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샤머니즘, 그 대립과 갈등(2) -김동리 장편소설
임영천의 한국 기독교소설 산책
평양에서 기독교도가 되어 귀향한 영술이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한 기독교 전도의 길이 뜻대로 열리지 않자 그는 기도처로 마을교회를 찾게 되고, 거기서 그 교회 설립자인 박건식 장로를 만나게 된다. 박 장로는 무당인 태주할미가 저지른 충격적인 일, 곧 명도 점(占)에 영검을 얻기 위하여 어린애를 유괴 살해해 암매장한 범죄사실을 전해 듣고서 미신타파의 방편으로 기독교에 입교한 그 지역 유지였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술이 그를 자신의 정신적 사부(師父)로 삼게 된 것이다.
오구굿판에서 정 부잣집 아들의 눈에 띄게 된 월희는 그의 후실 자리 말이 나오게 되고, 또 교회에서는 영술이가 그의 생부인 이성출을 찾아내게 된다. 그러나 월희의 후실 자리에 대해서는 오라비 영술이가 극구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또 아들이 생부의 집에 가거나 머무는 일에 대해선 어미 을화가 극력 반대의사를 표명함으로써 모자(母子)간은 갈수록 심한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어머니와의 대립 끝에 영술이 나흘간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는 동안, 을화는 아들의 귀가를 고대하며 식음을 전폐한 채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적 처사를 반성하며 영술이 귀가한 다음날 새벽, 을화는 아들의 성경책을 몰래 빼내어 부엌에서 불에 태우며 굿을 벌이고 있었고, 이 현장을 목격한 영술이 성경책에 붙은 불을 끄려고 소반 위의 물그릇을 집어든 순간 을화의 식칼이 영술이의 왼쪽 가슴을 찔러버린 것이다. 칼에 맞은 영술은 이튿날 끝내 숨을 거두고, 동생 월희는 생부 성방돌을 따라 집을 떠나게 된다. 그날 밤에도 무녀 을화의 집 처마 끝에 달린 종이등[紙燈]에는 전날과 같은 희뿌연 불이 켜져 있었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乙火’]의 개략적인 줄거리이다.)
작가 김동리가 그의 새 작품 <을화>에 대하여 설명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의 신은 철두철미하게 인격화된 초자연적인 신이며, 근대 인간주의는 신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안티테제로서 반신적(反神的) 성격을 띤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새로운 성격의 신은 좀 더 자연적인 신이라야 하며, 새로운 형의 인간은 좀 더 신을 내포한 인간, 즉 여신적(與神的) 인간형이라야 한다고 보고, 이에 대한 해답으로서 샤머니즘의 신이 철저한 자연적인 신이며 샤머니즘의 인간은 소위 ‘신들린 인간’이라고 할 만큼 여신적인 인간형이므로 바로 이러한 샤머니즘의 세계를 문학 창작에다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로 보아 <을화>가 기독교보다는 샤머니즘에 더 우위를 두고 제작한 작품이란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샤머니즘의 구원의 긍정가치를 드러내고자 시도한 이 작품이 그 의도대로 되려면 부득불 상충요인으로서의 외래 종교인 기독교와의 긴장과 갈등을 통해서 그것을 드러낼 수밖에는 없었겠는데, 과연 작가의 의도대로 작품의 결과가 수행되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봄직하다. 미리 말하기로 하면, 이 작품은 흥미 있는 무당들의 생활풍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데는 확실히 성공하고 있는 편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무당의 삶에 접한 독자들이 그 무당 정신에 심취한다거나 샤머니즘의 가치를 재인식한다거나 하는 지경에까지 끌어올리는 데에는 결코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다주었다곤 할 수 없겠다는 것이다. 전작 <무녀도>와는 달리 <을화>에서는 기독교도 영술이 죽음에 이르게 된 반면, 무녀 을화가 생존하게 됨으로써 그 인물설정 자체에서 이미 샤머니즘의 승리를 예정(의도)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작가의 그 의도가 작품상으로 실현되었다곤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그 ‘의도의 오류’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조선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