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물은 소리 내지 않는다. 시냇물은 졸졸 소리 내며 흐른다. 소리 내는 시냇물은 힘이 없다. 낙엽이나 종이배를 띄울 뿐이다. 반면 깊은 강물은 큰 배를 띄운다. 소리 없는 강물이 더 깊고 힘이 있기 때문이다. 꽃은 말이 없다. 향기로 말할 뿐이다. 나비나 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흔들리는 몸짓으로 유혹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비와 벌은 찾아온다. 향기 때문이다. 사람도 향기가 있다. 인품이다. 인품은 나무와 닮았다. 소나무 같은 사람이 있다. 한글학자 최현배선생의 호는 외솔이다. 소나무같이 변함없이 한글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사람들은 선생을 존경한다. 향나무 같은 사람도 있다. 자기를 찍는 도끼에 향을 묻힌다. 죽어 향기를 남긴다. 그래서 힘 있는 자를 부끄럽게 만든다. 매화 같은 사람도 있다. 매화는 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오늘날 돈 때문에 정신도 팔고 양심과 믿음도 파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매화 같은 사람은 돈에 흔들리지 않는다. 정신을 곧게 하고 믿음을 지킨다. 사람들은 비웃고 어리석은 인생이라고 조롱하지만 후세 사람들은 인정한다. 유한양행 창업자 고 유일한 회장이나 고 장기려 박사 같은 분이다.
믿음은 삶이다. 신실한 믿음은 ‘나는 믿음이 있노라’ 말하지 않는다. 떠드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진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삶으로 보여줄 뿐이다. 여리고성을 도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라. 엿새 동안 말없이 하루 한 번 돌았다, 성 위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지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돌았다.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을 돌았다. 말 없는 순종이다. 순종한 후 외치니 성이 무너졌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믿음은 말이 없지만 세상의 그 어떤 소리보다 하나님 앞에 크게 들린다. 하나님은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믿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기 때문이다. 그때 인생의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길이 열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요란한 말들이 아니라 소리 없는 믿음이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벨의 믿음은 말이 없다. 제사가 열납되었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가인은 말이 많다. 소리가 크다. 하나님께 대들기 까지 한다. 결국 동생을 죽이고 만다. 오늘날 믿음으로 예배드리는 아벨이 있고 형식적으로 예배하는 가인이 있다. 교회 밖에선 현대 아벨은 믿음으로 살며 말없이 이웃을 섬긴다. 소금과 빛이된다. 현대 가인은 “나는 교회 장로다, 권사다. 목사다” 자랑한다. 자기를 알아달라는 것이다. 종교 스펙이다. 사람들은 알아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스펙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시기 때문이다.
믿음은 소리 없는 외침이다. 그 외침이 큰 울림을 준다. 국민일보에 나온 간증이다. 어떤 목사님 부부가 있었다. 사모가 40세에 임신을 했는데 진단결과 태아가 다운증후군인 것을 알았다. 충격을 받았다. 둘째 아이도 뇌병변 1급 장애였기 때문이다. 의사는 낙태를 권유했다. 목사님 부부는 갈등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그 아이는 지금 초등학생이 되었고 지능지수는 4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목사님의 믿음은 큰 외침이 되었다. 당시 낙태 수술을 진행하던 산부인과 의사가 큰 도전을 받고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벨은 죽었지만 그의 믿음은 살아서 지금도 외치고 있다. 하나님은 아벨을 믿음의 명예전당에 기록하셨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가정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소리 없는 외침이 되길 원한다. /장유소망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