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도성, 큰 길로 달리며 신랑 되신 주님을 찾았으나 찾기는 커녕 봉변만 당한다. 어렵사리 다시 되찾은 그분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4절 하반절에서 그분을 놓지 아니하였다. 내 어머니의 집, 나를 잉태한 어머니의 방으로 그를 데려올 때까지 놓지 아니하였도다. ‘내 어머니의 집’은 어머니가 자녀를 잉태하고 낳은 곳을 의미한다. 아가서의 주인공인 신부 성도를 낳은 곳이다. 최초로 신부 되게 한 교회가 ‘어머니의 집’이다. 그러면 누가 신부 되게 낳았는가? 성령이시다. 성령이 신부 교회로 인도하여 거기서 나를 신부 되게 한 것이다. 즉 성령이 어머니와 같이 역사한 것이다. ‘나를 잉태한 어머니의 방’은 어디인가? 그 방은 ‘내 어머니의 집’에 들어가야 있다. 또 성령께서 우리를 어머니의 집인 신부 교회, 즉 계2장, 3장의 일곱 금촛대교회로 인도 하신다.
그리고 신부 되게 하는 말씀을 주시고 믿게 하여 순교신앙으로 세워지기까지 잉태하여 세우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우리를 잉태하여 낳은 방이 된다. 나를 순교신앙으로 세워지기까지 성령님이 낳는 역사를 하시는 곳이 ‘어머니의 방’이다. 또 옛 사람 이었던 우리를 성령이 중생케 한 곳이 어머니의 방이다.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도 성령이 잉태케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우리에게 어머니의 집은 어디인가? 종말의 일곱 금촛대교회로 인도받은 것이 어머니의 집이다. 또 우리를 잉태 한 방은 어디인가? 일곱 금촛대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계속 신앙이 자라면서 순교신앙으로 세워진 것을 말한다. 신앙이 온전히 회복되어 진 신부성도가 신랑 예수를 꼭 붙들고 자기를 잉태한 어머니의 방으로 왔다. 이는 순교신앙으로 세운 그곳으로 돌아와서 영원히 그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이는 또다시 신랑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게 된 것을 말한다.
3:5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 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여기 예루살렘의 딸들은 아가서의 주인공인 신부 성도와 구별된다. 그들은 아1:5에서 살펴보았듯이 육적 신앙에 속한 성도들이다. 또 ‘내가’는 신부 성도를 가리킨다. 그가 원하기까지는, 즉 신랑 예수님이 원하기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했다. 이는 4절에 신부 성도가 잃어버렸던 신랑 예수님을 찾아서 그분과 잉태한 방에 함께 있는 상태이다. 다시는 밤에 침상에서 잃어버릴 염려가 없게 하리라. 이는 그분의 사랑을 신부 성도의 심령의 아구까지 채우는 일을 예수님이 하심을 뜻한다. 그래서 그분과 신부 성도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지면 얼마든지 자기 남편, 즉 신랑 예수를 나가서 거침없이 자랑하며 증거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육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예루살렘의 딸들은 자기 남편을 증거 하지도, 자랑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한 영적 신앙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즉 신랑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깨우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은 이들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마치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한 것과 같이 말이다. 이처럼 육적인 성도들이 영적인 성도들을 방해하고 핍박한다. 그래서 노루나 들 사슴으로 부탁한다고 했다. 이는 신부 성도에게 지금 은혜 베푸시는 신랑 예수님이 마치 노루와 사슴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는 내 남편이신 그분의 사랑에 내가 푹 빠져 들리라. 그리하여 내 속에 그분의 사랑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노라. 그리된다면 내가 나가서 그분을 자랑하며, 증거 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이렇게 해 주시는 주님이 바로 노루와 들 사슴 같다는 것이다. 노루나 들 사슴이 귀가 밝아서 세미한 소리에도 놀라서 급히 달아나지 않느냐? 그러하니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 사랑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진리측 총회장·주사랑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