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말씀은 본격적으로 세례 요한의 설교로 시작한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설교하였다. 여기서 세례 요한의 설교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즉 1) 하나님의 진노, 2)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3) 회개의 촉구이다.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세례 요한의 설교는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고 시작하면서 메시아를 대망해 왔던 이스라엘의 자존심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설교를 듣는 청중인 무리는 분명히 비판의 대상이다. 더구나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누가복음 19:37)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능한 일”을 찬양하는 무리를 “제자의 온 무리”라고 언급한 것과도 아주 대조적이다.
왜 예수말씀에 등장하는 무리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는 구약적인 전통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이사야 2:11-22; 13:9; 아모스 5:18-20; 스바냐 1:14-15, 18; 2:2). 곧 여호와의 날 혹은 주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특히 하나님의 진노는 구약의 전통에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죄 값을 물으시는 헤렘법 곧 진멸법(신명기 7:2-6)과 맞닿아 있다. 아무도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진멸하시는 심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진노는 “멸하기로 작정하신 것”이기에 누구도 돌이킬 수 없다. 창세기 18장, 신명기 12장, 예레미야 51장을 읽어 보라.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진노란 말을 여러 번에 제시하면서(로마서 1:18; 2:5, 8; 3:5; 5:9) 이를 동성애와 연결 짓는다. 분명히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행위와는 반대되는 모습이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시고 구원하셔야 할 인간에게 진노를 내릴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류의 죄를 묵과하실 수 없으시다. 의인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따르지만,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뒤따르는 것이 불가피하다.
세례 요한의 설교는 “그리고 스스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고 계속된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들과 비교되고 하찮은 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것이라는 세례 요한의 설교는 유대인들에게 모욕감과 분노를 심어 주었지만, 갈릴리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무게를 실어주고 격려를 주는 말씀으로 간주되었다.
세례 요한의 설교는 하나님의 진노로 끝나지 않는다. 강력한 심판과 진노의 설교 후에 회개의 설교가 이어진다. 죄는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것이라면, 회개는 잘못된 길에서 180도 돌이키는 행동이다.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진노만이 아니라, 회개의 설교를 한 것은 율법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은혜의 시대가 동터 온 것을 알리는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죄인이다(고린도후서 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