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3-30(월)
댓글 0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밴드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기사입력 : 2020.01.20 11:13
  • 프린터
  • 이메일
  • 스크랩
  • 글자크게
  • 글자작게

21임성훈.PNG

 

요즘 날로 기독교가 극우화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본다.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기독교는 왜 이렇게 극우화되고 있는 것일까. 교회의 극우화는 어쩌면 기독교 논리가 향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렇다면 기독교가 지향하고 있는 논리는 무엇인가에 내 관심이 쏠렸다.

 

교회가 극우화 성향으로 치닫는 원인은 눈에 보이는 프랙티컬한 요소들, 즉 정치, 경제, 자본의 원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사상적으로 극우적이다. 우리가 우파와 좌파를 경계지을 때 보통 ‘자유’가 그 중심에 있다. 물론 우파가 ‘자유주의’라는 경제 패러다임을 필두로 ‘자유’라는 개념을 우파의 개념으로 가로챘지만 여전히 좌파는 ‘자유’를 지향하고 우파는 ‘자유’에 경색되어 있다.

 

내가 말하는 ‘자유’란 모든 흐름에의 개방성을 의미한다. 지면의 하이어라키, 즉 높이라는 포텐셜 에너지를 조작하면 수로를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물의 흐름은 이미 계획된 포텐셜 에너지에 의해 제약된다. 이러한 자유의 통제와 제약으로부터 하나의 조직이 구성되고 그 조직이 지향하고 있는 통제된 포텐셜 에너지의 총양과 분포를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 우파의 핵심 기조이자 대부분의 기독교분파들 논리의 핵심이다.

 

그러나 좌파는 이미 기획된 흐름을 자유롭게 풀어 헤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조직된 포텐셜 에너지를 자유롭게 해방시켜야만 하며, 그 때 우선시 해야만 하는 작업은 높이라는 지면의 위계질서를 평면의 수평구조로 전환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직구조를 수평구조로 전환하면 이제 물의 흐름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물론 어떤 이는 ‘순수평면’을 상상하고 물이 멈추어 썩어버릴 것이라 말하지만 곡률=0의 평면을 우리는 실증적으로 도저히 구현할 수 없다. 엔트로피=100의 무질서는 국소적으로, 양태적으로만 성취되며 현상계는 늘 곡률과 포텐셜 에너지, 그래서 흐름과 운동으로 가득차게 된다.


기독교는 이러한 자유로운 흐름을 통제하고자 한다. 통제의 제일원인으로 항시 신을 제시한다. 우리가 왜 구질서를 따라야만 하는가라고 묻기 시작할 때마다 기독교는 “그것이 신의 뜻이다. 신의 명령이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언제나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위계상 권리를 보존하기 위해 신을 들먹거렸고, 이러한 습성이 아예 기독교 자체 내에 내재되어 이제는 자신의 위치를 점유하려는 욕망을 신에게 투사한다는 간단한 자기반성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듯 하다.

 

그러나 나는 이내 이러한 기독교의 모습은 단지 로마에 의해 제국화되고, 가톨릭에 의해 교조화 된 기독교일 뿐이라는 것에 생각이 이르렀다. 우리가 신을 예수를 통해 보기에 기독교인이라 불리고 있는 것이 일리가 있다면, 이러한 기독교는 결코 그 어떠한 위계질서도 보존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지 우리를 멈춰있게 하지 않는다.

 

예수가 그토록 거부하려 했던 경직된 율법주의는 잘 통제된 시스템이었고, 당시 유대인들의 자유를 말살하는 감옥과 같은 구조였다. 잘 조직된 위계질서에 의해 조작된 포텐셜 에너지에 자유를 불어넣는 것, 사람들이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생각하는 것에 자유를 불어넣는 것, 그것이 예수의 뜻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기독교의 기본정신은 아닌 것일까.

 

/연세대 신학과 일반대학원 재학생


태그

전체댓글 0

  • 97081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실로암] 건강한 교회문화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