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12-0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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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신학동향-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29)
      옥중에서 예수에게 제자들을 보내어 질문을 던진 요한에게 보낸 예수말씀은 “나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끝을 맺는다. 예수의 제자 중에서 ‘예수 때문에’ 넘어진 사람은 가룟 유다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배반자인 그를 칭송하는 유다복음서가 나올 정도로, 초기 교회에서 가인파 이단의 위력은 대단했다.   가인파 이단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세가 3장을 읽어보라.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시자 가인이 시기하여 동생을 죽인 이래로, 그를 숭배하는 자들은 가인을 떠받들기 시작하여 오늘날은 사탄 숭배자가 가득하기까지 하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최초로 기록한 이레니우스는 가인파 이단을 가룟 유다에 연결을 지어서 유다복음서를 이단 문서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185년경에 대표적인 교부들인 오리게네스와 테르툴리아누스가 각각 남긴 이단논박이란 책에서도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유다복음서는 에피파니우스가 파나리온이란 책에서 이단 문서로 규정한 이후에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가, 클레어먼트 대학교의 제임스 로빈슨(James M. Robinson)을 중심으로 한 나그 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를 연구해오던 학자들이 1980년대에 이미 그 존재를 알고 있다가, 골동품상의 독점권에 막혀서 비밀리에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던 차에 2007년 부활절에 봉쇄조치가 풀리면서 세상에 다시 얼굴을 드러낸 문서이다.   유다복음서는 가룟 유다를 배반자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공생애 사역을 성취해야 하는 일을 제자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을 때, 유다만이 그 비밀인 지식(gnosis)을 알고 예수의 사역을 도운 영적인 지도자로 추켜세우고 있다. 사복음서가 전하는 내용과 전혀 다른 이단적 내용을 전한 유다복음서의 이런 거짓된 주장은 당시 기독교 지성인 가운데 플라톤의 이원론을 유행병처럼 붙들고 있던 영지주의란 이름으로 뿌리를 내리는 듯 하였지만, 초기 교회가 구약성서를 근거로 예수께서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라는 사상을 확립함으로써 손쉽게 물리치게 된 것이다.   이단은 예수 때문에 넘어진다. 여기서 넘어진다는 단어인 헬라어 ‘스칸달’은 오늘날 그 어원과 상관없이 성적 스캔들인 추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의미는 오늘 예수말씀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때문에 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단이 왜 이단인가? 처음에는 같다가 끝이 달라지는 것이 이단이다.   박태선과 문선명이 처음에는 교회 안에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교회를 무너뜨리고 결국에는 저도 무너지는 모양으로 막을 내렸다. 모든 이단이 이런 비극적인 길을 걸어가지만, 주위에 있는 신자들은 눈과 귀가 미혹되어서 자기들의 교주가 이단인지를 모른다. 이단 가운데 동성애 이단이 가장 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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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5
  • ‘희생양 이론’통해 동성애담론 비판
      ‘기독교의 헤겔’르네 지라르의 사유를 쉬운 내용으로 소개 “성경은 예수의 무죄성과 공동체의 유죄성을 주장하는 텍스트”     정일권박사(인스부르크대·사진)는 울산남부노회 서부시찰 교역자회 총회에서 「르네 지라르와 오늘날의 목회」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정박사는 “21세기 유럽에서 기독교 부흥을 학문적으로 주도해서 기독교를 구했다고까지 평가받고 그렇기에 21세기 교부로도 불리는 르네 지라르의 사유를 칼 마르크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의 학문적 논쟁을 통해서 소개하고자 했다”고 전했다. 또한 “20세기 유럽(독일과 프랑스)의 철학과 정치경제학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칼 마르크와 프로이트의 사유를 지라르의 이론을 중심으로 비판적으로 분석했다”며,“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학문적 융합이 이루어진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과 그 문화마르크스주의 그리고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라르의 미메시스 이론을 통해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정박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으로부터 파생된 유럽 68 문화혁명 세대들이 추구했던 성혁명(빌헬름 라이히) 운동과 성해방 운동 그리고 이후의 젠더 이데올로기, 퀴어이론, 동성애 담론 등은 사상누각이라며 지라르의 이론을 통해서 비판했다. 정박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이론은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작품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범성욕주의적 오독과 오해로부터 탄생한 것이기에, 최근 학계에서도 이 이론의 전면적 폐기가 주장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박사는 미국 경제주간지 포브스가「르네 지라르, 사회과학의 아인슈타인」이란는 제목으로 지라르의 신화해독과 C. S. 루이스, J.R,R. 톨킨의 신화와 성서에 대한 이해를 비교했던 것을 소개했다. 루이스는 영화 〈나니아 연대기〉의 원작자로 그리고 톨킨은 영화 〈반지의 제왕〉의 원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교수들이다. 루이스의 지적인 회심은 복음서를 지지하는 역사적 증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복음서에는 ‘옥수수 신’(corn god)이 실제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어느 강경파 무신론자의 말을 엿듣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톨킨은 “만약 복음서 이야기가 인류와 인류의 보편적 필요에 대한 참된 스토리라면, 그렇다면 그 보편성은 그 이론의 확증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라르는 이들과는 달리 기독교와 신화의 유사성들에 대한 질문을 다르게 접근했다. 정박사는 “지라르가 복음서에 대해서 가장 현격한 것은 그 복음서가 고대의 모든 다른 희생염소 스토리와의 차이라는 점을 보았다”고 강조했다. 그 차이는 “바로 희생당한 예수께서는 무죄하다는 사실이며 이 무죄성이 성경 본문에 의해서 인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박사는 “마녀사냥의 텍스트인 세계신화는 희생염소의 유죄성과 공동체의 무죄성으로 구조화된 텍스트다. 하지만 성경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과 공동체의 유죄성을 주장하는 반신화적 텍스트이다”며, “희생염소 역할을 하는 세계의 수많은 신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결코 무죄하지 않다. 그들은 언제나 범죄자 신들로 묘사되고 또한 공동체에 의해서 그렇게 믿어진다”고 설명했다.   그 외 양산 통도사가 가까운 곳이어 통도사에서 불교 승려로서 오랫동안 수행하다가 이후 개종해서 순복음교회 목사가 된 목회자는 정박사의 지라르 세미나에 두 번 참여해서 정박사의 불교연구 결과도 소개했다. 여기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예수 그리스도와 희생염소 역할을 하는 세계 종교의 수많은 신들의 급진적인 불연속성도 소개했다”고 정박사는 밝혔다. 정일권박사는 국제 지라르학회인 ‘폭력과 종교에 관한 콜로키움’의 정회원으로서 지라르와 불교 연구에 있어서 국제적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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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5
  • [오늘의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28)
      옥중에서 메시아인지 제자들을 보내 질문한 세례 요한에게 예수께서는 ‘내가 메시아이다’라고 속 시원하게 직접적인 대답을 하는 대신에 구약성서를 인용하면서 예수의 복음이 지니는 종말론적 사건에 대해서 대답하고 있다. “그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요한에게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말하여라.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듣는다”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대답은 이사야 61장 1~2절을 직접 인용하신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 이사야 61장을 읽어보라. 예수께서는 단지 이 말씀을 인용하기에 앞서서 “가서 요한에게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말하라”고 하신 것이 전부이다. 많은 이단의 교주가 저마다 이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한다. 이단마다 앞장서서 재림주요 하나님으로 자신을 탈바꿈시키고 진리를 가리고 신자들을 미혹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한다.   예수를 심문하던 빌라도가 돌연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로 질문을 던진 것처럼, 지금 북한에서는 예수교를 가리고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수령교로 인해서 진리에 대한 혼돈이 가득하다.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735일 만에 가까스로 풀려난 케네스 배는 “북한 주민들이 수십 년 동안 주체사상을 유일한 진리라고 믿었지만, 북한의 참혹한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탓에 ‘과연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는다”며, “북한은 주민들이 이러한 물음을 갖는 것 때문에 기독교를 가장 두려워한다”라고 말한다.    한 북한 보위부 조사관이 그를 심문하던 중 ‘내가 하나님이라는 말은 들어봤는데 예수라는 말은 당신한테 처음 들었다’며 ‘그 예수라는 사람이 우리 조선에 사는 사람이냐 중국에 사는 사람이냐’는 질문했다고 한다. 케네스 배는 “성경은 ‘예수만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김일성만을 절대화하는 주체사상과 배치되는 것이다”며, “이것이 북한이 예수라는 이름을 말살시키기 위해 노력한 이유다”라고 말한다.   지금 기독교 지식인 중에서 주체사상으로 무장을 하고서 북한을 교묘하게 편드는 인사들이 공공연하게 활동을 하면서 교회를 허물고 더 나아가서 기독교의 진리를 부정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데, 일반인들은 그들이 겉으로는 이단과 사이비가 아니니까 무관심하게 넘어가고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와 같은 사람들이므로 경계를 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듣고 본 것’을 전하라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신다.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언행 심사를 전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영적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말씀하신 것이다. 상황 윤리에 근거하여 말이 바뀌고 행동이 달라지는 지도자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북한을 다녀온 교계 지도자들이 우리 주위에 많다. 그들이 누구인지 관심 두고 그들의 언행이 북한방문 전후에 어떠했는지를 주목해보라.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가난한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듣는다.”라는 예수말씀을 다른 말로 풀이하면,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나병환자, 귀먹은 사람,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다는 말이다. 지금 북한의 3대 세습 독재자들인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고, 흑암의 장막에서 신음하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사선을 넘어 탈출한 주민을 억지로 북송하는 일이 만연된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적화통일의 야욕을 한순간도 버리지 않는 북한만을 편드는 거짓 교회지도자들은 회개하고 예수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는 복음의 전도자인가, 이념의 전도자인가? 거짓 삯꾼인가, 진리의 사도인가?   무릇 진리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거짓을 거부하고 거짓을 배격하는 데에 앞장서야 한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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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1
  • 송 훈박사, 기독교통일운동 연구 발표
      민중신학, 민족주의, 복음주의의 관점에서 통일운동 평가 평화와 정의를 위해 연대할 수 있는 ‘생태계’ 조성이 중요 송 훈박사(숭실대 평화통일연구원·사진)가 한국교회사연구원(원장=박종현박사)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한국기독교회 통일운동의 비판적 고찰」이란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송박사는 한교회의 통일운동에 대해 민중신학, 민족주의 사관 그리고 보수교회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송박사는 민중신학 진영의 통일담론에 대해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민간 기구로서는 처음으로 통일문제에 대해 발표한 선언문(일명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기독교회 선언’)을 주목했다. 그는 “이 선언은 1978년 해외기독교인들이 기독교평화컨퍼런스에 등장했던 조선기독교연맹에 최초로 서신을 보낸 이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줄기차게 북한교회와 교류하며 그 결과물로 내놓은 공개선언이었다”며, “이는 진보적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통일에 대한 신학들이 최초로 정리되었던 문서였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북한 문제에 대해 진보와 보수교회가 결별하여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설립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송박사는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민중의 주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과거 문익환목사는 통일운동 내내 통일운동의 성패는 얼마나 대중들, 특히 민중들이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 운동에 동참하는 지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며, “하지만 21세기의 민중이라고 불릴 수 있는 대중들이 통일에 대한 관심이 있는 지, 심지어 평화통일에 동의하고 있는 지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음으로 송박사는 민족주의 관점의 기독교통일운동을 고찰했다.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통일담론을 발전시키고자 했던 그 대표적인 인물로 송박사는 ‘한국의 제 1호 여성신학자이자 통일신학자’였던 박순경을 꼽았다. 박순경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도 같은 민족이며, 민중이기 때문에 그들 모두도 통일의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한국 교회 내에서 북한 대중들과 지배층을 분리하여 대중들은 포용하고 지배층은 배제하며 정의를 통한 징벌을 주장하는 것은 통일과정에서의 혼란과 갈등을 부추길 뿐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박사는 “현재의 폐쇄된 민족주의와 민족 동질성의 약화는 더 이상 민족주의 담론을 바탕으로 한 통일신학이 남한 사회에서 예전과 같은 호응을 얻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송박사는 보수권으로 분류되는 복음주의권, 특히 한경직목사를 분석했다. 한경직목사는 계속 반공과 대결의 입장을 견지했지만, 1990년부터 북한 땅을 휩쓴 기근으로 인한 일명 고난의 행군을 계기로 대결의 입장에서 선회했다. 한목사는 1990년 그가 주도해 설립한 한국기독교총연합을 중심으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시작했고, 800톤이 넘는 쌀이 북한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송박사는 “통일을 위한 복음주의 교회들은 열정은 통일관련 NGO 수에서 기독교가 여타 기관들에 비해 월등히 많다는 사실에서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복음주의 교회들의 이러한 다양한 통일 운동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선의와 가치들이 한국 사회 내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실정이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결론적으로 송박사는 대한민국 내에서의 통일의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그 당위성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70년 분단의 증오의 기억이 아니라, 한국전쟁과 분단의 와중에서도 대한민국을 이끄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희망의 기억을 다음 세대와 공유해야한다”며, “왜곡된 분단체제 속에서의 폭력과 전쟁임을 인지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연대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교회가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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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1
  • 김영한박사의 '역사적 예수 시리즈'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증언이었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불에 관한 메시지는 그의 설교의 중심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계승하면서 세례자 요한이 예언한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ία τού θεού, Kingdom of God)가 올 때가 충족되었음을 말씀하신다. 예수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설교하였다.   I. 때의 충족   예수는 자신의 출현이 “때의 충족”이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자들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나 뒤에 오실 자”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예수는 자신이 바로 모세와 예언자들이 증언한 오실 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때가 충족되었음을 말한다. 이 때란 “카이로스”(ό καιρός, kairos)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결정적 시기를 말한다.   스위스의 신약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이 그의 세기적 저서 『그리스도와 시간』에서 시간의 중심은 나사렛 예수라고 밝힌 것 같이 나사렛 예수는 때의 충족이다. 역사의 의미는 역사 안의 자그만 선인 “구속사”(Heilsgeschichte, salvation history)이다. 구속사란 역사 안에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 섭리의 선(線)이다. 이 구속의 섭리는 영원부터 있었고 창조의 타락과 더불어 이미 역사 안에 나타났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이 증언해주고 있는, 믿음의 열조인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부터 역사 안에서 자그만 선으로 시작되어 신약의 나사렛 예수에게로 집중한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로부터 12제자들의 선택, 그리고 초대교회, 이방선교, 재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보편적인 확장으로 나아간다.   II. 종말론적 실재인 하나님의 나라 1.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하나님의 나라   예수의 설교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었다. 예수는 자신을 믿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라고 하였다. 예수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었다. 그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도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라고 설교하였다. 그는 제자들을 동리에 파송하실 때에도 “어떤 동리에 들어가거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하라”(눅 10:8)고 가르쳤다.   이 하나님 나라는 이미 유대인들이 오래 고대하던 사상이었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상은 성경과 제2성전 시기의 유대교 내에서 흔한 개념이었다. 구약 예언자 다니엘은 그의 책에서 느부갓네살의 금신상과 뜬 돌을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3:44). 하나님이 세우실 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요, 모든 세상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지속하는 메시아의 왕국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나라를 다윗왕권을 가지고 오는 메시아가 세울 하나님의 왕국으로 생각했다. 마카비 왕조는 이 하나님의 나라가 무력을 가지고 이 지상에서 쟁취해서 얻어질 군사적 투쟁의 성취물로 보았다.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ία τού θεού, Kingdom of God)라는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들어 모두 122번 나온다. 그중 99번이 공관복음서에 나온다. 그리고 이 가운데 90개의 본문이 예수가 친히 하신 말씀의 일부로 나온다. 부활 이전 예수 설교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다.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세상적인 왕국으로 오해하였다.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하신 후 시기를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 때로 오해하였다. 누가는 다음같이 사도행전에 기록하고 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행 1:6). 그러나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 제자들의 설교는 전혀 달라졌다. 성령으로 새로움과 권능을 받은 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2.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로서의 하나님의 나라   그러나 예수께서 이해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적인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수행되는 영역이다. 유대인으로서 나사렛 예수는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자신의 인격과 생애 속에서 성취되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종교적인 율법이나 제사에 의하여 인간에게 다가오시지 않고 이제 메시아인 그의 아들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인간에게 찾아 오신다. 예수는 옥에 갇힌 요한의 질문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20)에 대하여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고 대답하셨다.   예수가 전파한 하나님의 나라 사상은 그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새롭게 동터오는 평화의 시대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속적 통치가 이 세상에서 새롭게 실현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의 통치 하에 있는 백성을 그분이 신원하셔서 그들에게 궁극적인 평화를 가져다 주신다는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현재인 동시에 아직 완성을 기다린다는 점에서는 미래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받아야 할 영역에 관계된다.   하나님 나라는 의인(義人)을 신원하며(vindicate) 궁극적인 정의를 실현한다. 하나님 나라는 작게 시작하지만 성장 발전하면서 결국 우주적 실재가 된다. 유대인이 기대한 하나님 나라는 강력하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정치적 나라인 데 반하여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성장하여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될 때까지는 거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 단계에 이르면 비로소 그 모습은 유대인의 일반적인 기대를 반영하게 된다. 의인들은 원통함을 풀 것이며, 악인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며, 평화가 수립될 것이며 사탄이 패배함으로서 도덕적 윤리적 질서가 회복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인 실재가 아니라 영적 실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공동체적인 열매로서 나타난다. 예수의 부활 이후 하나님 나라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설립된 초대교회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이방선교를 통하여 확장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하나님의 때요 하나님의 권한이라고 말씀하신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가 아니요”(행 1:7). 예수는 복음전파의 때가 시작되었고 그 사명을 제자들에게 부여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언이 되리라”(행 1:8). 사도행전의 선교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역사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영접하는 개인과 공동체 가운데서 겨자씨 처럼 파편적으로 구현되는 구원과 평강과 희락과 사랑의 공동체이다.   III. 하나님 나라의 복음 1. 복음의 의미   복음(εύαϒϒελίον, Evangelium)이란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표현했다. 본래 이 단어는 로마 황제들이 쓰던 언어다. 로마 황제들은 스스로를 세상을 지배하고 구원하는 구세주로 이해했다. 그래서 황제들이 발송하는 소식은 단순한 소식이 아니라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소식이라고 보았고 그 내용이 좋든 나쁘든 모두 복음이라고 불렀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에 대하여 복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스스로 신격화된 황제들이 부당하게 주장하던 구원이 실제로 나사렛 예수의 대속(代贖) 사역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 1:1)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황제들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참된 복된 소식을 전해주는 자라는 소식이 복된 소식, 복음(εύαϒϒελίον, gospel)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초대교회는 로마 황제에게 주(kyrios)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을 거절했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kyrios)요 그리스도(Christos)’라는 신앙을 고백하였다. 신자들은 황제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화형에 처하거나 짐승에 찢겨 기꺼이 순교했다. 만일 초대교회가 로마 황제를 경배했다면 기독교는 로마의 재래종교 속에 혼합되어 그 영적 힘을 상실하고 오늘날 세계적 종교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순결성 보존을 위해 순교한 신자들의 희생의 대가로 기독교 복음은 4세기 로마 황제 콘스탄틴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면서 공인을 받고 마침내 로마의 국교가 되는 것이다.   2. 구약의 “하나님의 나라” 약속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는 창세기 12장에서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1-3).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12지파와 모세에게 동일하게 약속되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12:7-8). 열 두 지파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영도를 받아 가나안 복지로 들어감으로써 역사적으로는 구현되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수 1:3-4). 그러나 이스라엘이 들어간 가나안 복지는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모형에 불과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서 이 지역 주민들의 풍습에 물들어 가나안의 토속신 바알을 섬기고 하나님의 약속과 법을 어겼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이 약속받은 축복의 땅에서 쫒겨 나야했다.   바벨론 포로시기에는 이사야, 예레미아, 에스겔 등 예언자들은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을 약속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스라엘 민족의 국가적 차원을 넘어선 실재로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는 다가오는 미래의 약속으로 주어졌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적 실재에서 종말론적 실재가 된 것이다. 미국의 구약학자 존 브라이트(John Bright)가 말한 바 같이 구약은 ‘지붕이 없고 네 기둥만 있는 성전’ 같은 것이다. 구약은 약속만 있고 성취되지 못했다. 이 성취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성취될 것이다. 이 성취를 증언한 책이 바로 신약이다.   3. 회개와 믿음, 하나님의 나라 시민의 조건   세례자 요한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회개의 설교를 하였다. 당시 그에게 나아온 사람들은 죄를 고백하고 요단강에서 물 세례를 받았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 3:5-6).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회개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나라를 소망하고 자기의 허물과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삶을 살려는 자들의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악한 마음과 행실을 뉘우치고 돌아서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고 새 삶을 사는 자들이 들어간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다고 증언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 이들은 세상의 혈육으로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난 자들이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요 1:13).   구약의 예언서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 다니엘은 다음같이 증언한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단 7:18).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적그리스도가 일어나 때와 법을 고치며 권세를 가지고 상당기간 박해하는 것을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 그러나 하나님은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고 적그리스도의 권세를 빼앗고 인내와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한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상속케 하실 것이다: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단 7:26-27). 역사의 종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하여 적그리스도의 권세는 멸망되고 세상의 권세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에게 위임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폐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요 모든 권세자들이 그의 지고한 권세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 대학원 설립원장)    
    • 신학/선교
    • 신학
    2019-11-15
  • 복음주의윤리학회 박성철박사 논문발표
      관심 얻으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 부각 “거짓을 유포함으로 지지를 얻으려하는 정치운동을 거부해야”     기독교사회연구소 등이 지난달 31일 발표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한국교회 교인 3명 중 2명은 전광훈목사가 주도하는 기독교정당과 정치운동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 박성철박사(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사진)가 한국교회의 극우 정치운동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박박사는 전광훈목사를 중심으로 한 일부의 활동을 ‘배타적인 기독교 정치운동’으로 규정했다. 박박사는 “이들은 한국의 극우적인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과거의 독재를 정당화하고 기독교 근본주의의 가치를 현실에서 실현하려 한다. 더구나 사회적 관심과 영향력을 얻기 위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그리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을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다문화사회에서 그리스도인 저마다의 ‘좋은 정치’에 대한 생각들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미래를 진정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사회적 다양성을 파괴하고 배타적인 이념이나 가치로 인간을 획일화하려는 억압적인 종교적 행위에 대해서는 분명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을 반대한다고 박박사는 제시했다.   첫째,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는 우상 숭배자들”이다. 박박사는 “이들은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구원에 들지 못한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한다”며, “하지만 이들은 구원을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으로 둔갑시켜 자신들이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고 선전을 하고 있다. 구원의 상품화는 물신숭배이며 이는 명백한 우상숭배이다”고 규정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우상숭배자들이 주도하는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운동을 마땅히 거부하고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가짜 뉴스를 통해 거짓을 유포함으로써” 사회적 지지를 얻으려 한다. 박박사는 “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졌거나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가짜 뉴스를 만들어 유포함으로써 지지를 얻으려 한다. 이는 이들의 정치적 견해가 타인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며, “그리스도인은 진리에 거하는 자로서 거짓과 가짜의 미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요일 1장7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가짜 뉴스라는 거짓을 만들고 유포함으로써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극우적 기독교 정치운동을 마땅히 거부하고 반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셋째, 극우적 기독교 정치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이웃에 대한 미움과 혐오 그리고 무시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박박사는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도움으로써 이웃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 기독교적 이웃사랑의 기반은 바로 고난 가운데 있는 이들에 대한 공감과 배려이다(로마서 9장15절)”며, “하지만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들을 죄악시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미움과 혐오 그리고 무시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한다”고 분석했다.   넷째,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네오 기독교파시즘’을 지향한다. 박박사는 “한국의 극우적인 기독교 정치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과거 군사독재를 찬양하고 공공연히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지지한다”며, “그리스도인은 다양성을 억압하고 획일성을 지향하는 운동을 반대해야한다”고 말했다.
    • 신학/선교
    • 신학
    2019-11-08
  • [오늘의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27)
      오시는 이는 부처, 무함마드, 공자가 아니다.   조국 부인 정경심이 결국 구속되었다. 자신은 마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발뺌한 남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옥중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보내었다.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오시는 이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대해야 합니까?” 요한의 측면에서 보면, 답답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이미 헤롯의 칼날이 그의 목을 겨누고 있고, 기다리던 메시아는 오시지 않고, 제자들은 요한의 임박한 죽음에 흔들리고 있으니 요한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궁금해 하는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께서 ‘오시는 이’인가이다. 많은 학자가 예수말씀에 메시아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으므로 예수를 단지 지상의 인물로만 이해하고 있지만, 이는 예수말씀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오해이다. 오시는 이는 예수말씀의 종말론적 차원에서 메시아를 대신하는 단어이다. 누가복음 7장 18절과 마찬가지로 13장 35절도 오시는 이를 메시아로 고백하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되시다”고 선언한다. 특히 이 말씀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메시아로 오시는 이를 강조한다.   누가복음 3장 16절에서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벗겨 드리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다.”라고 설교한다. 이 설교는 요한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에게 드린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이다. 이 구절에서 오시는 이는 앞뒤에 연결된 서술어를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그 신앙고백에 아주 깊이가 있다. 곧 ‘오시는 이’ 앞에 ‘내 뒤에 있는 이’가 있고, 그 뒤에 ‘능력이 많으신 이’가 있다. 이는 요한이 원시적인 언어로 투박하게 예수에게 드린 최초의 신앙고백이다. 샌드위치가 두 개의 빵으로 잼을 감싸고 있듯이, 두 개의 신앙고백인 내 뒤에 있는 이와 능력이 많으신 이가 가운데에 있는 오시는 이를 앞뒤에서 호위하고 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의식하면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린 것과 같이 요한은 메시아의 임재를 오시는 이로 고대하며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능력이 많으신 이라고 고백한다.   정작에 나에게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로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누구인가? 많은 이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세례 요한과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과연 예수께서 정녕 오시는 이인가?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지난 2천 년 동안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 교주를 배출시켰다. 이들은 적그리스도로 모두 자신을 재림 주요 보혜사요 신으로 둔갑시켜서 사람들 앞에 군림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의 신을 감히 들고 그 신발 끈을 풀기도 스스로 감당치 못한다고 겸손해하면서 단지 신랑의 들러리로 누리는 기쁨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고 그 지름길을 평탄하게 하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철저하게 인식하였다.   예수말씀에 나오는 오시는 이와 관련된 세 구절은 모두 메시아의 위엄보다는 오시는 이를 고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의 모습에서 겸손과 평화의 메시아를 보여주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에게 오시는 이는 갈등과 싸움이 가득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시는 겸손한 이시다. 이미 이런 평화를 가져오시는 이를 알고 있던 요한은 옥중에서 겸손하게 평생 메시아를 위한 소리꾼으로 살았던 자신의 모습에 조금도 흩트림 없이 제자들을 보내서 그들에게 예수가 메시아로 오시는 이라고 분명히 확인하게 한다.   과연 나는 부처, 무함마드, 공자, 아니 그 누구도 아니고 오직 예수만 메시아로 오시는 이로 믿는가? 많은 이가  우상에 이 땅에서 예수 이외에 오시는 이는 없다.
    • 신학/선교
    • 신학
    2019-11-08
  • [선교사 통신] 산타클로스의 6개의 십자가
      산타크루즈는 볼리비아 제2의 도시이다. 그런데 산타크루즈 마을이 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신화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 마을 입구에는 십자가가 6개 세워져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곳에서 순교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실존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미국의 어느 선교단체가 있었다. 그들은 오지만 선교하는 단체로 유명하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 깊은 정글 속에 착륙할 곳이 있으면 착륙하여 오지를 중심으로 선교하는 데, 그들은 대개 원시의 생활을 하며, 독화살과 정글 칼로 무장을 하고 다닌다. 여전히 부족간의 전쟁도 하는 데, 영화에서 보는 그런 원주민들의 동리이다.    그러다보니 선교사들은 독특한 선교방법을 가지고 접근하는데 그 중의 한 방법이 원주민들이 다니는 길목에 사탕이나 초콜릿을 두면 원주민 청년들이 가끔 오다가 선교사들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청년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여 변화시킨 다음 다시 그곳으로 보내어 마을 사람들을 전도하게 하는 것이다. 보통 10년에서 수십 년이 걸리는 선교를 하는 것이다.   경비행기는 이들에겐 없어서는 안될 유용한 선교도구인 것이다. 6명의 선교사들은 그 청년들과 함께 마을의 허락을 받아 들어가는데 당연히 무장을 하고 다닌다. 그런데 그들이 들어간지 얼마되지 않아 분쟁이 생긴다. 선교사들을 받아들이자고 하는 부락민과 그것을 반대하는 부락민간에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투표를 하였는데, 죽이자는 쪽으로 표가 더 많이 나온 것이다. 그럴 때 선교사들이 회의를 했다. 선교사들은 무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다. 차라리 죽임을 당하기로 결심한다. 살기 위한다면 무장한 총기를 사용해야 하지만 그러면 원주민들을 다 죽여야 하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후일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해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순교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원주민들이 선교사들을 다 죽인 다음, 함께 간 청년들이 울부짖으며 말한다.   “여러분들 보십시오. 이분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죽였습니다. 이들의 옷을 벗겨 보십시오, 이분들은 우리 마을 전체를 몰살시킬만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을 사랑하기에 죽음을 택하고 순교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분들에게 영원한 빚을 졌습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 모든 부족은 주님께로 돌아왔고 산타클로즈에는 6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데 순교한 6명의 선교사들의 이름을 새기게 된 것이다. 후일 산타클루즈의 지명이 되기도 한 이 마을은 산타클루주 시 안의 산타클루즈 마을로 기억되고 있다. /김이삭 볼리비아선교사(볼리비아학교 이사장, 진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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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05
  • 개혁주의학술원서 도르트 세미나
    개혁주의학술원(원장=이신열박사)은 지난달 30일 고신대 손양원홀에서 「개혁신학과 목회 : 베자와 도르트총회의 가르침」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개혁주의 신앙인의 정체성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세미나를 통해 개혁주의 신앙의 집결체인 도르트 신조의 중요성과 역사적 의의를 조명하고 현대 세속사회 속 교회 공동체가 갖춰야 할 목회적 소양에 관해 진단했다. 강사로는 양신혜박사(합신대)가 「고난 중에 핀 꽃: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 - 베자의 〈흑사병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을 중심으로」, 정요석목사(세움교회)가 「도르트 총회와 신경이 갖는 목회적 성격」이란 주제로 강의했다. 세미나 관계자는 “테오도르 베자는 프랑스 베즐레에서 태어나 스위스 제네바에서 생을 마감한 제네바 종교개혁자이며 칼뱅의 후계자로 제네바 아카데미의 초대 학장을 지냈다”며, “흑사병에 맞닥뜨린 베자의 삶, 목회자의 삶, 그리스도의 행동에 관해 세미나 동안 집중적으로 다루게 됐다”고 전했다. 이어 “도르트총회는 튤립 교리로 알려진 교리인 도르트 신조를 낳은 총회이다”며, “1618년 11월에 시작하여 1619년 5월 29일까지 지속된 도르트 총회가 지닌 신학적·목회적·교회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의 현주소를 조명했다”고 덧붙였다.
    • 신학/선교
    • 신학
    2019-10-31
  • [오늘의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26)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놀라운 치유 기적을 마무리하신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기시어, 따라왔던 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복음서를 보면, 대개 예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이나 말씀, 혹은 교훈을 보고서 제자들이나 무리들이 놀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오늘의 예수말씀에서는 뜻밖에도 예상을 뒤엎고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신다. 참으로 신기한 모습이다. 예수께서 그 백부장의 믿음을 예상하지 못하셔서일까?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이방인인 백부장이 위세를 부릴만한데도 아주 겸손하게 직접 자신 앞에 와서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말하는 이야기의 시작 단계부터 놀라워하셨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무조건 순종적인 발언도 놀라웠을 뿐만 아니라, 단 한 말씀이라도 주시면 하인의 병이 고침 받을 것이라는 그야말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예수의 능력을 고대하는 일련의 모습 전체가 경이로운 것이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히브리서 11장 1절) 바로 백부장이 예수께 보인 믿음이 이런 것이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문자 그대로 인식하고 모든 것을 맡기고 처분대로 따르는 것이 믿음이다. 흔히 성경무오설을 주장하지만, 이는 다분히 교조적이다. 심지어 횃불신학교는 신임교수 응모를 하면서 성경무오설에 관한 서약을 받게 하였다는 후문이 들린다. 그러나 성경무오설은 요리문답 제1조처럼 우리의 삶과 행위를 정확무오하게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모든 것에 순종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바로 백부장은 이런 믿음을 예수께 보인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 믿음을 놀라워하시며 칭찬하신다. 더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에서는 내가 이런 믿음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이것은 이방인 선교의 결과로서 Q 공동체가 이방인을 자신들의 공동체 안으로 적극적으로 영접해 들였다는 차원에서 이해하기보다는, 유대인에게 경종을 울리고 그들에게 각성을 촉구하고자 하는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유대 율법에 대한 보수적인 태도에 입각하여 아직 제자들에게는 유대인 선교를 치중하게 하시지만,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함으로써 유대인들의 불신을 경고하고 그들을 시기 나게 하여 믿음을 일깨우려는 종말론적 의도를 통해 이방인에게까지 선교를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직 제자들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가지 못하고 전적으로 유대인 선교만을 간신히 감당하는 상황일지라도, 이미 예수의 소문은 날개를 달고 이방인의 지역에까지 퍼져나갔다. 그래서 스불론과 납달리 그리고 데가볼리(헬라어 데카 폴리스는 10개의 도시라는 뜻이다)의 이방인 지역에까지 복음이 퍼져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백부장이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 앞에 나온 것이다. 유대인은 특수주의에 입각하여 원의 중심에 자신들만 놓고서, 원 밖의 이방인들을 개와 돼지처럼 부정하게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을 보이게 될 때, 예수께서는 유대인에게 자존심이 상할 정도의 심한 발언을 동원하여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백부장의 하인을 고친 이야기를 학자들이 복원하면서 “그리고 <…>”라고 미완성으로 남겨놓고 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도전을 우리에게 준다. 우리는 유대인의 믿음인가 백부장의 믿음인가? 어떤 믿음을 예수 앞에 보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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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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