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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4.02.2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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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동네 가게에서 과자나 음료수를 사서 뚜껑을 뒤집으며 마음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다음 기회에!’ 물론 하나 더당첨이라면 더욱 기쁠 일이다. 하지만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쳤더라도, ‘이라는 글자는 실망감을 주는 반면 다음 기회에라는 문구는 의지마저 불끈 다지게 했다. 다음엔 꼭 뽑아야지! 그러고 보면 다음이라는 말은 참 희망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가 줄어들고 있단다. 오늘 우리 세대가 뭔가 실수하더라도 부족했더라도 다음이 있으면 위로가 되고 만회를 기대하게 될 텐데, 다음이 확실치 않다. 초저출생율을 나날이 갱신하며 국가 소멸로 가고 있다는 통계학적 수치, 한때 북적이던 초등학교 교실이 텅텅 비고 문을 닫는 학교들이 늘어나면서 대학들도 곧 비극적 벚꽃엔딩을 맞이할 거라는 위기감, 교회학교 어린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적어 교회마다 다음 세대가 있을지 걱정이라는 말도 새롭지 않다.

 

다 중요한 현상이다. 그런데 정작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묻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어도, 구호와 운동을 벌여도 해결될 리 없다.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야 하는 것은 이 질문이다. 왜 오늘의 청()년 세대는 다음을 기대하고 기약하지 않을까? 그들이 자녀를 낳지 않는 이유도,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도 결국은 같다. 사회도 교회도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있더라도 기회와 희망으로서의 다음이 아니라 더 악화되는 현재로서의 다음이 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 때문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은 가끔 인생의 을 만나도 다음 기회에~’를 기대하는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우리 세대의 책임이다. 오늘의 세계를 절망적으로 만든 것은 어른 세대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고백한다. 잘 보살피고 양육하여 뭇 생명이 땅에 풍성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람의 소명이라는 말이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대신 다스리는일은 호모 사피엔스의 몫이다. 물론 최근 학계에는 인간의 교만이 사회와 자연을 이렇게나 파괴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 그 권위의 자리를 내려놓으라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누가 누굴 돌본다는 말인가? 모든 생명은 서로 돌보는 것이다. 인간이여 자만하지 말라!” 그러나 창조신앙을 믿는 나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특별한 소명을 간과하기 어렵다. ‘사피엔스라는 말에 담긴 의미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인간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다음 기회가 허락될 세계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북미 토착민의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당신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땐, 언제나 당신의 일곱 번째 세대의 후손을 생각하라!” 손자도 아니고, 증손자, 고손자도 아니고 무려 일곱 번째의 후손이라니! 일곱 번째의 후손에게 살아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오늘 내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다. 바벨탑과 같은 욕망의 시스템을 만드느라 바쁜 사람들이 놓친 인간의 청지기적 소명은, 어쩌면 맑은 영혼으로 신이 만든 세계를 잠잠이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가 보다.

 

그러니 지금 나의 행동이 다음 세대에게 다음을 허락할 수 있는 일이 되도록 행동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첩첩이 쌓인 후기-근대적 문명의 숙제는 크지만, 원칙(principle)은 분명하다. 지금 넘어졌어도 실패했어도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 있는 시스템, 환경, 인적 자원. 이런 것들을 만들어 간다면 다음 세대는 용기를 낼 테니까. 교회가 먼저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리된다면 교회 안에 다음 세대가 북적이는 것은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강남대 기독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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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다음 세대’에게 ‘다음’이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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