나 악하다고 확신할 때조차도 이런 정체성은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든지 온화하고도 부드러운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을 시민사회에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체성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현대사회에서 시민은 누구든지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자유롭게 광장에서 말하고 표현할 수 있다. 종교 단체 역시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치적인 의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소통가능성과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수용할 수 있는 보편성의 획득이다. 만약 광화문에서 집회를 이어가고 있는 보수 기독교의 집회가 시민사회의 합리성과 보편성을 통과한다면 의미 있는 모임으로 확장될 수 있을 테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것이다.   파커 팔머(사회운동가)는 교회야말로 민주 시민의 정신을 배양할 수 있는 모판이라고 했다. 교회에서는 서로 다른 세대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정치적, 지리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성만찬에 참여한다.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의 습관을 키울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만약 교회에서 진정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배우고 실천하고 나눌 수 있다면,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될 것이다.   / 신학박사,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공동대표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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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건강한 설교이론 - ①
      박영식 목사     누구처럼 살아라, 누구를 본 받아라, 누구처럼 행하여 복 받아라, 누구처럼 살아야 성공한다 등의 말들은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나 청중들에게 매우 익숙하고 친숙한 표현들이다. 성경은 그 본문에 등장하는 족장이나 성인을 모범으로 제시하기보다는, 허점투성이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설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본문의 의미와 의도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단지 성경의 인물들을 영웅화하고, 마치 위인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미화하여 좋은 모범으로 삼으라는 식의 전형적인 인간 중심적 설교를 주로 하고 있다.   설교는 인간의 사상·철학이 아닌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  그러나 설교가 어떤 인간의 사상, 철학, 관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역이라고 할 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말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에 관한 책이다. 성경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행복한 결혼이라든지, 성, 직업, 혹은 체중 조절 등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경전 같은 책이 아니다. 비록 성경이 수많은 문제들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성경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은 무엇을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말하는 책이다. 설교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며,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설교에서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자리가 확보되어야 한다. 즉 설교자는 성경의 어느 본문에서든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신적 계시의 자리를 먼저 확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는 성경신학적 관점을 토대로 본문을 전체적인 맥락, 즉 설교 본문을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구속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본문을, 성경신학적 관점으로 면면히 흐르고 있는 구속사라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성경을 인간의 영웅담이나 위인 전기식 같은 인간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신적 계시의 자리를 먼저 확보해야  그런데 한국교회 설교의 특징은 본문을 전체적인 맥락에서가 아닌 설교자의 주관적 관점에서 본문을 파편적이고 원자적으로 보아 온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 설교의 특징에 대하여 김운용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교회 설교의 특징은 본문의 배경이 고려되지 않는 문자적 해석이 많고 알레고리칼한 해석도 자주 사용된다. 특히 본문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설교자가 정한 설교의 주제나 명제를 위한 보조 도구화하는(proof text) 경향과 ‘추출식 성서해석’의 방식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설교는 기본적으로 성경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그리고 제대로 드러내는 강해설교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적 설교로서 강해설교를 “성경 본문의 배경에 관련하여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 신학적으로 연구하여 발굴하고 알아낸 성경적 개념, 즉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할 때, 과연 작금의 ‘∼처럼 살아라’, ‘∼를 본 받아라’ 등 인간이 중심이 되고, 도덕적 교훈이 주를 이루는 이런 설교들을 성경적 설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또 성경신학적 토대 위에서 본문을 정당하게 다루며 성경 본문의 의도와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는 설교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된다.       / 실천신학박사, 건강한설교사역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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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4
  • 히스기야의 신앙
    하경지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가 갑자기 죽는 일이 발생했다. 정권 이양 시 보통은 어수선하기 마련이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후계 작업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왕위에 오른 사르곤 2세는 곧바로 북이스라엘을 항복시키고, 그 백성들을 할라, 하볼, 메대 등으로 분산하여 이주시켰다. 이러한 강제 이주를 통한 혼혈정책은 피정복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아시리아의 독특한 통치 방식이었다. 이리하여 호세아 왕 통치 9년 차에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세자 시절부터 부왕의 곤경과 실패, 종교적 타락 및 불명 예스러운 죽음을 보았던 히스기야는 왕이 되고 나서 몇 년 지나지 않아 형제 국가가 멸망하는 모습까지 지켜 보았다. 더군다나 그가 왕이 되었을 때는 아시리아가 남유다까지 공격하려고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보다 크고 강한 나라였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힘없이 멸망하는 모습은 히스기야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는 금송아지 및 바알 숭배가 끊이지 않았던 북이스라엘의 모습은 분명히 잘못되었음을 느꼈을 것이다. 부왕의 정치적-종교적으로 부패한 통치, 또한 이로 인해 조상들의 묘실에 묻히지 못한 모습 또한 히스기야에게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히즈키-야후,’ 즉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의미이다.  이 진리를 깨달은 그는 가장 먼저 부왕에 의해 무너져 버린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쌓았다. 더 나아가 부왕이 들여온 우상들을 제거하며, 여호와만이 자신의 유일한 힘이 되심을 선포했을 것이다. 히스기야의 선왕 아하스는 아시리아를 의지하여 실패했고, 자신과 동시대에 통치했던 호세아는 아시리아에게 반항하다가 멸망하고 말았다. 따라서 진퇴양난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 외에는 다른 길이 전혀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로써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오히려 진정한 희망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C.S. 루이스의 표현처럼, 고난은 우리를 가까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정말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 이때가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문제 속에 함몰되지 않고,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나아간 히스기야의 신앙은 가히 감동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 희망이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그를 찾아오셔서, 친히 그의 힘이 되어 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더욱 감동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사면초가와 같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친히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길 소망한다     / 서울한영대 교수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4-05-13
  • [신학] 창조 이야기 - 2
    하경지교수   고대 근동에서 창조라는 개념이 우리의 현대적 개념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조직신학적 접근에 익숙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는 ‘무’로부터 어떠한 ‘존재’가 생겨난 사건으로 이해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개념을 부정할 의도는 없지만, 적어도 고대 근동의 창조 개념에서는 어떤 물질의 존재 여부가 큰 관심거리는 아니었다. 고대근동의 창조에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점은 창조된 존재에게 부여된 ‘역할’과 ‘기능’이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2절에 기록된 ‘공허’는 반드시 거기에 있어야만 하는 가치와 목적, 진실, 유익, 온전함이라는 개념이 결여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하심으로써 나타난 결과는 빛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점보다는 그 빛이 제 ‘기능’과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흔히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다고 하지만 땅에서 취한 ‘먼지, 티끌’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창 2:7). 이 재료는 고대 근동에서 알려진 신의 눈물(코핀 텍스트), 신의 살(아트라하시스), 신의 피(에누마 엘리쉬)와 같은 신성한 재료에 비해 턱없이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재료이다. 더 나아가 흙과 달리 티끌은 빚으려 해도 빚을 수조차 없는 형편 없는 재료에 불과할 뿐이다. 고대 근동 배경에서 읽는 창세기 1-2장의 창조 이야기는 올바른 창조 신앙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역할과 기능을 잘 감당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해와 달과 별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얼마나 성실하게 잘 담당하고 있는지 묘사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시 19:1-4). 이에 반해 하나님의 최초 대리자였던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불순종과 거짓말(창 3:1-13)로 인해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했다(창 3:18). 또한 그들의 자녀들 사이에 시기와 살인(창 4:3-10)이 있었으며, 가인의 자손 라멕은 자신의 잔인함과 포악(창 4:19-24)을 자랑으로 삼을 정도였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은 커녕 이스라엘은 자신의 계속된 죄로 인해 이방 땅으로 끌려간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사야를 통해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 선포되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 42:5-7). 하나님께서는 ‘먼지, 티끌’과 같은 우리를 빚어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셨다. 고대 근동의 배경 속에서 읽는 창조 기사는 우리로 하여금 더 적극적인 창조 신앙을 가지게 한다.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자,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게 하신 놀라운 은혜를 성도여,찬양하세!   / 서울한영대 교수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4-04-26
  • [신학]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 4
    .   오늘날 공공신학은 신학의 여러 분과에 적용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선교학과의 대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공공신학과 선교학은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려는 목적을 공유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실천에 있어서도 비슷한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공공신학이 공적 영역에서 다양한 주체들과 상호협력을 통해 공동선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 선교학은 이방인(타 문화)과의 만남을 통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선교학은 오늘날 현대 사회의 맥락을 파악하고 분석하기 위해 공공신학을 필요로 하고, 공공신학은 신학의 형식과 방법을 넘어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내기 위해 선교학을 필요로 한다. 공공신학과 선교학의 교차점에 대한 연구는 조지 헌스버거(선교학자)로부터 시작됐다. 헌스버거는 ‘공적 선교학’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면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복음의 공공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교회는 복음을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종교적 표현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복음선포는 공적인 선언이자, 고백이었고, 선언문이었다. 뉴비긴이 말한 것처럼 복음은 “열린 비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신비가 공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고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공적으로 선포된 사건이다.   초대교회의 ‘에클레시아’는 복음의 공공성을 추구했다 어떤 이들은 교회가 세상 속에 대안 공동체로 세워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헌스버거는 그보다 세상과 동료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는 겸손한 자세로 세상과 동료애를 가져야 한다. 세상과 대결하고 대항하려는 자세보다 포용하고 감싸 안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을 향해 ‘겸손, 개방, 환대, 진실 말하기’ 등과 같은 자세를 취해야 한다. 복음 선포는 동료 시민들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과 겸손한 봉사 그리고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 속에서 꽃을 피울 것이다. 이런 자세가 바로 세속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덕목이며, 공공성을 증진하려 할 때 반드시 갖춰야 할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선교학에서는 문화인류학이나 선교역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바 있지만, 사회를 분석하는 틀로서 ‘공공성’은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현대사회학에서는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 형성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전개되고 있으며, 공공성에 대한 복합적인 개념들이 등장하고 있다. 공공신학은 주로 이런 사회적 역동과 그것이 전개되는 공론장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연구가 선교학에 접목된다면 복음과 문화에 대한 더욱 심층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레슬리 뉴비긴(신학자)이 제안하고, 데이비드 보쉬(신학자)가 확증한 것처럼 선교는 교회 전체의 삶을 아우르는 학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공공신학 역시 선교학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민주주의와 다원화된 세상 속에서 복음과 교회의 공적 차원을 연구하는 것은 결국 기독교적 증언의 새로운 차원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복음과 문화, 교회와 세상을 구분해 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지양하고, 복잡하고 다양하게 얽혀 있는 다원적 공론장 속에서 복음의 역할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 지점에서 공공신학이 선교학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 신학박사,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공동대표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4-04-26
  • [신학]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 - 2
    최경환 박사 공공신학, 보편성과 합리성을 중요한 특징으로    공공신학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은 그 개념 규정의 모호성만큼이나 다양하다. 공공신학의 목적, 신학적 근거 혹은 ‘공공성’에 대한 의미 규정에 이르기까지 단일한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공신학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 자체가 공공신학에 대한 담론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이자, 그 내용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공공신학을 정의하고 규정하는 방식 자체가 신학적 공론장에서 하나의 의미 있는 신학 활동이면서 동시에 실천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공공신학’이라는 말은 마틴 마티(신학자)가 라인홀드 니버(기독윤리학자)의 사상을 연구한 과정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티는 이 논문에서 니버가 이후에 전개된 모든 공공신학을 위한 하나의 패러다임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이 용어는 다시 데이비드 트레이시(신학자)에 의해서 차용되었는데, 트레이시가 밝히고자 한 것은 공적인 삶 속에서 신학이 단순히 윤리적인 이슈들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학문으로서의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 근본적으로 질문한 것이다. 다시 말해 ‘신학이 공적인 담론 속에서 허용될 수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특별히 트레이시가 제시한 신학의 공적 영역은 ‘교회, 학문, 사회’로 요약된다. 모든 신학은 이 세 가지 영역에서 유의미한 담론을 제공해야 하고, 이들의 관심사를 포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학의 공공성은 특정한 전통이나 도덕성이 아닌 비판적인 기준을 갖춘 보편성을 통해 구성되어야 한다. 스택하우스(공공신학자) 역시 신앙은 철학이나 타종교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의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진정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기독교 신앙이 비판적인 검증을 통해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신적 현실은 반드시 보편적 현실이어야 하고, 신학자는 이 현실을 간문화적인 연구를 통해 적절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신학은 윤리, 법, 사회의 각 영역에서 모든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보편성과 합리성을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삼는다. 공공신학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 형식을 가져야 하고, 이는 공론장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 형성되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변증적 성격을 취한다.   반면, 공공신학을 보편성과 합리성, 세속화,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맥락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시도와 달리, 신앙과 공적인 삶의 관계를 갈등과 투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신학자들은 보편성에 근거한 공공신학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신학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저항 담론에 집중한다. 이들은 공공신학이 사용되고 있는 맥락과 상황을 강조함으로 시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신학의 초월성을 비판한다.    따라서 이들은 보편적인 공공신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존 드그루치(신학자)는 남아공의 공공신학이 북미의 공공신학과 다른 점은 고통받고 주변화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들을 돕기 위한 신학을 전개하는 것, 그리고 공적 영역의 변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신학박사,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공동대표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4-04-22
  • [신학]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 - 3
    최경환 박사 교회는 민주 시민의 정신을 배양할 수 있는 모판이다    공공신학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다국적 기업을 옹호하는 보수적인 신학부터 전통적인 해방신학의 의제를 더욱 급진적으로 확장시키는 신학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세계화에 대한 의견도 저마다 다르고, 정치 참여에 대한 의견도 모두 다르다. 공공신학이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공론장의 성격에 대해서도 저마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정체를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하는 것이 공공신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공공신학은 각 지역의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이슈를 가지고 신학으로 대답하는 방식, 즉 귀납적으로 혹은 아래로부터 신학을 구성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한다고 하면 먼저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공공신학은 학제 간 연구이고, 다양한 학문과의 교류를 통해 신학을 재구성한다. 사회학, 정치학, 행정학, 철학, 문화연구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공공신학이 이런 학문의 도움을 받아 한국사회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도 갱신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점에서 공공신학은 어쩌면 신학의 내용이 아닌 그것의 전달 방식 혹은 태도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갖는다. 무엇을 선포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고 볼 수 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독선적이거나 배타적일 필요는 없다.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얼마든지 온유하고 겸손하게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핵심을 차지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을 자신 있게 그러면서도 온유하게 전하는 것과 타자의 신념을 존중하고 그들을 포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중요한 정체성이다. 심지어 세속 사회와 문화가 기독교에서 보기에 틀렸거나 악하다고 확신할 때조차도 이런 정체성은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든지 온화하고도 부드러운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을 시민사회에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체성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현대사회에서 시민은 누구든지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자유롭게 광장에서 말하고 표현할 수 있다. 종교 단체 역시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치적인 의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소통가능성과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수용할 수 있는 보편성의 획득이다. 만약 광화문에서 집회를 이어가고 있는 보수 기독교의 집회가 시민사회의 합리성과 보편성을 통과한다면 의미 있는 모임으로 확장될 수 있을 테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것이다.   파커 팔머(사회운동가)는 교회야말로 민주 시민의 정신을 배양할 수 있는 모판이라고 했다. 교회에서는 서로 다른 세대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정치적, 지리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성만찬에 참여한다.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의 습관을 키울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만약 교회에서 진정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배우고 실천하고 나눌 수 있다면,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될 것이다.   / 신학박사,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공동대표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4-04-22
  • [신학] 창조이야기 - 1
    하경지교수   간혹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홍수, 바벨탑과 같은 이야기들이 성경 밖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성경 밖에서 성경과 비슷한 기록들이 발견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기에 그분이 계신다는 흔적이 만물에 남아있기 때문이다(롬 1:20). 따라서 우리는 그 흔적들인 고대 근동 자료들을 통해 구약의 사상을 더 깊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성경 본문을 대할 때 우리가 성경의 일차적인 수신자가 아닌 것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를 위한 책이지만, 우리를 일차적인 대상으로 기록한 책이 아님도 감안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우리를 위한 것이지만, 우리에게 직접 쓴 것은 아닌’ 것이다.   구약성경의 일차적인 독자였던 고대 이스라엘인 및 주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창조기사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고대근동의 문화 속에서 살았던 그들에게는 창세기의 창조기사가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의 도움 없이 홀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때문이다. 고대 근동의 신들은 각자 자신의 영역을 담당하고, 때로 이해관계가 발생했을 때는 서로 싸우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집트에서는 18명 가량의 창조신들이 각각 자신의 역할인 계절, 출생, 잠, 치료, 꿈, 부와 가난, 세대 계승 등을 담당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는 하늘의 신 ‘아누’가 하늘을 차지했고, 대기의 신 ‘엔릴’이 땅을 차지했으며, 죽음의 여왕 ‘에레쉬키갈’이 지하세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후 바벨론에서는 창조신 ‘마르둑’이 ‘티아맛’ 여신의 몸을 쪼개어 윗물과 아랫물의 경계를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고대 근동의 이야기들은 다신론적 배경 속에서 신들 사이의 역할 분담 및 대립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에 반해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다른 신들의 도움 없이 모든 만물을 ‘홀로’ 창조하셨다. 창세기의 일차 독자들이 충격을 받았을 두 번째 이유는, 고대 근동에서 신으로 여겼던 신들이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수메르의 신들인 하늘(아누), 땅(키), 해(우투), 바람(엔릴), 물(엔키), 달(난나), 별(이난나)은 모두 하나님께 순종하는 피조물들로 묘사된다. 고대 근동에 살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그저 하나님의 피조물로 취급되는 것으로 인해 화가 치밀어 올랐을 수도 있다.   창세기 1장 27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형상대로’라는 한글번역(개역개정)은 좀 어색한 감이 있다. 마치 하나님의 형상이 따로 있어서 그것을 본떠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의미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으로’라는 번역을 제안하고 싶다. 고대 근동에서 신의 형상은 신의 속성을 지녔으며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보통 그 형상은 왕이나 우상을 지칭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즉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창조되었다고 한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더 나아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게(창 2:18)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하도록 지음받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 서울한영대 교수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4-04-22
  • [신학]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 1
      최경환 공동대표   참된 신앙은 교회에서만이 아닌 사회 속에서 구현되어야   오늘날 많은 이들이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시급한 과제로 교회의 공공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라든가 제자도의 신학을 넘어 이제는 공적인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단순히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이 직장에서 성실하고 착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신학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최근 공공신학이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고, 국내에도 이제 조금씩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먼저 공공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공공성은 어떤 의미이며, 기존에 신학의 한 분과로 다루던 기독교윤리와 무엇이 다른지 설명해 보려 한다. 일반적으로 공공성은 사적 영역과 반대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대부분은 사적인 신앙으로 환원되는 경우가 많다. 신앙생활을 개인의 신앙체험이나 내면의 영성으로만 설명한다든가, 조금 더 확장하면 교회중심주의로 이해하려는 경우가 많다. 분명 신앙의 어떤 부분은 사적이다. 하지만 공공신학은 신앙의 공적 영역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한 명의 시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신앙은 단순히 골방이나 교회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부분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일반 사회 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신앙은 공적이다.   공공신학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이후 시민사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학의 제반 문제들을 다룬다. 여기서 공공신학은 현대사회 속에서 민주적인 삶을 떠받치고 있는 활동 영역, 즉 ‘공론장’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이 창조 세계를 통해 드러난다고 믿는 자들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성품을 통해 그 사랑을 알 수 있고,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것을 믿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공적 영역으로 나가야 하며, 이 세상의 영혼과 문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복음은 공적인 영역에서 선포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공적인 영역에서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복음, 교회, 신학은 항상 세상과 관련이 있고, 구체적으로 공적인 삶과 관련이 있다. 즉 복음은 창조, 역사, 문화, 사회에서의 삶, 그리고 인류애 전체를 포괄한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위치와 부르심에 대한 이러한 보편적인 인식은 전통적으로 신학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했다. 공공신학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공적인 삶 속에서 교회의 위치와 교회의 사회적 형식, 그리고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을 주로 다룬다.  교회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항상 세상 안에 존재하며 세상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또한 자신이 알든 모르든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공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회는 세상, 정치, 시민사회와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신학적으로 고민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공공신학의 과제라 할 수 있다.   / 신학박사,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공동대표
    • 신학/선교/해외
    • 신학
    2024-04-09
  • 선거와 한국기독교 - ④
    배덕만교수 선거와 한국기독교 - ④   근본주의·반지성주의의 실수와 기독인의 올바른 선거  한국 개신교가 근본주의적 성향을 갖는 것이 문제되는 이유는 특정한 정치집단이나 정치적 성향과 배타적으로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해방과 한국전쟁 후 강력한 반공사회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남한의 우익정권에 적응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런데 이것이 원래 기독교의 본질과 같은 흐름인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한국 개신교는 보편적인 형태, 즉 성경적으로 정통성에 선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누구만의, 누구만을 위한, 특정 정치성향을 지지하는 기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정치와 이념의 갈등 속에서 특정한 진영에 서 있는 기독교가 아니라 모두를 아우르고 제3의 지대에서 중재하고 통합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역사를 견인해 나가는 자리에 서야 한다. 시대와 역사를 초월해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본래의 기독교로 돌아가야 한다.   보통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과 성서비평학, 그리고 진화론에 대한 신학적 고민으로 등장했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신학적 근본주의는 세월이 지나가면서 윤리 문제가 파생되고, 정치경제적 문제와 연동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근본주의는 신학적 문제(성서무오설, 세대주의종말론)만 관심을 갖는데, 윤리적으로 가니까 복제문제, 낙태문제, 동성애문제가 이슈가 됐고,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여기에 반공, 친미가 한국 근본주의에서 중요한 아젠다라고 다뤘다.   오강남교수(리자이나대 비교종교학)는 모든 종교는 심층과 표층이 있다고 말한다. 보다 진리를 추구하는 차원이 있기도 하지만, 종교의 힘을 빌려 현실 문제 해결하려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근본주의의 상당수가 후자, 표층적 종교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신학적으로 출발했는데, 성서비평학이나 진화론, 과학의 발견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학문의 장에서 진지하게 대결하지 않고, 오히려 현대신학이 무신론적이고 세속적 인본주의라고 봤다. 세상의 학문적 발전을 악마의 궤계로 폄하했다. 그래서 일반대학 내의 신학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순수하게 성경과 교리만 가르치겠다는 ‘성경학교’ 혹은 ‘성경대학’에 진학하고 목회자로 사역했다.    기독교 본질에 대한 공부필요, 신학자와 목회자의 몫. 이런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세상 학문을 비난하고 과학적 성취를 반기독교적이라고 가르쳤다. 미국의 경우 보수적인 정권의 지지자 중에는 이런 분위기에서 교육받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런 것들이 먹혀들어가는 것이 반지성주의의 폐해다.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하고, 근본주의적 신앙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총체적이고 상식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한국교회를 약화시키는 근본주의와 반지성주의를 극복하고 올바른 신앙적 기준에서 행동할 수 있을까. 결국은 공부다. 한국 현대사와 한국 기독교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공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마치 진리인 듯 뿌려지는 기도제목 이라는 명목의 가짜 뉴스 등에 반대되는, 제대로 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는 노력들이 교회와 단체마다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계몽시킬 책임은 목회자와 학자들에게 있다.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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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2
  • [신학] 선거와 한국기독교 3
    배덕만 교수                                       그리스도인은 현실에 대한 날카롭고 예언자적인 태도로 선거에 임해야 한다    이 글을 마치며 이상에서 선거의 역사를 간략히 살피면서, 각 선거에서 개신교가 참여ㆍ대응했던 방식도 함께 검토했다. 이제. 이런 역사와 제언을 토대로 곧 총선을 앞둔 개신교인들을 향해 몆 가지 제언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 이번 선거을 통해, 개신교는 특정 이념 및 정당과 자신을 배타적으로 동일시 해왔던 오랜 관행을 청산해야 한다. 분단과 냉전을 배경으로 남한에서 재구성된 개신교는 ‘반공, 친미, 친자본’의 전위대로 맹활약을 해왔다. 덕택에, 특정 권력층이 부여한 특혜와 특권을 누리면서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특권적 지위를 획득ㆍ유지하기 위해, 개신교는 복음을 타협하고 예언자적 책임도 회피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따라서 특혜와 특권을 부여했던 특정 정권 및 이념과의 밀월관계도 청산하고 철저하게 “백의종군”해야 한다. 그래야 "빛과 소금"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착오적 극우세력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둘째, 당분간 광장에서 함성을 멈추고, 골방에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분명히, 개신교가 한국의 문화를 선도하고, 정치와 경제를 이끌었던 때가 있었다. 수와 양은 여전히 소박했지만, 사회적ㆍ문화적 영향력은 비범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개신교는 몸집이 급속도로 거대해지고 힘도 막강해졌다. 장로 대통령을 만들어 내고 법안을 폐기시킬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전성기가 막을 내리자, 광장에 모여 폭언과 망언의 말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장에 빈번히 다수가 모여 막말을 쏟아낼수록, 사회의 반응은 싸늘해지고 혐오감은 급상승했다. 동시에, 개신교 내부의 모순과 오류가 만인의 상식이 되면서 어느 새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분명히, 개신교가 담대히 광장으로 나가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광야와 골방으로 물러날 때가 아닐까? 분명히 세상이 듣도록 함성을 외쳐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침묵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할 시간이 아닐까?   셋째, 이익집단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ㆍ공적 종교로 성숙해야 한다. 그동안 선거에서 개신교가 보여준 모습은 과거에 향유하던 특권을 유지 혹은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정치 집단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선거의 존재 이유라고 항변할 수 있지만, 그 순간 개신교는 자신이 또 하나의 이익집단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기적 욕망으로 끊임없이 분열하고 갈등하는 세상에서 보편적 가치와 공적 진리를 전파하여 상생과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고등종교의 본질이고 사명이다.    그런 숭고한 책임과 역할을 포기하는 종교는 단지 미신과 사이비일 뿐이다. 따라서 개신교가 이기적 욕망에 집착하여, 보편적ㆍ공적 가치를 외면할수록 한국사회에서의 입지는 빠르게 축소될 것이다. 반면, 타자를 존중하고 공동체적 이상에 충실할수록,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용기 있게 내려놓을수록, 한국사회는 개신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이번 선거가 개신교에게 성숙과 변화의 기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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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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