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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3.17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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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34e365c395aed6eba502ef1e2983f0_gGuQdHzIibc8.jpg▲ 김도인목사
 
문재인 정권의 경제 정책은 ‘소득주도성장’이다. 이 정책은 저소득계층이 더 많은 소득이 돌아가도록 하는 의도에서 추진되었다. 2년이 지난 뒤 ‘소득주도성장’의 결과는 거꾸로 최하위 20%의 사람들의 소득이 6년 전으로 후퇴했다. 지난 1년간 소득이 월평균 30만 원 감소했다. 그런데도 정책입안자들은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겠다고 한다. 이는 자기 생각이 옳다는 고집 때문이다.

나 또한 고집이 세다. 나와 다른 견해에 일단은 내 생각이 옳다고 우겨본다. 특히, 아내와의 의견충돌에서는 일단 내 말이 정답이라고 고집을 피운다. 하나님도 고집을 피우신다. 인간들의 고집과 하나님의 고집에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인간은 악한 고집이라면 하나님은 선한 고집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고집’이라면, 인간은 ‘세속적인 고집’이다. 인간의 고집은 ‘도무지’ 답이 없는 고집이라면 하나님의 고집은 답이 있는 ‘도리어’의 고집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고집을 부리셔야 한다. 인간의 고집은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하나님의 고집은 인간을 살리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똥고집이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반전이 있는 거룩한 고집이기 때문이다.

오늘 베드로는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 ‘도무지’의 삶이 아니라 ‘도리어’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리어’의 의 축복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받는다. 하지만 그 고난은 하나님 안에서 ‘도리어’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성도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비는 자(9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9절)”

베드로는 성도는 ‘도리어’의 삶을 사는 자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남에게 받은 대로 행하지 말고 ‘도리어’로 행하라고 한다.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고 한다. 이는 성도는 ‘도무지’ 답이 없는 삶이 아니라 ‘도리어’ 답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고난 가운데서도 ‘도리어’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기 때문이다(12절)” 그리고 “하나님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기 때문이다(12절)” 성도는 ‘도무지’의 상황을 신앙으로 ‘도리어’로 바꾸며 살아아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도무지’의 신앙을 ‘도리어’의 신앙으로 바꿀 수 있는가? ‘딜레마’ 신앙을 ‘디딤돌’ 신앙으로 바꾸면 된다.

소득주도성장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면 딜레마에 빠진다. 피운 고집이 잘못됨을 깨닫는 순간 딜레마에 빠진다. 신앙생활 하다가 고난을 받으면 신앙의 딜레마에 빠진다. 이럴 때 딜레마의 신앙이 반전을 이룰 수 있는 디딤돌이 필요하다. 디딤돌을 만들려면 반드시 ‘도리어’의 신앙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즉 반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성도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마음이란 죽을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신 마음이다. 사람마다 두 개의 보따리를 지고 산다. 바로 근심 보따리와 웃음보따리다. 근심 보따리로는 고난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 하지만 웃음보따리는 고난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웃음보따리는 고난을 축복으로 바꾼다. ‘도무지’의 상황을 ‘도리어’의 상황으로 바꾼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성도는 ‘도무지’의 상황을 ‘도리어’의 상황으로 바꿀 수 있는 믿음이 있다. 

/아트설교연구원 원장, 주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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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도무지’에서 ‘도리어’로 바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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