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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한박사의 역사적 예수 시리즈
    역사적 예수의 독특성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이 감히 부르지 못했던 하나님을 "압바"(Aββα, abba, 아버지)라는 가장 친근한 호칭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아버지 호칭은 복음서에서는 150회 이상이나 기록되어 있다. 12세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 축제에 부모와 같이 와서 없어져 버렸는데 부모가 근심하여 찾다가 성전에 있는 그를 발견하였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라고 질책한다. 이에 대하여 소년 예수는 독특한 문장으로 대답한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소년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압바”(abba)라는 호칭은 독특하다. “내 아버지 집”이란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집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인 하나님의 전을 말한다.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른 것이다. 예수는 그의 복음 전파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지칭할 때 어느 누구도 부를 수 없는 친근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십자가 상에서 숨을 거두시면서 하신 예수의 마지막 말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었다. 유대교 문헌에 정통한 독일의 신약학자 여호야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압바”(abba)라는 단어는 역사적 예수가 친히 쓴 아람어라고 밝히고 있다.   I. 구약에서의 하나님 아버지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 토기장이와 진흙, 주관자와 복종자의 관계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집단적인 내지 비유적인 의미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처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신명기에는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묘사된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시편 저자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에 비유하였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유대인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호칭으로 부르기를 꺼려하였고, 다른 편으로는 아버지 호칭을 집단적인 의미 내지 비유로 사용해왔다. 이러한 유대교의 하나님 “아버지” 호칭에 대하여 나사렛 예수는 새로운 의미, 즉 신약적인 독특성을 부여하였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족관계로 표시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부자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부성을 강조한 것은 바로 유대의 전통적 사상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분명히 설명해 준다. 예수의 아버지 호칭은 유대교가 의미하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부자(父子)관계로 끌어 올리는 혁명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그것은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와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이 호칭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더 이상 주인과 종 사이의 비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자녀에 대해 베푸는 아버지의 무한한 긍휼과 인자에 대한 신뢰가 담겨져 있다. 예수는 자기와 우리의 관계를 친구 관계로 격상시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예수는 우리의 친구요, 우리는 예수의 친구로서 예수를 통하여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예수는 맏형이여 우리의 그의 형제로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   II. 호칭 "압바"(Abba)의 함축성   나사렛 예수가 사용한 하나님에 대한 “압바”(아람어로는 abba, 아버지)라는 호칭은 유대교적인 하나님 상(像)의 틀을 깨뜨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예레미아스는 당대의 유대교 문헌을 연구한 후에 “유대교 기도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압바’라고 언급한 유비를 전혀 찾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구약 전체는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성을 강조하고 야웨와의 친밀성을 두려워하고 피하고자 한데 반해서 예수는 일상적으로 하나님을 아주 친근한 용어로 불렀다. “아버지” 호칭은 다음의 함축성을 지닌다.   1.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깊으신 관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와 같이 보살피신다. 우리에게 의식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부모가 자녀들의 의식주를 돌보아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기본을 돌보아 주신다. 예수는 어떤 조건을 제시하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하여 근본적인 신뢰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소박한 믿음을 말한다. 예수는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심정을 지니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시고 계신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예수는 하나님이 무섭고 벌을 주시는 재판관이 아니라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시고 마련해주시는 부모보다 더 사랑과 자비로써 우리를 보살피시는 분이라고 가르치신다.   2. 자녀 하나 하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하나 하나를 눈동자 같이 머리털까지 세고 계시는 세밀한 사랑이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과 같다고 예수는 설교하신다. 그 양을 찾으면 목자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하며 집에 돌아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눅 15:6)라고 말하듯이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3.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계: 직접성과 단순성을 나타낸다.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이다. 단지 형식이나 의식(儀式)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아직도 종교적 차원이다. 하나님은 자유스러운 마음,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배와 찬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애원하는 심령에서 나오는 자녀의 소박한 기도를 들어 주신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나님께 기도하고 요구하는 데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직접성과 단순성이 요구된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 자식이 아버지 앞에서 주저한다면 그것은 참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앙의 자연스러운 관계로 나타내고 계신다.   4. 자녀의 고통에 함께 하시는 분, 하나님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시고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고통은 율법적인 인과응보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징계로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통에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는 겸손해지고 우리의 인생은 더욱 깊어진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묻는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유대인들에 의하면 질병은 죄의 결과이다(요 5:14). 맹인의 경우는 그 부모의 죄의 결과로 보아야 했다. 예수는 대답하신다: “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맹인은 “실로암에 가서 씻어라”는 예수의 말씀에 따라 씻고 밝은 눈을 가지게 되었다(요 9:7). 맹인은 보게 됨을 통하여 그를 치유한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맹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간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자녀인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우리를 그 분의 원하시는 그릇으로 만드신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당하는 이 세상의 고통과 박해에는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시고 좋은 것으로 갚아주신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이다. 이 하나님의 고통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5. 아버지로서 자녀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신다.   하나님은 구약의 율법학자들이 생각했듯이 그의 자녀에게 단지 준엄한 재판관이나 율법 집행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녀에게 어느 계명을 지켰는지 보시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가졌는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보신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예수의 설교는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탕자의 비유)(눅 15장)에서 나타난다. 탕자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라고 아버지에게 참회의 고백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게의치 않고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사실 자체를 기뻐하신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품꾼의 하나로 받아들라고 돌아온 아들을 즐겨 맞이해주시고 잔치상을 베풀어주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비유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아낌없이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훈해 주고 있다.   6.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한 형제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한 형제가 된다. 여기에는 백인, 황인, 흑인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없으며, 지식인과 비지식인의 차이가 없으며, 권력자와 서민의 차이가 없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고 인종이란 진화가 빚어낸 적자생존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형상에 따라서 지음을 받은 창조의 작품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아바지 되심 앞에서 모든 인종 계층의 구별이 사라진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하나님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진화론적 인간관은 인간을 자연과정이나 만물과 다름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았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동등하며 자연보다 존귀하다고 본다. 형제 자매가 아버지 앞에서 하나인 것처럼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하나의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계 21:26).   III. 예수의 영 안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부성(父性)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부성)이란 나사렛 예수에 대한 믿음 안에서만 계시되고 그 안에서 호칭되어진다. 혈과 육이라는 자연적인 관계로는 정립되지 않는다. 요한은 다음같이 증언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하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오늘도 예수를 믿고 그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아들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같이 증언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압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영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압바”(abba,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5-16). 오늘날에도 신자인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압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친히 “압바!”라고 불렀던 예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압바”라고 불렀던 역사적 예수의 실재에 대한 연속성을 체험하게 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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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1
  • 민경배박사, 한국교회사연구원에서 논문발표
      3·1운동은 전한국인의 일치된 전무후무한 동시동원의 운동 일본 기독교가 3·1운동에 매우 적대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     한국교회사학연구원·한국기독교사학회는 지난 9일 새해 첫 학회와 원장 이취임식을 열었다. 권 평교수가 신임회장에 취임했고, 취임식 후에는 류금주박사의 사회로 신년토론회가 진행됐다. 여기서 민경배박사(사진)가 “3·1 독립운동. 진영논리의 미문(迷問)”이란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민박사는 3·1운동은 일제에 항거한 거족적 독립운동만이 아닌 기독교의 거대한 힘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3·1독립운동은 전국 전한국인의 일치된, 역사상 전무후무한 동시동원의 거대한 운동이었다”며, “3·1독립운동은 우리 한국민 일체의 창세기 그 원전이다”고 주장했다.    민박사는 “그 주동 견인, 동원 동력이 한국교회였다는 것은 대서특필되고 복창되어야한다”며, “동서, 좌우, 상하가 ‘하나’로 또 ‘한 몸’으로 궐기했다”며, “종교간의 결속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발사, 수레꾼, 잡화상, 교사, 승려, 학생, 재봉업자, 심지어 술장사, 예기(藝妓) 등의 동참 행진이 눈부셨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당시 기독교인 수는 전인구의 1.5%였음을 상기시켰다. 민박사는 “오늘은 인구의 27%-30%에 이른다. 그렇다면 현재 그만큼 우리의 역사적 사명 수행의 가능한 저력원이 확보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민박사는 일제 기독교가 오히려 반한적(反韓的)이라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그것은 “한국교회사에 세계사의 투영”이다. 민박사는 일본 기독교가 3.1운동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은 역사문제로 한·일갈등이 증폭하는 현 시국에서 큰 울림을 갖는다.      민박사는 “경성 일본기독교회 목사 아끼츠기는 3.1독립운동을 ‘폭동’이라 했다. 친한으로 이름이 알려졌던 우찌무라는 3·1독립운동 피해보고는 ‘날조 과장’이라 경멸했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제암리교회의 비극적 사건은 “아리따 도시오 헌병중위 일대가 자행한 범행인데, 그는 일본군 제20사단 39여단 제78연대 소속이었다. 그런데 헌병대사령관이 하세베 헌병대좌로 바로 그 경성교회 장로였다. 그는 15일 간의 중근신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민박사는 당시 일제 고위층에서 3.1독립운동을 동조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렸다. 일본 황도파의 거물 도꾸도미가 대표적이다. 민박사에 의하면 그는 일제 군벌의 수장 야마가다와 친한 친구였고, 천황과도 가까웠다. 3·1운동 당시에는 ‘The Seoul Press’의 총감독으로도 있었다.    그런데 “도꾸도미는 1919년 3월에서 11월 논설에서 인도주의를 외쳤고 일제군경의 만행을 계속 매섭게 고발하고 있었다. 그 소요진압방법이 ‘벨기에 훈족들과 다름없는 만행’이라 규탄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4월 30일 사설에는 3월 15일 자행된 제암리사건을 대대적으로 취재 기사화했고, ‘그 잔학으로 일제는 지탄받아야 한다’고 분노했다.    다른 한 사람은 총독부 종교과장 나까라이 기요시이다. 민박사는 “그는 조선을 총체적으로 알려고 하면 조선에 있어서의 기독교를 알아야 하며, 일본인 중에 ‘한국기독교를 공격하는 もの가 있다’고 노발했다”며, “그리고 마침내 ‘역시 자기 나라는 아무리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자기들 손으로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고 공언했다”고 설명했다. 민박사는 이것이 사실상 ‘독립인정’이라고 평가했다.    끝으로 민박사는 “저 건너 쪽 도처에 우리와 손잡는 섹타가 있다. 여기 세계역사의 희망과 약속이 있다. 우리는 절대 외롭지 않다. 선과 의는 편재한다”고 마무리했다.    한·일 간의 역사갈등, 무역갈등이 증폭되는 상황에서 3·1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 민경배박사의 발표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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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0
  • 현대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1)
      태초에는 무엇이 존재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 현대인들이 우주 너머를 생각하면서 할 수 있는 대답은 대개 두 가지로 나눠진다.   창조론을 믿는 유신론자들은 신이 존재했다고 말한다. 반면에 진화론을 믿는 무신론자들은 물질이 초고밀도로 응축된 아주 작은 ‘특이점(Singularity)’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고대 동양철학자들은 음양의 세계인 태극이 있었다고 말한다.   현대 과학자들은 ‘열역학 제1법칙’(또는 ‘에너지보존법칙’)을 제시하면서 영원불변의 에너지가 존재했다고 한다. 그런 존재들의 명칭은 태초 이전에, 아직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아니한, 최초의 자연적 세계를 각각 다르게 표현하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에너지 세계의 존재는 과학적 지식인이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검증된 사실이다. ‘에너지 물질 등가의 법칙’(E=mc2)에 따라 ‘특이점’과 에너지는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태초에 에너지는 에너지로 존재했을 것이다.   유신론적 관점에서 에너지 세계는 창조의 신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특이점’은 태초의 빅뱅 사건 이전에 에너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물질이 아주 작은 크기로 응축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신의 처소를 감추려는 진화론자들의 속임수이다. 태초에 자연은 그렇게 존재했다.   자연의 역사에서 서로 대립적인 창조론과 진화론의 두 가지 관점은 비교해볼 문제가 많이 있다. 창조론에 의하면 태초의 자연은 신이 창조의 손길을, 진화론에 의하면 ‘특이점’이 빅뱅을 시작하면서 변화의 역사를 시작했다. 그 이후 현재까지 자연의 역사는 끊임없이 진행되어왔다.   여기에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지구 생명의 기원에 관한 문제이다. 지구 생명의 기원에 창조론은 창조주이신 신이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화론자 오파린(A.I. Oparin)은 1922년에 러시아 식물학회에서, 지구 생물들은 물질의 화학작용으로 ‘스스로’ 생겨난 최초의 생물이 진화한 것이라는 화학적 진화론을 주장했다.   이후 오파린은 인간이 인공생명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강변하면서 유물론과 진화론을 결합한 과학적 무신론을 전파했다. 신의 존재와 신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인공생명의 제작에 계속 매달려왔으나, 아직껏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에 창조론자들은 신이 최초의 자연에서 자기의 기원을 “스스로 있는 자”(출3:14)라고 선포한 사실과 그가 우주만물과 지구의 생물들을 종류별로 창조했다고 서술한 창세기의 기록을 믿는다.   그렇다면 진화론은 그동안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지구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잘못 주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직도 적지 않은 현대인들이 인공생명 만들기에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속임수에 빠져 진화론을 잘못 믿고 있다. 이제 창조론은 우리우주가 생기기 이전 태초의 자연에서 스스로 존재하셨던 신이 영원불변의 에너지를 빅뱅의 방법으로 우주물질로 전환하시고, 우리우주에서 지구가 형성된 때에 지구의 생명들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창조론과 진화론을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보다 합리적으로 이해한다면, 진화론은 더 이상 신의 존재와 그의 창조를 부정하는 이론이 아니고, 거꾸로 창조주인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론으로 쓰이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 기독교인들은 그동안 과학적 지식이 없어 진화론을 이용하여 신의 존재와 그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침묵했던 과거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명령하신 선교의 사명을 완수하는 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현대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있는 자”의 이름에서 과학적 지식으로 깨달아야 할 의미가 아닐까?   - 케리그마신학연구원 허정윤박사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7417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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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7
  • 손주철박사, 평화에 대한 평화학적 연구발표
      대신관계, 대인관계, 피조물 관계에서 성경적 평화를 조명 “탐심전쟁의 실낙원에서 벗어나 신국낙원으로 가야 한다”     새로운 해를 맞아 평화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동서남북평화재단을 이끌고 있는 손주철박사(사진)가「한반도 평화를 위한 평화학적 조망들」이란 논문을 발표해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손박사는 기독교적 평화를 대신관계, 대인관계,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성찰했다. 첫째, 대신관계에서는 하나님과의 믿음-순종-평화냐 아니면 불신-반역-전쟁이냐에 따라 개인과 사회, 국가와 세계의 역사에 그에 상응하는 평안이냐 재앙이냐, 평화냐 전쟁이냐가 결정되었다. 손박사는 “대신관계의 아담적인 악순환, 불신 불순종의 역사가 죄와 사망의 인류사의 전형이라면, 인류역사의 대역전극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순종의 새 역사의 전형으로 생명역사의 선순환을 이루고 평화인간-평화세계의 하나님나라를 완성하였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사인 영생과 성령의 생명의 법으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서 생명과 평안을 누린다고 바울은 그 평화신학의 평화메시지를 전한다”고 손박사는 설명했다.   둘째, 대인관계에서 평화에 대해 손박사는 가인의 아벨 살해를 주목한다. 손박사는 “인류 유전자 속에 형제살인의 DNA를 갖고 있어 형제의 난이 인류사에 비일비재한 것이 아닌가 싶다다”며, “한반도의 근현대사에 동서분열, 남북대결 구도가 이런 원시적 원죄의 유산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원수에게 앙갚음하여 되받아치거나 스스로 복수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 교훈의 핵심인데, 이 평화명령을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사람을 입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가 모든 사람과 평화할 수 있다”며, “성경의 증언대로 성령의 도우심이 평화명령을 준행하여 평화를 열매 맺는데 결정적이다. 성령을 부어주심이 있기에 평화인간-평화세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셋째, 피조물과의 평화에서 피조물(ktisis)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로마서8:19)을 기다린다. 손박사는 “피조물과 인간의 평화낙원이 피조물-자연과의 평화가 이루어져 성령 안에서 신국낙원 평화를 향유하는 것을 볼 수 있다”며, “미국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엘 고어의 환경보호운동이나 각국의 생태계 복원 및 자연보호운동단체들의 활동들이 바로 그러한 자연과의 평화이다”고 제시했다.   또 “지난 번 태안반도 바다해변에 유조선 기름 유출사고로 인해 바다 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되었을 때도 태안반도 해변을 썩게 만들고 악취해변을 온통 뒤덮은 기름 떼를 전국에서 모여든 백만여 자원봉사자들이 깨끗이 제거하여 해변 생태계를 복원했던 생태계복원 활동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손박사에 의하면 이런 생태운동은 “피조물을 썩음의 종노릇에서 해방시킨 사건이요, 하나님의 아들들과 함께 만물이 고대하는바 주님 재림의 그날(파루시아)에 이루어질 몸의 부활과 영생의 완성된 하나님나라 신국낙원의 전주곡”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러한 자연과의 영원한 평화, 신국낙원의 완성은 파루시아, 즉 주님의 오시는 날을 향해 역사는 전진하는 것이다. 그 때까지 피조물은 계속 썩어짐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 아들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고대하며 탄식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손박사는 “탐심전쟁의 실낙원에서 벗어나 진실관용과 겸손기도로 복낙원, 샬롬-신국낙원으로 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즉 “완전한 구원, 샬롬을 회복 받아 새 창조의 평화인간-평화세계, 하나님나라를 예수 안에서 이미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는 피스메이커가 되어 그 사귐으로써 충성과 진실로 오시는 주님의 새 창조 평화낙원 완성을 의와 진리의 거룩한 새사람(엡4:24)으로 맞이해야한다”고 주장했다.
    • 신학/선교
    • 신학
    2020-01-17
  • 김영한박사의 '역사적 예수 시리즈'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II. “구하라 주실 것이다”: 어떠한 일에도 간절히 기도할 것을 가르침.   열 두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 나사렛 예수는 산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 누가는 다음같이 기록한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예수는 간절히 그에게 구하는 자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딸이 더러운 귀신들린 수로보니게 여인이 다가와 자기 딸을 고쳐달라는 간청을 예수는 처음에는 거절하신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4). 이에 대하여 이 여인은 슬기롭게 간청한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5). 이에 예수는 이 이방여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시며 말씀하신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막 7:29-30).   여리고로 나가실 때 걸인 소경 바디메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가 지나갈 때 소리를 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지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한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더욱 소리를 지른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며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며 말씀하신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 예수는 하나님에게 구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는 간절히 구하는 자의 소원을 물리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신다.   예수는 어떤 일에 있어서든지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열심히 꾸준히 기도하셨다. 예수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야 할 것을 비유로써 가르치신다. 밤중에 친구가 와서 떡을 빌려 달라 할 때 이미 밤이 깊고 침상에 누웠으니 일어나 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친구가 간절히 청하기 때문에 들어 준다: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   그리고 예수는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치면서 간청하는 과부의 비유를 드신다. 어느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는데 한 과부가 원한을 풀어 달라고 번거롭게 하니 이 재판관은 마지 못해 그 과부의 원한을 풀어준다. 예수는 그처럼 하나님은 간절히 간구하는 성도들의 간구를 들어주신다고 가르치신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6-7). 기도는 무속신앙의 기도처럼 단지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소통하는 것이며 그와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의 뜻에 나의 의지와 뜻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III. 기도의 내용: 감사, 기원, 중보기도, 교제   예수의 기도는 감사, 기원, 중보기도, 교제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는 다락방에서 떡을 떼면서 감사하였고, 잔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눅 22:17-26). 그리고 구할 것을 기원하고 제자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셨다. 예수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였다.   변화산에서 예수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깊은 차원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 영광의 광채가 나타났고 그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화하게 되었다. 누가는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 9:29)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아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예수가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할 것을 말한다(눅 9:31). 이에 베드로와 함께 간 제자들이 이 영광스러운 사건을 체험하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들은 구름 사이에서 들려오는 성부의 음성을 듣는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눅 9:35). 변화산의 사건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본체(本體, the very nature)라는 것을 드러내는 지상에서의 유일의 사건이었다.   생활 속의 기도도 있다. 중세 수도사들은 노동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였다. 그러나 골방에서나 깊은 산 속에서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의 시간도 필요하다. 이러한 깊은 명상 속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차원의 교제를 가질 수 있다. 보다 깊은 명상 속 기도의 내용은 자기의 욕망이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여태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먼저 나 자신이 가정, 교회, 이웃,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중보자가 되어 저들의 회개와 안녕과 행복과 복지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제사장으로서 이웃을 위한 중보자의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보적 기도를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보다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모세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중보적 기도를 하였고(출 32:11~14; 신 9:25~29), 예수는 겟세마네에서 인류의 대속자가 되기 위한 중보적 기도를 하셨고(마 26:36), 사도 바울도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보적 기도를 하였다(롬 9:3).   IV. 진정한 기도: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는 십자가의 대속(代贖)을 준비하기 위하여 제자들과 같이 겟세마네(Gethsemane)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다(눅 22:41). 예수는 제자들과 떨어져 홀로 기도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는 땀이 변하여 피방울이 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신다. 누가는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히브리서 저자는 육체에 계실 때에 예수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의 기도를 올렸음을 증언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한 기원을 올렸다. 그러나 그의 기원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는 시몬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예수는 중보기도를 드리셨다.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도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V. 영적 안식과 평안을 주는 기도   나사렛 예수는 자기에게 몰려오는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시며, 마음에 상처받은 사마리아 여인, 니고데모와 같은 종교인들, 아리마대 요셉(마 27:57) 같은 부자와 대화하면서 저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그런 바쁜 가운데서도 예수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 속에서 안식과 평안을 찾았다. 그래서 예수는 탈진(脫盡)하지 않았다. 겟세마네의 깊은 기도에서 에수는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되는” 가운데서도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고 결정했다. 예수는 아버지 안에서 항상 안식하였고, 평안을 누렸다. 하나님의 성령이 항상 그의 마음에 충만히 거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의 삶은 기도가 우리 인간들이 영적 안식과 평안을 얻는 유일한 통로임을 보여주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역사적 예수의 기도에 대하여 다음같이 증언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히브리서 저자는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살아계셔서 이 불신 세상과 택하신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신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오늘도 나사렛 예수는 기도하는 자의 마음 속에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다음같이 말씀하시며 안식을 주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심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끝).  
    • 신학/선교
    • 신학
    2019-12-24
  • [오늘의 신학동향-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29)
      예수말씀에서 언급된 세례 요한과 관련된 말씀에서 본문에 나오는 광야는 유대광야로 요한의 동굴과 베다니, 세례 터, 엘리야의 승천 터 등이 가까운 곳에 있는 쿰란 지역이다. 요한이 활동하기 이전부터 이미 이 지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이유는 키르벳 쿰란이란 지역에 성서 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에 일시에 발견된 나그 함마디 문서와는 달리, 쿰란 문서는 거의 10년에 걸쳐서 조금씩 발굴된 문서이다. 바로 이곳에 근거지를 둔 요한을 보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쿰란 지역이다. 누가복음 7:24의 우리말 성서에 ‘흔들리는 갈대’로 번역된 단어는 ‘파피루스’로 수정해야 한다. 한민족에게 근동지방에 무성한 파피루스가 낯설기 때문에 갈대로 표현하였지만, 이젠 우리 주위에도 파피루스가 분양되어 자라고 있으니 원문대로 그 의미를 살려야 한다.   예수께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파피루스로 종이를 만들어 성서를 필사하는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쿰란 인근에서 세례 요한도 하나님의 말씀을 보려고 자주 들린 도서관을 언급하신다. 당시 사람들이 유대 광야 끝자락인 쿰란 동굴로 모여든 이유가 파피루스 종이 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말씀을 보고 읽고 묵상하는데 관심을 기울인 요한을 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누가복음 3:2는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고 증언한다. 여기서 빈들은 유대 광야인 쿰란 도서관에서 부지런히 파피루스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요한의 모습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오랫동안 이집트의 나시 파피루스로 알려진 기원전 150년경의 십계명과 신명기의 일부가 구약성서에서 가장 오래된 사본이었다. 그러나 유대 광야의 쿰란 동굴에서 무더기로 두루마리가 발견되면서부터 나시 파피루스보다 거의 1세기는 앞선 기원전 3~2세기의 것으로 추산되는 180여 구약성서의 사본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중에서 단연 압도적인 것은 쿰란 제1동굴에서 발견된 공동체 규율인 1QS으로 쿰란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문서이고, 제4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로 맛소라 본문보다 앞선 문서이기에 지금까지 2천년을 지켜온 본문비평의 기준을 새로 제시하였다. 곧 1947~1956년, 그리고 2018년에 발견된 쿰란 문서는 맛소라 본문 보다 수 세기 앞선 금세기 최고의 구약성서의 사본으로 평가된다.   유대 광야에 거주한 세례 요한은 거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약대 털옷을 입고 지냈다. 이런 요한에게 누가복음 7:25에 두 번씩이나 언급된 ‘부드러운 옷’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바로 부드러운 웃을 입고 왕궁에 거하던 사람들은 파피루스 대신에 금장이 둘린 화려한 성서를 주로 읽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서가 고급스럽게 포장이 되었지만, 그 화려함과는 달리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그야말로 껍데기에 불과한 하나님의 말씀을 소장만 하고 있던 상황에서, 필사가들이 아침과 저녁으로 미크베(유대인의 정결예식 장소)에서 목욕을 하고 성서를 필사하여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에게 읽히는 모습은 너무나도 감동적인 장면이다. 지금이야 인쇄술이 발달하여 종이도 사라지고 전자책이 새로운 화두가 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당시에 파리루스는 일반 대중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유일한 통로이었기에, 요한도 바로 그 말씀 보기 위해서 쿰란으로 간 것이다.   무엇을 보려고 성지에 가는가? 이국적인 풍경을 보고 근동의 음식을 맛보고 면세품을 무슨 이삿짐 꾸리듯이 잔뜩 들고 오려고 가는가? 돈만 싸들고 성지를 가는 졸부를 향해서 예수께서는 파피루스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려고 성지에 가라고 일깨우신다. 무슨 전리품 챙기듯 득템(?)에만 욕심내지 말고, 세상을 살리는 예수말씀을 하나라도 품고오자.
    • 신학/선교
    • 신학
    2019-12-19
  • 한국Q학회서 어록자료연구 발표
      한국Q학회는 이번 세미나에서 예수말씀에 대해 전반적으로 발표했다. 무엇보다 로마제국의 젠더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사회 속에서 초기 기독교의 여성은 어떻게 리더십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살피는 파트는 많은 흥미를 자아냈다.   동 학회는 “특히 주후 2-3세기까지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는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비공식적인 신흥종교이기 때문에 아직 공인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기독교 공동체가운데 여성의 활동은 그 당시 로마시대의 관료주의 제도권 밖의 종교현상처럼 여겨져서 여성이 기독교가 부흥해 가는데 있어 비교적 자유롭게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며, “기독교의 핵심인 자유와 평등의 메시지를 들은 여성 지도력이 예수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서 자신의 가정을 예배처소로 내어 주고 그곳에서 지도자로서 활동함으로써 교회들이 로마제국의 광활한 영토 여기저기서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이렇듯 3-4세기까지 기독교는 사적인 종교로써 여성 리더십을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여성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대부분의 현대의 기독교 성도는 초기교회의 발전에 이런 여성들이 기여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특히 초기교회 운동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 한다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초기교회 즉 가정교회에서 여성이 현대적인 개념의 성직자로 섬겼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가정교회 안에서 아직까지 여성 지도자들의 활동은 로마사회에서 강조된 젠더 역할을 준수하면서 주로 하나님의 가정을 돌보는 지배인, 혹은 후견인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5세기까지 여성들은 예언가, 순교자, 금욕주의 교사, 및 수도원 설립자 등의 역할들을 통해서 지도력을 감당하며 기독교 운동들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동 학회는 기독교 여성 리더십의 등장을 통해서 고대 로마제국에서의 젠더의 역할 및 초기교회가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특별히 “로마제국의 특권층에 속한 많은 남성들이 기독교에 입문하게 됨에 따라서 기독교를 정식종교로 공인화되는 과정에서 로마 종교의 구조들과 체계들이 도용되었다”며, “결국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의 공인화가 이루어지면서 그동안 기독교에 행해졌던 공식적인 핍박은 종료되었고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기독교는 교회의 제도화와 제국화를 통해서 여성 리더십에 대한 억압은 더 체계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렇듯 공인된 종교로서 기독교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여성 리더십은 더욱 제한을 받게 되었다. 즉 “남성중심의 공적인 영역에 여성이 지도자로 참여하여 그 당시 젠더역할에 관한 사회적인 통념을 깨뜨리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교부 신학자들이 교회를 제도화시키는 과정에서 여성 리더십 참여를 반대하는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고 동 학회는 제시했다.   예를 들면 3세기에 기독교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여성이 교회 지도자로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긴 남성지도자들이 교회 조직에 대한 지시서인 디다스칼리아(Didascalia)를 작성하여 남성 주교들의 역할을 교육, 설교, 세례, 성례전 집행 등으로 합법화했다. 토저슨에 따르면, 이 지시서에서 주교의 중앙집권 체제하에서의 목회 사역을 합법화시킴으로써 교회 사역에서 과부의 목회 사역을 제외시키고 “권위적인 것, 상위적인 것, 특권, 명예”와 관련된 예언적인 역할에서 여성을 제외시키는 등의 교회 사역에서 여성 리더십 참여를 제한시키는 것을 공식적으로 합법화하게 되었다.   동 학회는 “이렇듯 로마시대 젠더 이데올로기와 기독교의 제도화 과정은 여성 리더십을 계속 제한하는 방향으로 여성의 성직자 안수를 제한할 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 속의 여성 리더십을 왜곡했다”고 설명했다.
    • 신학/선교
    • 신학
    2019-12-19
  • 김영한박사의
     
    • 신학/선교
    • 신학
    2019-12-18
  • [오늘의 신학동향-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29)
      옥중에서 예수에게 제자들을 보내어 질문을 던진 요한에게 보낸 예수말씀은 “나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끝을 맺는다. 예수의 제자 중에서 ‘예수 때문에’ 넘어진 사람은 가룟 유다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배반자인 그를 칭송하는 유다복음서가 나올 정도로, 초기 교회에서 가인파 이단의 위력은 대단했다.   가인파 이단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세가 3장을 읽어보라.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시자 가인이 시기하여 동생을 죽인 이래로, 그를 숭배하는 자들은 가인을 떠받들기 시작하여 오늘날은 사탄 숭배자가 가득하기까지 하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최초로 기록한 이레니우스는 가인파 이단을 가룟 유다에 연결을 지어서 유다복음서를 이단 문서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185년경에 대표적인 교부들인 오리게네스와 테르툴리아누스가 각각 남긴 이단논박이란 책에서도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유다복음서는 에피파니우스가 파나리온이란 책에서 이단 문서로 규정한 이후에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가, 클레어먼트 대학교의 제임스 로빈슨(James M. Robinson)을 중심으로 한 나그 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를 연구해오던 학자들이 1980년대에 이미 그 존재를 알고 있다가, 골동품상의 독점권에 막혀서 비밀리에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던 차에 2007년 부활절에 봉쇄조치가 풀리면서 세상에 다시 얼굴을 드러낸 문서이다.   유다복음서는 가룟 유다를 배반자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공생애 사역을 성취해야 하는 일을 제자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을 때, 유다만이 그 비밀인 지식(gnosis)을 알고 예수의 사역을 도운 영적인 지도자로 추켜세우고 있다. 사복음서가 전하는 내용과 전혀 다른 이단적 내용을 전한 유다복음서의 이런 거짓된 주장은 당시 기독교 지성인 가운데 플라톤의 이원론을 유행병처럼 붙들고 있던 영지주의란 이름으로 뿌리를 내리는 듯 하였지만, 초기 교회가 구약성서를 근거로 예수께서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라는 사상을 확립함으로써 손쉽게 물리치게 된 것이다.   이단은 예수 때문에 넘어진다. 여기서 넘어진다는 단어인 헬라어 ‘스칸달’은 오늘날 그 어원과 상관없이 성적 스캔들인 추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의미는 오늘 예수말씀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때문에 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단이 왜 이단인가? 처음에는 같다가 끝이 달라지는 것이 이단이다.   박태선과 문선명이 처음에는 교회 안에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교회를 무너뜨리고 결국에는 저도 무너지는 모양으로 막을 내렸다. 모든 이단이 이런 비극적인 길을 걸어가지만, 주위에 있는 신자들은 눈과 귀가 미혹되어서 자기들의 교주가 이단인지를 모른다. 이단 가운데 동성애 이단이 가장 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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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19-12-05
  • ‘희생양 이론’통해 동성애담론 비판
      ‘기독교의 헤겔’르네 지라르의 사유를 쉬운 내용으로 소개 “성경은 예수의 무죄성과 공동체의 유죄성을 주장하는 텍스트”     정일권박사(인스부르크대·사진)는 울산남부노회 서부시찰 교역자회 총회에서 「르네 지라르와 오늘날의 목회」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정박사는 “21세기 유럽에서 기독교 부흥을 학문적으로 주도해서 기독교를 구했다고까지 평가받고 그렇기에 21세기 교부로도 불리는 르네 지라르의 사유를 칼 마르크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의 학문적 논쟁을 통해서 소개하고자 했다”고 전했다. 또한 “20세기 유럽(독일과 프랑스)의 철학과 정치경제학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칼 마르크와 프로이트의 사유를 지라르의 이론을 중심으로 비판적으로 분석했다”며,“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학문적 융합이 이루어진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과 그 문화마르크스주의 그리고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라르의 미메시스 이론을 통해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정박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으로부터 파생된 유럽 68 문화혁명 세대들이 추구했던 성혁명(빌헬름 라이히) 운동과 성해방 운동 그리고 이후의 젠더 이데올로기, 퀴어이론, 동성애 담론 등은 사상누각이라며 지라르의 이론을 통해서 비판했다. 정박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이론은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작품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범성욕주의적 오독과 오해로부터 탄생한 것이기에, 최근 학계에서도 이 이론의 전면적 폐기가 주장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박사는 미국 경제주간지 포브스가「르네 지라르, 사회과학의 아인슈타인」이란는 제목으로 지라르의 신화해독과 C. S. 루이스, J.R,R. 톨킨의 신화와 성서에 대한 이해를 비교했던 것을 소개했다. 루이스는 영화 〈나니아 연대기〉의 원작자로 그리고 톨킨은 영화 〈반지의 제왕〉의 원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교수들이다. 루이스의 지적인 회심은 복음서를 지지하는 역사적 증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복음서에는 ‘옥수수 신’(corn god)이 실제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어느 강경파 무신론자의 말을 엿듣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톨킨은 “만약 복음서 이야기가 인류와 인류의 보편적 필요에 대한 참된 스토리라면, 그렇다면 그 보편성은 그 이론의 확증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라르는 이들과는 달리 기독교와 신화의 유사성들에 대한 질문을 다르게 접근했다. 정박사는 “지라르가 복음서에 대해서 가장 현격한 것은 그 복음서가 고대의 모든 다른 희생염소 스토리와의 차이라는 점을 보았다”고 강조했다. 그 차이는 “바로 희생당한 예수께서는 무죄하다는 사실이며 이 무죄성이 성경 본문에 의해서 인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박사는 “마녀사냥의 텍스트인 세계신화는 희생염소의 유죄성과 공동체의 무죄성으로 구조화된 텍스트다. 하지만 성경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과 공동체의 유죄성을 주장하는 반신화적 텍스트이다”며, “희생염소 역할을 하는 세계의 수많은 신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결코 무죄하지 않다. 그들은 언제나 범죄자 신들로 묘사되고 또한 공동체에 의해서 그렇게 믿어진다”고 설명했다.   그 외 양산 통도사가 가까운 곳이어 통도사에서 불교 승려로서 오랫동안 수행하다가 이후 개종해서 순복음교회 목사가 된 목회자는 정박사의 지라르 세미나에 두 번 참여해서 정박사의 불교연구 결과도 소개했다. 여기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예수 그리스도와 희생염소 역할을 하는 세계 종교의 수많은 신들의 급진적인 불연속성도 소개했다”고 정박사는 밝혔다. 정일권박사는 국제 지라르학회인 ‘폭력과 종교에 관한 콜로키움’의 정회원으로서 지라르와 불교 연구에 있어서 국제적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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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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