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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11.1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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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백우인.jpg

 

가을 햇살이 쪽마루에 나와 앉아 해바라기가 내게로 쏟아진다. 너무 맛있는 걸 먹을 때 아껴먹느라 야금야금 베어 먹듯이 실눈을 뜨고 조금씩 조금씩 햇살을 받아먹는 오후다. 하늘은 푸르름이 가득하고 세상엔 온통 황금색 가루가 바람에 날리고 붉은 나비들이 춤을 춘다. 마당 한켠에서는 사랑에 빠진 얼굴의 맨드라미가 활짝 웃고있다. 모든 것들이 보기에 좋다. 참 좋다. 충만하다. 

 

 

카페목회를 시작한지 곧 1년이 된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보암직도하고 먹음직도 한 정성담은 식탁을 차려놓고 그곳으로 초대하고 싶었다. 한 순간이라도 성찬의 시간을 맞고 싶었다. 어쩌면 그냥 가장 순해진 얼굴로 옆에 있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서로 가장 닮은 얼굴로 마주 앉아 손을 잡아주고 싶었던 마음이 컸을지도 모른다. 이런 바램의 시작은 어느 고단한 겨울 날, 삶의 용기를 잃고 기진맥진 해서 더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노라고 나자빠져 버린 나를 찾아와, 먹게하고 쉬게 하셨던 “그분”, 존재의 용기를 흘러 넘치도록 채워 주시던 “그분”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고 풍족하게 나누어 주고 먹게하고 쉬게하는 엄마를 통해 나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어떤 것을 담아 주어도 그냥 주는 법이 없이 넘치도록 가득 부어 주고는 그래도 빈 틈이 있을까봐 흔들고 손으로 꾹꾹 누르고 그리고도 또 한줌 집어 맨 위에 얹어주던 엄마였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 나가 혼자 힘으로 살아 보겠다고 바등거리다 상처받고 위축되어 처진 어깨로 비틀거리며 엄마에게 돌아오는 길이면 엄마는 벌써 저만치에서 나를 알아 보고는 달려 나와 나를 품어주었다.

엄마에게는 부족이나 결핍이나 인색함, 초라함이란 없었던 것 같다. 저울로 잰듯한 딱 그만큼의 정량이란 애초 부터 없었다. 퍼담고 퍼담고 또 퍼담는 엄마는 넘치는 충만함 그 자체였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원칙은 넘치는충만함의 원칙이다.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일,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건진 일, 가나안의 혼인 잔치,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와 포도밭 일꾼들의 비유 등에서 넘치는 충만함을 만나게 된다. 넘치는 충만함, 풍요, 흥청거리는 호사는 구원의 시기를 나타내는 표상인것이다.

 

하나님은 몸소 흘러넘치는 생명이시고. 하나님의 열망은 이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잣대가 없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흘러넘치는 충만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똘똘뭉쳐진 매력쟁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루동안의 양식으로 만나를 내려주시던 광야에서의 시간은 몇 번을 읽어도 늘 감사의 고백이 절로 나온다. 나는 지금 광야에 살고 있다. 광야와 같은 현실에서 하루 동안 주어진 시간을 열심히 성실하게 채우고나면, 다음 날 또 새로운 하루가 선물로 주어진다. 그러면 또 그날의 시간을 꼼꼼하게 차곡차곡 채우는 반복된 하루 하루다.

 

놀랍게도 꼭 하루를 살 만큼의 체력과 능력과 집중력을 주입 받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도 변함없이 내게 주시는 “만나”로 사는 것이다. 

 

쪽마루에 앉아 만나와 같이 쏟아지는 햇살을 야금야금 받아 먹으며 내 마음의 감사주머니가 충만해지고 흘러넘치길 기도한다. 감사의 내용들이 퍼내고 퍼내도 가득 차있기를 기도한다. 비어버린 그 자리에 불평과 불만이 채워질까 더더욱 두렵다. 그리하여 나는 그날 그날 부어주시는 “만나” 를 먹으며 감사를 고백하며 그렇게 간신히 하루살이를 한다. 

/과학과신학의대화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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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 하루살이의 흘러 넘치는 충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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