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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총, ‘알렉산더 피터스 심포지움’

한글성경 번역, 한글대중화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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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8.2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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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면 확대.jpg▲ 한교총은 최초의 구약성경 한글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목사를 기리기 위해 심포지움을 진행했다.
 
“한글 구약성경 최초 번역자에 관해 아는 이들 많지 않다”
한글 성경번역이 한글발전과 초기 한국교회 성장에 기여

6피터스 추가.jpg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이승희·박종철·김성복목사)은 지난달 22일 새문안교회(담임=이상학목사)에서 「기억해야 할 구약성경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사진)」란 주제로 심포지움을 열고, 박준서목사(연세대 명예교수)가 「구약성경 최초의 한국어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목사」란 주제로, 주강식목사(증산로교회)가 「한글 성경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끼친 영향」이란 주제로 발표했다.


최초의 한국어 구약성경 번역자
연세대학교 구약학 명예교수 박준서목사는 「구약성경 최초의 한국어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목사」란 제목의 논문을 통해 신약성서 최초 한글번역자 존 로스목사는 경기도 용인에 ‘로스 기념관’ 건립을 통해 기념되고 있는데 반해 구약성경 최초의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목사에 관해서는 그가 최초의 구약성경 번역자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조차 많지 않다고 지적한다.

1871년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피터스목사는 1898년 시편의 일부를 최초 한글 번역한 〈시편촬요〉를 출간하고, 동시에 그가 작사한 17편의 찬송가를 담은 찬송가집 〈찬셩시〉도 함께 출판했다. 이후 피터스목사는 미국으로 돌아가 맥코믹 신학교 졸업 후 목사안수를 받고, 1904년 다시 한국에 돌아온 뒤 성경번역위원회의 위원으로 구약성경 번역작업에 동참했다. 그리고 피터스목사와 성경번역위원회는 1911년 최초로 구약 전체를 한글로 번역하는 성과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한글 구약성경 출간 후 성경의 개정·개역작업은 지지부진했다. 그럼에도 1926년 피터스목사가 ‘평생위원’으로 성경 개정사업에 다시 참여하자 성경 개정사업은 눈에 띄게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 피터스목사는 1931년부터 개역작업을 주도적으로 진행했고, 마침내 1938년 우리가 친숙히 알고 있는 〈개역구약성경〉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박목사는 “피터스목사가 1898년 역사상 최초로 구약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사역을 시작한 이래 40년이 지나 1938년에 〈개역구역성경〉을 완결시킴으로 구약성경의 한글번역 성업을 마무리 지었다”고 총평했다.

한편 피터스목사는 1941년 70세가 된 해 은퇴하여 미국 로스앤젤레스 근교 패서디나 시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58년에 향년 8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유감스럽게도 피터스목사가 미국에서 말년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박목사의 노력으로 피터스의 묘소가 패서디나에서 멀지 않은 마운틴뷰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만을 우리는 알고 있을 뿐이다. 


한글성경이 한글발전에 끼친 영향
증산로교회 주강식목사는 「한글성경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끼친 영향」이란 논문을 통해 한글성경이 한국 근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교회와 사회 전반에 뚜렷이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러한 현상에 대해 박성신은 〈근대한국과 기독교〉란 저서를 통해 “기독교의 한글성경과 한국 근·현대사와의 만남과 물림, 그리고 엇물림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 근·현대사의 총체적인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한국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것은 국민계몽이었고, 그 중심에 문자를 읽고 쓰는 능력의 향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글은 세종 28년인 1446년 반포된 직후 활발히 이용되어 오다가 이후 지배계층의 사대주의에 의해 그 사용이 전무하던 실정이었다. 하지만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국·한문 혼용 문서들이 등장하고, 순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의 출간과 더불어 한글사용도 조금씩 늘어났다. 하지만 주목사에 의하면 한글사용이 비약적으로 확장된 계기는 존 로스목사의 신약성경 번역에 있었다.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소속 선교사였던 존 로스목사는 1882년 심양(봉천) 문광서원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누가복음·사도행전 합본을 각각 3,000부씩 발행했고, 신약 전체를 번역한 〈예수셩교젼셔〉를 5,000부를 발행했다. 이후 이수정은 1882년부터 1886년까지 일본에 머물면서 〈현토한한신약성서〉와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발간했다. 이수정의 번역본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한국에 들어올 때 가지고 들어오기도 했다.

주목사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을 통해 한글 자체에 대한 연구과정도 뒤따르게 되어 한글의 문법화와 국문학의 발전을 이끌어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일례로 윤치오와 이능화, 주시경, 지석영 등이 1907년 설립한 ‘국문연구소’는 선교사들이 성경을 번역하면서 함께 발간한 한글문법책 등에 자극을 받은 결과이다. 또한 1895년 순 한글로 발간된 〈구셰교문답〉에서 최초로 한글 띄어쓰기가 사용되었고, 그것은 이후 띄어쓰기 정착에 초석을 다졌다.


한글성경과 초기 한국교회의 성장
주목사는 동 논문을 통해 한글성경의 번역이 초기 한국교회의 성장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목사는 가톨릭이 예전중심이었다면 개신교는 성경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했음을 지적하고, 성경의 번역과 더불어 초기 기독교교인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음을 보이며 “성경을 일찍이 우리말로 번역함으로 인해 한국인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파악하고 주체적으로 복음을 수용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초기 한국교회의 성장과 한글성경의 상관관계는 초기 선교사들의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 선교정책 5절은 “사람의 힘이 다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회개시키니 모든 힘을 다해 조속한 시일 내에 정확한 말로 성경을 번역하여 세상에 내어 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고, 이어 6절은 “모든 문서사업에는 한자의 구속을 벗어나서 순 한글을 사용함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평양신학교의 실천신학 교수였던 C. A. 클라크목사는 네비우스 정책을 요약·소개하며 “선교사 개개인은 광범위한 순회전도를 통해 개인전도를 실시한다. 또한 선교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주목사는 초기 선교사들이 성경번역 작업에 주력한 이유를 성경이 번역되기 전에는 교회성장이 미미했지만 신약성경이 번역된 1882년과 1895년 이후로 급속하게 교회가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김진환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사〉란 저서를 통해 1900년 이전의 한국교회의 성장요인을 한글성경의 보급이라 주장했고, 로이 E. 쉬어러도 이와 같은 주장을 자신의 저서 〈한국교회 성장사〉를 통해 밝히고 있다. 쉬어러의 저서에 따르면 1895년까지는 교인수 증가가 미미하다가 1895년부터 1914년까지 폭발적인 성장을 보였다. 특히 1900년에는 그 해에만 세례교인수가 30% 증가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주목사는 한글성경의 보급은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한국의 인재양성과 학교의 설립, 문맹퇴치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한글성경의 번역과 동시에 포교를 위해서 문맹의 문제를 극복할 이유가 생겼고, 그러한 동기로 인해 선교사들은 각종 교육기관의 설립에 주력하게 된다. 또한 교육활동을 통해 한국인 지도자를 양성함으로써 선교활동과 교육활동의 폭을 넓히는 선순환의 결과가 이어지게 됐다.

마지막으로 주목사는 “한글의 위대성을 알아 준 자들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서양 선교사들이었다. 우리는 이를 반성하여 오늘날 한글과 한글성경의 소중함을 알고 더욱 더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다”고 총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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