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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박사 칼럼

세계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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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5.1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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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지금부터 51년 전, 나는 광주 육군보병학교에서 장교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 때 소령 계급장을 단 멋진 교관이 단상에 오르더니 흑판에 <전쟁은 예술이다>란 제목을 크게 쓰고 나서 열변을 토해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가 말한 <전쟁은 예술이다>라는 말을 이해 할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외교전쟁, 무역전쟁, 경제전쟁, 문화전쟁 등등 다양하다. 그런데 나는 오늘의 사회에서 여러 가지 소리 없는 전쟁은 <세계관 전쟁>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소총으로 적의 심장을 향해 쏘고, 전투기와 탱크로 적의 군사 시설을 파괴하고, 미사일로 적진을 초토화시키는 것만이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전쟁의 개념은 매우 다양하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전쟁도 있는가 하면, 근래에는 과학이 고도로 발달되어 굳이 전면전쟁을 하지 않더라도 미국 본토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무인 공격기로 적장을 간단히 처리하는 방법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미국의 이란 솔레마이니 장군의 제거이다.

 

모든 나라들이 평화를 말하지만 실제적으로 아직도 이 땅에 평화는 없다. 평화 쇼를 멋지게 한다고 이 땅에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MI소총 가스 마게 앞에 새겨진 PAX는 곧 평화이다. , 평화를 원한 다면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전쟁이든 전쟁은 승패가 나기 마련이고, 전쟁에 패한 쪽은 엄청난 피해를 받게 되고 한 국가가 지도에서 사라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영국과 청나라와의 아편전쟁, 미국의 남북전쟁, 1,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중동전쟁, 월남전쟁, 625전쟁 등 헤아릴 수 없는 전쟁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면서 아직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쟁중인 나라가 있다. 바로 우리나라이다. 남북한은 지금 휴전상태가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70년전 북한 공산당의 불법 남침으로 울산 방어진까지 피난길에 올랐고, 그때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전쟁 중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또 하나의 전쟁이 있으니 이른바 <세계관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세계관 전쟁>이라니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들릴지 모르겠다.

 

세계관이란 단어는 영어에는 없다. 그냥 World View란 조어를 만들어 쓴다. 그러나 독일어는 세계관을 Weltanschauung이라 쓰고 있다. 최근 한국교회 안에서도 세계관이란 말을 보편적으로 쓰고 있다. 세계관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세상을 보는 시각 또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입장, 무엇을 기준으로 역사와 세계와 인간을 보는 가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 질 수 있다.

세계관은 실제로 우리의 삶의 가장 가까운데 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인간이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생각의 배경 즉 사상의 배경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삶의 결과도, 걸음걸이도 서로 달라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중립이란 것이 없다.

 

또한 사회적 분위기나 시스템이나, 정치방향도 세계관의 결정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 가령 사회주의적 생각에 물든 사람들이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만들면, 그 작품에서는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적 세계관이 나오게 되어 있다. 최근에 한국의 영화들이 오스카상과 아카데미 상을 석권했다. 참 대견하고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사회주의 세계관과 연관성이 있다고 들었다. 오늘날 문화, 예술가들은 그냥 소설은 소설로, 영화는 영화로 단순하게 보자고 한다. 그동안 한국에는 종북소설도 많았고 사회주의적 영화도 많았다. 금번에 상영된기생충이라는 영화에서도 사회의 양극화를 부추기고, ‘가난한 자가 식칼로 부자를 찔러 죽여도 된다는 공산주의적 혁명의 사상을 심어 주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유럽과 미국 영화계의 상을 휩쓸었고 세계적인 화제작이 되었다.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계도 벌써부터 그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는 증거이다. 영화 평론가들은 빈부격차를 다룬 문제작이라고 추겨세웠다.

 

나는 1980년부터 대학총장의 책임을 졌기에 그 때 상황을 잘 알고 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전교조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우리나라는 태어나지 말아야 할 나라라고 가르쳤고, 은근히 계급투쟁을 가르치고 있었다. 사실 그 동안 수십 년간 북한의 세작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법조, 교육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에게 세뇌교육을 했었다. 그런 교육을 받은 이들이 이른바 민주화의 깃발을 앞세우고 평등, 평화를 내세워 서서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적패를 부추기고, 고등부, 대학생, 청년들과 각계 각층에 사회주의 사상이 문화와 예술이란 이름으로 파고 들었다. 이런 것을 이른바 문화 맑스주의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정치권, 교육계, 문화계 등 광범위하게 우리 자신도 모르게 <유물주의 세계관>, <사회주의 세계관>에 물들어 버렸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종교이다. 지금은 사이비 종교적 신념을 굳게 믿는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19 이후, 세상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두고 TV에서 많은 학자들이 미래를 전망했다. 어떤 학자는 촛불 혁명의 위대함을 예찬하고,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유명한 교수라도 그가 비뚤어진 세계관에 붙잡혀 있다면 애기는 달라진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 또는 한국교회는 이런 거대한 물결과 대항할 수 없는 위기에 놓여있다.

 

이런 이데올로기와 대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적 세계관>, 또는 <칼빈주의 세계관>뿐이다. 그러기에 교회가 먼저 깨어나야 하고, 강단을 맡은 목회자들이 철저히 성경적 세계관 교육에 올인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한국교회 강단은 오직 현세적인 행복만을 선포하는 낙관주의 세계관이 지배했고, 이 세상과의 <영적 전투의 의지>를 심어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적 전투적 의지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계관 전쟁>에 바른 인식을 가져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타락>,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철저한 <기독교 세계관>을 갖도록 교육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교리적 교육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젊은이들에게 영적 전사로서 세속적 세계관과 투쟁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세계관 전쟁중이다. 물론 기독교의 핵심은 복음 그 자체이지,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중심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자는 자연히 세계와 역사와 인생에 대한 확고한 성경적 세계관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자들 중에서도 사회주의 세계관을 가진 자들이 많아서 큰 걱정이다.

 

화란의 칼빈주의 대학자인 정치가요, 신학자, 언론인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박사는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 성경적 중심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독교 세계관, 인생관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는 말하기를 칼빈주의가 신학적 체계만 갖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과 방향을 제시하는 근본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했다.

 

코로나19 이후, 오늘날 한국교회의 당면과제로 우리는 복음을 통한 영혼구원은 말할 것도 없고, 삶의 전 영역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등 모든 영역에 침투된 유물주의적, 인본주의적,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막아내고, 기독청년들에게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의 세계관을 정립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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