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댓글 0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밴드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기사입력 : 2020.07.10 16:54
  • 프린터
  • 이메일
  • 스크랩
  • 글자크게
  • 글자작게

얼마 전 아는 지인에게서 전해 들은 그녀의 작은 텃밭의 이야기를 전해보려 한다. 그녀는 작년 가을에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를 새로 만든 텃밭의 땅에 묻어 두었다. 작은 어린이집 원장인 그녀는 워낙 야무지다. 아이들 식사와 간식을 만들다 보면 제법 음식물 쓰레기가 많아서 텃밭에 거름이 되겠거니 하고 그렇게 한 것이라 했다. 간혹 고양이들이 냄새를 맡고 와서 땅을 후비기도 하고 똥을 싸기도 했지만, 오히려 녀석들의 배변물들이 땅에 도움이 되려니 생각하고 그냥 두었다. 

 

땅이 얼어붙은 겨울이 지나고 언제나 맞이하는 새봄이 왔을 때 텃밭에 작은 사건이 생겼다. 알뜰한 그녀는 음식물 쓰레기를 묻으면서 내년 봄 먹거리를 위해 상추를 심어 두었다. 상추가 얼마나 자랐나 보려고 옥상 텃밭에 올라갔는데, 눈 앞에 펼쳐진 풍광은 참으로 그녀가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풍광이라 한 이유는 이러하다. 그녀의 텃밭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울토마토, 큰 토마토, 호박등의 야채들이 원시의 자유로움을 드러내며 자라나고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 씨앗에서 나온 녀석들은 농장에서 줄을 맞춰 자라난 야채들과는 사뭇 달랐다. 

 

땅속에서 얼기설기 섞여서 지내던 씨앗들(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졌던)은 자기에게 할당된 땅이 따로 없다. 그냥저냥 서로 의지하며 겨울을 지내다 봄볕이 부르는 따스함에 세상 밖으로 나오니 지금의 자연스럽고 기이한 풍광을 만든 것이다. 마치 예전에 보았던 영화 ‘오두막’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곤혹스러운 자신의 인생에 화가 나 있던 오두막의 주인공에게 신이 나타났다. 신이 데려간 정원은 얼기설기 볼품없었고 자신의 것이라고 가리킨 나무는 더 형편없었다. 

 

그 흔한 가지치기도 주변 풀 뽑기도 없는 제멋대로 자란 풀숲 그 자체였다. 그러나 카메라를 올려 위에서 내려다본 정원의 풍광은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자연스러운 것들의 조화에서 오는 환희! 작은 텃밭의 아름다움도 그와 같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세상에 생길 때 나는 자신만의 씨앗에서 태어났다. 그 씨앗의 이름은 지금의 내 이름일 테고 그 모양대로 자라서 살다 가는 게 인생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물며 버려진 텃밭의 음식물 쓰레기도 각자의 모습을 내며 이리 아름답고 오묘함을 드러내는데 인간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제도라는 큰 울타리에 들어간다. 그것이 국가든 사회든 교육이든 간에 혼자 살 수 없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안전망이 자동으로 탑재된다. 제도와 체제는 다수의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개개인의 씨앗이 자라기에는 모양과 틀이 너무 일정하다. 도덕과 가치체계는 질서 있는 삶을 제공하지만 세분된 현대인의 삶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편협하다. 이러한 일정한 틀과 편협함이 이데올로기가 되면 고귀한 인간들은 서로를 공격하며 싸운다. 자신의 땅에 침범하지 말라고, 내 생각을 흔들지 말라고, 내 삶의 질서를 뭉개지 말라고 말이다.

 

우리는 모두 죽으면 육신의 흔적을 땅의 거름으로, 때로는 바다 생물의 먹이로 자연에 내어준다. 또한 우리가 살았던 삶은 크건 작건 역사라는 장르 속에 다음 생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터전이 된다. 난 그 터전이 될 우리의 삶이 엉키고 설킴 속에서 조화를 만들어 가는 그런 생명력 있는 텃밭이 되길 그려본다. 들려오는 크고 작은 분쟁 속에 다음 세대에게 건내줄 그 텃밭이 관용과 수용의 텃밭이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송천교회 부목사


태그

전체댓글 0

  • 14032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향유옥합] 텃밭의 신비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