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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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김기호   사도행전 28장 1절부터 31절 사도행전 28장의 마지막 장면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 마지막까지 전심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는데,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절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죽음의 폭풍을 이겨내고 멜리데섬에 도착한 로마군인들과 선원들의 숫자는 276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람인 바울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독사에 물렸지만 죽지 않는 기적을 보고 멜리데섬 사람들 중에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기를 겪는 폭풍을 만났지만 그가 예수님을 의지할 때,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멜리데섬 사람들도 병을 고침 받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의 병을 고침 받은 ‘보불리오’는 나중에 멜리데 오늘날의 몰타에 감독에 됩니다. 바울이 죽음의 폭풍을 뚫고 멜리데섬을 거쳐 가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만나는 폭풍과 같은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게 당하는 고난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인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가는 곳이 때로는 감옥과 같이 답답한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30~31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감옥과 같은 곳에서 지냈습니다.   감옥과 같은 환경에서 꼼짝도 못하는 바울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바울은 감옥에서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있는 가정과 직장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믿는 사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2006년 1월에 서른 세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 청년 바보의사>의 주인공 ‘안수현’씨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쓰는 이메일의 마지막에는 항상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흔적 안수현” 자신이 예수님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7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 성남 은혜제일교회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22
  • [금주의 말씀]종려나무 가지의 의미 (삿 4장 1-5절, 계 7장 9-12절, 요 12장 12-19절)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승리의 왕'으로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승리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종려나무 가지가 나오는 성경의 본문들을 찾아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종려나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4장 4-5절에 의하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거기서 재판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세상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스라엘의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재판을 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사 드보라와 함께 하사 백성들을 정의롭게 재판하고, 결국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시어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종려나무는 '승리와 영광의 찬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2절에 의하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들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만유의 구주가 되신 어린양 예수님을 향해 큰 소리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에서도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단어의 근원은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에서 왔는데,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십시오"라는 뜻의 짧은 기도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 '호산나'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서는 '찬양하라'(Praise), 혹은 '만세'(Hooray) 라는 의미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종려나무는 승리의 찬양, 영광의 찬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셋째로, 종려나무는 복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보면,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에 수르 광야를 지나는데, 사흘이 되도록 물을 얻지 못해 목마름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라'라는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실망과 목마름이 더하여졌습니다. 안타까운 모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시면서 그 나무를 잘라 샘물에 던지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맛이 바뀌어 모든 백성이 마시고 목마름을 해결하였습니다.   그 후에 온 백성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결단하고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 샘 열둘이 있었습니다. 풍족한 물이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종려나무가 70주나 서 있어서 시원한 그늘이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지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엘림의 종려나무는 하나님의 복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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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5-04-14
  • [금주의 말씀]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창세기 3장 1절~6절)
       온 나라가 자연재해에 정치문제로 전례없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이 두동이가 나서 양극단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 아닙니다. 전 세계도 그간의 민주질서, 자본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리고 정의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도둑처럼 대립과 갈등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안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이름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자기 사익만 탐욕하는 세력들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쩌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며 싸우게 되었나요? 무엇이 잘못되어나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나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또한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와는 아담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하와에 접근하여 “사실은 먹어도 죽지 않고 더 지혜로워 진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하와는 말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 이 말은 사탄의 말이 아닙니다. 하와가 사탄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한 말이며 느낌이며 마음속에 든 생각입니다. 사탄의 말에 하와가 답을 한 격입니다. 하와가 만일 반대로 느꼈다면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외부의 유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받아 들이고 있어 나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도 하와에게도 벌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책임을 밖으로만 돌립니다. 네가 문제다. 네가 사탄이다. 이렇게 상대를 악마화하며 공격합니다. 갈등과 분열의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남탓을 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나서서 회개하고 내가 잘못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상 앞에 사과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와 사과는 사탄의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사랑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를 외칩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를 이해하고 나아가 화합시키고 통합시키는 일입니다. 이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내가 잘못했다’ 외치며 ‘우리 통합하자’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그냥 말로, 그냥 마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비우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하와는 따르기는커녕 비우는 일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우지 않아서 사탄이 온 것입니다. 비우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당하고 이겨내지 못합니다 또한 비우지 않았다는 것은 거기에/그곳에 뜻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랑은 비우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상대를 사랑하려면 상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비우지 않는 사랑은 자신을 위한 사랑이 됩니다. 법은 죄를 심판하지만 사랑은 죄를 용서하고 품어 앉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시 하와가 품고 비우지 못했던 욕망들이 그 때 그 하와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다는 사실로 받아 들이고 그것들을 비우기 위해 눈물 흘리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하며 내 자신과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화합과 통합을 위해 세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주 하나님의 화합과 통합의 사랑의 역사가 이 세상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탓만 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갈등과 분열의 시대가 도둑처럼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이킬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 각자가 골방에서 회개하고 골목에 나가 사랑으로 이웃을 끌어 안을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4-01
  • [설교] 오병이어로 보이신 하나님 나라
        본문 : 누가복음9:1-17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새 나라’의 소식을 들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나사렛 이란 동네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이세요.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들고 오시구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 건중 하나가 오늘 보시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사 복음서 모두가 담고 있는 몇 안되는 사건 중 하나 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각각의 복음서마다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마다 각자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인데요. 그런데 보기 드물게 모든 복음서가 담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이야기. 우리가 보통 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에 ‘아이’가 들고 나왔다고 적혀 있어서에요. 빵 다섯 개와 함께 가져온 물고기는, 아마도 이 빵 안에 끼워서 먹을 목적으로 가지고 온듯 해요. 먹을 때는 보통 이 빵을 ‘찢어서’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받아서 ‘축복 기도’를 하신 뒤에 ‘찢어서’ 나누어 주셨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찢어서 나누고 찢어서 나누어 주는데도 빵이 자꾸만 생겨난거에요.   나누어도, 나누어도, 자꾸만 나오는 빵.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인 남성’만 오천명 이상을 먹였다고 해요. 이 사건을 사 복음서.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에수님께서 이 사건으로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요. 마치,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에서 ‘만나’를 먹이셨던 것 처럼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광야’에서도 우리를 ‘먹이실 수 있는,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다같이 함께 3절을 읽어보실게요. 눅9: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행길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돈도 가지지 말고, 옷도 두 벌씩은 가지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땅을 걸을 때도 그랬습니다. 먹을 빵도, 사먹을 돈도 없던 백성들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걸어라’ 라고 말씀 하셔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걷기를 바라셔요. 단순히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만이 아니에요. 그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길. 우리가 걷는 이 땅에서의 걸음이 이미 ‘하나님 나라’인거에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당장 손에 먹을 것이 ‘없어’ 보여도 살아갈 수 있는 믿음. 당장 우리 주변에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갈 수 있는 믿음.    그런데 놀라워요. 그 ‘나라’ 안에 머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리시고, 먹이셔요. 또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서로 ‘베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우리에게 남는 것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셔요. 하나님의 나라는 ‘베푸는’ 나라입니다.                                                                                                                                /  오산중앙교회 담임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25
  • [금주의 말씀] 사순절,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함께(에스겔 3:2~7)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에스겔 3:2~7)   사순절은 부활절을 향한 40일간의 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맺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땅과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모든 생물에게 고유한 특징을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사막에 강을 내시고, 메마른 땅에 샘물을 터뜨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른손을 뻗으셔서 우리가든 손을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된이 끈이 귀찮다고 믿음의 생활이 귀찮다고 믿음의 줄이 끊어지면 마음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욕심 덩어리입니다 욕망 덩어리예요 탐욕이 가득해서 사망에 집어 삼킴 당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주님 그 신음 소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아무에게나 그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신 이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는 듣는 것이 사명입니다. 성경은 듣는 자가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돌이켜서 그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귀를 지으셨는데 하나님이 귀에다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이가 그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는 듣는 자는 살고 듣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고 돌이켜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능력, 전적으로 그 말씀을 의지해서 듣고 돌이켜서 생명을 얻고 사는 모든 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동현교회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3-14
  • [금주의 말씀] 건강과 행복한 교회(고린도전서 12:25-31)
     교회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나라가 잘됩니다. 잘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해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이 넘쳐 예배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문턱이 낮은 교회가 잘되는 교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위기가 왔을 때 성도들과 연합하여 합심기도의 기회가 될 때 틈새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더 큰 축복은 성령이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첫째 교회란?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함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며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여야 합니다. 또 마태복음 16장 17절에서 19절 같이 흔들리지 않고 고백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하늘의 권세의 축복을 받습니다. 행함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심을 확신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평생 성령님과 동행하는 정품 성도가 되겠습니다.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명품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은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지체는 성도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교회라고 합니다.건강한 사람은 심장이 1분에 60-100회이상 심박수가 규칙적으로 뛰어 심장의 피가 잘 흐르게 됩니다. 건강한 교회도 예수의 피가 잘 흘러야 합니다.    예배의 피,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기도, 찬양, 말씀, 헌금, 축도(예배의 5대요소)가 잘 흘러야 합니다.    사랑의 피, 항상 예수님이 제일 우선이 되는 피가 흘러야 합니다. 사무엘상 2장-4장 엘리 제사장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가장 좋은 것을 자기것으로 삼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하고 자기의 고집, 아집, 쾌락, 정욕등 악행을 일삼은 두 아들의 최후는 전장에서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음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의 피가 흐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교회를 지키고 행복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의 능력의 피가 흐르는 성도가 되어봅시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5~31)”/광명대한교회 조주원 목사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5-01-20

실시간 금주의 말씀 기사

  • 기다리고 기다리라 (시40:1~8)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기다리는 것이 있다는 것은 소망이 있음을 의미한다.   기대가 있는 자만이 기다리게 되고, 그것이 비록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라 할지라도 분명한 확신이 있다면 그 고통의 시간들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사14:24)고 약속하여 주셨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고,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때를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기를 축원한다.  첫째:발을 반석 위에 두심을(1~2)  하나님이 나의 삶에 역사하시는 그 때를 기다리는 자세의 첫 번째는 그 발걸음이 반석 위를 걷는 자가 되어야 한다.   기다리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나의 발이 점점 더 빠져드는 순간 아무도 내 발을 지탱해 주거나, 바닥이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라는 말씀을 통해 반석 위를 걷지 않는 것은 전적인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의 발걸음을 항상 지켜 주시기를 소망하신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셔서 그들의 발걸음이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 빠지지 않게 하셨던 분이시다.   나의 발걸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주님과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는 축복의 발걸음이 되길 축원한다.  둘째:입에 찬송 두심을(3~5)  하나님이 나의 삶에 역사하시는 그 때를 기다리는 자세의 두 번째는 나의 입에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언제나 흘러나와야 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선택하며 살고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신앙의 지표이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을 가진 자는 세상의 다른 것들에 휘둘려 사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다.   고난이나 환란의 순간에 우리의 입을 지배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저주하는 말들이나 상대를 비난하며 상처를 주는 말들뿐이다.   야고보 사도는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3:10)라 책망하고 있다.   내 입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는가? 기다려야 하는 순간, 찬송할 수 있음이 그 어떤 것보다 큰 축복의 순간이 되길 축원한다. 셋째:귀에 들려 주심을(6~8)  하나님이 나의 삶에 역사하시는 그 때를 기다리는 자세의 세 번째는 그 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열려 있어야 한다. 환란과 고난 속에 있게 되면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분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본문은 그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방법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7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8절)라는 고백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어떤 것보다 분명하고 정확하게 나의 길을 알려 주신다.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인생이 될 때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라는 말씀을 경험하게 된다.   집중하는 만큼 들리게 되는데 나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집중하며 살고 있는지,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그 소리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돌아보길 바란다.     인생을 살아보면 뛰어나가 달려야 하는 순간도 있지만 멈추어 서서 기다려야 하는 때도 있기 마련이다. 멈추어 서 있을 때 무엇을 하느냐가 다시 움직일 때를 결정하게 된다. 기다리지 못함은, 인내하지 못함은 아직도 나의 믿음이 그만큼 밖에 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고 고백하고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만이 기다림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넘어지지 않게 된다. 한 주간 기다림 속에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는 축복의 시간들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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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30
  • 복 있는 자 (시32:1~11)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세상은 만사형통이 복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복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복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을 때 건강한 믿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신11:26)라 말씀하시며 분명한 선택 할 것을 명령하신다. 창조 이후로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두 가지를 가장 큰 복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데 수중에 돈이 가득한 것과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복이기도 하지만 이 땅이 아닌 영원을 바라보며 사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잠깐의 기쁨이 아닌 영원으로 이어지는 복을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자녀들에게 주시는 참된 복이 무엇인지 깨닫고 시선이 변화되길 축원한다.  첫째:가려진 죄(1~5)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은 죄를 가려주시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분명한 사실을 깨닫는데 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려진다는 사실(1절)이다.   온전한 회개와 철저히 용서를 구하는 자세가 있다 할지라도 죄의 흔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냥 내가 다 사라졌을 것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하나님이 그 은혜로 가려주시지 않으면 언제든지 내 삶으로 뛰어들어 나의 마음을 휘 집어 놓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환경에도 영향을 미쳐 죄의 영향아래 살도록 만든다.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라며 사탄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근신하고 깨어있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매일 일상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은 내가 거룩하고, 의롭고, 온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도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모든 허물과 죄악을 가려 주시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려주시는 은혜 아래 살면서 그 손길을 간섭이나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큰 축복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살기를 바란다.   둘째:기도할 기회(6~7)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은 주를 만나 기도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짚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만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경건한 자’(6절)라는 사실이다.   그 경건한 자가 하나님께 기도할 기회를 얻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이 그 음성을 들으시고 홍수 속에서도 보호하시고(6절), 환난에서 보호하시며(7절), 갈 길을 가르쳐 보여주신다(8절).   간혹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 하셨던 것처럼 가난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귀찮게 하여서 그 소원을 성취하는 경우(눅18:1~8)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예외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은 경건한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고 권면하고 있다.   경건이 매일의 삶과 영원한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이 경건한 자가 하나님께 기도할 기회를 얻게 되고, 하나님이 그 경건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삶에 온전히 응답해 주시기 때문이다.  셋째:훈계(8~11)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은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고 훈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고 훈계하리로다“(8절)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온전한 관계에서 훈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훈계를 귀담아 듣는 다는 것은 그 말을 하는 대상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본문도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9절)라고 경고하고 있다. 때로는 따끔한 훈계가 기분을 언짢게 하고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하지만 양약이 입에 쓰듯이 그 쓰라림이 새 힘을 얻게 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잠언도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잠8:33)며 훈계를 통해 지혜를 얻게 될 것이라 말씀하고 있다.   훈계가 사라지고 나면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권위가 사라지는 시작하는 것이다. 훈계를 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지만 그 훈계 때문에 내가 바로 설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을 주저하지 말고, 훈계가 축복임을 기억하며 살자.  본문의 복들은 이 땅의 사람들이 원하는 복과는 거리가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크고 귀한 복으로, 그리스도인의 복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안에 머무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앞두고 모세는 광야를 지나온 백성들을 향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8:2)고 말씀하고 있다.   비록 고난과 환란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 시간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기에 약속의 땅에 이르렀음을 깨우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 머물고 있는지가 복 있는 자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 손길을 느끼며 사는 복된 자가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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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6
  • 하나님의 시간 속에 살자 (시30:1~12)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2023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내야 할 시간에 대해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이라 여겨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시간 속에 살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솔로몬은 젊은이들 향해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12:1~2)고 권면하고 있다.     2023년을 새롭게 시작하는 첫날, 첫 주일에 예배하며 나의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며 살기를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첫째:잠깐(1~4)  하나님의 시간 속에 사는 자는 삶에서 만나는 고난을 잠깐의 시간으로 견디어 내는 인내의 믿음이 필요하다.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는 과정은 힘들고, 고통스럽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아서 고난의 순간에 처해 있을 때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될 뿐만 아니라 깊이 개입하셔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다윗의 고백에서 보면 고난은 내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지 완벽하게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끌어내사”(1절), “끌어내어”(3절)라 고백하며 고난 속에서 빠져 나오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고난을 당하는 순간은 영원처럼 느껴지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하셔서 역사하시면 잠깐 사이에 해결되고 만다. 2023년 나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이 모든 환란과 고난 속에서 끌어내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길 바란다.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해결하실 잠깐의 시간을 바라보며 인내하며 믿음으로 승리하길 축원한다.  둘째:평생(5~10)  하나님의 시간 속에 사는 자는 나의 평생에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5절)의 고백은 평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37:23~25)는 축복을 경험하며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만큼 내 평생의 소원은 없어야 한다. 이 기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믿음의 사람들은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5:10)라고 고백하며 살게 된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 손길을 느끼며 사는 순간들이 되어 남은 평생을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살기로 결단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셋째:영원(11~12)  하나님의 시간 속에 사는 자는 영원을 바라보는 자로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 수 있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노엽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5절),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11절)의 경험 때문이어서만은 안 된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언제나 변함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영원히 그 분을 찬양해야 한다.   장차 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7:9~10)는 찬양의 대열에 함께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   올 한해가 영원의 시간으로 보면 작은 점에도 미치지 못하는 찰나의 순간일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에게는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하늘의 은혜를 이어가는 축복의 순간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새해의 첫날, 첫 주일부터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눈 깜짝 할 사이에 소중한 시간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성경은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엡5:15~17)고 명령하고 있다.   2023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이기에 하나님의 자녀로 의미 있고 소중하게 사용하여야 한다. 올 한해도 우리를 분주하게 하고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리게 만드는 일들이 쉴 새 없이 밀려 올 것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속에서 세상의 시간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 안에 사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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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2
  • 정월 초하루(역하29:17~19)
      “첫째 달 초하루에 성결하게 하기를 시작하여…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정월 초가 되면 그 어느 때 보다 우리는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며 한 해를 뜻깊게 살도록 다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이다. 건축한 성전보다 앞서는 것이 교회이다. 성전 건물이 없어도 교회는 세워진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묶어지고 세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활하는 곳이다. 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헬라 원어의 뜻은 ‘뼈를 바른 위치로 세운다’라는 뜻이다. 우리 몸은 살과 뼈가 함께 있어야지 뼈와 뼈가 맞닿게 되면 뼈는 부러지고 만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상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기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하게 세워지면 그 역사는 봉사로 이어져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봉사에 있다. 교회 안에서나 사회에서 서로의 도움이 되고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때에 따라 각자의 소임에 맞게 우리를 불러 주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새 힘을 얻는 것이다. 성결하게 하라 하셨는데, 성결이 무엇인가? 마르틴 루터는 ‘우리 마음에 천사의 마음과 마귀의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라고 했다. 사도 바울도 ‘내 마음에 하나님의 법과 마귀의 법이 함께 있다’고 했다. 성결이란 마귀의 마음, 즉 마귀의 법을 깨끗이 씻어 내리는 것이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4:8).   지금 내 마음은 어느 것에 속해 있는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 6:24). 마음을 성결하게 했다면 이제 손을 깨끗이 해야 한다. 손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결단의 실천화를 의미한다. 정월 초하루 새아침에 우리는 손을 깨끗이 하자. 이날을 결단의 날로 정하자.   새해를 한문으로 신년(新年)이라고 한다. ‘신(新)’자의 뜻이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설립(立)자로 시작하여 나무 목(木)자가 그 밑에 있고 그 옆에 도끼 근(斤)저가 합하여 새 신(新)을 의미한다. 나무가 서 있는 바로 옆에 도끼가 놓여 있다는 뜻이다. 이는 결단의 다짐을 촉구하는 뜻이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진다”(마3;10)고 하셨다. 그래서 이 신(新) 자가 들어가는 낱말 중에는 혁신, 경신, 유신 등이 있다. 새해 새 아침에 우리는 신앙의 혁신이 필요하다.   에스라는 첫 달 초하루에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스7:9). 모든 경기에는 목표가 있다. 우리의 삶에도 목적과 푯대가 있어야 한다. 인생의 푯대가 정확한 사람은 그의 일생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정월 초하루에 금년 한 해의 목표를 뚜렷이 한 사람은 이 한 해를 승리로 이끌어 갈 것이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 바울은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했다. ‘부르신 부름을 위하여’란 말은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께 그의 초점을 맞추고 달려간다는 뜻이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각자 자신이 정한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달려갈 때 사회에서 인정받는 일꾼으로 자랄 수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푯대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부르신 부름의 그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고 인생의 달림 길을 달려가야 할 것이다. 모닥불이나 호롱불에 만족하고 있었다면 오늘날의 전깃불은 있을 수 없다. 일하는 즐거움, 발명하는 즐거움 속에 달려갈 때 생활의 발전을 가져오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항상 앞을 향하여 달려가 올해도 승리하여 많은 결실을 거두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한다./한강장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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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6
  •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자 (마1:18~25)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을 소개해 주고 있다.   성령으로 처녀의 몸으로 아기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주는 인상이 너무나도 강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요셉은 그 비중 면에서 조금은 덜 중요한 존재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육신을 입혀서 이 땅에 구원자로 보내실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보시고 누구의 가정으로 보내야 할지 고심하셨을까?   말씀을 통해 요셉이라는 인물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고 깨닫는 시간을 통해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그리스도를 모셔 들일 수 있는 변화와 결단의 시간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준비된 사람(18~19)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는 축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그 쓰임에 합당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준비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잘 되었다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19절)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 의로움의 기준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다. 요셉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에 불과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사람이 나타났다고 말하며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하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으냐”(요1:45~46)고 반문할 정도였다.   세상의 사람들은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곳이라고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 의로운 한 사람을 보시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아버지가 되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는 선지자의 외침처럼 믿음 안에 의로움으로 사는 자를 통해 하나님은 하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심을 기억하며 그 어떤 것보다 의로운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성취된 말씀(20~23)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는 축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분명하고 정확한 말씀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면서 마리아를 데려오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라”(20절)고 말한다.   믿음이 없고,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의 말씀이 없는 가운데 벌어지는 일들은 사람을 두렵게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분명한 믿음이 있고, 약속의 말씀이 있는 자에게는 어떠한 어려움과 시련이 기다린다고 해도 결코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선지자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셨다면, 성경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분명하고 정확한 말씀을 온 인류에게 확증시킨 놀라운 축복의 사건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는 고백이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셋째:순종의 삶(24~25)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는 축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 가운데 할 수 있는 일들을 온전히 감당해 내는 요셉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요셉은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24절) 마리아 데려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25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역사에 인간적인 의심과 의혹이 틈타지 못하도록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순종은 말씀하신 그대로 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말씀이 주시는 감동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것을 찾아 그것을 삶의 자리에서 끝까지 지켜내며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순종이다.   영광의 하늘 보좌를 버리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성탄절에 하나님의 귀한 뜻에 순종하기 위해 내가 어떤 결단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돌아보길 축원한다.   들에서 양을 지키던 목자들을 향해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11~12)고 하셨던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신다.   아무리 분주하고 바쁘다 할지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듯이 이 땅에 아기 예수로 오신 주님을 맞이하고, 기뻐하며, 찬양을 돌리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임을 기억하자.   요셉이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서서 그 사명을 감당했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를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믿음으로 주님을 모셔 들이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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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주의 말씀
    2022-12-26
  • 이유 있는 삶 (시27:1~6)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지혜로운 사람은 현상이나 결과가 아닌 이유를 깨닫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왜 그런지 이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사는 자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문제를 잘 해결하듯 신앙적으로 ‘왜’라고 하는 질문에 익숙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보다 분명히 깨달아 알게 된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왜 구원하셨고 무엇을 위해 불러 주셨는지 깨닫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나의 목적만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이유를 아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아내야 하는데 그 분명한 이유를 알 때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말씀 안에서 분명한 이유를 알고 결단함으로 나를 구원해 주신 분명한 이유 안에 살기를 축원한다.  첫째:태연할 수 있는 이유(1~3)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 태연하게 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의 빛이 되시고 구원이시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1절).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답은 언제나 하나님 한 뿐 밖에 없다. 다윗은 악인들, 대적들, 군대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태연함을 유지하는 하며 평소에 훈련된 대로 행동하는 자가 반드시 승리를 얻게 된다.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하면서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3:6)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는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태연하게 살 수 있는 분명한 약속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자만이 어떤 순간에도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다.  둘째:사모할 수 있는 이유(4)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 하나님을 사모하며 살 수 있는 이유는 거룩한 성전을 주셨기 때문이다.   다윗도 이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에 “내가 여호와께 바른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려니 자신의 평생에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는 것“(4절)을 가장 큰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간구하고 있다. 이런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자 솔로몬이 지을 수 있도록 성전에 들어갈 모든 것을 준비하는 열심을 보이게 된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고(요2:13~22), 공생애를 마무리 하시면서도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시며(마21:12~13) 성전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신다.   성전은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네가 건축한 이 성전에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왕상9:3)라는 약속이 있기에 거룩한 곳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머무는 곳을 향해 모두의 마음이 모아지고, 사모하는 마음이 가득할 때, 그곳에서 드리는 찬양이, 기도가, 예배가 하나님께 온전히 올려 지게 될 것이다.   셋째:찬송할 수 있는 이유(5~6)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 찬송하며 살 수 있는 이유는 환난 가운데 지키시고 숨겨 주시기 때문이다.   환난 날에 아무 근심도 없이 피해서 숨을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여리고를 정탐하다가 쫓기게 된 두 정탐꾼이 라합의 집에 숨은 것처럼, 부랑자라 손가락질 받던 자들이 다윗의 그늘을 의지했던 것처럼, 아무 능력도 없어 보이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능력 안에 머물게 되었던 것처럼 참 쉼과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축복이다.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척박한 광야에서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32:10)고 고백하고 있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는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5:13)고 권면하고 있다.   믿음의 사람은 어느 순간이 되었든 하나님 안에 머무는 삶을 살아야 하며 묵묵히 그 넓은 품을 언제나 내어 주시는 하나님을 항상 찬송하며 살아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적이 분명할 뿐 아니라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분명한 이유를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이유 때문에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고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며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며 자신들이 왜 그런 삶을 선택했는지 분명한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내 삶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며 믿음 안에서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확실한 고백 안에 바로 서는 한 주간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12-19
  • 내가 서 있어야 할 곳 (시24:1~6)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며 그 앞에 서는 인생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에 자신들이 죽을 것 같은 두려움 마음으로 모세에게 하나님께 듣고 와서 말해 달라(출20:19)고 간청한다.  예수님이 군대 귀신을 돼지떼에 들어가게 하셔서 모두 몰사하자 그 마을의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떠나달라고 부탁(눅8:37)하는 모습에서 보듯이 주님의 임재 앞에 서 있는 것은 원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이 서 있어야 할 곳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의 앞이 아니라 떨림으로 긴장되며, 때로는 두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첫째:모든 만물(1~2)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 있어야 할 첫 번째 장소는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 앞이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인이신 사실을 본문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보여준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모든 것들’(1절)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고 있는 존재들임을 명심해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시는”(2절)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나고 탁월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바다나 강들 위에 할 수 있는 것들은 배를 만들어 띄우는 일 뿐이다.   예수님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마6:30)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때로는 작은 풀잎 하나,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 나에게 미소 짓는 상대방의 얼굴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그 순간에 감사할 줄 아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나의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둘째:예배의 터전(3~4)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 있어야 할 두 번째 장소는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터전이다. 그런데 말씀에 의하면 이 거룩한 터전에 오를 수 있는 자는 구별되어 있다.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4절)이다. 이 말씀대로라면 교회에서 예배할 수 있는 자가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하게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4:8)며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피해 숨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은 솔로몬 왕에게 “네가 건축한 이 성전에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왕상9:3)라고 약속하여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임재를 약속하신 터전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의 말씀처럼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하는 열심 안에 살아야 한다.  셋째:찾고 구하는 자리(5~6)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서 있어야 할 세 번째 장소는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찾고 구하는 자리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라고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2:4~5)고 말씀해 주신다.   예수님도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구하라 그리하며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고 약속하여 주셨다.   이 말씀들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찾고, 그의 얼굴을 구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간절함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머무는 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분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기쁨이 없을 것이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사모하며 찾고 구하는 자리에서 살기를 바란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8~9)고 선포하고 있다.   오늘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 분의 시선과 그 얼굴 앞에 머물기 보다는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 앞에 서서 그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한 주간 세상이 주는 만족과 즐거움에 취하여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분의 이름을 높이며, 찬양하면서 행복한 삶을 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기를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12-12
  • 부족함이 없는 이유 (시23:1~6)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정확하게 선포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고 정말 아쉬운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부르실 때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고 말씀하셨다. 나보다 나를 더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말씀을 통해서 내게 부족한 것들을 바라보며 기도하던 시선이 이제는 내게 차고 넘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보면서 감사의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내길 축원한다.  첫째:인도하심(1~3)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는 이유 첫 번째는 바로 그 분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살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부족함 없이 인도하시는 이유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3절)이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2:8)며 그 이름의 영광과 찬송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도 없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며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함을 누리지 못하는 자의 마지막은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고 있다면 사망의 길을 벗어나 생명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인도하심 가운데 머물며 사는 것이 매일의 삶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는 인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보호하심(4)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는 이유 두 번째는 바로 그 분의 보호하심을 느끼며 살기 때문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생각하면 삶에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 다가오는 순간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하시는’(4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느껴지는 공간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분의 뜻대로 살다가 당하는 고난을 맞이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똑같은 사망의 골짜기라 할지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를 받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로 분명하게 나뉘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이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5~16)고 말씀하셨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절망과 슬픔의 장소가 아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깨닫는 곳이 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믿음 안에 사는 자의 가장 큰 축복임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동행하심(5~6)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는 이유 세 번째는 바로 그 분의 동행하심을 확신하며 살기 때문이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야 했던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1:5)라고 약속하셨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곁에서 입의 혀처럼 굴더니 드디어 권력을 얻게 되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을 택하여 자신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의 동행하심의 축복에 대해 다윗은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이어지게 될 것을 고백(6절)하고 있다.   영원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그 분과 동행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게 된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정말 부족함이 없는가? 세상의 많은 부족함에 대한 갈증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닌가?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라 찬양할 수 있을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의지적인 고백이 아니라, 진정한 감사와 찬양에서 나오는 고백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려져야 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12-05
  • 하나님을 자랑하라 (시20:1~9)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본문은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이 세상의 무엇보다 자랑할 수 있는 이유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9:23~24)고 말씀하신다.   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 받는 것”, “없는 것”을 택하셔서 사용하시는 이유는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내게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만큼 자랑할 것이 없음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첫째:예배 받으심(1~3)  하나님이 나의 자랑이 되시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나의 예배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소에서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붙들어 주시고(2절) 소제를 기억하고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는 것(3절)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온전한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 드린 예물과 제사를 받지 않으심에 격분하여 동생 아벨을 죽이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만다(창4:3~8).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고 말씀하셨다.   예배는 나의 삶에 가장 큰 자랑거리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시간이다. 오늘 나는 얼마나 참된 예배자로 서 있는지 점검해 보길 바란다.  둘째:기도 들으심(4~6)  하나님이 나의 자랑이 되시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본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6절)라는 것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 거하는 이를 의미한다. 기도라고 해서 무조건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 기반이 된 기도가 응답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2~3)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약속하여 주셨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음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자들만이 가지는 축복이다.   이 은총을 잃어버리지 않길 위해 날마다 어느 곳이 되었든 기도의 자리를 세우고 지켜가길 축원한다.  셋째:힘이 되어 주심(7~9)  하나님이 나의 자랑이 되시는 세 번째 이유는 바로 환란 날에 그 어떤 것보다 나의 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본문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7절)고 고백하고 있다.   성경은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18:10)고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그 이름 자체가 바로 능력이고, 그 이름을 신뢰하는 자만이 그 이름이 주시는 힘을 경험하며 살 수 있게 된다.   시편을 읽고 묵상하고 있지만 시편의 수많은 고백과 찬양은 환난 날에 하나님이 힘이 되어 주시고, 위로가 되어 주심에 대한 것들이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되어야 한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썩어 없어질 것이지만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고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가장 귀한 열매로 인정받게 될 것을 기억하며 살자.  자랑거리가 온 천한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 이름을 전하고 증거 하는 것이 절대 부끄러운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목숨을 걸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그가 받은 응답은 무엇이었는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오늘 나의 자랑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기억하며 하나님만을 자랑하며 선포하는 한 주간이 되길 축원한다. 
    • 교회/목회
    • 금주의 말씀
    2022-11-28
  • 하나님께로 피하라 (시16:1~11)
    길목교회 주재훈 목사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선성이시로다”(시18:2)라고 고백한다.   홍수나 화재의 순간에 어떻게 대처하고 그 위기를 피하는 방법과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 평소에 알고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위기의 순간에 내가 피할 곳이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구원받은 자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자세이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위기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기억하고 그에 따른 현상과 결과에 대해 말씀을 통해 배우고 준비하며 깨어있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첫째:방법(1~4)  하나님께 피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피하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한 마디로 성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2절)고 말씀하신다.   반대로 하나님께 피하지 않고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는 자들은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4절)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6~7)고 분명하게 약속해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는 바로 고난 앞에 서 있을 때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며 나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피하는 방법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둘째:현상(5~8)  하나님께 피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피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에게 피하는 자는 마음의 안식과 평안은 물론이고 모든 문제들의 실질적인 해결함을 얻게 된다.   본문을 보면 나의 재물을 지켜 주시며(5절), 삶의 울타리를 평안하게 하시며(6절), 양심의 교훈을 밤마다 얻게 되고(7절), 궁극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된다(8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 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 살피시는도다”(시33:12~14)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는 그 삶의 문제가 풀어지는 역사는 경험하게 된다.   이를 위해 이 세상이 주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성숙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처럼 평안함과 함께 찾아오게 된다(요14:27).  셋째:결과(9~11)  하나님께 피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누리는 결과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마음이 기쁘고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게 된다”(9절).   더 나아가 11절을 보면 “생명의 길”, “충만한 기쁨”, “영원한 즐거움”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그저 그 날개 아래에 숨어서 소나기를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길을 힘 있게 걸어가면서 그 길에서 충만한 기쁨을 경험할 뿐 아니라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즐거움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당장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얻는 것은 물론이고 영생의 문제까지 해결함을 얻게 된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존귀한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약속받았지만 생명의 길로 가지 않으며 충만한 기쁨 보다는 근심과 걱정이 앞서고 영원한 즐거움보다는 두려움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하게 된다. 아직도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면 어쩌면 내가 기대고 의지할만한 것이 내게 남아 있어서는 아닌지 돌아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이 되길 바란다.   성경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시125:1~2)고 약속해 주신다.   이번 한 주간도 인생의 어려운 순간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피하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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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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