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하면 좋아질 수 있나요?”
20대 중반의 한 자매가 센터에 와 울며 한 질문이다. 반팔 티셔츠가 무거워 보일 만큼 그녀의 팔은 얇았고, 얼굴은 창백했다. 3년 전 자살 시도를 했고 2년 전부터 강박과 우울로 약을 복용 중이라고 했다. 교회에 상담센터가 생겼으니 제발 한번 가보자는 엄마의 권유에 할 수 없이 방문한 상황이었다.
얼른 물 한 잔을 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자매는 컵에 손을 대기도 전에 울었다. 낯선 이를 마주하는 지금이 몹시도 긴장됐나 보다. 우는 자매 앞에 앉아 그저 한참을 머물며 바라보았더니 그녀는 내가 아닌 컵에 눈을 맞추며 물었다.
“제가 건강해질 수 있을까요?”
마음이 저렸다. 꽃같이 예쁜 아이가 왜 저리도 슬픈 눈으로 살 수 있는지 물을까? “너에게 약을 줄 수는 없지만, 같이 아파해 줄 수는 있을 것 같아. 뭐가 힘든지 내게 말해줄 수 있어?”
그렇게 시작한 상담을 40회기 정도 진행했고 정기적인 만남도 이어가고 있다. 상담을 통해 20여개가 넘는 강박증상이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그리도 좋아했던 책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미술 공부를 하고 있다. 교회에 출석하며 예배드리는 자매를 볼 때면 ‘아, 살았다. 너도 가정도 교회도…. 우리 모두가 살았다’ 혼잣말을 하며 미소 짓게 된다.
모든 생명은 생존을 위해 싸운다. 환경을 변화시키든 나를 성장시키든 인류는 환경에 맞추어 생존해 왔다. 하지만 지금 한국사회는 변화와 성장이 아닌 죽음을 선택하는 자들로 가득차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자살율은 OECD 국가 중 낮은 편에 속했다. 그러나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약 10년 동안 자살율이 100%이상 증가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며, 현재는 ‘OECD 평균의 두 배가 넘는 자살 공화국’이 되어버렸다.
며칠 전 보건복지부에서는 유의미한 통계 하나를 내놓았다. 지난 3년간(2020-2022) 팬데믹 질병 사망자 수(32,156명)보다 동일한 기간 자살 사망자 수(39,435명)가 더 많다는 보고이다.
이제 한국의 재난은 지진, 홍수, 질병이 아니라 ‘자살’이다. 10대부터 3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며 원인은 ‘정신과적 질환’이라고 한다. 이에 전문가들은 동네 병원에서도 항우울제를 처방하고 국가 지원으로 상담을 보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이런 사회가 되었을까?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내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안 하나는 내놓을 수 있다. 바로 ‘돌봄 목회’의 회복이다.
한 사람이 자살에 이르기까지 많게는 40번의 시도가 있다고 한다. 이 시도 중에 그 사람을 돌보는 따뜻한 손길을 한번이라도 만난다면, 희망을 선물하는 교회를 만난다면, 환경을 극복하는 생존자가 되지 않을까?
과거 한국교회가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사회복지사업으로 민중의 고통에 동참했다면, 이제는 우울, 불안, 죽음의 자리에 내몰린 이들을 돌봄으로 사회의 아픔에 동참해야 한다.
함께 웃고 함께 울 자가 필요하다. 우울증 약을 처방할 수는 없지만 상담과 돌봄은 교회가 제공할 수 있다. 자살이라는 재난 속에서 생명 살림을 실천하기 위해 이제 교회가 돌봄으로 응답해야 할 때다. /목사·과천교회 시냇가 상담센터 총괄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