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12-12(목)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한국교회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④

댓글 0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밴드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기사입력 : 2019.02.24 10:32
  • 프린터
  • 이메일
  • 스크랩
  • 글자크게
  • 글자작게
8특집.jpg▲ 3·1운동은 계획부터 거사준비, 만세운동 진행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중심이 되어 진행됐다(사진은 승동교회(좌), 정동제일교회(가운데), 병천교회(우)의 현재 모습).
 
만세운동 위해 적극 협력한 한국교회 모습 기억해야
민족교회 정체성 회복위한 교회연합의 중요성 대두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외친 선조들의 마음을 품에 안은 채 교계가 준비하는 각종 3·1운동 100주년 행사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 세계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아갔던 믿음의 선조들을 계승하고자 연합단체들과 주요 교단에서 여러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이홍정목사)와 한국교회총연합(공동회장=이승희목사, 김성복목사, 박종철목사)은 오는 3월 1일 정동제일교회(담임=송기성목사)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연합예배를 준비하는가 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총회장=림형석목사)과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총회장=김성복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감독회장=전명구목사) 등 교단들도 각각 기념행사를 다채롭게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다. YMCA 또한 3월 1일 광화문광장에서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를 통해 1919년 울려 퍼졌던 외침을 다시 한번 부르며 한민족의 희망찬 새로운 100년을 희망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한편으로는 한국교회 교인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3·1운동과 관련된 교회 유적지를 찾아가 둘러보면서 민족애를 품에 안고 일제에 저항했던 3·1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이에 연합단체들과 교계에서 준비 중인 3·1운동과 연관 있는 교계 유적지와 장소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학생운동의 중심지, 승동교회
오화영목사와 이필주목사, 양전백목사, 이승훈장로 등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 낭독 후 조선총독부에 연락해 자진하여 경찰에게 연행됐다. 이들의 구속으로 인해 3·1운동을 이끌 지도자가 사라진 상황에 빠졌지만,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이 전개된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학생들이 민족대표 33인과는 별개로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과 이들이 승동교회에 모여 독립운동을 준비했었다는 점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승동교회 청년면려회장을 맡고 있던 김원벽을 비롯한 학생대표들은 1919년 2월 20일 승동교회 기도실에서 학생지도자대회를 열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당시 학생대표들은 학생들이 모두 모여 앞으로 진행할 독립운동을 앞장서자며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2월 23일 승동교회에 다시 모인 학생대표들은 그간 작성하고 있던 독립선언문을 소각하여 없앤 뒤 민족대표들이 준비하던 독립운동에 함께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학생대표들은 독립운동을 이끌 학생조직을 구성했고 2월 28일 승동교회로 독립선언문 1,500장이 도착하자 김원벽과 학생대표들은 밤새 서울 곳곳에 이를 나누어 전달하며 3·1운동을 준비했다.

거사 당일 민족대표들이 탑골공원으로 오지 않자 학생대표들은 자체적으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3·1운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김원벽과 여러 승동교회 교인들이 감옥에 갇히고 당시 승동교회 당회장이었던 차상진목사 또한 ‘십이인등의 장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한 일로 투옥됐다.

서울에서 활동한 학생대표들이 승동교회에 주로 모인 점은 김원벽 등이 교회 교인인 사실 외에도 탑골공원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일제의 감시가 교회까지 잘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학생대표들이 교회로 발걸음을 쉽게 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꼽을 수 있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승동교회에는 ‘3·1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학생대표들이 모의하였던 곳’이라고 적힌 3·1독립운동 기념터 비석이 세워져 당시 학생대표들의 헌신을 기리고 있다.

3·1운동의 본산, 정동제일교회
이필주목사와 박동완전도사 등 민족대표 33인 중 2명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정동제일교회는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3·1운동 역사 전체를 들춰보아도 이례가 없는 곳이다. 정동제일교회는 인근에 있는 이필주목사 사택터와 함께 3·1운동의 본산이라 불리며 독립운동 사적지로서 3·1운동의 본산이라 불리고 있다.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하기 전인 2월 25일과 26일 당시 정동제일교회를 시무하고 있던 이필주목사는 자신의 사택으로 학생단 간부들을 모아 두 차례 회의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26일 기독교계 인사들을 교회 사무실로 불러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에 동의하도록 하고 기독교계 민족대표를 선정하도록 했으며 이튿날인 27일 기독교계 대표자회의를 진행해 박동완전도사가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리도록 도왔다.

유관순열사를 비롯해 3·1운동의 핵심 참가자들이었던 이화학당과 배화학당 학생들 대다수가 정동교회 교인이었던 점은 3·1운동이 더욱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활동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되었다. 배재학당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김진호전도사와 이화학당 하란사교수 모두 3·1운동 당시 정동제일교회를 다니고 있었으며 이들은 학생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도록 조직화 작업을 했다.

이윽고 3·1운동이 시작되자 이필주목사와 정득성장로, 박동완전도사 등 교회 지도자는 물론 정동제일교회 교인들 전원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거리에 나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조선총독부는 경찰을 동원해 이들을 체포했으며 많은 이들이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정동제일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해 3월부터 8월까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파이프오르간 송풍실에 등사기를 설치해 〈독립신문〉을 배포했다.

민족독립을 위해 전 교인이 하나 되어 싸운 정동제일교회의 모습에 대해 임용택목사(안양교회)는 기독교사상 제487호에 게재한 「정동제일교회와 애국독립운동」이란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19년까지만 해도 정동교회 교인들 사이에는 시대의 사명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사명을 앞장서서 완수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개인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쓸뿐 아니라 사회와 민족이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한국 민족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아우내운동의 숨은 주역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진행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진행된 독립만세운동을 보고 온 유관순열사를 중심으로 천안 병천시장에 있던 군중 약 3,000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민족독립과 식민지배 반대를 외쳤던 사건으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교육사업을 통해 병천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성공회 소속 병천교회와 진명학교가 큰 역할을 맡았던 사실은 조명이 되지 않고 있다.

전해주신부(성공회)는 「성공회 병천교회의 3·1 아우내 만세운동에 대한 기여」이란 주제로 낸 논문을 통해 진명학교 교사였던 김구응의사의 지도로 지역유지들과 교인 학생들이 아우내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했음을 밝혔다. 해당 논문에 따르면 대도시에 집중되었던 신학문 교육기관이 마을에 있었을 정도로 지역민들의 교육열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통해 진명학교는 지역 유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병천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망의 중심이 되었다.

3·1운동에 직접 참가하고 고향으로 온 유관순열사의 존재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짧은 기간 안에 조직을 새로 꾸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에 대해 전해주신부는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했던 때도 아니고 기껏해야 사람의 입과 발에 의존하던 시절에 조직적인 거사 준비르ㄹ했다는 것은 이를 총괄하고 조정하던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며, “만세운동을 위한 공동체가 조직되었을리는 없을 것이며 기존에 있던 것을 이용했으리라는 것이다. 당시 병천에 그만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공동체는 성공회와 진명학교뿐이었다”고 밝혔다.

김구응의사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은 1920년 김병조선생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사략〉에서도 알 수 있다. 김병조선생은 “천안군 병천시장에서 김구응선생이 남녀 6,400명을 소집해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헌병이 조선인의 기수를 해치고자 했다”며, “일본헌병이 이들의 복부를 칼로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라 김구응이 일본헌병의 잔인함을 꾸짖자 돌연 총구를 김구응에게 돌려 그 자리에서 즉사케 했다”고 기록했다.

비록 만세운동 당일 죽음을 맞이했지만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한 마음을 품고 총칼 앞에 섰던 김구응의사와 병천교회 교인들의 헌신을 유관순열사만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과거처럼 교회연합 이뤄야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일본과 연해주, 미국 등 해외로까지 번져 만세운동이 진행됐다. 임종국선생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60일간 만세운동이 총 1,214회 벌어졌으며, 신복룡교수는 3·1운동 당시 46만 3,000여 명이 참가했다고 밝혔다.

근촌 백관수선생을 비롯한 2·8독립운동의 주역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수감된 상태였기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건네준 자유와 민족독립의 의지를 고스란히 받은 3·1운동은 을사조약 이후 일제에 의해 억눌렸던 자유를 갈망하는 성토의 장이 되었다.

한국YMCA전국연맹과 함께 3·1운동 100년 범국민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이홍정총무(교회협)는 “3·1운동은 민족마다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이 권리임으로 이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이 주도한 민주주의 운동이다”며, “황권과 국권을 상실했지만 민권을 살아있다는 믿음으로 한민족은 세계 도처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했다”고 전했다. 또한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 땅의 아름다움이 발휘되어 많은 이들이 국권 재민의 권리를 지니고 앞으로 나아갔다”며, “100년 전 그날 종파와 계층, 지역을 초월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던 이때의 함성을 재현하자”고 밝혔다.

아우내장터와 제암리, 곽산 등 일제의 학살극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민족애로 뭉쳐 하나가 되었던 3·1운동 당시 모습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어떻게 해야 연합을 도모할 수 있는지 짚어준다. 100년의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 모이는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3·1운동을 기억하고 정신을 계승한다면 그때처럼 진정한 교회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함성이 전국에서 다시 울리길 희망한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한국교회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