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지극히 높은 산에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게 한 후, 자신에게 절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마귀의 이 시험은 출발부터 잘못됐다. 마귀는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는데, 천하만국이 마치 자기 것이나 되는 것처럼 말했다. 이게 마귀의 특징 중 하나이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이라 한다. 하나님 신앙의 출발점은 바로 이것이다.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주인임을 선언하고 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마귀가 주인인 줄 잘못 알고 마귀 앞에 무릎을 꿇는다. 여기서 우상숭배가 시작된다. 어떤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왕은 정말 훌륭하다. 그는 비록 여호와의 성전을 짓지 못하여 섭섭했지만, 아들 솔로몬이 지을 수 있도록 은금보화와 건축자재를 준비하고 하나님께 모든 주권이 있다고 고백한다. 많이 아는 사람이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는 것, 아주 강한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 대단히 많이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빈털터리임을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본문에는 프로스퀴네오 즉 경배하다란 단어가 2번 등장한다. 이 단어는 마귀에게 경배하는 경우에 한 번, 하나님께 경배하는 경우에 한 번 사용된다. 결국 마귀를 경배할지 하나님을 경배할지 인간은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마귀 경배와 하나님 경배는 방향과 구조, 내용이 전혀 다르다. 마귀는 영광만 보게 한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보게 하고 재물을 보게하며 권력과 지식의 영광을 누리도록 종용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광만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눈은 영광의 뒤편 어두운 그늘에 앉은 자들을 보신다. 웃는 이들 뒤에서 우는 사람들, 이긴 자들 뒤에서 슬퍼하는 패배자들의 눈물을 보신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발로만 보신 게 아니라 압제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모세를 통해 해방시키셨다. 하나님의 눈은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이웃을 침략한 일제를 보신 게 아니라 그 아래 신음하는 우리 민족을 보시고 광복을 주셨다.
예수님 또한 영광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을 보셨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면 영광을 함께 누릴 것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면 어떤 고통이 따르는지 사실대로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 고난이 있다면 왜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인가. 그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일’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마귀는 언제나 ‘만일’이라는 조건부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만일’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비록’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을 경배할 때 ‘만일’이라는 조건을 버려야 한다. 마귀를 경배하는 사람들은 만일 복을 주면 섬기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더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루마니아 공산 독재체제 아래 투옥되어 고난당했던 리차드 범브란트목사는 만일의 기도가 아닌 비록의 기도를 드렸다. 언제까지라도 이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인으로 살다 천국의 예배자가 되길 희망한다.
/영락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