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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내 백성을 돌보라

디모데후서 1장 16절-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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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8.05.03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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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김철환목사.jpg▲ 김철환목사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오늘 본문 말씀에 이어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가 이어진다. “원하건대 주께서 그 [오네시보로]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이 축원은 16절에서도 언급이 된다. 사도바울은 오네시보로 집에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두번이나 거듭 강조하며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오네시보로는 주님의 긍휼을 가득 입어야 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사랑을 한껏 받고 있는 오네시보로는 누구인가?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위해서 한 것이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된다. 외로웠고 고독했다 죄수들이 갇힌 곳, 감옥의 면회는 즐겁지도 않은 일이며, 마음에 내키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네시보로는 부끄러워 않았다. 부지런히 찾아왔다. 그리고 만났다. 무엇을 한 것일까? 바로 돌봄을 한 것이다.

 교회 갱신, 또는 교회 개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한국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돌봄의 회복이다. 지금 우리 교회는 사랑이라는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행동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3대 사역 중에서 선포와 교제는 말로 가능하다. 
그러나 봉사 또는 섬김이라 일컫는 치유는 행동이 필요하다. 오네시보로 처럼 찾아가는 돌봄이 필요한 때이다. 감옥이라도 찾아가 사도 바울을 돌보는 오네시보로의 돌봄은 성경에 제시하는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21세기 교회들이 다시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은 초대 7집사의 역할이다. 사도는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고, 평신도인 7집사는 교회의 어려운 사람을 돌보라고 세운 돌봄 전문가이다. 순교자로 부른 것이 아니라, 히브리파, 헬라파 과부들을 돌보는 것이야 말로 맡은바 책무이다. 즉 교회의 어려운 사람을 돌보라는 사명으로 세움을 받은 것이다. 순교가 그 첫째 목적이 아니었다. 순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의 마지막 생의 영광이었다.

 우리는 사도행전 20장 35절 말씀 속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는 주님의 큰 말씀이 있다. 그래서 잊혀지는 말씀이 “내가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즉 사도 바울도 어려운 사람을 돌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쁘신 분이 시간을 쪼개어 어렵고 약한 사람을 돌보았다. 그러면서 너희들이 나를 본받는 자 되었으면 좋겠다(고전 11장 1) 한다. 경고도 잊지 않았다. 돌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이다.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딤전 5:8)이다.

 저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돌보시는 분이다. 그 돌봄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교회에게 명하고 계신다. 교회여 내 백성을 돌보라.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돌보는 것처럼, 돌보라고 명하신다, 제가 헌신하고 있는 스데반 돌봄 사역에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돌보면(care), 하나님께서 치유(cure)를 허락하신다.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어려운 우리 이웃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 요구 하도다. 먼저 믿는 사람들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겠네” 예수 사랑 가지고 돌보아야 한다.
건강한 교회는 예수님의 3대 사역에 충실해야 한다. 특별히 약한 자를 돌보는 일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루터회 직전 총회장, 작은예수들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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