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11-13(수)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③ - 세계 속에 우뚝 선 한국교회의 모습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범인류적 공동체실현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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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2.1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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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사진.jpg▲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5·4운동(좌)과 간디의 사티아그라하(우) 3·1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건네고자 했던 메시지는 비록 그들이 희망했던 방향으로 흐르지 못했지만, 전 세계 기독교인이 따르고자 했던 이상에 부합했다.
 

시대적 한계에 직면했던 이웃교회의 상황이해 필요

민족으로 시작한 한국교회, 세계와 보편애로 일치 추구


20세기 한민족 역사 가운데 3·1운동이 지닌 위치는 그 어떠한 사건보다 중요하다. 힘의 논리 앞에 민족과 개인의 자주성을 상실하고 식민지인으로서 온갖 굴욕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에게 자유와 독립은 그 어떠한 가치보다 숭고한 의미를 지녔다. 한국교회 또한 이와 마찬가지였다. 민족구원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헌신해 왔던 당시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일제의 무단점령과 폭압정치는 하나님의 역사와 절대적으로 일치하지 않은 길로 여겨졌다. 민족을 분열시키고 결사와 언론, 표현의 자유를 모두 억압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어를 국어로 교육하고 한국어는 일본어 화자와의 소통을 위한 통·번역 위주로 체계를 세워 가르쳤다.


프랑스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언어가 인간의 사유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우리는 국가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조국이다’ 3·1운동 이후 잠시 완화되지만, 일제는 한순간도 민족 정체성 제거를 위한 고삐를 풀지 않았다. 이에 한국교회는 바빌론 포로기 유대인들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영하면서 일제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2천 년을 넘어 하나님께서 한민족에게 전하시는 계시로 이해하였고, 유대인의 방식을 따라 일제에 항거했다.


결과적으로 3·1운동 당시 한국교회의 선택은 옳았다. 그들이 희망했던 만큼 일찍 성취하지 못했고 또 다른 강대국들의 대리전을 치르는 아픔을 겪었지만, 민족의 독립과 자유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질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3·1운동과 당시 한국교회의 모습을 본 이웃들의 시선은 어땠는가? 그들에게 3·1운동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일제와 충돌 인정한 선교사들

일제강점기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은 정치 문제에서는 어떠한 언급도 피한 채 조선총독부와 일제로부터 치외법권을 확보해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관점에서 3·1운동은 어떠한 전조도 느끼지 못했던 예측불발의 사건이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으로 재직했었던 고 송길섭박사는 기독교사상 제249호에 게재한 선교사들이 본 3·1운동을 통해 당시 선교사들이 3·1운동을 어떻게 느꼈는지 전했다. “일본이 3·1운동을 선교사와 관련시키려고 하나 우리가 아는 한에 있어서는 선교사들은 이 운동에 처음부터 관여한 바도 없고 또 자세히 아는 바도 없었다. 3·1운동이 터짐으로 일본제국만 놀란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도 깜짝 놀랐다. …… 어느 장로교 선교회의 보고서는 이 운동이 그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이 왔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불현듯 찾아온 3·1운동으로 인해 외국인 선교사들은 적잖은 당황을 표했다. 교회 담임목사들과 선교부 직원들이 대거 투옥되고 교인들이 뒤따라 가는 등 교회 운영에 차질이 생기자 선교사들은 큰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폭압정치를 오랫동안 지켜본 선교사들은 기독교와 일제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당시 한국감리교회 감독이었던 허버트 웰치목사는 분명히 일본관리사회는 기독교사업에 대하여 불안해하고 있다,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의 영도하에 있거나 최소한 외국인의 영향하에 있다는 것 또는 교인들은 일반대중보다는 더 각성하여 있다는 것 그리고 기독교의 이상은 필연적으로 군사정부에는 참으로 귀찮은 존재라는 사실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고 밝혔다.


일제 통치에 비판적인 시야를 품던 선교사들은 일본이 추구하는 가치가 기독교와 화합을 이룰 수 없음을 알았고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을 설득해달라는 조선총독부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를 통해 비록 자신들에게까지 비밀에 부치며 진행한 만세운동이었지만, 3·1운동에 대한 암묵적 지지를 통해 한국교회가 민족교회로서 자주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일왕 사이에 선 일본

한반도 현지에 머물면서 일제의 가혹한 처사를 몸소 겪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태도는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3·1운동에 많은 호감을 표했다. 하지만 일본교회의 태도는 이와 사뭇 대조적이었다. 도히 아키오교수(일본 도시샤대)3·1독립운동과 일본 기독교에 따르면 일본 기독교인들 중 상당수는 3·1운동을 조선총독부의 무단정치로 인해 생긴 폐해의 반발로 인식했다. 학교교육에서 일어나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나 무력에 의한 동화정책, 불평등한 토지정책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국가주의적 관점을 지닌 일본 기독교인의 경우 한국교회의 저변에 깔린 편협한 유대적 애국심으로 3·1운동이 촉발됐다고 풀어내기도 했다. 특이한 점으로는 군산교회의 스즈키 타카시목사의 3·1운동 인식이다. 스즈키목사의 관점에 대해 아키오교수는 일본인의 제국주의적 사고방식과 행동이 그러한 독립운동을 도출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스즈키목사는) 술회하고 있다고 밝혔다.


스즈키 타카시목사는 3·1운동에 대해 일부에서는 폭동적인 성격을 지녔던 지역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독립선언으로 보기에 합당하다, “그들을 폭도로 부른다거나 폭동이라고 말하는 일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까고 밝혔다. 이에 대해 아키오교수는 필히 그는 3·1운동이 시작되는 모양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는 3·1독립선언문을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을 면밀히 읽고 운동의 진행경과를 객관적으로 지켜봄으로 당연히 그런 표현이 가능했다고 짐작된다고 피력했다.


안타깝게도 스즈키목사의 바람과 달리 3·1운동에 대한 일본교회의 관점은 점차 부정적으로 변해갔다. 외국인 선교사들을 변호하던 이시자카 카메지목사는 이번의 운동은 종교상의 신앙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한국 민중의 입장에서 혹은 한국 민족의 입장에서부터 어떤 의식이 표출되어 나온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선교사들은 한국 독립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민족자결이라는 유행어에 미혹되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그들을 설득하여 복귀시켰다고 밝혔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아키오교수는 안타까움을 표하고 “(과거 일본교회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채 이 문제를 자각하지 못했다, “일본인 기독교인은 왜 천황제와 그 이데올로기 안에 사로잡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그 문제이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3·1독립운동에 있어서의 일본인 기독교인들의 대응의 문제성을 보다 깊이 살펴야 한다고 믿는다고 전했다.

 

톨스토이로 묶인 아시아

계획부터 시작, 발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가치가 3·1운동 전반에 깊숙이 들어가 비폭력·평화주의 운동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한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중국인들이 5·4운동을 전개한 일은 매우 유명한 일이다. 하지만 3·1운동 속에 깃든 기독교 정신이 5·4운동과 아시아 독립운동에 어떤 연관성을 지녔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와다 하루키교수(일본 도쿄대)아시아 해방사에 3·1독립운동이란 논문을 통해 3·1독립선언서가 지닌 특이한 점을 확인했다.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면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겠다는 윤리적 각성 촉구와 탄압을 각오하는 3·1독립선언서 속 비폭력혁명사상은 레프 톨스토이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하루키교수는 선언의 기초자인 최남선은 합병 직전에 잡지 소년을 경영했는데 잠시 정간처분을 받았다. …… 정간처분 해제 후 처음 호에 그는 장시 톨스토이 선생을 울림을 발표했다, “윤리적 소생의 호소, 비폭력혁명의 입장은 일본 측으로부터 가혹한 물리적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3·1운동의 그 거족적인 결집을 가능케 했던 것은 (톨스토이가 생전 주창했던) 높은 도덕성과 넓은 원칙성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흐름은 다른 나라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5·4운동을 이끌면서 3·1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베이징대 학생들은 성명을 통해 일본인의 윤리적 각성을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우리 중국 민족은 대일본 보이콧 운동 중에서 삼가 피눈물을 흘리며 일본 국민에게 충고하는 바이다. 눈을 떠라. 그리고 우리 나라 인민들과 손을 잡고 나아가 저 인도주의의 해충, 평화의 장해인 침략주의자들을 절멸시키고 평화와 행복의 동아 신천지를 건설하자이 당시 베이징대 학생들의 중심에는 천두슈를 비롯한 신문화운동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비폭력주의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과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왔음을 자주 밝혀왔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무저항 평화주의 운동 또한 같은 아시아 국가로서 3·1운동과 기독교가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간디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한국교회가 강조한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하루키교수에 따르면 간디는 사티아그라하로 명명한 이 운동에 대한 견해를 톨스토이로부터 직접 배웠다고 밝혔다.


아시아 사회가 받아들인 기독교는 한국교회가 강조했던 민족주의적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3·1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세계 곳곳에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한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민족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가 하나 되는 범인류적 공동체의 실현이라 정의할 수 있다.

 

서구사회의 냉대 속 희망

미국 현지에 3·1운동 전개상황과 일제가 자행한 학살 등 탄압을 알리기도 한 프랭크 스코필드박사의 헌신이 있었지만, 당대 서구사회에서 3·1운동이 큰 의미를 지니지는 못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9년 진행된 파리강화회담에서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미 국무부 또한 주일대사에게 미국 정부는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계획 수행에 일절 도움을 주지 않았으며 독립운동에 동조한다는 의심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과 유럽교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반도에 있던 선교사들은 3·1운동 이후로도 계속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지만 이에 응하는 어떠한 답변이나 조치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런 반응의 원인은 다음 2가지 사항으로 손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동아시아 끝자락에 있는 식민지 교회에서 일어난 일, 두 번째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서구 교회의 상황. 시대적 한계로 인해 서구교회가 한국교회에 시선을 두지 못했던 점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해외교회에 충분한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3·1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해외 교회에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고 여길 수는 없다. 당시에는 이루지 못했지만, 끝끝내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도 민족애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헌신 덕분이었다. 일본인 최초의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여자인 후세 다쓰지가 한국 독립이라는 시대의 부름에 응답한 이유도 그가 열렬히 사랑했던 기독교 정신에 바탕에 있었다. 송길섭박사는 말했다. “카이로회의에 한국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특별조항으로 한국의 일본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승인·결의한 것은 20여 년 전에 한국교회와 한민족의 독립의지의 결의를 전 세계에 과시했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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