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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8.01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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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을화 편에서 섣불리 상대(영술과 기독교)를 쓰러뜨리기 위해 극단적 반응을 일으킨 것이 결국은 함께 파국으로 치닫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을 뿐이란 말이다. 때문에, 월희가 방돌네 집으로 가게 된 일 자체는, 위험으로부터의 피신이란 의미에서는 구원(화해와 융합)의 길이 될는지 모르지만, 만일 그것이 영술 식의 길과는 다른 방향의 길이기 때문에 구원의 길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시켜 해석한 것이라면 옳은 해석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 만의 일이라도 그 길이 을화의 길과는 다른 길이어서 구원의 길이 될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면, 이는 전혀 별개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런 주인공들은 물론이지만, 부주인공이랄 수 있는 등장인물들의 경우에서도 위와 같은 면은 똑같이 간취되는 편이다. 영술이의 측근으로 등장하는 박장로와, 또 을화의 세계에 가까운 태주할미의 경우에서 그것은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박장로는 원래 양반 가문의 후예로서 유교에 밝은 사람이었는데, 태주할미의 무서운 범죄 사실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아 미신타파 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이었다.

 

그런 박 장로가 영술의 정신적 아버지라면, 태주할미는 을화의 부정적인 짝에 해당할 인물이다. 영술이가 곁길로 나가려고 할 때 그를 바로잡아 주고 정도를 걷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이가 박장로이다. 영술이는 박장로의 도움으로 자신의 결핍을 기워가며 살아간다. 반면 을화의 부정적인 짝이랄 수 있는 태주할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무죄한 어린애를 죽여 가면서까지 그 뜻을 실현코자 애쓰는 비정한 여인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을화의 잔혹한 면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들로 인하여 을화의 정신적 스승이라 할 빡지무당의 빛깔마저 크게 퇴색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을화>에서는 평론가 천이두의 지적처럼 한국인의 고유한 신앙적 근거가 되어온 샤머니즘과 서구에서 들어온 예수교 사이의 갈등 관계가 작품의 핵심적 주제로 제기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갈등의 종교사회학이 이 작품 안에서 문학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이태동 평론가의 표현처럼 기독교가 한국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토착적인 민간신앙과의 갈등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하겠는데, 결국은 이 양자(기독교와 샤머니즘) 중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 우리의 관심의 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작가 자신이 주장하듯 샤머니즘의 승리를 암시한 작품이 바로 이 <을화>라고 힘주어 말한다고 해도 그런 주장이 우리에게 시원스레 와 닿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느 편이냐 하면, 작가 자신이 <을화>를 통해 샤머니즘 세계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내리려고 시도했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도리어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내린 셈이 돼버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받는 교훈은, 흔히 시()를 논의할 때 하는 말처럼, 작품은 생산자(시인/작가)의 것이로되 일단 산출된 작품은 사회의 공유물이 된다는 것이다. 작가 자신은 어떤 의도로 썼지만, 그 나타난 결과는 의도와는 달리 읽힐 수도 있는 법이다. 그것은 시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비록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이 <을화>를 통해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을화>가 기독교의 승리를 그린 작품이라곤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똑같이, 이 작품이 샤머니즘의 승리, 곧 그것의 구원의 긍정 가치를 그려준 작품이라고 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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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샤머니즘, 그 대립과 갈등(5)-김동리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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