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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3.01.1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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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용의 장편소설 <성자여 어디 계십니까?>는 다소 허망하게 그 말미(末尾)가 장식되고 만다. 주인공 박요단의 그때까지의 모든 노력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려 버린 것이다. 그녀를 구원해 내기 위해 그의 모든 것을 바쳐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아내 권미림은 끝내 그를 배신해 버렸고, 그의 교역 사업의 상징적 성과라고 할 개척 천막교회는 불타 없어져 버리고 말았으니 그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참으로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필자는 유재용의 이 소설이, 아니 이 소설의 허망한 결말이 가장 기독교적으로 장식되어 있다, 라는 판단에서 결코 물러서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필자는 불가피하게 기독교 세계에서의 다른 사례들을 몇 가지 동원해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이론적인 설명보다는 역시 몇 가지 유사한 사례들의 제시가 오히려 더 큰 설득력이 있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먼저는 같은 문학 작품 가운데서 그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겠다. 영국 작가 A. J. 크로닌의 장편소설 <천국의 열쇠>(1941)를 통해서이다. 주인공 치셤 신부는 옛 친구요 신학교 동창인 안셀모 밀리 신부가 출세가도를 달리는 것과는 달리, 애써 고난의 길을 걸어간 신부였다. 나중엔 유럽을 벗어나 중국으로까지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도 그는 여러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무너져 있던 성당 건물을 천신만고 끝에 다시 지어놓았으나, 그게 홍수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찾아 기른 고아소녀 안나가 그를 배신하고 비적 와이츄 병사를 따라가 버린 일등이 그를 무척 괴롭게 하였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주님의 은총과는 무관한 가련한 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표면적 실패를 딛고 일어선 영원한 내적 승리자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난 패배의 잔영은 그의 참 교역자 상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여러 순교자들의 삶을 통해서이다. 그들은 모두 생의 말년에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귀한 생명을 주님을 위해 불가피하게 버린다. 실제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남겨놓은 그 순교의 신앙으로서의 흔적이 전혀 아무것도 아닐까? 아니다. 그들은 일견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그 희생(죽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은 최후 승리자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사도행전 6~7) 속의 인물 스데반의 경우를 보기로 하겠다. 히브리파 신도들 앞에서 용기 있게 주님을 증거한 헬라파 신도 스데반은 그 굳센 믿음과 용기 있는 증언 때문에 히브리파 신도들에게 성 바깥으로 끌려 나가 투석형에 처해졌다. 그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7:59~60)라고 부르짖으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의 이 죽음이 무의미했던가? 아니다. 스데반의 이 죽음이 앞으로 이어질 그리스도인들의 허다한 순교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음을 교회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박요단은 자신의 사랑을 암흑가의 한 여인에게 베풀고, 주위의 악의 세력과 싸워 그 나름의 사회정의를 구현해보려고 애썼지만, 그의 의지는 현실 앞에서 끝내 좌절되고야 말았다. 그는 단지 한 패배자의 위치에 머물고 마는 것일까. 아니다. ‘참 교역자 상을 보이는 그는 표면적 패배를 딛고 일어선 내적 승리자임을 위 사례들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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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 그 첨예한 대립상(5)-유재용의 「성자여 어디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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