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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8.12.04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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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황인찬.jpg▲ 황인찬목사
언제부턴가 한국의 기독신자로서 자부심을 잃었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볼 때 절망하는 순간들이 많다. 정통 교회와 이단을 일반 사회가 구분하지 못하므로 이단 사이비들의 준동과 비윤리와 반사회적인 작태가 오롯이 교회의 몫이 될 때 아픔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이단과 사이비들의 행태여서 우리도 일반 사람들과 같이, 아니 더 치를 떨며 비판하고, 암 덩어리 같이 나쁜 놈들이라고 거품을 물며 그들의 해악을 말하고, 우리 교회가 진정 그렇지 않음에 자위를 했다.

하지만 정통교회와 그 목사들의 일탈과 비윤리, 비도덕의 현장이 고발될 때면, 그것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듯 한, 때로는 자랑스러워하던 인사나 교회의 것이라면 그 부끄러움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지경이 된다.

너무나도 만연한 목사들의 잘못과 부정부패, 역사의식이 실종된 망언 등을 접할 때 한국교회에 정말 희망이 있는가를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처럼 심해에 좌초된 것 같은 한국교회에 과연 희망이 있는가?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여기의 성은 환란으로 멸망에 이른 오늘의 한국교회다. 열국의 부러움을 사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열방의 수치와 모욕거리가 되었다. 선지자는 ‘슬프다’는 말로 그의 심정을 토로한다. 위로 받고자 해도 위로 자가 사라져 위로 받을 수가 없다.

상황의 악화로 그 비참함이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형편이 되었다. 선지자는 고백한다.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소망이 끊어진 것을 절망이라고 한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절망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강제로 옷 벗김을 당한 사람처럼 참담한 모습으로 손가락질 받는 조소거리가 되었다. 하나님을 마땅히 의지하고 경외해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보다 맘몬을 믿고,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을 멀리한 결과로 이렇게 되었다. 지도자들의 안중에 하나님 없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 여전히 귀 기울이지 않는다.

선지자는 이 처절한 형편에서도 희망의 불꽃을 피운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절망에 찢긴 나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포기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시는 한 희망은 있다. 우리 교회가 오물을 뒤집어쓰고,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깨어지고, 망한 자처럼 되었어도, 심판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기에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희망이 있다. 주님의 위로가 있는 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무를 베어도 그루터기는 남겨두신다. 그 남겨진 그루터기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신다. 한국교회 심장의 박동을 멎게 하지 않으시고, 의의 사람 10사람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을 찾으시고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게 하신다. 시편의 기자는 말한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의 희망, 나의 소망은 주님께만 있다. 여호와를 신뢰하고 회개의 무릎으로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변질에서 여호와께로 돌아서 희망이 되자.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하지만 고난이 인생의 큰 유익이 된다.
/예장 개혁 증경총회장 의왕중앙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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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질에서 희망이신 여호와께로 돌아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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