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사랑도 또 하나의 예배입니다!
아신대학교 정홍열총장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웃 사랑이란 대개 예배 다음에 추가적으로 실천하게 되는 선한 행동으로 인식된다.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 이웃 사랑이든지 아니면 선교나 전도를 하기 위해 사전 작업으로 실천하는 행동이 이웃 사랑인 경우도 있다. 이 말은 이웃 사랑이 고유한 자기영역을 확보하기보다 언제나 구원이나 전도와 관련해서 부수적으로 등장한다는 느낌을 준다는 말이다.
이웃 사랑이 구원과 관련되어 등장할 때는 이웃 사랑은 구원의 조건이 되면 안된다는 이신칭의론의 교리 하에서 제한되어 등장하고, 전도와 관련될 때는 전도의 도구로 스스로 이웃 사랑을 제한시키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런 제한들이 어쩌면 개신교 안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조건을 달거나 스스로 제한시키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성경의 많은 본문들 가운데 특별히 막12:28-34절의 본문은 우리에게 이웃 사랑과 관련해서 고려할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서기관의 대화는 소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주제이다. 서기관은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이에 예수님은 첫째를 하나님 사랑으로 말씀하시고 답변을 끊지 않으시면서 이어서 둘째는 이웃 사랑으로 답변하셨다.
서기관이 질문한 것은 첫째인데 예수님의 답변은 둘째까지 다시 말하면 두 개의 계명으로 답변하셨다. 성도님들 가운데 이 본문을 읽으시면서 혹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 덤으로 주어지는 사은품 정도로 폄하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하나님 사랑에 온갖 정성을 다하다 보니 이웃 사랑은 조금 쉬어도 되거나 포기해도 무방한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실 이는 질문에 답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첫째와 둘째로 답변하신 것이지 예수님의 의도는 첫째에 해당되는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동시에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마치 조직신학 기독론에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이시다는 답변과 같은 논리로 설명된다고 볼 수 있다.
참 하나님이 51%이고 참 사람이 49%가 아니라 참 하나님이 100% 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 또한 100% 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기독론 이해인 것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로 동시에 각각 100%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똑같이 소중한 계명임을 밝혀 주셨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다른 점도 있다. 우선 사랑의 대상이 다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둘을 혼동하면 사람 사랑이 곧 우상숭배로 변질될 위험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을 우리가 예배라고 말한다면 이웃 사랑은 사랑의 실천, 곧 선행으로 말한다. 예배와 사랑의 실천은 분명히 구분되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둘을 구분은 하지만 동시에 함께 강조하는 경우를 보여 준다. 마치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첫째로 중요한 계명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담아서 소개해 주듯이, 우리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들도 마치 주님께 하듯 하라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골3,23)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힘쓰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말씀한다(히13,15-16절).
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인용해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는 선행과 그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행위를 찬송의 제사와 더불어 또 하나의 제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이웃 사랑도 또 하나의 예배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별하는 것과 차별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별될 일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아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예배드렸다고 해서 이웃 사랑을 외면해도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자위할 수 없다. 반대로 이웃을 열심히 사랑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까지도 다 드렸다고 합리화할 수도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은 분명 다른 것이고 구별될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도 없고 흡수할 수도 없다. 구별은 되어야 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되고 심지어 차별화되어서 그 둘 중 하나를 우선시하고 다른 하나를 뒤로 미루는 일은 막12,28-34절은 물론이고 성경의 전체 가르침을 왜곡하는 잘못된 행동인 것이다.
성도가 천국가는 날까지 쉬지 않고 실천해야 할 일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마치 우리의 호흡이 이어지는 동안 음식도 섭취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같은 무게로 성도가 이어나가야 할 예배하는 삶의 두 가지 상호보완적 모습인 것이다.
사랑의 실천은 예배와 같은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예배드리는 삶의 온전한 모습이다. 하나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은 단지 훌륭한 도덕이나 윤리일 뿐이지 예배는 아닌 것처럼, 이웃 사랑이 없는 하나님 사랑은 참된 예배가 아니라 거짓으로 위장된 예배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를 완성시켜 주는 상보적 관계 속에 있다.
끝으로 칼 바르트의 탁월한 가르침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기도와 실천을 하나로 엮어내는 멋진 표현이다. “기도는 두 손을 모아 일하는 것이고, 일하는 것은 두 손을 펴서 기도하는 것이다!”/아신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