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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10.2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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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기천교수.jpg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놀라운 치유 기적을 마무리하신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기시어, 따라왔던 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복음서를 보면, 대개 예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이나 말씀, 혹은 교훈을 보고서 제자들이나 무리들이 놀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오늘의 예수말씀에서는 뜻밖에도 예상을 뒤엎고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신다. 참으로 신기한 모습이다. 예수께서 그 백부장의 믿음을 예상하지 못하셔서일까?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이방인인 백부장이 위세를 부릴만한데도 아주 겸손하게 직접 자신 앞에 와서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말하는 이야기의 시작 단계부터 놀라워하셨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무조건 순종적인 발언도 놀라웠을 뿐만 아니라, 단 한 말씀이라도 주시면 하인의 병이 고침 받을 것이라는 그야말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예수의 능력을 고대하는 일련의 모습 전체가 경이로운 것이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히브리서 11장 1절) 바로 백부장이 예수께 보인 믿음이 이런 것이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문자 그대로 인식하고 모든 것을 맡기고 처분대로 따르는 것이 믿음이다. 흔히 성경무오설을 주장하지만, 이는 다분히 교조적이다. 심지어 횃불신학교는 신임교수 응모를 하면서 성경무오설에 관한 서약을 받게 하였다는 후문이 들린다. 그러나 성경무오설은 요리문답 제1조처럼 우리의 삶과 행위를 정확무오하게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모든 것에 순종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바로 백부장은 이런 믿음을 예수께 보인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 믿음을 놀라워하시며 칭찬하신다. 더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에서는 내가 이런 믿음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이것은 이방인 선교의 결과로서 Q 공동체가 이방인을 자신들의 공동체 안으로 적극적으로 영접해 들였다는 차원에서 이해하기보다는, 유대인에게 경종을 울리고 그들에게 각성을 촉구하고자 하는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유대 율법에 대한 보수적인 태도에 입각하여 아직 제자들에게는 유대인 선교를 치중하게 하시지만,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함으로써 유대인들의 불신을 경고하고 그들을 시기 나게 하여 믿음을 일깨우려는 종말론적 의도를 통해 이방인에게까지 선교를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직 제자들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가지 못하고 전적으로 유대인 선교만을 간신히 감당하는 상황일지라도, 이미 예수의 소문은 날개를 달고 이방인의 지역에까지 퍼져나갔다. 그래서 스불론과 납달리 그리고 데가볼리(헬라어 데카 폴리스는 10개의 도시라는 뜻이다)의 이방인 지역에까지 복음이 퍼져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백부장이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 앞에 나온 것이다. 유대인은 특수주의에 입각하여 원의 중심에 자신들만 놓고서, 원 밖의 이방인들을 개와 돼지처럼 부정하게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을 보이게 될 때, 예수께서는 유대인에게 자존심이 상할 정도의 심한 발언을 동원하여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백부장의 하인을 고친 이야기를 학자들이 복원하면서 “그리고 <…>”라고 미완성으로 남겨놓고 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도전을 우리에게 준다. 우리는 유대인의 믿음인가 백부장의 믿음인가? 어떤 믿음을 예수 앞에 보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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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신학동향 - 성서신학] 예수말씀 연구(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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