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8-10(월)

기독교정신의 민족애로 2·8독립운동

실천·지성·혁신적 발상으로 일제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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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2.05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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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촌 백관수 등 조선독립통한 이상사회 건설비전을 제시

자유·독립 박탈당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고뇌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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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 전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한 3·1운동은 을사조약 이후 한민족이 하나 되어 일제의 폭정에 저항하고 세계만방에 독립의지를 내비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민족애를 기반으로 하는 신앙 공동체로서 만세운동에 주도적인 참여를 보였다. 이는 민족성의 각성만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보편애와 세계 평화 등 서구로부터 유입된 선진적 사회 가치를 실현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도 동일하게 살겠다는 사회적 선언으로 볼 수 있다.

 

3·1운동 당시 2%를 넘지 못했던 기독교가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었던 점은 서양 선교사들의 존재와 교파를 초월한 연합 등을 손꼽을 수 있지만, 일본 유학길에 오르며 민족의 자유와 독립, 평화와 정의를 세우기 위해 고뇌한 기독 유학생들의 노고를 잊어선 안 된다.


2·8독립운동과 근촌 백관수선생

5년 동안 극심한 소모전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하면서 유럽과 북미는 물론 아시아와 남미 등 식민지 곳곳에서 평화와 독립, 자유를 찾는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이에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독일 제국이 지니던 산둥반도의 권리를 중화민국에 반환해야 한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등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제창하면서 식민지 사회에 큰 파란이 일어났다. 이후 1919년 파리강화회담에 개최되며 기대가 한층 고조됐다. 여기엔 훗날 베트남의 국부로 추대되는 호찌민이 찾아와 프랑스 식민 치하 베트남의 현실을 알리고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수많은 식민지 지식인들이 기대를 걸었다.

 

한반도 또한 이승만과 민찬호, 정한경 등이 조선인 대표로 참석해 일제의 침략 행위를 알리기 위해 강화회담이 진행된 파리로 가게 됐다. 이들의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 사이에선 여기에 호응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당시 메이지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근촌 백관수선생은 뜻을 함께하고 있던 김안식과 김현준, 정광호, 최원순 등과 함께 조선 유학생들을 조직, 독립의사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기로 했다. 이후 근촌 백관수선생은 1919년 1월 6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진행하기로 한 유학생 웅변대회에서 조선 독립의 달성에 조선 유학생들이 앞장선다는 내용의 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하고 유학생들과 함께 방법을 논의했다.

 

이어 진행된 2·8독립선언서의 작성을 위해 당대 문필가로 명성을 쌓던 이광수에게 선언서 집필을 요청했다. 독립선언서 초안을 읽어본 백선생은 사상과 이념 부분에서 자신이 생각한 것과 차이가 있다고 보고 세 차례에 걸쳐 선언서를 다듬었다. 훗날 근촌 백관수선생은 「조선청년독립단 2·8선언 약사」를 통해 “선언서는 본인이 담당하여 이광수군에게 하여금 기초해 재삼차 수정 완료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2·8독립선언서 작성을 마치자 근촌 백관수선생은 준비 중인 독립운동이 일본 안에서만 이뤄진다면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해 집필한 독립선언서와 함께 송계백을 서울로 파견했다. 당시 전달된 2·8독립선언서는 여러 과정을 거쳐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에게 전달되었으며 이를 읽어본 손병희는 교단 회의를 통해 일본에 있는 유학생들의 정신을 따라 교단 차원에서 독립운동을 궐기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기 위해 근촌 백관수선생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창설했다. 단장으로 추대된 근촌 백관수선생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쟁취한 세계만국의 앞에 독립을 기필코 이루기를 선언하노라. …… 우리 민족은 일본의 국군주의적 야심의 사기 폭력하에 우리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운명을 당했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이 시기에 당연히 바로 잡을 것을 세계에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또 세계 개조의 주인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은 보호와 합병을 솔선 승인하였으므로 이 시기에 구악을 대속할 의무가 있다”

 

선언문을 통해 근촌 백관수선생은 동아시아 민족의 공동 번영과 평화와 질서를 약속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 지닌 허상을 고발하고 조선 독립의 이념과 당위성을 강조했다. 기미독립선언서와 달리 근촌 백관수선생이 낭독한 2·8독립선언서는 민족애와 젊은이의 열정을 바탕으로 독립 의지를 눌러 담았다.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던 유학생 500여 명이 모여 진행된 2·8독립운동은 조국을 잃었던 서러움과 독립의 환희가 뒤섞여 통곡과 오열의 장으로 바뀌었다. 일본 경찰들은 강당으로 진입하고자 했고, 경찰들의 진입을 막고자 수많은 학생들이 그들과 다툼을 벌였다. 당시 사회를 보고 있던 유창석은 기도를 올렸고 눈물을 흘리던 학생들과 고함치며 폭력을 행사하던 일본 경찰마저 고요해졌다.

 

유창석의 기도가 끝나자 근촌 백관수선생은 앞장서서 강당에 모여 있던 학생들을 이끌고 도쿄 거리를 누비며 독립만세를 외치고자 했다. 그러나 기도로 인해 잠시 주춤하고 있던 일본 경찰들이 그들을 덮쳤다.


2·8독립운동과 기독교

이렇듯 3·1운동의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2·8독립운동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고국의 독립을 통해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하길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민족애와 독립의지만을 근간에 두지 않았으며 오히려 굳건한 기독교 신앙을 밑바탕에 깔아 식민지주의의 폐단을 없애고 보편 가치의 확립을 위해 나선 거사라고 평가할 수 있다.

 

지난해 진행한 2·8독립운동 100주년기념 학술심포지엄과 국민 대토론회에서 이종걸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은 “2·8독립운동은 절망적이었던 일제강점기 속에서 굳은 의지와 신앙심으로 민족독립을 민족 독립을 이끌었다”며, “조선기독교청년회의 선각자를 비롯한 항일 열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상기하면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겠다”고 전했다.

 

또한 이명화위원(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활동과 항일운동」란 주제의 강연을 통해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품고 있던 독립열망 한가운데엔 기독교 신앙이 있었음을 밝혔다. 이위원은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본인들의 천시를 받고 적대시되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강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품었다”며, “기독교 단체로서 재일본도쿄기독교청년회는 조선인 유학생들의 정신적 안식처이면서 유학생 사회를 이끌었던 민족운동의 지렛대 역할을 수행했다”고 전했다. 

 

이어 “재일본도쿄기독교청년회는 일본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고난의 시대를 함께하며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켜온 곳이다”며, “그곳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기독청년으로서 사회화를 도모하는 신앙 공동체를 건설했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유학생 사회에서 지니고 있던 재일본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근촌 백관수선생과 2·8독립운동을 계획한 독립운동가들이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위해 조선기독교회관에 모인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평할 수 있다.

 

2·8독립운동에 대해 정치역학적 관점을 통해 해석하는 한편 국제 기독교계가 이를 어떻게 받아드렸는지 알아보는 것 또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김숭배상임연구위원(연세대 통일연구원)은 「한국/조선 민족자결의 발현과 지속 - 2·8독립선언의 응집성」이란 주제로 정치역학적 관점에서 2·8독립운동은 한민족의 자기결정을 발현시켰다고 강조했다.

 

김위원은 “2·8독립운동은 단순히 3·1운동의 밑바탕이 아니다. 1919년을 기점으로 민족을 지탱했던 역사였고, 민족의 자결을 천명한 것이었다”며, “2·8독립운동을 이끌고 참가한 이들은 타지에 온 조선인 유학생이라는 신분과 우드로 윌슨으로 대표할 수 있는 세계사의 조류를 인지했음은 물론 기독교 사상이라는 배경이 맞물려 거사를 도모했던 것이다”고 역설했다.

 

또한 2·8독립운동을 필두로 독립운동 근간에 기독교가 버팀목 역할을 했음을 이명화위원은 피력했다. 이위원은 “조선기독교청년회는 각기 다른 배경과 계층을 지녔던 조선인 유학생을 하나로 잇는 연결고리가 되었고 2·8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됐다”며, “이를 통해 조선기독교청년회는 종교적 친목 단체를 넘어 민족공동체의 장이 됐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의 활동은 기독교 정신과 배치되지 않았기에 일본을 포함해 국제기독교청년회의 지지와 협력을 받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한편으로는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 힘들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꿈꿨던 조선인 유학생들의 기치를 높게 평가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김석근수석연구위원(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민족’과 ‘독립’과 ‘평화’ - 2·8독립선언의 사상사적 위상과 함의」란 주제로 2·8독립운동이 지닌 사상사적 위치에 대해 밝혔다. 

 

김위원은 “윤치호는 2·8독립운동에 대해 조선인들 마음속에 민족 본능이 살아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평가했다”며, “조선청년독립단이 독립이라는 단어를 직접 내걸었다는 점은 과감한 결단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해외의 독립지사와 소통하고 있던 유학생들은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가 조선과 한민족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며,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조선인들이 주체적으로 독립을 선언해 국제사회의 원조를 이끌어내고자 독립운동을 감행했다”고 덧붙였다.


2·8독립운동의 의의

일본 경찰들의 난입으로 강제 해산에 그쳤지만, 2·8독립운동은 1910년 을사조약 이후 독립운동의 의지가 한 데 모여 민족의 등불을 밝힌 거사로 인정받고 있다. 윤재근박사(전 한양대학교 교수·문학평론가)는 2·8독립선언에 대해 논하면서 “2·8독립운동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과 비교했을 때 실천적이고 혁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며, “2·8독립선언서에서 볼 수 있듯 2·8독립운동은 지성적이면서 활력이 넘치는 측면이 강하다”고 밝혔다.

 

또한 “근촌 백관수선생을 비롯해 당시 유학생 신분으로 도쿄에 머물던 이들이 느끼고 있던 역사적 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며, “이들이 꿈꿨던 민족국가의 모습은 자유주의를 뿌리로 하는 근대국가로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희망찬 미래사회를 그린 것이다”고 평했다.

 

즉 2·8 독립선언서는 한민족 전체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한 자유주의국가 건설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봉건질서 타파와 근대이념의 대중화를 역설했다. 이는 한국교회 초창기 선교사를 시작으로 한국교회가 이루고자 한 가치세계와 맥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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