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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8.1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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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교회학교 일선에서 땀흘려 수고하시는 지도자들이 가끔 푸념섞인 말들을 이구동성으로 쏟아놓는다.

“왜 우리나라의 교회학교는 교사들의 열정이 점점 식어져갑니까”
“왜 우리나라의 교회학교는 점점 쇄락하고 있는가?”
“왜 우리나라의 교회교육이 더욱 암울해져 가는가?

이러한 생각을 가진 지도자들을 향해 조용히 말해 주고 싶다.

“당신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다음세대들을 향한 교회교육이 시행착오를 덜 하도록 어떤길잡이 노릇을 해 주었고, 올바르게 가르쳐 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얼마만큼 통감하였는가?”

우리는 그 옛날, 예수님께서 아무런 교육장비도 없이 산이나 빈들, 바닷가를 “교실”로 삼고 공중의 새와 길가의 풀 한 포기를 ‘교재’로 삼아 수많은 제자들에게 열정어린 훈육을 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 스승이시다. 기독교교육이 추구할 가치는 대 스승이 되시는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디딤돌로 삼아 착실하게 그 가치들을 구현해 나아가는 일이다. 예수님은 공생애동안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사 많은 무리들에게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병든자들을 치유하시면서 땀을 흘리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에 온갖 열정을 쏟아내셨다.(마태복음 9:35) 여기에서 예수님의 참된 지도자상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교육의 쇄락현상을 단지 어떤 환경적 요인 탓으로만 돌리려는 나약한 지도자들을 발견하게 되고, 대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사역의 현장에서 눈물어린 땀을 쏟아내어야 참된 복음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고 있다.

세상의 학문과 교회교육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그 전달방법도 다르다. 이를테면, 어느 중학교 수학담당 교사가 지난 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 취중상태로 욕지거리를 하며 부부싸움으로 하고 이튿날 아직도 취기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출근을 하고 지난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학생들에게 전과 다름없이 수학공식을 잘 풀어주었다고 했을 때, 만약 그 수학교사가 중학교 교단이 아닌 교회 교육의 현장이었다면 과연 하나님은 어떻게 평가하실까?

기독교 지도자는 달라야 한다. 차원이 다르다. 교회 교육을 맡은 지도자가, 그의 삶은 엉터리면서 교회에 와서는 공과학습시간에 어려운 성경이야기를 마치 먹기 쉽지 않은 약을 캡슐로 포장하듯이 재밌게 들려주었을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엔 “외식하는 무리”라고, 언짢아(?)하셨을 것이다. 경건하지 못한 자와 외식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지 않으신다. 아무리 빼어난 재능을 겸비한 자라도 그의 외침은 공중에 떠있는 풍선처럼 공허한 외침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나오기까지 많은 고통의 나날을 넘기면서 변화시키려는 “날갯짓”을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통의 십자가를 지셨고 끝내 인류의 구원역사를 이루셨다. 가을에 곡식단을 수확하기 위해, 과연 농부의 “고통의 날갯짓”이 없이 가능한 일일까? 더군다나 마귀의 손아귀에 매어있는 저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특별히 세움을 받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고통의 날갯짓”을 귀찮아하고 마다한다면 10년, 50년, 100년의 세월이 흘러간들 회복하기 어려운 고난의 행진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오늘의 교회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들은 통감하고 또 통감하여야 할 것이다. 
/(사)나눔플러스 이사장·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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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날갯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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