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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5.03.25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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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홍렬.jpg

 

 사실상 무기없는 전쟁이다. 작금의 탄핵국면은 찬탄과 반탄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전개되는 양상은 속된 말로 모두 [죽기 아니면 살기]식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전부 아니면 전무,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만 하는 것일까? 역사이래로 수많은 그리고 다양한 전쟁과 갈등 투쟁과 대립의 역사가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고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전쟁, 현대에는 북한과 남한의 전쟁을 겪었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의 수많은 사화가 바로 그 죽기 살기 전쟁 혹은 정쟁의 산물이다. 근현대사는 어떤가? 해방후 찬탁과 반탁의 역사, 그리고 3명의 대통령이 직무정지 내지는 파면의 역사를 보자. 노사가 대립하면 쇠몽둥이와 최루탄이 등장하던 것이 바로 엊그제 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절대 승리만을 추구하는 갈등과 대립이 끝없이 되풀이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기는 것만이 최고의 목표요 절대목표라고 좌표를 설정하기 때문은 아닐까? 스포츠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물론 선수들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상대방을 모조리 재기불능 상태로 때려 눞혀야만 이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게임의 룰을 지켜 승부를 겨룬 다음 깨끗하게 그 결과에 승복하고 그라운드를 떠난다.

 

 나아가서 한 번의 승리에 도취되지도 않고 한번의 패배에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승패의 결론이 나지 않아 무승부로 끝난다고 해도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다. 스포츠 게임은 이기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기는 하지만 절대목표는 아니다. 스포츠 선수들이 그렇게 할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음번 게임이 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에 이겼어도 다음에는 질 수도 있으며 이번에는 졌어도 다음에는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은 한 번뿐이 아니라 계속되기 때문이다.

 

 논어에 중용지도라는 말이 있다. 이도 저도 아닌 타협주의라는 비판도 받지만 다시 새겨볼 만한 말이다. 앤서니 기든스의 [3의 길] 이라는 저서가 있다고 한다. 좌우의 이념적 갈등을 넘어서는 새로운 실용주의적 이념의 모델로 제시된 이론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제는 바로 이런 중용, 3의 방법등을 생각해볼 만한 때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기는 것만이 절대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사회는 쇳소리와 쨍그랑거리는 소리만 들릴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에는 좌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운데도 있다. 이 세상에는 이기고 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기는 것도 있다. 예수께서 적대자들에게 잡힐 위기에 처하자 제자중의 한 사람이 적대세력인 대제사장 수하의 귀를 짤라 버린다. 지금 우리식으로 말하면 예수님 편에서 보면 참으로 잘한 일이고 속이 후련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말씀하신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니 칼을 집어 넣어라. 내가 이기려고 마음 먹으면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들도 동원할 수 있다고. 그리고는 십자가를 지신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과 방법이 있는데. 예수님은 이기고 지는 세속의 대립적 갈등구조를 쫓아가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총과 칼로 대립하는 절대 승리를 추구하는 극단의 갈등을 넘어 부활의 새벽이라는 또 하나의 길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 아닐까? 게임은 계속될 것이다. 꼭 이기고 지는 것만이 게임의 결과는 아니다. 비기는 방법도 있다. 끝장을 보겠다는 승부욕의 뒤에는 이겨도 져도 남는 것은 상처뿐일 것이다./기독교한국루터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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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승패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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