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삶은 고난이 있어 값지다
시편 119편 65~72절
시냇물은 ‘졸졸졸’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시냇물이 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지를 아십니까? 그것은 물속에 돌멩이가 있기 때문이다. 서양 속담 중에도 ‘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라는 말이 있다. 시냇물 속에 들쑥날쑥한 돌멩이가 있기에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도 고난이라는 돌멩이가 있기에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곱고 성숙한 인격은 고난의 돌멩이와 함께해온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도 고난의 돌멩이가 있어서 저의 삶이 더 아름답고 성숙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삶은 고난이 있어서 값진 것이다. 시편 저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하며 고난당한 것인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곧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법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이 고백을 하기 전에 이런 고백을 한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저자는 자신이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말씀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이 없이 자기 멋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만일 이 시편 저자가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여전히 자기 멋대로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처음 고난을 당할 때는 시편 저자도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다. 고난 자체는 분명 힘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고난이 마음의 고난이든 몸의 고난이든 상황적인 고난이든 힘든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시편 저자는 그 고난 가운데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갔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고난이 유익임을 고백하고 있다. 고난을 통해 자신의 삶이 더 값지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소논문 〈질서〉에서 고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난이란 수를 놓은 천을 보는 것과 같다. 천의 뒷면을 보면 많은 색깔의 실이 무질서하게 얽혀 있기에 보기에 나쁘다. 고난을 다만 괴로움과 부조리로 보는 것은 뒷면만을 보기 때문이다. 천의 앞면을 본다면 혼란하던 실들의 형태와 색채가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고난의 혼란과 혼잡을 뚫고 아름다운 미래를 본다” 참 멋있는 비유이다. 수를 놓은 것은 정말 아름답다. 하지만 그 수놓은 뒷면을 보면 너무 지저분하고 보기가 싫다.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수놓은 뒷면처럼 고난과 고통으로 뒤죽박죽 뒤섞여 있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가장 아름다운 미래를 만드신다.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수를 놓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고난 너머에 있는 아름다운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보다 더 값진 삶을 살게 될 모습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고난도 우리의 믿음을 이길 수는 없다. 믿음으로 그 고난을 이겨낼 때 우리의 삶은 다이아몬드처럼 값진 삶이 된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셨다. 하나님은 그런 주님을 높여 주셨다.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고난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값지게 됨을 알고 고난의 아름다운 수를 놓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