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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8.06.1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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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83_20085_1715.jpg▲ 김헌곤목사
  이인재목사의 선친 순교자 이판일장로는 1930년에 문준경전도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판일은 복음을 받아드리고 곧 바로 담뱃대와 제사도구를 아궁이에 넣고 태워 버렸으며 전 식구들과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문준경전도사가 1932년 임자도에 교회를 세울 때 서양 귀신을 몰고 온 여자라고 조직적인 방해가 있었지만 이판일·이판성 형제가 든든한 디딤돌이 되어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다.

  일본제국주의 시절, 이판일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목포경찰서에 구속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싱글벙글 웃기까지 하였다. 경찰은 그가 미쳤다고 판단하고 석방하였다. 이판일은 “나같이 비천하고 못난 인간을 위해 주님께서 그 모진 핍박을 당하셨는데 내가 이렇게라도 주님 사랑을 만분지일이라도 갚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서 웃음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후 충직한 이판일은 이후 장로가 되었고 교회의 기둥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지역 좌경세력들은 이판일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동생 이판성 집사와 함께 목포 경찰서로 압송되었다가 국군이 들어옴으로 풀려나 임자도로 돌아온다. 이 장로는 “설사 내가 화를 당한다 할지라도 주를 위한 것이라면 뭘 주저하겠느냐?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순교를 각오했고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10월 4일 수요일 저녁, 이판일은 집에서 가족과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예배를 드렸다. 이런 전시상황 속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예배는 좌경세력에 발각되어 중단되었다. 그들은 죽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의 기회를 주었다. 바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살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이판일장로는 무릎을 꿇고 스데반집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장로는 “아버지여, 우리의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그리고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판일은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고 쓰러졌으며, 흥분한 좌경세력들은 죽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리며 채 죽지 않고 울부짖는 생명들까지 모래구덩이에 쓸어 넣듯 생매장을 했으니 그 시간은 자정이 지나 10월 5일 새벽 2시경이었다.

  이판일장로가 살해당한지 얼마 후 결혼하여 목포에 살던 큰 아들 이인재집사가 해군함정이 임자도에 상륙하던 날 동행하였다. 이인재는 군인들과 함께 지역 좌경세력들을 다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밤 그는 이봉성담임전도사와 교회의 싸늘한 마루에서 밤새도록 통곡하며 기도를 하였다. 새벽녘에 두 분의 음성이 들렸다. 문준경전도사님의 평소 설교 말씀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나님 기뻐하신다” 또 아버지의 음성이 있었다. “아들아, 나는 저들을 용서했단다. 그러니 너도 용서하여라” 다음날 가해자들이 모두 즉결 처형을 받게 되었다. 이때 군 지휘관은 이인재에게 총을 주어 복수할 기회를 주었다. 이때 이인재는 “지휘관님, 이 사람들은 마땅히 죽어야할 죄인이지만 이제부터 공산사상을 버리고 예수를 믿겠다고 하면 살려주시기 바랍니다”고 요청했다. 지휘관이 허락했다. 이때에 가해자들이 모두가 살아나게 되고 예수 믿게 되었다.

  이러한 이인재의 용서는 임자도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쳐, 수복 후 대한민국 곳곳에서 일어났던 보복이 임자도에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6.25동란 직전에 임자도의 인구가 1만3천 명이었는데 동란 중 21%인 2천7백여 명이 희생되었지만 임자도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이인재의 핵폭탄 같은 용서와 사랑의 영향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인재집사는 6.25직후 논을 팔아, 좌경세력과 가해자들이 가장 많았던 지역에 교회를 직접 건축하고 1954년에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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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용서한 이인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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