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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 선박사의 행복칼럼-25

예장대신과 백석교단의 신학적 기초를 놓은 최순직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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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9.1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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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30‘5분 칼럼진행자

 

조직신학자 최순직박사(사진.아래)는 항상 검은 한복을 입고 강단에 섰다. 그는 부드럽고 다정하게 강의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대목에서는 분명한 어조로 힘주어 강조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목회자의 열정을 학생들도 갖기를 원했다. 그런 그의 강의는 학생들의 신학과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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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박사는 1923316일에 함경남도 함주군 상기천면 오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로리소학교를 졸업하고 김치선 박사의 양아버지였으며 평생의 은인이었던 캐나다 선교사 영재영(Young)이 설립한 함흥 영생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또한 1943년 일제 강점기에 학도병 징집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중화민국 해암공립영화 국민우국학교 교사로 봉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신학교에 가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으로 부모의 허락 없이 고국으로 들어와 19453월에 평양신학교에 입학 하였다. 하지만 신학을 시작한 일 년도 못되어 폐결핵 진단을 받았고 학교를 중퇴하고 요양을 시작하였다.

 

석 달 정도 살 것이라는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산기슭의 격리된 오두막집에서 혼자 외롭게 지냈다. 당시 최순직은 40가 넘는 결핵환자 보호소까지 기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의 어머니로부터 사정을 들은 간호사가 보증을 서주어서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 간호사는 틈틈이 찾아와 회복이 멀지 않다고 격려해 주었고 최순직은 간호사에게서 희망을 느꼈고 건강도 차도가 보이게 되었다.

 

최순직박사는 19506.25 전쟁을 피해 아픈 몸을 끌고 그해 12월에 남쪽으로 내려와 경남 거제도에 정착하였으며, 계룡산 기슭에서 병든 몸으로 다년간을 동굴에서 기도하며 생활하였다. 이북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감당하였지만 평양신학교를 중퇴하였기에 1952년 총회신학교에 편입하여 방학 때는 목회를 하며 거제도에서 대구까지 통학을 하면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955년 한남노회 제37회 정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 한양교회 담임목사로 목회에 전념하였다. 1958320일에는 대한신학교 학장이었던 김치선 박사의 차녀 김동화씨와 결혼을 하였다. 그는 19594월부터 대한신학교 서무과장과 시간강사로 시무를 시작하여 1968년부터 1975년까지는 대한신학교 교수로 19812월부터는 방배동 총회신학교 교수로 조직신학을 강의하였다. 1999년에는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19991010일 자택에서 소천하여 미국 조지 워싱턴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하였다.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노선을 대신과 백석교단이 계승하도록 기틀을 놓은 최순직박사의 아내 김동화사모는 192825일 평양에서 김치선 목사와 이홍순 여사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치선 박사를 따라 1931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에서 성장하면서 그곳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녀는 1945년 경성사범학교 본과에 입학하고, 민족이 해방을 받아 경성사범학교가 국립 서울대학교로 편입됨으로써 예과 졸업을 하고 본과에 입학하여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대한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수년간 강의 하였다.

 

산부인과 의사에 의해 도저히 아기를 출산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던 김동화사모는 최순직 박사와 결혼을 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 태은을 출산하는 기적을 경험하였다. 현재 최순직 박사, 김동화사모의 사위는 한국에서 안과의사로, 며느리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간호사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는 어려운 국내 환경을 벗어나 1975년 미국으로 떠나 이민생활을 하다가 1992년 한국에서 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최순직박사에게 다시 돌아가 남편과 함께 생활을 하였다. 1999년 최순직박사가 돌아가신 후 온누리교회에서 권사로 임직을 받고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였다김동화 사모는 2014년 미국으로 건너가 새소망교회를 정성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숙환으로 2020813일 육신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장례식은 George Washington Memorial Park Chapal에서 아들 최태은, 며느리 최현숙, 손자 최바울, 손녀 최진주, 손녀사위 저스틴김, 손녀 최안나와 딸 이은혜, 사위 이기증, 외손자 이명철, 외손자 아내 이조에나, 외손녀 이지혜씨가 참석하고 815일 토요일에는 입관예배가 (Viewing Service)오전 11시와 하관예배 (Burial Service)오후 1230분에 장두만 목사와 구경서 목사의 집례를 통하여 가족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생로병사를 겪게 된다. 지금까지 최순직박사와 김동화 사모의 삶에 대하여 간단히 생각해 보았다. 필자는 김치선 박사의 삶과 사역에 대하여 논문과 글들을 학회발표와 출판으로 소개했다, 그분의 가족인 고 최순직박사와 고 김동화사모를 추모하면서 후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축복한다. 한 번 왔다가 가는 인생에 하나님을 만나고 십자가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며 생명의 말씀 속에서 위로를 받아 앞으로의 삶에 승리하는 독자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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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봉

그래서 백석은 무슨 연관이 있나요?
이제 백석이 끼어들기 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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