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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연구원서 허정윤박사 발표

“신민회 분열이 현재 남북분단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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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9.25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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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활동 한계에 국외망명 결정하며 독립전쟁론 채택

“신민회 ‘자유문명국’에 기독교적 가치와 이상이 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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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연구원(원장=박종현박사)은 연구원 창립 22주년을 맞아 지난 6일 한국기독교사학회와 함께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권 평박사의 사회로 시작한 이날 발표회에서는 허정윤박사(케리그마신학연구소·사진)가 「신민회의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일고」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신민회는 1907년 안창호의 주도로 결성된 비밀조직으로 신민회의 창립목적은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성립케 함’이었다. 이에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는 국내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국외망명을 결정하면서 ‘독립전쟁론’을 최고의 전략으로 채택했다. 망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신민회의 존재를 알게 된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의 간부들을 대량 검거했다. 이에 대해 허박사는 “그 이후에 신민회 발기인들에게 닥친 일제의 탄압과 망명지에서의 현실 속에서 ‘독립전쟁론’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 되었다”며, “그 결과는 신민회의 분열로 나타나면서 이후 항일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에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4번의 분열을 주목했다. 

 

첫째 단계의 분열은 1차 망명자 그룹의 청도회의에서 일어났다. 허박사는 “여기서 안창호의 점진파와 유동열의 급진파가 대립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급진파의 안이 채택되었으나, 현실적인 제약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둘째 단계의 분열은 이동영이 가족을 국내로 돌려보내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을 때 일어났다. 허박사는 “그곳에서 이동영은 이상설과 합류하여 대종교인으로 개종하고 말았다”며, 종교적 분열을 시사했다.   

 

셋째 단계 분열의 주인공은 이동휘였다. 허박사는 “이동휘가 하바로브스크 군옥에서 남모르게 그를 구해준 하바로브스크시 볼셰비키당위원장 김알렉산드라의 후원으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당위원장이 되었다”며, “이를 계기로 그는 신민회와 기독교를 완전히 버리고 볼셰비키즘으로 기울었다”고 설명했다. 


넷째 분열은 양기탁에게서 촉발됐다. 허박사는 “양기탁은 통천교를 창시하고, 선언서에서 이는 ‘기독교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며, “종교는 ‘자국을 숭배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언급했다.

 

허박사는 “3.1운동 이후 설립된 상해임시정부에 신민회 발기인들을 포함한 망명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며, “이때에도 신민회의 급진파와 점진파의 독립운동 방법론이 임시정부를 분열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름 붙여진 것이 ‘좌우대립’이라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또 “좌우대립 문제는 상해임시정부 시절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타났다”며, “그것이 임시정부의 정치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고, 그 존재와 권위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주된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일제의 패망 후 승전국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한반도에는 분열된 2개의 국가가 성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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