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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4.10.2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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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jpg

 

신약성경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화이다. 기록된 사실대로 나사로는 땅에 사는 동안 고난을 받은 자이다. 

 

 단순히 고난을 받은 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고난을 이긴자라고 할 수 있다. 이김은 우리의 환경적 문제를 해결할 때 쓰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의 이김은 환경이 변화되는 것보다 환경을 극복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면에서 나사로는 거지로 사는 삶이 바꿔진 것이 아니라 걸인의 삶을 원망없이 받아 들인 점이다.

 

 반면 부자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극히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 것처럼 보여진 사람이라는 데 있다. 여기서 믿는 우리들이 두려워해야할 것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인 아브라함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눅16:24)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데도 지옥에 갔다는 것이다.

 

 부자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면서도 지옥에 갔다. 지옥의 고통속에서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 “나를 긍휼히여기사”(눅16:24)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눅16:27)라고 구한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세상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전도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오직 혈육만이 전부인 사람이다.

 

 부자는 살아 생전에 호위호식하며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 그의 믿음은 이러한 축복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께 감사했다면 자기 집 문앞에서 먹을 것을 구걸하는 나사로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자는 나사로를 향한 동정심이나 긍휼이라는 주님의 인격이 없었다.

 

 부자는 분명 믿는 자였으나 지옥에 가게 된 이유를 또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믿으면서도 육의 눈만 있고 영의 눈이 없는 소경이었다. 

그는 믿는 자를 주님의 지체요, 믿음의 가족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죽은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안긴 것을 보고도 여전히 지옥에서 그를 하인 부리듯 명령하고 있다.(눅16:24.) 믿는 자들이 꼭 추구할 일은 무엇인가?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거룩한 교통이다. 믿음은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주님의 영을 받아 주님의 인격으로 변화된 새사람으로 지음받는 일이다. 이러한 회개는 나를 떠나 주님의 인격으로 충만해 지는 영성인 주의 은혜뿐이다./대전반석교회 목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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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생활 [46회] –그리스도인의 영성 회개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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