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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7)
    ◇허정윤박사(알파창조론연구소소장)   창세기 용어의 오역과 의미의 변화(2)   ‘테홈’이 창세기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은 야곱이 죽기 전에 그의 아들 요셉을 축복하는 때이고, 한글 성경에서는 ‘원천’으로 되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테홈’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쫓겨난 군대 귀신이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는데, ‘무저갱’이 ‘테홈’을 번역한 말이다(눅8:31). 한편 로마서에서 ‘테홈’은 “혹 누가 음부로 내려가겠느냐 하지말라”는 말에서 ‘음부’로 번역되었다(10:7). 두 곳의 ‘테홈’을 KJV한영 성경은 각각 ‘깊음’과 ‘the deep’로, ASV는 ‘the abyss’로 번역했다. 그리스어 신약성경(Greek NT Byzantine/Majority, 2000)과 현대 히브리어 성경(Hebrew Modern)을 비교해보면, ‘테홈’은 그리스어 ‘아비소스’(αβυσσος)를 번역한 것이다. ‘아비소스’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 역본’에서 ‘테홈’을 번역한 말이다. 신약성경에서는 거꾸로 ‘아비소스’를 ‘테홈’으로 번역했다.   신약성경에서 ‘테홈’은 귀신조차 가기를 두려워하는 곳으로 변했다. 그 이유를 알려면 히브리어 신약성경에서 ‘테홈’을 가장 많이 사용한 요한계시록을 찾아보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에서 ‘테홈’은 그리스어 명사구 ‘του φρεατος της αβυσσου’을 번역한 것이다. 그것을 ASV는 ‘‘the pit of the abyss’로 직역했고, KJV는 ‘bottomless pit’(바닥없는 구덩이)로 의역했다. 한글성경은 KJV를 따라 그것을 한문으로 ‘무저갱’(無底坑)이라고 번역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9:1). 그 별이 무저갱에서 나오는 황충의 왕노릇을 하니, 그 이름은 히브리어로는 ‘아바돈’(אבדון)이고 그리스어로는 ‘아볼루온’(Απολλυων)이다이다(9:11). 영어로는 Apollyon으로 불린다. ‘아바돈’은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마귀요 사단이요 곧 옛 뱀인 용을 잡아 무저갱에 감금하는’ 천사이다(20:1). 여기서 누가복음(8:31)에서 귀신이 무저갱을 두려워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현대 우주론은 별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음부’는 그리스어 ‘하데스’(ᾍδης)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성경은 ‘Hades’(ASV), 또는 ‘the hell’(KJV) 등으로 번역했다. ‘하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범죄한 신이나 인간의 사후 거주지인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최고신의 이름이므로 그대로 음역하는 것이 올바르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사망과 음부(‘하데스’)의 열쇠를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것으로 서술했다(계1:18). 예수 그리스도의 열쇠는 ‘아바돈’이 가진 무저갱의 열쇠와 다른 것이다. 그와 같이 성경 용어의 의미 변화를 연구하면, 그만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확장되는 것이다. 요한의 서술은 계시록의 세계관이 그리스 신화를 차용했다는 비난을 받기에 딱 알맞은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따랐다고 밝혔다(1:1).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자기에게 산 자와 죽은 자를 모두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한편,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그리스 신화의 세계관을 극복하라는 것이다.   베드로 역시 ‘하데스’가 다스리는 ‘타르타로스’(ταρταρωσας)를 언급했다. 베드로에 의하면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타르타로스’에 가둬두고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벧후2:4). ‘타르타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지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타르타로스’를 영어성경(KJV, ASV)은 ‘hell’로, 한글성경은 ‘지옥’으로 번역했다. 문자적으로 보면 ‘하데스’와 ‘타르타로스’라는 말은 성경의 세계관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요한과 베드로는 그리스 신화와 ‘타협’한 것인가? 그들은 당시 그리스 신화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관을 선교할 목적으로 그리스 신화를 배웠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현대사회를 주도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과학적 무신론을 극복할 방법을 요한과 베드로에게 배워야 한다. 과학적 무신론의 세계관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창조법칙인 과학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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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 홍인표박사의「자유인 김재준」 출간 화제
    ◇홍인표박사는 김재준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을 제시했다.     김재준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복음을 추구한 ‘자유인’ “김재준과 박형룡의 신학은 일반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홍인표박사(사진)가 「자유인 김재준」이란 제목의 저서를 발간해 교계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저자는 기독교장로회 소속이 아니면서도 기장교단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신학적 거두에 대한 연구서를 내놓았다.   홍박사는 “중학교 1학년 때 당시 인기를 끌던 ‘톰소여의 모험’이란 만화를 티브이에서 봤다. 그 중 톰이 가출했다가 집에 돌아와 교회에 출석해서 회개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거기거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찬송이 흘러나왔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홍박는 나중에 이 찬송가의 작사가가 김재준이란 사실을 알게 됐고, “자유주의 신학의 거두이며 행동하는 신앙인”이란 해설을 보고 의문이 들었다. “당시 자유주의는 성경을 파괴하는 나쁜 것으로 알고 있었고, 행동하는 신앙인은 좋은 것으로 보였다”며, “어떻게 한 사람에게 이런 두 이미지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대학원에서 장공 김재준에 대한 박사학위논문을 쓰게 됐다”고 홍박사는 전했다.   본서의 목적은 오늘날 파편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장공에 대한 통전적 인식을 갖도록 하려는 데 있다고 저자는 스스로 밝힌다. 다시 말해 “오늘날 김재준에 대한 인식은 그와 평생에 걸쳐 경쟁적 대립관계를 형성한 박형룡을 통한 인식, 해방 이후 남한 교회의 진보적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강원룡, 박형규, 문익환, 문동환 등을 통한 인식이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장공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자유인’이다고 강조했다. 보수적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자유주의신학’은 장공을 오해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자유주의란 예수를 오로지 도덕적 인간으로만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예수의 초자연적 탄생이나 기적, 부활 등을 어떤 역사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며, “그러나 장공은 예수의 초자연적 이적과 속죄. 육체적 부활과 승천을 다 믿고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 “1930년대 죽산 박형룡과 김재준의 신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까지 말한다. 장공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기독교는 허망 중의 허망이다. 허나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진리다”라고 단언했다. 홍박사는 장공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기절설, 환상설 등 여러 가설을 소개했으며,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의미에서 “장공은 정통주의 신학자이다. 1930년 대 장공의 논문을 보면 이게 박형룡의 글이지 잘 구별이 안 될 정도이다”로 말했다.   홍박사에 의하면 장공은 “성경은 과학책도 아니고 교과서도 아니다. 예수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책이다. 이런 면에서 성경은 무오하다”고 말했다. 그러하기에 장공의 신학을 단지 자유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파편적이다. 이렇게 홍박사는 김재준과 박형룡 사이의 차이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크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장공과 죽산 사이에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해석에 장공은 ‘오류’라는 말을, 죽산은 ‘난제’라는 말을 사용했다. 장공은 “내가 동정녀 탄생도 부활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쓴 글과 강의록을 다 봐라”고 자신 있게 선언했다. 또 장공은 역사비평, 양식비평 등 성서에 대한 고등비평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을 절대화하면서 강요하지 않았다고 홍박사는 주장한다. 고등비평은 해석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자 도구일 뿐이다.   홍박사는 “장공 김재준의 신학에는 알려진 것보다 보수적인 부분도 많으며, 그의 신학을 특정한 주의의 범주로 놓아서는 안 되고 그가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생동하는 신앙을 선물로 받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주의자’ 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홍박사는 다음과 같은 장공의 고백 “나는 아무 주의자도 아닙니다. 다만 한 개의 겸비한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심정을 좀 더 이해하고 그의 뜻을 따를까 하는 걱정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를 장공 신학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홍인표박사는 충남대 음악학과(성악 전공)를 졸업 후 침신대 신대원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숭실대학교 대학원 기독교학과에서 기독교역사 전공(Ph.D cand), 백석대학교 기독교 전문대학원에서 역사신학(한국교회사)으로 Ph.D 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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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7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6)
    ◇허정윤박사(케리그마신학연구원)   창세기 용어의 오역과 의미의 변화(1)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창조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는 언어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창세기의 언어는 창조 이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되면서 의미가 계속 변했다. 의미의 변화는 사물의 역할이나 위치 또는 질량 등이 바뀌는 것이므로 개념도 바뀌게 한다. 그 변화를 알면 처음에 몰랐던 의미가 새로 드러나기도 한다.    번역 성경에서 언어의 변화를 알려면 원어 성경을 동시에 살펴봐야 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조금 복잡하다. 게다가 번역 성경에서는 언어를 오역한 것도 있다. 번역 성경을 읽으면서 언어의 오역과 의미의 변화를 알지 못하면, 선입견에 의해서 잘못된 해석이 나오기 마련이다. 창세기를 읽으면, 누구에게나 숱한 의문이 일어난다. 의문 없이 창세기를 읽는 사람은 천재 아니면 바보다. 그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방면에 걸친 통섭적 지식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안목을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히브리어 ‘테홈’(תְהֹום)을 골라 살펴보기로 한다.   ‘테홈’은 1:2절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테홈’은 처음에는 지구를 덮고 있었던 ‘깊은 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그리스어 ‘70인역본’에서 ‘아비소스’(ἀβύσσος)로 번역되었다. 영어로는 ‘the deep’로, 한글로는 ‘깊음’ 등으로 번역되었다. 창세기 1:2절은 지구가 둥글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태초의 지구는 달걀 속의 노른자위와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테홈’이 흰자위이고, 그 안에 노른자위가 지구이다. 또 ‘흑암’이 ‘테홈’의 껍질처럼 그것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이 ‘테홈’ 위를 강보처럼 싸고 있는 흑암 속에서(욥38:9) 지구를 살펴보고 있다. 그러나 고대 히브리인들은 지구가 달걀처럼 생겼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 의하면 땅의 기둥(욥9:6, 시75:3)이 받치는 평평한 지구 위에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있다(욥26:11. *주석서 등에서 그림들을 참조하라).   ◇우주에서 본 지구의 모습. 지구의 70%가 물이다. 이 과학적 사실이 창세기의 테홈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은 첫날에 흑암과 빛을 나누시고, 둘째 날에 테홈’을 ‘하마임’(הַמַּיִם)으로 바꿔 부르시고, ‘하마임’ 가운데에 평평하게 펴진 ‘라키아’(רָקִיעַ)를 만드셨다, ‘하마임’이 ‘라키아’의 아래와 위로 나뉘게 되었다. 궁창으로 번역된 ‘라키아’가 하늘이 되니, 하늘 위의 물은 위로 들어 올려졌다. 하나님은 이때 하늘 아래에 산을 만들어 하늘을 받치는 기둥으로 삼으신 것으로 보인다. 하늘 아래에서 물이 약 절반으로 줄어들자, ‘테홈’에 잠겼던 지구에 마른 땅이 드러났다. 3일째에 하나님은 궁창 아래의 물을 뭍의 한 곳으로 모아서 ‘야밈’(יַמִּים)을 만드시니 ‘테홈’은 깊은 바다가 되었다. 하나님이 마른 땅과 깊은 바다의 경계선을 만드시니, 넘치던 물이 이때 땅을 받치는 기둥 사이로 내려갔을 것이다. 4일째에 하나님은 밑의 하늘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다. 이때 하늘의 창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에 진노하시고, 노아의 때에 홍수로 심판하셨다.   노아의 홍수는 궁창 위의 물이 하늘의 창들을 통해 비로 쏟아졌고, 땅 밑에서 ‘테홈’의 샘이 터진 것이다(창7:11). 궁창 위에 있던 물과 궁창 아래에 있던 물이 땅 위에서 다시 합쳐지자, ‘테홈’이 처음처럼 지구를 다시 덮었다. 창세기 저자는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15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였다’(7:20)고 설명했다. 현재 15규빗을 환산하면 6.8m에 해당한다. 노아의 방주가 멈춘 아라랏산은 해발 5,185m로 알려져 있다. ‘테홈’의 샘과 하늘의 창이 닫히고 비가 그치매 지구를 덮었던 홍수의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지구를 덮었던 ‘테홈’의 물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현대인들에게 그것은 과학적으로 큰 의문이지만, 고대 히브리인들은 물이 평평한 땅 밑으로 내려가서 ‘테홈’이 더 깊어졌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창세기 뒤에 쓴 구약성경에서 ‘테홈’은 대개 ‘깊은 물’ 또는 ‘깊은 바다’를 가리키는 것이 그런 사실을 반증한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8260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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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5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5)
      태초는 얼마나 오래됐나?   한글 성경의 첫 글자인 “태초에”는 히브리어 원어 ‘베레쉬트’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이 나오는 창세기 1:1절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신 일을 서술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이 서수로 서술한 명사구라는 점을 알았다면, “태초에”라는 말보다 ‘최초에’ 또는 ‘처음에’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이해하기에 더 쉬웠을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으로써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사는 우주와 지구가 되었다. 그러므로 “천지”는 우리우주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한 “태초”는 지금부터 얼마나 오래된 시간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지게 된다. 그러나 창세기는 1절에서 “천지”의 “천(하늘 天)”에 해당하는 ‘하샤마임’에 대해서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바로 2절로 넘어가서 “지(땅 地)”에 해당하는 ‘하아레츠’를 설명한다. 여기에서는 창세기를 따라 “태초에” 지구에서 시간의 흐름을 살펴보기로 한다.   창세기에서 “태초”의 시기를 알려면, 첫 하루의 시작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첫 하루의 시작은 히브리인의 날자 계산법에 따라, 첫날의 밤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찾아야 알 수 있다. 한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밤으로 정하신 ‘어둠’이라는 말은 4절에서 빛과 나누면서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3절에서 하나님이 빛을 ‘있으라“하신 때에 어둠도 같이 창조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어둠’은 히브리어 ‘호쉐케’를 번역한 것이다. 히브리어 ‘호쉐케’는 2절에서 처음 쓰였고, “흑암”으로 번역되어 있다. 히브리어 ‘호쉐케’를 2절에서는 “흑암”으로, 4절에서는 “어둠”으로 다르게 번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글 성경에서는 밤의 시작을 제대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은 4절의 ‘호쉐케’를 가리켜 밤이라고 말씀하셨으로 첫날 밤은 2절에서 “흑암”으로 번역된 ‘호쉐케’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호쉐케’의 시간은 빛이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2절에서 땅의 상태와 깊음 위에 “흑암”의 존재를 설명하는 동사의 시제는 1절에서 “태초”에 의해 제한받는 동사와 같이 완료형이다. 완료형 동사는 과거에 완료된 사건을 서술한다. 그러므로 문맥상 지구가 “천지”와 동시에 만들어졌다고 보거나, 또는 간격을 두고 별개의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신이 “흑암” 속에서 수면 위에 운행한다는 동사의 시제는 계속 진행 중이라는 의미의 분사형이다.   현대인들은 대개 “태초”를 약 138억 년 전 하나님이 우주물질을 만들어낸 빅뱅의 때로 보고, 지구는 약 46억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과학적 관점을 지지하고 있다. 그것은 창세기 독자들에게 1장 1절과 2절을 독립절로 해석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루를 24시간으로 보면서 “태초”를 약 6,000년 전이라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적 관점을 가진 기독교인들도 있다. 그들은 창세기 1:1절을 2절의 종속절로 본다.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창세기를 “태초”에 마술사가 지구를 포함한 모든 행성을 순식간에 만들어냈다는 마술사의 이야기로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마술사라면, 하나님의 신이 왜 “흑암” 속에서 수면 위를 운행하고 있었을까? 첫날 밤을 의미하는 ‘호쉐케’의 시간적 길이에 따라 우주와 지구의 나이는 달라질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를 본 사람은 없으므로 ‘진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법칙을 연구한 물리학에 의하면, 하룻밤에 우주와 지구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기독교인들은 “태초”의 시간에 대해 하나님의 ‘카이로스’에 속하는 것이므로 “인간이 알 수 없는 문제”라고 이해하고, 과학에 맡겨두는 것이 낫다. 현대과학을 아는 교양인들은 우주와 지구가 약 6,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7417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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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0-02-25
  •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4)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지식   기독교에는 아직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전부를 ‘오로지 성경에서만’ 얻을 수 있다고 강변하는 자들이 없지 않다. 그런 믿음은 하나님을 성경의 문자 안에 제한하고 가둬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확장을 가로막는 ‘위험한’ 믿음이다. 전통신학은 성경에 기록된 ‘특별계시’와 함께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 곧 자연계시와 일반계시를 인정하고 있다. 즉 자연과 역사를 통해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시을 얻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구약성경의 토라는 약 3,500년 전에 고대 히브리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쓰인 것이고, 나머지 부분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거나 기록한 것이다. 신약성경은 약 2,000년 전 로마제국에서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믿는 유대인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서, 그가 선포한 복음과 선교활동을 기록한 것이다. 성경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복음에 관한 서술이 큰 줄기를 이룬다. 그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복을 취소하고 심판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복음의 줄기와 심판의 가지들에는 역사적 사건들이 무성하게 잎과 열매를 달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꽃을 피우고 있는 곳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인간에 가장 중요한 복음을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복음을 실천하는 지엽적 문제는 인간들이 스스로 풀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이 질서를 지키도록 그의 창조법칙에 따라 창조하셨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자세한 과정이나 방법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땅과 생물은 말하지 않아도 창조법칙에 따라 질서를 지킨다. 창조법칙이 그것들 안에 본성으로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연계시이다.   돌이켜 보면 아담은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원복음에 따라 그가 다스려야 하는 생물인 뱀의 본성이 간교함을 몰랐기 때문에 원죄에 빠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원복음을 실천하는 일에 자연계시를 아는 지식은 필수적이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자연계시를 왜곡하고 과학을 오용하면서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들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땅과 생물을 멋대로 다스리도록 방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원죄를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의 전통적 근본주의자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대개 성경 안에 있는 문자를 그대로 이해하는 선에서 만족하고, 자연계시를 무시한다. 따라서 전통적 근본주의자는 창세기의 원복음과 원죄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해한다. 그런 지식수준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복음에서 요구하는 회개를 온전하게 실천할 수 없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두 종류의 과학적 지식이 추가되어야 한다. 첫째는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땅을 아는 지식이고, 둘째는 생물을 다스리기 위해서 생물을 아는 지식이다. 과학은 현대 기독교인들이 과학적 무신론을 극복하는 일에 필수적 지식을 제공한다. 그런 지식은 하나님의 자연계시를 연구하는 과학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 바로 그것이 현대 기독교인들이 근본주의를 넘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성경에 제한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8260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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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0-02-25
  • 에스더기도운동본부 탈북민센터 이중인선교사
        에스더기도운동본부(본부장=이용희교수) 탈북민센터(소장=이중인선교사·사진)는 매주 화요일에 북한구원 화요모임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북한구원을 소망하는 많은 참가자들이 모여 기도에 힘쓰고 있다.    지난달 28일 모임에서는 탈북자 서경화목사가 말씀을 전했다. 서목사는 자신이 탈북한 동기와 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서목사는 “북한에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렇게 살다가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넜다”며, “이후 접경지역에서 불안 속에 살다가 주위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으로 오는 과정에서 위기의 순간마다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그때마다 살 길이 열렸다”고 말했다.   화요기도회를 이끌고 있는 이중인선교사는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형제자매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자. 굳게 닫힌 북한의 문이 열릴 수 있는 길은 기도 외에는 없다”며,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의 힘이 능력이 돼어 북한을 변화시키고 통일을 가져올 수 있다”고 외쳤다.     탈북민센터의 기도운동은 201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시 탈북민 3명, 내국인 2명이 모여 탈북민을 섬기는 사역을 전개했다. 이선교사는 “우리의 기도운동은 통일을 미리 연습하고 준비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탈북민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생명을 걸고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온 사람들이다”며, “그래서 이들은 순수한 순교자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탈북민을 위한 과제도 이선교사는 제시했다. 탈북민은 주체사상을 버리고 한국에 왔다. 그런데 오자마자 자본주의 지나친 돈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주체사상이란 우상대신 돈이라는 우상이 그들의 생각과 생활을 지배하고 말았다. 이선교사는 “우리 기도운동본부는 밥과 돈이 아닌 오직 복음과 기도로 탈북민의 정착을 돕고 있다”고 전했다.   탈북민센터가 주력하는 사업은 명절에 탈북민을 돌보는 일이다. 이선교사는 “설이나 명절이면 남쪽에 가족이 없는 탈북자들은 매우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함께 잔치를 열어서 명절을 기쁨을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 센터는 지난 설에도 기도운동본부에서 탈북자 1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풍성한 설 잔치를 벌여 탈북민을 위로했다.    동 센터는 오는 5월 19일에서 6월 1일까지 독일로 단기선교여행을 떠난다. 이선교사는 “독일은 우리처럼 분단국으로 지내다가 결국 통일국가를 이뤘다. 거기에는 분명 우리가 배워야할 영적인 교훈이 있다”며, “이번 방문을 통해 현지의 한인교회들과 함께 보내며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탈북민들도 함께 하기에 독일 영사관측과 긴밀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여정은 하노버, 베를린, 라이프치히 등이다.    현재 국내에는 36개 탈북민교회가 있다. 대부분 10명 미만의 작은 교회이다. 이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따뜻한 돌봄이 매우 필요한 상황이다. 이선교사는 특히 탈북민 신학생에 대한 지원을 강조했다. 이선교사는 “북한은 전혀 새로운 선교지라고 봐야 한다. 북한이 열리면 북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탈북민 신학생이 가장 효과적으로 북한선교를 할 수 있다”며, “미래의 북한선교사를 지금부터 키워야 한다”고 전했다.    현재 국내의 주요 교단은 북한선교를 준비하고 투자하고 있다. 생필품 지원 등 물질적 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투자이다. 사람을 준비시켜야 이들이 북한선교의 주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탈북민센터는 이러한 ‘사람에 대한 투자’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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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2
  • 화제의 신간 「한국교회를 빛낸 칼빈주의자들」
    한국교회 칼빈주의 신학전통을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큰 업적 “후배들이 알아야하는 뜨거운 감동의 내용들 많이 포함됐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정신을 가진 한국교회의 학자들과 목회자들을 선별해 연구한 작품「한국교회를 빛낸 칼빈주의자들」이 세상에 나왔다. 무려 5년이 걸쳐 진행된 프로젝트로서 한국교회의 칼빈주의 신학전통을 정리하고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큰 화제를 낳고 있다. 다만 김재준박사 등 기독교장로회 계통의 신학자들이 빠진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한 편집자 안명준교수(평택대·사진)는 “2009년에 칼빈이 태어난 지 500주년 기념으로 서울교회에서 우리나라 칼빈 전공 신학자들을 모시고 큰 행사를 했다. 그날 70명이 발표한 내용으로 ‘칼빈과 한국교회’라는 책도 4권으로 발행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제는 박형룡‧박윤선‧황성수 박사 같은 분들에 대해 연구를 하자고 해서 시작하게 됐다”며, “그때는 30에서 40명 정도였는데 연구할수록 관련 신학자와 목회자가 늘어 6년째 되자 59명이 됐다”고 전했다.   이 책은 비록 신학사상에 대한 연구도 있지만, 김홍만박사가 쓴 김양선박사에 대한 내용은 상당한 감동을 전한다. 김박사는 기독교 유물을 북한에서 옮기기 위해 자기 대신 아내와 딸을 통해 몇 차례 옮기다가 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공산당에 발각되어 총으로 순교한 장면에서는 뭉클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안교수는 “황성수박사, 신복윤박사, 박형용박사 같이 한국교회의 초기신학을 주도했던 신학자들에 대한 글에는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후대들이 알아야만 하는 뜨거운 감동의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책은 조직신학, 구약신학, 신약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으로 구분해서 정리됐고, 분량이 1600페이지 정도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1부 조직신학자들에는 박형룡, 이상근, 김치선, 이근삼, 이종성, 신복윤, 김준삼, 최순직, 한철하, 박아론, 조석만, 차영배, 서철원, 이수영, 김영한, 권호덕, 김길성, 조봉근, 이보민, 노영상 등에 대한 글이 실렸다. 2부 성경신학자들로는 박윤선, 이상근, 홍반식, 오병세, 강태국, 이종윤, 박형용, 박창환, 윤영탁, 황창기 등이 실렸다. 3부 역사신학자들에는 김양선, 김의환, 홍치모, 김영재, 심창섭, 이양호, 이상규, 허순길, 김명혁 등이 포함됐다. 4부 실천신학자들에는 황성수, 김득룡, 조동진, 전호진, 정성구, 정정숙, 정일웅, 주선애, 정근두 등이 실렸다. 끝으로 목회자들에는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주남선, 한경직, 한병기, 정규오, 이병규, 김준곤, 안경운, 옥한흠 등이 실렸다.   이 책에서는 한국교회 신학의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다뤄졌다. 박형룡박사의 경우 그는 결코 서구신학을 소개하는데 머물지 않고 분명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종말론에 있어서는 천년기적 재림론을 취하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박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견해만이 절대적이라고 고집하지 않았고, 무천년기 재림론과 천년기후 재림론에 대해서도 관용적이었으며, 과학적 연구와 발견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 작품이 100년을 넘어 200년을 향해 나가는 한국교회의 신학발전에 큰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이다. 초기의 신학자들은 화란이나 미국의 칼빈주의를 소개하고 수용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리고 이후 세대의 학자들은 소개와 수용을 넘어 한국적 상황 속에서 칼빈주의를 진정한 ‘삶의 체계’로 확장하는데 노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안명준교수는 “이 자리에서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이 없었다면 결단코 이 책은 출판되지 못하고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 채 사장되고 말았을 것이다”며 집필진과 후원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감사를 전했다. 또 “좋은 홍보가 나갈 수 있도록 협조해주신 이우금박사에게도 깊은 감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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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5
  • 현대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3)
    ◇허정윤박사(케리그마신학연구원)   과학으로 밝혀진 원죄의 유전설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 4:17)는 말씀으로 천국 복음을 선포했다. 그리스도에 의하면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이다(눅16:16). 요한이 대표하는 구약시대는 지나갔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시작된 신약시대는 계속되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요한과 그리스도는 인류의 모든 시대를 대표한다. 따라서 그들이 동일하게 선포한 천국복음은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면서 회개하고 거듭난 자는 그가 재림하는 때에, 죽은 자는 부활해서, 산 자는 공중에서 그를 맞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와 함께 영생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천국복음은 기독교인들에게 최고의 소망인 천국의 길이 걸린 명제이다. 천국복음은 동시에 선교의 의무가 부과되어있는 것이기도 하다.  기독교에서는 천국복음에서 “회개하라”는 의미를 원죄까지 회개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원죄와 회개에 대한 해석은 초기 교부들의 신학에서부터 엇갈리기 시작했으므로, 지금은 신학자들의 수만큼 많아졌다.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인류에게 원죄가 유전되었으므로 누구나 회개해야 한다는 원죄유전설이다.  원죄가 유전되지 않는 것이라면, 오늘날 굳이 원죄까지 회개해야 할 이유는 없어진다. 현대인들은 대개 원죄의 유전설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현대사회의 법 정신이 죄인의 범위를 범죄행위자에게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은 인간들끼리의 관계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와 개혁교회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어거스틴의 신학적 전통을 따라 원죄유전설을 교리로 채택하고 있다.    원죄유전설은 그동안 교회의 신학적 차원에서 논의되었으나, 과학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유전법칙에 의한 DNA이론으로 설명하면 설득력을 더 얻을 수 있다.  인간의 유전자는 체세포마다 46개씩 염새체 형태로 들어 있다. 생식세포(정자와 난자)에는 염색체가 각각 23개씩 나눠져 있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면, 46개의 염색체는 그대로 배아세포 하나를 형성하게 된다. 이때 부모의 유전적 특성은 자손들에게 그대로 유전된다. 인간은 그 배아세포 하나에서 수많은 체세포가 분열하면서 성장한 것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에 의하면 생물들은 특성별로 열성 유전자와 우성 유전자가 있어서 다양한 변이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동물의 종간에는 생식장벽(reproduction barrier)이 있어서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는 변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조상의 유전형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대로 후손의 표현형일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양자물리학자 짐 알칼릴리와 유전학자 존조 맥패든은 공동으로 양자생물학을 탐구하면서 『생명, 경계에 서다』를 공저했다. 그들의 양자생물학에 의하면 생명은 양자역학과 고전역학의 경계에서 양쪽에 두 다리를 걸치고 서 있다.  양자역학적 의식 현상이 일어나는 곳은 고전역학적 뇌 속에서 뉴런 세포막에 있는 이온 통로이다. 의식의 발생은 인간의 전체 뉴런에서 전자기에너지장이 동조화(同調化)하면서 발화(發火)하는 것이다.    발화된 의식의 정보는 뉴런 세포의 DNA에 저장된다. 그러므로 조상의 범죄의식은 DNA를 통해 자손의 무의식에 그대로 전달된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의 표현형인 인류는 자손 대대로 무의식 속에 누적된 조상의 죄를 회개해야 하는 존재이다.  역사적으로 회개운동은 기독교의 부흥에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 이제 과학적으로 원죄유전설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현대 기독교에 새로운 회개운동이 일어나서 천국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7417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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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5
  • 현대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조명(2)
    허정윤박사(케리그마신학연구원)     창조신학은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과 대결해야 인간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존재라면, 인간들은 솔로몬이 잠언에서 말했듯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1:7)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은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알고 그가 원하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1:26)고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밝히셨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신 때에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원복음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이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5-17)고 말씀하셨다.    앞의 세 구절을 곰곰이 살펴보면 하나님에게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자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되, 복을 누릴 수 있는 권한과 의무를 주셨고, 그 권한과 의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할 때는 복을 누리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경고를 하셨다. 하나님의 원복음에 의하면 아담은 온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과 의무를 가진 자였다. 원복음과 경고를 들었음에도 아담은 뱀의 꾐에 빠진 하와에게 넘어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그의 권한과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담에게 원죄가 되었다. 하나님은 아담의 원죄를 처벌하여 영생할 수 있는 에덴동산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바깥 땅으로 추방하셨다.    겉으로는 뱀의 꾐에 넘어간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아담이 먹은 것이 원죄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원복음이 인간의 창조목적과 같다는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면, 아담의 원죄는 하나님이 원복음에서 주신 권한과 의무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것에 무게가 실린다. 히브리어에서 죄(하타아)는 목적을 벗어난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원복음을 잊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면, 두 가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첫째는 간교한 뱀이 하와를 꾀지 못하도록 하거나 또는 하와가 뱀의 꾐에 넘어가지 않도록 잘 다스리는 것이다. 둘째는 땅에 어떤 조치를 취하여 선악과 열매가 열리지 못하게, 또는 선악과 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다스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의 원죄를 심판하시면서 뱀에게는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하셨고, 땅에게도 저주를 내리신 것(창14-19)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이 원복음의 실행 방법을 스스로 알아서 하기를 기다리신 것 같다. 땅과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종범(從犯)으로 심판을 받은 것이 그런 사실을 암시한다.    아담의 원죄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원복음과 원죄를 다시 살펴봐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오늘날 현실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차지하여 그들의 지식대로 다스리고 있다. 그런 현실을 방관하는 것은 원복음을 저버린 원죄와 다르지 않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르는 길은 물리학과 생물학 등의 과학적 지식을 습득하여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차지한 땅과 생물의 지배권을 되찾아서 원복음대로 다스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8260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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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0-02-05
  • 김영한박사의 역사적 예수 시리즈
    역사적 예수의 독특성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이 감히 부르지 못했던 하나님을 "압바"(Aββα, abba, 아버지)라는 가장 친근한 호칭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아버지 호칭은 복음서에서는 150회 이상이나 기록되어 있다. 12세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 축제에 부모와 같이 와서 없어져 버렸는데 부모가 근심하여 찾다가 성전에 있는 그를 발견하였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라고 질책한다. 이에 대하여 소년 예수는 독특한 문장으로 대답한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소년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압바”(abba)라는 호칭은 독특하다. “내 아버지 집”이란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집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인 하나님의 전을 말한다.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른 것이다. 예수는 그의 복음 전파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지칭할 때 어느 누구도 부를 수 없는 친근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십자가 상에서 숨을 거두시면서 하신 예수의 마지막 말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었다. 유대교 문헌에 정통한 독일의 신약학자 여호야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압바”(abba)라는 단어는 역사적 예수가 친히 쓴 아람어라고 밝히고 있다.   I. 구약에서의 하나님 아버지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 토기장이와 진흙, 주관자와 복종자의 관계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집단적인 내지 비유적인 의미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처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신명기에는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묘사된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시편 저자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에 비유하였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유대인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호칭으로 부르기를 꺼려하였고, 다른 편으로는 아버지 호칭을 집단적인 의미 내지 비유로 사용해왔다. 이러한 유대교의 하나님 “아버지” 호칭에 대하여 나사렛 예수는 새로운 의미, 즉 신약적인 독특성을 부여하였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족관계로 표시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부자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부성을 강조한 것은 바로 유대의 전통적 사상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분명히 설명해 준다. 예수의 아버지 호칭은 유대교가 의미하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부자(父子)관계로 끌어 올리는 혁명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그것은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와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이 호칭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더 이상 주인과 종 사이의 비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자녀에 대해 베푸는 아버지의 무한한 긍휼과 인자에 대한 신뢰가 담겨져 있다. 예수는 자기와 우리의 관계를 친구 관계로 격상시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예수는 우리의 친구요, 우리는 예수의 친구로서 예수를 통하여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예수는 맏형이여 우리의 그의 형제로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   II. 호칭 "압바"(Abba)의 함축성   나사렛 예수가 사용한 하나님에 대한 “압바”(아람어로는 abba, 아버지)라는 호칭은 유대교적인 하나님 상(像)의 틀을 깨뜨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예레미아스는 당대의 유대교 문헌을 연구한 후에 “유대교 기도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압바’라고 언급한 유비를 전혀 찾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구약 전체는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성을 강조하고 야웨와의 친밀성을 두려워하고 피하고자 한데 반해서 예수는 일상적으로 하나님을 아주 친근한 용어로 불렀다. “아버지” 호칭은 다음의 함축성을 지닌다.   1.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깊으신 관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와 같이 보살피신다. 우리에게 의식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부모가 자녀들의 의식주를 돌보아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기본을 돌보아 주신다. 예수는 어떤 조건을 제시하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하여 근본적인 신뢰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소박한 믿음을 말한다. 예수는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심정을 지니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시고 계신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예수는 하나님이 무섭고 벌을 주시는 재판관이 아니라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시고 마련해주시는 부모보다 더 사랑과 자비로써 우리를 보살피시는 분이라고 가르치신다.   2. 자녀 하나 하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하나 하나를 눈동자 같이 머리털까지 세고 계시는 세밀한 사랑이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과 같다고 예수는 설교하신다. 그 양을 찾으면 목자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하며 집에 돌아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눅 15:6)라고 말하듯이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3.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계: 직접성과 단순성을 나타낸다.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이다. 단지 형식이나 의식(儀式)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아직도 종교적 차원이다. 하나님은 자유스러운 마음,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배와 찬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애원하는 심령에서 나오는 자녀의 소박한 기도를 들어 주신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나님께 기도하고 요구하는 데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직접성과 단순성이 요구된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 자식이 아버지 앞에서 주저한다면 그것은 참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앙의 자연스러운 관계로 나타내고 계신다.   4. 자녀의 고통에 함께 하시는 분, 하나님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시고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고통은 율법적인 인과응보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징계로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통에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는 겸손해지고 우리의 인생은 더욱 깊어진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묻는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유대인들에 의하면 질병은 죄의 결과이다(요 5:14). 맹인의 경우는 그 부모의 죄의 결과로 보아야 했다. 예수는 대답하신다: “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맹인은 “실로암에 가서 씻어라”는 예수의 말씀에 따라 씻고 밝은 눈을 가지게 되었다(요 9:7). 맹인은 보게 됨을 통하여 그를 치유한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맹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간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자녀인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우리를 그 분의 원하시는 그릇으로 만드신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당하는 이 세상의 고통과 박해에는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시고 좋은 것으로 갚아주신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이다. 이 하나님의 고통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5. 아버지로서 자녀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신다.   하나님은 구약의 율법학자들이 생각했듯이 그의 자녀에게 단지 준엄한 재판관이나 율법 집행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녀에게 어느 계명을 지켰는지 보시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가졌는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보신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예수의 설교는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탕자의 비유)(눅 15장)에서 나타난다. 탕자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라고 아버지에게 참회의 고백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게의치 않고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사실 자체를 기뻐하신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품꾼의 하나로 받아들라고 돌아온 아들을 즐겨 맞이해주시고 잔치상을 베풀어주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비유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아낌없이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훈해 주고 있다.   6.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한 형제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한 형제가 된다. 여기에는 백인, 황인, 흑인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없으며, 지식인과 비지식인의 차이가 없으며, 권력자와 서민의 차이가 없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고 인종이란 진화가 빚어낸 적자생존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형상에 따라서 지음을 받은 창조의 작품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아바지 되심 앞에서 모든 인종 계층의 구별이 사라진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하나님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진화론적 인간관은 인간을 자연과정이나 만물과 다름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았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동등하며 자연보다 존귀하다고 본다. 형제 자매가 아버지 앞에서 하나인 것처럼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하나의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계 21:26).   III. 예수의 영 안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부성(父性)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부성)이란 나사렛 예수에 대한 믿음 안에서만 계시되고 그 안에서 호칭되어진다. 혈과 육이라는 자연적인 관계로는 정립되지 않는다. 요한은 다음같이 증언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하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오늘도 예수를 믿고 그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아들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같이 증언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압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영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압바”(abba,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5-16). 오늘날에도 신자인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압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친히 “압바!”라고 불렀던 예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압바”라고 불렀던 역사적 예수의 실재에 대한 연속성을 체험하게 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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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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