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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7.2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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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는 법질서라는 상징 체계위에 존립한다. 이 상징체계를 깬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연일 이어지는 이유는 이 약속된 체계가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틀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주요 전제 조건 중의 하나는 본능을 억압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완전한 억압은 거의 불가능하다. 억압된 것은 환상과 망상 또는 생각지 못한 뜻밖의 행동과 같은 증상들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불구(性不具)가 아닌 이상 성추행과 음담패설 등을 그들의 삶의 일부로 받아드리는 일에 남자들은 주저하지 않는다. 성추행사건에 심각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환상화 된 성 충동은 보통 여성에 대한 인지능력과 보편적 도덕능력을 저하시킨다. 최근 몇 년간 일어난 고급공무원들의 성추행이나 성폭력사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억압된 것을 소산(消散)시키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실패한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바다. 하나님께 특별한 은총을 받았던 다윗도 한 순간 이 부분에서 무너지지 않았던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대부분의 남자들이 성충동사랑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남자들은 성충동이 자극되면 사랑에 어려움을 겪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성충동을 느끼지 못하는 분열 속에 살아간다. 이 분열을 정상으로 간주하고 양성화한 것이 과거 일본군의 정신대이다. 여기에 여자들의 인권은 없었다. 퇴폐업을 운영하는 사람들 역시 남자들의 이러한 분열을 이용하는 셈이다. 이런 분열에 대한 자본주의적인 해결방법은 돈을 주고 성()을 사고 파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좌파진영에서 이 문제가 자주 불거지는 이유는 성()을 교환거래가 아닌 순수한 사랑으로 보려는 것에 있다. 성충동에 순수함이란 없다. 남자들에게 성충동은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준 죄 값으로 코카서스 산에서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아 먹히고 간이 다시 재생되는 프로메테우스의 반복 고통과 같다. 마치 오줌보가 차오르면 배출해야 하고 배출 후 또 다시 차오르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듯.... 남자들은 이 고통을 여자들과 함께 나누자고 한다. 다른 스트레스의 경우 소비(consumeing)와 같은 공격성의 배출을 통해서 해소가 가능하지만 성충동은 자본주의적 소비나 명예, 권력 등으로 완전한 해소가 불가능하다. 예술이나 지식활동으로도 심지어 종교적 의례로도 해결 되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자주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모든 남자들에게 화학거세를 시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과거에는 권력가들이 이용했던 관기(官妓)제도나 해방 이후 대도시에 제한된 구역 내에 집창촌의 암묵적 허락은 퇴폐 문화가 사회전역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여성의 인권이 신장됨에 따라 최근 청량리 588지역은 몇 업소를 빼고 거의 철거가 마무리된 상태다. 청량리 주민들은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온전히 지워버리고 이곳에 새로운 현대식 건물을 올리기를 원한다. 결국 남자들의 지하운동은 온라인이나 다른 채팅 방법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과거에는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결혼의 충분한 조건이 되었지만 요즘은 치솟는 집값이나 전세값, 혼전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늦은 나이에도 결혼을 못하게 된다. 결국 성충동의 해소는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혹 결혼한다할지라도 남자들의 분열(성충동과 사랑)된 욕망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문제를 좌우 진영논리나 정치적 문제로 비화시키면 문제의 핵심을 겉 돌 수밖에 없게 된다. 고발하고 폭로하고 억압하고 잡아넣어도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동물적이고 원시적인 본능은 어떤 방법으로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문화적 능력을 포기할 수도 없다. 완전한 방법은 아니지만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해 본다.

 

첫째, 남자들의 가부장적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과거의 가부장적 권위로는 더 이상 남자들이 이 사회를 살아갈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이다. 과거 여성들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남성과 연합하여 출산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야 했다. 여자혼자 경제활동을 하거나 독립할 수 있는 능력자체가 거의 불가능했고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남자에게 의존해야 했다. 열녀비(㤠女碑)는 그 만큼 여성들이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가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하고 춘향전의 이야기는 권력자들의 수청을 거부할 수 없었던 여성들의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역설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한국의 대도시 수도 서울의 수장(守長)이 과거 작은 고을의 현감(縣監)보다 힘이 없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그만큼 변화된 것이다. 이제는 여자들이 남자들의 가부장적 권위의식에 봉사할 이유가 없어졌고 옛날의 관기처럼 권력에 빌붙어 그들의 삶을 연명해야 할 이유도 없다. 이런 시대에 남자들이 과거의 구태의연한 성의식(性意識)으로 현대를 살아간다면 그의 마라톤은 아마 중간에서 포기되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 남자들은 자신의 몸을 부유(浮遊)하는 이물질(利物質), 곧 성충동이 어디에서 기인되었는지 성에 관한 교육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 여자들이 남자에게 의존적이고 여성의 본능 때문에 남자의 남성성을 무조건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무엇보다 남성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여성성을 살려내고 여성성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워야만 여성과의 깊은 관계가 가능하다. 아무리 감당할 수 없는 성충동일지라도 결단코 한 인격의 주체로서의 여성을 침범할 수 없다는 윤리의식이 그들의 인격의 중심 안에서 자리잡아야 한다. 간음하지 말라는 7계가 왜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지속적으로 묵상해야 한다.

 

셋째,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인문학독서나 예술, 놀이 등을 통해서 성적에너지를 조금이라도 분산시키는 방법을 통해서 극단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차단해야 한다.

 

넷째, 우리의 욕망이 억압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결핍 때문에 왔다는 사실, 그리고 결핍은 무언가 모자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곧 존재(being)와의 분리에서 생긴 구멍, 곧 운명적인 존재론적 불안과 연관된다는 사실을 받아드려야 한다. 물론 외양적 종교 의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분주함에서 더 깊은 존재(God)의 장안으로 들어가야 함을 의미한다. C.S 루이스는 이 복잡한 설명을 천국에서는 성적 유혹이 결코 없을 것이라는 말로 함축했다. 그곳은 어떤 정동의 불일치인지적 부조화’, ‘정서적 결핍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에서도 율례나 법억압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36:27)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5:18) 온전하지는 않지만 계명과 도덕이 억압으로 경험되지 않을 수 있는 그 세계는 아직 우리에게 열려 있다. 동물에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사랑과 성충동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말씀과 계명 그리고 신앙 안에서 찾아내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 깊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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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평안교회 박종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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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담 전문가 박종서박사의 ‘교회와 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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